목 차
베드로와 요한의 사명적 한계
천국복음과 영원한 복음
승천 주님의 부탁과 재림주님의 부탁
재림의 징조와 확실한 예언
부활성도와 변화성도의 사명
베드로와 요한의 사명적 한계
- 요21 :15 ~ 21 -
기독교는 사명의 한계선을 바로 지키는 것이 없다면은 주님은 역사할
수가 없다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아무리 사명자가 부족하다 하여도 필연코
사명을 감당하도록 역사해 주는 것이 사명을 맡기신 주님의 의무라고 보게 된다.
이제 베드로의 사명과 요한 사도의 사명의 한계선을 분명히 주님은
가르쳐 주셨다.
1. 베드로의 사명적 한계 (15∼19)
아무리 베드로가 주님의 부활을 철저히 믿지 못하고 주님을 따라가다가
실수한 일이 있다 하여도 주님은 친히 베드로를 찾아오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명을
맡긴 목적을 분명히 알려서 베드로를 들어 쓰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를 두 번째 찾아갔다.
첫 번에도 목수의 한사람으로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를 부를 때에
나를 따라오면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할 때에 베드로는 용기있게 따라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완전한 사도의 직을 할 수 없는 인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에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를 찾아갔지마는 밤이 맞도록 고기 한 마리도 못
잡은 어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때에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두 번째 찾아갔다. 베드로를 보고
나를 따르라는 말을 하지 않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할 때에 베드로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는 주께서 아시나이다 한 마디를 할 때에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거듭하시면서 베드로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을 말했다.
이것이 사명자를 쓰는 주님의 뜻이라고 보게 된다.
부활을 증거하는 사명을 맡은 자가 아무리 부족해도 부활만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성신의 권능을 주어서 사명을 감당하도록 해주시고 단 마음으로
순교까지 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날까지의 모든 종들은 이 사명적인
한계 안에서 움직이는 종들이라고 보게 된다. 완전한 사람에게 성신을 주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부활을 증거할 신앙이 있다면 무조건 은사를 주어서 들어 쓰되 순교라는
끝을 맺도록 해주는 것이 은혜 시대에 사명자의 한계라고 본다.
2. 사도 요한의 사명적인 한계 (20∼23)
요한은 베드로보다도 실수가 없고 대신 아들이라는 명분을 맡겼지마는
요한에게는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이 없고 베드로가 사명을 물어볼 때에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머물러야 한다"고 말씀할 때에 모든 사람은 무슨
뜻인 줄을 모르고 죽지 않겠다는 말을 할 때에 육이 죽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고 그
사명을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머물러 둔다고 하는 뜻을 말하면서 너희는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최고의 영계에 도달하는 사람으로 완전 계시를
받아서 그 글을 통하여 기독교 종말의 역사가 있으므로 재림의 주를 영접할 변화성도의
역사가 따로 있을 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의 사명적 영감과
사도 요한의 사명적 영감이 시대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움직이는 종이 되어야만
될 것이다. 부활을 증거할 목적과 계시록을 증거하는 목적이 시대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베드로의 사명적인 영감을 받아 그것으로서 끝을
맺는 역사인 줄 알고 계시록을 자기가 받은 영감에 한계를 탈선하여 억지로 해석한다는
것은 큰 과오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죄인을 부르는 주님의 심정과 재앙을 나리는
진노의 날에 하나님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종이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설 수 있는 사명이 무엇인 것을 모르고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생각은 너무나 얕은
영감에서 과오를 범하는 말이라고 보게 된다.
이제 사도 요한의 사명적인 한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완전 영감이 있어야 된다. 왜냐하면 영감이라는 것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한 한계의 영감이 있고 성경 전체의 숨은 비밀을 전하는 영감도 있으니 베드로도
이 영감을 자기는 받지 못했으니 이 예언의 말씀은 새벽 별이 마음에 떠오르는 역사가
있을 때까지는 해석하지를 말라고 벧후1:19∼21까지 말했던 것이다. 바울도 나는
십자가 외에는 더 말할 수 없는 영감이라고 말할 때에 그리스도 한 분을 아는 지식이
자기의 사명이라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빌3:8∼9).
우리는 사람이 자기가 진리를 연구한다는 것은 오히려 교만을 가져오는
폐단이 있게 될 것이다. 이날까지의 많은 종들이 여기에서 큰 과오를 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계시를 받을 적에 자기가 작은 책을 꿀같이 먹고 배에는 쓴데 다시
예언하라는 계시를 보았던 것이다(계10:11).
이것은 앞으로 세계적인 대환란이 올 시기가 이 땅 3분의 1이 피해를
당하고 계시록 9장과 같이 흑암이 세계를 덮고 인명 3분의 1이 죽어버리는 전쟁이
계9:15과 같이 일어날 때에 주님 오실 때이니 그때에 가서 완전 영감의 역사가 올
것을 그는 계시로 보고 쓴 것이 계시록 11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동의 위기를 앞에 논 금일에 와서 소위 세계 평화라는
간판 밑에서 영계 흑암이 교회를 침투하는 이때에 사도 요한이 본 계시록 11장과
같은 영감을 받고 나서는 일이 없이는 기독교의 통일을 가져 올 수도 없고 남은 교회가
될 촛대교회를 이룰 수가 없고 승천하기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선지 사명을 할 수
없을 것이니 금일에 우리 사명자들은 사도 요한의 계시에 완전 영감을 받아야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교파를 초월하여 완전 계시의 영감으로 하나같이 예언의 말씀을
증거하는 푸른 나무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단체가 나와야만 될 것이다.
결 론
사명과 시대 또는 시대와 사명에 대하여서 우리는 바로 알고 이 시대에
선지적인 영감을 받는 일과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어진다는 복음 운동에 승리를 이루어야만 될 것이다.
천국복음 천국복음과 영원한 복음에 대하여
-
마 24 : 16, 계 14 : 6 -
주님께서 감람산에 앉았을 때 제자들이 조용히 물어보기를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 물어볼 때 대답하시기를 난리를 무서워하지 말고
미혹에 들지 않도록 주의할 일을 말씀하면서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할 것이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하시면서 끝까지
견디는 자라야 구원을 받는데는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하시었고, 계14:6이하에는 영원한 복음을
가졌는데 바벨론을 심판할 시간이 이르렀다고 하는 것을 사도 요한은 계시로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 복음에 있어서는 첫째로 시대를 구분해야 됩니다.
천국 복음이
전파된 후에야 세상 끝이 온다고 하였고 영원한 복음을 전할 때는 바벨론을 심판할
때라고 한 것을 보면 천국 복음은 은혜시대에 전할 복음이요, 영원한 복음은 심판기에
전할 복음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은혜시대의 복음은 죄인을 불러서 중생을 받게
하는 복음이요, 영원한 복음은 바벨론 세상이 한 시간에 불탈 때에 영과 육이 아울러
구원을 받되 이 땅위에 남은 백성으로 새로운 시대에 들어가게 하는 복음이라고 봅니다.
여기에 대하여 세밀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천국 복음은 영원한 영생의 나라로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게 한 것인데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을 증거하므로 사망 아래 다스림을 받던 죽은 영들이
중생을 받는 동시에 몸은 죽으나 영혼은 구원을 받는 것을 목적한 것이니 여기에는
십자가로만이 구원을 받는 속죄 구령의 역사입니다.
주님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속죄제를 드리는 때이므로
죽은 영들이 중생 받는 일은 없으므로 복음을 전하는 때가 아니고 조상적부터 택한
이스라엘 민족이 유일신 하나님을 율법에 의하여 속죄제로 공경하는 때요, 천국 복음을
전할 때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인데 아무런 죄인이라도
회개하는 즉시에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죽었다가 천년
왕국이 지난 다음에 심판의 부활에서 생명의 부활을 받아 천국의 영원한 도성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영원한 복음은 천년 왕국의 백성으로 들어갈 자들에게 전하는 복음입니다.
누구든지 짐승의 표를 받고 그 앞에 절하는 자는 다 죽게 되는 재앙이 내릴 때에
예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므로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보호를 받아 지상 왕국에
들어가는 백성들을 위하여 전하는 복음입니다.
세세 왕권을 받을 자는 두 가지로 봅니다.
천국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순교한
자는 주 재림시에 왕권으로 부활을 하고, 영원한 복음을 환란 가운데 전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싸우던 자는 재림시에 변화 성도로 왕권을 받아 승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권은 복음을 전하던 자에게 있되 순교를 하기까지 전한 자에게 있고 시민권은
천국 복음을 받아 영혼이 구원받은 자가 천국의 시민권이며 영원한 복음에는 예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자는 천년 왕국의 종족이 됩니다.
다시 세밀히 말하자면 천국 복음은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사도들에게 전한
복음이요, 영원한 복음은 하나님께서 구약 선지에게 심판과 새 시대를 가르친 복음인데
이것은 바벨론이 망하고 예루살렘이 복구된 사실을 들어 인간 종말의 심판과 새 시대를
가르친 것입니다[계10:7].
성경은 목적이 살아서 새 시대에 들어갈 백성들에게 전할 복음을 세밀히
가르친 것은 선지서요, 계시록인 것입니다.
천국 복음이라는 것은 한날 한시에 구원받는
복음이 아니고 심판기가 올 때까지 온 세상 인류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 영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을 목적했으므로 많은 글이 쓰여져 있지 않고 진노의 날에 온
세상 인류가 불에 사름을 당하고 남은 백성이 될 자는 지상 축복을 받는 동시에 영원한
천국에까지 들어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복음은 직접으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복음이요 영원한 복음은 지상 왕국의 축복을 받는 동시에 자동적으로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승천하는 주님의 부탁과 재림주의 부탁
-
행 1 : 6 ∼ 11, 계 22 : 6 ∼ 7 -
서 론
주님은 가실 때나 오실 때나 사람을 통하여 역사할 것을 부탁하였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당신의 하실 일을 인간이 해야 된다는 부탁을 말한 것이다.
천국의
복음 운동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하실 일과 사람의 할 일이 결합되기 전에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1. 승천시의 부탁 (행1:6∼11)
주님께서 승천하는 목적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적인 역사를
하기 위하여 승천한 것이니 중보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로 향하여 할 일과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할 일을 다 이루기 위한 중보적인 역사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신의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이 역사라는 것은 중보적인 예수님의 역할로 되는
역사이니 인간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는 동시에 성령을
부어 주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중보적인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니고는 속죄의
은총을 받을 회개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성신의 역사도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이 내려오게 되는 것이다.
좀더 말하자면 올라가는
기도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려오는 성신의 은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되는 것이니
속죄를 받는 자도 인간이요 성령을 받는 자도 인간이요 이것을 만민에게 증거할 것도
인간이 해야할 일이니 이것을 위하여 쉬지 않고 하늘 보좌 우편에서 역사하는 이는
승천하신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이다. 이 역사는 국경이나 민족을 초월한 역사이기
때문에 땅 끝까지라는 말씀을 하시고 승천하신 것이다.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기간은
20세기를 지나는 기독교 역사를 이룬 것이다.
2. 재림하는 주님의 부탁 (계22:6∼7)
재림이라는 것은 올라가신 주님의 부탁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야 되는
것이니 다시 올 때는 예언의 말씀을 지켜야만 복이 있다는 부탁을 사도 요한에게
주님은 나타나 부탁했던 것이다.
만일 어떠한 종들이 가시는 주님의 부탁만 존중히
하고 오시는 주님의 부탁을 등한히 한다면 주 재림시에 남은 종이 될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왜냐하면 오시는 주님의 부탁을 무시한 자가 주님을 맞이할 종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오시는 주님을 대적하는 종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승천하는 시대와 재림하는
시대가 다른 시대이기 때문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승천하는 시대는 죄인을 불러들이는
은혜 시기라면 다시 오시는 때는 죄인을 심판하는 심판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기에는 영과 육이 아울러서 받는 구속이니 예언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환난과
재앙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재앙이 나리는 것도 예언대로 될 것이요,
재앙을 피하는 것도 예언대로 될 것이니 예언이라는 것은 재앙 중에 재앙을 받지
않게 하겠다는 예언이니 이 예언을 지키지 않는 자를 주님께서 책임을 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때는 노아 때와 롯의 때와도 같다는 것이다.
결 론
종이라는 것은 주인의 부탁을 받은 데로 순종할 것 뿐이요 그밖에는
주인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니 가실 때 부탁은 사도가 받았으니 사도적인 사명은 그
부탁을 그대로 순종하는 역사이다.
다시 올 때는 예언을 지키라는 사명이니 바로
듣고 지키도록 전해야될 사명에 순종하는 것이 마지막 권세 받은 증인의 역사이다(계11:3).
; - 벧후 1 : 12
~ 21 -
서 론
우리는 주 재림을 믿는 신앙에 대하여도 확실한 징조도 있고 확실한 예언도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우리에게 완전한 신앙을 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징조만 있고
확실한 예언이 없어도 불완전이요 예언만 있고 징조가 없어도 완전한 것은 아니다.
징조가 확실하고 예언도 확실하니 이것은 합법적인 진리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제
징조와 확실한 예언을 성경으로 다음과 같이 찾아본다.
1. 재림에 대한 징조를 봄 (16-18)
이 날까지 기독교에서 재림에 대한 확실한 징조는 보여진 것으로 알고 있으나
확실한 예언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 자체도 징조는 내가 보았으나 확실한
예언은 분명히 모른다고 말했다.
베드로가 재림의 징조를 보았다는 것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변화산에 올라가서 직접 눈으로 그 영광도 보았고 주님의 자체를
보았고 똑똑히 음성도 들은 것이다. 이것을 보아서 확실히 주님은 강림한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또는 주님이 승천할 때 천사가 말했다(행1:11).
그러나 다시 온다는
징조는 친히 눈으로 보았으나 다시 올 때 예언은 계시록을 통해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은 어찌하여 재림의 징조는 있게 했으나 이 때까지 예언의 확실한 것은 알려주지
않는 이유도 있는 것이다. 이미 죽은 성도에게는 주님 다시 온다는 것만 알아도 만족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다.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이 신앙은 주님이 분명히 오신다는 것만 믿으면 된다. 왜냐하면 확실한
예언이란 주 재림을 살아서 환난 가운데 남은 종으로서 맞이할 자에게 해당되기 때문이다.
만일 죽어서 부활할 성도에게 예언을 지키라고 하면 이것은 이단설이 될 것이다.
이것은 때가 되기 전에는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날까지 예언을 들고 활동하던
사람이 실패한 것은 그리스도만을 바로 믿기만 하면 될 시기에 월권적인 행동을 했던
것이다.
2. 확실한 예언 (19)
사도들은 확실한 예언이 있다는 것을 말했으나 해석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언이란
인간의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풀 수가 없다는 것이다(20).
예언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할 때 하나님이 바로 해석하도록 해 준다는 것을 베드로가 그 때 사사로이 예언을
풀었던들 그는 사도의 자격을 잃게 되었을 것이다. 사도의 직분은 그리스도 한 분을
바로 증거해서 믿게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확실한 예언을 증거하는
총 대지는 계시록 10장 7절일 것이다.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시기는
일곱째 나팔을 불때니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한 말씀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비밀이 옛날 선지의 전한 복음과
같이 성령으로 잉태되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고 성신이 강림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사명이다. 그러나 심판기의 사명자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것이
선지의 예언대로 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심판기의 종들이 전할 사명이다.
그러면
심판기에 남은 종들은 모든 환난과 재앙과 또는 남은 종과 남은 백성이 선지의 예언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의 다림줄을 바로 쥐고 나가서 다시 예언하는 역사이다.
다시 말하면 미분명한 해석을 분명히 해석해 준다는 뜻이다.
만일 환난과 재앙이
올 때 확실한 예언을 증거 못한다면 기독교는 흑암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예언은 등불이라
할 것이다.
등불은 어두움이 오는 밤에 필요한 뜻을 가르친 것이다.
이미 태양빛
같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로 믿게 하는 시대가 빛의 시대라면 신랑이 온다는
말과 같이 주님 올 때는 빛의 시대가 아니고 흑암 시대다. 흑암 시대가 올 때까지
예언의 등불을 들지 못한다면 주님을 맞이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기독교가 확실한
예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촛대교회를 일으킬 수 없다.
촛대란 밤에 쓰는 등불이다.
우리는 사명적인 겸손이 있어야 한다. 베드로와 같은 심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확실한 예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믿으면 된다 하여 예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것도 교만이요, 자기 사명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예언을 해석
한데도 교만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니 하나님께서 확실한 예언을 나가
하도록 해줄 때 순종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나가 증거할 것뿐이다(계12:11).
결 론
하나님의 역사란 징조가 먼저 똑똑하고 예언은 글자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약때 양으로 제사 드린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징조를 보여준 것뿐이다.
십자가의 속죄를 완성할 때 폐지된 것이다. 그와 같이 재림의 징조만을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확실한 예언이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주님 다시 온다는
징조도 다 있는데 믿으면 되지 무슨 예언이 필요 있느냐 할 때 이것은 시대를 모르는
어리석은 종이 될 것이다.
부활 성도의 사명과 변화 성도의 사명이 다르다는 것을 아십니까?
-
계 20 :4 ~ 6 -
부활 성도라는 것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순교하기까지 싸운 자를 가르친
것이다.
1차 부활이란 것은 왕권을 받을 자만이 해당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시므로 임금의 머리가 되셨고[계1:5], 부활 성도는 죽기까지 십자가를
증거했으므로 왕권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말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그가 편지를 쓸 때에 십자가의 도라는 제목 하에서 성신의 감화를 받아 14권의
편지를 쓴 것이 신약 시대에 정통 신학 변론의 요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날까지의 신학이라는 것은 바울 서신에 의하여 세밀한 변론을
말한 것이 신학자의 학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학설을 말한다해도 순교적인
생활이 없다면 1차 부활에 참여할 수 없다. 아무리 학설이 부족하고 기독교의 종말관을
모른다해도 십자가 하나를 증거 하다가 순교한 자는 아무리 집사의 한 사람이라도
스데반은 왕권의 반열에 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언제나 사랑하는 종은
그때 그때에 원수를 들어서 순교하도록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이제부터 변화 성도는 주 재림시까지 살아서 붉은 짐승과 거짓 선지와 싸움을
하면서 예언을 증거하는 사명이니 그 예언이라는 것은 은혜 시대의 예언을 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비밀이 옛날 선지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어진다는 예언이다.
모든 선지는 심판과 새 시대를 목적 두고 묵시를 봤던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 성도가 선지서를 증거할 때에 은혜 시대에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사명에서 선지서를 해석한 것 뿐이요, 변화 성도는 무서운 환란을 앞에 놓고
환란 가운데서 남은 자로서 새 시대에 들어갈 것을 목적 두고 선지서에 가르친 말씀
그대로 읽어서 증거하는 예언을 하는 것을 변화 성도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서는 환란 중에 남은 종이 증거하는 복음이요, 남은 백성이 순종해야 될 복음이니
지상에서 새로운 시대의 축복을 받게 하는 역사이다.
부활 성도와 변화 성도에 관하여
부활 성도와 변화 성도는 계20:4을 보아서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던 자들이라고
봅니다. 부활도 2차가 있는 것이니 1차 부활은 왕권 받을 자를 일으켜서 왕국 조직을
이루어 지상 통치 천년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요, 2차 심판의 부활은 천국에
들어갈 자나 지옥에 갈 자를 다 부활시켜 행함에 따라 심판을 받고 영원한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진 것인데 이미 구원을 받은 자중에도 1차 부활에 참여한 자는 왕권의
반열에 들 자요 2차 부활에 들 자는 천국의 시민권을 받을 자들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부활 성도는 믿고 구원받은 자가 아니요, 구원받은 자 중에도 남을
살리기 위하여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며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순교를 당했지만 1차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요, 변화 성도는 주님 재림시까지 말씀을 증거하되 기독교 종말에
대하여 예언의 말씀을 증거하는데는 그 증거를 듣고 순종하는 자들이 환란 가운데
보호를 받고 새 시대의 백성으로 바다의 모래같이 번창하게 되는 것이요, 변화 성도는
말씀을 증거하다가 공중에 나타나시는 주님을 영접하여 변화 승천하여 왕국 조직의
반열을 이루어 지상 강림할 때 변화 성도는 계19:19이하와 같이 짐승의 군대를 쳐
없애는 백마 군대가 되어 대승리를 보게 되므로 부활 성도들은 이것을 감사하다고
화답하는 노래를 계19:1-5와 같이 노래하면서 혼인 잔치에 참여하여 부활 성도는
부활 성도의 사명에 따라서 왕권 반열이 있고 변화 성도는 변화 성도의 사명에 따라서
반열이 있게 됩니다.
변화 성도는 지상에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가지고 그 자손이 지상 축복을
받는 새 시대 왕족이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새 시대라는 천년 왕국은 변화 성도의
사명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 모든 백성은 다 변화 성도의 열매가 됩니다.
그러므로 지상 통치권을 받되 부활 성도는 정치의 문관과 같은 반열이 되고
변화 성도는 무관과 같은 반열이 됩니다. 왜냐하면 변화 성도는 사명이 원수를 갚는
심판의 다림줄의 진리를 가지고 싸우던 사람이므로 거기에 따라서 반열이 조직되게
됩니다. 예를 든다면 나라의 대통령의 계통적인 반열이 있고 군부의 총사령관의 계통적인
반열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변화 성도라는 것은 주 재림시에 대표적인 사람의 지도하에서 하나같이
움직이다가 하나같이 들림을 받게 되는 것이니 세밀히 말하자면 부활 성도는 베드로의
사명 계통에서 반열이 이루어지고 변화 성도는 뢰자의 사명 계통에서 반열이 이루어집니다.
뢰자라는 것은 요한에게 준 이름인데 피 값을 갚는다는 사명의 뜻이요,
베드로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사명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계통은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순교의 피를 흘렸고 뢰자의 사명 계통은 교회를 심판할 때에
씌워지는 계통입니다. 아무리 베드로의 사명 계통에서 선 교회라도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라야 새 시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은 진노의 날에는 예언의 말씀에 의하여
종들과 교회를 심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에게는 천국 열쇠를 네게 주노니 누구든지 네가 죄를 사하면
사하여지고 정하면 정하여 진다고 말했고, 요한 사도에게는 계시록을 줄 적에 이
예언의 말씀을 듣고 가하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더한다고 했고 감하면 이 책에
기록된 거룩한 성에 못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사명 계통은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것만을 중심했고
뢰자적인 사명은 재앙의 날에 남은 종과 남은 백성을 일으켜서 지상 왕국을 이루는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