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말씀의 칼

  말씀의 칼 Ⅱ

   

목  차   말씀의 칼 Ⅰ / 말씀의 칼 Ⅲ

 51.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생활 (약1:1~5)

 52. 그리스도 안의 통일 문제 (엡1:3~14)

 53. 사명에 불타는 바울의 심정 (롬9:1~3)

 54. 참된 증인의 양심 (요3:22~36)

 55. 신령한 자의 판단 (고전2:6~16)

 56. 한날에 수고가 족한 생활 (마6:19~34)

 57.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눅8:11~21)

 58. 성경을 기록한 목적의 차이점 (요20:30~31, 계22:6, 16)

 59. 주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요구하시는 일 (계3:14~22)

 60.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자 (고전7:1~35)

 61. 지혜와 지식을 간구하는 자가 되자 (잠2:1~22)

 62. 세례요한의 인격과 축복 (마11:2~15)

 63. 주의 인도를 따르는 복된 가정 (마2:13~23)

 64. 성도의 사생활과 하나님의 보응 (골3:18~25)

 65. 교회 안의 분쟁은 왜 있을 것이냐 (요16:1~4)

 66. 주님이 잊을 수 없는 종의 역사 (사49:3~15)

 67. 여호와의 말씀이 응하는 길 (시105:10~25)

 68. 하나님의 소원과 종의 할 일 (딤전1:18~2:7)

 69. 면류관을 빼앗기지 말라 (계3:7~11)

 70. 온전한 인격을 이루는 비결 (약3:1~12)

 7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일 (벧전2:11~17)

 72. 주님의 역사와 인격의 차이점 (요21:1~6, 행3:1~10)

 73. 영적 소경된 사람의 행위는 무엇이냐 (요9:39~41)

 74. 합심된 교회가 되자 (마18:15~20)

 75. 교회 안에 두 가지 지혜 (약3:13~18)

 76. 의인의 깊은 생각과 실천 (마1:18~25)

 77. 주님의 말씀과 심판 (요12:46~50)

 78. 택한 자를 위한 천사 활동 (행10:1~8)

 79. 열매와 가지 (사11:1)

 80. 기독교 순교의 처음 열매 (행7:51~60)

 81. 승천하는 주님의 부탁과 재림주의 부탁 (행1:6~11, 계22:6~7)

 82. 다시 오실 주님의 심정 (요14:1~4)

 83. 십자가의 승리와 봉한 책 (계5:1~10)

 84. 성령의 역사와 심판기의 역사 (욜2:28~32)

 85. 심판을 향한 두 가지 길 (요3:16~21)

 86. 기도에 전력하는 교회와 말씀에 전력하는 교회 (행1:12~14, 계11:3~4, 22:16)

 87. 믿는 자의 받는 권세와 지키는 자의 받는 권세 (요1:7~18, 계2: 26~28)

 88. 사도들의 예언을 기억하라 (유17~23)

 89. 베드로와 요한의 사명 차이점 (요21:15~25)

 90. 만국 위에 세운 예레미야 (렘1:4~10)

 91. 영적 지도자가 되는 길 (출2:1~15, 3:1~8)

 92. 선지서를 전하는 바울과 말세증인 (행28:23~28, 계10:5~11)

 93. 성경을 깨닫는 시기 (눅24:44~49)

 94. 재림에 대한 징조와 확실한 예언 (벧후1:12~21)

 95. 순교자의 호소와 수가 차는 일 (계6:9~11)

 96. 하나님의 비밀을 보이는 일과 행하는 일 (암3:1~8)

 97. 성신 충만의 역사와 권세 역사 (행2:1~4, 계11:3~5)

 98. 끝까지 주의 일을 지키는 자의 권세 (계2:23~29)

 99. 말씀에 잘못된 증거와 받을 재앙 (사8:16~22)

 100. 완전 계시를 받은 요한의 인격 (계1:9~10)

51.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생활  

- 약 1:1~5 -

 

서 론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부족함이 없이 생활하게 하는 것은 인간에게 행하시는 일이다. 완전이라는 것은 땅의 것만으로가 아니고, 땅의 것과 하늘의 일이 결합되는 여기에서만이 부족이 없는 생활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되려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만 되는 것이다.  

1. 온전한 기쁨이란 것이 있게 된 것이다 (2)  

온전한 기쁨은 어떤 흥분, 감정, 오락을 통하여 오는 것은 아니다. 본문 2절과 같이 시련을 받을 때 오는 기쁨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쁨을 얻어 보려고 세상에 무엇을 요구한다는 것은 방탕의 길로 가는 시점이 될 것이로되 어떠한 어려운 시련이 올 때 완전히 기쁘게 여겨보려는 사람은 최고의 영계에 들어가려는 시점이 될 것이다.  

2. 인내력을 기르기 위한 노력이다 (4)  

우리는 노력도 잘못된 노력도 있고, 바로 된 노력도 있는 것이니 어떤 신자가 인내의 힘을 길러 보려는데 노력치 않고, 일시적인 오락적인 수양에 노력한다면 이 신앙은 자동적으로 부패라는 것을 가져올 것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볼 때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 보려는 안타까운 심정을 가졌다면 그 사람에게 하늘의 것으로 채워 주는 것이 필연코 있는 것이다.  

3.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는 자이다 (5)  

사람이 무슨 일을 당할 때 자기의 지혜가 부족한 것을 깨닫는데서 초인간적인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하는 자가 될 때에는 넘치도록 주시는 것이다. 만일 인간 지혜로만이 해결하고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원치 않고, 의심하면 이 사람은 아무 것도 얻기를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결 론  

온전하고 구비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은 인간 자체의 노력으로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현재 없다는 것보다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이루어 보려고 하는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알지도 못하고 덮어놓고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적을 바로 정하는 동시에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여기에서부터 만족을 삼고 나갈 때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될 것이다.  

 

52. 그리스도 안의 통일 문제  

- 엡 1:3~14 -  

 

서 론  

완전한 것은 완전한 통일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통일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품안을 떠나서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욕망을 가질 적에 자기의 주권, 자기의 욕망을 채워 보려는 것 이상은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다. 마귀는 마귀의 욕망으로 세계를 통일하려는 것이 붉은 용의 역사이다. 그리스도의 요구에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을 이루려는 것이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이다.

세계 정치적 양대 진영도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로,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로써의 통일을 꿈꾸는 것이 정치적 양대 세력으로써 욕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대 정치가 통일을 이루어서 평화로운 시대가 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다니엘 선지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꿀 적에 종말에 양대 세력이 서로 철과 진흙같이 나누어서 합할 수 없는 난관이 부딪힐 때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은 무엇으로써 될 것이냐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성서를 통하여 완전한 진리를 찾을 수 있다.   

1. 초인간적인 지혜와 총명이 임함으로 (8~9)  

인간 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알 수도 없고, 그 경륜을 따라서 행할 수도 없는 것이 인간 지혜다. 왜냐하면 피조물의 지혜가 창조주의 지혜와 서로 대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금일에 소위 유물론 정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볼 때 웃을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분명히 계시록 13장에 보면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준다는 것을 보면 마귀가 사람의 마음을 마취시키는 역사라고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지금은 통일의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그 비밀을 바로 가르치고 바로 믿고 바로 행하도록 한 것이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이다.   

2. 통일된 기업이 되게 하는 일이다 (10~12)  

만일 어떤 사람이 목적을 정하고 일할 때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기업적인 본질이 아닌 것을 시작했다면은 이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통일이라는 것은 오메가를 이루는 것이니 시작에서부터 그 기업이 되는 일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은과 금으로 집을 지어야만 될 일인데 시작이 흙으로 빚어서 시작이 되었다면 위에 올라와 아무리 좋은 것을 쌓았다 하더라도 이것은 파괴를 이루는 행동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기초를 놓음 같다”고 했던 것이다. 우리는 통일을 목적했다면 통일된 기업을 상속할 수 있는 인격을 이루는 데서부터가 될 것이니 이것은 양심의 토대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3. 확실한 인침을 받은 증거가 있어야 된다 (13)  

우리는 인친 보증적인 증거가 없는 일을 가지고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탈선된 행동이라고 보게 된다. 인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인을 말한다. 누구든지 마음에 성신의 인을 맞은 자면은 국경을 초월한 어느 민족이든지 자동적으로 하나 되고 있는 것이니 이것은 누가 꺾을 수는 없는 통일이다. 은혜 시대에는 성신의 인으로 통일된 교회를 이루었고 환난기에는 하나님의 인을 맞는 역사로 통일된다는 것을 계7:2~3, 9:4을 보아 알 수 있다. 이것은 시대를 따라 역사하는 하나님의 인이다.

다시 말하면 종말의 인의 역사는 영과 육이 아울러 들림 받을 종들이 하나같이 사상, 정신, 말씀 통일에 무장을 갖추어 성신의 인으로 섰던 교회를 하나님의 인의 역사로 끝을 맺어 재앙의 날에 진노 심판을 면하고 새 시대를 정복하는 심판의 비밀을 통하여 일어나는 역사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비밀을 믿음으로 성신의 인을 맞게 되고 심판의 비밀인 예언의 말씀을 바로 믿고 증거하는 종들에게 하나님의 종말적인 역사가 임하여 환난과 재앙 중에서 원수를 무찌르고 나아가는 백마 탄 군대를 이루는 것이니 승리자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고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통일하는 하늘 권세와 땅의 권세를 받고 나가서 역사하는 권세의 역사다(계 11:3~6). 하나님은 시대를 따라 역사하시되 통일된 역사를 하심으로써 세계 통일의 왕국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독일무이하신 하나님의 종으로서 통일에 목적을 두고 역사하는 그 경륜과 뜻을 알려주는 대로 알게 되고 말하게 되고 역사하는대로 쓰여지는 사람이 된다면 통일은 종된 사람의 책임이 있다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들어 쓰는 일로써 세계통일을 이루게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자기가 통일해 보려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자동적으로 통일을 목적한 하나님과 대적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그 뜻을 믿고 순종하는 데서만이 하나같이 움직일 뿐이다.  

 

53. 사명에 불타는 바울의 심정  

- 롬 9:1~3 -  

 

서 론  

하나님은 기독교를 박해하던 바울을 완전히 중생 시켜 어느 사도보다도 더 불타는 심정을 주어서 맹렬히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던 것은 기독교 신앙의 표본으로써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기독교의 원수라도 하나님은 용서하여 쓰신다는 증거로 보여 주신 동시에 그를 높이 들어 썼던 것이다.   

1. 조금도 거짓이 없는 심정 (1~2)  

이는 극도로 강한 의사를 가졌기 때문에 특히 타인보다도 기독교를 더 박해한 것은 거짓이 없는 양심가인 동시에 유대 교회 최고의 열성가였다(딤전1:13).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는 것은 거짓이 없는 양심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기뻐하신다. 아무리 훼방, 핍박, 폭행을 행한 바울이지만 그 중심을 보시고 주님은 나타나 부르셨던 것이다.  

2. 애족심이 강하다 (3)  

바울은 이방의 사도인데 특히 타인보다도 동족의 박해를 더 많이 받은 사도이다(고후11:24~25). 그러나 동족에 대한 애족심은 누구보다도 더 강하게 일어났다. 왜냐 할 때에 이 복음을 반대하므로 자기 동족이 망할 때에 불타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는 환영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는 것은 바울의 정신은 아닐 것이다.  

3. 희생적인 봉사심이 강하였던 것이다 (고전4:11, 행18:1~4)  

바울은 친히 희생을 하는 동시에 친히 일하면서 복음 전하기를 목적으로 했던 것이다. 그는 조금도 타인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정신이 강하였던 것이다(고전9:11~15).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그에게 특성을 주신 것은 복음을 모르는 이방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쓰기 때문에 이러한 심정을 불타게 가지도록 역사했던 것이다.  

4. 그는 동정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고전9:21~23)  

이것은 외식이 아니요,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심장이 뛰는데서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받는 고통을 볼 때 눈물을 흘리는 심정에서 그를 대해 주는 심정이었던 것이다(빌1:8). 우리는 남의 형편을 볼 때 동정하는 마음이 불타는 것이 없이는 복음을 전할 마음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방의 불쌍한 민족을 위하여 조금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안타까운 심정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5. 세상 영광을 분토같이 보는 것이었다 (빌3:5~8)  

바울은 자신이 귀족인 동시에 학문이 높고, 로마의 시민권이 있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고, 정통적으로는 바리새교인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란 분을 위하여 다 버리고 오직 복음 하나만을 불쌍한 이방 민족에게 전한다는 마음 하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결 론  

우리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 신앙한다면 복음을 전한 자의 심정을 우리도 모범 한다는 것이 합당한 일이라고 본다. 종말에 와서 예언하는 증인으로서 이와 같은 심정이 없다면 순교자의 반열인 그 수에 들 수 없을 것이다. 주의 종은 하나님을 중심하는 종인 동시에 택한 백성을 위하여 우리는 주의 일꾼이니, 바울과 같은 심정이 없다면 종말적인 권세 역사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러한 심정을 가지고 순교를 함으로 끝을 마쳤고, 우리는 그들의 억울한 피값을 갚는 자가 되려면 권세의 역사를 받아야만 할 것이다. 이 권세의 역사는 선지자와 성도의 원한을 풀어 주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54. 참된 증인의 양심  

- 요 3:22~36 -

 

서 론  

하나님의 사명 받은 증인은 하나님을 대한 양심이 맑은 자를 참된 증인이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양심을 보고 역사하기 때문이다. 이제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통하여 참된 증인의 양심을 다음과 같이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1. 하늘에서부터 주신 것을 받는 것뿐이라는 양심이다 (27)  

만일 어떤 종이 하늘에서 주신 것 외에 딴 것을 가한다면 이것은 참된 증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낸 사람은 위에서 준 것 외에는 딴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인에게 부탁을 받고 가서 그대로 하지 않고 자기의 주관을 세운다면 이것은 주인을 무시하는 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오늘의 주의 종들이 하나가 못된 원인도 깊이 양심적으로 반성할 문제이다.   

2. 사명의 한계에서 지키는 양심 (28~30)  

만일 어떤 종이 사명 한계를 지키는 양심이 없이 남의 사명을 침범한다든지 자기의 맡은 바 사명을 회피한다면 이것은 참된 종이라고 할 수 없다. 세례 요한은 자기의 사명적인 한계를 분명히 대중 앞에 말했던 것이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율법시대의 끝을 맺는 나의 사명은 쇠하여야 하겠고, 은혜와 진리를 가지고 온 그리스도의 역사는 이제부터 흥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대제사장이나 장로, 집사들이 다 이와 같은 양심이 있었던들 예루살렘은 큰 축복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적인 자기 교회의 교권을 내세우고 새로 나오는 사도적인 교회를 없애려는 압박이 심하므로 예루살렘은 황폐화되고 돌 한 개도 덧놓이지 않고 다 무너지고 만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을 대적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종들이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고 자기의 주권을 세우려는 교만으로 망하고 만 것이다. 만일 금일의 교회의 종들이 새로운 순과 같은 종들이 새 역사를 가지고 나설 때 세례요한 같은 양심이 있는 종들이어야 할 것이다.   

3. 하나님은 참되다 하여 인친 양심이다 (33)  

증인은 하나님은 참되다는데 대하여 변할 수 없다는 양심의 인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확신이 없다면 그는 생명을 바치는 증인은 도저히 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론에서가 아니고 확실한 체험이 역사적인 사실, 중심적인 사실, 생활에 확증적인 사실의 삼대 증거가 있는 자로서 하나님은 참되다는 인친 양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증거하는 것을 누가 환영치 않는다고 해서 말씀 외에 딴 어떤 것을 가입한다면 이것은 인친 양심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참되시니 말씀대로 역사한다는 것을 믿고 듣든지 말든지 역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 론  

누구든지 참된 증인의 양심적인 생활에서만 움직이는 종이라면 열매는 없을 수 없고 승리도 없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따를 증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순종하면 영생이요 순종치 않으면 진노라는 것뿐이다.  

 

55. 신령한 자의 판단  

- 고전 2:6~16 -  

 

서 론  

인생이라는 것은 동물이 아니고 영물이다. 그러므로 신령한 것을 가지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바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이 신령해지지 않으면 짐승만도 못한 판단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령한 것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향하여 “소도 그 임자를 알고 나귀도 그 임자를 알지만 이스라엘은 모른다”고 탄식했다. 사람이란 것은 그 자체 본질의 심령을 하나님께 받았기 때문에 그 심령이라는 것은 신령한 것으로써만이 그 가치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동물은 혼만 있기 때문에 거기는 신령이라는 것이 하등 필요가 없다. 예를 든다면 보석은 보석답게 써야 가치가 있고, 나무는 나무답게 써야 가치가 있는 거와 같이 최고의 가치를 가진 생령의 사람은 신령하게 쓰여져야만 가치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제 어떤 자가 되어야 신령해 지느냐 하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1.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받아야만 될 것이다 (6)  

인간 지혜와 지식으로 날뛰면서 성신의 지혜 받은 스데반을 이단이라고 판정을 내려 돌로 치라고 했던 사도 바울은 회개하고 성령의 지혜를 받고 볼 적에 아무리 세상 지혜가 있어도 하나님의 지혜를 받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는 것을 그는 말했던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로 타고난 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배워야 될 의무가 있고 받아야 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다시 예를 든다면 육신의 자식이 부모의 교훈을 받음과 같이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와 교훈을 받아야만 될 것이다.  

2. 통달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10~11)  

통달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사람은 깊이 연구하고 무엇을 알려고 할 때 물체에 대한 이치는 통달할 수 있는 것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는 것은 성령의 충만을 받은 자 외에는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물체의 이치를 통달케 하는 것이 과학적 연구라면 영계에 관한 깊은 것을 통달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신학이라 할 것이다. 금일에 신학이라는 세계의 인간 지식이 결부된다는 것은 큰 위법 중에 위법이 될 것이다.  

3. 사람의 지혜로 가르치는 일을 버리는 자 (13)  

만일 어떤 종이 은혜를 받았다 하면서 인간 지혜 수단 방법이 들어간다면 이 사람은 은혜를 쏟을지언정 깊은 영계를 맛볼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왜냐하면 성령을 노엽게 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어떤 선생이 있는데 그 선생을 무시하고 다른 선생의 말만 따른다면 그 선생의 마음을 분노케 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하물며 성령을 받은 자가 인간 지혜를 따라 일한다는 것은 성령을 괴롭히는 행동이 될 것이다.   

4.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 (16)  

우리의 신령이라는 것은 어떤 외형적인 이적이나 어떤 표적으로써가 아니다. 중심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한 것이 신령자라 한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마음인 겸손, 온유, 진실, 사랑 이것이 있는 자라면 모든 일을 바로 판단할 수 있는 신령한 자라고 보게 될 것이다. 판단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 외에는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사 11:3~4).   

결 론  

우리는 속담에 ‘되지도 못하고 다 된 체 한다’는 말과 같이 신령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남의 영계를 판단한다는 것은 멸망을 자취하는 행동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마7:1~2과 같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신령한 사람이 되어서 모든 진리를 말씀의 칼로 바로 쪼개서 판단이 있게 설교하는 자가 마귀를 치는 권세의 종이 될 것이다. 기독교의 최고의 영계는 말씀의 칼을 들고 나가 말씀으로써 세계를 통일시키는 일로 끝을 맺을 것이다(계11:3).  

 

56. 한날에 수고가 족한 생활  

- 마 6:19~34 -  

 

서 론  

인간의 수고는 없음으로가 족한 것은 아니다. 수고가 바로 있음으로써 족한 생활이 있어야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 수고 없이 사는 생활을 바라본다면 이것은 식충에 불과한 동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한날의 괴로움을 그날에 족하게 여기라 했던 것이다. 조물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격을 존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이제 한날의 괴로움이 족한 생활은 어디서 있을 것이냐에 대하여 본문은 말하고 있다.  

1.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기 위해 수고하자 (19~21)  

우리는 가장 가치 있고 열매가 있고 영원한 기쁨의 생활을 원한다면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기 위한 수고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왕의 왕 예수님도 이것을 위하여 매일같이 수고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요14:2~3). 주님은 우리의 있을 곳을 예비하기 위하여 역사하고 있다면 우리도 그 것을 위하여 수고하는 생활이 있어야 될 것이다.

만일 이런 수고를 원치 않는 자라면 주님이 다시 올 때 그 사람과는 하등에 관계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신랑 예수님은 신부를 영접하기 전에 동거동락할 그 세계의 모든 화려한 집을 준비하는 것이라면 신부는 여기에 같이 수고하기를 원하는 자라야 맞이하게 될 것이다.   

2. 몸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25~26)  

만일 세상에 사람이 났다가 몸을 위해 염려하다가 죽는다면 제일 무가치한 생활이란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동물에 불과한 생활이다. 모든 동물은 밤낮 자기 몸을 위해 사는 것은 동물의 생활이요, 몸을 희생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생활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는 세계를 지배할 왕 될 자격을 이룬 생활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낸 것은 모든 만물을 미리 창조하고 사람의 몸을 낸 것이니, 몸을 위하여 염려하는 것은 퇴보의 생활일 것이다.

우리는 진보적인 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몸을 낸 그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바로 알고 활동하는 생활이라고 보게 된다. 세밀히 말하자면 몸을 위하여 염려하는 것은 썩어질 양식을 위한 것이요, 몸을 주님께 바쳐 사는 생활은 영생할 양식을 위해 사는 생활이 될 것이다. 사람의 몸이란 것은 천양지차별을 둘 수 있는 것이다. 그 몸이 바로 움직이면 신과 같이 될 수도 있고 잘못 움직이면 동물보다 무가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했던 것이다.   

3.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움직여야 할 것이다 (32~33)  

우리는 하나님을 계시다고만 하는 것이 지식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 적에, 우리가 우리를 생각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먼저 아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며, 또는 우리가 먼저 할 일을 먼저 할 때에 모든 것을 더 풍성히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선후가 있는 것이니 먼저 할 것을 먼저 하는 그 수고가 있기 전에 아무런 열매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고가 필요하되 무엇을 위하여 먼저 수고하느냐 하는 것을 매일 같이 바로만 한다면 그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수고가 없이 되기를 바라는 것도 게으른 사람의 하나요, 수고를 하되 덮어놓고 일한다는 것도 어리석은 사람의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먼저 할 것만 시작하면 작은 데서 큰 것을 이루는 열매는 하나님의 축복에서 될 것이다. 큰 일을 기대하고 있는 생활보다도 작은 일을 바로 해야 된다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의 생활이라고 볼 수 있다.   

결 론  

하나님은 사람에게 수고할 수 있는 지혜를 준 것이다. 이것은 수고의 열매를 하나님께서 맺게 해 주마는 뜻에서 사람은 수고할 수 있는 지혜를 준 것이다. 최고의 가치는 그날의 수고가 족하리만큼 사는 생활이 왕권을 이루는 종의 생활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니 내일 일을 꿈꾸지 말고 그날에 시키는 대로 충성을 다할 것뿐이라는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종이 그날에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고 내일 일을 생각하고 염려하고 맥 떨어져 있다면 이것을 망령된 종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주인이 얼마만큼 계획이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교만의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예지와 예정과 무소불능의 하나님을 믿는 종이라면 그날에 괴로움을 족하게 아는 생활이 자동적으로 있게될 것이다.  

 

57.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 눅 8:11~21 -  

 

서 론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이라는 것은 듣는 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 듣는 것은 입으로 먹는 양식보다도 인생 생활에 큰 흥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입으로 먹는 양식은 하루의 생활이 보존되지 못해도 귀로 듣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좌우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신자가 들을 줄 모르고 있다면 이것은 주님의 양이라고 할 수 없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들을 줄도 모른다면 올바른 인도를 따라갈 수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 주님은 듣는데 삼가란 이유로 다음과 같이 성서를 통해서 말할 수 있다.  

1. 말씀을 듣고도 마귀에게 뺏길까봐 삼가라 (12)  

만일 듣고도 뺏기는 생활이라면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예를 든다면 음식을 먹고 즉시 설사해 버리는 자와 같다. 언제나 마귀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시험하는 것보다도 귀로 듣는 것을 시험하기 때문이다.  

2. 기쁘게 듣고도 배반하는 자가 되지 마라 (13)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가 너무 기뻐서 날뛰되 그 말씀을 소화하지도 못하는 자이니 말씀을 빼앗으려는 마귀도 말씀에 조건을 가지고 어려운 문제가 닥쳐오도록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시험은 말씀을 따라서 살아보려고 할 때 따라오는 시험이다. 마귀 역사라는 것은 말씀을 듣고 배반하게 만들어 보려고 대항하는 것을 말한다.  

3. 듣고도 결실이 완전치 못할까 삼가야 한다 (14)  

마귀는 말씀을 듣고 생활하는 자에게 항상 온전이라는 것을 이루지 못하도록 하는 노력이 있다. 이 마귀는 교회 출입도 허락한다. 너는 교회 다니기는 해도 온전히 되지는 말라고 시험한다. 말씀은 온전을 이루어 주마 하는 것이 말씀인데 세상에 끌리게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삼가야 된다는 것이다.  

4. 말씀을 듣고 인내로 결실 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삼가야 한다 (15)  

들은 것이 내 마음에 들어와 결실이 되도록 항상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져야 될 것이다. 말씀은 씨요, 마음은 밭이니 항상 말씀을 들은 자로서 양심적으로 하나님을 공경하기 위해서 삼가야 될 것이다(딤후1: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마음에 말씀을 양심적인 생활에서 간수하는 자는 더 많이 받도록 해 주신다(18). 하나님은 말씀대로 역사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항상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생활한 사람은 말씀대로 이루어줄 책임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항상 더 주기 위하여 역사하는 것이다.  

결 론  

인생의 최고의 가치는 말씀을 듣고 삼가는 생활이다. 같은 질그릇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서 보존되는데 따라 인격은 향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삼가해서 행하는 사람이라 했던 것이다. 세계를 정복하는 인격은 삼가는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하나님은 그 사람을 책임지고 인도하고 보호하고 승리하게 되기 때문에 왕권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58. 성경을 기록한 목적의 차이점  

- 요 20:30~31, 계22:6, 16 -   

 

서 론  

우리는 성경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의 원칙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쓴 목적의 차이점을 알지 못한다면 혼선을 가져올 염려가 있을 것이다. 즉 성서는 한 시대를 목적한 것은 아니나 그 시대에 하나님이 역사하는 목적 하나를 가르친 것이다. 성경 자체가 영생인 것은 아니다. 성경을 통해서 시대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순종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금일의 기독교의 혼선은 성경을 기록한 목적의 차이점이 분명치 못한 데서 혼선을 가져오는 것이다.   

우리는 금일의 기독교 종말의 말기를 당한 이 때 성서의 목적을 바로 아는 데서부터 완전한 역사의 시발점인 것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1. 그리스도를 믿게 하자는 목적을 둔 성경 (20:30)  

복음서는 조금도 가해도 감해도 안 된다는 목적이 아니고 그리스도 한 분을 바로 믿는 것을 목적한 것이다. 약간의 4복음서의 차이점이 있어도 여기에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은혜 시대의 복음 운동은 성경 해석이 서로 같지 않은 부분이 있어도 큰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만을 믿게 하려는 목적이니 종말관이 혼선이 되었어도 하나님은 묵인하였던 것이다.

이 날까지 강단 생활에서 종말관을 말하는 것이 각각 혼선이 있고 또는 성경 주석이 혼선이 있다 하여도 그리스도 한 분만을 믿도록 하는 목적만 이루었다면 하나님은 성령으로 역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내가 이 글을 쓴 것은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는 목적이라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도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진 것은 이와 같은 뜻이 있는 것이다.

베드로도 더 확실한 예언이 있으니 너희 마음에 새벽 별이 떠오르기까지 주의하는 것이 가하다고 했던 것이다(벧후1:19). 그러므로 사도들은 여호와의 책을 읽고 증거하되 부분적인 말씀을 이용한 것뿐이다. 그 목적은 예언서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자는 목적에서 성경은 해석한 것뿐이다.  

2. 종으로 바로 역사하기 위한 목적 (계22:6)  

이것은 그리스도를 바로 믿는 종으로서 시대적인 분별과 시대적으로 오는 환난과 재앙 속에서 진리를 바로 증거하도록 하자는 것을 목적한 것이 계시록이다. 만일 계시록이 아니었던들 그리스도를 믿는 종으로서 시대를 바로 증거하고 재앙 속에서 백성을 살리는 역사를 할 수 없을 것은 사실이다. 만일 어떤 종이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하면서 종말관을 똑똑히 증거 못한다면 주님 다시 오실 때 도저히 주 앞에 설 수가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 있다고 했다. 은혜 시대에는 그리스도 한 분을 바로 믿기만 하면 되었으나 기독교 종말인 환난 재앙이 나릴 때 예언의 말씀을 가감하여도 재앙이니 이 말씀을 바로 증거 못한다면 대중을 죽이는 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종은 계시록을 분명히 깨달아 꿀같이 먹고 다시 예언하는 종이 아니고는 권세 역사를 행할 수 없을 것이다(계 10:10, 계2:3).  

3. 교회로 환난에서 구원받게 하기 위한 목적 (계22:16)  

그리스도를 바로 믿게 하는 전도를 받아 선 교회로 그리스도가 다시 올 때 남은 교회가 되게 하는 목적을 둔 것이 계시록이다. 아무리 교회라 하여도 미혹을 받고 거짓 선지에게 표를 받으면 누구든지 영원히 멸망한다는 것이 계14:9~10에 있는 것이다. 기독교 종말의 구원은 육이 죽고 영혼이 구원받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은 절대적으로 아니다. 살아서 새 시대를 들어가는 것으로 목적한 것이 선지서인 동시에 계시록이다.

지금 교파의 활동으로써 교회가 섰으나 남은 교회가 되는 것은 교파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세밀히 말하자면 율법적인 교회에서 복음적인 교회로 설 때 그리스도를 바로 믿는 사도들의 역사로 토대를 닦은 것이다. 그러나 말세의 교회는 예언의 말씀을 바로 들어서 지키게 하는 목적을 둔 종들의 역사가 없다면 옳은 교회를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증인 감람나무 촛대라고 한 것이다.

이 날까지는 그리스도 한 분만을 믿게 하자는 목적에서 교회를 세웠으나 종말에 환난 중 재앙의 날에 미혹 받지 않고 새 시대로 들어갈 사람을 위하여 예언의 말씀을 바로 가르치기도 하는 것이 촛대교회의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도 교회통합이라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예언의 말씀으로 통합을 이루는 것 외에는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교회가 시대를 따르는 것보다 교회가 시대를 가르쳐 줄 책임이 있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교회 없이 믿을 수 없고 교회 없이 싸울 수 없고 교회 없이 보호를 받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교회를 중심하여 역사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환난 중에 예비처의 양육을 받을 교회로서 계시록 12장에 해를 입은 여자라 했다. 은혜 시대는 개인적 구원을 목적했고 종말적인 심판에는 교회적인 구원이 온다. 교회적으로 망하는 교회도 있고 교회적으로 남는 교회도 있다. 그러므로 해를 입은 여자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성경 전체를 논하면 메시야가 온다는 교훈도 있고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믿게 하는 교훈도 있고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교훈도 있다.  

 

59. 주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요구하시는 일

- 계 3:14~22 -  

 

서 론  

주님은 역사하실 때 사랑하는 자에게 대하여 모든 일을 진행하시되 사랑의 법만을 쓰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인 동시에 징계를 나리는 것은 특히 사랑하는 자에게 요구하는 바를 들어 달라는 것이다. 주님은 요구 없이 덮어놓고 징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부모가 자식을 책망할 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없이 공연히 성이 나서 책망한다면 오히려 책망을 받는 자녀에게 큰 저주가 될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을 책망하고 징계할 때 무엇을 요구하는 안타까운 심정이 있어서 자식을 책망한다는 것은 큰 축복이 될 것이다.

이제 주님께서 사랑하는 자를 향하여 징계하시면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본 성경에서 알 수 있다.  

1. 열심을 내 달라는 것 (19)  

이것은 주고싶은 주님의 사랑에 불타는 심정에서 안타까워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법은 열심을 내는 자에게만 준다는 것이 은혜를 주는 법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열심을 안내는 게으른 자에게는 징계를 하는 것이요, 열심을 내야만 좋은 것을 준다는 것이다. 어떤 신자가 열심히 없이 잠을 잔다면 그대로 은혜를 주시는 주님은 아니다. 열심히 나도록 때리는 것이다.

기쁜 일이 있을 때 열심을 내고 괴로운 일을 당할 때는 열심이 없으니 주님의 요구는 괴로운 일에 열심을 내는 자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즉 징계가 올 때 열심을 내면 영적 향상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식을 책망할 때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한다면 부모는 만족한 마음으로 더 기뻐할 것이다.  

2. 문을 열어 달라는 것이다 (20)  

주님께서는 마음 문을 열고 있는 사람에게는 얼마든지 은혜를 주는 것이로되 마음 문을 닫는 사람에게는 은혜를 줄 수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바로 믿는 사람은 정상적인 은혜를 계속 받게 될 것이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항상 사모하는 마음을 가리킨 것이다. 즉 항상 자기 부족을 깨닫는 심정에서 좀더 은혜를 받아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재촉하는 것은 기도다. 혹 마음을 닫고 기도를 아니하여도 괴로움이 없다면 이 사람은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다.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주님이 항상 마음을 재촉한다는 뜻을 가리킨 것이다. 성령이 내게 함께 하는 증거는 항상 듣고 마음을 열고 먹는 일이다. 누구든지 듣고 먹는 자는 완전한 그리스도와 같은 지위를 소유하게 된다. 이것이 신앙 향상의 큰 요소가 된다.  

3. 보좌에 함께 앉기를 요구한다 (21)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가 당신과 같이 보좌에 앉기까지 재촉하신다. 이 보좌라는 것은 왕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랑하는 종들을 남보다 더 징계를 하고 두드려서 재촉하는 것은 최대의 목적인 왕국의 보좌를 주겠다는 사랑의 요구이다. 이러한 사랑의 요구는 주님밖에 가진 자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요구되기 때문에 이기는 자를 만들기 위해서 열심을 내라 문을 열라 함께 먹자 이와 같이 요구하는 것이다.  

결 론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사람이 먼저 구하니까 준다는 것이 아니요, 주님께서 먼저 사랑하는 자를 향하여 요구하는 바를 믿고 순종하는 것을 기독교 신앙이라 하는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은 복음과 신앙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주고 싶은 사랑 속에 요구하는 심정을 만족하게 들어준다면 보좌에 앉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은 나의 요구를 들어 달라는 것이다.  

 

60.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자  

- 고전 7:1~35 -  

 

서 론  

하나님은 어떠한 일이든지 화평 중에 행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니 아무리 신앙이 열렬하다고 하여도 무슨 일이든지 어지럽게 만드는 일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우리는 성경을 중심하는 동시에 성경에 탈선되지 않는 일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하되 분요함이 없이 해야 될 것이다. 만일 성경이 탈선된 일이 있는 경우에는 목숨을 내놓고 싸우더라도 할 수 없으며 그밖에 일은 양심 자유에 맡기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교회에 덕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1. 부부간의 분방 문제 (1~6)  

하나님께서 일남 일녀를 창조하여 가정을 이루게 한 것은 서로 돕고 합의하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피차에 돕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부부는 서로 자기 한 사람을 위하여 움직일 수 없고 서로 책임을 지고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서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여자가 만일 자기는 거룩한 체하고 남편과 분방하여 남편과 멀리 한다는 것은 합당치 않고 남편이 거룩하다 하여 아내를 가까이 아니하고 분방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합당치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단에게 기회를 줄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부의 분방이라는 것은 어떠한 특별한 기도의 기간을 정하고 얼마 동안 합의하에 분방 하는 것 외에는 합당치 않다.  

2. 혼인 문제 (7~11)  

우리는 혼인을 부정하게 본다는 것은 잘못이요, 또는 혼인을 억지로라도 해야 된다고 강조하는 것은 합당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신앙 자유에 맡기되 부득이 혼인하여야 할 자신이라면 억지로 불타는 정욕을 가지고 나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가당할 것이요, 혼인을 해도 자신상 필요 없는 관계도 있고, 사명상 안 해야 할 형편이라면 혼인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3. 가정 문제 (12~15)  

가정이라는 것은 신앙으로써 단번에 완전하게 거룩하게 되는 가정은 심히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가 함께 부부의 생활을 하기 원하는 것이 죄라는 것보다도 함께 생활하기를 원한다는 경우에는 믿는 신자가 믿지 않는 자를 전도해서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모든 일을 참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믿기 전에 부부 생활이 있었던 사람에게 해당된 말이다.

이미 믿는 자가 안 믿는 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로되 믿지 않는 생활에서 먼저 믿고 나중 믿는 관계라면 먼저 믿는 자는 나중 믿는 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갈라서기를 원한다면 갈리게 하여도 하등 죄가 없다는 것이다.  

4. 환경 문제 (17~20)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질 때부터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생활이니 과거의 할례의 유무가 관계가 없고, 과거의 종이나 자유 자에게 하등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억지로 갑자기 고쳐야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믿는 자는 다 그 복음을 받은 그 때 있는 환경에서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바로 살아가는 것을 존중하게 생각할 문제요, 환경 문제부터 억지로 고치려고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탈선된 경우라면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워서 벗어나야 할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상관되지 않는 환경에서 억지로 변경을 하려는 것은 어지러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  

5. 자녀 출가 문제 (25~26)  

우리는 억지로 자녀 결혼을 시키지 않으려는 부모는 잘못이요, 자녀가 합당치 않게 여기는 결혼을 억지로 시키려는 것도 잘못이다. 출가 문제는 절로 자유에 맡기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녀가 출가하는 것은 주님의 사업에 큰 지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는 주님의 사업을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결혼 생활은 더 합당하게 볼 수 없는 것이다. 주 재림이 임박한 이 때 부부 생활은 사명 감당하기에 불리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사명자에게 국한된 말이다. 주 재림이 임박한 환난의 세상에 무거운 짐을 사명자가 걸머진다는 것은 즉 육신의 고난이 있다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데는 인간에게도 어지럽지 않도록 덕을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있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목적에서 가정 생활을 어지럽게 만든다는 것은 합당한 것이 아니다. 만일 가정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관계가 있는 경우에는 안 될 것이로되 진리 안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면 얼마든지 어지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것이다.  

 

61. 지혜와 지식을 간구하는 자가 되자  

- 잠 2:1~22 -  

 

서 론  

인생의 최고의 목적은 지혜와 지식을 간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로 오는 지혜와 지식을 요구치 않고 딴 것을 구하는 것은 정욕으로 흐르는 요구가 되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은 구하는 것 외의 것을 더 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지혜와 지식을 감추인 보화보다도 더 귀하게 아는 심정에서 소리 높여 부르짖는 자는 여호와께서 무엇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을 본문 성경에서 알 수 있다.   

1.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된다 (5)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지혜와 지식이 될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한다 해도 지혜와 지식을 바로 받지 못한 자는 오히려 더 악한 행동을 할 수도 있게 된다(요16:1~3). 그러므로 주님은 바리새교인보고 너희가 안다 하기 때문에 오히려 죄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요9:41). 하나님은 당신을 알게 해 주는데는 지혜를 주며 지식을 준다는 것이다.  

2. 그 길을 보호하시며 보전하신다 (8~9)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도 못하고 덮어놓고 나를 보호하사 한다는 것은 미신에 가까운 행동이 될 것이다. 우리가 보호를 구치 않아도 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이 될 때 뜻밖에 일이 나타나서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이다. 요셉은 자기가 총리대신이 될 것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는 길은 우리의 기대를 어긋나게 함도 아니요 이루어짐도 아니다. 우리의 기대밖에 보호와 보전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공부를 많이 한 훌륭한 아들을 사모하고 보호함과 같다.  

3. 영혼을 즐겁게 한다 (10~11)  

아무리 은과 금이 쌓였더라도 지혜와 지식이 없는 영혼은 심령에 평화와 즐거움을 소유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의 영혼이란 물질에 국한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4. 악한 자를 이기게 된다 (12~16)  

하나님은 당신이 기뻐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나 더러운 음녀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보호한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이 있어서 이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을 악한 사람에게 미혹을 당하지 않도록 건져 준다는 것이다.  

5. 땅을 정복하는 자가 된다 (21~22)  

전 세계의 땅을 정복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구하는 자가 완전한 사람일 것이다. 즉 악한 자와 궤휼자를 없애는 심판이기 때문이다.  

결 론  

우리는 인격적인 신앙을 가져야 하는데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혜와 지식이 있어야 된다.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솔로몬에게 감동감화한 성령은 말세에 남은 자가 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본문에 기록케 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되 덮어놓고 무엇이든지 주겠다는 것보다도 먼저 지혜와 지식을 구하면 하나님은 다 책임지고 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의 하나이다.  

 

62. 세례요한의 인격과 축복  

- 마 11:2~15 -  

 

서 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신이 아닌지라 실족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말할 때 주님을 향하여 실족치 않아야 된다는 것을 말했다. 세례요한은 어떠한 인격이 있었다는 것을 본문은 증거하고 있다. 주님은 인생의 약점을 아시기 때문에 요한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큰 자라 했던 것이다. 즉 사람 중에 큰 자라하는 것이다.   

이제 요한의 인격에 대하여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경홀치 않는 인격 (2~3)  

요한은 예수께 대한 소문을 옥중에서 들었다. 사람에게 전해온 말을 들을 때 신이 아닌 요한은 마음에 의문되는 점이 있었다. 이것은 전해지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말이란 예수께 대한 좋지 못한 평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악한 헤롯왕에게 억울하게 옥에 갇힌 것은 헤롯왕이 동생의 아내에게 장가들은 것을 책망한 죄로 옥에 갇혔기 때문에 극도로 헤롯왕은 요한을 미워하고 예수를 악평하는 무리들을 통하여 말을 들을 때 먹기를 탐하며 병을 고치되 안식일을 범하고 또는 아무런 가치 없는 사람들만 가까이하고 사귄다는 이러한 말만 듣게 된 것이다.

그는 전하는 말에 경홀히 움직이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비밀로 사람을 예수께 보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행하신 그 사실을 분명히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종들이 전하는 말만 듣고 경홀히 비판하면 그 말에 충동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요한에게 배워야 될 것이다. 만일 요한이 사람을 보내지 않고 전하는 말만 듣고 움직였다면 크게 실족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2. 선지자 보다 나은 인격이다 (9)  

모든 선지는 앞으로 될 일을 미리 보고 글을 기록한 것 뿐이다. 세례요한은 직접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준 사람이니 선지자보다 높다. 다시 말하자면 주님의 길을 직접 예비한 자다. 과거의 선지자는 이러한 사람이 오리라는 예언을 하였지만 세례요한은 오는 사람을 직접 영접하고 인도하고 소개해준 자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선지자 보다 낫다는 것은 그만큼 귀한 사명을 가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은혜시대의 영계 사명자보다도 재림의 날에 살아서 주님을 영접하는 자의 영계가 높다는 것과 같다.   

3.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제일 큰 자다 (11)  

세례요한은 여자가 낳은 모든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눅1:15에 보면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가 되었지만 세례요한은 모태부터 성신의 충만함을 받았다. 예수님은 신성으로 잉태되었지만 세례요한은 인성으로 출생을 하되 모태로부터 성령을 충만히 받았다는 것이다. 눅1:42를 보면 성모 마리아의 문안하는 소리를 엘리사벳이 들을 때 태중에서 요한은 기쁨으로 복중에서 뛰놀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성령으로 역사된 것이며, 이것을 본다면 세례요한은 보통 속된 사람과는 달라서 모태에서부터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함은 세례요한의 역사는 율법시대 역사의 끝을 맺는 것뿐이니 하늘 왕권의 최고의 왕위에는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은 잠깐 증거하고 예수님을 소개한 것뿐이고 여기에 작다는 것은 왕권을 받는 지위에 국한된 것뿐이다.   

4. 축복 (14)  

세례요한이 인간 중에는 복 있는 자라고 보게된다. 날 때부터 거룩하게 살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위하여 앞길을 여는 사람이 되었으니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많은 제자를 전도하여 예수께 인도한 것이니 복 있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만일 세례요한이 경솔히 움직였다면 요한도 실족한 자로서 실패에 들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를 소개하되 정직하고 겸손한 분이라고 소개하였고 또한 경솔하지 않고 끝까지 옥중에서 참은 사람이니 성신강림 되기 전 율법시대 사람으로는 복 있는 자라고 볼 수 있다.  

 

63. 주의 인도를 따르는 복된 가정  

- 마 2:13~23 -  

 

서 론  

역사적인 인류생활의 호화롭고 복된 생활을 한 가정이 많지마는 가장 빈한하고 쓸쓸한 목수 요셉의 가정은 인류역사에 제일 복된 가정이라는 것을 그 시대에 아는 자는 심히 적었던 것이다. 육안으로 볼 때 멸시, 천대, 빈곤, 피난의 길을 걸어가는 가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의 인도를 따르는 그 가정은 어디를 가나 평화, 승리를 이루는 가정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복된 가정은 무엇이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1. 천사가 왕래하는 가정 (13)  

금일에 어떤 정치요인의 집에 군대가 파수를 보고 있는 것을 안전이라 복되다 하는 일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천사가 지시하고 인도하고 보호한다는 가정은 얼마나 복된 가정이냐 하는 것을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산 높고 물 맑은 빈촌에 빈한한 목수의 가정에 천사는 왕래하고 인도하고 보호한다는 것은 그 집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이었다.

요셉의 복된 가정이 알파라면 우리의 가정은 오메가적인 교회에 끝을 맺는 복된 가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시91:10~11). 앞으로 오메가의 끝을 맺는 것은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는 가정일 것이다. 어린아이로 온 예수를 모신 가정도 복되다 하거든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는 주님을 영접하는 가정은 얼마나 복된 것인가   

2. 합심하여 순종하는 가정 (14~15)  

아무리 하나님은 롯의 가정을 유황불에서 건져내고자 하여 천사가 와서 인도해도 순종치 않을 적에 불행스러운 비참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어린 예수를 앞에 놓은 요셉과 마리아는 밤을 세우며 찬이슬을 맞으면서 길을 떠나는 그 부부의 절대적인 순종의 걸음은 복된 가정이 되고야 만 것이다. 고향을 떠나라는 지시를 받은 아브라함은 정처 없이 떠날 때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다는 축복의 음성은 그 가정에 들려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쓸쓸한 피난의 걸음을 걷는 그 가정은 헤롯왕을 이기는 승리의 발걸음이 되고야 만 것이다. 말세에도 아무리 악한 정치가 성도의 가정을 해치려고 병력을 동원해도 합심하여 순종하는 가정에는 아무 피해도 없을 것이다. 만일 순종의 발걸음이 하루라도 더디었던들 화를 만나는 가정이 될 것이었으나 철저한 순종이 있는 가정이니 필연코 승리한 것이다.  

3. 안정한 생활의 회복된 가정 (16~23)  

아무리 비참한 환난을 겪었으나 어린 예수는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고 정든 고향을 다시 복구할 때 그 가정에 행복스러운 생활은 매일같이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귀여움을 더하는 그리스도의 장성은 세계인류를 구출시키는 인격을 양성시키고야 말았던 것이다. 아무리 물질의 부요, 명예, 화려가 있다한들 이러한 인격을 길러내는 가정은 인류역사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가정에서 만왕의 왕이 오실 때 그의 국왕의 한 보좌를 차지하는 주의 종이 나온다는 가정은 얼마나 복된 가정일까! 세상 정치, 문화가 이 자리를 줄 수 없고 오직 합심하여 순종하는 가정에만이 세계를 움직일 하나님의 종은 나올 것이다. 우리의 축복이라는 것은 세세왕권을 가질 종을 길러내는 것이라는 것을 인간이 알 자는 심히 적다.  

결 론  

복된 가정은 세계를 천국으로 이루어 놓는 역사의 원천이며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시키는 학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소식이 연락되는 가정, 하나님의 보호가 같이하는 가정, 세계 만왕의 왕을 길러내는 가정, 인류 역사에 둘도 없는 복된 가정은 어느 가정인가. 목수 요셉의 가정인 것이다. 우리는 노동을 부끄러워 말고 빈곤을 원망하지 말자. 복된 가정은 무엇이라는 것을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이다.  

 

64. 성도의 사생활과 하나님의 보응  

- 골 3:18~25 -  

 

서 론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염세주의적인 사상을 버려야 할 것이고, 세상의 사생활에서부터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생활에서 행하는 일을 통하여 보응을 나리는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의 종이 대중 앞에서 신령하게 보이더라도 사생활이 그렇지 못하다면 이것은 자동적인 외식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친히 사생활에서부터 본을 끼치는 길을 걸어가신 것은 성도에게 마땅히 가야 할 길과 생활의 표본이 되는 것이다.  

1. 성도의 부부 생활 (18~19)  

성도의 부부 생활이라는 것은 주안에서 사는 생활이니 주안에서 남편에게 순종하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으로서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 부부 생활을 주님과 교회와의 관계와 같은 뜻을 표시한 것이다(엡5:22~25). 하나님께서 일남일녀를 창조하실 때에 남자를 도와주라는 책임을 주기 위해서 여자를 창조했고, 남자는 여자를 통하여 영광을 같이 누리게 함으로 일체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승리하시고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에 교회도 주님께만 순종하면 영광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남자나 여자나 합하여 지므로 서로 더 아름다운 미의 생활의 열매를 이루어 주자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니 부부라는 것은 조금도 가면적인 형식이 따를 수는 도저히 없다.   

2. 부모와 자녀간에 할 일 (20~21)  

자녀는 모든 일을 부모에게 순종하되 주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라야 된다. 아무리 부모에게 순종이라 하여도 주안에서 되어지는 일이 아니라면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해도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를 격노케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자녀를 기르는 부모는 소망을 끊어주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책망에 있어도 소망을 위하여 자녀를 더 힘이 나도록 하기를 힘써야 될 것이다. 푸른 순같이 자라나는 자녀를 낙심이 가게 만든다면 축복을 빼앗는 일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리 징계해도 더 열심이 나도록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하는 일이다. 이와 같이 주 안에서 믿음으로 자녀를 기르는 것도 은혜로 되도록 힘써야 될 것이다. 만일 부모가 자식에게 혈기를 내고, 감정을 내서 어린 마음을 낙심하게 하면 사단은 반드시 틈을 탈것이다.  

3. 종과 상전에 대하여 (22~23)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어떤 형제가 자기 상전인 주인에게 순종하되 눈가림만 하는 일이 된다면 이것은 신앙의 양심이 잘못된 행동이다. 주님을 믿는 신앙이라면 양심적인 생활에서 주를 두려워하여 거짓이 없는 성실로 행해야만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신자가 남의 일을 할 때 그 날 그 날 자기 삯이나 바라는 마음에서 한다는 것보다도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목적하고 마음을 다 하여야 할 것이니 이것이 없다면 주님 앞에 설 때 불의의 보응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이 없다면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는 주님 앞에 서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 론  

성도의 지상 생활에서 되어지는 일은 영원한 천국을 위하여 심는 생활이니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둘 것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여야 큰 일에도 충성이 있다고 주님은 가르친 것이다(눅16:10). 예를 든다면 큰 나무가 유형적인 열매를 이루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포적인 작은 뿌리에서부터 힘을 얻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큰 열매를 나타내려면 은밀한 골방 생활인 사생활에서부터 힘을 얻어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은 천국을 건설하는 인격을 양성시키는 양성소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마6:6).  

 

65. 교회 안의 분쟁은 왜 있을 것이냐  

- 요 16:1~4 -  

 

서 론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운 것은 참된 사도들 통하여 그리스도의 정신 사상 양심을 가진 종들로 한 가정적인 아름다운 교회로 세워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있다는 정도로 아는데서 세워진 것이 아니고 시대적인 하나님의 깊은 비밀을 아는 사도들이 동족인 유대교인들에게 박해를 받으면서 세웠던 것이다.

그 때에 소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의 부활을 증거하는 자를 축출하고 박해, 사형을 처한 것은 그리스도를 이단으로 판정을 내린 교권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세상 끝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교회 안에 있으리라는 것을 미리 말씀한 것이 본문이다. 이제 어떻게 교회 안에 큰 분쟁이 일어날 것이냐 하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성경을 찾아보자.  

1. 시험에 빠진 자들이 권리를 쥠으로 (마24:10)  

이것은 주 재림시기에 사단의 흑암이 교회에 들어와서 교인들의 마음을 강퍅케 만들고 서로 주권 쟁탈이 파당적으로 일어날 것을 말한 것이다. 이 때에 거짓 선지가 큰 기회를 타서 대 환난을 일으킬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서 동석할 수 없는 사람이 됨으로 자동적으로 순의 종이 나오는 요시야의 집에서 모였던 몇 사람과 같은 숨은 제단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슥6:9~12).  

2. 종말의 예언을 무시하는 자들이 많이 일어남으로 (사66:4~9)  

교회는 말씀을 바로 증거함이 완전한 교회일 것이다. 그러나 심판기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을 미워하고 쫓아내는 무리들이 교회 안에서 권리를 쥘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떠는 자로서 쫓겨남을 당할지언정 불의를 용납할 수 없다는 점으로 교회와 합할 수는 없을 것이다(사66:5~6).  

3. 교회의 상부가 부패하게 됨에 따라서 (습3:18~20)  

초대교회는 교회 상부가 신령하다 보니 약간의 이단자가 교회 중에 있더라도 이것을 책벌과 출교를 행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심판기의 교회는 대회를 인하여 근심하는 자들이 쫓겨남을 받고 수욕을 받게 됨으로 그들이 남은 자가 적다고 말씀하셨다. 대회라는 것은 상부의 최고 기관을 말한 것이니 최고 기관이 부패되는 동시에 하부에 이르기까지 큰 분쟁이 있을 것을 가르친 것이다.   

4. 미운 물건이 교회에 서게 됨으로 (단11:31~32)  

이것은 북방의 배도적인 정권이 정치적 도구로 쓰는 거짓 선지를 말하는 것이다. 계13:11이하와 대조가 된다. 이 미운 물건은 궤휼적인 정책의 앞잡이로서 거룩한 언약을 배반시키는 동시에 모든 사람을 타락시키고 있으므로 이 때 하나님을 바로 아는 자로 강하게 일어나서 용맹을 발할 것이다.  

5. 궤휼 친합이 있으므로 (단11:34)  

궤휼 친합이란 것은 북방 궤휼자의 수단 방법에 끌려 교회가 먹힘을 당하는 것을 말함이니 그 때에 그들 중에 지혜로운 자가 적게 남아서 연단을 받고 청결케 되어 마지막 때까지 이른다고 하였다. 우리는 진리 통합이란 것은 진리와 사랑 안에 통합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궤휼로 친합 된다는 것은 교회를 삼키는 사단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를 받는 자는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덮어놓고 사랑이란 간판 밑에서 분쟁이 없도록 해 보자는 것은 성서적은 아니고 분명히 심판기의 교회는 성도들이 박해를 받고 축출을 받고 연단을 받게 되는 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을 가르친 것이다. 협상이나 또는 어떤 인물 중심이나 교파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미혹에 들어가는 넓은 길이 될 것이다. 싸워야 할 것이며 참아야 할 것이며 끝까지 말씀을 지켜야 할 의무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66. 주님이 잊을 수 없는 종의 역사  

- 사 49:3~15 -  

 

서 론  

주님은 당신의 종을 들어 쓰는 동시에 역사한 일을 조금도 잊지 아니하신다. 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한 것을 당신이 한 일과 같이 인정하는 것이다. 혹 종은 잊을 일이 있어도 주님은 잊지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이제 어떠한 종의 역사를 잊지 못하느냐에 대하여 본문은 증거하고 있다.  

1.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이다 (3~4)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선을 행하지 말라고 마6:1에 말씀하셨다. 주님이 잊지 않는 일은 인간이 볼 때 헛된 수고 같고 아무런 유익 없는 일에 내 힘을 다했다는 일이다. 인간들에게 칭찬 받고 대접받고 환영받는 일이 아니다. 만일 어떤 종이 헛된 수고 같이 보이고 억울한 것 같다하여 불만을 두고 원망하고 낙심한다면 그 종은 주님이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2.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일 (6)  

주님은 인간을 구원하되 종을 들어서 이방에 빛이 되게 하시고 구원받은 자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동시에 종의 일을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빌립보에 있는 형제들을 자기의 면류관이라고 했다(빌4:1).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은 많은 사람을 구원해주는 일이다. 어떤 종이 강단에서 말씀을 증거할 때 옳게 증거해서 많은 사람이 그 설교로 구원을 받게 된다면 그 많은 사람은 그 종의 면류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목적이 인류를 구원하라는 목적이니 주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을 이루는 일이니 주님이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3. 주님을 위하여 멸시와 미움을 받는 일 (7)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미움을 받고 멸시 당하면서 끝까지 참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백골난망이라는 문자를 쓰게 된다. 하물며 주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미움 받고 멸시 당하는 그 일을 잊을 수가 없는 동시에 큰 상급이 되는 것이다(마5:11~12).  

4. 기도가 상달되는 일 (8)  

주님은 택한 종이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 주소서 하며 영광이 되어 달라고 부르짖는 기도를 잊을 수 없어 응답해 준다는 것이다. 당신의 뜻을 이루어 달라는 요청을 이루고 싶은 주님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잊을 수 없는 종의 기도를 응답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친구가 잊을 수 없는 친분이 있는 자라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요청을 아니 들어 줄 수 없다는 것이다(눅11:5~8).  

5. 고난을 당하는 일 (13)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달게 받는 자라면 주님은 잊지 아니하시고 불쌍히 보시는 동시에 그를 위하여 세세의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롬8:17~18).  

결 론  

주님은 잊을 수 없는 종을 통하여 새 시대를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새 시대를 이루는데 있어서는 그 종의 자녀로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같이 많게 하신다는 것이다(사49:18~21). 새로운 시대의 완전한 기업과 영광은 일한 종의 열매이니 그 영광을 잊을 수 없이 일한 종에게 준다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고 본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죄를 지은 인간이라도 은인을 잊을 수가 없다면 하물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충성을 다한 종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줄 것은 사실이다.  

 

67. 여호와의 말씀이 응하는 길  

- 시 105:10~25 -  

 

서 론  

여호와의 말씀이 응하는 길은 어떠한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진리 하에서 똑똑히 배워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했느냐 하면 그들에게 언약하신 말씀대로 이루어 주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고 천신만고의 어려움이 와도 따라가는 신앙을 가진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이제 여호와의 말씀이 응하는 길은 무엇이냐 하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유리하는 길이다 (12~15)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운 후에 그를 인도할 때 정처 없는 객지 생활로 유리하는 생활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네가 나의 말을 순종하느냐 아니하느냐 하는 것을 먼저 시험해 보는 인도였던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같이 많아지리라고 언약을 하시고 그를 인도할 때 억울한 고생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는 팔레스타인 성지를 얻는 길은 정처 없이 고향을 떠나서 가던 중 모리아 상수리나무 아래서 홀연히 하나님께서 나타나 성지를 너에게 준다는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복을 누린 것이 아니고 흉년을 만나 애굽으로 갔던 것이다. 불행스럽게도 애굽에 가서 아내까지 잃어버리는 비참한 광경에 처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망 중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표적을 나타내어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사라를 빼앗아 준 일도 있게 되었다.

그때 그는 분명히 하나님은 자기와 같이 한다는 것을 깨닫고 성지를 떠나 외국으로 가도 그는 하나님이 어디서나 같이 한다는 것을 믿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인도란 인간이 볼 때 불행스러운 일 같으나 하나님은 나를 도우신다는 것을 굳게 믿도록 하는 일도 있는 것이다.  

2. 극도로 원통한 일도 당하게 된다 (16~17)  

아브라함은 나이 백세에 이삭을 낳아서 하나님께 바치게 된 일이 있게 된 것도 인간이 볼 때는 너무나 원통하고 억울한 일 같이 보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거기에서 아브라함은 큰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열두 아들을 낳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말씀이 응하기 위하여 요셉을 억울하게 애굽으로 팔리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서 네 민족이 반드시 이방의 객이 되어 사백 삼십 년만에 돌아오므로 이 성지에서 복을 누린다는 예언이 응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억울한 시기와 쫓겨남을 당해도 가는 길은 하나님 말씀이 응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 자는 심히 적을 것이다.  

3. 억울한 누명을 쓰는 일도 있었다 (18)  

요셉은 억울하게 보디발의 아내에게 누명을 쓰고 고랑을 차고 사슬에 매여 옥중 생활의 슬픈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억울한 사정을 당하지 않고는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니 옥중 생활이 있으므로 그의 길이 열려지는 숨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인도하는 길은 실패 같고 죽는 길 같으나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되는 것이다.  

4. 홀연히 해방을 받음 (20)  

하나님의 인도하는 길은 죽는 길 같으나 오히려 더 유리한 길이 열려지는 일도 있는 것이다. 요셉이 옥중에 들어갔다가 기적적으로 해방을 받는 일은 열방의 통치자가 되는 자유의 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는 길은 인간이 어떤 연구 예산 기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기대밖에 놀라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모르는 인생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양심이 맑은 자라면 하나님은 책임지고 말씀이 응하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5. 무서운 재앙도 이루어지는 일이다 (21~22)  

일곱 해 동안 곡식을 하나도 거두지 못하는 흉년이 온 것은 언약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비참한 재앙이 없었던들 야곱의 12지파는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방의 객이 되게 하기 위하여 무서운 재앙이 왔던 것이다.  

6. 번성하게 되는 일 (23~24)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는 과정은 뜻밖에 번성하고 갑자기 강해지는 일도 있다. 이들은 굶어 죽는 기근이 무서워서 얻어먹는 사람의 하나로 갔지만 큰 축복을 받아 70여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60만명이란 대중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흥망성쇠가 전부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결 론  

우리의 신앙 정로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덮어놓고 잘된다고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양을 인도하는 목자가 양을 인도할 때 가는 길이 돌밭 또는 가시밭 높은 언덕과 구덩이를 통과하는 것과 같이 주님의 인도하는 길은 요셉이 애굽으로 내려간 일까지 보더라도 넉넉히 험한 길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는 예지 예정이 계신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길에서 무슨 일을 당하든지 원망, 낙심, 공포가 있다면 아브라함의 신앙은 아닐 것이다. 신앙의 완전한 체험이란 어떤 기사 이적이 아니고 실천 생활에서 말씀이 이루어지는 증거가 나타나는 것이니 이것을 아브라함의 신앙 노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68. 하나님의 소원과 종의 할 일  

- 딤전 1:18~2:7 -

 

서 론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쓰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만일 어떤 종이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생각지 않고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종 된 자의 직분은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서 순종할 것뿐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소원을 따라 행하는 종은 어떠한 종인가 하는 것을 본문에서 배울 수 있다.  

1.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1:18~19)  

하나님께서 종을 쓰는 목적은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이다. 이러한 싸움은 자기의 욕망을 위하여 싸우는 것은 아니다. 마귀를 물리치고 남을 구원해 주기 위하여 싸우는 것을 선한 싸움이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군대가 적군이 자기편을 해치고자 하는 것을 보고도 구경만 하고 있다면 군인의 양심은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종이 진리의 대적이 양떼를 해치려고 들어 왔는데 이것을 보고도 예언을 따라 싸우지 않는다면 양떼를 살리기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양심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에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한 것이다.  

2.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에 힘쓰는 종이다 (2:1~4)

우리는 국가를 위하여나 민족을 위해서 영적 대표 인물은 하나님의 종이니 이 종의 간구하는 기도로써 많은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받도록 역사하겠다는 것이다. 왜냐 할 때 하늘의 법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 없다면 역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란 다 제사장의 사명을 맡은 자인 것이니 그러므로 죄 중에 큰 죄는 남을 살리기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 죄가 제일 큰 죄라는 것이다(삼상12:23).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양심에서 잘못된 일이다. 즉 자기는 남의 기도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받고도 남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 없다면 양심이 하나님을 향한 종은 아닌 것이다.  

3. 믿음과 진리 안에 스승이 되자 (2:6~7)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거짓이 없는 믿음과 진리니 이것을 그래도 가감 없이 가르치는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믿음으로 가르치지 않고, 자기 주관으로 가르치든지 진리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든지 자기 지식으로 가르친다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말씀을 따르는 종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믿음도 하나요, 진리도 하나니 믿음과 진리가 떠난 역사라면 마귀의 일이 되기 때문이다  

결 론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따라 역사하는 주님의 역사와 모든 종들의 역사로써 구원을 받은 우리니 구원받은 양심으로써 선한 싸움을 싸우며 남을 위해 기도하며 믿음과 진리 안에 스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가 없는 사람은 삯꾼에 불과한 것이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간곡히 부탁한 것이 이것이었던 것이다. 바울은 종된 자로서 언제나 착한 양심적인 행동을 해야 된다는 것을 거듭 디모데에게 가르친 것이다(딤전1:5~9, 딤후1:3~5).

주의 종의 양심이 잘못되면 하나님과 양떼 사이에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종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향하여 깨끗한 양심이 있어야 할 것이고, 양떼를 향하여 착한 양심이 있는 동시에 뜨거운 사랑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귀신의 역사는 외식하는 자라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딤전4:1~2). 하나님의 종이 양심적인 사람이 못 될 때 하나님은 그 종을 통하여 은혜를 나릴 수도 없고, 또는 그 종이 하는 일에 책임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69. 면류관을 빼앗기지 말라  

- 계 3:7~11 -  

 

서 론  

하나님은 예지와 예정이 계신 섭리 속에서 모태로 택하기도 하고 택함 받은 자의 잘못을 회개시켜 용서하기도 하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너그러운 사랑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 면류관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은 자기가 싸워서 이겨야만 얻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것은 구원 문제가 아니고 왕권 문제가 결부된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여 면류관을 뺏기지 않느냐 하는데 대하여 빌라델비아 교회의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1.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말씀을 지키는 일 (8상반절)  

사람이 볼 때 어떤 큰 이적 기사나 큰 부흥에 이르는 역사는 없으나 순수한 말씀 중심에서 나갔기 때문이다. 신앙의 영계가 올라가는 것은 능력의 역사가 많다는 것만 아니라 말씀을 지키는데 있다는 것이다. 마7:22을 보면 아무리 이적과 기사가 있다 하여도 말씀이 바르지 못한 종은 주의 날에 알지 못한다고 하시었다.  

2. 내 이름을 배반치 않는 일 (8하반절)  

이것은 극도로 어려운 고통이 닥쳐와서 원망스럽고 낙심될 일 공포를 주는 일이 와도 배반치 아니하였다는 조건이 상급이 된다. 마5:11~12과 같이 공연히 주님을 위하여 남에게 욕을 먹고 악평을 듣고 핍박을 당하는 일이 올 때에 상급이 제일 크다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 중심의 신앙을 가진 자에게 남 보다 시련이 많게 하는 것은 영계를 높이기 위한 모략이다. 본문 9절을 보면 자칭 유대인들이 와서 절하게 한다는 것은 가장 높은 영계의 왕권을 말한 것이다.  

3. 숨은 사랑을 받는 일 (9)  

영계란 남이 보기에 은혜를 받는데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볼 때 실패자요 또는 비천한 자요 아무 축복도 받지 못한 것 같으나 그 가운데 위로 받고 참고 나가는 자는 절대 상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은밀한 가운데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 상을 받도록 행하라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 닥쳐 올 때 남 모르게 중심에서 체험하는 하나님의 숨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자는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4.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고 한 것이다 (10~11)  

우리는 주님께 은혜를 받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받은 것을 잃지 않고 보존하는 일이 더 큰 일이다. 예를 들면 부모가 어린 아이에게 무엇을 줄 때 잘 건사하고 잃어버리지 않는 자이면 더 좋은 것을 주겠다는 것이다. 잃어버리는 자에게는 더 좋은 것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께 받은 것은 적은 일이라도 끝까지 참고 나가면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기둥과 같이 쓸만한 사람은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자라고 하셨다. 인내의 말씀이란 언제나 말씀을 지키는 그 곳에는 시험을 하는 마귀가 따라 온다는 뜻이다(10). 그러므로 마귀 시험을 많이 받으면서 나가는 사람은 앞으로 오는 세계적인 큰 환난의 시험을 면케될 것이다. 세밀히 말하면 시련에서 말씀을 지킨 자는 세계적 환난 가운데 역사하는 종이 되기 때문이다. 즉 환난 가운데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자에게 시련을 시키기 때문이다.  

 

70. 온전한 인격을 이루는 비결  

- 약 3:1~12 -  

 

서 론  

하나님께서 종에게 요구하는 초점은 인격을 요구하는 것이다. 종된 자의 인격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인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어떤 사회단체 지도자도 그 단체에서 인정을 받는 인격을 요구한다면 적어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는 종교단체에 합당한 인격은 사람이 세울 수 없고, 하나님께서 택해 세우시되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을 상대한 종교단체에서 하나님이 요구하는 인격을 찾지 못하고, 사람이 인정하는 인격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종교 부패를 가져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인격은 어떠한 인격이냐 하는 것을 성서를 통해서 알아야 할 것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인격 (요一2:5)  

우리는 온전한 인격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데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속에 와서 온전하게 되도록 역사해 주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리에 탈선된 노선에 서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기다린다는 것은 미혹을 받는 사람의 행동이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니 진리를 따르고자 하는 자에게만 역사하는 사랑이다.  

우리가 그 말씀을 지키므로 온전해 지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사랑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사랑의 인격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타락된 인생을 어떻게 구원하시며 축복을 받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만일 말씀이 온전한 사람을 찾자는 말씀이라면 죄를 지은 사람은 지키겠다는 생각조차 가질 필요가 없다. 죄를 지은 사람을 온전케 만들어 주겠다는 사랑에서 약속하신 말씀이니 그 말씀을 순종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이다.  

2. 말에 실수가 없는 자 (약3:9)  

말의 실수라는 것은 본문에 의하면 형제를 저주하는 말이라고 쓰여 있다. 우리는 남을 살려 보려는 목적으로 입을 열어야 온전이라는 인격을 소유할 수가 있다. 그러나 바리새교인들이 율법을 숭배하고, 정통을 찾고 장로 유전을 지키는 거룩한 경건파라고 하지만, 입으로 그리스도를 바알세불에 걸렸다고 말을 할 때 “네 말이 네 죄를 정하리라”고 했던 것이다(마12:37). 금일에 말씀을 전하는 종이 함부로 남을 이단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심판 날에 큰 책임을 질 실수라고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이단이라고 판단했으니 심판 날에 자동적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같이 말세에 참종을 이단으로 판정한다면 그 종이 심판권을 받을 때 자동적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육을 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종된 자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외에 딴 것을 말할 자격이 없다. 예를 들면 가정에 어떤 종이 주인에게 그대로 전해 달라는 대로 전하지 않았다면 이것도 말의 실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심판을 받을 죄라는 것보다도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다.  

3. 종말에 시대적인 비밀을 바로 증거하는 종이 되자 (계11:3)  

하나님의 종은 시대를 바로 가르쳐서 시대적인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칠 책임이 있는 것이니 마귀 참소를 이기는 인격은 피와 증거의 말씀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다(계12:11). 즉, 종은 자기를 위하여 입을 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하여 쓰는 입이니 입에는 지식의 말씀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말2:7).

그러므로 완전한 사람이 되려 할 때에 하나님은 입술에 말씀을 주는 것이다(사59:21). 이것은 하나님의 종의 입을 쓰기 때문에 말씀을 입에 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입을 바로 쓰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살고 바로 쓰지 못하므로 죽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시대적인 비밀을 바로 증거하는 종이라면 비밀의 말씀대로 역사하는 하나님께서 그 입을 능력 있게 권세 있게 바로 쓰게 하실 것은 사실이다. 최고의 인격은 입에 실수 없이 바로 말을 증거하는 종을 통하여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다(사11:4~5).  

결 론  

하나님은 완전한 신이시니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는 것만이 완전히 아니요, 입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될 때에 당신의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와가 입에 실수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바로 싸웠던들 인간의 타락을 가져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말하지 못하는데서 시작됐다면 인류가 타락하는데서 최고로 올라가는 마지막 승리는 입에 실수 없는 증인을 통하여 끝을 맺을 것이다.  

 

71.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일  

- 벧전 2:11~17 -  

 

서 론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 종된 자로서 마땅히 해야할 본문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 하는데 대하여 본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1.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일 (11~12)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이라는 것이다. 모든 일에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하는 근본은 육체의 정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싹이 트는 것이다.

아무리 사람 앞에는 모든 일을 잘 한 것 같으나 육체의 정욕을 따르는 일은 주님 나타나는 날에 오히려 큰 벌을 받을 것이니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이라는 것이다(마24:49~51). 주님께서 자기가 가장 옳다고 주장하는 바리새교인을 보고 “네 아비는 마귀라” 한 것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요8:44).  

2. 인간이 세운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는 일 (13~15)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를 덮어놓고, 무시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정치적인 제도도 악행 하는 자를 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세운 제도이다. 만일 주님을 위한다는 자가 인간 제도에 어긋나는 일을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되고, 또는 주님을 중심해서 그 제도를 순종치 않는다는 것도 영광이 못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 제도를 순종하되 주를 위해서 해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주님을 위하여 모든 일을 행할 때 그 결국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이다.  

3. 자유를 바로 사용하는 일 (16~17)  

자유란 바로 사용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요, 자유를 악용하면 그 자유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될 것이다. 분문은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 된 자의 자유를 가져야 할 것이다. 종 된 자의 자유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불타는 데서 되는 일이다.

사랑에 불타는 심정 속에서 사람을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는 것이다. 자유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죄를 이기는 자유를 받은 자이니 형제나 나라를 위해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생활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건설적인 자유를 말한 것이다. 과거에는 죄의 종 된 자로서 교만의 종이 되고, 욕심의 종이 되고, 인간 물질의 종이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종과 같이 건설적인 생활에 들어가는 것을 참된 자유라 하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일을 위하여 사는 것을 성도의 가치 있는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제일 무가치한 생활은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가는 일이요, 인간 제도에 뒤떨어진 일이다. 즉 자유를 악용하는 일, 이것을 무가치한 생활이라고 본다. 그러나 영광 되는 일은 자체의 정욕을 이기고, 사회적인 제도의 선구자가 되고, 진정한 자유의 종이 되는 생활을 하나님께 영광 되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72. 주님의 역사와 인격의 차이점  

- 요 21:1~6, 행3:1~10 -  

 

서 론  

우리는 주님의 역사를 따르는 종으로서 그 생활의 차이점은 종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역사를 따라서 하늘과 땅의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본문에서 알 수 있다.  

1. 주님의 역사가 없는 인격 (요21:1~6)  

베드로는 주님의 부활을 친히 보았고 만져 보았고 성경을 깨닫게 하는 은혜도 받았고 또는 세계적인 사명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큰 권능으로 역사하지 아니할 때의 인격이라는 것은 어떻다는 것을 본문에서 잘 알 수 있다. 베드로는 다시 할 일 없는 인격으로 자기 고향 어장으로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 3년간 안해 보던 고기잡이도 해보았다. 고기를 잡아 보니 3년간에 잘 잡던 고기를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도 못 잡는 인격이 되었다. 이러고 보니 과거에 예수님을 따라가기 전에 어부의 인격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실업자 중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인격이다. 나가서 식생활을 해결하자니 아득하기만 하고 속담에 시세 폭락이라는 말이 베드로에게 해당된 말이었다. 기술도 노력도 소용없고 좋은 그물도 소용없는 전부가 헛것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이때 주님은 그들을 찾아갔던 것이다. 주님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말했던 것이다. 순종하고 보니 150마리라는 많은 물고기를 얻었다. 얻고 보니 겨우 어부라는 인격을 찾게 되었다.

그 때 베드로는 심각히 깨닫는 겸손이 생겼다. 나는 이제 주님을 떠난다면 고기도 못 잡을 사람이라는 겸손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될 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유구무언의 태도에 주님이 아신다는 한마디를 대답했다. “너는 내 양을 먹이라”는 음성을 들었으나 용기 잃은 맥 떨어진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주님이 역사하지 않는 종의 인격이라는 것이다.  

2. 주님이 역사하는 종의 인격 (행3:1~10)  

 1) 대중을 움직이는 인격  

인간이 상상 못할 일이다. 고기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는 인격이 한번 입을 열 때 3천명이 통회했다는 것은 과학적 지식으로는 이해 못할 일이다.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말씀은 금일에 와서 이루어지는 인격이다. 3년간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훌륭한 것을 보기도 했고, 훌륭한 교훈을 듣기도 했고, 훌륭한 주님의 부활체를 만져 보기도 했다. 그러나 보고 듣고 만져 보았다는 인격은 하등의 열매는 없었다. 웬일인지 뜨거운 불덩어리가 몸에와 부딪힐 때 그는 홀연히 3천명을 회개시키는 위대한 설교자인 인격을 소유했던 것이다.  

 2) 마른 다리에 힘을 주는 인격(행3:7~8)  

나면서부터 다리가 말라서 일 평생 힘을 얻어 보지 못한 그 다리에 말 한 마디에 힘을 주는 인격이다. 은과 금은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준다는 말 한 마디에 예수님의 이름은 높아졌던 것이다. 이것이 세계를 지배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과학 만능을 부르짖는 금일의 세계를 지배할 인격은 여호와의 이름의 힘을 받는 자이다.   

 3) 사람의 생명을 좌우하는 인격(행5:1~11)  

인간이 볼 때 두려워 아니할 수 없는 인격이다. 말 한마디 책망이 있을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일은 너무나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 인격이다. 이 인격을 소유한 자는 원수를 회삼물같이 밟는 인격이니 이러한 인격이 최후의 승리를 이룬다는 것이다(사41:25). 하나님은 알파적인 초대교회를 수제자를 들어 쓴 것은 약간의 표적이 되고 오메가가 되는 동방 땅 끝의 종을 부르는 일은 전세계의 열 왕을 굴복시키고 세계적인 원수를 짓밟고 나가는 역사이니 이 역사로써 기독교 종말의 끝을 맺는 것이다.

실수 많은 베드로가 어제는 주님을 저주하고 고기 한 마리 못 잡는 인격이 금일에 와서 이와 같은 표적을 보았다. 이것은 기독교 종말에 지렁이 같이 무가치한 인격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들어 쓴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면 성경도 똑똑히 모르고 아무런 영적 체험도 없는 베드로도 이렇게 하나님께서 썼거든 말세에 성경 지식을 소유하고 쓴 시련 겪은 권세 받은 종의 역사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결 론  

기독교는 어떤 인간의 과학적인 인물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최저로 떨어진 지렁이 같은 인간이라도 주님만 사모하는 자라면 일조에 큰 변동을 일으키는 일이 하나님께로 오는 그 역사를 힘입어서 쓰여지는 인격으로 교회를 세웠고 교회의 끝을 맺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신이시요, 무소불능 하신 역사를 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종을 최저로 떨어뜨리기도 하고 최고로 당신과 같이 일할 수 있도록 올리기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모략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이론이 아니요, 확실한 증거가 있는 사실이니 종말의 역사를 담대히 믿고 여호와를 앙망하여야 할 것이다(사40:30).  

 

73. 영적 소경된 사람의 행위는 무엇이냐  

- 요 9:39~41 -  

 

서 론  

주님께서 영적 흑암에 잠겨 있는 바리새교인들을 향하여 “네가 본다 하기 때문에 죄가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왜냐하면 주님은 주님을 판단하는 그들의 죄가 더 크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자가 본다 하기 때문에 죄가 더 많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이제 영적 소경된 바리새교인들이 주님께 대한 판단을 내린 것은 다음과 같이 성경에서 보게 된다.   

1. 주님을 안식일 범죄자라는 판단을 내림 (16)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는 조건으로 예수를 안식일 범죄자로 보았다. 안식일이란 사람을 위하여 있는 안식일인데 사람이 복을 받는 일까지 죄로 취급한 것은 영적 소경이라 하는 것이다. 안식일의 정신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축복한 날인데도 불구하고 병을 고치는 것을 죄라고 판단한 것을 주님께서는 그들을 소경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2. 예수를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정함 (22)  

교권주의에 치우친 행동이라는 것은 영적 소경이라는 것을 주님은 말씀하셨다.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해도 교권에 치우친 야욕적인 행동은 용서할 수 없는 죄라는 것을 주님은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 하는 사람은 무조건 출교하라는 것이 바리새교인들의 교권이었던 것이다. 금일도 무조건 자기 교권 하나를 내세우는 무리들은 다 영적 소경이 될 것은 사실이다.   

3. 그리스도를 죄인이라고 결정 내렸던 것이다 (24)  

함부로 남의 죄를 만들어서 판단하는 것이다. 자기만 옳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하여 남을 정죄하는 것이 바리새교인의 악독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영적 흑암이란 남의 허물을 만들어서 책잡으려는 것이 영적 흑암이라고 주님은 말했던 것이다.   

4. 그리스도를 모세만 못한 사람이라고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29)  

남의 근본을 알지도 못하고 영계를 판단하는 것이 영적 소경이라 하는 것이다. 모세는 훌륭한 종이지만 예수는 모세보다 못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그들은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의 당파를 내세우기 위하여 자기가 숭배하는 사람 외에는 다 틀렸다고 보는 것이 영적 흑암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5. 남을 무조건 무시하고 나가는 것이다 (34)  

이것은 자기 주관 외에는 남은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무시하고 나가니 역시 영적 흑암이다. 소위 종교 지도자라는 바리새교인들이 불쌍한 소경의 눈이 나아서 감사하며 말할 때 압박하며 회중에서 쫓아냈던 것이다(요12:10).  

결 론  

이와 같은 무리들은 소위 정통파라는 자기의 고집을 내세우고 예수님을 판단하고 또는 훼방하는 동시에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까지 한 그 영계를 보시고 예수님은 “너희가 소경이 되었다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본다 하니 죄가 그냥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차라리 하나님을 몰랐다면 나을 뻔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방인보다 더 악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말세에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무리 가운데도 교권에 치우친 악한 거짓 선지의 행동이 역시 이러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육신으로 오신 메시야를 박해하던 무리가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에도 반드시 이와 같은 무리가 있다고 말씀하셨다(계1:7).  

 

74. 합심된 교회가 되자  

- 마 18:15~20 -

 

서 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의 피로 산 교회에 대하여 요구한 바가 합심이라고 보게 된다. 만일 수천 명이 모이는 교회라도 합심이 없으면 주님은 떠나시고 두 세 사람이라도 합심된 교회면 함께 계신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교회는 주님이 떠나면 아무 필요 없는 원두막같이 빈 깍지만 있는 교회일 것이다. 이제 합심된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된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범죄한 형제를 아끼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15)  

주님은 범죄한 자녀를 위하여 은밀히 하늘에서 고요히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주님이시니 땅에 있는 교회도 그와 같은 방침을 취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없이 형제의 단점을 대중 앞에 함부로 말한다는 것은 사단을 청해들이는 연락이 될 것이다.   

2. 불의한 자를 용납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17)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니 회개할 기회를 주어도 짐짓 회개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니 교회에서 용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런 분자가 있음으로 합심된 교회가 되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3. 교회는 본부가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것이니 하늘에서 원하는 뜻은 땅에서도 행해야만 될 것이다 (18)  

만일 어떤 교회가 하늘 본부와 연락이 없는 결재가 된다면 이것은 사단의 회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본부에 원치 않는 것을 행하는 단체는 본부와 대적이 되기 때문이다.  

4. 주의 이름으로만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20)  

교회는 주님의 이름으로 전부가 되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는 예수의 이름이 없이는 기도도 연보도 사업도 하등의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5. 너그러이 용서하는 교회가 되어야 될 것 (22)  

교회는 죄의 권세 잡은 마귀와 대결하여 싸우는 기관이니 너그러히 형제를 용서함이 없다면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운 목적은 완전한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은 아니다. 죄인을 불러 완전케 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니 용서가 없이는 교회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세계 인류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살 수 있는 시대를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교회를 세운 것이니 합심이 없는 교회는 새 시대와는 하등에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합심한 곳에 주님도 함께 하시니 이런 교회는 새 시대를 이루는 승리를 거둘 것이다.  

 

75. 교회 안에 두 가지 지혜  

- 약 3:13~18 -  

 

우리는 교회 안에서 지혜롭게 하는 것이 원칙인 것이다. 그러나 지혜도 마귀로부터 오는 지혜도 있고, 위로부터 오는 지혜도 있는 것이니 이것을 분별할 줄 모른다면 마귀로부터 오는 지혜를 따를 때 교회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1. 마귀로부터 오는 지혜는 무엇이냐 하는 것을 먼저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14~15)

    마귀로부터 오는 지혜는  

 1) 마음속에 독한 시기를 품은 지혜다.  

시기라는 것은 사단의 본질이니 바리새교인들이 아무리 정통을 찾고 있었으나 그리스도를 시기하고 자기의 주권을 따라 해코자 하는 마음을 가질 적에 간교한 묘책을 썼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엇이든지 인간의 묘한 방침으로써 그리스도를 대적했던 것이다. 이는 독사의 행동이라는 것을 주님은 말했던 것이다.  

 2) 다투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위하여 싸운다는 것은 없을 수 없으나 자기의 주권이나 명예나 영리를 위해 다투는 것은 자동적으로 진리를 거스리는 대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망치는 이리의 행동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 15절에 이러한 지혜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고 했던 것이다.  

 

2. 위로부터 오는 지혜 (17)  

 1) 성결이다.  

이 성결이라는 것은 인간 자체의 수양을 따라 오는 것은 아니다. 위로부터 오는 것이니 참된 지혜가 마음 가운데 들어올 때 정욕이라는 것은 자동적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참된 섭리를 분명히 깨닫는 동시에 그 뜻을 준행할 수 있는 마음을 받게 되는 것이다.  

 2) 화평이다.  

하나님은 화평의 신이시니 그 자체가 올 때 조금도 불평이라는 생각조차 있을 수 없게 된다.   

 3) 관용이다.  

하나님은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신이시니 그 신의 역사가 임할 적에 자동적으로 형제를 관용하는 마음으로 대하게 된다.  

 4) 양순이다.  

하나님은 자체에는 해코자 하는 것은 전혀 없는 신이시니 이 신의 역사가 임할 때 중심에 조금도 발악적인 행동을 가질 수 없게 된다.   

 5) 긍휼이다.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는 신이 마음에 와서 역사함으로 자동적으로 형제를 긍휼히 보는 마음에서 움직일 때에 선한 열매가 따르고 절대 편벽과 거짓이 없게 될 것이다. 만일 남을 사랑한다 해도 편벽이 있다면 이것은 위로부터 오는 사랑은 아니다.  

결 론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이 하늘과 땅에 있는 진리이다. 참된 지혜로 화평을 심으면 의의 열매가 거두어지고 마귀적인 지혜로 시기와 다툼으로 심어지는 곳에는 요란함과 악한 일이 열매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 열매를 보아서 알라고 했던 것이다.  

 

76. 의인의 깊은 생각과 실천  

- 마 1:18~25 -

 

하나님의 사람은 어려운 일과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가 안되는 일, 답답한 일, 원망스러운 일 이러한 일들을 당해도 깊이 생각을 하는 일이 있을 적에 하나님은 역사하셔서 실천이 잘못되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제 의로운 요셉의 깊은 생각과 실천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1. 요셉의 깊은 생각  

요셉은 자기와 정혼한 처녀 마리아가 잉태하였다는 말을 들을 적에 그는 경솔히 움직이지 않고 깊이 생각을 하여 가만히 끊고자 하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마리아가 처녀 몸으로 잉태했다는 것은 인간이 말해 보았던들 누구에게 인정을 받을 일은 못된다. 왜냐할 때에 사람이 성령으로 잉태된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 비판해 볼 때 이것은 도저히 이론이 서지 않는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의 아내 될 마리아의 신앙을 존경하는 동시에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가만히 끊고자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어려운 일이 올 때 경솔히 움직인다면 실패 중의 실패가 될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을 향하여 깊은 묵상도 많이 하여 보고 이것을 어떻게 하면 될 것이냐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마리아의 잉태를 이해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왜냐 할 때 이 일은 하나님만이 보증할 일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급히 천사를 청년 요셉에게 보내셨던 것이다. 요셉은 만족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역사적인 하나님의 섭리가 자기 가정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깊이 믿었을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오히려 더 힘을 얻고 기쁨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2. 요셉의 실천  

요셉은 서슴치 않고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동할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이전보다도 아내 될 마리아를 더 존경하는 마음으로 모시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마리아의 거룩한 몸을 조금도 침범한 일이 없이 해산하기를 기다리며 친히 봉사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예지와 예정이 계시기 때문에 요셉 같은 의로운 청년을 마리아의 남편으로 정했던 것이다. 비록 목수의 한 사람이었으나 하나님 앞에는 의로운 청년이었다. 그야말로 인간 사회가 볼 때에는 조롱거리가 된 불행스러운 가정 같으나 하나님 앞에는 역사적인 축복을 받은 가정이 되었던 것이다.  

결 론  

우리는 기독교의 알파가 되는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을 오메가 될 말세의 성도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를 가져야 한다. 말세 복 받는 가정이 되려 할 때 억울한 일, 원통한 일, 답답한 일, 고생스러운 일, 조롱 받는 일, 훼방을 받는 일, 이러한 것들이 요셉의 가정에 있던 것 같이 우리에게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니 하나님을 중심하는 깊은 생각과 실천이 있어야만 될 것이다. 깊은 생각과 지혜로운 행동이라는 것은 전화위복이라는 큰 변동을 일으키는 열매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77. 주님의 말씀과 심판  

- 요 12:46~50 -  

 

말씀과 심판이란 것은 인간을 구원하고 마귀의 세력과 악인을 없애기 위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 많은 학설이 있지만 세상을 구원할 수 있고 심판할 수 있는 말씀은 주의 말씀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주님의 말씀은 심판이란 것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1. 주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46)  

심판은 어두움을 그대로 두고 심판하지 아니하며 어두움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참 빛을 비취어 깨닫게 한 후에 라야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흑암 가운데 있는 백성에게 빛을 보내지 않고 심판을 한다면 이것은 의로운 심판이라고 할 수가 없다(사49:6, 사42:6, 사9:2).  

2.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47)  

인간 자체의 힘으로는 빛을 받아서 깨달았을지라도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올라올 수가 없으므로 주님께서 오신 목적은 심판을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세상 죄를 친히 짊어진 어린양의 몸으로 대속의 제물이 되어 오신 것이니 믿으면 구원이요, 믿지 않으면 멸망이란 것이 멸망의 대지가 된다. 만일 대속의 구원이 없이 심판을 한다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복음의 말씀으로 심판을 베풀므로써 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3. 주님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말씀했기 때문에 (49~50)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오셨으므로 스스로 말씀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명령은 영생을 주는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인간에게 숨김없이 가르친 것이다.  

결 론  

그러므로 은혜시대 사람들에게는 은혜시대에 가르친 교훈대로 심판을 하고 환난시대 사람들에게는 환난시대에 가르친 예언의 말씀에 의하여 심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가르친 말씀은 은혜시대의 구원을 목적하였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요한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가르친 계시록은 마지막 환난과 심판기에 대한 교훈이다(계22:18).  

 

78. 택한 자를 위한 천사 활동  

- 행 10:1~8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타락하고 또는 위험한 자리에 들어갈 때 천사를 택한 자를 위하여 부리는 일이 있는 것이다. 마귀를 들어서 택한 자를 위하여 활동하는 일도 있다. 이제 택한 자를 위한 천사 활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 예언적인 천사 활동 (눅1:10~19)  

하나님은 예고의 일을 위해서는 가브리엘을 활동시키는 것이다. 소식을 전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다고 천사는 말했다(눅1:19). 하늘나라의 소식을 인간에게 알려주는 일은 천사를 통해서 역사하는 것이다. 언제나 시대가 바뀌어지는 큰 역사가 생길 적에는 천사를 동원하는 일이 있다. 양심시대가 끝나고 언약신앙시대가 올 때도 대표적인 사람 노아나 아브라함에게 천사가 나타났던 것이다.

언약신앙시대가 지나고 율법시대가 올 때도 천사의 역사가 모세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율법시대가 지나고 은혜시대가 올 때도 천사가 세례요한의 부친 사가랴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나타났던 것이다. 은혜시대가 지나고 환난시대가 올 때도 천사를 동원하여 택한 자를 한 데로 모으는 역사를 말한다(마24:31). 천사는 하늘에서 보냄을 받기 전에는 인간의 마음대로 오지를 않는 것이다.  

2. 택한 자를 인도하기 위하여 나타난다 (행10:1~8)  

하나님은 인간이 모르는 비밀을 알려주는 일도 하는 것이다. 또는 사람을 소개해 주는 일도 있다. 고넬료는 비록 이방 사람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이였던 것이다. 천사는 그 가정에 나타나서 사도 베드로를 데려다가 복음을 받도록끔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와 사도들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부탁을 받고도 등한히 알고 있으므로 복음을 이방에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천사는 보냄을 받았던 것이다.

또는 빌립을 천사가 인도해서 구스 내시에게 전도한 일도 있다(행 8:26). 우리는 말세의 때가 급할 때에 하나님께서 천사로 인도해서 복음을 받도록 인도하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사52:12과 슥3:5을 보면 마지막 때 사명자에게는 주의 천사가 같이 할 것을 말하였다. 언제나 주의 천사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같이 활동한 것을 말한 것이다.   

3. 보호하기 위하여 활동한다 (단12:1, 행 12:8~10)  

하나님은 필요한 종이나 백성을 보장시켜 주기 위해서는 천사를 동원하는 것이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같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니엘 12장에 북방 세력이 오는 큰 환난에서는 네 민족을 호위하기 위하여 대군 미가엘이 일어난다고 했다.  

4. 적군을 치기 위해서 천사를 동원한다 (사37:36)  

하나님께서 적군이 피해를 못 주도록 천사를 동원하여 막아 주는 일도 있으니 히스기야의 기도에 이와 같은 일을 보여준 것은 앞으로 환난기에 이와 같이 행하시겠다는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준 것이다(욜2:20).  

결 론  

하나님은 말씀으로 역사하시되 종을 들어서 역사하는 일도 있고 천사를 동원하여 이루어지는 일도 있고 마귀를 시켜서 이루어지는 일도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나 천사나 마귀나 다 하나님이 부리는 것이니 최후의 승리는 천사와 같이 하는 사람이 승리한다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 것이다. 마귀를 들어 쓰는 것은 천사의 보호를 받을 만한 사람을 골라 세우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19:11이하를 보면 백마 탄 자가 승리한 다음에는 마귀가 필요가 없으므로 무저갱에 가둔다는 것을 계20:1~3에 말씀하였다.  

 

79. 열매와 가지  

- 사 11:1 -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열매는 가지에 있다고 말한 것은 종말의 사명자를 가르친 것이다. 이것은 10장과 같이 세계적인 환난이 있고 11장과 같은 새 시대가 이루어지는 열매는 가지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이제 가지와 열매에 대하여 본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한 가지는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먼저 가지라는 것은 뿌리가 있고 다음에 있는 것이니 주님께서 당신을 그루터기라고 말한 것은 요한복음 15장에 말씀하였다. 본문에도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은 그루터기를 이루는 근본이 되는 것이니 가지는 열매를 맺는 모든 진액은 그루터기를 통하여 가지에 연락이 되므로써 열매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에 대표적인 한 종이 나옴으로 그 위에 여호와의 신이 강림한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스가랴 4장에 두 감람나무 가지란 말이나 동일한 것이다.

이 가지에 대하여 다시 말하자면 살아서 새 시대를 정복할 사명자를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서는 심판과 새 시대를 말할적에 살아서 안식에 들어갈 종족에게 전할 복음이 되는데는 심판날에 다시 예언할 증인 감람나무의 역사가 일어나므로써 이사야가 받은 비밀의 뜻을 분명히 다시 예언할 대표자를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가지에게 지혜와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신이 임하므로써 모든 선지의 비밀을 분명히 변론하여 전 세계적인 환난에서 모든 백성을 구출시키는 역사를 하는 종을 가르친 것이다.  

2. 열매  

열매라는 것은 대표적인 종이 나와서 그 종의 역사가 그 종들에게 임하므로써 많은 종들이 일어나는 것을 열매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교파를 초월한 종말의 역사에 왕권의 한 클럽을 열매라 하는 것이다. 열매를 맺는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는 것이다.  

 1) 옳은 판단을 가지게 된다.  

만일 옳은 판단을 하지 못하는 종이라면 옳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같이 되는 종은 절대 신과 같이 보고 듣고 말하게 되므로 끝을 완전히 맺는 것을 열매라 하는 것이다.  

 2) 입에 막대기로 세상을 친다.

입에 막대기로 세상을 친다는 것은 계19:10 이하에 백마 탄 자의 입에서 검이 나온다는 말이나 같은 진리다. 누구든지 입에 말씀으로 세상을 치는 자가 아니면 마지막 결실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3) 공의와 성실로 띠를 삼는다.  

공의라는 것은 시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 것이니 이 종은 심판의 다림줄의 진리를 중심으로 하여 성실과 진리로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만일 공의로 띠를 삼지 않고 성실로 띠를 삼는 종이 아니라면 끝을 바로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새 시대를 이루는 결실이라는 것은 완전한 가지가 되는 종이 나타남으로만이 끝을 맺는 것이니 어느 시대나 대표적인 종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은혜시대에는 싹으로 난 예수님이 만민의 기호로 설만한 역사를 한 것이다. 기호라는 것은 끝을 맺는 것이 기호가 아니고 끝을 맺는 종들이 기호를 들고 나가는 것이니 세계 통일의 기호는 싹이 되는 메시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세계 통일의 기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동시에 기호를 들고 나타나는 한 가지가 있어서 종말의 완전 역사를 하게 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80. 기독교 순교의 처음 열매  

- 행 7:51~60 -

 

서 론  

기독교는 순교 없이 열매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순교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는 축복의 열매다. 스데반 청년이 기독교에 순교의 첫 열매가 된다는 것은 그 자신도 축복이요, 기독교에도 큰 열매가 나타났던 것이다.   

하나님이 시키는 순교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는 것이다.  

1. 스데반의 담대한 증거 (51~53)  

담대한 증인이라는 것은 외식을 용납치 않고 절대적인 양심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동시에 시대를 바로 증거한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한 자라도 참된 종을 대적하는 자는 반드시 망한다는 사실을 말했던 것이다. 예루살렘은 역사적으로 참된 종을 피 흘리게 한 예루살렘이니 너희가 회개치 않으면 멸망이라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어떤 교권이나 어떤 정권을 무서워하지 않고 증거하는 자이였다. 만일 어떤 종이 역사적인 교권을 무서워한다면 이것은 순교자의 동무는 될 수 없다.   

2. 영안이 열리며 천계(天界)를 봄 (56)  

담대한 증거 자가 될 때 그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한다는 증거는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의 세계를 보게 하며 주님 자체가 그에게 나타나는 일이다. 이것은 순교자인 스데반에게 큰 힘을 주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하나님은 순교자에게 큰 담력을 주지 않으면 순교자가 될 수가 없기 때문에 스데반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이 그 우편에 서신 것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3. 간곡한 기도 (59~60)  

스데반은 기도에 큰 힘을 얻었던 것이다. 돌무더기 속에서도 괴로운 것을 잊어버리고 돌로 치는 무리를 향하여 간절한 기도가 나온 것은 위에서 주는 축복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어린 청년의 하나에 불과한 집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올린 기도를 그 입에서도 올리게 됐다는 것은 예수와 같이 왕권에 도달하는 승리의 기도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열매라는 것은 이것이 성신 충만의 승리의 열매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스데반의 피로 땅을 적시게 하시고 그 대신 사울을 세웠던 것이다. 사울은 그 당시에 순교의 피를 쏟는 스데반을 바로 죽였다고 판결을 내렸던 사람이다(행8:1). 하나님은 피가 땅에 떨어진 그 피를 대신해서 원수가 되었던 사울을 회개시키기 위해서는 강권 발동을 시켰던 것이다. 주님은 다메섹 길에서 홀연히 하늘로 빛이 비춰주면서 사울은 엎드려 떨었던 것이다.

사울은 부활하신 주를 증거하는 스데반을 죽이는 순교의 눈동자가 되었던 자이었으나 고요한 음성이 들려 오는 소리는 사울의 고막을 울렸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했던 소리였다. 그 음성을 들은 사울은 회개치 않을 수 없는 자리에서 돌아서게 되었던 것이다. 스데반 청년이 순교를 한 열매는 이방의 사도를 대신 세우는 열매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2천 년간 역사의 한 원동력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는 순교의 피가 흐르는 땅에 반드시 큰 열매가 나타났다는 것이 20세기 후반기에 나타난 열매이다. 공산당 세력에서 피 값을 갚는 14만 4천이 일어나는 종말의 역사가 될 것이니 20세기 끝을 맺는 역사는 억울한 피를 흘린 셈의 장막에서 일어날 것은 사실이다.  

 

81. 승천하는 주님의 부탁과 재림주의 부탁

- 행 1:6~11, 계22:6~7 -

 

서 론

주님은 가실 때나 오실 때나 사람을 통하여 역사할 것을 부탁하였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당신의 하실 일을 인간이 해야 된다는 부탁을 말한 것이다. 천국의 복음 운동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하실 일과 사람의 할 일이 결합되기 전에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1. 승천시의 부탁 (행1:6~11)  

주님께서 승천하는 목적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적인 역사를 하기 위하여 승천한 것이니 중보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로 향하여 할 일과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할 일을 다 이루기 위한 중보적인 역사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신의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어 달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이 역사라는 것은 중보적인 예수님의 역할로 되는 역사이니 인간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는 동시에 성령을 부어 주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중보적인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니고는 속죄의 은총을 받을 회개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성신의 역사도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이 내려오게 되는 것이다.

좀더 말하자면 올라가는 기도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려오는 성신의 은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되는 것이니 속죄를 받는 자도 인간이요 성령을 받는 자도 인간이요 이것을 만민에게 증거할 것도 인간이 해야할 일이니 이것을 위하여 쉬지 않고 하늘 보좌 우편에서 역사하는 이는 승천하신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이다. 이 역사는 국경이나 민족을 초월한 역사이기 때문에 땅 끝까지라는 말씀을 하시고 승천하신 것이다.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기간은 20세기 반기를 지나는 기독교 역사를 이룬 것이다.  

2. 재림하는 주님의 부탁 (계22:6~7)  

재림이라는 것은 올라가신 주님의 부탁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야 되는 것이니 다시 올 때는 예언의 말씀을 지켜야만 복이 있다는 부탁을 사도 요한에게 주님은 나타나 부탁했던 것이다. 만일 어떠한 종들이 가시는 주님의 부탁만 존중히 하고 오시는 주님의 부탁을 등한히 한다면 주 재림시에 남은 종이 될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왜냐하면 오시는 주님의 부탁을 무시한 자가 주님을 맞이할 종이 될 수 없고 오히려 오시는 주님을 대적하는 종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승천하는 시대와 재림하는 시대가 다른 시대이기 때문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승천하는 시대는 죄인을 불러들이는 은혜 시기라면 다시 오시는 때는 죄인을 심판하는 심판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기에는 영과 육이 아울러서 받는 구속이니 예언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환난과 재앙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재앙이 나리는 것도 예언대로 될 것이요, 재앙을 피하는 것도 예언대로 될 것이니 예언이라는 것은 재앙 중에 재앙을 받지 않게 하겠다는 예언이니 이 예언을 지키지 않는 자를 주님께서 책임을 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때는 노아 때와 롯의 때와도 같다는 것이다.  

결 론  

종이라는 것은 주인의 부탁을 받은 데로 순종할 것 뿐이요 그밖에는 주인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니 가실 때 부탁은 사도가 받았으니 사도적인 사명은 그 부탁을 그대로 순종하는 역사이다. 다시 올 때는 예언을 지키라는 사명이니 바로 듣고 지키도록 전해야될 사명에 순종하는 것이 마지막 권세 받은 증인의 역사이다(계11:3).  

 

82. 다시 오실 주님의 심정  

- 요 14:1~4 -  

 

서 론  

완전한 사랑이 계신 동시에 실천을 하기 위한 심정에서 가르친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이다. 주님은 이루어 주고 싶은 심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여기에 분명히 나타내셨다.  

1.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1)  

이것은 인간들이 마음에 근심하는 것을 볼 때에 안타까운 심정에서 근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한 인사적인 표현이 아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사람이 근심하는 일을 책임지고 해결해 줄 것을 말함으로 나를 믿으라고 했던 것이다. 믿음이란 것은 모든 근심을 하나님께서 해결시켜 주는데 사용하는 선물이다.   

2.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것이다 (2상반절)  

주님은 이 땅의 사람들이 거처하는 것을 볼 때에 불쌍히 여기는 심정에서 이 말을 한 것이다. 이 것은 사실에 있어서 조금도 숨김없이 인간에게 알려주는 심정에서 쓴 말이다. 우리는 천국을 누가 가서 보았다는 것보다도 주님께서 참된 심정으로 말씀한 것이 더 확실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거짓이 있되 주님은 거짓이 없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3. 있을 곳을 예비하는 것 (2하반절)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영원히 있을 처소를 예비하되 그 사람의 일한 데 따라서 예비하는 것이니 심지어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준 것도 상을 잃지 않도록 하겠다는 공평한 심정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예를 들면 참된 사랑을 가진 부모가 자식에게 좀 더 많은 생산을 내서 기업으로 주고 싶은 심정과 같은 것이다. 주님은 승천하셔서 다시 오실 때까지 쉬지 않고 역사하는 것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많은 상급을 주고 싶은 심정에서 역사하는 것뿐이다.   

결 론  

다시 오시는 주님은 신부 자격을 가진 자들을 영접하는 심정으로 오시는 것이다. 자기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충성을 다하는 종들을 위하여 완전한 도성인 새 예루살렘을 예비하고 그리로 영접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다(계21:1~2).

 

83. 십자가의 승리와 봉한 책  

- 계 5:1~10 -  

 

서 론  

하나님은 예지와 예정이 계신 반면에 완전 구비한 섭리를 기록한 책이 있는 것이다. 이 책은 타락한 인간을 어떠한 방법으로 구원하며 사람을 미혹하는 마귀를 어떠한 방법으로 없이한다는 것을 목적으로 쓴 책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숨은 비밀의 말씀이니 아무나 함부로 떼거나 보거나 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법과 심판할 수 있는 법을 책임지고 행할 자 외에는 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을 뗄 자격은 십자가의 승리하신 주님밖에 없다는 진리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1. 다윗의 뿌리가 된 자이다. 이것은 신성과 인성을 아울러 가진 인격을 구비한 자라는 것이다(5).  

2.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적인 역할을 할 자이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승리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한 예수밖에 없다(6상반절).  

3. 온 세계 인류에게 성령으로 역사할 권세가 있는 것이다(6하반절).  

이것은 율법적인 정치나 교훈으로써가 아니고 각 사람 마음을 바로 세워 놓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완전히 구원할 수 있고 마귀를 완전히 없이할 수 있는 하나님의 법을 맡아서 시행할 자격은 세 가지가 구비된 예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날까지 그리스도의 역사는 봉한 책을 뗄 수 있는 조건을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역사한 것뿐이다. 뗄 수 있는 조건은 다음과 같이 된 후에야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1) 악마의 세력을 없이할 수 있는 조건은 십자가로 승리하고(5)  

2) 사람의 개인적인 중심 속에서 역사 하는 악령을 없이하는 성령의 역사로써의 조건이 되고(6)  

3) 전 세계 인류에게 이 역사가 확장된 후에야 이 책을 뗄 시기가 온다는 것이다(9).  

그러므로 이날까지 세 가지의 조건이 완성되기 위하여 역사한 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이루어진 일이다.  

결 론  

이 책을 뗄 떼는 끝을 맺는 심판의 시기인 것은 일곱 인 떼는 비밀에 있고 심판을 이루는 환난은 일곱 나팔의 비밀에 있고 전 세계 인류가 전멸되는 불에 살라지는 재앙은 일곱 대접의 비밀에 있다. 누구든지 이 세 가지 인과 나팔과 대접의 비밀을 바로 알고 증거할 때에는 기독교 종말에 끝을 맺는 역사라는 것이다.  

 

84. 성령의 역사와 심판기의 역사  

- 욜 2:28~32 -  

 

서 론  

시대를 따라 역사하실 것을 요엘 선지를 통하여 분명히 가르쳐 준 것이 여기 본문이다. 하나님은 시대가 이루기 전에 먼저 이러한 시대에는 이렇게 역사하고 저러한 시대에는 저렇게 역사하신다는 것이 선지의 예언인 것이다.  

이제 시대와 역사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여 말할 수 있다.  

1.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줄 때에는 어떠한 역사인가(28~29).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코자하여 독생자의 피로 속죄의 구원을 완성하시고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서 그 진리를 바로 믿고 그 진리대로 살 수 있는 역사를 하시되 남종과 여종을 세워서 역사하시고 더 큰 역사를 하도록 신을 부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사람의 몸에 부어주는 것은 심판기에 쓰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인 것이며 세세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금일 세계 모든 민족이 성령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 20세기 반기가 지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날까지 역사는 이것을 목적한 것 뿐이다.  

2.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캄캄한 흑암 시대가 올 것이다(31).  

이와 같은 흑암 시대가 올 때의 역사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고 하였다(사41:25).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세상의 정치인들을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음같이 밟으리라는 것은 흑암 시대에 역사하는 종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은혜시대에 성령을 받은 종으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적군을 무찌르고 나가는 역사이다.  

3. 피할 자가 환난을 피하도록 하는 역사이다(32).  

이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목적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영, 육이 아울러 구원받도록 하는 역사이다. 이와 같은 역사는 강권 역사이다. 은혜시대에는 신자들의 육체가 쓰러져 죽을 때에 영혼을 구원하는 역사였으나 이 역사는 모든 인류가 다 쓰러질 때 쓰러지지 않고 남은 자가 되도록 하는 역사이다.  

결 론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요. 은혜를 받되 성령을 천하만민이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은혜시대요, 다음은 흑암이 덮인 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로 흑암을 이기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인류가 전멸되는 날에 자기의 택한 자로 아무런 피해를 당치 않게 하는 것이 기독교의 시대적인 역사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대를 따라 그 하나님께 순종할 때 시대적인 축복과 구원을 받는 것이다.  

 

85. 심판을 향한 두 가지 길  

- 요 3:16~21 -  

 

서 론  

하나님은 심판을 목적하고 역사할 때 인생은 자동적인 두 가지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만일 두 가지 길로 갈라지지 않게 하고 심판을 한다면 심판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함으로써만 당신의 사랑의 뜻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심판의 법을 세우실 적에 택한 자로서의 살길을 열어 주고 심판하는 것을 의로운 심판이라고 한다.   

이제 의로운 심판을 행하시는 데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길이 있다.  

1. 빛이 세상에 왔어도 빛을 미워하고 어둠을 사랑하는 것은 자동적인 사망의 길이 될 것이다 (19)  

왜냐하면 심판이라는 것은 억압적인 심판이 아니고 자기의 무엇을 사랑하는데 따라서 갚아 주기 때문이다. 빛을 미워하고 어둠을 더 사랑한 자는 자동적으로 어둠의 지옥으로 향하여 가는 것이 자동적인 의로운 심판이 될 것이다. 만일 빛을 사랑하는 사람을 어두운 데로 가라고 한다면 이것은 불의가 될 것이다. 심판을 받는 자는 자기가 어둠을 사랑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심판이 될 것이다.  

2. 진리를 좇는 자는 빛을 따라 오게 되니 결국은 빛의 광명한 나라를 가게 되는 것이 기독교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만일 진리를 좇지 않는 자를 하나님이 사랑해서 그를 구원해 준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불의의 심판이 될 것이다. 이 진리라는 것은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이라도 따라만 오면 살려 주마 라는 약속의 말씀이 선한 목자 예수님의 진리인 것이다. 진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생을 사랑하시사 어떻게 구원해 준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 진리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언약의 말씀이니 그 말씀을 좇기만 하면 하나님은 진리대로 행하여 주실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빛도 어둠도 창조한 것은(사45:7) 하나님의 공평한 공의의 사랑을 베풀기 위한 방침이다. 왜냐하면 선과 불의를 갈라놓기 위한 모략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심판은 사람으로서의 자유를 주는 동시에 결말을 그들의 요구대로 이루어 주는 것을 심판이라고 하는 것이다.

 

86. 기도에 전력하는 교회와 말씀에 전력하는 교회   

- 행 1:12~14, 계11:3~4, 22:16 -

 

서 론  

하나님께서 언제나 시대적인 역사는 개인을 통해서가 아니고 성도가 뭉쳐진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을 순종하는 기관이니 하나님의 시키심을 순종할 것뿐이다.  

1. 기도에 전력하는 교회 (행1:12~14)  

주님께서 구름 타고 승천할 때 남은 교회는 기도에 전력하는 교회였다. 이것은 왜냐 할 때 성신 강림을 목적했기 때문이다. 성신이 강림한다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의 피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강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환난이 올 때 흩어졌던 무리들은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보고 새 힘을 얻어 전혀 기도의 힘을 쓰는 다락방 교회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 때 교회는 기독교 종말적인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이 아니요, 기도를 전력하여 성신의 권능을 받아 가지고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와 부활을 만방에 전하는 큰 사명을 맡은 본부 교회가 되었던 것이다. 이 때 그들이 기도에 전력을 두지 않고 산재 상태에 있었던들 이러한 큰 성신의 역사를 맛보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들은 승천하시는 주님의 부탁을 하나같이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자기의 사생활을 생각지 않고 전력을 다하여 합심 기도의 주간을 정했던 것이다.

합심이라는 것은 주님의 뜻만 순종한다는 것 외에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들의 과거는 열 두 제자로 기도의 전력을 두고 뭉쳐진 일이 없었다. 겟세마네 동산의 하룻밤 기도도 잠만 자고 있던 그들은 십일이라는 기간을 전력을 다해서 뭉쳐 부르짖는 기도가 있었던 것이다.   

인생은 어려운 환난을 통과하므로써 깊이 깨닫는 지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니 십자가의 환난기를 지나고 보니 자기네가 가졌던 주관, 기대는 어긋나는 일을 당할 때 자기를 포기하고 승리의 부활을 이루신 주님의 명령만을 순종하자는 것으로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은혜 시대 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사명을 위하여 성신의 역사를 기다리고 합심 기도로만이 세계를 정복했던 것이다.  

2. 말씀에 전력을 둔 촛대교회 (계11:3~4)  

말씀에 전력을 둔다는 것은 말씀대로 재앙이 나리고 말씀대로 재앙으로 땅을 치고 말씀대로 보호가 있고 말씀대로 심판하는 시기에 남은 교회를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는 증인이 권세를 받아 예언하는 기간에 나타난 감람나무 촛대교회다. 이 때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 이것은 은혜 시대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때는 전혀 기도에 힘을 써야 할 때는 지나고 이미 기도에 힘을 써서 기름 준비한 처녀들이 예언의 말씀의 등불을 들기에 전력을 두는 주재림기다.

재림 전 1260일이라는 기간에 되어 지는 일이니 시대적인 종말의 예언을 밝히 증거하는데 전력을 두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재앙의 날에는 예언을 가해도 감해도 구원이 없다는 말씀이 계22:18~19에 있기 때문이다. 이 촛대교회는 재앙의 날에 대중을 살리기 위한 사명을 띤 교회이니 원수가 피해를 못 주도록 하나님은 보호한다는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씨를 뿌리는 역사보다도 알곡을 모으는 때 남은 교회다. 영혼이 천당에 가는 시대가 아니고 살아서 죽음을 맛보지 않고 남은 종 남은 교회로써 새 시대를 정복하는 권세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재앙이 내릴 때 그 진노를 받지 않는 교회는 말씀에 전력을 두어야만 될 것이니 진노의 날은 성령을 부어 주는 날이 아니고 재앙이 쏟아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교회가 말씀에 전력을 두지 않는다면 이 교회는 종말의 큰 미혹을 가져오는 거짓 선지의 세력을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권세의 역사는 예언의 말씀을 바로 증거하는 종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결 론  

우리는 교회가 바로 서느냐 못 서느냐 하는 문제가 은혜 시대라면 끝을 바로 맺느냐 못 맺느냐 하는 것이 환난기다. 기도에 전력을 다하는 교회가 은혜 시대의 중심이 되었다면 말씀에 전력을 두는 촛대교회가 환난기에 중심이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교회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는 시대적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있는 것이니 교권은 우리와는 하등의 필요가 없는 것이니 하나님께로 오는 권세를 받는 자밖에는 참된 교회를 인도할 수 없는 것이다.  

 

87. 믿는 자의 받는 권세와 지키는 자의 받는 권세

- 요 1:7~18, 계2:26~28 -

 

서 론  

하나님께서는 만물에게 권세를 줄 수 없으나 자기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에게 권세를 주는 것은 영광을 받고자 하는 뜻이 있는 것이다. 권세라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에게 주는 권세도 있고 악한 자에게 주는 권세도 있는 것이다. 악한 자에게 주는 권세는 잠깐동안 허락하는 일이 있는 것이요, 사랑하는 자에게 주는 권세는 영원한 권세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권세라는 것은 반드시 주시되 차별이 있는 것을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1. 믿는 자에게 주는 권세 (요1:10~12)  

하나님께서 인생을 향하여 죄가 없을 때에는 에덴동산에서 지키라는 사명을 주었던 것이다. 그 때 지켰다면 그 권세는 믿는 자에게 주는 권세가 아니고 지키는 자에게 주는 권세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키지 못함으로 자녀의 권세까지 잃어버리는 인류 타락의 비참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잃어버린 권세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지키라는 법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음으로 믿음으로써 그 권세를 다시 찾도록 한 것을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하는 것이다.

메시야로 오신 것은 이 권세를 주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준다는 권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권세를 택한 자에게 찾아 주기 위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부활하여 인생을 대할 때에 “너희는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한 것은 잃어버렸던 권세를 받을 자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권리와 요청할 수 있는 권리와 상속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신 것이다. 이 권리를 가진 자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인도와 양육과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이 권세는 천국 시민권이다.  

2. 지키는 자에게 주는 권세 (계2:26~28)  

하나님은 자녀 되는 권세를 주는 동시에 너는 이런 일을 하라고 사명을 맡기는 것은 더 큰 철장 권세를 주고픈 사랑에서 맡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서 사명을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주려는 목적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맡긴 사명을 끝까지 지키면 동등한 권세를 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이 예수와 같이 사랑하는 한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맏아들이라고 롬8:27에 말하였다.

맏아들 되시는 예수님이 끝까지 사명적인 계명을 지킴으로 철장 권세를 받았다면 작은아들 되는 우리도 맡은 일을 죽기까지 지켜야만 될 것이다. 이것은 첫째 아담을 떨어뜨리던 마귀를 쳐서 없애기 위해 주는 권세이다. 다시 말하면 억울한 피 값을 갚기 위한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자기의 맡은 일을 충성치 않고도 다시 오시는 주님을 고대한다면 이것은 철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다. 철장 권세라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줄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엡4:13~14).  

결 론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낸 목적은 훌륭한 영광의 나라를 이루어 놓자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타락을 슬퍼하는 하나님은 먼저 자녀의 권세를 주기 위하여 성령을 부어 주는 동시에 다시 왕국을 이루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다. 이 때에 중생을 받은 정도의 신자는 백성이 될 것이요, 철장 권세를 받기까지 사명을 지키는 자는 왕권으로써 새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될 것이다.  

 

88. 사도들의 예언을 기억하라  

- 유 17~23 -  

 

서 론  

성령으로 시작된 신령한 교회가 종말의 심판기가 올 때에 지도자의 부패로 말미암아 사도들이 피 흘려 세운 교회가 막대한 피해를 당하게 될 것을 성령님은 미리 아시고, 사도들에게 감동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을 한 것이니 우리는 이 예언을 마음 속 깊이 기억하고, 정신을 차려 교회를 바로 지도하는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금일에 우리의 원수가 되는 자들은 본문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1.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다 (18)  

이들은 사도적인 경건한 신앙 생활을 변질시켜서 인본주의적인 세속화로 흐르되 육체적인 정욕의 자유를 부르짖는 동시에 초대적인 신앙 노선을 오히려 기롱하는 자들이니 신령한 일을 어리석게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이다.  

2. 당을 짓는 자들이다 (19상반절)  

우리는 그리스도는 머리요, 성도는 그 몸의 지체라는 것이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사상이며, 정신이며 생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세에는 부패를 따르는 무리들이 한 자기의 그룹을 만들어 보려는 야욕적인 교권주의의 파당이 올 것을 말한 것이다. 이런 무리들은 심판 날에 용납할 수 없는 미운 물건이 될 것이다.  

3. 성령이 없는 자들이다 (19하반절)  

기독교라는 것은 성령이 없으면 자동적으로 사단의 회가 되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잉태할 때부터 성령의 역사로 시작되고 부활 승천할 때도 성령으로 된 것이다(롬1:4, 8:11). 또는 교회가 완전히 서는 것도 성령의 강림으로 시작된 것이니 교회가 끝을 맺는 것도 인간의 힘과 능으로 못하되 하나님의 신으로만이 되는 역사를 종말의 역사라 하는 것이다(슥4:6, 계11:4~5).  

결 론  

아무리 심판기의 교회가 부패했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이니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는 사람을 통하여 영생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려서 끝까지 남은 자는 그리스도의 강림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도적인 신앙에서 조금이라도 변하여지면 개포도가 되는 것이니 심판을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계14:18~19).  

 

89. 베드로와 요한의 사명 차이점  

- 요 21:15~25 -

 

서 론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특히 대표적인 자로서 인정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시인하는 바이다. 그러나 대표적인 두 사도의 사명의 차이점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두 사도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기독교 종말의 시대에 관한 문제가 결부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사명의 차이점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사명을 구별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 베드로의 맡은 사명 (15~19)  

주님께서 당신을 부인하던 베드로에게 세 번까지 반복하여 물어 본 것은 이 사람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베드로의 심정을 몰라서가 아니라 베드로의 겸손을 요구하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모든 제자는 다 부인할지언정 자기만은 주를 위해 죽겠다고 장담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큰 사명을 가진 종이 가룟 유다 외에 더 큰 실수를 한 자는 베드로였다. 그러나 베드로가 끝까지 주님을 따라 갔기 때문에 이런 실수도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가 미리 도망했던들 이런 과오는 없었을 것이로되 끝까지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따라 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실수가 있어도 제일 열심히 있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주님은 “네가 얼마만큼 나를 사랑하는 중심이 있어서 애썼다는 것을 내가 아는 것이니 너는 낙심 말고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것은 은혜 시대의 양떼에게 양식을 나누어줄 복음의 총 책임자로 너를 세운다는 약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들어서 높이 썼던 것이다.

이방 땅에 복음을 나가 전하는 일에 문을 연 자도 베드로요, 예루살렘 교회에 큰 부흥을 일으킨 자도 베드로요, 기독교 역사에 제일 큰 이적을 먼저 행한 자도 베드로요, 심지어 옥에 갇혔어도 천사가 그를 옥에서 해방해 준 일도 그의 사명이 컸기 때문에 천사까지도 동원했던 것이다. 주님은 사명을 맡긴 후에도 사명을 감당하도록 역사해 주겠다고 말할 적에 네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주님은 사명자에게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해주는 것이 주님의 책임이라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2. 요한 사도의 사명 (20~23)  

베드로는 요한 사도의 사명을 주님께 물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는 질문이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머물러 두신다”고 하셨다. 이것은 요한의 사명을 말한 것이다. 요한의 사명은 주님이 다시 올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사명적으로 받은 계시록은 당신이 재림할 때에 이루어질 사명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를 들어서 크게 역사했다는 일은 있으나 요한을 들어서 크게 역사했다는 일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으로 본다면 베드로보다도 요한이 더 크게 쓰여져야 할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제일 사랑하는 제자요, 십자가 밑까지 실수 없이 따라가 십자가 앞에서 주님 대신에 아들이 된다는 맹세의 부탁을 받은 사도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을 들어서 큰 부흥이나 큰 이적 기사를 나타낸 일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요한은 장로의 한 사람으로서 성모 마리아를 끝까지 받들어 효성을 다한 제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제일 깊은 주님의 교훈을 직접 받아서 쓴 일은 있으나 큰 놀라운 역사는 없었고 모든 제자가 다 순교를 당했지만은 그는 구십 노령으로 밧모섬에 가서 말세의 영원한 복음이 되는 안식에 들어갈 남은 종과 남은 백성이 읽고 듣고 지켜야 될 계시록을 받아서 기록하여 세상에 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계시록은 이 날까지 봉한 책으로서 전하지 않고 머물러 있었던 것뿐이다.   

이 계시록의 비밀은 주 강림시 재앙의 날에 전해야 될 사명자가 다시 꿀같이 하나님께 받아먹고 쓴 것이 있지마는 세계 만방에 다시 예언한다는 것을 사도요한은 계시로써 받은 것뿐이다(계10:8~10). 사명적인 이름까지도 베드로는 사명적인 이름을 불렀으나 요한은 우뢰의 아들(보아너게)이란 이름을 받았지만 숨겨 두고 만 것은 그 뢰자(雷子)라는 이름은 심판이 나릴 시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재림시에 전할 복음을 왜 요한에게 미리 계시를 주었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성경을 완전한 책으로 이루어 놓음으로써 그 책을 만방에 전할 것이기 때문에 신약전서를 완전히 구성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종말의 증인은 다시 해석해서 증거함으로써 다시 예언자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금일에 와서 어떤 사람이 계시록을 맡아 가지고서 성경이 다시 나온다고 하면 이것은 혼선 중에 혼선이 될 것이며 기독교는 완전한 진리가 구비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예지와 예정이 계신 동시에 어떻게 종말에 가서 세상에 환난, 재앙, 심판을 나리며 어떻게 종을 들어서 쓰며 교회를 어떻게 보호해서 남은 종과 남은 교회로써의 새 시대를 이룬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 것이 사도 요한이 받은 종말의 복음이다.  

결 론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를 놓아 터를 닦은 복음의 역사라면 요한의 사명은 기독교가 끝을 맺는 즉,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는 추수기에 사명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생을 받고 성령을 받는 것이 베드로를 통해 받은 복음이라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서 재앙의 날에 재앙을 받지 않고 구원받는 복음은 기독교 종말에 끝을 맺는 역사가 될 것이다. 세밀히 말하면 은혜 시대 역사의 대표적인 사도는 베드로요, 환난 시대의 대표적인 사도는 요한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90. 만국 위에 세운 예레미야  

- 렘 1:4~10 -

 

서 론  

하나님께서 육적 이스라엘이 말기를 당하여 바벨에게 먹힘을 당할 일을 앞에 놓고 눈물의 선지 예레미아를 부를 때 너를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무너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고 하시었다. 이것은 예레미야 한 사람을 가르친 말이 아니고 영적 이스라엘이 바벨화 되는 심판기에 사명자를 가르친 예언적인 표증이라고 볼 수가 있다. 우리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명령할 때 하신 일은 우리에게 해당된 것임을 뜻 깊이 알아야 할 것이다.  

1. 태에서 나기 전에 구별했다 (5)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되는 일은 사명자가 나기 전에 말씀한 대로 사명자를 그 위치에서 탄생케 하는 것이다. 말세에 동방 땅 끝에 종을 세운다는 일도 땅 끝에 종이 나기 전에 미리 말씀한 것이다. 말세의 종이 어머니 뱃속에서 나기 전에 예정하신 섭리가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이 땅에 출생되었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할 것이다.  

2. 예레미야의 겸손 (6~7상반절)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적에 마음이 겸손할 대로 겸손했던 것이다. “나는 아이라 말할 줄도 알지 못하나이다.” 하는 대답을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 크게 쓰여질 종이 되려는 사람은 자기에게 역사가 임할 적에 마음이 더 겸손해지며 자신이 없는 생각이 나야만 된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좀 은혜가 임할 적에 자신이 만만한 생각이 난다면 이 사람은 아직까지 만국을 위하여 쓸만한 종이 되었다고 볼 수가 없다. 이 사람은 한 번 넘어지고야 일어날 사람이다. 예수를 용기있게 따라가던 제자들도 자기가 서로 높아지겠다고 생각이 들 때 다 한번 넘어지고 실패를 당한 후에야 일어났던 것이다.  

3. 순종할 것뿐이다 (7하반절)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 것이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크게 쓰여질 종은 하나님께 순종할 것뿐이라는 것 이외는 딴 것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자기의 주관과 자기의 포부를 앞에 품고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이 사람은 만국을 위하여 세우는 종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순종을 제사보다 낫게 여긴다는 것은 이것을 두고서 말한 것이다.  

4. 담대할 것이다 (8)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구원하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니 나는 두려울 것이 없다는 담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원수를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종은 만국 위에 설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심하는 불완전한 신앙이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 임해야 될 것이다 (9)  

여호와께서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며 내 말을 네 입에 두노라 고 하시었다. 만일 어떤 종이 입에 말의 실수가 많고 횡설수설하는 입이라면 만국 위에 설 종은 못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 임함으로써만이 세계적인 사명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 론  

이러한 종이 된 자라면 파괴할 수 있는 권세도 있고 건설할 수도 있는 권세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은 말세 종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국부적인 활동은 하였지만 만국 위에 나선 종은 실지 아니었다. 예루살렘 거리를 다니면서 울던 예레미야였다.

예루살렘 거리에 빨리 왕래하며 찾아봐도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했다. 이것은 예언적인 일이 된다(렘5:1). 그때는 예루살렘에만 성전이 있으니 예루살렘에서 그는 울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세 종은 만국 위에 교회가 섰으니 만국을 위하여 외치는 일을 해야만 될 것이다. 예레미야는 육적 성전이 황폐될 것을 슬퍼했지만 말세 종은 영적 교회가 황폐될 것을 보고 슬퍼해야 할 일이다.  

 

91. 영적 지도자가 되는 길  

- 출 2:1~25, 3:1~8 -  

 

서 론  

영적 지도자라는 것은 정치적이나 문화적이나 어떤 경제적 지도자보다도 제일 큰 사명자니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쓰는 자를 영적 지도자라 하는 것이다. 영적 지도자는 인간 정계나 문화계, 경제계를 초월한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도자가 되려면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하느냐 하는데 대하여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장성기의 길 (2:1~10)  

영적 지도자는 자라날 때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보호와 인도를 받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예지 예정이 계심으로 모태로부터 택하되 그 시대를 따라서 나게도 하시고 자라게도 하시는 것이다. 언제나 마귀는 영적 지도자를 해치려는 박해는 어려서부터 따라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생명을 빼앗지 못하도록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이다. 그 길은 전화위복이라는 하나님의 비밀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자라는데 불행스러운 것 같으나 결국은 영적 지도자를 만들기 위하여 불행스러운 환경에서 자라게 하는 것이다. 모세는 세상에 나올 때도 원수의 공포 속에서 낳고 자랄 때도 원수의 무서운 정권 아래서 자라나되 하나님의 보호는 항상 같이 했던 것이다. 영적 지도자는 시대적인 혁명을 일으키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원수의 강한 세력 아래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원수의 강한 압박 속에서 장성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라날 때부터 하나님의 보호 안에서 자라나게 하며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해서 기른다는 것이다.  

2. 시련의 길 (2:11~25)  

영적 지도자는 실패를 당하게 한 후에야 지도자의 자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즉 남을 지도하려면 자기가 어려운 시련을 겪어 보아야만 되기 때문이다. 모세는 애굽의 학술을 배운 인격이었으나 이것으로만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실패를 당케하여 미디안 40년의 시련의 길에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세계로 인도했던 것이다.

영적 지도자가 되려 할 때는 인간과는 끊어지도록 만들어 놓는 것은 하나님과만 접촉할 기회를 주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즉 사람에게 박해를 받고 축출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숨어 있지 아니하면 안될 환경으로 몰아 넣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명예와 권리의 영광을 맛보면 하나님과 교통하는 마음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적 지도자로 쓰려는 사람은 세상의 쓴 맛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계10:10, 사40:27).  

3. 명령을 받는 길 (3:1~8)  

하나님은 영적 지도자를 명령할 때 홀연히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기대나 어떤 연구나 계획을 가질 때가 아니다. 만일 자기의 어떤 주관적인 계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인간 지도자는 될 수 있으나 영적 지도자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영적 지도자는 초자연적인 신의 역사 없이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절망, 낙망, 공포 속에서 명령이 나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를 믿지 말고 하나님만 믿고 나서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니 인간의 어떤 힘이나 지식이나 세력을 초월한 역사이기 때문에 홀연히 명령이 나리되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하는 명령이다. 인간이 볼 때는 어리석은 일이요, 큰 위험을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이 명령을 받는 자는 목숨을 내걸고 참된 희생이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이다. 여호와만을 앙망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길이다. 실패 같으나 성공이요, 죽는 길 같으나 생명이요, 약한 것 같으나 강한 역사가 일어나는 길이다. 앞으로 전진할 때 그때 그때 홀연히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같이 하는 길이니 조금도 좌우나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시대가 바뀌어지는 동시에 당신의 영적 활동의 법을 변경시킬 때 영적 지도자를 들어 쓰시는 것이다. 언약 신앙 시대에는 아브라함에게, 율법시대에는 모세에게, 은혜시대에는 그리스도에게, 환난 시대에는 동방의 사람(말세 증인) 이와 같이 쓰시는 것은 지도자 없이는 시대를 개혁시키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에게는 생사를 좌우할 수 있는 권세를 맡긴다.  

 

92. 선지서를 전하는 바울과 말세증인  

- 행 28:23~28, 계 10:5~11 -  

 

서 론  

하나님의 말씀인 선지서는 신약 성서의 원체와 같은 의미를 깊이 알고 우리가 성경을 논해야 될 것이다. 바울도 로마에 가서 이사야서를 들고 강론을 했던 것이다. 말세의 증인도 선지서를 들고 증거할 것을 말했다. 그러면 바울의 강론과 말세 증인의 증거의 차별 점을 분명히 알지 못하면 성서의 혼선을 가져올 염려가 있다.  

1. 선지서를 강론하는 바울 (행28:23~28)  

바울은 일생 동안 어디로 가나 선지서를 강론했다. 심지어 로마에 가서 셋방을 얻고 오는 사람마다 선지서를 강론했던 것이다. 그 목적은 예수님 한 분만을 이방인에게 말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 사명은 여기에 국한된 줄 알므로 선지서 전체를 강론할 자격은 없었다. 왜냐하면 거기에 국한된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엡3:1~3).

바울은 계시로 받되 선지서를 통하여 예수님의 일을 밝히 증거할 수 있는 영감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일을 정확히 선지서를 들어서 강론을 권위 있게 한 사람은 사도 바울 밖에 없다. 그러므로 바울은 친 수로 신약 성경 14권을 쓰게 되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특별한 은혜를 받은 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바울의 강론이 없었던들 기독교의 십자가의 복음은 확실한 광명을 이루지 못할 염려가 없지 않는 것이다.

그는 특히 바리새교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성서에 능한 학자의 한 사람이었다. 구약 성서의 학자적인 자격을 가진 바울은 계시를 아울러 받게 될 때 천재적인 강론을 말로도 하고 붓을 들어 쓰기도 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의 일을 분명히 복음적으로 알려면 바울 서신을 볼 필요가 있다.  

2. 선지서를 전하는 말세 증인 (계10:5~11)  

사도 요한은 묵시를 볼 때 다른 천사가 몸에 구름을 입고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 그 손에 펴 놓인 작은 책을 들고 오른발은 바다를 밟고 왼발은 땅을 밟고 사자같이 부르짖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큰 소리로 외치기를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고 우렁찬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것은 천사가 전한다는 것을 본 것은 아니고 말세의 사명자가 이와 같이 외쳐야 할 광경을 보여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한 일이 선지서와 같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제목으로 말했다면 말세 증인은 하나님의 심판의 비밀인 선지서와 같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을 목적한 해석이다. 만일 심판 날에 가서도 바울 서신만 증거하고 그밖엔 증거 못한다면 이 사람은 말세 증인은 못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교회에 가서 예수 믿으시오 하며 전도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바울의 강론인 편지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분명히 알았다면 완전 계시인 계시록을 통하여 심판기에 될 일을 분명히 알되 선지서를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바울이 이사야서를 든 것은 그리스도 한 분만을 목적하여 들었고, 말세 증인이 선지서를 드는 것은 심판기에 남은 종과 남은 백성들에게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데는 어떻게 된다는 사실을 강론하여야 할 것이다.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가 세상에 와서 행한 일을 밝히 증거키 위한 목적이요, 말세 증인은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으로서 당할 환난과 또는 환난 가운데 받을 보호와 환난 중에 역사하는 역사와 거짓 선지자의 미혹을 바로 알려주어서 미혹 받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죽음을 맛보지 않고 안식에 들어갈 백성들을 살길로 인도하자는 목적이다.  

결 론  

우리는 바울의 서신과 계시록을 반대적으로 본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편지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고 계시록은 예언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했으니 이것을 합할 수가 없다. 즉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말세 증인이 믿음으로 천당 간다고 해도 위험이요, 바울이 증거할 때 예언을 지켜야 한다고 했어도 탈선이 될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일만 바로 증거했기 때문에 탈선된 교훈은 조금도 강론한 일이 없다. 말세 증인은 심판 날에 재앙을 받지 않도록 하는 사명이 있으니 이 예언의 말씀을 증거해야만 탈선이 없을 것이다.  

 

93. 성경을 깨닫는 시기

- 눅 24:44~49 -  

 

서 론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때가 되기 전에 필요 없이 깨닫게 하는 일은 도저히 없는 것이다. 제자들이 3년 동안 그리스도를 따라가며 이적을 보고 교훈을 받고 심지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하늘의 음성을 듣기도 하고 예수님의 본체의 영광을 본 사실까지 있지만 시기가 되기 전에는 절대 그 말씀을 깨닫지를 못했던 것이다.

만일 성경을 아무 때나 누구든지 마음대로 깨달을 수 있는데 국한된 것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시기가 되기 전에 성경을 억지로 풀려는 것도 실패의 근본이요 시기가 되었는데도 성경을 깨닫지 못하는 것도 멸망을 자취하는 인간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어떠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때를 따라 성경을 깨닫게 해 주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해 주고 있다.  

1.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을 해 보는 사람에게 (마1:19~23)  

아무리 때가 온대도 어떤 학자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는 것은 아니다. 목수의 한 사람인 요셉은 어려운 난제를 앞에 놓고 경솔히 말하지 않고 행동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기다릴 때 천사가 나타나서 성경을 깨닫게 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성경을 깨닫게 아니하였더면 마리아는 큰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때가 될 때 하나님은 가장 의로운 사람에게 당신의 비밀을 깨닫게 해 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요셉같이 의로운 사람, 인내력이 있고 깊은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시대적인 비밀을 알게 할 것이다.  

2. 구속을 기다리는 자에게 (눅24:21~27)  

아무리 낙심될 일이 와도 낙심치 않고 구속을 기다리는 심정에서 염려하는 자에게 나타나신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참된 메시야로 믿었던 그들이 슬픔에 잠겨서 염려하며 길을 갈 때 홀연히 주님 나타나시어 성경을 가르쳤던 것이다. 누구든지 낙심될 일, 슬픈 일을 당해도 타락하지 않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자에게 비밀을 알게 해 준다. 만일 어떤 사람이 뜻대로 안 된다고 낙심, 원망하면 안될 것이로되 자기가 도저히 깨닫지 못하는 심정에서 안타까워하는 자에게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3. 공포 속에서 마음이 변치 않은 자에게 (눅24:36)  

우리는 낙심될 일을 당할 때 떠는 것이 약점이다. 제자들은 유대인이 두려워서 문을 걸고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주님을 배척하는 마음이 아니요, 비겁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누구든지 진리를 모르고 떠는 자에게 진리를 알게 해 줄 책임은 주께 있는 것이다. 이때 주님이 그 제자들에게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안될 경우에 처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깨닫게 해주는 동시에 사명을 맡겼던 것이다. 세계적인 사명은 내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전하는 동시에 회개를 만방에 알리라고 했던 것이다.  

4. 성경 읽기를 좋아하는 자에게 (행8:29~34)  

아무리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를 좋아하는 자에게 빌립을 친히 인도해서 성경을 깨닫고 믿도록 했던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서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자는 성경을 누구를 통해서든 지 깨닫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다.  

5. 항상 기도를 힘쓰는 자에게 (행10:30~38)  

고넬료는 성경을 모르지만 하나님이 계신 줄 알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를 힘쓸 때 하나님은 강권으로 베드로를 인도해서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여 그 가정을 구원했던 것이다. 그때 베드로까지도 고넬료의 가정을 통해 진리를 완전히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할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성령이 나리는 것을 볼 때 이방인의 집을 가기를 꺼리던 사도들은 완전히 복음의 진리를 확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지금은 누구든지 하나님께 상달하는 기도를 통해서 시대적인 말씀을 분명히 알도록 지시할 것이다. 계11:1을 보면 성전 제단 안에서 경배하는 자를 하나같이 시대적인 비밀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결 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화를 가져오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벧후1:20, 3:15~18). 종이란 주인이 알려주면 주인의 말대로 전해줄 것뿐이다. 만일 어떤 종이 내막을 알려주지 않는데 자기 멋대로 가서 전한다면 이것은 망령된 행동일 것이다. 증인은 시대적인 비밀을 주님이 깨닫게 하는 그대로 증거할 것 뿐이다. 모든 사도와 성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그대로 전하기 위해서 피를 흘렸고 말세 증인은 작은 책을 꿀 같이 먹고 배에서 써도 만방에 예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94. 재림에 대한 징조와 확실한 예언  

- 벧후 1:12~21 -  

 

서 론  

우리는 주 재림을 믿는 신앙에 대하여도 확실한 징조도 있고 확실한 예언도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우리에게 완전한 신앙을 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징조만 있고 확실한 예언이 없어도 불완전이요, 예언만 있고 징조가 없어도 완전한 것은 아니다. 징조가 확실하고 예언도 확실하니 이것은 합법적인 진리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제 징조와 확실한 예언을 성경으로 다음과 같이 찾아본다.  

1. 재림에 대한 징조를 봄 (16~18)  

이 날까지 기독교에서 재림에 대한 확실한 징조는 보여진 것으로 알고 있으나 확실한 예언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 자체도 징조는 내가 보았으나 확실한 예언을 분명히 모른다고 말했다. 베드로가 재림의 징조를 보았다는 것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변화산에 올라가서 직접 눈으로 그 영광도 보았고 주님의 자체를 보았고 똑똑히 음성도 들은 것이다. 이것을 보아서 확실히 주님은 강림한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또는 주님이 승천할 때 천사가 말했다(행1:11).

그러나 다시 온다는 징조는 친히 눈으로 보았으나 다시 올 때 예언은 계시록을 통해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은 어찌하여 재림의 징조는 있게 했으나 이 때까지 예언의 확실한 것은 알려주지 않는 이유도 있는 것이다. 이미 죽은 성도에게는 주님 다시 온다는 것만 알아도 만족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다.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이 신앙은 주님이 분명히 오신다는 것만 믿으면 된다.

왜냐하면 확실한 예언이란 주 재림을 살아서 환난 가운데 남은 종으로서 맞이할 자에게 해당되기 때문이다. 만일 죽어서 부활할 성도에게 예언을 지키라고 하면 이것은 이단설이 될 것이다. 이것은 때가 되기 전에는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날까지 예언을 들고 활동하던 사람이 실패한 것은 그리스도만을 바로 믿기만 하면 될 시기에 월권적인 행동을 했던 것이다.  

2. 확실한 예언 (19)  

사도들은 확실한 예언이 있다는 것을 말했으나 해석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언이란 인간의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풀 수가 없다는 것이다(20). 예언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할 때 하나님이 바로 해석하도록 해 준다는 것을 베드로가 그 때 사사로이 예언을 풀었던들 그는 사도의 자격을 잃게 되었을 것이다. 사도의 직분은 그리스도 한 분을 바로 증거해서 믿게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확실한 예언을 증거하는 총 대지는 계10:7일 것이다.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시기는 일곱째 나팔을 불 때니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한 말씀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비밀이 옛날 선지의 전한 복음과 같이 성령으로 잉태되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고 성신이 강림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사명이다. 그러나 심판기의 사명자는 세상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것이 선지의 예언대로 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심판기의 종들이 전할 사명이다.

그러면 심판기에 남은 종들은 모든 환난과 재앙과 또는 남은 종과 남은 백성이 선지의 예언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의 다림줄을 바로 쥐고 나가서 다시 예언하는 역사이다. 다시 말하면 미분명한 해석을 분명히 해석해 준다는 뜻이다. 만일 환난과 재앙이 올 때 확실한 예언을 증거 못한다면 기독교는 흑암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예언은 등불이라 할 것이다. 등불은 어두움이 오는 밤에 필요한 뜻을 가르친 것이다. 이미 태양빛 같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로 믿게 하는 시대가 빛의 시대라면 신랑이 밤에 온다는 말과 같이 주님 올 때는 빛의 시대가 아니고 흑암 시대다. 흑암 시대가 올 때까지 예언의 등불을 들지 못한다면 주님을 맞이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기독교가 확실한 예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촛대교회를 일으킬 수 없다. 촛대란 밤에 쓰는 등불이다.

우리는 사명적인 겸손이 있어야 한다. 베드로와 같은 심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확실한 예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믿으면 된다 하여 예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것도 교만이요, 자기 사명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예언을 해석 한데도 교만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니 하나님께서 확실한 예언을 나가 하도록 해줄 때 순종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나가 증거할 것뿐이다(계12:11).  

결 론  

하나님의 역사란 징조가 먼저 똑똑하고 예언은 글자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약 때 양으로 제사 드린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징조를 보여준 것뿐이다. 십자가의 속죄를 완성할 때 징조는 폐지된 것이다. 그와 같이 재림의 징조만을 믿던 신앙을 완전한 예언이 나올 때 징조만을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확실한 예언이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주님 다시 온다는 징조도 다 있는데 믿으면 되지 무슨 예언이 필요 있느냐 할 때 이것은 시대를 모르는 어리석은 종이 될 것이다.  

 

95. 순교자의 호소와 수가 차는 일  

- 계 6:9~11 -  

 

서 론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사랑하는 종들을 순교하도록 한 것도 비밀이 있고 끝 날에 수를 채우기를 기다리는 비밀도 있다. 인간이 볼 때는 사랑하는 종들이 억울하게 순교 당한 일이 슬픔이 아닐 수 없으나 순교는 사랑하는 종에게 주신 축복이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죽었다가 부활할 성도들에게 순교의 죽음을 준다는 것은 그들이 어떤 병마에 걸려서 죽는 것보다는 영광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 발자취를 따르는 형제가 되고 동무가 되는 것이 영광이요 큰 축복이 되는 것이다.  

1. 순교자의 영혼들이 왜 호소하느냐에 대한 것을 알아야 한다 (9~10)  

이 날까지 모든 선지와 사도와 성도들은 교회를 개척하여 세우기 위하여 어느 국가 민족 할 것 없이 피를 흘리지 않고는 참된 구원의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방 신의 종교가 가득하고 이방적인 풍속에 젖어 있고 이방의 정권이 다스리고 있는 그 나라에 전도를 개척할 때 이방적인 종교나 풍속이나 정치에 대한 일을 대항하는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앞서간 종들이 현실적이어서 어느 나라를 들어가든지 피 흘리지 않고 그 나라 종교와 타협을 하고 풍속에 속화되고 그 나라 정치의 압박을 받지 않으려고 무조건 타협하는 종들이었다면 우리는 참된 구원의 복음을 바로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신앙은 세상을 이기는 것이 신앙이라고 요一5:4에 말했던 것이다.

신앙이란 타협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수많은 종들이 피를 흘렸던 것이다. 그런데 심판기가 오는 말기에 교회가 극도로 부패해서 타협과 세속적으로 흐르는 동시에 참된 종들의 신앙 사상과는 거리가 먼 개포도 같은 자리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속히 피 값을 갚아 주는 역사가 일어나야만 된다는 것이다.  

2. 수가 차는 일 (11)  

피 값을 갚아줄 책임은 주님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로 전하기 위해서 흘린 피니 그 피를 무효로 돌린다는 것은 공의가 아니다. 만일 금일의 타협적인 신앙 노선을 그대로 둔다면 그들의 피는 억울한 호소를 아니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교계는 백마에서 시작된 교회가 백마적인 사상에서 청황색 말의 사상으로 변해지는 때가 되기 때문에 이러한 심판이 나리는 때의 역사가 일어나기 전에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잠시만 기다리라는 뜻으로 순교자에게 흰 옷을 준 것은 내가 너희를 신부의 자격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제 주님께서 앞서간 선지들의 피를 인정하신다면 그 피의 발자취를 따르는 형제와 동무되는 종들의 수가 차기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말세의 심판권을 새로 받고 나갈 종들의 수를 채우는 기간은 잠깐 동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죽음을 당한다는 것은 말세의 종들로 자기 사명을 지켜 끝까지 나가는 자는 순교의 반열에 드는 산 순교인 것을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 자기처럼 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주님이 썩지 않고 죽었다가 삼일만에 부활함같이 말세의 남은 종들도 순교의 생활에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수라는 것은 14만 4천 명의 수가 찬다는 것이나 같은 뜻이다. 아직까지 심판의 역사가 나리지 않는 것은 그 수가 차기를 기다리는 잠시라는 기간이다. 이제 시련기를 거쳐서 환난기에 남은 종은 자체를 죽이고 나가는 순교적인 생활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앞서간 종들도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순교했다면 종말에 남은 종은 예언의 말씀을 받고 증거하기 위하여 순교적인 생활에서 승리하여야만 될 것이다.  

결 론  

순교자의 호소의 원한이 이루어지는 강권 역사는 말세의 수가 차는 역사로 종말을 짓는 것이니 잠시 동안에 수가 차는 일은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강권 발동의 강권 역사가 내리기 때문이다(계7:3, 11:3). 다시 말하자면 눅14:23에 나가서 강권하여 데려다가 혼인 석을 채우라는 말씀과 동일하다. 종말의 수는 자기의 기도가 부족해도 순교자의 원한이 이루어지는 강권 역사에 끌려서 사명자가 되는 일도 있고 하루아침에 자기 인간성이 죽는 강권 역사도 있을 것이다(슥3:9). 하나님은 무소 불능하신 신이신 동시에 사랑의 신이시니 자기가 예정한 수는 어떻게 하든지 채우고야 만다는 것이다.  

 

96. 하나님의 비밀을 보이는 일과 행하는 일  

- 암 3:1~8 -  

 

서 론  

하나님은 보여주는 시대도 있고 행하는 시대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보이는 시대라는 것은 성경이 인간에 기록되어 나타나는 선지시대를 말했다면 행하는 시대는 심판기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들로 혼선되지 않도록 빠짐없이 보여서 기록하도록 하시고 그대로 행하는 것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보여지는 때는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며 행하는 때는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1. 보여주는 때 (7상반절)  

하나님은 보여주는 때라는 것은 일을 어떻게 앞으로 행하시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은 인간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하시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의 책이 인간에 나타날 때부터가 선지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눅24:44에 모세 율법과 선지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것이 이것이다 하면서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서 성경을 깨닫게 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세 때부터 나타난 글은 역사적으로 된 것이다. 묵시를 보이는 일이나 모든 기록한 것을 보여준 시대의 역사라고 보게 된다(사46:10). 세상에 많은 종교라는 간판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있지만 앞으로 행할 일을 전부 빠짐없이 보여주고 행한 일은 기독교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언을 친히 행하는 일도 보여주었고 묵시로도 몸으로도 보여주었고 영감으로 나타나는 말씀으로도 보여준 것으로 본다는 것은 어떤 유형적인 무엇을 본다는 것보다도 똑똑한 말씀을 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라고 한 것은 똑똑히 보라는 것이 포함된다(사34:16). 만일 똑똑히 보여준 일이 없이 된다고 믿는 것은 미신에 불과한 신앙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율법과 선지는 요한의 때까지요, 다음에는 사람마다 천국을 침노한다고 한 것이다(마11:12).  

2. 행하는 시대 (7하반절)  

메시야를 통하여 행하는 것은 사람이 행할 의무는 없다. 하나님이 오셨으니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을 어떻게 해서 구원하겠다는 말씀은 선지로부터 보여진 것이니 행할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잉태할 때부터가 하나님은 행하는 단계에 들어오는 시대다. 천사는 요셉에게 이르기를 이사야에게 보여진 예언이 네 집에 응한다는 말을 가지고 요셉에게 오해를 다 풀도록 끔 가르쳤던 것이다(마1:22~23).

만일 성서적인 증거가 없었던들 요셉은 용기를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지는 영자적인 율법의 의식적 종교에서 앞으로 될 일을 보여주시는 시대에서 앞으로 이루어질 일을 소망하면서 활동한 시대를 선지시대라 하는 것이다. 이루어질 일을 사람이 깨닫지 못하나 천사가 깨닫게 해주면서 행하는 것이 신약 시대에 되어진 일이다.

그리스도가 잉태할 때는 천사가 지시했다(눅2:15).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로 완전히 세상에 나타날 때도 하나님이 직접으로 증거했다(마3:17). 십자가에 못 박힐 때도 하나님이 증거한 것이다(마27:51~54). 부활 때도 천사가 증거했다(마28:2~5). 승천할 때도 천사가 증거했다(행1:10).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와서 선지에게 보여준 예언대로 행하는 일을 인간이 믿지 못하므로 믿도록 끔 역사한 것은 신약 시대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이날까지 세계 만방에 전파된 복음은 예언이 이루어진 사실을 증거로 확실히 나타났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기 위하여 성령은 역사한 것뿐이다. 이것은 은혜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3. 심판주로 오실 때 행하는 일 (눅21:28)  

오실 때가 된 징조를 깨닫도록 하는 일이 있다. 말세 증인은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일을 성경을 들어서 똑똑히 시대를 가르치는 것이 있는 동시에 직접 증인에게 권세를 주어서 예언대로 행하는 증인을 통하여 나타난다. 이것이 주님 올 때까지의 역사라 하는 것이다. 그 때 증거자는 주님이 오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또는 거짓 선지자에게 미혹을 받지 않도록 깨우쳐 주는 증거도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심판이 올 터이니 너희들이 미혹 받으면 반드시 멸망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때를 예언 성취의 시대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은혜시대에는 그리스도께서 예언대로 행하신 일을 만방에 알리는 시대요, 말세 증인 시대는 증인이 직접 권세로 예언대로 일을 행하면서 깨우치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다시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선지자들에게 보여준 일이 말세 증인을 통하여 깨우쳐주는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때는 예언을 가해도 감해도 죽는 재앙이 오는 때이다. 왜냐하면 예언대로 재앙을 내리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종 선지자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어진다는 것으로써 세상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  

결 론  

성경은 될 일을 보여준 시대를 선지시대라 하고 선지의 말씀대로 메시야가 와서 행한 것을 만방에 알려주는 때를 은혜시대라 하고 증인에게 권세를 주어서 예언대로 행하시면서 역사하다가 심판주를 맞이하는 것을 예언 성취되는 환난 재앙의 시대라 하는 것이다. 예언이 이루어지므로써 시대는 새 시대가 온다.  

 

97. 성신 충만의 역사와 권세 역사  

- 행 2:1~4, 계 11:3~5 -

 

서 론  

하나님은 종을 통하여 역사하되 시대적인 환경을 따라서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선지 시대에는 말씀만을 기록하였고 은혜 시대에는 성신 충만을 받도록 역사하였고 환난 재앙시기에는 원수를 이길 수 있는 권세를 주어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신 충만과 권세 역사는 시대에 어떠한 필요가 있는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경을 통하여 알게 된 것이다.  

1. 성신 충만(행2:1~4)  

이때는 죄인을 회개시키는 역사를 하기 위한 목적을 두고 성신 충만의 역사가 임하였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성신이 충만하여 증거할 때 3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부흥이 일어났다. 이 역사는 교회를 세우기 위한 역사이다. 아무리 제자들이 3년간 주를 따라가며 듣고 보고 그리스도의 부활한 몸을 만져 보기까지 하였지만 성신 충만이 임하기 전에는 한 사람도 그 신앙 자체가 바로 서지를 못하고 남을 바로 서게도 못했으므로 완전한 교회를 이루지 못하고 또는 부흥할 수도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신 충만은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할 때 핍박이 오고 여러 가지의 악형을 당할 때도 쓰러지면서 순교를 당해도 기뻐하는 성신 충만이다(행7:55). 성신 충만이 없이는 남을 예수 믿고 은혜 받도록 하는 종이 될 수도 없고 순교를 당해도 단 마음으로 순교를 이기고 나갈 수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세계 만방에 교회를 세우는 복음 전파를 위하여 나리는 역사이다.  

2. 권세 역사 (계11:3~5)  

이 권세 역사는 예언을 증거하는 종에게 필요한 역사다. 이 예언이라는 것은 기독교 종말의 심판기에 영, 육이 아울러 살아서 새 시대에 들어갈 종들과 백성을 위한 경고적인 예언이며 보호를 받기 위한 것이며 심판을 내리기 위한 목적을 둔 예언이다. 예언대로 역사가 있고 예언대로 보호가 있는 동시에 예언대로 환난 재앙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신 충만의 역사는 이루어진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라면 권세 역사는 이루어질 일을 예언하는 선지적인 역사이다.

권세 역사가 있어야 될 이유는 계9:3과 같이 마귀의 세력도 흑암의 권세를 받고 나와서 해와 공기를 어둡게 하는 세계적인 흑암 시대를 이루는 때요, 극도로 시험이 교회로 들어와서 쭉정이와 알곡을 가르는 시기니만큼 마귀 권세를 물리치고 소멸시키는 권세의 종이 아니면 역사할 수가 없는 재앙기이다. 다시 말하면 성신 충만을 나릴 때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역사요, 권세의 역사가 일어날 때는 공의로운 진노의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이 증인은 모세, 엘리야 때와 같은 역사를 행하도록 권세를 준 것이다.

아합과 바로가 극도로 강퍅해 짐과 같이 그때 모든 인간들은 극도로 악화된 때이므로 짐승이라고 또는 황충이라고 이름을 준 것이다. 짐승같이 황충같이 사람이 사납게 되는 때를 말한 것이다. 이때 교회는 마귀 권세를 받은 거짓 선지에게 먹힘을 당하는 교회도 있을 것이요, 하나님의 권세를 받고 나오는 증인을 통하여 촛대교회도 나올 것이다. 율법시대가 은혜시대로 바뀔 때 교회가 유대교와 기독교로 갈라짐 같이 은혜 시대가 끝나고 환난 시대로 접어들 적에 바벨적인 교회와 촛대 교회가 갈리게 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예지와 예정을 가지신 동시에 확실한 예언이 있고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역사가 있으니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주는 역사도 있고 만민에게 재앙을 내리는 동시에 남은 자를 보호하는 역사도 있는 것이다.  

 

98. 끝까지 주의 일을 지키는 자의 권세  

- 계 2:23~29 -  

 

서 론  

주님께서 자기의 일을 종에게 맡긴 것은 권세를 주기 위한 목적인 것이다. 그러나 일을 맡기고 끝까지 지키느냐 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과정이 있다.  

1. 뜻과 마음을 다해야 될 것이다 (23)  

주의 일이라는 것은 조금도 뜻과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주님 보기에 합당한 자가 될 수가 없다. 주님의 일은 사람을 상대할 일이 아니고 주님을 상대할 일이니 뜻과 마음을 살피는 주님이신 고로 조금도 형식이나 억지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먼저 사랑을 베풀되 은혜를 주시고 사명을 맡기고서 뜻과 마음을 살피고 계신 것이다.  

2. 이미 있는 것을 굳게 잡아야 할 것이다 (25)  

이미 있는 것이라 함은 주님께 받은 것을 말한 것이다. 누구든지 받고도 이것을 굳게 잡지 못하고 잃어버린다면 권세의 역사를 받을 수는 전혀 없다. 주님 올 때까지 굳게 잡아야 될 이유는 빼앗으려는 원수가 많기 때문이다.  

3. 자기의 것이라는 것을 전혀 포기하지 않고는 안될 것이다 (26~27)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종이니 종은 자기의 것을 조금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불법이 될 것이다. 어떤 종이 주인이 하라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주인에게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일이다. 또는 종이 주인의 일을 한다면서 실지는 자기의 어떤 이익을 계획한다면 이것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주의 일만 붙드는 자라야 권세를 받을 것이다. 만일 주의 일만 붙들지 않는 종에게 권세를 맡긴다면 도리어 주인을 손해 시킬 우려가 있는 것이다.  

결 론  

우리의 최고 축복은 주와 같이 철장 권세를 받고 세세에 왕권을 누리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최고의 행복도 왕권이라면 하늘 나라에 세세의 왕권을 무엇으로 비할 수 있을 것인가?  

 

99. 말씀에 잘못된 증거와 받을 재앙  

- 사 8:16~22 -

 

서 론  

하나님께서는 시대를 따라 말씀을 바로 증거하는 종을 들어서 쓰는 동시에 그와 반대로 말씀이 잘못된 증거를 가진 사람은 버린다는 것이 하나님의 시대적인 역사이다. 그러므로 율법시대가 지나고 은혜시대가 올 때 시대적인 증거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유대교는 망하고 만 사실을 보아서 심판기의 종으로서의 말씀에 잘못된 증거가 있다면 어떠한 재앙이 있다는 것을 본 성경은 똑똑히 가르쳐 준 것이다.  

1. 말씀에 잘못된 증거 (16~19)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의 말씀을 기록한 목적은 심판과 새 시대를 목적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7장을 보아도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14절에 가르쳤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은혜 시대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보다도 심판이 오고 새 시대가 올 때 임마누엘의 날개는 세계에 편만해진다는 것을 사8:8에 가르친 것이다.

깊이 말하자면 이와 같은 환난과 재앙이 오고 이와 같은 새 시대가 올 것이니 여기에서 임마누엘이 아니고는 북방의 앗수르的인 원수의 세력을 막아낼 자는 없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면 이 앗수르는 과거 이사야 시대의 앗수르를 가르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임마누엘이 나올 때라고 한 것을 본다면 분명히 말세를 가르친 것이다. 말세에 북방 앗수르는 계시록의 붉은 세력이라는 말과 대조가 된다.

심판기라는 것은 앗수르的인 북방 세력이 창일한 큰 하수같이 그 세력이 온 땅을 덮어 나올 때 임마누엘이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고 한 것을 본다면 8장은 종말의 심판기를 말한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이 북방이 강하게 내려오는 위기를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씀을 증거하는 종이 그 시대적인 증거를 함부로 자기 마음대로 말씀에 맞지 않도록 해석하는 것을 잘못된 증거라 하는 것이다.

말씀 증거자가 어떤 속살거리는 마술적인 지시에 따른다는 것도 잘못이요, 자기의 주관을 성서보다 앞세운다는 것도 잘못된 증거이다. 이날까지는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는 시대이니 종말관이 혼선됐더라도 하나님은 묵인했으나 사8:8 이하와 같은 시대가 올 때 증거가 잘못되면 증거한 자에게 큰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중을 죽이는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사람을 망케 하는 것 보다도 전 교회를 망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2. 받을 재앙 (20~22)  

 1) 빛을 보지 못한다 (20)  

이것은 흑암으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아침빛이라는 것은 새 시대의 영광을 말한 것이다. 새 시대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2) 땅으로 헤맨다 (21상반절)  

하나님은 말씀을 따라서 재앙의 날에 붙들어 주고 인도해 주는 것이니 말씀에 잘못된 종을 버리게 되므로 어찌할 줄 모르고 헤매는 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3) 곤고하며 주리게 된다 (21중반절)

이것은 자기 자체가 말씀에 잘못된 증거를 하였으므로 위로부터 오는 힘을 얻지 못하니 곤고하고 주리게 될 것이다.  

 4) 번조스럽게 되어 하나님을 저주하게 된다 (21하반절)   

이것은 배은망덕이다. 자기가 말씀에 바로 못섰음으로 하나님이 버리는 것은 생각지 않고 직접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  

 5) 아무리 잘 살 길을 찾으려고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이 오게 된다.  

이것은 환난과 흑암과 고통에서 건져주마는 말씀을 부인했으니 자동적으로 여기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때는 전 세계 인류가 당하는 심한 흑암이니 그 가운데로 쫓겨 들어간다는 것이다(22).  

결 론  

우리는 종말의 재앙이 무섭다는 것보다도 말씀의 잘못된 증거를 하는 종이 될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환난과 고통이 오는 것도 말씀대로 오는 것이요 그 환난을 면하게 되는 것도 말씀대로 될 것이니 말씀을 바로 증거하는 것 이외는 종된 자의 살길은 없을 것이다.  

 

100. 완전 계시를 받은 요한의 인격  

- 계 1:9~10 -

 

서 론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종말적인 비밀을 계시로 받은 요한의 인격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을 먼저 달아보고 난 다음에 가서 완전 계시의 비밀을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왜냐 할 때 신앙이라는 것은 그 장성에 따라 그 인격을 소유한 것이니 완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1. 어려운 환난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9상반절)  

완전한 신앙적인 영적인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은 어떤 인간 지식 경제 문화로써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의를 위하여 환난을 통과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요한의 인격은 열 두 사람 중 가장 연소한 청년이었으나 예수의 환난이 되는 십자가 고난이 닥쳐올 때 그는 아무런 큰 낙망 절망 공포가 없이 십자가 앞에서 담대히 서서 주님께 큰 부탁을 받았으니 주님을 대신하여 마리아에게 아들이 되라는 인격을 받았던 것이다.  

2. 참음에 동참했다 (9중반절)  

주 앞에 인정받는 인격이라는 것은 참음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열심히 있고도 참음이 없다면 그 열심은 극도로 인격을 떨어뜨리는데 씌워지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을 이루는데는 어떤 수양 도덕적인 인격을 요구치 않고 인내력의 강한 인격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3. 자기의 사명을 인하여 끝까지 노력하는 자 (9하반절)  

하나님 앞에 최고의 인격은 하나님께 맡은 일에만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맡은 일을 충성을 다해도 충성이라고 인정을 받거든 하물며 하나님 앞에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할 때 완전한 것을 하나님께 아니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도 요한이 이와 같은 인격으로써 받은 계시록이 아니라면 기독교 종말은 도저히 완전이란 것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4. 성신에 크게 감동된 인격 (10)  

사람은 성신의 감동 없이는 영계를 볼 수 없고 영계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영계의 세계의 것을 도저히 알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초자연적인 최고의 인격을 가져오는 힘은 성신 감동에 있다고 볼 수 있다.  

5. 변화체 (17~18)  

사람이 아무리 영계가 높고 완전한 계시를 볼만한 인격이 있지만 완전한 변화체를 이루지 못한 요한은 변화체를 가지신 주님의 본체가 나타날 때 그 앞에서 죽은 자 같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완전한 변화체를 가진 예수님과 동거할 수 있는 자격은 완전한 변화의 영체를 받은 후에야 있을 것이다.  

결 론  

기독교 초기에 개척적인 복음 전파의 시대에는 완전한 계시를 받은 자의 사명이 필요가 없던 것이다. 왜냐 할 때 이 완전 계시는 완전 영체로서의 들림을 받을 시기의 종과 백성들이 읽고 듣고 지켜야 할 복음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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