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33] [34 ~ 63] [64 ~ 96] [97 ~ 126]
(1972년 2월호)
97. 허락 받은 붉은 마귀를 무서워 말라
98. 진실한 자가 이기는 싸움
99. 일할 것은 많으나 바로 일하기는 어려운 세상
100. 믿음이 없는 세상에서 더 믿어지는 일
101. 작은 일을 바로 할 때에 큰 일은 열매
(1972년 3월호)
102. 삶을 바라면서도 죽음의 길을 가는 생활
103.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면서도 더러워지는 생활
104. 약한 것을 깨닫게 될수록 강한 인격
105. 사랑이 좋으나 죽는 사랑
106. 작은 일 바로 하는 것은 큰 일을 할 원동력
(1972년 4월호)
107. 금할 것을 금하지 못하는 나라의 부패성
108. 강한 것 같으나 약한 자
109. 인위적인 평화는 인위적으로 끝나고 만다
(1972년 5월호)
110. 새 것을 좋아하나 새로워지지 못하는 일
111. 사람의 제일 기쁜 일은 수고를 바로 하는데 있다.
112. 지극히 작은 것을 삼갈 때에 큰 것을 바로
113. 가장 지혜로운 자 같으나 어리석은 자
114. 노동을 등한시하는 국민이 나라를 망친다
(1972년 6월호)
115. 인격을 따르는 것보다도 인격을 만들어주는
116. 큰 것을 기대말고 작은 것을 잃지 말라
117. 모든 일에 재미를 얻고자 하는 것보다도
118. 인간 생활의 진보는 받는 데 있다
119. 높은 것 바라지말고 낮은 데서 바로 살자
(1972년 7월호)
120. 진리를 이용하는 자는 악한 사람이요, 진리를
121. 영광을 얻고자 하는 자 보다도 영광을
122. 일을 한다는 열심보다는 일을 바로 아는
123. 인생의 걸어가는 길은 자력에서보다도
(1972년 8월호)
124. 악을 이기는 자는 악한 일에 동참치 않는 자이다
125. 평화라는 것은 진리를 떠나 있을 수 없다
126. 오늘에 시간을 다투어 할 일은 무엇인가
97. 허락 받은 붉은 마귀를 무서워 말라
오늘날 어리석은 인간들은 허락 받고 나오는 붉은 마귀가 무서워서 떨고 있다. 붉은 마귀와 싸우겠다는 결심에서 20년간 수많은 청년을 죽이고 이제 와서 협상이니, 평화이니 하는 인간들은 지식이 없고, 사상이 없고, 먹기 위해서 사는 동물에 가까운 인격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누가 도와주면 싸우고, 도와주지 않으면 협상한다는 것은 사상이 바른 사람이 아니요, 돈에 팔려 다니는 사람이라고 본다. 참된 사상이라는 것은 허락 받고 나오는 붉은 마귀를 무서워하지 않고 싸워 나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상이라는 것은 인생관을 아는 지식에 따라서 좌우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붉은 마귀를 왜 허락했느냐 하는 것을 바로 알지 못하는 교회는 참된 교회라 할 수 없고, 교파라고는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대적인 비밀을 바로 알아서 난국을 돌파하게 하는 사명을 가진 것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이제 허락 받고 나오는 붉은 마귀를 무서워하지 않는 인격을 가진 사람은 누구냐 하는 것을 말한다.
1. 이 시대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다
오늘날 붉은 마귀가 아시아를 다 삼켜 버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조그만 남한을 남게 하신 것은 우리만을 들어서도 북방을 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조그만 나라, 보잘것없는 민족, 적은 용사를 들어서 마귀의 나라를 이기게 했던 과거의 역사는 인간 종말에 이루어질 예언적인 역사라고 본다. 만일 영토가 크고, 민족이 많고, 군대가 강하고, 돈이 많은 나라를 들어 쓴다면 하나님을 자랑할 일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사야 41장을 보면, 동방 땅 끝의 사람이 아무리 지렁이 같은 존재이지만 그를 들어서 하나님을 자랑하게 하겠다고 하셨다. 붉은 마귀를 허락한 하나님의 비밀을 분명히 아는 자라면 금년부터 강하게 일어나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극도로 어려운 문제가 닥쳐왔기 때문이다. 평안할 때에는 반공 반공하고 어려울 때에는 협상, 협상한다는 것은 허수아비 같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본다.
2. 하나님께서 동행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냐,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이냐 하는 것은 금년부터 알게될 것이다.
언제나 난국이 닥쳐올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한 사람을 통하여 난국이 해결되었다는 것은 역사가 똑똑히 증명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나오는 붉은 세력을 능히 무찌르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 위하여 적마의 세력이 강하게 일어났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 이긴다는 것도 분명히 이루어질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한 마귀가 하나님을 이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수도원에서 7년간 40일 금식 기도회가 되어졌다는 것은 사람의 어떤 결심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하게 하시므로 한 것 뿐이다. 40일 금식을 한 사람이 420명에 달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자랑거리로 내세우고자 시킨 것이 아니고, 앞으로 어려운 난국이 올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를 보호하실 뜻이 계시므로 시키신 일이라고 본다.
3. 불타는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참된 사랑이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올 때에 알 수 있다. 어려운 난제가 올 때에 백성을 살려보겠다는 사랑의 불이 붙는 자라면 애국 애족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가정이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에 집안을 잘 다스려 보겠다고 힘을 쓰는 자라면 참으로 가정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에 어려움이 닥쳐 올 때에 목숨을 바치고 나가는 자라면 진리를 사랑하고, 양떼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붉은 마귀의 세력을 인력으로 막을 수 없게 허락하신 것은 당신의 사람을 들어 쓸 때가 온 증거이며 영광을 받으실 때가 온 증거이다.
98. 진실한 자가 이기는 싸움
하나님께서 가장 간교한 뱀을 창조하여 사람을 꾀어보는 것은 진실한 자로 영원한 나라를 이루기 위한 선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옛 뱀인 붉은 용의 세력을 들어서 본격적으로 꾀어보는 일이 72년에 있다고 본다. 사도 요한이 인간 종말의 완전 계시를 볼 때에 옛 뱀인 붉은 용이 큰 권세를 짐승에게 주고 짐승은 거짓 선지를 앞에 놓고 천하를 꾀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자기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고, 합심하여 만왕의 왕인 그리스도를 대적하게 되는 것이 심판기에 오는 싸움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는 진실한 자가 이기게 된다고 계17:12~14에 말했다. 심판이라는 것은 진실한 사람만 남게 하고 그 밖의 사람은 모두 없이하는 것인데 이것이 인종 전멸의 심판이다. 진실이라는 것은 하나님 한 분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이때를 분명히 알고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이 말씀을 중심과 사상으로 삼고 끝까지 싸워 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진실하다고 인정하시게 된다. 진실이라는 것도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 도덕적으로 진실한 것도 있고,
둘째 : 사업적으로 진실한 것도 있고,
셋째 : 사상적으로 진실한 것도 있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진실이라는 것은 사상적인 것을 말한다. 공산주의의 사회에서는 허위 선전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충성된 사람으로 알아주고, 우리는 하나님의 거짓이 없는 말씀을 믿고 남을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끝까지 싸울 때에 하나님께서 충성된 사람으로 인정하시고 천사를 동원시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진실한 다니엘에게 인류 종말을 말할 때에 북방은 전부가 궤휼적이라고 하였고, 진실한 사람을 위해서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금년부터는 진실한 사람으로 하나가 된 단체가 나와야만 할 것이다. 우리 나라의 살길은 진실한 사람이 뭉쳐진 단체가 나올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므로 있게 될 것이다.
이제 진실한 사람이 뭉쳐진 단체가 어떠한 방법으로 될 것이냐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본문 그대로 읽어서 시국을 분별하고, 이 나라의 살길을 말하고, 우리 민족의 축복을 말하는 역사가 즉 새일 수도원에서 나타난 진리 운동이다. 우리는 말씀을 가감하는 자를 원수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 그대로 읽어서 얼마든지 변론할 수 있는 단체가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 종말에 될 일에 대하여, 사람이 조금도 가감할 수 없는 정확한 변론을 기록하게 했는데 이것이 선지서와 계시록이다. 새일 수도원에서 25일간 공부하면 진리 무장을 갖추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말 같지만, 누구든지 수도를 해보면 하나 같이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다.
어떤 인물이나 정권이나 교권이나 물권을 중심하여 뭉쳐진 단체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지 않으시겠지만, 말씀을 가감없이 믿고 순종하는 단체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아무리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망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청년 3, 4인이 바벨론을 이겼던 것이다. 바벨론 왕인 느부갓네살이 말씀에 뭉쳐진 청년 세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풀무불을 보통 때보다 칠 배나 뜨겁게 하여 거기에 던졌지만 결국은 왕이 머리를 숙이고
그들 앞에 굴복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살길은 새일 수도원에서 나타난 멸공 진리를 중심하여 몇 사람이라도 합심하여 일어난다면 하나님의 역사가 같이하므로 있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기독교의 사상을 바로 가진 사람이라면 새일 수도원에서 일어난 진리 운동을 반대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멸공 진리의 사상으로 일어나지를 못하고 협상을 하고 만다면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고 사단의 회가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로만 기독교인이 되지 말고 말씀대로 싸워 나가자! 말만 주여, 주여 하지 말고 말씀대로 싸워 승리하자!
99. 일할 것은 많으나 바로 일하기는 어려운 세상
일이라는 것은 홀로 할 수가 없다. 언제나 옳은 사람이 일하려면 옳은 사람끼리 손길을 마주 잡아야 하는 것이요, 사상이 바른 사람이 일하려면 사상이 바른 사람끼리 합심하여 싸워야 할 것이요, 말씀을 바로 증거하는 일을 하려면 말씀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끼리 단결해서 나서야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종말에는 바로 일하기가 어렵게 되므로 하나님의 특별 보호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쳤다.
그런데 일할 것이 많은 세상에서 일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옳은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옳은 사람은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민주 국가에서도 다수 가결이 있게되므로 불의한 자가 많게 될 때에 의로운 사람은 홀로 앉아서 울며 탄식할지언정 나서서 이 세상의 주권을 가지고 백성을 다스린다든지 옳은 사업을 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산주의라는 것은 그 사상 자체가 의인을 없애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세상이라는 것은 일할 수 없는 것보다도 의로운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피의 도성이다. 자본주의 정치라는 것은 의인을 죽이는 것은 아니요, 돈만 있으면 무슨 일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정치이다. 그러나 돈이 없이는 아무리 옳은 사람이라도 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 공산당은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없애고 있고,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돈의 세력이 교회를 정복하게 되므로 의로운 사람이 일할 수가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2. 참된 진리와 원수가 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과학 문명으로 소위 문화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하나님 말씀과는 원수가 되는 사상으로 교육을 받은 자들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고등 동물이라는 이론을 학과로 배워서 사람에게는 영혼도 없다. 사람은 한 물체에 속한 것이니 과학 발전으로 화려하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라는 생각이 문화인들의 뇌속에 정통 교훈과 같이 가득히 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성경만 가지고 일하는 사람을 시대에 뒤떨어진 무식한 자로 보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모르고 학교에서까지 유물론을 배워주는 세상이 되었으니 기독교가 이대로 나간다면 유물론 사상에게 먹힘을 당할 위험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성서를 들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신과 같이 역사하기 전에는 이 세상을 옳은 진리로 깨우칠 수가 전혀 없을 것이다.
금년에는 성경을 가지고 문화인을 굴복시키는 진리의 사람이 나타나야만 한다. 앞으로는 성경 본문 그대로 읽어서 얼마든지 변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이 시대에 빛이 되는 진리 운동을 할 수 없을 것이다.
3. 죄악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죄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양심인데,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기가 막힌 일이라고 본다. 세상의 사람들이 죄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동물보다도 더 악한 세상이 되기 쉽다. 왜냐하면 죄를 모르는 동물은 미물이지만 죄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 인간들은 정신 작용이 극도로 발달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새긴 기독교 안에서도 죄를 회개할 줄 모르고,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무나 슬퍼하실 일이다.
100. 믿음이 없는 세상에서 더 믿어지는 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할 때에 그 힘으로 할 수 있는 범위에 둔 것이 아니고, 할 수 없는 범위에 두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할 수 있게끔 역사하시는 조물주 하나님을 믿어야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일은 할 수 없는 인간들이 해줄 줄 믿고 당신에게 순종하는 것인데, 이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도와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간교한 뱀을 내어 의심이 나도록 꾀어보는 역사를 하게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믿기만 하면 된다는 조건을 세우기 위한 목적이다.
오늘날 과학이 발달됨에 따라서 믿음이 없으므로 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왜냐하면 믿을 수 없게끔 꾀이는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을 바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과학이 발달되면 될수록 믿을 수 있는 조건이 더 확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을 말하므로만 종말의 신앙 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첫째 : 믿을 수 있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된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이 믿을 수 있는 성경을 바로 증거하지 못하므로 신앙 운동이 점점 박약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루어진 일을 바로 알아야 한다. 이루어진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고는 이루어질 성경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믿는데 있어서는 그를 믿음으로 완전한 신이며, 사람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아무리 믿어도 증거가 없는데 예수를 바로 믿게 되면 그 사람에게 응답이 내려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완전한 신이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십자가 부활 승천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는 사람은 그를 통하여 오는 산 체험을 받게 되므로 십자가를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며 십자가를 지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능력에서 자동적인 열매가 십자가를 지고 나갈 수 있는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지고 나갈 수 있는 생활에 들어갈 때에 모든 성경의 말씀을 이론이 아닌 산 체험에서 증거하게 될 것이다.
둘째 : 지킬 수 있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된다.
지킬 수 있는 성경을 바로 아는 것은 과학 발전에 비추어 보아서 알 수 있다. 현실에 되어지는 모든 일을 성경에서 바로 알므로 지킬 수 있는 말씀을 확실히 깨달아서 믿게되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을 한 시간 정도면 완전히 불태울 수 있는 것은 과학 발전으로 이루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불 가운데서 구원받는 진리를 더욱 믿게 되는 것은 불탈 수밖에 없는 위기를 과학이 이루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 붉은 공산당의 세력이 인력으로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된 것은 모든 성경을 글자 그대로 읽어서 알 수 있는 때를 이루어 놓은 것이다.
성경대로 공산 정권이 강하게 일어났다면 성경대로 그 세력이 망하고 새 시대가 온다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더욱 더 믿어지게 된다. 악의 세력이 성경대로 강하게 일어났으면 의의 세력이 악의 세력을 이기게 된다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믿을 수 있는 증거가 된다. 또는 사람의 지혜와 지식이 별세계까지 간다면 이것이 심판기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별세계까지 가는 것은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조건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밖에도 세계가 되어지는 모든 것은 성경을 글자 그대로 읽어서 알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성경을 읽어서 알 수 있게 된 것은 과학의 발달에 있으니, 이러한 때를 당하여서 믿음이 없다는 것은 교회에 책임이 있되 교역자에게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바로 알기만 하면 이전보다도 더 확정적으로 믿을 세상을 만났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미리 성경에 세밀히 말씀하신 것은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택한 자녀에게 말씀을 믿어서 미혹을 받지 말고 새 시대의
영광을 누리라는 목적에서 기록해 두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믿음을 더욱 가져야 할 때이다.
101. 작은 일을 바로 할 때에 큰 일은 열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에 무엇이나 작은 일이 바로 되어야 큰 일이 열매로 맺어지도록 하셨다. 나무 하나를 두고 본다 하여도 지극히 작은 보리 한 알이 땅에 바로 박혀 진액을 흡수하게 될 때에 국가에 큰 유익을 주는 열매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작은 일 하나를 바로 하는 것이 높고 높은 하늘 위에 있는 것을 가져올 수 있는 힘이 된다. 골방 속에서 입을 열지 않고 바로 묵상하게 될 때에 보좌 위에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소망은 큰 일을 하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작은 일 하나를 바로 할 수 있는 국민이 되고 정치인이 될 때에 비록 영토가 작고 빈곤 속에서 살고 있다 하여도 과학을 초월한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므로 있게 된다.
이제 작은 일을 바로 하므로 큰 일이 열매가 되는 일에 있어서 그 요소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보이지 않는 사상 문제이다
사상 하나를 바로 가지게 될 때에 세계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오는 것이다. 사66:18이하는 인간 종말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들어 쓰실 때에 그 중심 사상을 보고 쓰시되 세계적인 역사를 하게 하시는 동시에 그 자손까지 영원한 복을 받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완전한 사람을 쓰시려고 찾으시는 것이 아니요, 당신과 의합된 사상을 가진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
지금 이 아름다운 소식의 월간지를 입으로 불러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는 빈민인 한 사람을 살려 보겠다고 사흘 동안 잠을 자지 않고 기도하다가 피곤이 없는 몸이 되어, 15년간 고요히 묵상하던 중에 나도 모르게 입술이 이상하게 되면서부터 말씀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4년 동안이나 계속 입으로 불러서 책을 내었고 지금도 말씀이 임하는 대로 아름다운 소식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슨 책이나 입으로 불러서 낸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없었던 놀라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이 사람 하나가 멸공진리를 변론으로 쓰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 새 시대를 이루는 열매가 될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누구든지 새일 수도원에서 나타난 책을 읽어보게 되면 성경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고, 앞으로 어떻게 하여야 살 길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되는 동시에 큰 역사를 받게 될 것이다.
사상이라는 것은 큰 것을 하는데서부터가 아니고, 작은 일에서라도 그 사상이 조물주이신 하나님과 의합 될 때에 큰 역사는 얼마든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2. 적은 물질 하나를 바로 쓰는 문제이다
물질이라는 것은 바로 쓰면 큰 열매가 있고, 바로 쓰지 못하면 큰 화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것도 상을 잃지 않는다고 하신 것은 물 한 그릇이 상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아니고, 적은 것이라도 바로 쓰게 될 때에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나라 국민들이 물질 하나를 바로 쓸 줄 알게만 된다면 모든 문제는 크게 변동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사람이 물질을 따라 간다는 것은 물질의 종이지만, 적은 물질 하나를 바로 쓸 줄 아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주안의 물질계를 전부 움직일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렙다 과부가 보리떡 한 개를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에게 바친 것이 작은 일 같았지만 그것이 3년 6개월 가뭄에서 자기 가정을 구원하는 열매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가 생산 확장이니 5개년 계획이니 하고 있지만, 그것보다도 국민들에게 적은 물질을 바로 쓸 수 있게 지도하는 정치가 더 필요하다고 본다. 물질을 쓰는 것은 사람에게 있지만 그것을 주시는 이는 조물주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적은 물질을 바로 쓰는 사람들이 단체가 될 때에 하나님께서 그곳에 같이 하시므로 많은 물질을 가지고 죄를 짓는 사람들보다도 더 큰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이 진리 운동을 하는 본부인 새일 수도원이 시작될 때에 2천원을 가지고 했지만, 그 2천원의 가치라는 것은 큰 수도원을 열매로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바칠 적에 큰 일을 이루는 열매가 되는 것이다.
3. 작은 말 한마디를 바로 하는 문제이다
약3:6을 보면 혀는 곧 불이라고 했다. 작은 불이 천하를 태울 수도 있는 큰 힘을 가진 것과 같이, 작은 혀 하나를 바로 움직이고 바로 움직이지 못하는데 따라서 세계가 잘 살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대 자연을 창조하실 때에는 말씀으로 하셨고, 앞으로 새 시대를 이루기 위하여 역사하시는 것도 말씀으로 하시는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한 절을 잘못 전했다는 조건으로 자신을 망치고 교회를 망칠 수도 있는 것이요, 작은 말 한마디를 하나님께서 인정하리만큼 했다는 조건으로 그 사람에게 대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이 필요없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은 큰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참 종을 함부로 이단이라고 한 말 한마디가 자신을 망치게 할 수도 있고, 교회를 망치는 말이 될 수도 있고, 양떼를 죽이는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남을 살리기 위하여 한 말 한마디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자신이 살게 되는 일도 있다. 이 사람이 예수를 믿고 난 후에, 말 한 마디 하는 것을 극히 조심하는 생활에서 내려온 것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내
입을 쓰시는 열매가 되었다고 믿어지는 바이다.
설교자가 강단에 서서 한마디의 말이라도 필요가 없는 말을 하게된다면 그것이 큰 실패의 근본이 될 것이다. 왜냐 하면 작은 말 한마디에 하나님께서 기뻐하기도 하시고 작은 말 한마디에 하나님께서 노하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얼마 전에 내가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루에 열 시간이나 수도생을 가르치고, 매주일 서울에 가서 목회를 하고, 매달 70페이지의 월간지를 발행할 때에, 쉬는 시간도 없이 너무 분주해서 못하겠다고 하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몸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필요가 없는 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공산당을 이길 사람은 작은 말 한마디에 응답이 오는 사람이라야 될 것이다.
암7:1이하를 보면 아무리 황충떼가 강하게 일어나서 피해를 주고 큰 불이 바다와 육지를 먹어 나오지만,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라는 기도의 말이 하나님께 상달되므로 황충떼의 피해도 당치않고 불의 피해도 당치 않으리라는 응답을 받게 되었다. 이것은 인류 종말에 환란과 재앙에서 남을 자는 한마디의 말에 응답이 있는 사람이라야 된다는 것을 보여준 묵시라고 본다. 인간 종말에 마지막 싸움에서 원자탄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고, 작은 일
하나를 바로 하는 사람의 기도가 승리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가 세계를 정복하는 나라가 되려면 작은 일 하나를 바로 할 수 있는 인격을 양성시키는 일이 없이는 안될 것이다.
102. 삶을 바라면서도 죽음의 길을 가는 생활
인생이 삶을 바라는 것은 하나같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참으로 삶의 길이 무엇이며, 죽음의 길이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지식을 가진 자는 심히 적다고 본다. 그러므로 삶을 바라는 그 욕망을 채워보려고 날뛰는 것보다는 삶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 바로 아는 지식을 찾는 것이 먼저 할 일이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유일신 종교의 사상을 가졌고, 세계적인 종교 지도국의 사명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들의 열심이 참된 지식을 따르지 못하고 자기 욕망을 채워보려고 할 때에 오히려 불행을 가져오는 열심이 되었던 것이다(롬10:1~3).
마귀란 놈은 사람을 꾀일 때에 산다는 말과 완전해 진다는 말을 가지고 꾀였던 것이다. 지금도 삶을 바라고 완전한 것을 바라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마귀 미혹이라는 것은 죽을 일을 하게 하면서도 살게 되는 것처럼 생각이 나게 하고, 실패에 들어가는 일을 하게 하면서도 완전하게 되는 것처럼 생각이 나게 하는 것이다.
이제 삶을 바라면서도 죽음의 길을 가는 생활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자기 힘으로 삶의 길을 찾는 생활이다 (사9:8~12)
하나님께서 대 자연을 창조하시고 인생을 낼 때에 인간의 힘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끔 하신 것이 아니다. 사람은 가장 무능하지만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의지하므로 완전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가장 간교한 뱀을 창조하여 사람을 꾀어 보았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순종하는데 전력을 두는 사람으로서 완전한 것을 소유 하도록끔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아보려는 것은 삶을 바라나 죽음의 길을 가는 사람의 생활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생명의 능력의 역사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이 말씀해 놓은 그 법을 순종하는 자에게만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2.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의 길을 찾는 생활이다 (마16:25)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종을 들어 쓸 때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 나가면 항상 같이 하시고, 목숨을 아끼고 싸우지 않으면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목숨을 아끼는 자는 오히려 죽게 되었고,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 나가는 자는 죽는 길 같았으나 오히려 삶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종을 들어 쓰시는 목적은 왕국을 이루어서 세세왕권의 영광을 주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 나가는 자에게만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살기를 원한다는 것은 사망의 법에 지배를 받고 있는 증거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 나간다는 것은 생명의 법에 지배를 받고 있는 증거이다. 왜냐 하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 마음 자체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없는 증거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마음
자체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있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같이 할 때에 사망의 법을 가진 마귀와는 하등에 관계가 없다. 사람에게 죽음의 공포가 있을 때에 이것은 생명의 활동이 그 마음에 없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죽고 사는 것이 자기의 힘에 있지 않고 어떤 원수의 힘에있는 것도 아니고 조물주 하나님께 있다. 만일 택한 자를 하나님께서 죽이지 않으려고 하시는데 원수들이 해치게 된다면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이 원수에게 지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수에게 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순종하는 사람이라면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3. 남을 해치면서 삶의 길을 찾는 생활이다 (계13:10)
오늘에 모든 인간들은 자기가 살아 보려고 남을 해치는 것을 승리로 보고, 심지어 사람을 많이 죽이고, 자기 영토를 넓히는 사람을 영웅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해치는 것은 동물과 같은 생활이다.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해치는 사람은 자기가 죽게되는 것이요,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같이 하시므로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게 되는 것이다.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자기의 권리를 세우려던 나라는
다 망했지만 만민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는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해치는 사람을 전부 심판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인생 생활의 가치라는 것은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해치는 생활에 있지 않고,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생활에 있다. 그러나 이것을 체험한 자는 심히 적은 세상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가 세계를 정복하게 된 것은 남을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들어간 사람들이 하나같이 목숨을 바치고 남을 살리기 위하여 복음을 증거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한 세력이라도 남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나가는 사람
앞에 굴복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 통일은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해치는 자에게 있지 않고,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자에게 있게 되므로 바벨론 세상이 불탈 때에 기뻐하게 된다(계18:20).
103.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면서도 더러워지는 생활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눈으로 볼 때에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집을 볼 때에 자기도 그런 집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요, 아름다운 옷을 볼 때에 자기도 그런 옷을 입고 싶어하는 것이요, 아름다운 사람을 볼 때에 자기도 그런 모양으로 꾸미고 싶은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아무리 옛날 보다 아름다운 집을 많이 짓고, 아름다운 옷을 많이 만들어 내고, 아름다운 모양으로 꾸밀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하여도
실지는 점점 더 부패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얼마든지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내놓을 수 있지만 사람이 거기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가 아름다운 집을 옛날 보다 많이 지었고, 아름다운 의복을 많이 만들어 내어 청년 남녀들까지도 아름다운 모양을 가지게 되었지만 과거보다 소망이 없는 민족이 되어가고 있는데, 이 원인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아름다운 모양을 볼 때에 그 모양을 부러워하는 인격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옷을 부러워하는 인격이라는 것은 철모르는 아이들이 고운 옷을 해 주면 좋아하고, 눈으로 볼 때에 겉만 아름다우면 탐하는 것과 같다.
아름다운 것을 볼 때에 그 속에 어떠한 진리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진리를 떠난 마음에서 부러워한다는 것은 언제나 결말에는 수치스럽게 되는 열매를 가지게 된다. 남의 집이 아름답다고 해서 자기도 빚을 내어 아름다운 집을 지었다가 그 집에서 살지도 못하고 빚 때문에 쫓겨나고 만다면 오히려 아름다운 집을 지은 것이 수치가 되고 말 것이며, 남이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고 해서 자기도 그 모양을 내다가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게 된다면 오히려 아름다운
옷을 입고 다니던 것이 수치가 되고 말 것이다.
어떤 사람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해서 무조건 따르다가 그 사람에게 미혹을 받아 피해를 당하게 된다면 오히려 자신을 망치는 손해를 보게 된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모양을 보고 부러워하는 인격이라는 것은 가정을 망치고 국가를 망칠 위험성이 많다고 본다.
2. 아름다운 것을 가지고 있을 때에 그것을 자랑하는 인격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남보다 아름다운 집에서 산다든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살게 된다면 이것을 큰 자랑거리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인격 자체는 아름답게 되지 못했다고 본다. 아무리 아름답지 못한 집에 살며, 아름답지 못한 옷을 입었다 하여도 자랑할 것이 있는 지식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름다운 집에서 살며 아름다운 옷을 입고 만족히 여기는 사람을 얼마든지 바로 지도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인격적인 감화가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태도와 아름다운 말과 아름다운 행동과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진 자라면 완전한 미를 가진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집이나 아름다운 의복보다 인격이 아름답게 되는 것을 목적하기 전에는 아무리 아름다운 것을 바란다 하여도 더러운 생활이 될 것이다.
3. 아름다운 자연을 볼 때에 그 자연을 신과 같이 아는 인격이기 때문이다
소위 유물론이라는 것은 아름다운 자연계를 볼 때에 그것을 스스로 있는 전능의 힘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무신론 사상이라는 것이다.
어떤 공장에서 기술자가 많은 연구 끝에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어 내었는데 사용하는 사람들이 만든 기술자보다도 그 물건을 귀하게 안다는 것은 대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보다도 자연을 존중히 보는 사람과 같다. 대자연의 아름다운 것을 보고 그것을 숭배하는 자의 생활이라는 것은 아무런 발전을 볼 수가 없다.
인생의 미라는 것은 대 자연을 초월해서 오는 역사를 받으므로만 있게 된다. 자연계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도 대 자연을 지배하시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이 될 때에 자연계를 즐기는 인격이 아니요, 자연계를 지배하는 인격이 되므로 진정한 미의 생활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대 자연계만 좋아하면서 그 자연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체험치 못한다면 오히려 자아를 비관하는 생활에서 자살하는 일도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나 같은 인간이 세상에서 살아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는 자격지심을 가지게 되므로 전부 비관하게 되어 자기의 생명까지 끊어 버리는 일까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을 초월한 하나님과 교통을 하는 자라면 하나님의 세계에서 오는 것을 받게 되므로 자연에 국한된 것이 아니요, 자연을 볼 때마다 진리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앞으로 소망의 기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소위 유물론이라는 것은 사람을 타락시키는 요소라고 본다.
104. 약한 것을 깨닫게 될수록 강한 인격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향하여 역사하실 때에 자기 자체는 약한 줄을 깨닫고 당신을 의지하는 자에게 인간 세력의 정권이나 물권이나 병력이 피해를 주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과거에 나타난 일인 동시에 인간 종말에도 이루어질 예언이 되므로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신이시다.
이제 약한 것을 깨닫는 자가 강하게 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자기의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예수님께 부르짖을 때에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강하게 내리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항상 자기의 미약을 깨닫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 마음이 비록 약해서 넘어졌사오니, 주여! 내 마음에 능력의 불을 주시옵소서”하는 기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날마다 죄를 이길 수 있는 강한 능력을 마음에 충만히 받게 되어 완전한 인격이 이루어질 때에 죄의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들을 이끌어 내는 위대한 역사를 하게 된다.
베드로가 비겁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일도 있었지만, 자기가 장담하던 그 교만을 버리고 무릎을 꿇고 권능이 임하기를 기도할 때에 큰 역사를 받게 되므로 한번 외칠 때에 3천명이라는 대중이 마음에 찔림을 받고 “어찌할꼬” 하는 회개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자기 미약을 모르고 나는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마음이 변할 수 없다고 장담할 때에는 약한 사람이 되어서 쓰러졌지만 자기 미약을 깨닫고 성신의 권능을 받고자 할 때에는 가장 담대하고도 강한 사도가 되어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힘을 당할 때까지 복음을 전한 베드로였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 미약을 깨닫기까지는 그대로 버려 두시고, 자기의 미약한 것을 철저히 깨닫고 당신을 의지할 때 가서야 말씀대로 강하게 들어 쓰시는 것이다.
2. 자기의 힘으로 적군의 세력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적군을 이길 수 있는 역사가 강하게 내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한 자라고 해서 그 사람에게 환란을 없게 하시는 것이 아니요, 남보다 더 큰 환란이 있게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자기의 미약을 깨닫고 당신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는 인격을 이루어주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히스기야 왕이 앗수르 군대가 둘러싸고 항복하라고 위협을 줄 때에 옷을 찢고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기를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였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자로 사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으로 주만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였던 것이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천사를 내려보내어 앗수르 군대 18만 5천명을 전멸시키는 일이 있으므로 히스기야는 북방 세력을 승리한 강한 용사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인간이 볼 때는 북방 세력이 강하여 우리를 이길 것같이 보이지만 대통령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자기 미약을 깨닫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면 이 나라는 북방을 이길 수 있는 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 인간이 볼 때에는 지렁이같이 보이지만 자기 미약을 깨닫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라면 새 타작기 같이 강하게 일어나는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게되므로 약한 자가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할 것이다.
3. 자기의 힘으로 거짓 선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양떼를 살려 줍소서 하는 호소를 할 때에 거짓 선지의 교권이 아무리 강하다 하여도 그것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양떼를 바로 인도할 수 있는 인격이 강하게 내리는 것이다.
모세가 자기 힘으로 민족의 억울한 일을 도와 보려고 하다가 미디안으로 피신 생활을 하게 되었고, 40년간 자기 미약을 깨닫고 있을 때에 여호와 나타나셔서 신과 같이 그를 들어 쓰셨던 것이다. 인간이 볼 때에 아무리 실패를 당한 것 같았지만, 미약을 깨닫고 하나님의 명령을 떨리는 마음으로 순종할 때에 모세 앞에서 바로가 떨게 되고 강한 군대가 전멸을 당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는 사명자들이 자기의 미약을 깨닫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호소를 하게 된다면 양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종을 들어서 양떼를 환란에서 구출하는 역사를 하시므로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약할 때에 강하다고 한 것은 미약을 깨닫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에 강한 역사가 임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미약을 깨닫고 대중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역사만 믿고 호소하는 자에게 강한 용사의 인격을 주시는 것이다.
105. 사랑이 좋으나 죽는 사랑
오늘날 사람들은 정신 작용의 과학이 발전됨에 따라서 옛날보다는 무엇이나 자유롭고 평화롭게 나가야만 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생각으로 따라오는 사랑이라는 것은 성서를 입각하여 볼 때에 죽는 사랑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오락적인 사랑
이것은 사람을 방탕하게 만드는 열매를 가져오게 된다. 과거보다도 화려한 옷을 입게 되고,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고, 평안히 살 수 있게 된 자리에서 도취가 되어 거기에 만족을 누리는 사람이 될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는 대적이 되는 사랑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는 부족함이 없다는 자만심이 생기는 동시에 이 외에는 생각조차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 이상 다른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어리석게 보는 것이다. 그러나 더러운 피의 작용을 따라서 음란, 사치, 방탕으로 그 소욕을 채워보려는 사람이 될 때에는 하루아침에 멸망을 당하는 죽음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운데서 서로 사랑하고 교제한다는 것은 인간이 보기에는 좋은 것 같으나 죽는 사랑이다. 왜냐 하면 도취된 생활에서 어떤 사상이나 어떤 진리를 가진 것이 없이 그 시간에 오는 만족과 쾌락을 일삼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이러한 생활을 만족히 여기는 사랑이다.
2. 타협적인 사랑
사람의 정신 작용이 발달됨에 따라서 서로 이해를 해가면서 사랑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인간을 대할 때에는 좋은 것 같으나 인간이 하나님을 대할 때에는 타협적인 사랑이므로 대적이 된다. 왜냐 하면 타협적인 사랑의 노선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대적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여자가 한 남자와 결혼을 해서 그 남자밖에는 없다고 생각을 하고 괴로워도 즐거워도 평생토록 살아 나가기를 결심했지만 시일이 흘러감에 따라 그 사랑은 식어지고 다른 남자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처음에 만난 남자가 그 여자를 볼 때에 원수가 될 것은 사실이다.
이와 같이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양심에서 죽어도 그 사랑밖에는 없다고 싸워 나가던 교회가 그 마음이 식어지고 다른 주의와 사상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사랑하자는 것은 십자가의 사랑과는 원수가 된다. 왜냐 하면 십자가의 사랑은 죄를 위하여 죽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사랑을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 죄의 사상을 가진 주의를 이해하고 교제한다면 자동적으로 십자가의 원수가 되고 만다.
오늘날 기독교가 소위 통합이라는 간판을 가지고 십자가 사랑 중심으로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타협적인 사랑으로 흐른다는 것은 사랑 같으나 죽는 사랑이다. 왜냐 하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께서 죄를 용납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십자가의 사랑이 죄를 용납하는 사랑으로 변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십자가가 죄를 용납한다면 죄를 위하여 죽은 사랑은 완전히 무효가 되고 만다. 어느 때에는 죄 때문에 죽고 어느 때에는 죄를 용납한다면 죄를 위하여 죽은 십자가의 사랑은 폐지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타협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것이니
실지는 심판 날에 죽는 사랑이다.
3. 편벽적인 사랑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사랑하시되 아무리 창기며 세리며 강도라도 죄를 회개하고 돌아온다면 꼭 같이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랑을 가지셨다. 그런데 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형제를 편벽 되게 사랑한다면 이것은 생명을 주는 사랑이 아니요,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사랑이 될 것이다.
어떤 목자가 자기를 대접하는 사람은 사랑하고 대접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랑을 가진 자는 양떼를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의 이용물로 삼는 것이니, 이용을 하는 자도 죽게되고 이용을 당하는 자도 죽게 된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서 남에게 주는 자라면 조금이라도 편벽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전해야 될 빚을 졌다고 하면서 아무리 괴로움이 오고 핍박이 와도 기뻐서 복음을 전한 것은 십자가의 사랑을 남에게 전해 준다는 것밖에는 아무런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십자가의 사랑을 그대로 남에게 전해 준다면 그 사람을 통하여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든지 공급되므로 남을 살릴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력의 종이 되려면 편벽이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대로 남에게 전해주는 일을 하여야만 된다.
106. 작은 일 바로 하는 것은 큰 일을 할 원동력
사람이라는 것은 큰 일을 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고 작은 일을 바로 할 수 있는 양심을 받은 것 뿐이다. 그러므로 정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공경하기 위하여 지극히 작은 생각 하나를 조심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큰 일을 할 수 있는 인격이 이루어지도록 응답을 내리시는 것이다.
종교인이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탈선이요, 큰 일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작은 일을 하지 않는 것도 탈선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혀 하나라도 바로 움직일 때에 그 입술의 열매는 조물주 하나님의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겨자씨만큼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이 볼 때에 작은 일 같으나 이것을 믿음으로 할 때에 그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응답으로 나리신다는 것이다.
이제 작은 일을 바로 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지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작은 죄 하나를 마음에서부터 용납지 않는 일이다.
아무리 큰 일을 한다 하여도 마음 가운데 작은 죄의 생각 하나를 용납하게 된다면 이것은 큰 실패의 근본이 된다. 예를 든다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작은 세균 하나가 폐를 접촉될 때에 그것으로 말미암아 쓰러지고 마는 병사가 생기는 것과 같다. 작은 죄의 생각 하나를 용납하는 사람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큰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의 줄을 끊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죄와 싸우는 것이 인간의 제일
큰 일이라면, 작은 죄를 마음에서부터 용납한다는 것은 죄와 싸우는 전쟁에서 큰 실패를 가져오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항상 마음 가운데 죄의 생각 하나를 용납지 않고 의로운 것을 사모하는 생각이 있다면 죄의 강한 세력을 이길 수 있게된다. 죄의 생각을 용납지 않고 싸우는 것은 붉은 용의 세력을 때려부술 철장 권세를 받게 될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2. 진리의 획선에 의하여 조금도 가감이 없이 나가는 일이다.
진리의 획선에서 조금도 가감이 없이 나갈 때에 진리 전체를 바로 알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획선 하나를 탈선되게 나갈 때에 진리 전체를 짓밟는 멸망의 자식이 될 수도 있다.
진리에도 획선이 있고 사랑에도 획선이 있고, 신앙에도 획선이 있고, 믿음에도 획선이 있고, 구원에도 획선이 있는 것이다. 덮어놓고 사랑하고, 덮어놓고 믿고, 덮어놓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든지 탈선된 과오를 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그 획선을 바로 나가는 자리에서 크게 역사하는 원동력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랑도 믿음도 구원도 법을 떠나서 있는 것은 다 허공을 치는 일이 될 수 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공의의 신이시니 공의를 떠난 일이라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3.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를 아끼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린아이를 용납하여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위하여 먼 길을 걸어가신 일도 있었고, 밤을 새워가면서 교훈하신 일도 있었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 요구를 들어주신 일도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이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를 아끼는 사랑의 불이 붙을 때에 대중을 살릴 수 있는 역사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일한 대로 갚아 주시려 오실 때에는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행한 것을 자기에게 행한 것과 같이 상을 주시며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행치 아니한 것을 자기에게 행치 아니한 것과 같이 벌을 주신다(마25:40, 45). 만일 어떤 사람이 지극히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볼 줄 모르고 부요한 사람을 가까이 하기를 좋아한다든지, 지극히 무식한 사람을 무시하고 지식이 많은 사람을 가까이 하기를 좋아한다든지, 지극히 비천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싫어하고
화려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기를 좋아한다면 조물주 하나님과는 대적이 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역사할 수가 없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위하여 눈물 흘리며 기도하던 중에서 역사가 나리기 시작하여 계시록의 깊은 뜻을 완전히 알게 된 것이 이 사람이 하고 있는 진리 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살려 보려는 눈물의 기도가 있는 자에게 대중을 살릴 수 있는 역사를 하도록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우리는 나가야 할 것이다.
107. 금할 것을 금하지 못하는 나라의 부패성
오늘의 많은 나라들은 과학 만능을 믿는 정치로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그러나 금할 것을 금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앞에 종이 되는 생활을 정치인 자체가 하고 있으니 이것은 형식적인 정치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금할 것을 금할 수 있는 인격이 있어야 완전한 나라를 이룰 수 있는 지도자라고 보게 된다.
정치에는 신정도 있고 인정도 있고, 선정도 있고 악정도 있다. 그런데 신정이라는 것은 금할 것을 금할 수 있는 정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금할 것을 금하지 못하는 나라에 대하여 그 부패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금할 것을 금하지 못하는 지도자로 말미암아 오는 부패성
어느 사람이든지 처음에는 올바른 지도자가 되어 보려고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서 올라오는 죄의 세력을 금하지 못하는 인격이므로 갈수록 남을 지도할 용기를 잃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종이 된 인격에서 억지로 그 법대로 남을 지도할 때에 권리가 없는 지도자가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입을 열어 남을 지도하는 말을 한다 하여도 자기 자신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지지 못했다면 아무런 열매도 있을 수 없다.
말할 권리를 가지고도 그 말을 할만한 자격을 상실한 자는 아무리 많은 말을 한다 하여도 거기에 생명이 없으므로 지도를 받는 사람들이 순종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불만을 가지게 된다. 지도자가 존경을 받지 못하고 무시를 당하게 된다는 것은 지도하는 사람 자체에 부패성을 가졌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그 지도를 받는 사람들도 영향을 받게 되므로 부패를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이 많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의로운 사람에게 지도권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자신에 있는 모든 죄악을 금하는 자라야 대중의 잘못을 금할 지도권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공산당이라는 것은 최고의 궤휼적 정책을 노골화시키고 해 나가므로 자기 사명인 특권을 마귀에게 받은 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세력은 백성을 얼마든지 괴롭히고 망하게 하는 말세의 진노의 막대기로 쓰여지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이 북방 세력을 이길 자는 자신의 죄악을 금하는 거룩한 자라야 된다고 모든 선지는 하나같이 묵시로 보았던 것이다.
아무리 반공이라 하여도 자신이 죄악을 금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벌써 마귀에게 정복을 당한 인격이니 마귀의 최고의 권세를 가진 공산 세력을 막을 수 없다.
2. 금할 것을 금하지 못하는 단체의 부패성
단체라는 것은 어떠한 목적을 두고 뭉쳐진 것을 말한다. 공산당이라는 것은 목적이 죄가 없다는 사상에서 의를 대적하고, 하나님이 없다는 사상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나오는 단체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무리 죄를 범해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더 강하게 뭉쳐지는 단체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의와 하나님을 위하여 그 뜻을 이루자는 것이 목적인 단체다.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라는 애국가가 즉 이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만한 단체가 되기 전에는 아무런 권리가 없는 것이다.
오늘에 소위 기독교라 하는 단체에서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을만한 일을 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은 사실이다. 오늘날 기독교 종교국의 지도자가 기독교를 말살시키는 공산당 정치와 협상을 해서 평화를 이루자는 것은 벌써 악한 단체에게 먹힘을 당하는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자유진영이라는 측에서 자유를 방랑적으로 사용한다면 그 자유진영이라는 자체가 참된 자유로 단체를 이룬 것이 아니므로 혼란에 빠지게 되어 자유를 박탈하는
공산당에게 오히려 멸시를 받고 눌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마음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사상으로 뭉쳐진 단체가 되기 전에는 도저히 금할 것을 금할 수 없는 사회 혼란을 가져 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에 14만 4천명인 단체로서만 짐승의 나라를 이기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비록 적은 수이지만 하늘의 권세를 받은 단체이므로 완전 승리를 이루게 되는 동시에 새 시대를 이루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이 단체라는 것은 흠이 없는 사람들이 합하여 죄악의 세력을 완전히 때려부수는 승리의 열매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붉은 용, 붉은 짐승, 거짓선지의 세력이 완전히 이 땅에서 없어지는 것을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다.
108. 강한 것 같으나 약한 자
어리석은 인간들은 무신론 공산주의를 강한 자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실지는 가장 약한 자라고 본다. 왜냐하면 무신론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믿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말을 탄 사람이 채찍으로 말을 때릴 때에 그 말은 아무 것도 모르고 무조건 강하게 뛰지만, 그 강한 것은 오래 가지를 못하고 차츰 약해지는 것과 같다.
공산주의라는 것은 사람을 짐승 다루듯이 하는 정책이다. 그러므로 지도자 하나가 굴복을 당한다면 그 힘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제 공산주의의 약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생산력이 약하다.
생산이라는 것은 각자가 소망이 넘치는 가운데서 잠을 자지 않고 노력하는데 따라 증가할 수가 있다. 그리고 축복의 대상자인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생산을 내는 자라야 축복 속에서 생산이 증가되는 것이다. 소위 농장을 경영하는 사람이 억지로 노동을 한다면, 이것은 농작물에 대하여 애착심이 없는 것이므로 생산은 자동적으로 약해진다.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 소욕을 위하여 힘드는 줄을 모르고 일하게 된다. 그런데 그 소욕이 없게 되면 힘이라는 것은 자동적으로 약해져서 생산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을 많이 내려면 다음과 같이 해야 된다.
자본주의 정치에도 하나님의 축복을 믿는데서 생산을 각자가 내어야할 것이다. 그런데 욕심 많은 사람이 빈민을 탄압하고, 자기의 소욕만을 채우려는 생각으로 치우친다는 것은 생산이 자동적으로 약해지고 만다. 그러므로 각자 각자가 소망이 넘치는 기쁨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야 생산력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소위 자본주의 정치가 대 자본가만을 중심한다는 것은 완전한 민주주의적이라고 볼 수 없다. 완전한 민주적인 정치를 하려면 국민 전체가 소망이 넘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정치가 있어야 하는 동시에 생산력이 올라가는 정치가 있어야 된다. 이것은 약자나 빈자까지도 다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정치이다.
참된 민주주의라는 것은 국민에게 사상과 소망이 넘치도록 하는 정치가 있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공산주의가 강하게 정치를 하는 것 같지만 실지는 가장 약한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수 없고,
둘째는 국민의 인격을 완전히 이룰 수가 없고,
셋째는 이상적인 단체를 이룰 수가 없으므로 결국에는 아무런 열매도 없이 되고 만다.
2. 사상적으로 약하다.
사상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강한 것이 아니고, 있다는 것이 강하다. 공산주의 유물론 사상이라는 것은 하나님도 없고, 영혼도 없고, 죄도 없고, 심판도 없고, 천국도 없고, 사람은 고등동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강한 사상을 넣어줄 수가 없고 오히려 타락을 주게된다.
세계를 정복할 강한 사상을 가진 자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체험적으로 받은 자이며, 영적 생활에 큰 발전을 가진 자이며, 마음에 천국을 소유한 자이며, 완전히 죄를 이기는 변화 성결을 받은 자이며, 확실한 진리의 소망에서 사상이 강하게 된 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자립적 정신에서 시간을 다투어 가며 싸우는 사상적인 생활이 있게 되어 백전백승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미약한 사상은 공산주의 유물론 사상이요, 가장 강한 사상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순교적 사상이다. 오늘에 소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대 세력이 세계를 좌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이 없는 우상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약한 것 같으나 강하게 되는 순교적 사상이라야 세계를 통일하게 될 것이다.
3. 인격적으로 약하다.
공산주의 인격이라는 것은 전부 속여서 사람을 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만 되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돌아설 인격인 것이다.
참된 진리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인격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참되다 하는 깨달음이 있으므로 날마다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참된 진리의 말씀이 없이 이루어진 인격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허무하다 하는 것이 있으므로 바람 앞에 겨와 같이 날아가고 만다.
지금 공산주의는 기독교가 자본주의 국가의 한 도구라고 가르치고 있고, 종교를 아편이라고 말하고 있고, 자본주의 정치 아래서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먹지 못해서 굶주리는 상태에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게 될 때에 공산주의 인격을 가진 자들은 자기들의 생활이 너무나 허무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서 북진하게 될 때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도 거짓말이요, 기독교는 자본주의 앞잡이라는 것도 거짓말이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다 못산다는 것도 거짓말이요, 제일 악질이 기독교인이라는 것도 거짓말이요, 그 밖에 모든 것이 다 허위 선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아서 떠들던 무리들은 하루 아침에 깨닫고 자동적으로 돌아오게 된다.
억지로 뭉쳐진 단체라는 것은 바람 앞에 겨와 같이 흩어지고 말것이요,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받은 사람 앞에 다 굴복을 당하고 만다. 왜냐하면 노예에 불과한 인격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서를 통하여 공산주의가 아무리 강한 것 같으나 약하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
109. 인위적인 평화는 인위적으로 끝나고 만다
우리는 평화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평화를 위하여 아들을 죽게 하시고, 아들은 죽기까지 순종하셨는가 하는 진리를 바로 아는 데서부터 참된 평화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체험하게 된다. 개인의 마음속 평화도 인위적으로 이룰 수가 없는데, 세계적인 평화를 인위적으로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가장 간교한 뱀을 내어 사람을 꾀이도록 하여 원수가 생기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원수와 타협하므로써 평화를 이루라는 것이 목적이 아니요, 그 원수를 이기므로써 평화를 이루라는 것이 목적이다. 이렇게 되므로 이루어진 것을 참된 평화의 왕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종이 된 생활에서 평화를 얻을 수 없는 인생들에게 참된 평화를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역사하셨던 것이다.
인간의 죄와 원수를 없이하는 방법을 세우기 전에는 완전한 평화가 있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승리의 부활을 하게 하시므로써 심령 중생의 평화를 얻게 하셨다. 그러므로 중생의 평화라는 것은 중생의 체험을 받는 자에게만 있게되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라면 누구든지 다 숨은 보화 같이 마음의 평화를 보존하고 있을 것을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개인적인 중심평화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니고, 중심 평화가 시작이 되면 세계 평화로 끝을 맺는 것이다. 중심 평화는 인위적인 도덕이나 수양이나 어떤 인간의 화려한 생활로써 이룰 수 없고, 오직 독생자의 승리의 역사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세계평화를 일으킬 이도 예수님 밖에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인위적인 평화를 위하여 영웅적인 행동을 한 것 같이 보이는 일도 있지만, 하나님편에서 보실 때에는 오히려 어리석은 음녀와 같은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붉은 용, 붉은 짐승의 세력을 완전히 없애므로 평화 왕국이 올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붉은 짐승과 통상이니, 협상이니, 평화 공존이니 해 보았던들 이것은 인위적인 평화이므로 인위적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 신자는 인위적인 평화에 끌려서 사상을 빼앗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심판과 평화 왕국을 목적한 다림줄의 진리를 굳게 잡고, 그 진리를 통하여 오는 초인간적인 지혜와 지식과 능력과 권세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평화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일과 완전한 단체를 이루는 일에 목적을 두고 해산의 수고를 다하여 부르짖는 일이 이제부터 더 강하게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위적인 평화가 성립된다고 해서 마음을 놓고 방심적인 태도에서 헛 꿈을 꾸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인본주의적인 인격은 인위적인 평화를 목적하는 것이 원칙이겠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그리스도인이 인위적인 평화를 목적한다는 것은 그 인격 자체를 상실하고 마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서 그리스도의 평화왕국을 목적하고 싸워 나가야만 할 것이다. 아무리 붉은 짐승의 세력이 강하게 일어난다 하여도 우리는 이것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요, 오히려 하나님을 바라볼 일이 된다. 왜냐하면 성경에 평화왕국이 이루어지는 심판 날에는 붉은 짐승을 들어서 환란이 오게 하고,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천사로 보호하고, 붉은 짐승이 두려워서 그 앞에 절을 하고 표를 받는 자는 붉은
짐승과 같이 없애 버린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붉은 짐승과 타협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세계 평화의 왕국을 이룬다는 것이 성경 전체의 종말관이다. 인위적인 평화가 잠깐동안 있다는 것이 성서적이요, 인위적인 평화를 꿈꾸던 사람들이 슬퍼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사33:7~12).
110. 새 것을 좋아하나 새로워지지 못하는 일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낡은 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는 것은 본 성품이라고 본다. 그러나 새로워지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처음에는 무엇을 열심히 시작하지만 결말에 가서는 싫증을 내고 마는 것이 인간들이다. 열심히 시작만 하고 결말은 싫증을 내고 만다면 그 사람의 일생이라는 것은 다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새 것을 좋아하나 새로워지지 못하는 생활에서 어떻게 하여야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이 있다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새로워지는 마음을 받는 체험을 가져야 한다
지금 우리 나라에서 새 나라 새 마을이라는 표어를 가지고 나서는 일도 있지만 먼저 국민의 마음이 새로워지는 운동이 없다면 새 나라 새 마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참된 진리가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사람이라는 것은 동물과 같이 배를 채우는 것으로 새로워질 수 없고, 마음을 채워주는 진리가 있어야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조물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하는 이치를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진리를 깨달을 적에 마음에 새롭게 하는 역사가 오는 것을 체험하게 되고, 몸이 새로워지는 진리를 깨달을 적에 몸에 새롭게 하는 역사가 오는 것을 체험하게 되고, 생활이 새로워지는 진리를 깨달을 적에 생활을 새롭게
하는 역사가 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가 합해질 때에 새 나라도 새 마을도 필연적인 열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진리라는 것은 이론이 아니요, 이루어지는 열매가 있는 것이니 우리는 새 나라 새 마을이 이루어지는 진리 운동이 급선이라고 본다.
2. 새롭게 하시는 이가 누구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새롭게 하는 일은 피조물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조물주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사람이 애써 보았던들 조물주께서 새롭게 해주는 역사가 없다면 그 수고라는 것은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보다도 오히려 원망, 불평, 낙망을 가지게 된다.
유물적 사상을 가지고 아무리 새로운 물건을 만들었다 하여도 그 물건이 사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물건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더 어둡게 만드는 욕심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참된 진리를 따라오는 역사라는 것을 바로 알 때에 물체에 국한된 과학을 초월한 세계에서 오는 새 일의 역사를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가 조물주 하나님의 새 일의 진리를 모른다면 새로운 역사를 받지 못하므로 점점 쇠퇴하여 마른나무와 같이 되므로 아무런 열매를 이 땅에 이룰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새 나라와 새 마을을 이루려면 조물주 하나님의 새 일의 역사를 받는 멸공 진리의 운동이 급선 문제라고 본다. 새 일이라는 것은 악의 세력을 이 땅에서 완전히 없이하고 눈물, 고통, 죽음 없는 시대가 오는 것을 말한다.
111. 사람의 제일 기쁜 일은 수고를 바로 하는데 있다
오늘의 모든 사람들이 수고없이 사는 생활에서 자기의 쾌락을 얻어 보려는 것은 벌써 참된 기쁨을 얻을 만한 사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인격은 벌써 참된 인생의 의무를 할 수 없는 인격이므로 이러한 자들이 많은 나라가 될 때에 그 나라는 자동적으로 쇠퇴해지는 것이요, 이러한 자들이 가정에서부터 모든 일을 게을리 할 때에 그 가정은 자동적으로 비극을 가져오게 된다.
이제 인생의 제일 기쁜 일이라는 것은 수고를 바로 하는데 있다는 진리를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1. 수고를 바로 할 수 있는 사상이 있어야 한다
오늘에 공산사상이라는 것은 근본 자체가 수고를 바로 할 수 없는 사상이다. 왜냐하면 정부가 운영하는 농장이나 공장에 가서 일하면 먹을 것을 준다는 정치에서 그 사상은 아무런 발전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소망의 확실한 것이 사상이 되면 자나깨나 그 소망을 생각하고 이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고를 영광으로 알고 나가는 것이 있을 때에 그 수고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게 된다. 그런데 공산 세계는 국민들이 아무런 소망없는 국민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종교적인 소망도 찾아볼 수 없고, 개인적인 생활 향상의 소망도 찾아볼 수 없는 사회가 되어 전 국민은 소망이 없는 사람으로 한 기계에 불과한 인격이 되므로 그 사람들은 한 정치의 도구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사상을 가질 적에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는데서 기쁘다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세계에서 오는 것을 받는데서 기쁨을 얻는 것은 흥분이나 감정을 초월해서 수고를 기쁨으로 하게 된다.
인생이라는 것은 사람에게서 무엇을 얻는다는 것이 완전한 소망이 될 수 없으므로 그것을 위해서는 수고할 용기가 있지 못하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체험한 자로서 수고를 하는 것은 정욕을 떠난 양심에서 다른 사람을 살려준다는 목적을 두고 수고를 하게 되는 것이니, 이 수고를 통하여서만 완전한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다.
2. 수고를 바로 할 수 있는 단체가 있어야 한다
오늘의 단체라는 것은 수고를 바로 하려고 해도 바로 할 수 없는 단체를 이루게 되는 일이 너무나 많다고 본다. 왜냐하면 각자가 다 자기의 소욕을 채우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지는 단체는 사상, 양심이 바른 사람으로서 그 단체에서 같이 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소위 종교 단체라고 하는 가운데서도 사상 양심이 바른 사람으로서 그 종교 단체가 하는 일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게 되는 때가 왔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고가 헛되지 않게 끝을 바로 맺을 단체가 필요하다. 일한 대로 갚아 주려고 오시는 예수님 앞에 설 수 있는 단체는 수고를 바로 하는 종들이 자동적으로 뭉쳐진 단체라고 본다.
과거에 초대교회는 수고를 바로 할 수 있는 단체가 예루살렘 다락방에서부터 일어나서 세계적인 교회 확장을 가져 왔지만, 오늘의 종교 단체라는 것은 사상이 바른 종으로서 그 단체에서 쫓겨날 수 밖에 없는 단체들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 수고를 바로 할 수 있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오늘에 많은 사람이 하루 하루 사는 생활이 어떻게 하여야 먹고 사느냐 하는 문제가 머리에 꽉차서 밥만 잘 먹여 준다면 어디든지 따라 간다는 정도에까지 이르게 된 현실 사회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이 사회라는 것은 자동적으로 동물에 가까운 생활에 들어가는 사회가 된다.
짐승들이 배만 부르면 좋다고 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이 아무런 종교심도 없고, 애국심도 없고, 도덕심도 없이 먹고 보자는 생활로 들어간다면 이 사회는 자동적으로 공산주의가 승리하는 사회가 될 염려도 없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 있어야 수고를 바로 할 수 있는 생활이 된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생활이 될 때에 한 시간도 헛된 수고를 하지 않고 수고를 바로 하는 생활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 수고는 전체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수고가 될 때에 수고를 바로 하는 자가 받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생활에서 재앙의 날에도 기쁨으로 찬송하는 생활이 있게 될 것이다.
112. 지극히 작은 것을 삼갈 때에 큰 것을 바로 할 수 있는 인격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대 자연을 창조하실 때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빠짐없이 하셨고,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잊지 않으시고 다스리고 계신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큰 공장을 움직이는 것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를 삼가는 기술자에게 달려있고 대자연을 움직이는 것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를 살피고 계시는 조물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움직여지는 것이다. 이제 지극히 작은 것을 삼가는 자가 큰 것을 할 수 있는 인격이 이루어진다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지극히 작은 죄의 생각 하나를 삼가는 자라면 큰 붉은 용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인격을 가지게 된다.
인격이라는 것은 두 가지로 보게 된다. 하나님을 상대하는 인격이 있고 사람을 상대하는 인격이 있다. 인간으로서는 지극히 작은 생각 하나를 바로 가졌는지 가지지 않았는지를 모르고 사람을 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위대하신 창조주로서 사람의 마음에 작은 죄 하나를 아시고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들어 쓰는 큰 인격을 가지려면 지극히 작은 생각 하나라도 삼가는데서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말씀할 때에 먼저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 있다고 한 것은 중심에 자기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만 사모하는 자라야 거룩하고도 영원한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의 신앙 양심에 비추어 경험한 바는 다음과 같다.
지극히 작은 죄의 생각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종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체험했으므로 나는 인간의 도덕을 초월해서 중심성결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경건한 사람 같으나 중심 속에 작은 죄의 생각 하나라도 있다면 하나님과는 아무런 교통을 못한다는 것을 나는 날마다 체험하고 있다.
2. 지극히 작은 말 한마디를 삼가는 자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증거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신이신 동시에 법을 따라 역사 하시는 신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완전 계약서가 되는 말씀을 삼가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입을 들어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과거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확실치 않는 것은 증거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러므로 계시록과 선지서에 대해서는 절대 함부로 말하지 않고 4복음서와 편지서에서만 말씀을 증거 하는데 전력을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계시록과 선지서를 증거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시간을 보내게 될 때에 내가 과거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일에 있어서 함부로 말하지 않았던 것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일이 된 줄로 생각하는 바이다.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 작은 절수 하나라도 분명치 않다면 나는 감히 계시록의 말씀과 선지서의 말씀을 가지고 증거할수가 없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작은 말 한마디라도 하나님 말씀에서 가감되지 않도록 증거할 수 있게 되므로 나는 날마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은총을 받게 된다는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오늘에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있지만, 작은 말한마디를 삼가지 않으므로써 완전한 하나님의 종의 인격을 이루지 못한 자가 너무나 많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3. 지극히 적은 성금 한 푼을 삼가는 자라면 큰 사업을 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업을 사람에게 맡겨서 지극히 적은 성금 한 푼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는 자라면 벌써 도둑으로 인정하게 된다.
나의 체험은 다음과 같다. 내가 지금 큰 수도원 사업을 하게 된 것은 7년간 하나님의 성금에 대하여 동전 한푼도 삼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성산에 들어온 돈을 내 사적으로 소비하는 일이 없이 이 사업을 받들게 된 것은 시작할 때부터 내가 어떤 명예나 권리나 생활의 대책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큰불이 내려와서 나를 불 가운데 앉혀 놓고 하나님께서 명령하기를 너는 “뢰자”라는 이름을 주노니 이 이름을 받아 가지고 변화 성도를 일으키는 수도원 사업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돈이 없는 사람으로서 이 사업을 할 수가 없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순종만 하면 물질까지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단돈 2천원을 가지고 그 날부터 이 사업을 하기 위하여 자수로 수도원 지대를 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실 줄 믿고 성금 한 푼을 삼가는 것 뿐이다.
나는 앞으로 물질의 큰 축복이 우리 수도원에 올 것을 확신하며 내 소원대로 가난한 자를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지금 이 사람은 너무나 무식하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이다.
그러나 무식하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으로서 수도원 사업을 해 나가는 일이나, 아름다운 소식의 월간지 사업을 해 나가는 일이나, 여호와 새일 교단을 움직여 나가는 일이나, 새일 중앙 교회에 300여명의 교인을 다스리고 목회하며 나가는 일은 너무나 짐이 무거운 일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조금도 피곤이 없이 가장 가볍고 명랑하게 일해 나가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이 사람이 훌륭해서가 아니요, 지극히 작은 일에 삼가는 것을 하나님은 보시고 역사 하는
일이라고 믿는 바이다.
113. 가장 지혜로운 자 같으나 어리석은 자
오늘에 인간들은 인간이 하는 일을 다 지혜로운 일로 보기 때문에 그 일에 있어서 미혹을 받게 된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사람의 정신 작용으로 발달된 것을 보고 놀라게 되는 자
과거 정신작용이 발달되지 못한 때에 살던 사람의 생활과 오늘날 정신 작용이 발달된 때에 사는 사람의 생활을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의 차이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인력거를 타고 다니던 것이 오늘에 와서 아폴로를 타고 달나라에 간다는 것도 놀랄 일이요, 소식을 알리기 위하여 역마를 사용하던 것이 오늘에 와서 전화로 가만히 앉아서 전하게 되었다는 것도 놀랄 일이요, 손으로 물건을 만들기 위하여 땀을 흘려가면서 밤을 새우던 것이 오늘에 와서 스위치 하나만 누르면 가만히 앉아서 무슨 물건이든지 만들어져 나온다는 것이 놀랄 일이다. 그리고 이 생활이라는 것은 영리적이며 호화로운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또는 남의 영토를 빼앗기 위하여 단병 접전으로 피를 흘리며 싸우던 전쟁이 약 한시간이면 세계 인류를 한 사람이 죽일 수 있는 전쟁이 있게 된 것은 모든 인간들에게 공포를 주고 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이것이 참된 지혜이며 지식이라고 생각하고, 그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보는 자가 있다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신 작용에 속한 사람으로서 대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신의 역사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고등 동물에 불과한 인격을 가졌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600년전 경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하여 인간 종말에 될 일을 기록하게 하셨고, 그 말씀대로 이 세상이 되어지도록 역사하시는 아래에서 심지어 공산당까지라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의 사람으로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는 도저히 살길이 없는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별 세계까지 깃들이게 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행함 따라 갚아 주시는 심판을 나리시되 영적으로 움직이던 야곱은 불이 되게 하시고 세상에 인간 지혜와 지식으로 움직이던 에돔은 초개가 되게 하므로 불에 살라지게 될 것을 말씀했기 때문이다(옵1:18 이하).
2. 인간 향락에 도취가 되어 하나님께 대한 관심이 없는 자
인간이 볼 때에 지금 이 때가 얼마든지 호화롭게 살수 있는 때이다. 그러므로 황금만능을 자랑할 때라고 본다. 돈만 있으면 현 세상을 천국이라고 할만큼 화려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이러한 자를 보실 때에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으로 여기시는 것이다.
지금 완전한 지혜를 받은 자라면 세상 향락에 도취가 될 수 없고 오히려 그 생활을 부끄럽게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시기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때에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쉬지 않고 인격 무장을 갖추는데 전력을 두어야할 것이다.
화려한 바벨론이 하루아침에 불탈 때에 할렐루야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남은 자가 되어 새 시대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인격을 무장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자의 할 일이다. 이 인격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완전 역사를 받아야만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변화 성결, 지혜 지식 능력 권세의 역사를 받은 자로서 죄와 죽음과는 상관이 없는 완전 변화체를 이루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만 지혜로운 자라고 할 수 있다. 오늘에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 인격을 무장하는 일에 전력을 두지 않고 세상에 끌리는 생활이 있다면 누구보다도 가련한 인간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망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3. 종교적인 정통 관념에 굳어져 새로움이 없는 자
오늘에 소위 정통 신학이라는 학설에 굳어진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학설이 제일인 줄 알고 있지만, 이것은 너무나 어리석고도 유치한 사람의 하나라고 본다. 왜냐하면 과거에 정통이 그대로 인간 종말에 정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통적인 신앙을 가졌다면 인간 종말에 이 몸이 살아서 새 시대에 들어가는 정통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만 잘 믿으면 성경 해석이라는 것은 각각 다르게 해도 무방하다고 한다면 이것이 가장 지혜로운 자 같으나 실지로 가장 어리석은 자이다. 이미 이루어진 말씀이 글자 그대로 이루어졌다면 앞으로 이루어질 말씀도 글자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과거 사도들이 초림의 주가 오신 것은 선지 예언이 성경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성신의 계시를 받아서 알게될 때에 소위 정통이라는 바리새인들이 이단이라고 정죄를 하다가 망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만일 오늘에 와서 정통이라고 하는 관념에 굳어진 사람들이 새 일의 진리를 이단시한다면 망하게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 새 일이라는 것은 영혼구원의 역사가 아니고, 택한 자를 재앙의 날에서 그 몸까지 구원하여 새 땅의 축복을 받게 하는 역사이다(사42:9, 43:19).
114. 노동을 등한시하는 국민이 나라를 망친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큰 병은 노동을 등한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농민들이 농지를 팔아서까지 자식을 공부시켜서라도 취직을 시켜야 되겠다는 관념이라는 것은 나라를 부강케 하는 일에 있어서 너무나 큰 병이라고 본다.
사람이라는 것은 어느 직장에 취직하는 것으로 목적이 다 이루어진 것이 되고 만다면 자동적으로 나라의 생산력은 약해질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농민들이 이런 병에 걸린 원인은 다음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식민 정책 하에서 너무나 멸시를 받고 노동을 하던 것을 고질로 알았던 부모들이 자기 소원이 좀 일하지 않고 먹고사는 자식을 만들어 보겠다는 것에서 생긴 것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노래를 부를 때에 “놀자 놀자 젊어서 놀자, 늙어지면 못 논다” 하는 것은 타락한 민족의 부끄러운 노래라고 본다.
근본이 바로 되려면 “일하자 일하자 젊어서 일하자, 늙어지면 일 못한다” 하는 국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조 5백년 동안 내려 온 것은 소위 양반이라는 사람들이 상놈을 부려먹고, 36년간 왜정 시대에 악독한 사람들이 한국 국민을 너무나 억압을 하고 부려먹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하기가 싫은 일을 하던 습관이 오늘날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농민들이 자식을 열심히 공부시킨다는 것은 정말로 좋은 일이지만, 그 목적이 일하지 않고 놀면서 먹겠다는 정신이라면 그 공부란 것은 훌륭한 국민을 양성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훌륭한 인격이 이루어질 것에 많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농민들이 일을 싫어하는 원인은 조상들이 일하기 싫어하는데서 앞으로 어떻게 하여야 국민들의 생활이 잘살 수 있다는 것에 머리를 쓰지 않고, 그날 그날에 먹고 지내면 그것으로 만족하게 알고 어떻게 하든지 일하지 않고라도 먹고 지내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나라가 이렇게 된 것은 일은 바로 할 수 있는 인격을 길러내는 일에 너무나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억지로 일하는 국민의 생활에서 이러한 가난한 나라를 이루게 된 것이다. 우리 나라가 조상 적부터 바로 해 내려왔다면 남의 나라보다도 모든 것이 다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위치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북방에는 얼마든지 곡창이라고 할 수 있는 대륙을 놓고 동해, 남해, 서해로는 얼마든지 수산을 낼 수 있고, 산이 높은 만큼 얼마든지 전기를 낼 수 있고, 수로가 편리한 만큼 얼마든지 외국과 무역을 할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과 물, 곧 자연의 경치가 아름답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네 철의 기후가 적합하므로 무엇이든지 만족히 살 수 있는 나라가 우리 나라이다. 그러므로 산명수려(山明水麗)하고 사시 기후가 적합해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나라가 남의 나라보다도 못사는 이유를 알아서 전 국민이 자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노동을 부끄러워하는 국민이 된 것이 첫째 원인이라고 본다.
115. 인격을 따르는 것 보다도 인격을 만들어주는 하나님께 순종하자
인생이라는 것은 인격을 숭배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볼 때에 자기보다도 인격이 훌륭해 보이는 사람 앞에는 자동적으로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예를 든다면 큰 나무가 생기면 작은 나무는 그 나무 그늘 아래서 자라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고 큰 짐승이 나타나면 작은 짐승이 그 앞에서 떨고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자기보다 큰 인격이 나타날 때에 그 사람을 숭배하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나 인격을 따르는 사람은 그 인격 앞에 눌림을 받을 것 뿐이로되 인격을 완전히 만들어 주는 하나님을 따라갈 때에 다음과 같은 향상이 있다.
1. 행할 수 있는 인격 (요14:12)
하나님께서는 무소불능의 신이시지만 언제나 당신을 따르는 사람에게 그 능력을 주어서 역사 하기를 기뻐하는 신이시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은 완전한 사람을 찾는 것보다도 완전한 사람을 만들어 놓기 위한 목적에서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킨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완전한 것을 인생에게 주고자 하여도 그것을 받을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완전한 것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
그러므로 완전한 인격을 가진 아들을 통하여 완전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고 완전한 인격을 가진 아들을 통하여 완전한 역사를 누구든지 받게 한 것이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세계적인 대 종교가 된 것은 완전한 인격을 만들어 주는 은혜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2. 이길 수 있는 인격 (사41:25)
하나님께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 놓을 때에 자신이 있다는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다. 승리는 오직 하나님께 있다고 믿는 사람을 들어 쓸 때에 아무런 환란이 없게 하는 것이 아니요, 환란이 있게 하시되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난국을 당할 때에 낙심하지 않고 담대히 나가는 자에게 넉넉히 이기도록 하시는 것이다.
오늘에 인격을 따르는 사람들은 공산당을 이기기가 어렵지만 하나님을 따르는 인격으로는 공산당을 넉넉히 이길 수가 있다. 세계 통일의 완전 승리를 이루는 인격은 하나님을 따르는 자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격을 따르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따르는 인격을 가져야 한다.
3. 살릴 수 있는 인격 (행2:37~41)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대중을 살리는 역사를 하실 때에 아무리 실수가 있다 하여도 베드로를 들어서 대중을 살렸던 것이다. 우리가 남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만을 증거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살리고자 하는 사람을 우리가 살리는 일을 할 수가 있다. 가장 큰 일은 남을 죽이는 일이 아니요, 남을 살리는 일이다. 누구든지 일편단심 남을 살린다는 마음이 뜨거워 있는 자라면 남을 살릴 수 있는 사람으로 쓰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격을 따르는 인격이 되지 말고 하나님을 따르는 인격이 되어야 한다.
116. 큰 것을 기대말고 작은 것을 잃지 말라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큰 것을 기대하는 허영심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작은 것을 잃지 않는데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고기를 잡는 사람이 큰 고기를 잡아 물에다 놓아주는 것과 같다. 그리고 구멍이 난 포대에 돈을 담는 자와 같이 모든 것이 다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대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다 작은 데서 큰 것을 이루도록 하셨다. 식물도 작은 씨를 심어서 큰 것을 이루게 하셨고, 동물도 작은 것으로 시작되어 큰 것을 이루게 하셨으니 사람이 큰 것을 얻고자 할 때에 작은 것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이제 큰 것을 얻는 것은 작은 것을 잃지 않는데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작은 일에 충성하므로 영원한 왕권이 되는 것이다.
어떠한 종이 작은 소자 하나를 사랑할 줄 모른다면 대중을 거느릴 인격을 상실하는 것이요, 작은 말 한마디를 잘못하여 신용을 잃는다면 아무리 크게 소리를 질러도 그 소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 누구든지 소자 하나에서 행하는 일이 즉 주께서 갚아 줄 일이 되고 골방 속에서 한 마디 한 말이 심판의 대지가 된다고 하신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자라면 크고 두려운 날이 올 때에 남은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2. 적은 시간을 아끼므로 영원한 왕국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적은 시간을 아끼지 않고 허송하는 자라면 많은 시간을 허송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적은 시간을 아껴서 바로 할 때에 영원한 영광을 이루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지극히 적은 시간을 다투어 싸워 나가는 열심이 있어야 한다.
열심이라는 것은 허영의 열심도 있고 진리의 열심도 있는데 이 진리의 열심이라는 것은 완전한 지식을 따라 살 때에 적은 시간을 가치있게 이용하는 것으로 큰 것을 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 받게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고 있는 시간에 자지 않고 기도를 한다든지 다른 사람이 쉬는 시간에 쉬지 않고 진리를 상고한다든지 다른 사람이 오락하는 시간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시간으로 바뀌어 진다면 그 생활은 전부 열매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완전한 열매라는 것은 적은 시간을 허송하지 않는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3. 적은 물질을 바로 사용하므로 큰 보화를 상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질이라는 것은 많으므로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아니요, 적은 물질이라도 바로 사용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본다. 아무리 많은 물질이라도 바로 사용을 못하면 큰 화가 되는 것이요, 적은 물질이라도 바로 사용하면 큰 축복이 되는 것이다. 물질의 자체가 가치있는 것보다도 물질을 바로 사용하므로만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예를 든다면 아무리 좋은 약이라 하여도 그 약이 잘못 사용되어 사람을 죽이는 화를 가져올 수 있고 아무리 적은 냉수 한 그릇이라도 바로 사용되어 사람을 살리는 열매가 될 수도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말씀 한 절을 잘못 전하므로 큰 화를 가져올 수도 있고 말씀 한 절을 바로 전하므로 큰 산이라도 옮길 수 있는 역사가 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큰 것을 기대하는 것보다는 작은 것을 잃지 않는 일을 먼저 해야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17. 모든 일에 재미를 얻고자 하는 것 보다도 수고를 달게 해야 된다
인간이라는 것은 재미를 얻고자 하는 것이 본능이라고 본다. 그러나 참된 재미를 맛보지 못할 때에 공연히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수고를 달게 하지 않고 먼저 재미부터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참된 재미를 맛보지 못한 자는 발전보다도 일을 하다가 타락의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참된 재미를 얻는 생활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1. 양심적인 수고가 있어야 한다.
누구든지 양심적인 수고를 하는 자라면 참된 기쁨을 주고 평화를 주고 새로운 힘을 주시므로 수고를 하지 않는 자 보다도 더 재미가 있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양심적인 수고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합당한 수고를 하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를 나리시므로 수고를 하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2. 진리를 위한 수고가 있어야 한다.
사람이 참된 진리를 위하여 수고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얻게 되는 인격이 아니요 하늘에서부터 오는 인격이다. 그러므로 이 인격을 얻는 일은 인간 노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로만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행하시는 일이니 우리가 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말씀대로 먼저 역사하는 일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인격이다. 사도 바울이 누구보다도 진리를 위하여 더 많이 수고하였던 것은 주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지만 주님께서 바울을 찾아오셔서 부르시므로 다른 사람보다도 주님의 사랑을 더 깨닫고 수고를 영광으로 알고 나갔기 때문이다.
3. 희생적인 수고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희생적이 수고가 있는 다음에 가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재미있게 살게 하기 위하여 간교한 뱀을 내어서 꾀어 보셨던 것이다. 이것은 독생자의 희생적인 수고로써 간교한 뱀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부여되므로 남을 살리기 위하여 희생적인 수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방법이다.
아무리 남을 희생시켰던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능력을 받게 될 때에 남을 살리기 위하여 희생적인 수고를 하게 되므로 최대의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수고로써 재미있는 생활을 하게 되는 자는 기쁨의 세계를 기업으로 받게 된다.
118. 인간 생활의 진보는 받는 데 있다
인간이라는 것은 받아야 할 의무가 있고 조물주는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예를 든다면 어머니는 자녀를 낳았으므로 어린이에게 주어야 할 책임이 있고 어린이는 받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선생님은 가르쳐 주어야 할 책임이 있고 학생들은 받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어야 할 책임이 있고 우리는 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 받을 것을 받지도 못하고 주의 일을 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 보다는 주실 책임이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노엽게 하는 일이 된다.
이제 받는 자에게만 진보적인 생활이 있게 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1. 새 생명을 받는 자에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을 받는 이치는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에게 주겠다는 것을 언약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받는 것이 있으므로 생명의 종교라고 한다. 받아야 할 인생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자를 바로 알아 믿음으로 받는 것이 참된 종교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받는 것이 없다면 아무런 열매가 없는 것이로되 하나님을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받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진보적인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에 기독교가 아무리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한다 하여도 받는 것이 없다면 그 예배와 기도는 자동적으로 외식이 되므로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믿음이라고 보게 된다. 참된 종교 신앙에는 항상 받는 것이 있으므로 진보적인 인격과 생활을 가지게 되어 비록 겨자씨 같이 작은 것 같으나 큰 나무를 이루듯이 진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새 생명을 줄 수 있는 신앙의 대상을 이루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믿고 사는 생활에는 항상 새로운 생명의 은혜가 흘러오는 체험을 받게 되므로 십자가만 자랑할 수 있는 담대한 힘을 받게 되는 것이다.
2. 새로운 지식을 받는 자에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지식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이라는 것은 인간이 물체를 바로 사용하는 지식도 있고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는 그 경륜을 바로 알아 하늘에서 오는 것을 받는 지식도 있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여도 하나님의 경륜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다면 정상적인 진보를 갖지 못하고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만다.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바로 아는 지식이 발전할 때에 그 지식을 따라오는 새로운 힘을 계속적으로 받게 되므로 백전백승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과학적 지식이 발전 했다 하여도 하나님의 경륜을 아는 지식이 없다면 한 기계에 속한 한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인생이 기계를 사용하여 생산을 낸다 하여도 하나님의 경륜을 아는 지식이 발전됨에 따라서 영원한 영생의 나라에 기업으로 얻는 일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
3. 새로운 생활을 받는 자에게 진보가 있는 것이다.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이다. 기도를 할 수록 새로워지고 성경을 볼 수록 새로워지고 찬송을 부를수록 새로워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만일 어떤 신자가 새로워지는 것이 없다면 기도와 성경과 찬송을 하는 것이 하나님과 하등 관계가 없는 탈선된 노선에 있는 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신앙을 가지게 될 때에 날마다 새로워지는 생활이 있게 되어 참된 미의 세계를 이루는 생활에서 천국을 바라보는 것보다도 천국에서 오는 것을 먹고 마시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날마다 받는 것이 있으므로만 참된 진리 안에서 진보하는 생활을 하므로 아름다운 새 시대를 이루는 단체를 가지게 된다.
119. 높은 것 바라지 말고 낮은 데서 바로 살자
사람이라는 것은 남보다 높아지려는 것이 본질이다. 그러나 높아지는 자가 심히 적은 것은 무슨 원인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극히 낮은 자리에서 바로 할 때에 높아지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므로 되는 것이다.
이제 낮은 데서 바로 사는 생활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작은 노동을 바로 하는 데서
어떤 농부가 곡식 한 포기를 바로 가꾼다면 그것은 전 국민을 살리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있는 것을 소비하는 일 보다도 없는데서 있게 하는 일을 바로 할 때에 조물주 하나님과 연합된 자가 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있는 것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요, 없는 것을 있게 하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작은 곡식 한 포기를 바로 가꾸는 사람은 대 자연을 지배하시는 하나님과 같이 일할 수 있는 일이다. 만일 우리 나라 국민이 곡식을 가꾸는데 전력을 두지 않고 소비하는 데만 전력을 둔다면 날마다 쇠퇴해 가는 나라가 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의 교회 종들이 작은 양 하나를 찾아서 바로 기르는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면 주님의 역사가 나리지 않으므로 점점 약해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큰 역사라는 것은 소자 하나라도 바로 가르쳐 주는 것이다. 어떠한 종이 대중을 이끌어 보려는 목적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한다 하여도 한 사람의 심령을 소성시키는 일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면 작은 열매도 맺지 못하는 일이 되고 만다. 누구든지 지극히 작은 소자라도 바로 가르치려고 하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큰 일을 할 수 있는 인격이 이루어지므로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는 열매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을 구원하시고 이것이 나의 양식이라고 하셨다.
2. 작은 골방의 생활을 바로 하는 데서
주님께서 골방에서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을 가르친 것이다. 아무리 대중이 모여서 떠든다 하여도 하나님과 교통이 없다면 무효가 될 것이요, 은밀한 골방에 홀로 앉아 소리 없이 기도하여도 하나님과 교통이 있다면 큰 열매를 응답으로 받게 된다.
히스기야의 하루 밤 기도에 북방 앗수르가 무너졌고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하루 밤 기도에 마귀의 세력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오늘에 많은 교회가 있지만 골방 속에 숨은 성도의 기도가 최후에 완전 승리를 이루게 될 것이다.
3. 적은 물질을 바로 쓰는 데서
하나님께서 사렙다 과부의 떡 한 개를 축복할 때에 큰 구원이 그 가정에 왔고 주님께서 보리 떡 다섯 개를 놓고 축복할 때에 대중을 살리는 일이 되었다. 오늘에 많은 종들이 거액을 들어서 성전을 짓고 있지만 축복이 내리느냐가 문제이다. 우리는 이 때에 적은 물질을 바쳐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면 이것으로 말미암아 큰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가 적은 물질을 가지고 희생할 때에 큰 열매가 되게 하시는 것은 그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120. 진리를 이용하는 자는 악한 사람이요,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자는 의로운 사람이다
오늘에 많은 사람이 성경을 들고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이용하는 사람이냐, 성경의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싸우는 사람이냐 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될 것이다.
오늘에 적 그리스도의 세력을 높이 올라가도록 하는 것은 성경을 이용하는 자는 없이하고 성경의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싸우는 자로 남은 자가 되게 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새로운 시대를 이루기 위한 방법이다. 우리는 성경을 들고 성경의 진리를 위하여 싸워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성경을 들고 싸워야 할 조건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무신론 사상을 없애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
우리가 무신론자와 싸우려면 우리 자체가 성경대로 이루어지는 신의 역사를 받아야만 한다. 오늘날 성경을 들고 교회에 다니는 자가 많지만, 성경대로 이루어지는 역사를 받은 자는 심히 적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에 교회가 성경대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역사가 없다면 무신론자와 싸울 용기조차 낼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우리가 무신론 공산주의를 말살시키는 것은 성경대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새로이 나타나되 이 시대의 비밀의 진리를 바로 증거하는
데서 일어나게 된다.
2. 과학자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
오늘에 무신론 과학자들은 과학이 발달되므로 성경은 아무런 가치가 없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되므로써 성경을 바로 알 수 있는 때가 왔다고 본다.
과학이 성경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과학 발전으로 인류 전멸이라는 전쟁이 일어나므로 세계 인류가 불에 사름을 당할 것을 가르쳤다. 성경이 과학을 따라 간다는 것 보다도 과학 발전이 성경의 예언을 이루어 놓는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되 무신론 공산 정치는 분명히 심판의 대상자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싸워야 할 것이다.
3. 협상주의를 없애기 위하여 싸워야 한다.
모든 성경에 인류 종말에 망하는 땅을 음녀 세상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정치와 협상을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가 음녀화 될 우려가 많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협상적인 거짓선지의 미혹을 성경의 진리로 변론하여 말살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싸우는 자라야 의로운 종을 구원하시러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다. 우리 의라는 것은 행하므로써 있는것이 아니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싸우는 것 밖에는 있을 수 없다. 인류 종말에 붉은 짐승과 거짓 선지를 대항해서 성경의 진리를 들고 끝까지 변론으로 싸우는 사람만을 보호하고 그 밖에 사람은 다 심판해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121. 영광을 얻고자 하는 자 보다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자 하는 자가 되자
영광을 얻고자 하는 것은 어느 사람이나 다 가지고 있지만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자 하는 자가 심히 적은 세상이 되고 보니 자동적으로 멸망의 도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영광을 받고자 할 때에 인생을 먼저 축복하신다. 인간 자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만한 것이 없으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할 때에 우리가 무엇을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축복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고 보니 영광을 얻고자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되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자 하는 자는 축복을 받게 된다.
이제 영광을 얻고자 하는 자의 인격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자 하는 자의 인격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영광을 얻고자 하는 자의 인격
누구든지 영광을 얻고자 할 때에 그 인격은 올라갈 수 없이 떨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조물주 하나님과에 대적이 되는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오직 영광을 받을 일을 하시는 이는 조물주 하나님밖에는 없다. 그런데 조물주 하나님의 역사 아래서 사는 인생이 자기 스스로 영광을 받아 보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 예를 든다면 꽃병에 꽂혀 있는 꽃이 잠깐동안은 꽃도 피고 잎이 나올 수 있지만 열매는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조물주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가 홀로 영광을 받아 보려고 하는 자는 잠깐 동안은 활동할 수 있으나 결말은 아무런 열매없는 인격으로 쓰러지고 마는 것이다. 이 세상이 아무런 열매가 없는 세상으로 끝을 맺고 마는 것은 전부가 자기 영광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원수로 아시고 심판하시는 것이다(계18:7).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여도 자기 영광을 목적한 자는 신앙 생활 전체가 다 저주받을 행동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망치는 도적의 생활이 되기 때문이다(요5:44).
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인격
누구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마음이 불타는 자는 그 마음이 하나님과 연합되었으므로 마음에서부터 초인간적인 역사를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요, 중심 속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자라면 그 중심 속에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하여 역사하신다.
사람의 마음은 그릇과 같은 것이니 자기가 영광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역사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의 역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중심에서부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할 때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역사가 오는 것이다.
우리의 인격이라는 것은 내 마음에 하나님의 역사가 오느냐, 사단의 역사가 오느냐 하는데서 차이를 가지게 된다. 인간이 볼 때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사람이 약하게 보이지만 오히려 강한 자가 되는 것이요, 인간이 볼 때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사람이 어리석게 보이지만 오히려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그 사람에게 오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라면 인간의 물질계를 초월한 인격이 마음에서부터 시작된 자라고 본다. 초인간적인 마음이 있게 되므로 그 인격은 전부가 초인간적인 인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느냐, 인간을 초월했느냐에 따라서 차이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영광을 얻고자 하는 자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자 하는 자의 인격 차이점은 하늘과 땅의 차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122. 일을 한다는 열심보다는 일을 바로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열심이라는 것이 자동적으로 있게 된다. 죄를 짓는 자도 열심이 있고 의를 행하는 자도 열심이 있다. 이제 우리는 일을 한다는 열심보다는 그 일을 바로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1. 일할 수 있는 힘의 원동력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일꾼을 부릴 때에 밥을 많이 먹으라고 권하면서 밥이 일을 한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 때에 그 일하는 사람은 주인이 주는 밥을 먹지 않고 보자기에 싸서 나무에 높이 달아 놓았다. 일꾼은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들어 누워서 그 밥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에 주인이 와서 일꾼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일은 하지 않고 가만히 드러누워 있느냐고 하였다. 일꾼이 대답하기를 주인님이 밥이 일한다고 하기에 밥이 일하나 보려고 밥을 싸서 높이 달아
놓았다고 한다면 그 주인은 대답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일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에게 밥이라는 것은 일할 수 있도록 효과를 주게 된다. 우리는 사람이 일할 수 있는 힘은 밥에 있지 않고 그 힘이 대자연을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오늘에 인간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지만 밥을 위해서 일하는 열심이 된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일할 수 있는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한다는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힘을 구할 때에 초자연적인 힘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이 힘을 받은 자로서 열심히 일 한다면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열심을 내지 않아도 필연적인 결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아무리 인간들이 생산 확장을 위하여 열심으로 일한다 하여도 초인간적인 힘의 원동력이 어디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그 열심이라는 것은 오히려 후회 막심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다.
2. 일을 하고 난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열심으로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그 길로 가면 마지막이 어떻게 되는 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 열심은 큰 불행을 가져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해서 종말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합법적으로 아는 지식이 있어야 된다.
오늘날 인간들은 무슨 일이든지 우선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면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우는 일까지 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은 짐승이 배가 고플 때에 금시 배를 채우기 위하여 싸우는 것과 같다. 지금은 자기에게 손해가 있다 하여도 손해를 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이며, 지금은 자기에게 유익이 있다 하여도 유익을 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지식이 없다면 일한다는 열심만 가지고는 아무런 가치를 발휘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우리가 이 지식을 완전히 가지게 되려면 하나님의 지식이 풍성해야만 되는 것이다. 가장 비극은 종교인들이 열심이 있다 하여도 진리의 완전한 지식이 없이 열심으로 기도하고 열심으로 연보하고 열심으로 봉사하다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쓰러지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말기에 모든 선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경고의 말씀을 주실 때에 너희의 천천의 수양과 하수 같은 기름이 필요가 없고, 아무리 아들을 희생했다 하여도 필요가 없고, 오직 완전한 지혜를 받아야만 된다고 하셨던 것이다. 종교의 열심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진리의 완전한 지식이 없이는 아무런 필요가 없다.
3. 큰 것을 바라고 열심을 내는 것보다는 작은 일을 바로 할 수 있는 지식을 먼저 찾아야 한다.
예를 든다면 아무리 상공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라도 가장 작은 못 하나가 잘못 되면 비행기는 추락되어 파괴되는 것과 같다.
우리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가장 작은 절수 하나가 잘못될 때에 그 신앙은 독수리같이 올라갈 힘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초인간적인 힘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법에 따라서 역사하시는 진리의 신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법에서 잘못된 것을 불법으로 인정하시기 때문에, 아무리 선지자 노릇을 하고 권능을 행하고 이적을 행한 사람이라 하여도 말씀대로 심판이 내리는 그 날에 도저히 설 수가 없는 것이다.
죄를 용서하는 때에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법을 목적하고 역사했지만 말씀대로 재앙 심판이 올 때에는 말씀에 의하여 심판을 내리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일했다 하여도 조금이라도 진리의 법에서 탈선이 있는 자는 불법자로 인정하게 되므로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을 한다는 열심보다도 그 일을 바로 아는 지식을 성경에서 바로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식을 따라 열심이 온다는 것은 열매가 있을 것이로되, 열심을 따라 피동을 받는다는 것은 아무런 효과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123. 인생의 걸어가는 길은 자력에서보다도 인도자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실 때에 자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게 낸 것이 아니요, 반드시 인도자를 따라서 일할 수 있게 낸 것이다. 우리가 내일의 일을 모르는 인생이 된 것은 불행이 아니요, 오히려 행복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다 자기 앞길을 내다본다면 이 사회를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라는 것은 인도자가 있어서 그를 중심한 단체가 되어야만 아름다운 사회를 누릴 수가 있다. 오늘날 인간들이 너무나 교만하여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자기 고집과 자기 주관을 내세우기 때문에 혼란한 사회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이라도 모든 인간들이 자기 자력으로는 무엇을 할 수 없다는 미약을 깨닫고 나를 인도해 주시옵소서 하는 겸손으로 머리를 숙여서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가 누구를 따라가려고 찾지 않아도 참되신 신의 인도가 같이 하게 될 것이다. 만일 사람 스스로가 어떤 인도자를 바로 찾아서 따라간다 하여도 질서를 이룰 수 없고, 겸손히 자기 부족을 깨닫는 사람을 찾아 인도해 주는 참신이 있으므로써만 하나가 되는 단체를 이룰 수 있다.
인간이 육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는 가운데 역사하는 참된 신의 역사는 어떠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겸손히 자기의 부족을 깨닫는 자이다. 나를 참으로 인도할 이는 어떤 사람이 아니요, 무소불능의 신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고요히 머리 숙여 생각하는 정도에 사람이라면 어떠한 신이 참되신 신이라는 것을 체험으로 알게 된다.
완전이라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찾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조물주 하나님께서 겸손히 부족을 깨닫는 사람을 살펴보시고 역사하는데 있는 것이다. 이제 인간 자력이라는 것은 무엇에 필요하며, 참되신 신의 인도는 무엇에 필요하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인간 자력의 필요성
하나님께서 창조한 자연계 속에서 정신 작용을 바로 움직여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정신을 차려 깊이 생각을 해가면서 힘을 기울이고 정성을 기울이고 정신을 집중시켜 하는 것은 인간 자력에 있다고 본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서 무엇이 잘 되기만 바란다면 어리석은 사람의 하나라고 본다.
2. 참된 신의 인도의 필요성
하나님께서는 정신을 차리고,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애쓰는 사람을 도와주시며 인도해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신의 역사라는 것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하는 일은 마귀의 역사요, 정신이 맑아지게 만들어서 정신을 차리게 하고 힘써 일해도 피곤치 않게 해 주시면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능력으로 역사해 주시는 이가 즉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라는 것은 사람이 할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데 있지 않고, 사람이 할 일을 다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동시에 인간의 생각이나 기능으로 할 수 없는 자리에 들어가도록 하신다. 그러므로 신의 역사라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기술이나 인간의 힘을 초월해서 있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신의 인도가 없이는 끝을 바로 맺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동물세계에서 끝을 맺는 것이 아니요, 신의 품안에 들어가서만 참된 기쁨이나 평화나 모든 완전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동물은 신의 품안에 들어갈 자격이 없지만 신의 품안으로 들어갈 자격이 있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력만을 가지고 살아보려는 것은 결국에는 다 허사가 되고 만다.
사람이라는 것은 겸손히 신의 인도를 따라 가는데서만 인생의 가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가치라는 것은 참되신 신의 인도를 따라갈 수 있는 인격이 있으므로 이룰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생은 참되신 신의 인도를 따라가므로써만 그 길에 결말을 바로 가지게 되는 것이다.
124. 악을 이기는 자는 악한 일에 동참치 않는 자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악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인생이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그 악한 일에 동참치 않는 일 밖에는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경고의 말씀을 하실 때에 악한 자와 타협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심판의 대상자가 악의 세력이므로 악한 자와 타협한다는 것은 악한 자가 망할 때에 같이 망할 일이기 때문이다.
악의 근본은 마귀요, 의의 근본은 하나님이시니 의를 위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악한 일에 동참하는 것을 음녀적인 행동으로 보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로운 일을 위하여 싸워야 할 사람이 의로운 일과 악한 일을 동등하게 여기는 타협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 편이나 마귀 편을 동등하게 아는 일이므로 의로운 심판이 내릴 때에 악과 의를 동등시하는 사람은 반드시 망하게 된다.
오늘에 와서 악의 사상과 의의 사상을 구별하지 않고 동등권을 주어서 평화 통일이니, 민족 운동이니 한다는 것은 벌써 악의 사상에게 먹힘을 당하는 과정으로 들어가는 일이라고 본다. 쓴 물과 단물을 한 그릇에 넣어 섞는다면 단물이 쓰게 될 것이며, 흰 페인트와 검은 페인트를 한 그릇에 넣어 섞는다면 흰 페인트가 검게 될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이와 같이 언제든지 의로운 일을 위하여 싸워야 할 사람이 악한 일에 동참하게 되면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일이 있다 하여도 선과 악을 동등시하는 일에는 보호하실 수 없는 것이요, 옳은 일은 옳다고 하고 불의한 일은 불의하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불의한 일을 없애기 위하여 싸워 나가는 일에만 보호의 역사를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세상에서 같이 살도록 하시지만 선한 자를 돕기 위하여 역사하시는 신이시다. 이 세상에서 악한 자의 세력을 없애지 않고 자유로운 권세를 준 것은 끝까지 악의 세력과 타협하지 않고 싸워 나가는 사람을 충성되다 진실하다 인정하시고 축복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는 사람을 남은 자가 되게 하고, 악의 세력을 이 땅에서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것을 의로운 심판이라는 것이다.
우리 나라가 근본이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하는 백의민족인데, 민족운동을 하려면 백의민족의 사상을 원칙으로 하면서 운동을 하여야만 될 것이다. 지금 우리 민족은 남의 나라가 싸운다고 해서 그 일에 끌려 자기 민족을 죽이는 일을 해 내려온 가련한 민족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큰 나라가 싸울 때에는 제 민족끼리 이유도 없이 싸우다가 큰 나라가 협상한다고 해서 무조건 협상한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 본다면 허수아비가 바람에 놀다가 바람이 잠잠하니
가만히 있는 것과 같은 격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 백의민족은 예의 도덕에 도취가 되어 한번도 남의 영토를 침범한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도덕보다도 좀더 발전해서 양심과 사상으로 움직이되, 진리에 적합한 사상과 진리에 적합한 양심으로 움직이는 민족이 될 때에 진리를 따라 판결을 내리시는 하나님 앞에 큰 축복을 받는 민족이 될 것이 분명하다.
악의 세력이 무서워서 평화라는 말을 가져오는 것보다는 악의 세력을 심판하실 하나님과 평화 하는 것을 먼저 하는 것이 진리의 사상 양심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가 악의 세력을 용납하면서 소위 사랑이라는 간판을 붙인다면 이 사랑이라는 것은 절대로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것은 죄악을 추호도 용납할 수가 없다는데서 죄를 위하여 죽은 것인데, 죄악의 세력을 용납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십자가를 대적하는
음녀적인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덕을 위한 도덕보다도 진리를 위한 사상 양심에서 진리를 위한 도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도덕을 위한 도덕은 생명의 역사가 없어도 진리를 위한 도덕은 생명의 역사가 있는 도덕이 된다. 악을 완전히 이기게 하는 일은 심판으로 되는 것이니, 우리의 할 일은 악한 일에 동참하지 않고 심판이 오는 날까지 많은 사람을 인도해 주는 일을 하되 악에 빠지지 않도록 깨우쳐 주고 가르쳐 주는 동시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을 하는데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125. 평화라는 것은 진리를 떠나 있을 수 없다
이날까지에 평화를 부르짖는 사신들이 분주히 왕래하는 일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진리를 중심한 평화 운동이 아니고는 그 속에 기만적인 정책이 흘러들어 평화를 이용하여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일이 너무나 많다고 본다. 인간 머리 속에 소위 간사한 방침을 연구할 수 있는 것이 특별히 있는 것은 동물의 세계와는 다르다. 동물이라는 것은 그 머리 속에 간사한 방침을 연구할 만한 것이 없는 미물이다. 그러나 사람은 가장 머리가 좋다는 사람일수록 남이
생각지 못하는 기만적인 정책을 연구해 내는 일이 있다.
레닌 전집의 골자는 기만적인 정책을 어느 책보다도 잘 써놓은 것이 장점이다. 왜냐하면 진리를 대적하는 레닌은 간교한 사단의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영감이라는 것도 진리적인 영감이 있으며, 기만적인 영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만적인 영감은 붉은 용인 옛 뱀 즉 사단이요, 마귀의 감화이다.
창3:1을 읽어보면 뱀은 가장 간교한 자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와가 가장 간교한 뱀과 싸우지 않고 평화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볼 때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벌써 사단을 통하여 오는 영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단의 영감이라는 것은 사람으로서 감당하지 못할 만한 욕을 주는 영감이라고 본다. 언제나 가장 간교한 마귀의 역사라는 것은 부드러운 말을 사용하여 사람의 마음을 이끌되 하나님과는 멀어지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나게 하는 것이며, 의혹적인 영감을 넣어 주어서 사람의 마음을 조급하게 하는 것이며, 무엇이나 쉽게 될 것 같이 생각이 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과만 평화를 누리는 사람으로 한 단체를 이루어 영원한 평화의 왕국을 이루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누가 하나님과만 평화를 누리나 보기 위해서 가장 간교한 뱀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평화 하는 일을 방해하게 해서 마귀와 화평을 누리는 마음이 생기도록 꾀어 보는 역사를 하게 하시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아무리 마귀가 꾀어도 끝까지 하나님과만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 절개 있게 나가는 자를 합당한 자로
인정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로 가게 하는 것이요, 그밖에 마귀와 평화를 누리고자 하는 자는 마귀가 있는 유황 불못으로 가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없는 평화라는 것은 오히려 불행을 가져오는 일이 되는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즉 진리이니,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어떻게 행하시겠다는 것을 목적으로 둔 언약의 말씀이다. 이 언약이라는 것은 사람이 행하라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행하시겠다는 말씀의 언약이다.
에덴 동산에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하는 법을 주었지만, 미혹을 받고 선악과를 먹은 타락한 인생에게는 하나님께서 내가 이렇게 행하겠으니 너희는 믿고 순종하라는 것이 구속의 언약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여 타락된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침으로 다시 구원해 주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구원해 주겠다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자는 구원을 받게 되고, 구원해 주겠다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마귀와 평화를 누리는 자는 영원히 사망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다. 이날까지는 하나님과 인생과에 평화를 누리는 것을 목적하고 화목 제물로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너그러이 용서하는 법을 썼고, 다음에는 세계 평화를 위하여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지 않고 평화의 왕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는 한 사람도 내놓지
않고 전부 없이 하는 것을 평화 왕국을 이루기 위한 심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기에는 간교한 뱀인 붉은 용을 내 보내어 붉은 용과 평화를 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는 권세를 주게 된다. 이때에 끝까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가는 자 외에는 붉은 용과 평화를 누리는 바벨론 음녀 세상이 되게 한 후에, 한 시간 동안에 음녀 세상을 불로 살라버리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사람만을 남은 자가 되게 하여 영원한 평화의 왕국을 누리게 하는 것이 심판과 새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평화라는 것은 진리를 떠나 있을 수 없다. 지금 소위 평화라는 미명하에 기만적인 정책이 세계를 정복하려는 사단의 미혹을 받지 말고, 진리의 하나님과만 평화를 누리는 자가 되어야 완전한 평화 왕국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126. 오늘에 시간을 다투어 할 일은 무엇인가
인류 역사상 어느 때나 시간을 다투어 일하는 자가 필요했지만, 오늘과 같이 필요한 때는 없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가 시간을 허송하는 사람이 제일 많다는 것은 눈물겨운 심정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할 일을 두고도 일을 하지 않고 쓸데없이 노는 자도 있고, 일을 하려고 하여도 할 일이 없어서 노는 자도 너무나 많은 민족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하여야 해결될 것이냐 하는 것을 사상과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깊이 생각을 하면서 염려를 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본다. 일을 하려고 해야 일할 수 없다는 말도 무시할 수가 없고, 할 일을 두고도 맥이 빠져서 일하기 싫다는 말도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오늘에 시간을 다투어 할일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알아보기로 한다.
1. 자아의 인격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시간을 다투어 할 일이 있다.
첫째 : 인격 개조를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할 일이다.
인격 개조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내 인격을 개조시킬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이시니, 지금은 하나님께서 새 시대의 왕권 반열에 들 사람의 수를 채우기 위하여 강권 역사를 나리는 때이니 만큼 누구든지 자기 인격 개조를 목적으로 두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이 문제를 놓고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강권으로 하루에 죄악을 제해주시는 역사가 나타날 것이니, 누구든지 인격 개조를 위하여 부르짖는
시간을 금같이 알고 애써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문제는 진노의 날에 남을 자가 될 수 있는 인격을 하나님께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할 일이 없어서 논다는 자도 일할 수 있는 인격을 받기 위하여 노력해야 될 것이고, 할 일을 두고도 맥이 빠져서 논다는 자도 일할 수 있는 인격을 받기 위하여 조물주 하나님께 호소하되 해산의 수고를 다해야 한다.
이 시대에 일할 수 있는 인격이 되느냐, 일할 수 있는 인격이 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 제일 급한 문제라는 것을 아는 자라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어제가 옛날이라고 생각하리 만큼 시대가 변천된 이 때에, 인격도 고쳐져야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돈이 많고 적은 것도 문제가 아니요, 지식이 많고 적은 것도 문제가 아니다. 오직 제일 큰 문제는 하나님께서 들어 쓰실 수 있는 인격이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6장을 보면 다섯째 인을 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죽은 영들이 심판을 독촉하는 호소를 할 때에 주님께서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면서 그들의 동무가 될 사람들의 수가 차기를 잠시 동안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 잠시라는 기간이 어느 때라는 것이 문제가 된다. 모든 성경을 다 상고해 볼 때에 오늘이 잠시라는 기간에 들어 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둘째 : 완전한 권세 새 힘을 받기 위하여 여호와를 바라보고 용기있게 싸워 나가야 할 일이다.
은사라는 것은 회개하는 시간에 받았지만, 권세 새 힘이라는 것은 아무리 난제가 닥쳐온다 하여도 후퇴하지 않고 돌진의 걸음을 걸어 나가는 자에게 왕권을 받을 수 있는 인격을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주시는 역사이다. 할 일이 없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것도 잘못이요, 할 일을 놓고도 맥이 빠져서 못한다는 것도 잘못이니 조물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날그날 닥치는 대로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면서 싸워 나갈 때에 큰 일을 할 수 있는 권세 새 힘을
받게 된다. 큰 일을 하려고 영웅심을 가지지 말고 작은 일에서 새 힘을 받을 수 있도록 충성을 다하라!
셋째 : 매일같이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는데 전력을 두어야 할 일이다
지금은 성경의 천체가 다 이루어지는 때가 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을 다 알지 못하고는 미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혼란이 닥쳐 온 이때에, 말씀의 빛을 발하지 않고는 마귀 흑암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지금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보다도 본문 그대로 읽어서 증거할 수 있는 때가 왔다. 성경에 이러한 시대를 가르쳤는데, 이 시대가 오기 전의 사람들은 알지를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해 보았지만, 오늘에 와서는 성경을 달리 해석할 필요가 없이 본문 그대로 다시 예언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시간을 다투어 가면서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아야 할 때이다.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가지 인격을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고, 조물주 하나님의 역사로만 완전케 되는 것이니, 조금도 시간을 허송하지 말고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일이 있어야만 앞으로 오는 난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인격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될 것이다.
2. 자아의 생활 방침을 세우기 위하여 시간을 다투어 가면서 할 일이 있다.
첫째 : 생활의 위치를 바로 가지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일이다
이날까지는 개인 영혼 문제를 목적으로 두고 신앙 생활을 했기 때문에 위치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반드시 위치를 바로 택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은 하나님께서 단체적인 보호와 단체적인 구원을 하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신이 옳게 나가려고 하여도 너무나 교회가 부패했으므로 내가 나가는 교회의 위치를 바로 정해야 한다. 만일 사단의 회가 되는 교회에 위치를 정하게 된다면 가족에 큰 화가 오는 일이 있게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말씀이 가감된 교회에는 저주의 두루마리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지금은 영적 재앙기이니 만큼 영적 흑암의 재앙이 들어가지 못하는 교회에 위치를 정해야 되는 것이다. 앞으로는 말씀을 가감하는 교회는 사단의 회가 되고 말씀을 가감하지 않는 교회는 촛대교회가 될 것이니, 촛대교회에 위치를 정하지 않고는 가족적인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
둘째 : 경제적인 생활에 대하여 축복 받는 일을 해야 할 일이다
앞으로는 돈이 많아서가 축복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경제적인 생활에 축복을 해야만 되는 것은 아무리 재앙이 오는 날에라도 아무런 피해를 당하지 않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금도 물질에 대하여 부정이 없어야 할 것이며, 철저한 십일조에 힘을 써야 할 것이며, 주일날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정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앞으로 지상 축복을 받는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십일조 현물과 안식일에 대해서 철저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물과 양식을 공급하는 가정이 아니고는 새 시대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셋째 : 사람을 교제하는 일에 대하여 극히 조심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마귀의 자식도 마귀의 권세를 가지고 나오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불의한 자와 불의한 일에 조금이라도 타협이 있는 자라면 그 만큼 피해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고독감이 있다 하여도 불의와 동참하지 않고 나가야 한다.
심판의 날에 남은 가정이 되려면 조금이라도 불의한 세력과 타협하는 것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가정이 조금이라도 불의의 세력과 타협하는 일이 있게 될 때에는 흑암의 세력이 그 가정에 가득해질 것이니, 가정 전체가 거룩한 보호 밑에서 움직여야만 하는 것이다. 노아가 온 가족이 합심되므로 방주를 준비하듯이 우리도 온 가정이 합심하여 불의의 세력과 조금이라도 타협이 없이 다림줄의 진리의 말씀에 굳게 서는 일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