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말씀의 칼 Ⅰ / 말씀의 칼 Ⅱ
101. 주의 강림과 제단 문제 (사19:19~22)
102. 다시 예언과 교회 문제 (계10:10~11:2)
103. 스룹바벨의 역사와 심판 (욜3:1~2, 14~17, 학2:18)
104. 하늘의 전쟁과 땅위의 환난 (계12:7~12)
105. 역사적인 강대국의 힘과 시온의 힘 (사18:1~7)
106. 심판 날을 작정한 하나님의 역사 (행17:22~32)
107. 무력 준비와 심판 (욜3:9~12)
108. 기독교 안에 쑥물은 무엇이냐 (계8:11~12, 렘23:13~17)
109. 여호와가 힘이 되는 인격 (합3:1~2, 17~19)
110. 사명자의 시련과 가정문제 (요7:1~7, 행1:12~14)
111. 그리스도 왕국을 위한 전쟁 (계12:7~11)
112. 안식으로 들어갈 자의 두려워 할 일 (히3:12~4:2)
113. 주 강림시까지 남을 자의 자격 (약5:7~12)
114. 재앙 받을 행위란 무엇인가 (잠1:20~33)
115. 시련 가운데 남은 종의 역사 (슥13:1~9)
116. 환난 날에 긍휼함을 받을 인격 (시59:1~17)
117.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보배 (사33:1~6)
118. 환난 중에 복된 자가 되자 (시34:7~22)
119.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인격 (요일4:17)
120. 환난 때 영화롭게 되는 자 (시91:1~16)
121. 환난 재앙의 날에 가정 자녀 문제 (사44:1~4, 49:25, 54:1~3,욜1:2~4)
122. 처음 사랑과 촛대 문제 (계2:1~7)
123. 참는 자가 받는 구원 (마24:10~14)
124. 여호와께서 중심이 뜨거워지는 일 (욜2:6~20)
125. 변론과 심판을 위하여 움직이는 여호와 (사3:1~17)
126. 참 이스라엘은 어디 있느냐 (요1:40~48)
127. 주께 징벌을 당하며 교훈을 받는 자의 복 (시94:10~23)
128. 심판 받을 행위 (갈5:2~10)
129. 롯의 처를 생각하라 (눅17:22~37)
130. 하나님의 백성의 삼대 축복 (시144:12~15)
131. 하나님의 사람이 용맹을 발할 이유 (단11:27~44)
132. 종된 자의 받을 축복과 재앙 (사65:8~16)
133. 여호와 뜻을 돌이키고 못 돌이킬 일 (암9:1~9)
134. 진노의 날에 아끼는 백성 (말3:16~4:3)
135. 진노의 날에 지혜로운 자가 되자 (단12:1~4)
136. 여호와의 땅에 빛날 일 (슥9:9~17)
137. 동방역사와 대 환난 (계7:1~3)
138. 하나님이 세우는 나라 (단2:44~45)
139. 불법자의 나타남과 주님의 나타날 일 (살후2:1~12)
140. 강권 역사의 필요성 (슥3:1~10)
141. 인간 세력이 부끄러워 할 종말의 역사 (미7:1~17)
142. 백마의 2차 승리와 천년 시대 (계6:1~2, 19:11~16, 20:1~3)
143. 인류 종말의 난제 해결 (단2:31~45)
144. 말세에 나타난 주님의 역사와 재림시의 역사 (벧전1:20, 계22:4 ~13)
145.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 (사45:21~22)
146. 알곡을 모으는 주님의 심정 (암9:7~15)
147.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자의 새 힘(사40:9~11, 27~31)
148. 여호와만 자랑할 일 (사41:8~20)
149. 여호와께 새 노래로 찬송할 일 (사42:5~17)
150. 여호와 새 일을 행하려 나타날 일 (사43:2~21)
151. 하나님의 아름다운 일 (사34:16, 35:1~10)
152. 증인 권세 (계11:3)
101. 주의 강림과 제단 문제
- 사 19:19~22 -
서 론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는 극도로 인심이 악화되고 극도로 기근이 오고 극도로 미혹이 오고 극도로 두려운 일이 올 것이니 이러한 때에 어떠한 교회가 남는 제단이 될 것이냐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할 문제이다.
이와 같은 어려운 시험이 올 때에도 남는 제단은 아래와 같은 제단이다.
1. 여호와만을 위한 제단이다 (19)
여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게 된 것은 교파를 초월한 하나님의 중심에서 이루어진 제단이니 하나님은 그 제단을 중심해서 당신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고 이루어지게도 할 것이다.
2. 시대적인 증거가 되는 제단이다 (20상반절)
하나님은 시대를 따라 역사하시되 제단 없이 역사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율법 시대가 지나고 은혜시대가 올 때 부활을 증거하기 위한 제단은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었다. 이와 같이 환난이 일어날 재앙시에 시대적인 표적과 증거가 나타나는 제단은 큰 교파를 중심하지 않는 여호와의 제단이다.
3. 압박을 받은 자들이 여호와께 부르짖는 제단이다 (20중반절)
이것은 극도로 악화된 사회 극도로 미혹이 심한 세상에서 악화를 이기고 미혹을 이기고 살려는 사람은 필연코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니 이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을 만나게 될 것이다.
4. 하나님께서 환난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세운 제단이다 (20하반절)
이 제단에 모인 사람들은 구원자 보호자를 하나님께서 보내어 건져주는 것을 받게 될 것이니 이때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것을 악한 세상은 알게 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제단을 통하여 역사함으로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므로 큰 개혁이 일어날 것이다(22). 하나님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 올 때는 약하고 가난하고 압박 받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역사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도 있되 특히 재림시의 역사는 세계적인 큰 역사가 될 것이다.
102. 다시 예언과 교회 문제
- 계 10:10~11:2 -
서 론
하나님께서는 예언대로 이루어진 십자가 부활, 승천, 성신, 강림으로써 세계 만방에 교회를 세운 것이 기독교 2천년이 거의 다 차도록 내려온 역사이다. 그러나 기독교 종말의 심판기는 예언의 말씀대로 환난과 재앙과 심판이 올 것이다.
1. 예언을 다시 할 종 (계10:10~11)
예언을 다시 해야 할 필요성은 다음과 같다. 예언을 다시 할 종은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작은 책을 받아먹고 쓴 것이 와도 참고 나가서 세계적인 역사가 일어날 때는 권세를 받게 되는 것이다.
2. 권세역사가 일어남으로 (계11:1)
어느 교파를 막론하고 마음 성전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종들은 다 하나같이 예언의 말씀을 척량 받고 하나가 되니 이 종들을 통하여 촛대교회가 나오게 된다.
3. 권세 받은 자의 예언을 반대하는 자 (계11:2)
이때에 권세 받은 종의 예언을 반대하고 이방의 세력과 타협하는 자는 바벨적인 음녀 교회가 되므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말씀 통합으로 세계 교회를 하나가 되게 하시되 양심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종들로만이 한 감람나무같이 결합시킬 것이다.
103. 스룹바벨의 역사와 심판
- 욜 3:1~2, 14~17, 학 2:18 -
하나님은 과거에 이스라엘 성민이 극도로 부패하여 렘5:1과 같이 예루살렘 거리에 진리를 구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으므로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에게 황폐화되어 인간의 힘으로는 다시 성전을 복구할 가능성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방 파사국의 고레스왕을 들어 바벨론을 멸하고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에 마음이 감동되어 성전을 다시 건축하라는 명령을 나리되 스룹바벨이 총독이 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합세하여 성전 지대를 놓고 건축을 시작하였으나 동족의 시기와 방해로 성전 건축은 중지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리오왕 2년에 다시 강권 발동을 시켜 스룹바벨에게 권세를 주어서 성전을 마치도록 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9월 24일에 학개에게 임하여 지체하지 않고 세계적인 심판이 올 것을 말씀하셨다(학2:18~23). 이것은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가 부패되어 바벨화 될 적에 새로운 스룹바벨에게 순의 역사인 촛대 교회가 이루어지므로써 심판기가 온다는 것을 가르킨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명령이 있더라도 합심이 안 될 때는 하나님은 역사를 중지시켜 이루지 못함과 같이 기독교 종말의 역사도 합심이 안될 때 하나님은 역사를 거두시는 일도 있지마는 심판기가 임박했으므로 강권으로 택한 종에게 권세의 역사를 주어서 촛대교회를 완전히 이루시고야 심판을 나리신다는 뜻을 가르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것보다도 동역자가 합심을 하느냐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만일 끝까지 합심이 못되는 경우는 한 사람에게 권세를 주어서 강권으로라도 이루고야 만다는 것이다.
104. 하늘의 전쟁과 땅위의 환난
- 계 12:7~12 -
서 론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이 있는 동시에 공의를 이루기 위한 전쟁도 필연코 있게 하는 것이다. 이 전쟁이란 그리스도 왕국을 이루기까지 목적을 두고 싸우는 하나님의 전쟁인 것이다.
1. 하나님이 간교한 뱀을 낸 것은
사람을 망케하자는 목적이 아니요, 뱀과 싸워서 이기면 지위를 올려 주고 세세의 왕권을 주겠다는 것이 공의가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이기지 못했으므로 간교한 뱀의 세력은 마귀의 권세인 붉은 용의 활동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계12:9).
2.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마귀를 멸하려고 오신 것이다(요一3:8). 마귀는 죄의 권세를 가지고 세계 인류를 영적으로 다 점령하였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는 누구든지 그 피를 믿는 자는 마귀 권세를 벗어나서 그리스도 왕국에 이름이 기재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 왕국의 왕권을 받을 자의 자격은 죽기까지 생명을 아끼지 않고 피와 말씀을 증거하는 자이다.
이와 같이 충성된 종들이 왕권을 받게 될 수가 하늘에서 차게 되면 대군 미가엘은 마귀의 세력을 땅으로 쫓아 내리기 위하여 하늘에서 전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4. 마귀가 지금까지는 참소권을 가지고 주의 종들을 괴롭히고 있었지만 승리자의 수가 차게 될 때는 마귀는 공중의 권세를 빼앗기고 땅으로 쫓겨 내려오게 되므로 이 땅에는 큰 환난을 가져오게 된다.
그때는 주님께서 공중에 나타나셔서 승리의 종들은 들림을 받고 승리의 종들의 전도를 받은 해를 입은 여자와 같은 교회는 예비처에서 양육을 받게 되므로 환난을 피하여 심판하러 지상강림하는 만 왕의 왕과 왕권을 가지고 오는 성도들을 영접하여 세계가 멸망할 때 남은 자가 된다.
결 론
하늘에 전쟁이 있을 때는 영적 혼란이 오는 때요, 땅에 환난이 있을 때는 모든 육체가 죽어 쓰러지는 대 환난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혼란기에 피와 말씀으로 승리한 자는 신랑인 주를 맞이하여 들림을 받고 땅의 대 환난을 예비처에서 피한 자는 만 왕의 왕을 영접하여 종족이 된다.
105. 역사적인 강대국의 힘과 시온의 힘
- 사 18:1~7 -
서 론
인간의 인류 역사는 강대국의 역사를 비롯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본문을 보면 강대국의 백성들까지도 예물을 가지고 시온으로 온다고 했다. 그러면 강대국의 힘은 어느 시기까지 보전 될 것이냐 하는데 있어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큰 꿈을 본 사실도 있었다(단2:31~35). 이 꿈은 강대국인 바벨론을 비롯하여 이 땅에 성도의 나라가 올 때까지 역사적인 강대국은 우상으로 보여졌던 것이다. 이것은 왜냐 할 때 세상 강대국은 생명 없는 우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바벨론 시대로부터 금 은 동 철 반철 반토로 인류 역사의 강대국을 표준하여 보여준 것이니 바벨론 문명 바사 문명 헬라 문명 로마 문명을 비롯하여 세계적인 기독교 복음으로 문명을 가져온 현실에 양대 진영으로 철과 흙같이 되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사야는 18장에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이여 하는 슬픈 경고의 말을 쓰게 되었다. 왜냐하면 남방 구스 강 건너편 아프리카는 새로운 시대가 올 때까지 강대국을 의뢰하는 연약한 자로서 끝을 보고 말겠다고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말했던 것이다.
다니엘 선지도 인류 종국을 고하는 전쟁은 사상과 정치가 남북으로 대립되어 역사적으로 없던 환난을 이루는 때에 구스 땅 리비아(즉 아프리카)는 북방의 시종을 들다가 세상 끝을 보리라고 말할 때에 북방 강대국의 세력은 동북의 소문을 듣고 번민을 하다가 어쩔 줄 모르고 발악을 하다 망하게 될 때 시대는 끝이 난다고 말했다(단11:43~44).
1. 강대국의 힘 이것은 한 침략적인 힘에 불과하다 (6)
인류의 영웅적인 투쟁이란 것은 약자를 잘 이용해 먹는 나라를 강대하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는 큰 악한 도성이라고 말하게 된다. 하나님은 역사하실 적에 악의 세력으로 도구를 삼을 적에는 강한 나라를 들어서 썼다는 것이 신.구약 성서가 역사적으로 증거한다. 예를 들면 몽둥이로 쓴 것에 불과한 세력이 되고 말 것이다(사10:5, 15).
2. 시온의 힘 (7)
하나님께서 언제나 당신의 역사를 나타낼 때에는 의로운 사람이 나는 곳도 약소국가요, 크게 기사와 이적을 나타내는 곳도 약소 국가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략적인 방법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말씀을 기록하도록 한 민족도 약소국의 하나인 이스라엘 족이요, 종말의 기록한 책에 숨은 비밀을 만민 앞에 알도록 끔 인봉 개시의 역사를 일으킬 곳도 동방의 해 돋는 곳이라고 계시록은 보여 주었다.
아무리 강대국이 아시아 천지를 뒤흔들었지만 앗수르 바벨론 메데바사 헬라 로마는 다 망하고 말았지만 참 시온이란 기독교는 나날이 왕성하고 있다. 칼을 든 강대국은 넘어졌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든 기독교는 세계를 정복하고야 만 것이다. 지금 아무리 북방 적마의 세력이 아시아의 큰 땅덩어리를 집어삼키고 동방 해돋는 나라의 남쪽 작은 나라가 남은 이 땅이지만 선지 예언을 비추어 본다면 이사야는 종말적인 기독교 역사는 동방 땅 끝 한 모퉁이 해돋는 곳에서라고 2차 3차 분명히 말했던 것이다(사41:2~3, 15, 24:15, 46:11).
강대국의 힘을 의뢰한 것은 슬픈 일이라고 본문은 말했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은 자랑하는 일이라고 분명히 사41:14~16 에 말했다. 시온의 힘은 인간을 초월한 하나님께로 오는 힘이니 이것이 세계를 복음으로 정복했고 종말의 심판의 권세로써 세계를 정복하고 왕국의 권세로써 새 나라를 건설한다.
결 론
우리는 시온의 힘을 체험한 사실을 증거할 진리가 된다. 만일 기독교가 시온의 힘이 무엇인가를 체험한 사실이 없다면 금일에 기독교는 큰 위기에 위기를 만나서 잠잠히 잠이 들고 말 때가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고 독수리 같이 올라가고 피곤이 없이 걸어가는 역사가 있음으로 세계 민족을 새롭게 하고 열왕을 굴복시킨다고 이사야 41장에 분명히 가르쳤다. 이 힘은 받은 자밖에 모를 것이다.
106. 심판 날을 작정한 하나님의 역사
- 행 17:22~32 -
서 론
하나님은 심판 날을 작정하신 일은 하나님만이 아는 일이다(마24:36).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생이 심판 날에 구원받도록 활동하는데는 어떠한 역사를 하느냐에 대하여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자세히 알고 전해야 될 책임이 있고, 또 믿고 순종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만 아는 작정한 날을 향하여 쉬지 않고 가고 있는 심판의 길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과거나 현재나 다 그 길에서 생활하다가 끝을 맺는 것이다. 죽었다가 부활하는 자도 그 날에 가서 갚음을 받을 것이다. 주님 올 때까지 살아 남은 자도 갚음을 받을 것이다.
1. 하나님을 찾아 발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행17:26~27)
사람은 하나님을 발견하는 데서부터 완전한 생활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금일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하나님을 바로 발견치 못하는 데서 헛된 수고를 많이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아덴 땅에서 알지 못하는 신의 단을 보고 거기서 전도를 했던 것이다. 많은 종교가 다신 숭배를 하는 것은 어느 것이 참 종교인지 모르니까 덮어놓고 섬기는 것이다.
하늘에 별을 섬기고 산에서 나무를, 물에서 물을, 돌에서 돌을 섬기는 것은 참신이 누구인지 발견치 못했다는 것을 스스로 나타내는 것이다. 금일에 과학자들도 하나님을 바로 찾지 못했기 때문에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지 못할 적에 무신론이요, 그 하나님을 찾을 적에 완전한 지식인 것이다. 세계를 통일하는 지식은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라는 것을 사11:9에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찾아보려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 나타나시되 중심을 보시는 것이다(마5:8). 하나님을 찾되 깨끗한 양심대로 살아보려는 마음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은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과거에도 마음이 깨끗한 생활을 하려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지시 한 일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시대 사람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 시인들도 우리는 하나님의 소생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2. 하나님은 시대를 따라 역사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행17:28~30)
하나님은 회개하라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심판하기 위한 종말의 역사이다. 과거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자에게는 약간의 부족이 있어도 허물치를 않았던 것이다. 예를 들면 과거에 동양에 성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천애인을 부르짖는 것도 그 시대에 한 등불 같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옛 시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지 아니했더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역사한 사실도 있는 것이다(행10:34~35).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고도 회개치 않는다면 심판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복음으로 심판하기 때문에 고넬료는 복음을 받기 전에도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볼 때 베드로는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3.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로 하여 심판이 옴 (행17:31~32)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로는 그 부활증거를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생명의 은혜를 준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안다 하드라도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 믿음이 영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만으로 영생을 줄 수 있는 권세가 있기 때문이다(벧전1:3~4). 그러므로 이날까지 세계 만방에 전한 증거는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한 것뿐이다(눅24:46~47).
4. 심판시의 증거 (계14:6~7)
이것은 심판시기에 주 강림 후에 바벨론이 하루아침에 망할 때 심판하는 영원한 복음이다. 이것은 부활을 믿는 자라도 짐승의 표를 받으면 육체적인 구원을 심판 날에 받지 못한다는 것을 증거한 것이다.
결 론
우리는 그 날이 오기 전에 세계 만방에 전하는 역사와 그 날이 올 때 전하는 역사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부활을 모르는 아덴 사람에게 전한 말씀이 과거에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허물치 아니했거니와 지금은 회개치 않으면 멸망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와 같이 말세 증인이 할 말은 과거에는 말세관이 혼선되었어도 허물치 아니했거니와 이제 와서 만일 짐승의 표를 받으면 용서 없이 죽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법을 시행할 때가 되기 전에는 허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107. 무력 준비와 심판
- 욜 3:9~12 -
서 론
하나님은 심판에 대하여 무력을 준비시켜서 행하는 심판도 있고 하나님이 직접 하늘의 불로 행하는 심판도 있는 것이다. 무력 준비로써 오는 심판은 인종이 전멸되고 남은 백성으로서 지상 왕국을 이루는 것이요, 하나님의 불이 내려서 천지를 살라버린 후에는 무궁 세계가 오는 것이다.
이제 무력 준비와 심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성경을 들어 말한다.
1. 무력 준비와 중동 전쟁 (계9:13~17)
우리 앞에 무력 준비와 인류 전멸이 될 일이 불가피 하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성서를 통하여 볼 적에 중동 유브라데 강을 중심해서 잠깐 동안 일어나는 전쟁은 결박한 네 천사가 놓이는데 이것은 년, 월, 일, 시에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했다고 하였다. 이것은 천사가 예비했다는 것은 아니다. 천사들이 계시를 요한에게 보일 적에 유브라데 강을 중심하여 전쟁할 준비를 가진 세력은 넷이라고 말한 것은 4대 강국이라 보게 된다. 이것은 평화시대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계9:20을 보면 3분의 1이 죽는 전쟁에서 남은 자들은 회개치 아니하고 우상 숭배 살인 복술 음행 도둑질을 하면서 악화된 사회가 온다는 것이다. 이 전쟁은 세계를 멸망시키는 전쟁은 아니다. 4대 세력이 세계에서 중심지가 되는 중동의 요새지를 탐하는데서 잠깐 일어나는 전쟁이다. 이때는 서로 승부를 결하는 것보다도 큰 무서운 재앙, 인심 악화, 경제 혼란, 종교 흑암 이러한 시대를 잠깐 동안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때에는 하늘의 천사를 동원해서 택한 백성을 보호해 주는 역사가 있을 것뿐이다. 단11:40~12:1까지 해당된 말이다. 이것은 북방과 남방 구스 리비아(아프리카) 사람이 북방을 시종 드는 일이 생겨서 서로 의합되므로 중동 전쟁은 북방의 손에서 열국이 큰 진멸을 당할 위기가 올 때 동방에서 북방을 번민케 만드는 소문이 일어난다고 말하였다. 그때 대군 미가엘이 하나님의 백성을 호위하기 위하여 일어나니 이 환난에서 살 자는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라고 말했다. 이것은 전무후무한 환난이라고 했다.
계시록은 이와 같은 일이 있을 때 11:3에 마지막 증인이 큰 권세를 받아 재앙으로 땅을 치면서 짐승과 전쟁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 동북의 소문이라는 말과 계시록에 증인이 권세를 받아서 재앙으로 땅을 친다는 말은 동일한 역사가 될 것이다. 이때는 권세의 역사를 행하는 종이 아니고는 옳은 진리를 증거할 수 없는 때이니 종된 자의 심판이 온다고 볼 수 있다. 이때에 증거하던 종은 공중 재림하는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다.
2. 무력 준비와 아마겟돈 전쟁 (계16:16~21)
이때는 주님이 지상 강림하는 때이다. 이 전쟁이 있으므로 세계는 진노의 심판인 불에 사름을 당하니 이것은 세계를 불태우는 무기를 사용한다는 것이다(계17:16~18). 이때에 중동 전쟁이 일어날 때 권세를 행하여 증거하던 종들은 공중 재림하는 주님을 영접하여 휴거를 받게 된다. 이것이 동방에서 일어나는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다(계7:2~3). 권세로 환난 중에서 역사할 때에는 거짓 선지와 적그리스도와 싸우는 것이다.
이때에 거짓 선지를 따르지 않고 권세로 역사하는 증인을 따라오던 무리는 삼 년 반 동안 예비처에서 양육을 받고 피난을 하게 된다. 이때에 악화된 사회가 오니 이것은 중동 전쟁이 잠깐 일어났다가 협상주의로 들어가는 후 삼 년 반이다. 이 협상이라는 것은 짐승의 표를 받도록 하는 거짓 선지자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피난처에 보호를 받는 자 외에는 신앙의 절개를 지킬 수 없는 박해가 온다. 누구든지 표를 안 받으면 매매도 못하고 심지어 짐승과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자는 전부 죽이는 박해 때문이다. 이것을 후 삼 년 반이라 한다.
이때 들림 받은 종들은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여 보좌 앞에 올라가 왕국 부서가 일 한데 따라서 조직이 된다. 후 삼 년반이 지난 후에 세상을 통치하러 도둑같이 시온 산으로 올 때 세계를 사상으로 통치한 짐승과 거짓 선지는 멸망을 받게 되는 전쟁이 아마겟돈 전쟁이다. 아마겟돈이라는 뜻은 선과 악의 큰 싸움을 뜻한 것이다. 그러므로 짐승의 정치는 갑자기 망하게 되니 최후 발악으로 세계를 무력으로 불살라 버린다. 그러나 하나님 보호를 받은 백성들은 절대 무력적인 불에 살음을 당하지 않고 해변이나 혹은 밀실에서 생명을 보전한다(습2:6~11).
그때 세계가 불타고도 남은 자가 있으니 붉은 군대와 백마 탄 군대이다. 그때 백마탄 성도의 군대가 짐승의 군대를 쳐 없이 하는 결전을 내린다(계19:11~21). 이렇게 되므로 남은 자는 승전을 한 백마 탄 군대와 종족이 남게 되고 누구든지 짐승의 표를 받은 자가 전멸에 들어가고 마는 것을 아마겟돈 전쟁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엘 선지는 묵시를 볼 적에 전쟁을 위하여 무력을 준비한 다음에 심판이 온다고 보았던 것이다.
결 론
금일에 극도로 사람이 무력 준비에 최고 발전을 가져온 것도 하나님이 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성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이것은 세계 인류의 인종을 없이 하기 위한 무력이다. 그러므로 요엘 선지도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했던 것이다(욜3:14). 지금 인종이 팽창해지는 것이 큰 문제라고 하는 공포도 가지고 있지만 남은 자는 심히 적다는 것을 말할 때 이사야 선지는 오빌의 금보다도 적다고 말했다(사13:12). 우리는 금일에 무력이 완비된 현실을 볼 때 불가피한 심판은 불원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108. 기독교 안에 쑥물은 무엇이냐
- 계 8:10~11, 렘 23:13~17 -
서 론
하나님께서 맑은 강과 샘이 쑥물이 되는 광경을 보여준 것이니 기독교 종말에 영계를 망치는 쑥물이 큰 별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큰 별은 쑥물을 내어서 기독교를 망칠 종이요, 지도자를 말한 것이다. 구약 성전이 황폐될 때에도 지도자가 쑥물을 먹인 죄값이었고 말세 교회가 맑은 강과 샘물같이 신령하였으나 쑥물이 들어오므로 망쳐질 것을 가르친 것이다. 이제 쑥물은 무엇이냐는 것을 말한다.
1. 가증한 일이다 (14)
가증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면서 세상과 타협해서 속화된 일을 말한 것이다. 기독교는 신랑 예수님과 약혼한 처녀와 같은 것이니 만 왕의 왕을 신랑으로 모실 교회가 만 왕의 왕을 대적하고 세속에 물들어 타협하는 것이 가증이라는 것이다. 이 가증은 주님께서 볼 때 밉게 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남자로서 제일 미운 물건은 자기와 결혼한 여자가 다른 데로 마음을 두는 일일 것이다. 이런 무리는 철저히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것이다. 회개라는 것은 세상을 끊어 버리는 것이 참된 회개라 하는 것이다.
2. 사악이다 (15)
악도 포악과 사악이 있으니 포악이라는 것은 사람이 보기에 나타나는 악을 말했고 사악이라는 것은 겉은 옳게 보이면서 중심이 악한 바리새인 같은 행동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상대하는 종교이니 사악이라는 것은 영혼을 죽이는 쑥물이 될 것이다.
3. 자기 마음대로 말하는 것 (16)
하나님의 종은 자기 마음 대로라는 것이 있을 때 자동적으로 쑥물을 내는 것이다. 종이라는 것은 주인의 마음을 기쁘게 하겠다는 것 외에는 위법이니 위법은 쑥물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강단에서는 종이 헛된 말로 세상 적인 지식으로 지절거리기를 좋아한다면 그 강단은 쑥물이 되는 것이다.
4.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에게 평안이 있다는 말이다 (17)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치 않고 그 말씀을 멸시하는 자에게 말씀을 바로 가르치는 것보다도 자기의 주권으로 그 사람을 포섭하는 방침을 쓰는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니 아무런 재앙이 오지 못하리라 말하면서 실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일이다.
결 론
하나님은 이러한 쑥물을 먹고도 참된 선지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악인의 머리를 폭풍과 회리바람 같이 치겠다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할 때 너희들은 완전히 깨달으리라고 말한 것이다. 쑥물을 먹는 자도 멸망이 올 때는 후회 막심해 진다는 것이다. 이 쑥물은 멸망에 떨어뜨리려는 마귀의 미혹이니 임시 기분, 감정, 흥분을 주는 것이 쑥물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참된 생활을 하는 것은 조금도 말씀에 가감 없이 순종의 걸음을 걷는데서 만 있는 것이니 말씀을 가해도 감해도 그 교훈은 영을 죽이는 쑥물이 되는 것이다.
109. 여호와가 힘이 되는 인격
- 합 3:1~2, 17~19 -
서 론
최후의 승리를 이룰 자는 여호와가 힘이 되는 인격을 가진 자일 것이다. 하박국 선지는 묵시를 볼 때 종말의 북방 세력이 극도로 강하게 일어날 것을 하박국 1장에 보았던 것이다. 하박국 선지는 의문된 바를 하나님께 물을 때에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확실한 대답을 하였던 것이다.
1) 북방 세력도 하나님이 들어 쓴다는 것(합1:6~11)
2) 너는 달려가면서라도 읽어볼 수 있으리 만큼 이 묵시를 판에 새기라는 것(합2:2)
3) 북방이 아무리 강하지만 남은 자가 북방을 없이하고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시대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하나님은 말했던 것이다(합2:7~14).
이제 어떠한 자가 되어야만 여호와는 그 종들에게 힘이 되는가에 대하여 본문으로써 알게 될 것이다.
1. 각성하는 자이다 (합2:7~8, 3:2)
하나님은 시대적인 하나님의 경고를 받을 때에 자던 잠을 놀래서 깨어나듯이 각성을 받고 준비코자 하는 자를 향하여 역사하는 신이시다(눅21:34~36). 종말의 역사라는 것은 누구든지 과거를 돌아다 보지 않고 각성을 받고 앞을 향하여 나갈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강권으로 힘을 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급한 전쟁이 원수를 통하여 들어올 때에 각성하여 원수를 대항하는 힘을 하나님께 구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는 것이다. 히스기야가 북방 앗수르에게 훼방을 받고 위협을 받을 때에 각성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할 때 북방 군대를 무너뜨리고 여호와의 힘이 나타났던 것이다. 급할 때에는 하나님이 급하게 역사하는 것이니 급하게 놀라서 일어나야 된다는 것이다.
2. 주의 일을 부흥케 하고자 하는 자이다 (3:2상반절)
하나님은 자기 사적을 위하여 생각하고 사적을 위해서 시간을 보내려는 자에게 하나님의 힘은 오지 않는 것이다. 사적을 버리고 희생을 당할지언정 주의 일이 부흥케 되는 일이라면 먼저 그 일을 해야 된다고 나서는 자에게 힘이 되는 것이다. 힘이 오면 일하겠다는 사람보다도 힘이 올 줄 믿고 나서는 사람이 되어야 될 것이다.
3. 진노중에 긍휼을 기다리는 자이다 (3:2하반절)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이 북방으로부터 올 때 나를 불쌍히 보시옵소서 하는 자에게 힘이 올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원수의 세력이 강하게 들어 올 때에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지 않고 원수에게 가서 나를 좀 사정 봐 달라는 타협이 있다면 하나님은 원수에게 맡기는 일이 있을 것이다.
4. 극도로 궁핍이 와도 여호와를 즐거워하는 자 (3:17~18)
하나님은 기근과 궁핍이 올 때 물질에 국한된 생각을 버리고 창조주 여호와를 즐거워하며 그 뜻을 순종코자 할 때 그 사람에게 힘을 주시되 사슴과 같이 피곤 없는 활동을 하도록 힘을 주시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궁핍이 왔다고 해서 물질의 환경을 따른다면 하나님은 그의 힘이 될 수가 없을 것이다. 인간 최고의 힘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고 절망 낙망이 올 때 여호와가 힘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지렁이 같이 약한 사람에게 타작기 같은 강한 힘을 주어서 강한 세력을 부스러기를 만든다는 것이 말세종에게 약속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여호와의 힘이 내게 오느냐 안오느냐 하는 문제가 생사에 관한 문제인줄 알고 나가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힘을 주면 일할 수 있다 하면서 짐짓 힘이 오기를 기다리고 가만히 있다는 것도 탈선이요, 그 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고 나서는 것은 교만이 될 것이다. 오직 북방의 강한 군대를 무너뜨리고 새 시대를 이루는 힘은 여호와께만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110. 사명자의 시련과 가정문제
- 요 7:1~7, 행 1:12~14 -
서 론
시련과 가정 난제는 결부된다는 것과 큰 사명자의 시련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도 가정에서 쓴 시련을 통과한 것은 우리는 깊이 생각할 문제다. 삼십년간 가정의 생활 문제를 위하여 목수의 노동 생활도 시련이겠지만 세계민족을 살리는 복음 운동을 시작할 때 가정 단합이 되지 않고 동생들까지도 비웃고 믿지를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요7:4~5에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주님께서도 나사렛 동리 회당에서 축출을 받을 적에 이 말씀을 했던 것이다(눅4:24). 시련이라는 과정에는 하나님과 그 사명자만이 비밀이 연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도 친척도 부모도 그 사정을 모르게 되는 것이다.
1. 시련시의 가정문제 (요7:3~7)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때가 되기 전에는 가정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본문 성경이 증명한다. 동생들이 예수를 보고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는 자라는 말은 비평적인 한 마디였다.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지 않고 왜 숨기고 있느냐라는 이런 말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는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매일같이 손에 장기를 들고 목수 일을 하던 것을 보던 동생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세상의 구주라 하는 이 말을 들을 적에 마땅히 비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세의 종들도 멸시를 받고 미움을 받고 종 되었던 자가 일어남으로 열왕이 그 앞에 절을 한 것도 시련 중에 하나라고 말한 것이다(사49:7). 또는 원통한 사정을 당하는 야곱이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말도 시련 중에 하나라고 할 것이다(사40:27).
초인간적인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생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야곱의 열 한 형제들이 요셉이 어떻게 될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를 박해한 사실도 사명자의 시련일 것이다. 다윗이 장인 되는 사울에게 미움을 받고 쫓겨다닌 것도 다윗이 만 왕의 왕조가 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신이시니 인간이 기대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들어 쓰지를 않기 때문에 인간이 흠모할 만한 사실이 없다고 이사야 선지는 53:2에 말한 것이다.
주님께서 이와 같은 가정 시련을 거친 것은 그와 같이 왕권을 가질 사명자에게 주는 교훈의 하나가 될 것이다. 때가 되기 전에는 예수님도 완전한 사람의 하나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합당한 진리가 된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 없었더라면 이것은 완전한 구주의 자격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는 사명자는 여러 가지의 시련을 통과시킨다는 성서이기 때문이다. 주님도 받은 시련이어늘 우리는 가정적인 시련에 낙심할 것은 도저히 없는 것이다.
2. 사명자의 축복과 가정 문제 (행1:12~1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도 그 동생들은 믿지를 않았지만 부활 승천한 사실을 본 후에야 동생들도 깨닫고 그리스도의 가정식구들은 전체가 다락방에서 모여서 부활하신 주님이 내려보낼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성모 마리아까지 동참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만일 부활 승천하는 일이 없었던들 그 가정은 이와 같은 변동을 받을 수 없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말세 사명자도 변화 승천할 시기가 올 때 그 가정은 더욱 합심하여 부르짖는 기도가 있게 될 것이다(계11:13). 자기가 남편으로 모셨던 사람이 승천하는 광경을 볼 때 아내가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자녀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축복 받은 종의 가정은 절대 합심하여 부르짖는 기도가 있도록 역사해 줄 것은 사실이다.
결 론
우리는 가정을 떠난 축복이 없고 가정을 떠난 승리가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위하여 부모나 처자나 전토를 버리는 자는 현세에서도 백 배나 준다는 것이다(마19:29).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가정의 시련과 가정의 축복을 통과한 것은 말세에 들림 받을 종들에게 줄 약속의 표증이 될 것이다.
111. 그리스도 왕국을 위한 전쟁
- 계 12:7~11 -
서 론
우리는 왕국을 위한 전쟁이라는 것을 조금도 경홀히 알아서는 안될 것이다. 일개의 국토를 위한 전쟁도 사적을 버리고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우거든 적어도 세세 영원토록 쇠함이 없는 왕국을 위한 전쟁에 태만하다는 것은 악한 반동분자의 하나가 될 것이다. 일 국의 싸움을 등한히 여겨도 엄벌에 처하거든 하물며 이 왕국을 위하여 싸우는 싸움에 조금도 목숨을 아낄 수 없다는 것이다.
1. 왕국 전쟁의 대상자 (7~9)
전쟁이란 대상자의 비밀을 아는 데서부터 승리하는 것이다. 만일 기독 신자가 이 싸움의 대상자가 되는 마귀의 비밀을 분명히 모른다면 어리석은 자중에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다. 마귀의 비밀을 아는데는 마귀의 근본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9절에서 보면 옛 뱀이란 피조물인 것을 증명한다. 어떤 자가 이원론을 말한다면 알파에서부터 이단이다. 만일 마귀 근본을 천사 타락으로 본다는 것도 그와 방불한 학설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의 원리를 아는 데서부터 비밀을 알게 된다.
왜냐 하면 전쟁 없는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전쟁에 승리하므로 인생은 영원한 왕국을 이룬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싸움의 대상자 간교한 뱀을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원리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파괴적인 계획은 아니고 건설적인 과정의 제일보가 된다. 즉 건설이라는 것은 싸우는 것을 건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싸울 수 있는 인격을 갖고 나온 것이 사람이요 뱀이다. 뱀은 가장 간교하고 사람은 가장 의로운 양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간교한 뱀을 축복하자는 목적은 아니고 의인을 향상시키기 위한 모략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 방법은 알파에서도 있고 오메가인 종말에도 있다는 것이다. 처음의 피조물인 아담은 실패자로서 흙으로 돌아갔고 둘째아담 예수는 승리하므로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 즉 마귀와 싸울 만한 자격을 가진 자는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을 본문 성경은 증거하기를 그리스도의 나라와 권세라 했던 것이다. 이제 마귀로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방법은 참소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도 죄를 짓도록 만드는 동시에 그 영계를 떨어뜨려 왕국의 건설을 완성치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왕국이란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왕권을 가질 부서가 차야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마귀는 승리의 십자가의 피를 건드릴 자격은 없으나 그 피를 믿는 자로서 올라갈 영계를 떨어뜨릴 수 있는 권세는 갖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도 우리의 씨름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이라고 했다(엡6:12).
우리는 그리스도 왕국 건설의 정병으로서 승리하면 왕권을 가진다는 것이 피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세운 공의의 보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퇴보시키라는 방법은 아니다. 일반적인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건설적인 왕국의 높은 보좌의 자리를 주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나 왕국의 부서가 차게 될 때 마귀는 참소권을 상실하고 땅에 떨어지는 것은 종말의 지상 환난이라는 것이다.
2. 전쟁의 사명자 (11)
우리는 십자가의 도를 믿고 중생 하였으므로 왕국 건설을 위하여 싸울 사명을 하나님께 받았다. 이것은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 받고 성신의 법안에 들어온 자가 받는 사명이다. 우리는 전쟁 대상자의 비밀을 안 이상 어떠한 방법으로 적을 이긴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왕이신 그리스도는 어려운 방법을 주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피와 말씀의 증거를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면 이긴다는 것이 방법이니 이 방법은 사람이 할 일이다.
즉 자기 사명을 위해서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면 그밖에 것은 천사가 싸워 준다는 것이다. 천사는 충성된 종을 위하여 부리는 군대이니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을 위해 싸워 주라는 하늘 군대이다. 은혜 시대에는 그 영들을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천사는 택한 자를 위해 마귀와 싸우는 것이다. 이것은 임종시 30분전에 천사와 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종말의 종을 위해서는 그 몸이 원수에게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싸워 주며 앞서간 성도의 피 값을 값는 마지막 싸움에 천사를 동원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천군은 택한 자의 원한을 풀어 주라는 사명을 맡았기 때문에 말세 종에 대하여는 천사 전체가 동원한다. 최후 결전이기 때문이다. 이날까지는 개인 개인을 위해서 부분적인 싸움을 했으나 주 강림시는 교회 전체 즉 세계적인 인류 중 택한 종 택한 백성을 위하여 싸워 주는 전쟁이다. 택한 종에게는 영계 싸움에 승리하도록 싸워 주고 택자를 위해서는 적군에게 환난의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한다. 즉 택한 종을 위해서는 공중에서 싸워 주고 택한 백성을 위해서는 지상에 내려와서 보호해 주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전쟁을 하기 위해서 능력도 권세도 지혜도 하나님께 받는 것이니 이것은 타협적 신앙에 맡길 수 없고 순교적인 신앙 노선을 걷는 형제들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다. 우리는 싸우면 상급 받고 싸우지 않으면 빼앗아 간다는 것이다. 말세에 들림 받는 종은 피와 증거의 말씀을 아울러 증거하되 목숨을 바치는 자는 절대적인 보호를 받아 최후 승리를 이루게 될 것이다.
112. 안식으로 들어갈 자의 두려워 할 일
- 히 3:12~4:2 -
서 론
안식을 향하여 가는 길은 싸우는 길이요, 환난과 역경을 통과하는 길이니 안식에 들어가기까지는 두려워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소망 없는 공포를 말한 것은 아니다. 소망이 확실한 사람으로서 두려워할 일을 말한 것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군대가 원수에게 죽을까봐 무서워 떤다는 것은 실패의 근본이다. 그러나 승리를 이루지 못할까봐 떠는 마음으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갈 때 나는 죽고라도 승리를 이루는 것을 목적한다면 이러한 군대는 강병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일 국의 영토를 위하여 싸우는 군대로서 목적을 위하여는 이루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요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확신하는 소망이 있다면 여기에 이르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일이 없이는 안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다 들어간 줄 알고 잠자는 것도 잘못이요 목적을 향하여 가다가 원수가 무서워 후퇴한다는 것도 잘못일 것이다. 그러나 원수를 두려워할 것보다도 하나님이 두려워서 죽어도 나간다는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안식으로 인도하시는데 이 하나님을 순종치 않을 수 없다는데서 떠는 심정일 것이다. 이제 두려워하는 자의 할 일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형제 중에 악심을 품고 떨어지는 자가 있을까봐 염려하라는 것이다 (12)
우리가 만일 내가 죽을까봐 떤다는 것은 합당치 않지만 어떤 형제가 잘못될까봐 떠는 심정이 있다면 사랑의 양심에서 움직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어떤 종이 형제가 잘못되는 일을 보고도 안심하고 있다면 이것은 합당치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도 양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항상 애타는 심정을 가졌다는 것을 늘 말한 것이다(히12:15).
2. 유혹을 받아 강퍅해질까봐 조심해야 한다 (13)
우리는 항상 유혹이 없다는 것은 성서적이 아니고 유혹이 있으나 피차 권면하여 유혹을 받지 않도록 한다는데 항상 형제 가운데 유혹이 있을까봐 조심하고 떠는 심정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복지를 향하여 가는 길이었으나 강퍅해지는 무리가 있으므로 수많은 대중이 재앙을 받고 화를 받은 일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3.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한다 (14)
아무리 확실한 소망이 있고 확실한 안식의 도리를 안다해도 끝까지 굳게 잡는 것이 없다면 하와가 말씀의 칼을 잡지 못하므로 떨어지듯이 굳게 잡는 자라야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하는 자가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세 진리가 틀림없다고 말하면서 굳게 잡는 그것이 없다면 이것은 아무런 효과를 낼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확실한 말씀을 주는 동시에 빼앗는 마귀도 대립을 시키는 것이다. 만일 확실한 것을 주고 빼앗는 대적을 두지 않는다면 누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 (15~18)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너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와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를 마셨으나 하나님을 격노케하는 원망이 있고 순종치 않을 때 전부 광야에서 쓰러지고 만 것이다. 이것은 말일에 안식에 들어가는 무리에게 준 교훈이다. 하나님의 교훈을 받고도 짐짓 말씀을 가감한다면 재앙을 받는다는 것이 계시록의 원 대지가 되는 것이다.
왜냐 할 때 하나님은 어느 민족보다도 야곱을 더 사랑해서 인도하는데도 불구하고 짐짓 순종치 않을 때 격노치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양의 피를 문에 바르고 나오는 이스라엘도 이와 같은 일이 있었거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는 영적 이스라엘이 예언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다는 것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계14:9~10에 누구든지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표를 받는 자는 영원히 멸망이라는 것은 교회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5. 안식에 미치지 못할까봐 떨어야 한다 (4:1~2)
우리는 주님 다시 오셔서 들림 받을 때까지 가는 길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거쳐서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치고 들어가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40년 광야에서 만나를 먹던 무리 중 여호수아 갈렙만 안식에 들어가고 육십만 대중이 다 쓰러진 것은 우리에게 주는 경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사10:22~23에 이스라엘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온다고 한 것은 온 세계 중 끝까지 행할 일이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길을 떠나는 일도 해야할 일이나 목적지에 도착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를 중요시 아니할 수 없다. 만일 이날까지 기독교가 내려오다가 말세 예언을 믿지 않고 망한다면 이스라엘 대중 60만 명중 두 사람만 남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도 시대적인 말씀을 믿는 것이니 말씀을 듣고도 화합치 아니하면 안식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슬픔 중에 슬픔은 안식의 길을 가다가 끝을 맺지 못하고 쓰러지는 인간이라고 볼 수 있다(사1:4).
결 론
우리는 소망 있는 인간이라면 두려울 것도 없다. 아무래도 죽을 바에는 해본다는 발악적인 행동을 하는 인간들을 황충이라는 것이다. 소망이 있고 두려워하는 일도 있고, 소망 없이 공포 중에 떨다가 죽는 일도 있고, 소망 없이 발악하는 단결도 있고, 소망이 확실해서 용기를 내는 단결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려움이란 소망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며 화합해야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의 불길이 붙는 데서 한 생명도 잃을까봐 떠는 심정이다.
113. 주 강림시까지 남을 자의 자격
- 약 5:7~12 -
서 론
주님께서 메시야로 올 때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으므로 메시야는 자기의 죄만 깨닫는 자라면 영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판주로 강림할 때에 어떤 인격을 갖추는 자라야 주를 영접한다는 것을 본 성경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의 인격이라는 것은 그 시대에 오는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인격적인 존재라 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봄에는 봄철에 합당하도록, 여름에는 여름철에 합당하도록, 가을에는 가을철에 합당하도록 자라나는 것과 열매 맺는 것이 없다면 인류 사회는 보존할 수가 없음같이 주님 다시 오실 때는 그 시대에 적합한 인격이 아니라면 그 시대의 인격을 보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 본문 성경은 이미 은혜 시대가 지나 주 강림시에 남은 자가 될 인격을 가리킨 것이다.
1. 길이 참는 인격이다 (7)
참는다는 것도 여러 가지 구별이 있고, ‘끝까지’ 라는 것은 ‘주님 강림하실 때까지’ 라는 말이다. 참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시험문제가 있다는 것이 결부된다(약1:12, 마24:12~13). 그 때는 불법이 성하므로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인내라는 것은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므로 되는 일이 아니고, 남에게 배척받고 시험을 받을 때 결부되는 일이다. 하나님은 끝까지 참는 자라야 재림의 날에 남는다고 했다.
참을 수 없는 어려운 문제가 오는 것은 계시록에 가르친 것이다. 주 재림시에 참을 수 없는 어려운 난제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끝까지 참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 것이다. 계22:6에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과 동일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2. 마음이 굳센 인격 (8)
마음이 굳세다는 것은 심지가 견고한 것을 말한 것이다(사26:3). 인격이라는 것은 외형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혹은 위대하다, 혹은 강하다, 충성 되다는 이것은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따르는 열매이다.
3. 원망하지 않는 인격이다 (9)
이 원망이라는 것은 가장 가깝고 친한 사이에서 오는 시험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했다. 주님께서 강림할 때는 믿는 형제끼리 서로 원망할 일이 많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시련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만 시련이 오는 것이 아니고, 전체적인 무서운 시련이 옴으로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했다. 예를 들면 온 몸에 한 지체가 괴로우면 온 몸이 괴로운 것같이 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서로 똑같은 시련을 통과시키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고 원망하지 말라는 것이다(계9:5~6).
4. 앞서간 선지의 길을 따르는 인격이다 (10)
앞서간 선지의 뒤를 따르는 인격의 신앙이 아니고는 그 선지의 예언이 응하는 때에 남은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간 선지들이 쫓겨남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압박 밑에서 말세를 두고 예언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육적 이스라엘이 망할 때 참된 이스라엘이 자기 민족에게 억울함을 당한 것같이 영적 이스라엘 교회가 심판이 올 때 교회 안에서 극도로 어려운 일이 올 것을 가리킨 것이다.
과거에 성경을 받아서 기록한 자들이 받은 시련을 말세에 그 뜻을 바로 해석하여 전할 종 된 우리도 이와 같은 시련이 온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세밀히 말하면 순교자의 피 값을 갚는 날에 순교자의 뒤를 따르는 자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5. 함부로 경솔히 맹세하지 않는 인격이다 (12)
이것은 그 때 그 때 양심대로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다른데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하겠다고 자신 있게 맹세하지 말고, 하지 못한다고 자신 있게 맹세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때 그 때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에 양심껏 순종할 것뿐이라는 것이다. 종이라는 것은 주인의 하는 일을 순종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주인이 옳다면 옳은 줄 알고 틀렸다면 틀렸다고 아는 것뿐이다.
결 론
다시 오시는 주님은 원수를 갚아 주되 두 가지로 갚아 준다. 주를 영접하는 인격이 있는 자는 상급으로 갚아 주고, 그렇지 못한 자는 다 형벌을 받기 때문이다. 심판은 공의로 갚아 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갚아 주는 일은 사랑이 아니고 공의이기 때문이다.
114. 재앙 받을 행위란 무엇인가
- 잠 1:20~33 -
서 론
하나님은 재앙을 주기를 기뻐하지 않고 복을 주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본성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을 향하여 말씀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는 것은 재앙의 날에 재앙을 받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택한 자를 머리털 하나도 다치지 않게 하여 재앙의 날에 남은 자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이 아끼는 심정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재앙을 받게 되느냐 하는데 대하여 본 성경을 보아서 알 수 있다.
1. 하나님의 지식을 미워하는 일 (20~22)
하나님의 지식에 따라서 말하는 것을 듣기 싫어하는 자를 말한다. 이 지식이란 장차 이렇게 하면 살고 저렇게 하면 죽는다는 교훈을 가르친 것이다. 사람이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나 또는 바른 길을 가보려는 마음이 있는 자는 절대 재앙을 받지 않도록 알게 하고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식을 미워하는 것은 재앙을 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위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지식을 찾아보려는 마음조차 없는 것이다. 실지 말씀에 떠는 자를 미워하고 쫓아내는 일도 있다. 믿으면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지식을 등한히 하는 일을 말한 것이다.
2. 하나님의 인도를 요구치 않는 일 (23~24)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해 달라는 사람에게는 인도할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니 불러도 듣기도 싫어하고 손짓을 해도 돌아오기를 싫어하는 자는 재앙의 날에 재앙을 면치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참된 양의 심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은 바리새교인을 향하여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않고 따라오지도 아니하니 내 양이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3. 책망을 받지 아니하는 일 (25~26)
우리는 하나님이 징계하고 책망하는 것을 달게 받는 자는 아무리 부족함이 있다 하여도 절대로 재앙을 받지 아니하되 책망하는 교훈이나 설교를 듣기 싫어하는 자는 재앙을 받아도 하나님은 웃으신다는 것이다.
4. 재앙이 올 때에 부르짖는 자 (27~28)
이것은 멸망 받을 악한 인간들의 하는 짓이다. 옛날 노아 때도 그러하였고 주님 재림시에는 모든 사람이 통곡한다고 했다(계18:10, 계6:15~17).
결 론
하나님은 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게 하는 하나님이시다.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는 것이고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고 하셨다(31~33). 인생이 재앙의 날에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듣기만 하면 재앙을 받지 않고 평안히 살려주겠다는 말을 듣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므로 재앙 받는 것은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재앙을 면케해 주마 하는 말씀을 듣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은 책임을 질 수가 없고 오히려 웃으신다고 말씀 하셨다.
115. 시련 가운데 남은 종의 역사
- 슥 13:1~9 -
서 론
주님은 언제나 시대가 바뀌는 시기에는 종들을 시련 시켜서 남은 종으로 새 시대를 정복하는 것이 역사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왜냐하면 시대가 바뀌는 그때는 이미 역사하던 역사가 바뀌는 동시에 환난기가 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라의 정권이 바뀔 때 혼란해지는 것과 같다. 시대적인 남은 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라야 남기 때문이다. 새 시대를 건설하는 것은 새로운 순과 같은 종이 아니고는 새 시대를 건설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율법적인 종교가 복음적인 사도들을 죽이는 권리를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그와 같이 죄와 더러움을 씻는 은혜 시대 역사가 바뀌고 예언시대로 접어들어 예언자들이 당할 시련을 본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은혜시대에도 시련 중 남은 종으로 큰 역사를 일으켜서 세계적인 대종교를 이루었고 환난 시대에도 시련 중에 남은 종으로서 세계를 정복하는 새 시대를 건설하는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시련 중에 남은 종의 자격은 성서를 통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1. 가정의 박해를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3)
하나님은 어느 종이나 가정에서부터 시련을 통과시키신다. 만일 어떤 사명 가진 종이 가정 박해가 무서워서 굴복하는 정도라면 남은 종이 될 수가 없을 것이니 하나님은 언제나 네가 부모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것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이것은 부모의 사랑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닫게 해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나가는 가운데 축복을 받도록 하는 시련이 있게 하는 것이다. 주님은 부모나 형제를 나보다 더 사랑해도 내게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다(마10:34~37). 종말의 예언이란 사상문제가 결부되기 때문이다. 사상이란 육적인 혈통 관계가 아니고 시대적인 각오를 가진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예언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니 부모의 말보다도 더 존중히 여기는 자라야 될 것이다.
2. 극도로 피하기 어려운 환경의 시련이 있다(4~6)
그때는 종말의 예언을 말한다면 그 자리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부끄러운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당한다. 그러므로 대부분이 변명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 마음으로는 예언의 말씀이 옳은 줄 알면서 겉으로는 나는 그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아니고 농부라고 하며 또는 수고를 한 일이 없다고 변명하게 될 것이다. 이때 남은 종이 되는 자는 위신을 떠나고 그 사회의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예레미야 선지와 같이 임박한 환난을 당하여 눈물겨운 심정을 가지고 나오는 종이 아니라면 남은 종이 될 수가 없을 것이다.
3. 인간이 볼 때 작게 보이는 자가 되는 것이다 (7)
인간이 볼 때 무식하고 가난하고 무가치한 사람들을 붙들어 주겠다는 것이다. 말세 종은 어떤 인간의 교권이나 어떤 명예나 어떤 지위를 떠나야 된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때 나타나서 자기라는 것을 내세우는 사람은 주님께서 친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인간에게 미움을 받고 멸시를 당한 종을 들어서 세계 열왕이 절하게 만든다는 것을 사49:7에 말했다.
4. 연단한 금같이 빛나는 자이다 (8~9, 단11:35, 12:10)
금과 은은 연단이 있으므로 빛을 내는 것과 같이 금은 같은 불변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때 더 빛나게 될 것이다. 신앙이란 어려운 일이 오게 될 때 더 빛을 내게 되는 것을 가르쳐서 금 같은 믿음이라 했다. 하나님은 아무리 시험을 해보아도 택한 종에게는 더욱 영광이 되고 축복이 되도록 하기 때문이다. 시련이란 쓰지 못할 사람을 다 떨어지게 만드는 하나님의 모략적인 방법이다. 만일 말세에 사명자에게 시련이 없이 새 시대에 간다면 알곡과 쭉정이를 가를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종들을 시련의 몽둥이로 치는 것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기 위한 타작기의 역사이다.
결 론
하나님은 종을 들어서 신과 같이 쓰는 것이다(슥12:8). 하나님의 종이 신과 같이 되는 것은 시련 중이라야 이루어지는 것이니 극도로 사람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동시에 당신의 종은 신과 같이 만들어 쓰는 것을 남은 종의 역사라 하는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남은 종은 신과 같이 쓰여지는 동시에 심판권을 가지고 주와 함께 세계를 다스리는 것이다.
116. 환난 날에 긍휼함을 받을 인격
- 시 59:1~17 -
서 론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시며 시대를 따라서 사람을 불쌍히 보는 긍휼이 있되 환난 날에 특히 긍휼히 여김을 받을 자는 어떠한 자라는 것을 본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1. 억울한 피해를 당하게 된 자에게 (1~4)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동시에 사람이 볼 때는 흠이 많고 악평을 받을만한 형편에 있다해도 하나님이 볼 때 옳게 보는 사람은 특히 불쌍히 보는 것이다. 요셉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중 생활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다윗이 억울하게 사울에게 시기를 받고 축출을 당할 때 그를 만 왕의 왕조를 삼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택한 당신의 사람이 죄 없이 억울한 사정을 당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친히 불쌍히 보고 더 큰 것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모략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2. 억울하게 악평을 받는 자에게 (5~7)
하나님께서 남에게 공연히 악한 말을 토하며 다니는 인간들을 개라고 말했던 것이다. 개라는 것은 필요 없이 분별도 못하고 막 짖는 것을 개라 하는 것이다. 또는 시대적인 분별도 못하고 사람을 분별도 못하는 자를 못 짖는 개라고 말한 것이다(사56:10). 하나님은 이러한 무리들을 긍휼히 볼 수 없다. 억울하게 말을 듣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게 되는 사람을 특히 불쌍히 보는 것이다. 즉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좋아하는 사람을 간사한 악인이라고 말했다(9~13).
3. 악한 자에게 저주와 거짓말로 인하여 눌림을 당하던 자에게 (10~13)
하나님은 남을 저주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거짓말하는 자를 향하여 진노하므로 소멸하여 없애는 마지막 환난이니 이러한 가운데 악인들에게 저주를 받을지언정 같이 저주하지 않는 사람을 불쌍히 본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도 억울한 저주를 받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긍휼함을 받게 되어 왕권의 영광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4. 식물을 탐하여 욕심으로 하지 않는 자 (15)
우리는 식물을 위하여 사는 생활이 아니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힘입어 환난 날에 피난처를 찾는 사람이니 억울한 물질적 피해를 당할지라도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며 하나님의 큰 힘을 믿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물질적으로 억울한 피해가 있다고 해서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멀어진다면 그에게는 긍휼 함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자는 본문과 같은 악한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는 것이다.
결 론
우리가 인간의 어떤 피해가 온다하여도 무서워 말고 낙심하지 말 것이니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요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러한 억울함을 당하는 종을 향하여 원수를 갚아주는 일이 없다면 앞으로 환난 날에 의인은 생명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의인이 억울함을 당하는 그 시대에 그 환경에서 특히 긍휼 함을 베풀어준다는 것을 목적한 것이 본문 성경이다. 다시 말하자면 다윗이 사울에게 억울하게 박해를 당할 때 하나님의 신의 감동으로 쓴 것이 곧 시편 59편이다. 우리는 다윗 왕의 계통적인 왕권을 소유할 자로서 다윗이 당했던 어려운 환경에서 긍휼 함을 받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117.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보배
- 사 33:1~6 -
서 론
인생은 무엇이 참 보배인가 하는 것을 바로 찾는 것이 없다면 허공을 치는 허수아비에 불과한 생활일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에게 무엇이 보배라는 것을 가지지 않는 자는 없을 것이로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보배라는 것을 아는 자는 인간에 심히 적다는 것은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보배는 어떤 것이냐에 대해서 본문 성경으로 알 수 있다.
1. 참된 평안이 있다 (6상반절)
하나님께서 이 평안을 말한 것은 본장 11~12절과 같이 세계 민족의 호흡이 불이 되고 불에 굽는 횟돌 같이 되는 종말의 환난이 올 때 평안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종말에 불타서 남은 자가 적게 될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참 평안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16).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시대를 따라 평안이 있다.
그러나 특히 완전한 평안이라고 하는 것은 종말에 세계가 전멸되는 환난이 올 때 완전한 평안은 그때 있다는 것을 본문 성경은 가르치는 것이다. 금일에 인간들은 은과 금이 참 평안 인줄 알지만 이것은 어리석은 인간의 생각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선지자의 묵시든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이 종말에 인간이 불타질 적에 남은 종 남은 백성이 되어서 참된 안식의 시대를 축복으로 받는다는 것을 목적으로 말한 것이다.
2. 구원 (6중반절)
이 구원이라는 것은 영혼만을 구원하는 것을 가르침이 아니다. 온 세계가 황폐화되는 환난 재앙의 심판이 있을 적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살아서 새 시대의 축복을 받는 구원이다(21). 이것은 전 가족적인 구원이 되는 것이다(사49:25). 노아 때와 같은 구원이다. 하나님이 위엄 중에 함께 하여 피난처에 보호를 받는 구원이다.
3. 지혜 (6중반절)
지혜는 인간적인 세계 사람의 지혜가 아니요, 하나님께로 온 지혜를 가르친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어리석게 보이나 세계가 불에 살라지는 그날에는 제일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말할 것이다. 단12:3~10을 보면 지혜로운 자는 바로 깨달음이 있으므로 별과 같이 빛난다고 하였다. 인간 지혜는 오히려 자기를 속이는 일이 되고 만다(사5:21).
4. 지식 (6중반절)
인간 지식이라는 것은 현실주의에 국한된 지식이다. 그러나 이 지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이니 현실을 초월한 지식이므로 지식을 가진 자는 앞으로 될 일을 다 아는 지식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르친 말씀이다. 세계를 정복하는 지식은 이 지식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식을 줌으로써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 머리 속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무한 광대하신 조물주의 완전한 지식이다. 불타는 날이라도 그는 살길을 바로 찾게 될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과학적인 지식을 배우기 위해서는 노력하나 이 지식을 배우고자 하는 자는 심히 적다는 것은 인간 두뇌로써 감히 연구할 수 없다는 세계를 아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결 론
우리가 만족한 것은 만족을 줄만한 보화를 가진 자에게만 있다. 예를 들면 알곡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숨은 보화가 있으니 새로운 봄이 올 때 다시 새로운 시대를 볼 수 있는 요소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알곡될 신앙에 참된 보배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가지는 보배니 평안과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한 것이다.
118. 환난 중에 복된 자가 되자
- 시 34:7~22 -
서 론
하나님이 종말의 환난을 일으키는 것은 악한 자를 땅에서 자취까지 없이하고 의인이 사는 복된 생활의 복된 땅을 기업으로 주고자 하는 종말의 환난이다. 그러면 악인이 세상에서 끊어지는 그 환난에서 복된 자는 어떤 자인가에 대하여 본 성경으로 알 수 있다.
1. 혀를 악에서 금하라 (12~13)
이것은 악한 일이다. 악한 말에 동참하지 말라는 것이다. 누가 물어도 대답하지 말고 누가 하는 말에 같이 혀를 놀리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왜냐 할 때에 악인은 자취도 없이 하는 때이니 악한 일에 동참만 해도 죽는다는 것이다(계18:4). 이때는 진노의 날이니 행위로도 안되겠지만 말에도 동참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33:15에 귀를 막고 피흘린 꾀를 듣지도 말라고 한 것이다.
2. 입을 궤사한 말에서 금하라 (13)
심판 날에는 거짓말로 남을 해치던 자가 보응을 받을 때니 그런 말에 입술을 같이 놀려도 안 된다는 것이다. 누가 와서 남의 말을 할 때 묵묵히 기도할지언정 거기에 동참치 말라는 것이다.
3.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 (14상반절)
아무리 좋은 일을 하고라도 악을 버리는 일이 없다면 이것은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악한 자를 없이하는 환난이니 악을 버리는 성별된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사랑이라고 해서 악한 사상을 가진 사람과 타협을 갖는 것은 환난 날에 악자와 같이 형벌을 받을 것이다.
4.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14하반절)
화평을 찾으라는 것은 상대편이 아무리 나를 원수시하는 자에게라도 같이 악을 발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화평한 일을 위해서만 따라가라는 것이다. 화평한 일이 아니라면 따라가지도 말아야 될 것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누구와 당파적인 싸움을 하는데 그 일에 동참한다면 이것은 화평을 찾아 따라가는 길이 아닐 것이다. 이 화평이라는 것은 불의와 화평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동시에 이 일을 중점 하여 따라가는 것이다.
결 론
이와 같이 사는 생활이 있는 자라면 아무리 악인이 땅에서 끊어지는 날이라도 여호와께서 그의 호소를 들으시고 저희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또는 중심에 통회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가까이 하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살려는 사람에게는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고난에서 건지시는 것이다(16~19).
119.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인격
- 요일 4:17 -
서 론
인생의 최고의 인격은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인격이다. 왜냐하면 스바냐 1장을 보면 모든 이방 종교나 정치인이나 모든 사람이 다 소멸될 때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만 남는다고 말한 것이다. 아무리 사람 앞에 옳은 것 같아도 심판 날에 서지 못할 인격도 있고, 아무리 사람이 볼 때 멸시와 천대를 받아도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자가 있다는 것이 말세 교훈 중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제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인격을 다음과 같이 성경에서 자세히 찾아보기로 하자.
1. 원망하지 않는 자다 (약5:9)
하나님께서 심판기가 올 때는 극도로 당신의 택한 종에게 원망스러운 일이 부딪혀 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략이니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인격을 이루기 위한 훈련에 불과하다. 인생은 자체가 완전한 것은 못되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히 생각해서 무슨 일을 당하든지 원망하지 않는 것 하나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2.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이다 (약2:13)
하나님은 남을 살려 보려고 눈물 흘리며 올리던 기도와 소원을 다 풀어 주는 것이 심판이니 오히려 심판 날에 나서서 자랑을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일로 원하는 것은 당신이 긍휼히 여기는 자를 같이 긍휼히 여기면서 애쓰는 사람을 귀히 여기기 때문이다. 어떤 종이 양떼를 불쌍히 보는 심정이 없는 목자라면 심판대 앞에 설 수는 없을 것이다.
3. 작은 일에 충성한 자이다 (마25:21)
하나님은 충성이라는 것은 작은 일에서부터 보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은 일에 충성이라는 것은 하나님만 중심하는 일이 아니라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 앞에 크게 보이는 것만을 목적한다면 상을 이미 다 받는 일이 될 것이니 지극히 작은 일에 하나님께 대한 양심으로 일할 적에 숨은 사랑을 받는 종으로서 심판대 앞에는 전부 상급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4. 형제와 화평을 위하여 노력한 자다 (롬12:17~19)
만일 화평을 위하여 노력이 없다면 심판 날에 설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수를 갚는 심판이니 원수를 맺는 일이 없어야 된다는 것이다. 어떤 종이 남을 공연히 판단을 했다면 자기도 판단을 받는다고 주님은 말했다(마7:1). 심판대 앞에 담대하려면 아무리 형제가 원수같이 나를 미워해도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한 사람만이 심판대 앞에 설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기도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5.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종 (마24:45~46)
이것은 종이라는 것은 맡은 일에 충성을 하되 시대를 따라서 진리를 바로 증거해야만 된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심판은 복음대로 심판하는 것이니 은혜시대 종이 그 시대적인 진리를 바로 증거 못했다면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요, 환난 시대 진리를 바로 증거하지 못했다면 그 때 사람들의 생명에 대하여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스승 된 자의 심판이 크다고 약3:1에 가르친 것이다. 진리를 증거한 종만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아끼고 아끼는 심정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붙들어 주시고 일으켜 주시는 것은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인격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이라는 것은 당신의 사람을 위하여 심판하는 것이니 당신의 사람이 부족한 것을 그냥 두고 심판하면 하나님은 막대한 손해가 되기 때문에 강권으로라도 심판대 앞에 서게 하겠다는 것이 기독교 종말에 심판기의 역사이다.
120. 환난 때 영화롭게 되는 자
- 시 91:1~16 -
서 론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환난이 없음으로가 아니고 어려운 환난이 부딪쳐올 때에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영화롭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완전하고도 공의로운 신이시니 환난이 오게 하는 동시에 여기서 의로운 사람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환난을 당해 보아야 하나님은 당신이 영화롭게 하는 인격을 알아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환난 중에 영화롭게 할 인격은 어떠한 자라는 것을 본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1.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과 통하는 자이다 (1)
하나님은 평안할 때 은밀한 곳을 살핀다. 은밀한 곳을 살필 때는 잠잠히 계셔서 고요히 숨어 계신 역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에 은밀한 곳에서 거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한다고 한 것이다(계2:23). 지금은 하나님은 고요히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를 살피고 있지만 환난이 올 때는 누가 은밀한 곳에 계신 하나님과 사귀었느냐 하는 문제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2. 하나님만 의뢰하는 자다 (2)
하나님은 어느 정도까지 당신을 의뢰하는가를 달아보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평안할 때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 같으나 어려운 일이 올 때 의뢰하는 힘이 약하다면 영화롭게 될 수 없다. 다니엘이 바벨론에서 영화롭게 된 것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힘이 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천인 만인이 쓰러지는 염병과 재앙이 와도 하나님을 의뢰하는 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3~10).
3.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이다 (14상반절)
우리는 하나님을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느냐에 따라서 영화롭게 되고 못되는 것이 달려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는 있으면서도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영화롭게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건져주는 정도에까지 사랑하는 자라야 할 것이다. 어느 정도 사랑할 때 건져주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판단에 있다.
4.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이다 (14하반절)
이 안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증거하는 뜻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높여 주리만큼 안다는 정도가 무엇이냐 라는 것을 양심적으로써 판단할 일이다. 하나님은 양심을 보고 그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니 조금도 입으로만 하나님을 찾는 일이 없고 날마다 일구월심의 양심 속에서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여기에서 움직이는 자라면 이 사람은 하나님이 높여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위신을 높이려고 하는 중심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진실한 체 한다면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악자의 행동일 것이다. 바리새교인의 행동이 즉 그것이었던 것이다.
5. 간구하는 사람이다 (15)
이 간구는 사생을 결단하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다. 되면 되고 라는 그 정도가 아니라 꼭 안되면 나는 죽는 일이다 라는 각오를 가지고 올리는 기도가 간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영화롭게 해주는 인격이 아니고는 환난 가운데 남을 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 환난은 종말에 오는 환난을 말한 것이니 이 환난에서 영화롭게 된 자는 장수함으로 만족하게 되리라고 말한 이것은 육체의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영화 중에도 큰 영화는 종말에 환난가운데 남은 백성에게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121. 환난 재앙의 날에 가정 자녀 문제
- 사 44:1~4, 49:25, 54:1~3, 욜 1:2~4 -
서 론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이라는 것은 개인적 영적 구원에서 끝을 맺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주님께서 노아 때나 롯의 때 같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은 가족적인 구원 문제가 포함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의 가정이라야 재앙의 날에도 축복이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경을 대조해 보기로 한다.
1. 말세에 새 일의 역사에 증인된 가정의 자녀 문제를 가르친 것이니 사44:1~4이다. 본문은 이사야 43장과 같은 증인된 종의 가정에 축복을 44장에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종의 가정의 자녀에게는 하나님의 신이 친히 오시어 복을 나리시되 풀 가운데서 솟아나는 시냇가의 버들같이 무성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이 임재하는 가정이 아니고는 재앙의 날에 남는 백성이 될 수가 없을 것이다(사49:25).
2.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위하여 고난을 당했던 자의 가정에 그 가정을 위하여 보수적인 일을 행함으로 자녀를 구원하는 것이다(사49:25). 마지막 환난과 재앙은 원수를 갚아주기 위한 심판의 일이니 억울함을 당하던 가정은 절대적인 피해가 없도록 하나님은 싸워주시기 때문이다(사54:1~3).
3.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몸에 탄생하신 것은 그 목적이 영혼 구원만이 목적이 아니요, 그 피를 믿는 자 참된 이스라엘인 그 자녀로 열방을 얻으며 황폐되어진 성읍을 복구하여 새 시대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사54:1~3, 계7:9~17).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에 별같이 모래같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 이사야 54장 본문이다. 우리는 기독교의 구원을 개인들에게만 국한된다고 생각하면 종말적인 진리에 탈선된 일이다.
4. 하나님은 종들의 자녀에게 역사적인 한 페이지를 남겨 놓는 것이니 그 자자손손에게 전할 큰 역사는 환난 중에서 남는 가정인 것이다(욜1:3~4). 우리는 인류 역사가 내려오는 중 크게 이루시는 놀라운 역사는 과거가 아니고 이제 이루어질 환난 재앙에 남는 가정이 되며 남는 자녀가 되는 일이 가장 놀라운 일이 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거룩한 씨로 거룩한 시대를 이루려는 것이 종말의 심판 날에 있는 숨은 비밀의 뜻이 될 것이다(사65:9). 만일 남은 자녀가 없는 심판이라면 이것은 의로운 심판이라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엘 선지의 묵시는 목적이 종말적인 환난 날에 재앙은 북방으로부터 올 것이니 여기에서 남는 자는 어떤 사람을 통하여 어떻게 남는 자가 나온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 요엘서의 중심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
122. 처음 사랑과 촛대 문제
- 계 2:1~7 -
서 론
인간은 사랑이란 것을 원하고 또는 사랑을 남에게 주고 싶어하는 것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기독교는 덮어놓고 사랑을 받고 덮어놓고 준다는 것으로써 촛대교회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알파가 되는 처음 사랑의 사랑을 잃어 버렸다면 오메가인 촛대교회를 이룰 수는 전혀 없을 것이다. 교회는 사랑의 시초가 인간에게서 온 것이 아니고 완전한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처음 열매가 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 인간의 처음으로 맛보는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가지고 온 실천의 사랑은 인간 도덕, 수양, 어떠한 교제적인 인간의 사랑을 초월한 처음 되는 사랑의 열매가 이루어진 것이 십자가의 피라는 것이다. 이제 처음 사랑과 촛대 역사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기독교는 완전한 사랑으로 섰으니 그것으로 끝을 맺어야 된다는 것이다. 만일 어떠한 교회가 완전한 사랑의 본질인 그 정신, 사랑, 중심을 잃었다면 이것은 참포도를 심었지마는 맛이 변한 들포도가 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생의 완전이라는 것은 완전한 사랑을 받은 데서부터 싹이 튼 것이니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이방에 전파된 것도 완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그대로 남에게 주기 위해서 피를 쏟은 것이 순교적인 선교의 역사였던 것이다. 요15:13, 요일4:11에 온전한 사랑이라는 것은 목숨을 바쳐서 남을 살리겠다는 것이 온전한 사랑의 불길이 되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에 이것이 없다면 기독교는 세계를 정복할 수는 도저히 없었을 것이다.
1. 진리의 사랑으로 시작되었으니 진리의 사랑으로 마쳐야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신자가 사랑을 주장해도 진리의 사랑이 아니라면 이것은 마귀를 초대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진리 때문에 사랑하고 진리 때문에 서로 교제가 된다는 것은 기독교 처음 사랑의 본질이 되는 것이다(요이1~3). 만일 기독교가 종말의 예언의 말씀을 떠나서 사랑으로써 뭉쳐지자는 통합 운동이 된다면은 예언의 말씀을 가해도 감해도 재앙이라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사랑이 자동적으로 될 것이니 이러한 사랑을 가진 기독교는 촛대 역사를 일으킬 수가 없을 것이다.
2. 기독교 사랑은 겸손한 사랑이다
만일 남이 나를 유익하게 한다면 사랑을 하고 유익이 안되면 배척을 한다는 것은 거짓 선지의 사랑일 것이다(미3:5~6). 하나님의 아들이 말구유에 탄생을 했다는 것이 기독교 사랑의 시발점이다. 겸손한 자리에서부터 걸어간 일이 사랑을 가지고 온 그리스도의 길이다.
겸손한 출생, 겸손한 노동, 겸손한 전도, 겸손한 죽음, 겸손한 부활, 겸손한 승천의 주로서 지금도 죄인을 향하여 울면서 약한 자에게 능력을 어리석은 자에게 지혜를 범죄한 자에게 속죄의 은총을 주기 위해서 겸손히 인간을 대해 주고 계신 사랑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효과를 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겸손한 사랑이 하늘 본부에서 행하는 역사라면 겸손이 없는 사랑은 촛대 역사를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결 론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세계 인류에게 전한 표어가 된다. 아무리 서 아시아의 모교회지만 촛대를 거두시겠다고 말씀한 것은 전 세계 기독교의 지침이 되는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아무리 사명적인 모교회지만 처음 사랑을 잃고 보니 아무런 사명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기독교는 완전한 자를 위한 것이 아니고 종말의 사랑은 좀더 강권적인 사랑이 있어서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 절뚝발이 같은 영계를 가진 자라도 끌어다가 내 집을 채우리라는 것이 기독교 종말적인 오메가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처음 사랑보다는 좀더 강권으로 사랑을 베풀려는 것이 기독교 종말의 역사이니 처음 사랑을 잃었다면 종말의 역사와는 하등 관계가 없을 것이다.
123. 참는 자가 받는 구원
- 마 24:10~14 -
서 론
하나님께서 어려운 시련을 통과시킨 후에 기독교 종말의 구원은 끝을 맺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진리만 알고 끝까지 견디어 나가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모른다면 이 사람은 환난 날에 나가서 설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대적인 진리를 따라서 역사하는 것이니 환난 날에는 끝까지 견디어 보려는 데서 예언을 지키는 자라야 만이 구원을 얻도록 역사해 주실 것이다. 이제 어떠한 환난에서 참아야 된다는 것을 본문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1.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지는 일이다 (10)
우리는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서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할 때 거기에 동참치 않으면 부득불 쫓겨나는 일이나 또는 그들에게 잡히는 일도 있을 것이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끝까지 견디어야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한다는 것은 기독교 안에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니 이러한 시험이 교회 안에 들어올 때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끝까지 참는 자다.
2. 거짓 선지의 세력이 극도로 강할 때 (11)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의 세력을 강하게 하는 것은 누가 참된 예언의 말씀을 바로 지키나 보자는 것이니 미혹이라는 것은 말씀대로 참고 살려는 것이 없는 자에게 필연코 있게 될 것이다. 미혹을 받는 자는 많은 사람이요 받지 않는 사람은 소수일 것이니 다수가 소수를 압박할 것은 정해 놓은 일이다.
3. 기독교 사랑이 다 식어질 때 (12)
우리는 남이 사랑하니 나도 사랑한다는 정도를 가지고는 끝까지 참을 수가 없을 것이다. 참이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와도 그 사랑이 식어지지 않는 것을 참이라고 한다. 만일 어떤 형제가 기분이 좋을 때는 사랑하고 환경이 나쁘고 기분이 나쁠 때는 사랑이 식어지고 만다면 이런 사람은 알곡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에게서 오는 사랑을 가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어려운 환난이 올 때 더욱 눈물겨운 심정으로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나가는 자 만이 남는 종이 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를 구원해 주기 위해서 첫째로 천사를 동원한다(단12:1).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네 민족을 호위하기 위하여 대군 미가엘이 일어난다고 말 한 것은 다니엘같이 끝까지 견디는 사람을 네 민족이라고 했다. 예를 든다면 추수기에 끝까지 견디고 남는 알곡은 아끼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보호를 반드시 받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에 끝까지 견디는 자라야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했으니 끝까지 참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는 어려운 일이 우리 앞에 올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만일 어떤 종이 우리 신자는 절대 어려운 환난이 없이 평안히 있다가 들림을 받는다고 말한다면 이는 말씀과 대적이 되는 말이다. 분명히 이런 때가 오는 것은 먼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후에야 이러한 때가 온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124. 여호와께서 중심이 뜨거워지는 일
- 욜 2:6~20 -
서 론
하나님은 위대하고 높으신 분이지만 낮고 천한 인생을 향하여 그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신이시다. 이것은 여호와는 창조주요 인간은 그의 피조물인 동시에 택한 백성은 특히 아끼는 중심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제 어떠한 일에 여호와의 마음이 뜨겁게 움직이느냐에 대하여 본문을 보아 알 수 있다.
1. 인간이 송구하고 기절할 일이 생길 때 (6)
하나님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무서운 환난을 당하도록 한 것은 하나님의 종말적인 거룩한 경륜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니 이때를 당하여 하나님은 어떠한 자에게 보호가 있고 어떠한 자에게 멸망이 있다는 것을 본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2. 택한 백성에게 어려운 일이 올 때 마음을 찢고 회개하여 돌아오라는 것이다(12~13)
만일 어떤 사람이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고 위급할 때에 배반하고 만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진노의 채찍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릴 때 절실히 깨닫고 참된 통회의 눈물로 회개가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를 불쌍히 보고 뜻을 돌이키는 것이다.
3. 급한 환난이 올 때 열심히 성회를 열고 부르짖는 일이다 (14~16)
만일 어떤 교회가 환경이 좋을 때에는 집회를 열지만 어려운 환난이 올 때 해산하고 만다면 이 교회는 허명무실한 즉 외식의 형식적인 교회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어려운 환난이 부딪쳐 와도 열심히 모여서 부르짖는 교회라면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은 뜨거워지는 응답의 강한 역사는 필연코 있을 것이다.
4. 대표자의 간곡한 기도가 있으므로 (17)
만일 어떤 종이 어려운 환난이 온다고 교회를 집어던지고 양떼를 버리고 자기 생명 하나를 보전하기 위하여 도망을 한다면 이것은 삯군의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극도로 교회가 위기를 만날 때 모든 것을 자기가 기도할 문제로 알고 제단 사이에서 울며 부르짖는 호소의 기도가 있다면 그 종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은 중심이 뜨거워지는 응답이 있으므로 모든 문제는 일시에 해결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시대적인 큰 역사를 일으키는 것은 북방 군대를 일으켜서 환난을 가져오게 하는 동시에 당신의 백성과 종들의 호소를 듣고 그 원수를 갚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친히 북방 군대를 전멸시키고 평화의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이 종말적인 하나님의 큰 역사라는 것이다.
125. 변론과 심판을 위하여 움직이는 여호와
- 사 3:1~17 -
서 론
하나님은 변론도 해야할 책임도 있고 심판도 해야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한 예언을 인간이 알도록 변론을 해야만 할 것이요, 인간이 행복되게 할 수 있는 새 시대를 이루기 위해서는 악인을 없애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심판기에 변론하러 일어나심에 대하여 어떤 형편에서 여호와는 변론하는 것이냐에 대하여 이사야 3장은 가르친 것이다.
1.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예루살렘의 부패를 그냥 두고 심판할 수 없다는 것이다(1~3)
이것은 왜냐 할 때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깨우치는 변론을 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변론이라는 것은 당신의 백성이 심판기에 이렇게 하면 너희가 죽을 것이요, 저렇게 하면 살리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심판 날에 살려 주겠다는 언약의 말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보다 세상 것을 더 의지한다는 것은 멸망을 받을 가증한 행동이다.
2.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사회가 되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친히 일어나시는 변론의 역사가 있을 것이다 (4~7)
하나님은 인심이 극도로 악화되고 부패되고 혼란한 세상에서 당신의 백성을 찾기 위하여 강한 역사를 일으키는 심판의 변론자를 세워야만 될 것이다. 인간의 부패한 정치가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니 하나님이 나타나야만 된다는 것이다.
3. 지도자가 극도로 악하여 미혹을 시키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8~12)
만일 미혹을 극도로 당할 때 말씀의 칼인 하나님의 변론이 나타나지 않는다면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바로 인도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유혹을 심하게 하는 것은 당신의 변론을 따라오는 자를 찾기 위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유혹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변론을 바로 믿고 따르느냐에 대하여 시험해 보는 모략이다.
4. 극도로 빈민이 살 수가 없는 난제가 오기 때문에 여호와가 일어나는 것이다 (14~15)
이것은 가난한 자는 대부분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자들이다. 이것은 왜냐하면 극도로 악화되고 거짓이 많은 세상에서 동참할 수 없는 생활을 하려면 빈곤은 필연코 닥쳐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심판기가 올 때는 도저히 의롭게 사는 자로서 생계를 보전할 수 없는 고난이 오는 것이다.
5. 하나님은 극도로 교만하고 사치한 인간들을 볼 때 참지 못할 진노를 나리게 되는 것이다 (16~17)
여호와께서 제일 미워하는 것은 소위 시온이라 하면서 사치해지고 교만해지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모르고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려는 미운 물건이 즉 이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시대를 따라 당신의 변론을 나타내신 것이다. 은혜시대는 비록 귀천이 없이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동등한 권리와 동등한 생활을 하는 동시에 일반적인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변론을 위하여 사도 바울도 이방으로 향하여 나섰던 것이다. 이것이 바울 서신이다. 그러나 심판의 변론은 아무리 시온이라 하여도 여호와의 변론을 가감하면 심판을 면치 못한다는 것을 목적한 변론이다. 이것은 계시록과 선지서이다.
126. 참 이스라엘은 어디 있느냐
- 요 1:40~48 -
서 론
주님께서 도성인신하여 세상에 오셔서 당신과 같이 일할 사람을 택할 때 참 이스라엘을 찾기 위하여 그는 빈촌을 찾아가다 보니 벳새다 동리에 한편 모퉁이 어촌에 숨어 있는 참 이스라엘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육안으로 본다면 참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에 있지 않고 어촌에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이제 참 이스라엘이 어디 있느냐에 대하여 성경을 찾아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참된 회개의 운동을 따라가는 자이다 (40~42)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하고 회개의 운동을 일으키는 그 말을 달게 받고 따라가던 자 중에서 수제자 될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가 따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세례 요한의 책망을 받고 요한을 반대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오히려 비소 하는 훼방을 했던 것이다. 같은 성민이요 같은 이스라엘이지마는 충성된 마지막 선지인 요한의 말을 참으로 받아들이고 나가던 자는 주님을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언제나 시대가 바뀌어 질 때는 참 이스라엘만이 새 시대의 축복을 받게되는 것이다. 인간이 볼 때는 어리석은 자의 행동 같으나 시대를 바로 아는 참 이스라엘이 된 자는 갈릴리 해변에 있었던 것이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때를 기다리는 자들이다 (45)
율법시대가 끝을 맺을 적에 율법과 계명을 가르친다는 성직을 맡은 대제사장, 교법사, 장로, 유사, 서기관, 이런 무리들은 때를 모르고 교권, 명예, 안락, 여기에 도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바로 알고 때를 기다리는 무리는 이방 갈릴리 빈한한 어촌 벳새다 동리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말세에 끝 날에도 참 이스라엘이 재림의 주를 맞이할 자는 화려한 바벨에 있지 않고 쫓겨난 자 중에 있다고 사41:17에 말했다.
3. 조금도 간사가 없는 것이다 (47)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육적 혈통을 보아서가 아니고 영적인 참의 계통을 가리켜서 주님은 말씀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특히 하나님의 택한 야곱 같은 순수한 신앙을 가진 성도를 가리킨 것이다. 아무리 교회의 성직을 가진 자라도 간사가 있으면 이것은 참 이스라엘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를 가리킨 것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아무리 시험을 해도 끝까지 참고 천사와 씨름하여 이길 때 받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4.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이다 (48)
나다나엘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한적한 벳새다 동리 무화과나무 아래 제단을 쌓고 매일같이 하나님과 교통했다는 사실을 주님은 말씀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을 들은 나다나엘이 너무 똑똑한 자기 비밀을 말할 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만일 은밀한 가운데 살피시는 하나님이 인정할 만한 숨은 기도의 봉사가 없다면 참 이스라엘인 14만 4천에 들 수는 없을 것이다.
결 론
기독교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감하시사 간사가 없는 진실한 사람을 찾고 있는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계2:23). 메시야를 영접하는 자는 이스라엘 중에도 참 이스라엘만이 메시야를 영접하여 사도가 되었고,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가 재림의 주를 맞이할 때에도 참 이스라엘된 14만 4천의 인 맞은 종들이다. 다시 말하면 참 이스라엘인 사도들이 교회를 세움과 같이 참 이스라엘인 14만 4천이 남은 교회를 붙들고 역사하다가 재림의 주를 맞이할 것이다.
127. 주께 징벌을 당하며 교훈을 받는 자의 복
- 시 94:10~23 -
서 론
주님께서는 복 받을 사람을 복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징벌을 하면서 교훈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소망 있는 사람도 장차 성공을 하도록 부모의 징벌이 따라가는 일이 있다. 이와 같이 말세에 큰 축복을 받을 자는 그 교훈을 바로 알아서 축복을 받기까지는 징벌을 내리는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징벌만을 주고 깨닫는 교훈이 없다 해도 안될 것이요, 교훈만 하고 징벌만 해도 안될 것이다. 이제 징벌을 당하며 교훈을 받을 자의 받을 복을 본문에서 알 수 있다.
1. 환난 날에 빛이 나게 한다 (13)
우리의 축복은 캄캄한 어두움의 환난이 올 때 광명한 빛이 나를 인도한다면 이것이 축복이다. 이런 자에게 참된 평안이 따라 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불가피한 환난의 흑암을 거칠 것이니 그때 빛과 평안을 소유하려면 징계를 받으며 교훈을 받는 자라야 될 것이다.
2. 절대 버림을 당하지 않는다 (14)
하나님은 당신의 교훈을 받을 자가 부족이 있다하더라도 버리지 않고 영원한 기쁨을 얻도록 해 준다는 것이다. 교훈대로 할 책임은 가르친 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전해지므로 환난을 이기는 것이 아니고 환난 가운데 버리지 아니하므로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3. 그를 위하여 악자를 치신다 (15~16)
하나님께서도 악자가 교훈을 받는 사람을 피해를 주지 못하도록 싸워주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싸워 주는 일이 없다면 아무리 교훈을 받은 자라도 악자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4. 미끄러져도 붙들어 주신다 (17~18)
우리는 신이 아니요 육을 가진 사람이니 아무리 바른 길을 간다 해도 미끄러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누가 말하기를 나는 절대 미끄러져 넘어져 본 일이 없다는 사람은 거짓말이다. 하나님은 교훈을 따라가는 사람을 미끄러질까봐 넘어질까봐 항상 붙들어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어떤 친구가 길을 가다가 한 친구가 넘어져도 잘 되었다 하며 보고만 있다면 이것은 친구라고 할 수가 없다. 하물며 무소불능 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이 넘어지는 것을 보고 그대로 방관시 할 수는 없을 것이다.
5. 주의 위안이 영혼을 즐겁게 한다 (19)
사람은 시험이 많을 때 주님께로 오는 위안이 없이는 영적 생활을 보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교훈을 받을 자의 영혼을 주께서는 항상 위안을 주고 즐겁게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6. 피난처가 되신다 (20~23)
여호와는 아무리 악한 자들이 잔해를 도모하고 재판장이 아무리 의인의 영혼을 치려고 하되 여호와 하나님은 악자에게 피해 당하지 않도록 항상 보호하는 피난처가 된다. 하나님의 교훈은 사람이 네가 지키라 하는 교훈이 아니고 내가 이렇게 너를 해 줄테니 너는 이 교훈에 순종하라는 것이니 교훈을 달게 받는 자는 끝까지 보호해서 안식의 시대를 정복하게 할 책임이 있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결 론
우리는 덮어놓고 복을 받겠다는 것은 세계 인류가 다 바라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길을 취해야만 축복 받는다는 것을 아는 자는 심히 적다.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자 중에도 이 길을 바로 아는 자가 적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님의 교훈과 징계도 모르고 사는 자도 있고 징계를 받으면서 교훈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도 있으며 교훈을 받기 위해서 징계도 달게 받는 자도 있으니 우리의 취할 길은 징계도 교훈도 달게 받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128. 심판 받을 행위
- 갈 5:2~10 -
서 론
하나님의 심판이란 죄를 지은 사람을 덮어놓고 심판한다는 법은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를 지었다고 그대로 심판하는 신이라면 사랑이 없는 신이시니 사랑이 없는 신은 죄를 짓는 인간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하나님은 심판을 하되 심판 받을 행위를 가진 자를 심판하는 것이다. 이제 심판 받을 행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1. 남의 믿음을 요동케 하는 행위 (갈5:10)
우리는 실수가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되 고의적으로 남이 진리를 따라 바로 믿는 신앙을 쓸데없이 딴 교훈으로 동요를 시켜서 그 마음이 탈선되게 만드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율법 시대가 지나고 은혜 시대가 와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정통적인 복음을 받아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할례를 주장하는 이단설은 순수한 양떼의 신앙을 동요시키는 무리의 행위가 될 것이다. 지금도 이러한 행동을 하는 종이 있다면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죄는 죄 중의 큰 죄가 될 것이다.
2. 빛을 미워하는 행동 (요3:19~20)
우리는 빛을 사랑하지만 어둠과 싸우다가 실수하는 죄도 있고, 짐짓 빛을 미워하는 죄도 있으니 두 가지 죄를 놓고 하나님은 역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체가 어두운 미로에서 헤매면서 빛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빛으로 인도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빛이 오는데도 불구하고 빛을 미워함은 하나님의 사랑은 크지만 책임질 수 없이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중심에 빛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면서도 빛의 열매를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령은 빛의 열매를 맺도록 책임지고 역사하는 것이다. 아무리 주님의 교훈을 듣고 증거를 보고도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바리새교인들은 정통을 찾는 교파요 매일같이 기도하고 또는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려도 결국은 멸망을 받았던 것이다. 사랑은 두 가지가 있고 미워하는 것도 두 가지가 있다. 사랑도 빛을 사랑하는 것 외에는 죄가 되고 미워하는 것도 악을 미워하는 것 외에는 죄가 될 것이다.
3. 종을 대적하는 죄 (사41:8~11)
하나님께서 종을 쓰시되 말씀을 따라 쓰시는 것이다. 은혜 시대 종을 대적하던 자는 회개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스데반을 죽이는 것을 옳다고 판정을 내리던 바울도 회개하여 사도가 되었다. 그러나 말세에 동방 땅 끝에서 심판의 권리를 받고 나오는 종을 대적하는 자는 멸망이라고 했다. 이것은 왜냐 할 때 동방 역사는 피 값을 갚는 역사니 그 종에게 원수를 회삼물같이 짓밟는다는 특권을 주었기 때문이다(사41:25).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 이같이 하는 것은 대장이 군대에게 너를 대적하는 자를 쳐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것과 같은 것이다. 말세 사명자는 만 왕의 왕의 특명을 받고 나오기 때문이다. 엘리야 모세같이 쓰여지게 된다. 이것을 기독교 종말에 진노의 날에 쓰여지는 종이라 한다(계11:3).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 쓰는 종도 있고 원수를 치기 위하여 쓰는 종도 있으니 죄인을 부르기 위해 쓰는 종은 대적해도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원수를 치기 위하여 쓰는 종을 대적하는 자는 멸망하는 것이다.
4. 예언을 경홀히 아는 죄 (계22:18~19, 사65:12)
교훈도 용서하기 위하여 전하는 교훈도 있고, 심판하기 위하여 주는 교훈도 있으니 종말에 심판하려고 예언하는 말씀은 조금만 가감해도 용서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했던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심판을 하고 싶어하는 본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자체는 사랑의 본질이다. 그러나 사랑으로써 살리기 위해서 역사하는 역사를 순종치 아니하므로 자동적인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을 무서워하는 것보다도 시대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한다든지 그 말씀을 경홀히 여긴다는 것은 심판 받을 행위가 되는 것이다.
129. 롯의 처를 생각하라
- 눅 17:22~37 -
서 론
우리는 주 재림이 임박해서 주를 맞이할 자는 특히 롯의 처를 생각하라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한 의인 가정이라도 진노의 날에는 어느 때 보다도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어떤 신자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진노의 날에 하등 문제없다고 방심적인 태만을 가지고 있다면 롯의 처와 같이 멸망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1. 확실한 증거를 보고도 태만하는 자가 되지 말라
이것은 롯의 처는 자기 집에 직접 천사가 찾아와서 때가 급했다는 것을 경고했을 뿐 아니라 악당들의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그 가정에 증거를 보여준 것이다. 하나님이 롯의 가정을 특히 사랑해서 말씀으로만 경고한 것이 아니고 실천적인 행동에서 그 가정에 나타났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말세 성도가 직접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여 내 마음에 오셔서 역사하는 증거도 받고 하나님의 보호도 받은 체험도 있는 신앙을 가지고 짐짓 말세 예언을 등한히 한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체험 받지 못한 자 보다도 먼저 죽는 저주가 올 것이다. 짐짓 하나님의 명령을 만홀히 알았기 때문이다.
2. 강권 역사에 끌려가면서 짐짓 마음이 태만하는 자다
천사는 롯의 처의 손을 쥐고 끌고 가는 일이 있었다. 이것은 금일의 강권 역사의 힘을 받아서 나가던 사람도 떨어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노력을 한 일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강권으로 이끌어주는 체험을 받고도 세상을 돌아다보는 자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확실한 하나님의 체험을 받고 급했다는 증거자를 통하여 인도를 받아서 나가던 자라도 멸망할 자가 있다는 것이다. 천사가 끌고 가던 자도 떨어지는 자가 있었거늘 사람에게 인도를 받는 사람 가운데도 있을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증인을 통하여 강권적인 역사가 임할 때 절대로 세상일은 돌아다보지 말라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군인이 출전 명령이 내렸는데 뒤로 후퇴하는 자는 쏘아 죽이는 것이 군법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전 삼년반기가 닥쳐와서 사명자가 앞을 향해 나갈 명령을 받고 세상일을 보고 후퇴할 수 없을 것이다. 주 재림이 온다는 경고는 말세의 권세 받은 종이 나타날 때다. 권세 역사라는 것은 천사가 롯의 처를 끌고 가는 것과 같은 강권 역사다.
3. 천사는 롯의 요청대로 가까운 소알 땅으로 편리를 보아주었다
먼 동리에는 미처 급했기 때문에 가까운 그곳만 가면 산다는 편리를 주었다. 하나님의 택한 사람은 급한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하든지 살리겠다는 심정에서 안정처를 알려주고 보여주는데도 그 말을 등한히 여겼던 것이다. 롯의 아내가 사실을 확실히 믿었던들 뒤를 돌아다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진노의 날이란 예언의 말씀을 조금만 가해도 감해도 재앙이라는 것이 여기에 연결된 것이다. 예를 들면 급해서 종을 인도하는 것은 아끼는 심정이다.
사랑 중에 제일 큰사랑은 하나님이 롯의 집에 보낸 천사의 사랑일 것이다. 낮고 더러운 인간들인 롯의 가정을 살려보겠다고 천사가 와서 이렇게도 애를 쓰는 그 사랑을 태만히 하니 다시는 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아의 집보다도 롯의 가정은 강권적인 사랑이 임했던 것이다. 노아는 자기 손으로 배를 짓느라고 최선을 다했지만 롯의 가정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무조건 구원해 주겠다는 사랑이다. 말세의 주 재림기에 살아 남아 있는 종들에게는 이와 같은 사랑을 베풀어준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결 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두 남자가 한 자리에 있으면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 둠을 당한다고 하였다. 또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는데 한 여인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여인은 버려 둠을 당하였다 하였으니 롯의 처와 같이 태만한 사람은 버림을 당한다는 것이다. 롯의 부부가 일생동안 아름다운 부부생활을 했으나 그 처는 태만하니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노의 날에는 싸워야 된다는 것이다(33).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의 명령인 예언의 말씀을 따라 순종의 길을 걷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130. 하나님의 백성의 삼대 축복
- 시 144:12~15 -
서 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완전한 축복을 주고 싶어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정인 동시에 언약의 말씀이요, 약속의 말씀인 동시에 축복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우리는 축복을 요구하는 것보다도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느냐가 더 급선 문제일 것이다. 하나님은 참되시니 말씀한 대로 축복을 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받는 세 가지 축복을 본문 성경에서 알 수 있다.
1. 자녀 축복 (12)
우리 말세의 축복은 자녀의 축복을 큰 축복으로 주시겠다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네 씨가 하늘의 별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으리라고 한 것 같이 말세종에게도 자녀의 축복을 준다(사49:18~20)고 했고, 고난 중에 낳은 자녀가 후일에 내게 말하기를 이곳이 좁으니 넓혀서 우리에게 거처하게 하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특히 자녀의 축복을 받기 위한 시련 속에서 고난 중에 이삭을 통하여 축복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종된 자로서 자녀에 대하여 큰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죽어 천당을 목적함보다 새 시대 건설을 목적한 말세 사명자니 시련을 받을 때 여기에서 자녀가 축복 받을 일이 온다는 것을 아브라함 같이 믿어야 한다. 우리는 자녀를 하나님께 맡기는 심정을 가지는 동시에 자녀에게 축복을 빌어 줄 수 있는 자격을 잃지 아니해야 한다.
2. 물질의 축복 (13)
하나님의 종이 물질 중심에서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물질을 하늘 나라를 위하여 쌓을 수 있다면 축복 중에 축복이 될 것이다. 말세의 하나님의 종은 특히 기근의 날에도 물질의 축복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사65:13과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은 물질에 명백하여 물질에 치우치는 일이 없이 될 때 축복이 나린다.
하나님의 종이 물질에 애착심이 있으면 있던 물질도 거두어 간다는 것이다(시113:3~9). 물질을 죄악으로 본다는 것도 탈선이요, 무엇이나 정욕으로 치우치는 것 외에는 그 물질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종이 물질이 많을수록 하나님께 의지한다면 이 종을 통해서 하나님은 열매를 거둘 것이다.
3. 원수가 피해를 줄 수 없다는 일 (14)
하나님의 집에 악당의 피해를 당한다는 것은 징계의 채찍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부패할 때 악한 나라를 들어 쓴 것도 징계이지만 하나님의 종의 집에 악자가 피해를 준다는 것은 축복 받는 자에게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천사의 보호가 있기 때문이다(시34:7, 시91:9~10).
결 론
우리는 이와 같은 축복을 받으려면 다윗과 같은 신앙이 있어야 할 것이다. 다윗은 작은 일에 충성한 사람이다. 산 깊은 목장에서 홀로 부친의 양떼를 지킬 때 생명을 아끼지 않고 작은 양 한 마리를 위하여 싸웠던 것이다. 또한 민족과 하나님의 대적을 위해서 생명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리 동역자의 억울한 박해를 당하나 끝까지 기름 부은 종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심정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었던 것이다. 누구든지 이와 같은 종이라면 삼대 축복은 필연코 있을 것이다.
131. 하나님의 사람이 용맹을 발할 이유
- 단 11:27~44 -
서 론
하나님의 사람이 용맹을 발해야 할 때는 용맹을 내야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어떠한 일을 볼 때 용맹을 내야만 한다는 그 이유를 가르치고 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 용맹을 내지 않는다면 도저히 안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들어 써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을 들어서 용맹스럽게 쓸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한다.
1. 양대 거두가 서로 거짓말을 하며 흉계를 꾸밀 때 (27)
이것은 왜냐하면 소위 세계를 움직이는 지도자들이 국제적인 난제를 앞에 놓고 서로 부패한 정신과 사상을 가지고 거짓말을 뻔뻔스럽게 하면서 자기네가 정권 야욕을 품고 헛꿈을 꾸는 광경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람은 용맹스럽게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 양대 진영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할 때 일 할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세계를 지도하는 자가 거짓말을 하다 보니 그 아래 백성은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는 것을 문제시 아니할 수 없다. 이때는 전부가 거짓으로 꾸미는 세상이 되니 하나님의 참 사람이 나와야만 된다는 것이다.
2. 미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볼 때 (31~32)
심지어 하나님의 교회의 강단에까지 멸망케하는 자식이 섰으니 그것을 보는 하나님의 사람은 용맹을 발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이런 것을 보고도 하나님의 사람이 가만히 있다면 교회는 여지없이 망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인 말세 진리를 배반하고 악한 자들을 궤휼로 타락시키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란 악한 자를 회개시키는 일도 바쁜 일인데 오히려 타락시킨다는 것은 멸망의 자식이다.
3. 많은 사람이 궤휼로 친합이 될 때 (34)
우리는 친합을 반대하는 것은 진리의 사랑으로써 친합이란 하나님의 사람으로 마땅히 할 일이나 소위 기독교라는 간판을 가진 교회가 궤휼적인 정책에 타협하는 친합이라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사람은 용맹을 발하고 나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때가 된 증거이다.
4. 북방의 무신론 정책이 극도로 형통해질 때 (36~39)
만일 무신론자가 극도로 깃발을 날리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꼴을 하나님의 사람이 보고도 잠을 자고 있다면 양심이 허락치 않을 일이다. 소위 하나님을 안다는 사람이 하나님이 없다는 사상을 묵인하고 그 앞에 가서 타협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는 북방 세력을 높이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각성을 받고 일어나서 그 세력을 쳐 부셔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극도로 바로 왕의 마음이 강퍅할 때 모세를 들어 썼고 극도로 아합과 이세벨이 악화될 때 엘리야를 들어 썼다. 금일에 무신론자의 세력이 강성해질 때 하나님의 사람이 일어나는 일이 없다면 여지없이 기독교는 짐승의 밥이 될 것이다.
5. 중동 사태가 극도로 위기에 처해질 때 (40~44)
세계 남북의 양대 진영이 극도로 부패해지는 동시에 남방 구스, 리비아 사람은 북방을 시종들고 일어나게 되니 북방 세력을 막을 길은 아시아에서 아득한 것뿐이다. 이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동방에서 용맹을 발하고 일어나니 하나님은 대군 미가엘을 동원시켜 하나님의 사람을 호위해 준다(단12:1).
그러므로 아시아 문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해결하는 일은 동북의 소문이라고 한 것이다(단11:44). 이것은 초인간적인 역사니 하나님이 없다는 북방 세력은 어찌할 줄 모르고 번민하므로 발악을 하다가 망한다고 했다. 이때 땅의 티끌 가운데서 일어나는 부활 성도도 있고 용맹을 발해서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인도하는 종들은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왕권을 받게 될 것이다(단12:2~3).
결 론
하나님께서 주 재림기가 임박하여 극도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강하게 높이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서 용맹스럽게 역사하도록 하는 동시에 하나님은 동북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며 그리스도께서 강림하므로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용맹을 발할만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132. 종된 자의 받을 축복과 재앙
- 사 65:8~16 -
서 론
하나님은 종을 들어 쓰시되 시대가 바뀌는 그날에는 시대적인 새로운 법을 따라서 그때 종으로서 판단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은 주인이 방법을 고칠 때는 고치는 방법을 반대한다면 그 집에서 축출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 심판기가 올 때 종들은 어떤 방법으로 판단하느냐에 대하여 본문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1. 참포도에 즙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데서 판결이 올 것이다(8)
우리는 진액을 같이 받은 종이라도 주인이 요구하는 즙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으로써 판결 받는 것은 요15:2과 같이 되는 것이니 과실을 맺지 않은 가지는 제하여 버리고 과실을 맺는 가지는 과실을 더 맺게 한다는 말씀과 같다. 가지가 진액을 받는 것은 즙을 바로 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즙이라는 것은 맛이 변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모양은 포도 같으나 들포도 맛이 된다면 진노를 받을 것이다(사5:4).
이것은 본질이 변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본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본 비밀을 말한 것이다. 어떤 종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변하게 한다면 이것은 개포도가 될 것이다. 우리는 종이라 하는 사람은 주인과 종과의 질이 같아야 될 것이다. 주인은 남을 극히 사랑해서 그 사람을 돕기 위하여 보내는데 그 종이 그 사람을 해치는 마음이 있다면 이 종은 용납할 수 없는 처벌을 받을 것이다. 근본적인 기독교의 본질인 사상, 중심, 양심에서 벗어난다면 이것은 개포도라 하는 것이다.
2. 성산을 사모하느냐 잊었느냐 하는데서 판결이 난다 (9~11)
하나님께서 말세 종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성산의 축복이다. 살아서 새 시대의 성산을 들어가야 할 새 시대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오히려 잊고 세상 인간 운명에 맡기는 그 현실주의에 떨어진 자는 칼에다 붙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심판기가 올 때에 살아서 안식 성산에 들어간다는 그 사상과 목적을 부인하는 종은 원수의 손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찾는다 하여도 주시겠다는 축복을 등한히 하는 사람에게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죽어서 천당을 가는 것은 시인하면서도 살아서 성산의 축복을 받는 것은 부인하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언서의 말씀을 듣고도 가하면 재앙을 받고 감하면 거룩한 도성에 못 간다는 계22:18~19과 같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3.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을 택하는 일 (12)
종이라는 것은 언제나 주인이 즐거워하는 일만을 순종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은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니요, 주인의 것이니 주인이 즐거워하는 일만을 하지 못하면 그 집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을 극진히 사랑하기를 즐기는 것이다. 환난 중에 양떼를 사랑해서 죽지 않고 살아서 성산에 가도록 인도하는 것을 하나님은 즐거워하는데 이말 자체를 기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러도 대답도 없고 듣지도 않으니 이것을 악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된 종이 되려면 시대적인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서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을 이루기 위하여 목숨을 희생하고 순종하는 자에게만 축복이 올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율법 시대가 지나고 은혜시대가 올 때 십자가 와 부활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는 핍박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미치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말세종도 시대적인 비밀을 전할 때 사도적인 순교의 생활이 아니라면 참 포도송이라고 할 수는 도저히 없다.
결 론
이러므로 순종하는 종은 먹고 마시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노래할 것이로되 화를 받는 종은 주리고 목마르고 수치를 당하고 마음이 슬퍼서 통곡하게 되며 저주거리가 됨은 여호와께서 친히 그 종을 죽이고 복 받는 종은 다른 이름으로 칭하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무리 종이라도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하라고 했다. 이것은 시대적인 진리의 역사를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라는 것이다.
133. 여호와 뜻을 돌이키고 못 돌이킬 일
- 암 7:1~9 -
서 론
우리는 다같이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다같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뜻을 여호와께서 돌이킬 일도 있고 돌이키지 못할 일도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 이것을 분명히 모른다면 완전한 신앙의 지식을 가진 자는 못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으로 신앙의 완전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돌이켜 주는 일과 돌이키지 않는데서 완전이 있는 것이다.
1.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킬 일 (1~6)
1) 시련 중에서도 뜻을 돌이킴
하나님은 재앙을 오게도 하시고 재앙을 물리치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재앙을 무서워 할 것보다도 뜻을 돌이키지 않는 것을 무서워해야 할 것이다. 아모스 선지가 묵시를 볼 때 풀을 벤 그루터기에서 풀이 돋기 시작할 때 주께서 황충을 지어 황충이 풀을 먹는 광경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새로운 순과 같은 역사가 일어날 때 황충같은 악의 세력으로 그 역사를 대항시키는 광경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은 황충 같은 악의 세력을 들어서 하나님의 종을 시련시키는데 불과하다. 그러므로 청컨대 여호와여 용서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찌하오리까 하매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려운 시련이 닥쳐올 때 자기 죄를 깨닫는 심정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2) 낙심하지 않고 그 원수를 대항해 싸워보려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
만일 어떤 종이 시련이 닥쳐올 때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어도 안될 것이다. 원수가 무서워서 대항하지 않고 쫓겨가는 정도에 있어도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서리이까 하는 심정을 가질 때 하나님은 원수를 대항해서 넘어지지 않고 설 때까지 뜻을 돌이켜 그 악한 세력을 물리쳐 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려운 일을 당하게 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힘으로써 물리칠 수 있는 것을 아는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아시나 인간으로 자기 부족을 더 깨닫기 위한 것과 또는 자기 미약을 깨닫게 하기 위한 모략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어려운 난관이 닥쳐올 때 자기의 부족과 미약을 깨닫고 돌아오면 얼마든지 뜻을 돌이킨다는 것이다.
3) 큰 징벌에서도 뜻을 돌이킴
종말의 징벌이라는 것은 인명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고 바다나 육지를 다 삼키는 징벌이다. 이 세계가 불에 살라지는 것도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이어서 이것도 자기의 미약을 깨닫고 어떻게 하든지 바로 서 보려는 심령을 가진 자는 뜻을 돌이켜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리 징벌을 내려도 겸손한 사람이라면 그 환난에서 건져내 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심판 날에 죽을죄는 교만과 사치다. 바벨론이 망한 것은 자기를 영화롭게 하려는 죄와 사치한 부요로 인하여 망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징벌이 내릴 때 더 사랑이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은혜시대에는 오히려 당신의 종을 멸망의 자식보다도 더 시련을 당하도록 한 일도 있으나 세계 전멸의 징벌이 올 때 자기의 미약을 깨닫고, 여호와를 바라보는 자는 절대로 불의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사40:10~11).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미약을 아시고 미약한 사람이 살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다. 여호와 하나님께 부탁하는 간곡한 심령이 있다면 절대 책임을 져 주신다는 것이다.
2. 뜻을 돌이키지 못할 일 (7~9)
주님께서 곧게 줄을 치고 쌓은 담을 보여 다림줄을 잡고 섰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다림줄을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거든 다시 용서치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이삭의 산당이라도 황폐되고 이스라엘의 성소라도 훼파된다는 것을 말했다. 이것은 다림줄이라는 심판의 경고이니 심판의 경고를 하여도 받지 않는다면 아무리 사랑하는 아들인 이삭이나 야곱의 집도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육적 이스라엘도 아모스 선지의 경고를 듣고 회개치 아니할 때 멸망하였거든 영적 이스라엘인 하나님의 교회가 말세의 경고를 등한히 여긴다면 사랑하는 교회라도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대로 재앙을 내리는 것이니 재앙의 날에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말씀을 순종치 않을 때 책임을 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속는 자는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면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니 결코 재앙을 받지 아니하리라 생각하면서 짐짓 태만한 자다(사28:15).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언약을 순종하는 것보다도 자기의 수단 방법을 쓰면서 문제없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이스라엘 말기에 무서운 지진이 나는 2년 앞에 농촌에 뽕나무를 재배하던 아모스에게 묵시가 임하고 또 외친 것은 말세에 무서운 환난이 지진같이 세계를 불태우는 전쟁으로 될 때 나가서 외쳐야 할 심판의 경고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아모스 선지는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을 책망하며 네가 이 경고를 순종치 아니하면 너는 반드시 네 집의 자녀까지 전멸한다고 말할 때 그 말을 듣고도 순종치 아니할 때 이스라엘은 망하고 만 것이다.
134. 진노의 날에 아끼는 백성
- 말 3:16~4:3 -
서 론
하나님은 진노의 날이 올 때 당신이 기뻐하는 사람은 특히 더 아껴주는 것을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려운 무서운 시험이 올 때 부모가 자녀를 더 보호하고 아끼는 것과 같은 심정이다. 노아 홍수 때에도 진노의 날에 그 가정을 더 아꼈고 소돔 고모라 성이 불탈 때에도 롯의 가정을 구원했던 것이다.
이제 어떠한 자가 아끼는 백성이 될 것이냐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1. 시련 중에도 의로운 제사를 드리는 자 (3:3)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는 시련을 시키면서 믿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시련을 시키면서 아들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기뻐하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기분이 좋으면 연보도 하고 기도도 하고 기분이 나쁘면 그만 둔다면 아끼는 백성 될 자격이 없다. 예를 든다면 친구에게도 기분 좋으면 가까이 하고 기분이 나쁘면 박차버린다면 그 친구는 사귀는 것이 불리할 것이다.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심판 날에 아낄 사람을 아무나 그대로 두고 아낄 수 없다는 것이다.
2.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 (3:8~12)
십일조라는 것은 축복 받은 백성의 해야할 의무적인 한 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억지로 할 문제가 아니고
첫째: 감사한 마음으로 드릴 것,
둘째: 하나님의 집에 드릴 것,
셋째: 순수한 수입에서 드릴 것.
이것을 온전한 십일조라 하는 것이다. 만일 마지못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이 있고 어떤 교회의 체면으로 드린다든지 또는 이단적인 사단의 회가 되는데 드린다든지 또는 십일조를 순수한 소득이 아니고 자기의 어떤 이익을 붙여 놓고 드린다는 것은 온전한 십일조가 못된다.
3.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이다 (3:16)
이것은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되 이름을 더럽힐까봐 조심하고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존중이라 하는 것이다. 심지어 말 한마디를 해도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하면서 하는 것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라 한다(시34:11~13).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 사람을 함부로 훼방하고 모략한다면 이 사람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가 아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존중히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이라 할 것이다(마6:14, 마5:24).
결 론
심판의 목적은 아낄 자는 아끼고 없앨 자는 없애는 것이 심판인 것이다(4:1~3).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불탈 때 초개같다고 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기뻐 뛴다는 것이다. 모든 악인은 불에 살라져 재가 되고 의인은 땅에서 새 나라를 이룰 것이다.
135. 진노의 날에 지혜로운 자가 되자
- 단 12:1~4 -
서 론
하나님은 진노의 날이 올 때는 지혜로운 자를 특히 들어서 쓰는 일을 하신다. 은혜시대 보다도 더 빛나는 역사를 일으켜 주신다. 진노의 날에 가장 필요한 것은 지혜인 것이다. 이제 진노의 날에 지혜로운 자는 어떠한 자인가 하는 것을 본 성경을 보아서 알 수 있다.
1. 연단 중에서 정결케 사는 생활이다 (단11:33~35)
지혜라는 것은 연단 중에서 깊이 깨달아 지는 것을 하나님이 주는 지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방 세력이 아무리 강하고 또는 대중이 북방과 타협하는 이러한 시기에도 지혜로운 자는 동참치 않고 쇠패해지며 압박을 받아도 이전보다도 더 정결하게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왜냐 할 때 때가 다 되어 기한이 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환경이 나빠지고 국제적인 대세가 그러하니 현실을 따르자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하나일 것이다. 지혜라는 것은 대중을 따르는 것이 지혜가 아니고 대중이 다 옳다해도 그것이 틀린 것이라고 알아내는 것을 지혜라 하는 것이다. 어떤 신자가 많은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간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쭉정이에 불과하다.
2.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하는 자 (단12:3)
지혜라는 것은 자기 혼자만 알고 있는 자를 가리킨 것은 아니다. 내가 분명히 알았으니 어떻게 하든지 남을 지혜롭게 해서 살 길로 인도해 보려고 하는 것이 지혜로운 자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약3:17을 보면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다고 말했다. 지혜가 있는 자라면 남이 죽는 것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지혜로운 종이라면 환난이 올 때 많은 사람을 구원해 내는 전도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시대적인 말씀을 바로 전할 때 환난 날에 구원받을 사람은 다 그를 따르게 될 것이다.
3. 지혜로운 자는 시기를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다 (단12:10)
우리는 대중을 인도하는 사람이니 시기를 똑똑히 가르칠 줄 모른다면 지혜로운 자라고 할 수가 없다. 누구든지 주 재림시의 지혜 있는 자는 하나같이 깨닫게 될 것이다(사19:12). 진노의 날이 올 때 깨닫는 자는 깨닫고 악한 자는 더 악해질 것이나 악한 자에게 지혜로운 자가 쫓김을 당하게 될 것이다(사66:5).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는 다수요 지혜로운 자는 소수가 되기 때문이다.
결 론
우리도 진노의 날에 지혜로운 자가 된다면 시대는 지혜로운 자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날까지는 무신론자의 궤휼적인 세력이 형통했지만 진노의 날에는 지혜로운 자만 해같이 빛나는 시대가 오니 이것은 영원한 것이다.
136. 여호와의 땅에 빛날 일
- 슥 9:9~17 -
서 론
하나님은 당신의 땅에서 빛나게 살 수 있는 백성을 위하여 어떻게 역사한다는 것을 스가랴 선지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기독교 종말의 끝을 맺는 역사는 땅에서 빛나게 되는 일을 목적한다는 이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만일 어떤 신자가 죽어 천당만을 목적하고 이 땅에서 빛나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비밀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스가랴 선지는 육적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해방을 받고 돌아올 때 묵시로 본 것은 전부가 여호와의 땅에서 빛나게 되는 일을 보여준 묵시다. 이제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해서 여호와의 땅에서 빛나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본문에서 알 수 있다.
1. 예수께서 나귀 타고 오심으로 되는 일 (9)
만일 예수께서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일이 없이 되었다면 성경은 그대로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귀를 타신 것은 평화의 왕이라는 뜻을 보인 것이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그 길은 여호와의 땅에 빛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이루기 위한 왕으로서 상경했던 것이다. 모든 제자들은 그때 단번에 예수님이 왕이 되는 줄 알고 기뻐했던 것이다. 모든 대중은 예수가 왕이라고 호산나를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어긋났던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볼 때 절망 낙심해서 원망하고 욕하며 침을 뱉고 비웃었던 것이다. 이것은 즉 진리를 모르는 인간들이 호기심 명예심에서 날뛴 것뿐이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면 자기네 나라에서 왕이 되고 세계를 다스린다는 신앙관이었던 것이다. 제자들이 본문 성경인 슥9:9이하를 똑똑히 알았던들 그렇게도 낙심해서 넘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성경에서 일점일획도 어기지 못하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성경을 자기 욕망에 채우는 허영심에서 날뛰었던 것은 사실이다. 슥9:9에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온다는 것만 보고 그 아래는 자세히 읽어보지 않았던 것이다. 금일도 성경을 이와 같은 상태에서 자기 주관에 붙이는 신앙이란 어려운 일이 올 때 넘어지고 말 것이다.
2. 이방에 화평을 전하는 역사 (10)
하나님께서는 시온의 딸아 기뻐하라는 말씀을 하시고 그리스도로 먼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한 후에 그 정권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르고 세계를 통치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말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방인을 짐승같이 보는 과오를 범했던 것이다. 지금도 유대교인들은 이방은 구원이 없다고 말하는 흑암에 빠져 있는 것이다.
만일 바리새교인들이 이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았던들 바울을 그다지 박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위 정통을 찾는 바리새교인들은 이방에 복음을 전한다하여 염병 같은 놈이라고 했다. 금일도 성경을 자세히 읽지도 않고 남을 비판하는 자는 바리새교인에 불과한 것이다.
3. 언약의 피로 구원하는 역사 (11~12)
하나님이 이 세계의 땅을 빛나게 하는 역사는 언약의 피를 인하여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올라오게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쳤다. 이러한 성경을 모르는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님을 다 버리고 도망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그 피로 죄에서 구원하는 일이 있고야 예수가 왕이 된다는 것을 믿지 않고 그대로 살아서 왕이 된다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금일까지 이루어진 역사는 9~12까지 해당된 역사라고 본다.
4. 시온의 자식을 격동시켜 이방을 치는 역사 (13~14)
이것은 종말의 사명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 날까지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서 죄인을 구원하는 역사는 원수를 치는 역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기독교 종말의 끝을 맺는 역사는 원수의 세력을 치되 용사의 칼같이 역사해서 치는 것이다. 만일 금일에 종말적인 역사가 있어야할 때인데도 불구하고 헬라적인 문명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협상적인 기독교 사상 운동을 한다면 이 말씀과는 반대가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시대를 따라 역사하기 때문이다.
5. 여호와께서 백성을 호위하는 역사 (15)
하나님은 이방의 세력을 용납치 않고 치는 역사를 할 때 당신의 백성이 절대적으로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호위를 한다는 것이다(단12:1). 다니엘 선지도 북방의 세력이 남방을 침노하는 때 하나님이 자기 민족을 호위하기 위하여 미가엘 천사를 동원한다고 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호위해 주겠다는 데도 불구하고 원수를 무서워하고 원수와 타협을 한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6. 양떼같이 구원하는 역사 (16)
이것은 영적 구원을 말한 것은 아니고 적군인 원수의 피가 강같이 흐를 때 자기의 사람을 목자가 양을 보호함 같이 구원해 준다는 것이다. 이때 구원을 받는 자는 면류관의 보석같이 여호와의 땅에서 빛나고 형통하며 아름다움이 크게 이루어지므로 소년과 처녀들이 건강을 얻어 복된 땅에서 장수하며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시대와 하나님의 말씀과 시대와 하나님의 역사를 잘 구분하지 않으면 여호와의 땅에 빛나게 되는 일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를 통하여 기록할 때 어떻게 여호와께서 역사하므로 여호와의 땅에 빛나는 일이 있다는 것을 본문은 순서 있게 말한 것이니 우리는 빛나는 일의 축복을 받으려면 절대 이방의 헬라적인 사상과 맹렬히 싸우는 용사가 되어야만 되는 것이다.
여기에 헬라라 하는 것은 속화된 문명을 가르친 것이니 다니엘 8장에 바사의 문명을 수양으로 말했고 헬라의 문명을 염소로 말한 것은 사상을 보여준 묵시라고 본다. 바사는 스룹바벨의 역사를 적극 후원하고 승리하도록 스룹바벨에게 권리를 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헬라를 친다고 한 것은 종말의 기독교의 헬라적인 사상이 교회를 망칠 것이니 이것을 용납치 말고 쳐야만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금일의 종교 위기는 헬라적인 사상이 강단에 서게 되는 것이다.
137. 동방역사와 대 환난
- 계 7:1~3 -
서 론
하나님께서 노아의 입을 통하여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한 후 셈의 계통인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울 때 땅의 온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약속을 세웠던 것이다. 하나님은 셈의 장막에서 약속을 세웠고 셈의 장막에서 십자가 부활 승천 성신 강림으로써 세계적인 모 교회가 아시아 서극인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라는 말씀 그대로 역사하겠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의 전통적인 혈통과 신앙의 줄기는 성민의 역사를 보아서 알 수 있고 세계적인 기독교의 성도의 역사는 이방을 중심해서 되었다는 것은 2천년 역사를 보아서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가 완전히 서기까지는 성민의 계통으로 이루어진 것은 야곱의 언약이 이루어진 열매요 네 씨로 세계 민족이 복을 받는다는 것은 기독교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새 시대를 이루는 종결을 맺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지를 통하여 새 시대를 이루는 종말적인 역사는 동방이라 땅 끝이라 해 돋는 곳이라 이렇게 말한 것은 계시록 7장에 있는 해 돋는 곳이라는 것과 서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이제 동방역사와 대환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1. 동방 역사 (1~3)
모든 예언이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 부활 승천이 아시아 서극에서 이루어지는 동시에 성신 강림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예언이 이루어지는 사실이라면 마지막 하나님의 종들이 이마에 인을 맞는다는 것도 예언대로 동방 해 돋는 나라에서 이루어져야만 될 것은 사실이다. 만일 동방 역사가 없다면 모든 성경은 참되신 말씀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동방 역사를 세밀히 말한 것이다. 모든 예언이 분명히 이루어질 일도 사실대로 증거가 나타날 것이니 홀연히 나타나는 동방 역사일 것이다.
2. 대 환난
이 환난은 큰바람으로 보여졌는데 땅과 바다를 해할 바람이라고 말했다. 이제 세계적으로 바람같이 터져 나올 환난을 전멸의 환난이라는 뜻으로서 땅과 바다를 해한다고 말한 것이다. 동방에서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역사를 일으키는 목적은 임박한 대 환난에서 어떤 방법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냐 하는 문제가 결부된 것이다. 이 날까지 기독교의 역사는 죽음에서 다시 산다는 부활 영혼 구원 문제를 가지고 역사가 일어난 것을 성신의 인 맞은 종의 역사라 하는 것이다.
바람을 잡은 네 천사는 계9:15을 대조하면 분명히 중동에서 터질 전쟁을 좌우하고 있는 사대 강국으로써 보게 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런 무서운 종말의 환난이 터져 나올 때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새로운 역사가 없이 잠잠히 있다면 기독교의 종말은 큰 위기를 맞는 현실에 우리는 처하여 있다고 말하게 된다. 노아 때도 롯의 때에도 미리 비밀을 알려주는 준비가 있었거든 땅과 바다가 피해를 당할 이 바람인 대 환난을 앞에 놓고 시대적인 비밀을 증거하는 종들의 역사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7장은 기독교의 종말적인 구원론에 있어서 두 가지 구분을 간단히 말한 것뿐이다. 바람집이 터지기 전에 준비한 종으로서의 무장을 갖추고 역사할 것을 말했고 대 환난이 터질 때에는 헤아릴 수 없는 큰 무리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말했다. 이 구원은 영혼 구원은 아니다. 영육간에 아울러 구원을 받고 큰 환난에서 나온다고 말한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이스라엘이라는 이것을 바로 안다는 데서부터 진리를 바로 파악해야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금일에 유대 족을 14만 4천으로 본다는 것은 십자가의 복음과 너무 거리가 먼 사실이니 여기 이스라엘은 십자가의 피의 제사를 드린 후에 일어나는 영적 이스라엘에게 해당된 것이다. 여기에 이스라엘된 종들은 동방에서 역사가 일어난 후에라 했으니 종말적인 환난에서 역사할 종들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동방에서 역사가 일어난 다음에 무장한 종들이 환난에서 역사할 때에 회개하고 나온 무리는 어린양의 피로 속죄 받고 종족이 되어 나온다는 것이니 이것이 7장의 두 가지 대지의 뜻이다.
138. 하나님이 세우는 나라
- 단 2:44~45 -
서 론
우리의 완전한 지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그 일을 아는 것을 완전한 지식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과학적인 지식은 과학적인 지상 천국을 목표로 꿈꾸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지식이란 하나님이 어떠한 방법으로 당신의 나라를 세우느냐 하는 진리를 바로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알아도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당신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을 모른다면 이 사람은 얼마든지 이단설을 퍼뜨리며 미로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성경에 다림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세상에 당신의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니 알파에서 오메가로 연관된 것을 아는 지식을 다림줄의 지식이라고 한다. 이제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세우는 다림줄의 진리를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영원한 나라를 세울 자의 인격 (눅1:26, 30~33)
하나님께서 세우는 나라의 왕 될 인격은 성령으로써 잉태된 인격이 아니고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위대한 영웅적인 왕들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으나 잉태할 때부터 영원한 왕이라 하는 신의 지시를 받고 신으로서 잉태된 자는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로 잃었던 에덴의 축복을 찾아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탄생이다.
1) 인간 지식을 초월한 사람이다(눅2:46~47).
12세된 예수는 조금도 인간의 지식을 배운 일도 없이 예루살렘 성전에 앉아 문답할 때 모든 박사들이 다 크게 놀랐던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가 인간 지식을 배울 필요조차 없는 인격인 것이다. 인간 지식이란 사람이 꾸며낸 조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요7:28을 보면 예수님이 성전에서 가르칠 때 모든 사람이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모든 것을 아느냐 하며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대답하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2) 인간 정권을 초월한 권세(요10:17~18).
세상 정객들에게 예수님은 그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또는 친히 목숨을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말씀했던 것이다. 이것이 없이 그리스도께서 세상 정객들에게 죽음을 당했다면 세상 정권을 지배할 왕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정권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담대히 말씀하신 것이다(요18:36). 만일 예수님이 세상 나라에 속한 왕이었다면 영원한 나라의 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3)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몸이다(요20:17~18).
만일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어떤 비행기나 혹은 무엇을 이용하여 왕래할 인격이라면 심판할 왕이 될 수 없다. 그는 천계를 왕래하는 것을 문제시하지 않는, 물체의 지배를 받지 않는 몸이다(요20:19). 그리스도께서 물체의 지배를 받는 인격이라면 물체 안에 있는 자가 영원한 왕이 될 수가 없고 물체를 초월한 영체를 가진 신이시므로 구름을 타고 다시 올 자격이 있는 것이다(행1:10~11).
2. 나라를 세우는 방법
1) 회개의 방법(마4:17)
인간의 모든 종교는 혹은 도통이나 숭배나 수양이나 도덕 이러한 것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하나님의 방법은 회개하면 천국으로 간다는 것이 방법이다. 이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대하여 말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즉 죄를 사해줄 권리가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회개하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회개한다면 하늘 나라에 간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라는 것이다.
2) 보상의 방법(계22:12, 요3:4~5)
나라를 세우는데도 그 나라 국민의 자격을 만드는 방법은 회개와 중생이라면 왕국의 치리 권을 맡기는 방법은 보상의 방법이다. 하나님의 보상이란 일 한데 따라서 주는 보상이니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남을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일한 보상은 왕권을 주되 그리스도와 같이 세세의 왕이 되는 것이다(계22:3~5).
3) 보수의 방법(단2:44~45, 7:21~22)
우상을 때려부수는 것은 다니엘 선지에게 심판의 묵시로 보여준 것이다. 이 보수란 세상 나라를 몽땅 없앤다는 것이다. 세상 강대국을 우상이라고 보여진 것은 영구한 정권이 아니고 생명이 없는 우상의 정권에 불과한 정권이요 인류 강대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아무리 바벨론이 한때 강하여져서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으나 이것은 일시 하나님께서 들어 쓴 생명 없는 막대기에 불과한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는데 있어서도 인간이 극도로 번창하여 인종이 서로 섞여서 혼혈 부패에 들어가는 동시에 사상적으로 합할 수 없는 시기에 인생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요, 더구나 정치 사상문제 이것을 해결할 분은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강림하는 날에야 해결될 것이다. 여기에 뜬 돌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가리킨 동시에 왕권을 가지고 오는 성도의 나라의 권세를 말한 것이다.
그러면 이미 사명을 맡은 자로서 충성을 다하던 종들은 죽은 자는 부활할 것이요 살아 남아서 끝까지 역사하던 종들은 들림을 받고 들림 받는 종들이 역사할 때 회개하고 따라오던 무리는 그 나라의 국민 된 자격으로 들어가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이 땅에 나라를 세우는 것은 영혼이 가는 천국을 말한 것이 아니고 완전한 나라인 유형적인 사람으로서 누리는 왕국을 말한 것이다. 들어갈 자는 종족은 생명책에 기록된 자요 그 나라의 별과 같이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인도한 자라는 것을 단12:1~3에 말했다.
즉 사상 정치 혼란으로 인하여 합할 수 없는 이 자리에서 올바른 사상 올바른 정치에 바로 서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상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왕권을 받은 자만이 남는 것을 성도의 나라라 하는 것이다.
139. 불법자의 나타남과 주님의 나타날 일
- 살후 2:1~12 -
서 론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로 나타날 때도 불법적인 교권의 세력이 극도로 강성하여 참 성도를 탄압할 때 나타났던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다시 공중에 나타날 때도 불법적인 거짓 선지의 세력이 노골화하여 자기의 숨겼던 비밀을 만방 앞에 공포하고 개시할 때 주님은 홀연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주 재림을 고대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절대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는 일이 있기 전에는 주님이 오지 않는다고 단언적으로 말했던 것이다.
이제 불법의 사람이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대하여 본문을 보아서 알 수가 있다.
1. 배도자의 뒤를 따라 나온다 (2~3)
이 배도란 이미 세워진 교회를 황폐화시키는 정책을 말한 것이다. 단11:30~31에 다니엘은 종말의 환난은 북방과 남방으로 대립되는 것을 말할 때 북방 세력은 하나님 말씀을 배반하는 자를 중히 여기고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한다고 했다. 이 배도는 과거에도 개인적인 행동으로는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는 세계제왕이 배도한 일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배도라는 것은 세계적인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북방세력을 말한 것이다.
즉 북방의 적그리스도의 정책을 말한다. 이렇게 배도적인 세력이 세계적인 위협을 쥐고 나올 때 그 배도자의 뒤를 따라 나오는 거짓 선지를 불법자라 하는 것이다. 불법이란 마7:21, 마24:11~12의 성경을 보면 “주여 주여” 하면서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 날까지는 기독교가 말씀에 탈선된 자를 출교, 책벌 등의 강한 치리가 있으므로 불법의 비밀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노골적으로 나타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 재림이 임박해서는 이것이 세계의 교권을 쥐고 불법적으로 노골화시켜 만민 앞에 공개시키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현재 ‘새 신앙 고백서’ 라고 말할 수도 있다. 동정녀 잉태설과 심판을 빼고 나오는 이 고백서는 불법이 아닐 수 없다. 즉 알파와 오메가를 빼놓은 불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성신 잉태와 그리스도의 강림의 심판을 뺀다면 메시야도 재림의 주도 부인하는 불법이다. 이것을 강단에서 세운다는 것은 미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2. 성전에서 나타난다 (4)
여기에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한다는 것은 인본주의적 사상을 말한 것이다. 즉 자칭 유대인이다(계3:9). 동정녀 잉태설을 부인하고 재림을 부인하는 신앙고백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니 자칭 유대인인 동시에 가증한 물건이라고 보게 된다. 자기의 중심에 맞는 것을 믿는다면 자기를 믿는 신앙이니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는 인을 친 자가 아니고는 다 불법이라고 볼 수 있다(요3:33).
3. 하나님께서 허락하므로 나타났다 (5~8)
하나님은 왜 불법적인 신앙고백서를 내놓게 하느냐 할 때 이제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 때라는 것은 주님이 나타날 때이다. 이 때는 전 3년반기이니 말세증인이 나와야 할 때다. 왜냐하면 권세 받은 증인이 나오지 않고는 이 세력을 막을 자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이 나타난 현재 1967년을 경홀히 생각지 말아야 할 것이다.
4. 능력과 기적과 표적으로 나타난다 (9)
하나님은 사단을 허락해서 능력도 기적도 표적도 행하도록 허락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즉 예언의 말씀을 바로 믿고 다림줄을 쥔 종에게 천상 천하의 권세를 맡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 하와를 미혹해 보라고 사단을 허락한 것같이 말세에도 말씀의 칼을 든 종만 골라 세우기 위하여 사단의 능력과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5. 속이는 일로 나타난다 (10)
이것은 누가 진리를 사랑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을 시험하기 위한 방법이다. 누구든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사람은 다 속도록 만드는 심판이다(사66:4). 예언의 말씀을 듣고도 가하든지 감하든지 하면 재앙을 받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말세 진리를 가감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거짓을 믿도록 하겠다는 것이다(11). 다시 말하면 이것은 영적으로 오는 재앙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 론
주님이 나타날 시기에는 이 말, 저 말 듣지 말고, 기독교의 불법적인 행동이 교권을 가지고 나오는 때를 주님 나타날 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니 처음에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과를 주겠다는 목적에서 간교한 뱀을 허락한 것같이 말세의 성도들에게 죽지 않고 살아서 생명과를 먹을 수 있는 축복을 주기 위하여 다시 마귀를 극도로 간교하게 속이도록 허락하는 것이니 이 때는 말씀의 칼을 든 자 외에는 다 하와 같은 혼미를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종말에는 예언대로 심판하는 것이니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느냐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라도 이 때 진리를 사수하지 않는 자라면 다 미혹을 받게 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미혹을 시키겠다고 말씀했으니 이 말씀을 예언하신 하나님은 말세 진리에 혼선되는 자를 미혹을 안 시켜도 심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가 다시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한 것도 이러한 때를 두고 말한 것이다.
140. 강권 역사의 필요성
- 슥 3:1~10 -
서 론
하나님은 역사를 하시되 일반적인 구원을 주기 위한 역사도 있고 특히 종을 완전히 들어 쓰기 위한 역사도 있으니 종말의 종을 어떻게 들어 쓸 것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강권 역사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은 은혜로 되지만 종말의 종은 싸워야 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싸워서 승리할 수 있는 종을 만들기 위한 역사를 강권 역사라 하는 것이다. 구원이란 십자가의 피를 믿으면 되는 것이니 강권이라는 것이 결부되지 않는다. 강권이란 도저히 해보다 일이 안될 때 특별조치로 세우는 것을 강권이라 하는 것이다.
강권역사의 필요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대표적인 사람을 세우기 위한 필요성 (1~5)
이것은 사단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단으로 더불어 대표적인 종을 마음대로 대적하도록 만드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말세에 적군을 때리는 역사의 대표라는 것은 자기 자체가 원수가 되는 사단에게 그만큼 시련을 받아 보아야 되겠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단의 세력이 무엇인지 체험의 과정이 없다면 사단에게 피해 당하는 사람을 바로 서도록 지도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군대를 지휘하는 총 책임자가 되려면 자기가 직접 적군과 전투 경험이 없는 사람은 도저히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전투란 이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해 본 사실이 있어야 된다. 대표적인 책임자에게 강권 역사가 임해야 될 것은 사람은 사단과 싸워 승리할만한 인격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신이시니 사단을 대적시키는 시험이 올 때 문제없이 물리쳤지만 신성이 없는 사람은 마귀의 신인 사단을 이길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슬린 나무 같이 더러운 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슬린 나무란 뜻은 그 종이 사단과 싸웠다는 뜻이다. 그러면 군대가 싸우다가 부상당했다면 싸움을 붙인 편에서 고쳐줄 의무가 있다.
사단의 편에 가서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편에서 사단과 싸웠다는 뜻이 그슬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종이 정욕에 끌리는 생활이 아니고 사단을 대항하는 싸움에서 자기의 힘으로 완전 승리를 이루지 못할 때 그대로 둔다면 대표적인 사명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강권으로 옷을 벗기라고 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옷과 정한 관을 하나님 편에서 책임지고 입혀주는 일을 강권이라 하는 것이다.
2. 역사의 강권 (6~8)
하나님은 강권으로 대표적인 종에게 천사가 돕도록 같이해 주는 것이다. 대표자가 도를 준행하며 율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강권의 힘이요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며 지키는 것도 강권으로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과를 제했기 때문에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단과 대립을 시킬 때 첫 번에는 대표자를 세우기 위해서 시켰고 다음에는 강권으로 순이 나오게 하는 것이다.
순이란 자기 힘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니 순의 역사라는 것은 인간의 힘인 자기 자체의 힘과 능이 가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루터기로부터 진액이 오므로 하루아침에 순이 되는 것이다. 사단과 싸우는 대표자와 함께 동료들도 강권 역사의 힘을 다시 받아야 된다는 뜻으로 예표라고 했던 것이다. 예표라는 것은 앞으로 될 표적이 된다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3. 세계적 강권 역사 (9~10)
하나님은 역사의 순서가 있는 것이니 종도 대표자를 들어 쓰는 역사도 있고 일반을 들어 쓰는 역사도 있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싸움도 있고 일반적인 싸움도 있다는 뜻과 같다. 일반적 대중의 역사라는 것은 새길 것을 새기고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는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새긴다는 것은 세계적인 역사가 될 만한 확실한 말씀의 칼로 새겨지는 일이요, 땅의 죄악을 제한다는 것은 개인의 죄가 아니라 이 땅 모든 종들에게 해당되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그 때는 각각 서로 초대를 하게 되는 대중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아무리 일반적인 역사라해도 강권이 없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심판기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날까지는 버림돌의 진리를 바로 전하는 역사이었으나 종말의 순의 역사는 세운돌의 심판권세의 강권 역사이다.
결 론
하나님은 사단에게 권세를 주는 말기에 하나님 편에서도 강권으로 역사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것은 심판기에 남은 교회와 종을 위한 역사이니 하나님 편에서도 강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학2:18이하를 보면 심판이 오는 말기의 역사는 스룹바벨로 인을 삼는다고 한 것은 그만한 권세를 맡긴다는 것이다.
141. 인간 세력이 부끄러워 할 종말의 역사
- 미 7:1~17 -
서 론
하나님은 인간의 세력이 현재 아무리 팽창하게 올라가도 하늘에서 웃으시면서 인간 세력을 부끄럽게 할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은 숨어 계셔서 각 사람의 마음을 검토하고 중심을 살피시면서 초인간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하는 일에 쓰여질 인격을 달아보는 심판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인간 세력을 부끄럽게 할 역사에 쓰여질 종은 고립적인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본장 1~3절까지 말했다.
지금 크게 쓰여질 종은 어느 사람에게 가서 영적으로 무엇을 얻어 가질 만한 것이 없으리만큼 부패해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지도자들이 정직한 자가 없고 사랑이 없고 서로 잡아주며 악을 행하되 재판자는 뇌물을 구하고 대인이라는 지도자도 그들끼리 연락하여 자기 사욕을 채우고 있다. 외모로는 선하고 정직한 자 같으나 찔레 울타리 같이 사람을 찌른다는 것이다.
이웃도 친구도 심지어 품에 누운 여인이라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정이다(4~6). 이러한 가운데 여호와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인간 세력이 부끄러워할 만한 역사를 일으키도록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강권 역사를 행하겠다는 것이 본문이다. 이제 이러한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할 것이냐 하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엎드러져도 일으켜준다 (8상반절)
말세에는 도저히 사람이 없으니 그 가운데 나은 사람이 여호와를 바라보는 사람을 말한 것이니 엎드러져도 일으켜 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으키려는 사람을 엎드려뜨리려는 무리는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2. 어두움에 앉아도 빛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8하반절)
아무리 흑암의 세력이 운무같이 택한 종을 싸고 있더라도 하나님이 직접 빛이 되어 주겠다는 것이다.
3. 범죄가 있다하여도 용서해서 쓰겠다는 것이다 (9~10)
하나님을 바라보고 옳게 살아 보려고 싸우던 종이 약해서 혹은 속아서 혹은 모략적인 억압에 눌려서 실수가 있다해도 그를 인도하여 광명에 이르게 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역사하는 것을 강권 역사라 하는 것이다. 즉 대적을 진흙같이 밟고 나가는 역사이다.
4. 모든 사람이 굴복하고 돌아오게 한다 (11~12)
아무리 실수가 많고 부족하리만큼 되었더라도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이 산에서 저 산까지 다 사람들이 그 종 앞에 굴복하도록 하나님은 역사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악화된 사회 부패한 교계에서도 자기 사명을 감당해 보려고 노력하는 종이니만큼 강권 역사로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것이다.
5. 모세같이 들어 쓴다 (15~17)
하나님께서 모세를 들어서 애굽의 세력을 부끄럽게 함 같이 말세의 종을 들어서 열방 세력이 부끄러워서 자기 입을 막고 귀가 막히고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도록 역사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양떼를 회개시켜서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는 역사가 된다.
결 론
은혜 시대에는 모든 종들이 인간 세력에게 순교를 당하고 축출을 당하고 비방 받고 압박 받은 데서 세계적인 복음 선교가 되었지만 종말의 역사는 원수를 갚는 역사니 인간의 모든 세력이 그날에 부끄러워서 떨다가 망하고 만다는 것을 본 성경은 말하고 있다.
142. 백마의 2차 승리와 천년 시대
- 계 6:1~2, 19:11~16, 20:1~3 -
서 론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싸움이 없는 역사가 아니고 싸움이 있으며 승리가 있으므로 안식의 시대가 온다는 것이 성서의 원리가 되는 것이다. 인류 역사는 인류 타락이 있고 싸움이라는 것은 가인과 아벨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어찌하여 싸움이 있게 했는가 하는 진리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싸움이 있음으로써 왕권을 가질 자격을 이루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싸움이 없는 승리가 있을 수 없고 승리 없는 왕국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비극을 가져오는 현실을 이룬 것은 의의 세력이 승리를 보지 못하고 악의 세력이 승리를 이루는 열매이다. 다시 말하자면 아담이 싸움에 짐으로써 이루어진 사망은 금일에 전 세계를 흑암으로 떨어뜨리고 비참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싸움에 승리를 볼 자는 백마를 탄 자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계시록은 봉함한 책을 열어 놓을 때부터 세상의 될 일을 보여준 것이 계시록이다. 인류 역사의 시대 시대의 되어진 일도 안팎에 가득히 기록한 책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계시록은 목적한 것이다.
둘째아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승리를 이루게 되는 것은 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와서 승리한 것이다. 이것은 흰말을 탈 수 있는 군대를 이루는 공로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요16:33에 말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첫째 아담이 마귀와의 싸움에 지므로 사망이 왕 노릇했고 둘째아담 예수가 십자가에서 승리하므로 의의 왕국을 이루게 되었다. 여기에 백마 탄 자라는 것은 십자가의 피로 성결을 이룬 성도의 무리를 가르친 것이다. 이제 백마 탄 자가 어떻게 되어서 두 번째 승리하게 되느냐 하는 것을 본 성경에서 말한다.
1. 승리 (계6:1~2)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는 잃었던 백성을 찾는 일에 승리를 보게 된다(계5:9). 하나님은 인간을 왜 잃었느냐 하는 것은 죄 값이다. 죄 값은 사망이니 사망이 왕 노릇 하는 권세 아래 인류를 빼앗긴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가 세계를 정복하는 일이 첫째 승리가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십자가의 피를 믿으면 무조건 죄악의 권세에서 해방을 준다는 싸움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역사의 수많은 종들이 이 해방의 운동을 위하여 피를 흘리며 싸웠던 것이다.
즉 우상적인 마귀의 종교가 지배하고 있는 정권과 교권을 때려부수며 들어간 싸움이 기독교의 자유를 부르짖는 해방 운동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흑암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은 역사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승리의 부활을 이룬 몸으로써 승천하여 역사하는 활동이다. 아무리 기독교를 반대하던 사람도 회개시키어 복음을 위하여 싸우도록 만드는 혁명적인 큰 역사는 기독교를 통하여 세계를 침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았으므로 승리를 이룬 것이다(마28:18~20). 승천하신 주께서는 권세를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이 필연코 이루어진 승리를 본 것이 금일의 세계적인 기독교 문명이라는 것이다.
2. 두 번째 승리 (계19:11~16)
첫째 인을 뗄 때 두 번째 이기려고 한다 하는 말이 시작되었고 계19:11이하를 보면 완전히 이기었다는 것이 있고, 계20:1이하를 보면 천년 왕국이 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2차 승리는 어떻게 되어서 승리하게 되느냐를 알려면 계시록을 똑똑히 보아야 할 것이다. 금일까지는 계시록이 하등 필요가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이것은 해방 운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시록은 승리해야만 된다는 무서운 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을 말했다. 1차에는 그리스도가 승리한 십자가의 피로써 해방적인 운동이었으나 2차에는 해방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싸워서 이겨야 할 무서운 환난이 온다는 것이다. 금일까지는 하나님의 자녀를 마귀의 권세에서 해방하여 등록시키는 일이었으나 계시록은 이미 등록된 자녀들이 싸워야 된다는 것이다(계5:10). 이 때는 붉은 말이 허락을 받고 나온다.
2차 승리는 붉은 말과 싸워서 이겨야 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계19:19을 보면 백마 탄 군대가 붉은 짐승의 군대와 싸움을 마치는 광경이 보여졌다. 짐승의 군대는 분명히 용에게 권세를 받았다고 계13:4에 가르쳤고 거짓 선지는 붉은 짐승에게 권세를 받았다고 12절에 말했다. 그러면 백마 탄 군대의 대적은 붉은 용과 짐승의 군대와 거짓 선지 이것이 싸움의 대상자가 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상에서 혼자 승리를 봄으로 세계적인 해방을 일으키는 열매를 가져왔으나 두 번째 싸움은 백마 탄 자의 입에서 예리한 칼이 나오는데 이것으로써 싸운다고 말했다(계19:21). 이 검이라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다. 계시록에 내가 다시 올 때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계22:6에 말씀하셨으니 말씀으로 승리한 자라야 다시 오시는 주님을 살아서 맞이한다는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죽음을 맛보지 않고 들림 받은 종은 붉은 세력과 싸워서 이겨야만 들림 받는 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역사하실 것이니 말씀을 바로 믿고 지키는 자는 이기도록 하나님께서 권세를 준다는 것이다(계2:26, 11:3). 이 권세는 그리스도와 동등한 권세다. 주님은 이 권세를 왜 맡기느냐 하면 붉은 세력을 때려 승리하라는 허락을 맡기는 것이다. 재앙으로 이를 칠 수 있는 권세를 맡기고 붉은 군대를 쳐서 없이할 권세를 맡기는 것이다(슥9:13~15).
누구든지 계시록의 진리를 바로 나가서 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권세를 주므로 써 이기는 것이니 이 권세를 받는 자 외에는 다 붉은 세력에 먹힘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 권세라는 것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권세이니 그리스도께서 말하는 대로 되는 권세를 하나님께 받았고 그리스도는 종말의 백마 탄 군대에게 이 권세를 맡기는 것과 같다. 예를 들면 대장이 싸우는 군대에게 마음대로 쳐죽이라는 권세를 동등하게 맡기는 것과 같다. 그러면 이 권세는 만 왕의 왕의 권세니 당할 자가 없다.
즉 이 때는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죄인을 부르는 시대의 종들은 원수에게 죽으면서도 불평이 없어야 했지만 계시록의 예언의 말씀을 가지고 싸우는 종들은 죽이라는 권세를 받았기 때문에 재앙으로 땅을 칠 수가 있다. 모세에게도 엘리야에게도 죽이는 권세를 맡겼던 것이다. 이렇게 되므로 교회는 양대 진영으로 갈라지게 된다. 권세 받은 종은 승리하게 되고 짐승의 권세를 의지하고 타협하던 종은 용서 없이 백마 탄 군대에게 죽게 된다(계19:20).
결 론
천년 왕국이란 마귀가 없고 죄악이 없고 재앙이 없고 싸움이 없고 사망과 질병과 고통이 없는 평화 왕국이 온다. 왜냐 하면 마귀를 없애고 그 앞잡이 짐승의 군대와 거짓 선지를 다 없애고 보니 필연적인 평화 왕국이 온다. 다시 말하면 첫 번 역사는 원수를 사랑해서 원수라도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역사요, 두 번째 역사는 원수를 갚는 역사이다.
이 날까지 억울하게 원수에게 박해를 받고 피 흘리던 기독교의 원통한 사정을 종말에 권세 받은 종들이 원한을 풀어 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난 가운데 이길 수 있는 권세 받은 종은 왕권을 받고 환난 가운데 권세 받은 종이 전하던 예언의 말씀을 믿고 피난한 자는 백성이 된다.
143. 인류 종말의 난제 해결
- 단 2:31~45 -
서 론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에게 난제를 해결시키자는 것이 목적이 된 것이다. 인생의 난제는 여러 가지라고 말할 수 있으나 간단히 말하면 세 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1) 자기 영혼 문제
2) 생활 문제
3) 국제적인 종말 문제인 것이다.
오늘 낭독한 본문은 인류 종말 난제를 해결할 것을 말하고자 한다. 문명의 시발점이 되는 바벨론의 화려한 자리를 정복한 느부갓네살 대왕은 장래 일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은 왕에게 인류 종말 난제 해결이라는 큰 문제를 놓고 보여진 묵시 꿈은 다니엘 선지를 통하여 종말에 있는 우리에게 큰 축복이 될 새롭고 아름다운 소식을 알게 했던 것이다. 이제 난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말한다.
1. 인종 혼혈 문제 (43)
이것은 극도로 부패한 사회를 말한 것이다. 인종이 서로 섞인다는 것은 혼혈을 두고 말한 것이다. 금일에 양대 진영이 큰 세력을 잡고 있는 연방국과 합중국일 것이다. 극도로 혼혈 음란 방탕된 것이 양대국일 것이다. 그러면 세계를 지배하는 미소 양국은 극도로 인종 혼혈 방탕 사치 이것으로써 화해질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은 어떻게 될 것이냐 하는 것은 난제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인종이 이대로 간다면 금수에 지나지 않은 사회가 될 것이다.
2. 합할 수 없는 정치 사상 문제이다
이것은 인력으로써 해결할 수 없는 난제일 것이다. 만일 공산주의가 세계를 통일한다고 하는 것도 성서적이 아니고 자본주의가 세계를 통일한다는 것도 성서적이 아니다. 이것은 종국을 고하는 시대라는 것밖에는 말할 수가 없는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상적인 즉 생명이 없는 활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다 (44)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준다는 것이다. 영원히 망하지 않는 나라를 세우는데는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선다는 것이다.
4. 사람의 손을 대지 않은 뜬 돌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45)
이들은 심판자인 그리스도를 가리킨 동시에 성도의 권세를 가르킨 것이다(사28:16, 슥3:9, 4:7).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에게 스룹바벨의 역사에는 돌이 따른다는 것을 말했다. 이것은 종말에 다림줄을 쥔 성도의 권세의 역사를 말한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버림돌 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버림을 당했고 머릿돌된 예수님은 심판권을 받고 다시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심판의 돌은 인간의 정권을 초월한 신정적인 권세 역사를 돌이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힘으로 능으로도 안되고 여호와의 신으로 되는 최종적인 역사를 말한 것이니 인간의 과학문명이 난제를 해결할 수 없고 과학을 초월한 신의 역사로써 이루어지는 성도의 나라가 인류 난제를 해결하는 끝이 될 것이다. 인류가 원하는 평화 왕국은 여기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결 론
인생의 역사를 통하여 내려온 것은 한 우상적인데 불과하다는 것은 본문을 가르치는 동시에 우상적인 정치는 심판으로써 끝을 맺고 남은 성도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온다는 것이 인류 난제 해결이라는 것이다.
144. 말세에 나타난 주님의 역사와 재림시의 역사
- 벧전 1:20~23, 계 22:10~13 -
서 론
말세라는 것은 선지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때를 말세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야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으로 올 때부터가 말세라는 것을 말하였다. 왜냐하면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흘린 피는 세계 만민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 다 하루같이 하나님은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 다시 오시는 주님은 심판기에 오시는 것이니 말세에 온 것이 아니고 심판하러 오시는 것이다. 이제 주님께서 나타난 일과 다시 오시는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성경을 통하여 알 수가 있는 것이다.
1. 말세에 나타난 주님의 역사 (벧전1:20)
1) 믿음과 소망을 위한 역사이다(벧전1:21).
우리는 믿음으로써 되는 일은 말세에 종말의 세계적인 완전 구원의 역사이니 그리스도께서 말세에 나타나심이 아니면 세계 인류는 아무런 소망 없는 인간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을 주려고 오신 것은 심판기에 구원받을 사람을 얻기 위한 목적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믿음과 소망을 주는 역사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세계를 심판할 권리를 행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을 주는 일이 있는 다음에 심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와 사랑의 법칙이다.
2) 중생의 씨를 주는 것이다(벧전1:23).
중생의 씨라는 것은 썩지 아니할 씨이다. 만일 주님께서 믿음과 소망을 준다 하여도 그 씨가 내게 와서 자라난 역사가 없다면 완전한 역사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영생의 씨인 생명을 중생으로 받아 들여 이것으로 말미암아 자라서 완전한 열매를 이루는 것이다.
2. 심판주로 오실 때의 역사 (계22:10~13)
1) 예언의 말씀을 개봉한다(10).
심판기에는 중생의 씨를 받은 사람에게 예언대로 심판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의 씨를 받은 사람을 위하여 오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중생을 받은 자라도 예언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면 재앙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예언이다. 이것은 재앙 속에서 살아서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자에게 해당될 교훈이다. 그러므로 그때는 진노의 주님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봉한 책의 비밀을 그들이 알도록끔 전해주는 역사를 하게 된다.
2) 불의와 의를 갈라놓는 역사(11).
이때는 악한 자는 더욱 악하여지고 더러운 자는 더 더러워지고 의로운 자는 더 의로워지고 거룩한 자는 더 거룩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가을에 추수기가 임박하여 쭉정이는 완전히 쭉정이로 마르고 알곡은 완전히 알곡으로 굳어지는 것과 같다. 세밀히 말하자면 알곡 될 사람은 예언의 말씀을 꿀같이 받아먹을 것이오 쭉정이가 될 사람은 오히려 예언의 말씀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3) 일한 대로 갚아주는 역사이다(12).
갚아주는 일은 두 번 다시 없는 것이니 재림할 때에는 일한 대로 갚아주고 대심판 때에는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는 것이다. 이것을 행위 심판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 한대로 갚아주는 것은 종된 자를 표준한 것이요, 행위대로 갚아주는 것은 일반적인 백성에게 해당된다.
결 론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중생의 씨를 받은 것이요,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일한 대로 갚아줌을 받아서 왕국의 권세를 계급에 따라 왕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중생의 씨를 받은 데서 끝을 맺는 것은 절대 아니다. 씨를 받은 자로서 맡은 일에 따라서 갚음을 받는 것으로써 재림의 주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145.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
- 사 45:21~22 -
서 론
하나님은 온전한 공의와 사랑이 계신 동시에 공의도 당신이 행하시고 구원도 당신이 베풀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신이시니 공의도 행할 수 있고 구원도 베풀 수 있다는 것을 완전한 신이라 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역사함이 없다면 인간 자체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 은혜시대의 역사 (사40:1~2)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여 구원을 베푸는데 있어서 그 죄값을 당신의 손에서 배나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공의의 죄의 댓가로 받은 사람의 형벌을 친히 당신의 아들로 받은 것이 공의를 행한 것이다. 왜냐하면 공의라는 것은 죄를 범하면 그 댓가를 받는다는 것이 공의인 것이다. 이것은 율법의 공의에서 댓가를 아들을 통하여 다 행하는 제사로 끝을 맺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공의의 법칙을 범한 것을 친히 행하는 십자가의 피의 속죄가 없다면 구원을 베풀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공의의 댓가를 지불함이 없이 덮어놓고 구원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나 받았다는 것은 십자가의 피가 인간의 죄의 댓가를 배나 지불한 것과 같은 의가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피조물된 인간을 위하여 창조주의 신이 행하심이 더 큰 값이 된다는 것이다. 넉넉히 공의를 행했다는 뜻이 포함된 것이다.
2. 재앙과 심판에 대한 일(계18:6~7, 사40:10~11)
하나님은 택한 백성에게 대하여 십자가에서 공의로운 죄의 댓가를 갑절이나 지불한 것이 은혜시대에 전하는 복음이라면 심판기에는 공의의 형벌을 배나 인간에게 베푸는 것이 있는 동시에 남은 자를 구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에게 진노를 베풀되 갑절이나 더 사랑해 주는 일이다. 이것은 영과 육을 아울러 구원해 주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성도의 피값을 갚기 위해서 갑절이나 갚아주는 동시에 남은 자를 갑절이나 더 사랑해 준다는 것이다.
3. 심판기에 대하여 (계20:12~15)
하나님의 행위 심판이란 것은 시대 시대의 공의의 법을 따라서 친히 갚아주는 것이니 이것을 공의를 행하는 심판이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행한 대로 갚아주시되 시대적인 공의의 법칙을 따라서 갚아주고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구원해준다는 것이다. 이때에 심판권은 생명책과 심판록을 아울러 가진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심판하는 권세를 다 공의를 행한 아들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공의를 행하신 일이 없다면 심판도 베풀 수 없고 구원도 베풀 수 없기 때문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사랑이 시대를 따라서 진행되는 것이니 시대적인 공의의 법칙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사랑을 베풀고 순종치 않으면 공의의 법대로 심판을 내린다는 것이 의로운 심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공의를 행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순종하는 동시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사랑의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어느 때나 하나님은 시대적인 공의의 법을 순종만하면 사랑을 베풀어준다는 것이 하나님이 행하는 역사이다. 양심시대에는 양심을 따라 언약 신앙시대에는 언약의 신앙을 따라 율법시대는 율법에 따라 은혜시대는 십자가 법을 따라 환난시대에는 예언의 말씀을 따라 대심판기엔 행위를 따라서 공의를 베풀며 구원해주는 하나님이시다.
146. 알곡을 모으는 주님의 심정
- 암 9:7~15 -
서 론
알곡을 모으는 일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농부를 비할 때 씨를 뿌리는 농부의 심정과 비료를 주고 가꾸는 농부의 심정과 타작기를 들어대고 알곡을 모으는 농부의 심정으로 비교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타작기를 쓰는 농부의 심정은 어떠한 심정이냐 하는 것을 알곡을 모으는 주님의 심정과 비교할 수 있다.
1. 용서가 없는 것이다(7~8)
알곡을 모을 때는 온유한 심정이 아니고 강하고 강한 대책을 세우는 심정이다. 그러므로 쭉정이와 가라지 되는 인종은 하나도 남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땅으로 들어가도 죽을 것이요 하늘로 올라가도 죽을 것이고 산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또는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용서 없이 다 죽이겠다는 것이다(9:1~4).
만일 알곡을 사랑하는 심정이라면 쭉정이와 가라지를 아낀다는 것은 합당치 못할 것이다. 여름에는 짚이나 혹은 쭉정이 될 것도 가꾸는 심정이 있으나 알곡을 모으는 때는 한 알갱이도 남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세 진리를 대적하는 자는 피난처가 없다는 것이다. 인공 위성을 타고 별세계를 가도 죽을 것은 사실이다.
2. 알곡을 아끼는 심정 (9)
추수기는 알곡을 모으자는 것이 목적이니 어디 있든지 하나도 떨어지지 않도록 찾아내겠다는 것이다(암3:12). 그러므로 알곡된 백성이라면 어느 이단적인 교파 안에 있다해도 혹은 무신론 사상에 눌림을 당하고 있다해도 찾기 위해서는 주의 종을 타작기 같이 쓰겠다는 것이다. 원수의 나라를 들어가서라도 주의 백성을 찾기 위하여 타작기 같이 강하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말세증인이 재앙으로 땅을 치는 것은 알곡을 찾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동방역사에 쓰여지는 종이 대적을 짓밟고 나간다는 것도 그 목적이 주의 백성을 찾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을 누가 도둑질해서 숨긴 것을 아는 동시에는 그 아들을 찾기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찾을 것은 사실이다. 하물며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를 적군의 포로나 옥중에 갇혀있다면 이것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북진통일을 시키지 아니할 수가 없을 것이다(12).
3. 남은 자에게 마음껏 복을 주고 싶어하는 심정 (13~15)
하나님은 새 시대에 들어갈 백성을 위해서 심지어 기후까지도 고르게 해준다는 것이다. 무엇이고 피해를 줄 자는 도저히 없도록 해주는 축복이다. 에덴동산에서는 간교한 뱀을 쓴 일이 있으나 이 세계에는 에덴 동산에 비할 수 없는 큰 축복이 올 것을 말씀하셨다. 너무 포도즙이 많아서 산을 녹이리만큼 풍성해진다는 것이다. 그때는 일기가 농사 기후에 적합한 기후이므로 씨뿌리는 자가 추수하는 자의 뒤를 이어서 심어도 만족한 생산을 얻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물질계의 축복으로 극도로 만족하도록 축복할 것이다.
결 론
우리는 하나님이 심판기에 어떠한 심정을 가진다는 것을 똑똑히 모른다면 어리석은 아이가 부모의 심정을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덮어놓고 하나님은 사랑이라 하는 것도 어린아이의 심정이요, 덮어놓고 남을 두려워함도 어린아이의 심정이다. 우리는 어떤 자에게 어떻게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 때 알곡을 모으는 그날에 주 앞에 설 수 있는 자가 될 것이다.
147.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자의 새 힘
- 사 40:9~11, 27~31 -
서 론
하나님은 아름다운 새 시대를 이루기 위하여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이니 이것은 종말에 살아서 새 시대로 들어가는 주의 백성들이 들어야 될 소식이요, 그때 종들이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오신 것을 전하는 소식은 기쁜 소식이라고 전했던 것이다(눅2:10). 그러므로 종말에 아름다운 새 시대를 이루는 소식은 그리스도가 온다는 소식을 들은 자들인 시온의 아들딸에게 전하는 소식이다.
다시 말하면 기쁜 소식은 소망 없는 인간들에게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께로 다시 나아올 수 있는 소식이라면 아름다운 소식은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서 재앙을 받지 않고 아름다운 새 시대의 아름다운 생활 아름다운 영광을 새 시대에서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40:1~2은 죄사함을 입었느니라 하는 소식이요, 9절은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말했다.
세밀히 말하자면 사형 받을 죄인을 놓아주는 일이 속죄의 회개 운동이라면 아름다운 소식은 축복 받은 사람이 눈물과 죽음과 전쟁과 환난과 고통이 없는 시대를 얻는 것이다. 사람을 두고 말한다면 은혜시대의 소식은 병을 고치는 소식이라면 말세의 소식은 건강한 사람이 살아서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일할 수 있는 생활이 온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1. 높은 산으로 올라가므로 새 힘을 얻음 (9)
이 높은 산이라는 것은 시련의 고개를 말한 것이다. 높은 산에 올라가는 사람은 피로를 느끼고 힘을 다하여야만 되는 것 같이 이러한 영계에 올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산은 어떤 유형적인 이 땅에 있는 산이라고도 볼 수 있는 동시에 영적으로는 올라가는 산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세밀히 말하자면 말세의 대표적인 하나님의 종이 어느 산을 중심하여 그 산에서 영계가 올라가서 힘을 얻고 소리를 높여 복음의 나팔을 볼 것을 가르쳤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본장의 3절에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과 같이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친 것을 본다면 종말의 역사를 전하는 것도 유형적인 실지 산이 될 것이다. 이 산은 어느 산인가 그 방향만은 알 수 있다. 유대 광야는 아시아의 서해 옆이라면 종말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산은 아시아 동해 옆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이사야 41장에 동방에서 사람이 나온다고 2절에 말했고 9절에 동방 땅 끝이라 했고 25절에는 해 돋는 곳에서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방향은 알 수 있다. 동방 땅 끝에서 어느 산을 중심하여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가 완전 무장을 갖추고 나올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9절은 종말의 사명자는 산을 중심해서 나온다는 위치를 말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 새 힘을 얻어야 할 필요성 (10~11)
이때는 시대가 다른 때이다. 강한 심판이 내리는 보응이 있는 때니 죄인을 부를 때와는 달라서 다른 새 힘을 얻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민족이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그때는 온유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훼방하고 대적해도 용서해 주는 때다. 그러나 심판하러 오시는 역사는 강하고 두려운 주님으로 오시는 때이니 새로운 힘을 하나님께 받은 자 외에는 주님 오시는 그날에 설 자는 없을 것이다. 새 힘을 얻어 전하는 자도 있고 그때 특별한 보호를 받는 자도 있을 것이다.
3. 새 힘을 얻을 조건 (27)
이 조건은 억울한 사정을 하나님만 아는 원통한 일을 당하기 때문에 새 힘을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증적인 역사가 아니고는 안될 사정을 당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멸시를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슥3:2에 그슬린 나무라 했고 오바댜 2절에 크게 멸시를 당한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특히 시련을 주되 인간들에게 짓밟히게 만드는 억울한 시련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할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권세의 새 힘을 줄 자니 억울한 사정을 당하게 만든 후에야 주기 때문이다.
4. 새 힘을 얻는 방법 (28~31)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은 나만 바라보면 무조건 강권으로 주신다는 방법이다. 사람도 물질도 바라보지 말고 너는 낙심 말고 원망 말고 두려워 말고 나를 바라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종을 억울함을 당하도록 시련 시켰으니 책임지고 새 힘을 주어서 들어 쓰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방법이 아니고 하나님의 방법이며 종말적인 완전 역사다.
결 론
새 힘을 얻은 자의 열매는 완전한 인격을 소유하는 동시에 초인간적인 인격을 가졌으니 열 왕을 굴복시킨다. 또는 세계 민족들의 힘을 새롭게 만드는 인격이다(사41:1~2). 원수를 회삼물같이 짓밟는다(사41:25). 이 힘을 받은 종을 통하여 새 시대를 이룬다(사41:17~20). 이것이 기독교 종말의 끝을 맺는 역사라고 할 것이다.
148. 여호와만 자랑할 일
- 사 41:8~20 -
서 론
기독교 종말의 끝을 맺는 역사는 여호와만 자랑할 일이 온다는 것이다. 세계 인류를 지배할 인격은 여호와만을 자랑하게 되는 자일 것이다. 황금만능을 자랑하는 것이나 모든 인간의 자랑이 다 없어지는 날에 여호와만 자랑할 수 있는 일은 동방 땅 끝에 있다는 것을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셈의 장막에서 과거에도 미래에도 하나님을 자랑할 수 있게 역사하실 것이다.
지금 동방 아시아에 하나님의 제단이 다 황폐된 금일에 극도로 민생고가 심한 것은 동방이며 종교 위기가 온 것도 동방이요, 인심이 악화된 곳도 동방이다. 무엇으로 보든지 동방의 극동은 불행스러운 정부, 불행스러운 국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은 동방 땅 끝에서 여호와를 자랑하리라고 말씀한 이것은 하나님은 끝 날에도 셈의 장막에서 역사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제 어떤 사람이 여호와를 자랑하게 될 것인가 하는데 대하여 본 성경을 보아서 알 수가 있다.
1. 하나님이 붙드는 종이다 (8~9)
우리는 어떤 자가 나를 붙들어 주느냐 하는 것이 앞으로 큰 문제일 것이다. 사람이란 고립적 생활을 할 수 없다. 누구든지 누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 생활은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붙들어 주는 사람이면 세계를 지배할 것이니 이것은 한 번 하나님께서 택하고 싫어버리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에 붙들린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복된 생활이다.
어떤 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을 벌여 놓았는데 아니할 수도 없고 할 수도 없다는 처지라면 이것은 그 일에 붙들린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이 되어지는 일이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붙든 다음에는 당신의 영광을 받고야 만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이다 (10)
아무리 두렵고 놀라운 일이 오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는데는 그 종을 굳세게 하는 동시에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느냐 아니하느냐 하는 것을 존중히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시는 것이니 아무리 동방이 위기에 처해있고 절망 낙망할 일이 온다해도 우리는 여호와를 자랑하게 될 것이다.
3. 하나님이 싸워주시는 사람이다 (11~13)
과거 은혜 시대의 종들을 쓰실 때와는 다른 방법을 취하신다. 이제 하나님께서 진노하는 때 쓰는 종은 그 종을 대적하는 자를 반드시 멸망시킨다는 것이 하나님의 종에게 맡긴 특권이다. 종들의 억울한 피 값을 갚는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직접 싸워주는 것이다(25).
4. 알곡을 모으는 역사를 맡긴 자 (15~16)
타작기라는 것은 알곡을 모으는 사명을 가리킨 것이다. 이날까지는 씨를 뿌리는 역사라면 동방에서 역사하는 종말의 역사는 쭉정이와 알곡을 갈라놓는 역사라는 것이다. 씨를 뿌릴 때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난 일이 없지만 알곡을 모으는 추수 심판기의 역사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서 역사하는 것이다.
결 론
여호와를 자랑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가장 가련하고 빈핍한 자가 극도로 애타는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응답을 해주는 것이므로 끝을 맺는 종말의 역사이니 이 역사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17~20). 셈의 장막인 서쪽에서 일어난 예루살렘 다락방 교회의 일은 세계 만방의 교회를 세우는 것으로 열매를 맺었고 동방 땅끝에서 일어나는 역사는 완전한 새 시대를 이루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자세히 말하자면 씨뿌리는 시대는 교회가 은밀한 가운데서 각자 각자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이었으나 새 시대가 오는 종말기의 역사는 만민 앞에 여호와를 높이 자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일이 다 세상이 알도록 끝을 맺기 때문이다.
149. 여호와께 새 노래로 찬송할 일
- 사 42:5~17 -
서 론
여호와를 찬송하는 일이 시대를 따라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힘입어 구원을 받고 복 받은 사람들이 그 진리를 따라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이다. 여기에 새 노래란 심판 날에 살아서 새 시대에 들어갈 종들과 백성이 부르는 노래를 가리킨 것이다. 왜냐하면 재앙의 날에 남은 종과 남은 백성은 사후 천당을 목적하고 노래를 부를 수는 없다. 자기들이 받을 구원과 축복에 대한 노래를 불러야 할 것이다.
이제 새 노래를 불러야 할 조건을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새 일의 소식을 듣기 때문이다 (9)
이날까지 백성들은 살아서 새 시대에 가는 새 일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새 노래를 부를 진리조차 모르기 때문에 부를 수가 없었으나 종말의 새 일의 진리를 고할 때 그 진리를 받은 사람들이 새 일의 진리에 따라서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다.
2. 새 노래가 시작된 위치 (10)
새 노래를 부르는 위치는 땅 끝이라 했다. 섬들과 땅 끝이라 했으니 이 땅 끝은 섬들이 있는 땅 끝인데 동방이라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동방 땅 끝에서부터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종이 나온다고 이사야 41장에 말했기 때문이다. 새 노래는 복음을 따라 부르는 것이니 복음을 들고 나오는 데서부터 새 노래가 시작될 것은 사실이다.
3. 새 노래가 선전될 일 (11~12)
세계 열방이 아름다운 소식을 받는 동시에 그 복음을 통해서 새 노래도 같이 불러야 할 것이니 새 노래가 선전될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어느 나라 사람이나 다 같이 새 노래를 부를 남은 종과 남은 백성이 있기 때문이다.
4. 대적을 치기 때문이다 (13)
은혜시대는 죄인을 부르는 시대이니 대적을 친다는 노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용사같이 전사같이 분발하며 강하게 일으키는 역사이니 그만큼 강한 새 노래가 나와야 할 것이다. 예를 든다면 전투하는 군대가 전투에 대한 군가를 부르지 않는다면 사기가 저하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찬송을 제사로 받는 것이니 그 때에 따라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노래를 불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찬송은 제사이기 때문이다(히13:15). 그러므로 아모스 선지도 횡설수설하는 노래를 부르는 자는 망한다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쓸데없는 노래를 부르지 말라는 것이다(암6:5).
결 론
하나님은 시대적인 역사를 일으키는 동시에 당신의 역사를 따르는 종들이 기쁘게 노래할 때 그 노래를 통하여 하나님은 역사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에도 찬송 부르는데 힘쓴 것은 뜻이 있고 말세에 동방 땅끝에서부터 새 노래를 부르는 것도 큰 뜻이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나귀를 타고 올라가실 때 어린아이들이 찬송을 부르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를 지른다고 했던 것이다(눅19:39~40). 우리는 우렁찬 승리의 개가를 부르면서 나아갈 때 승리의 역사는 천사가 하는 것이다. 깃발을 높이 들고 행진하는 백의의 무리는 나팔을 불고 우렁찬 새 노래를 부르면서 새 땅을 정복할 것이다(계14:3).
150. 여호와 새 일을 행하려 나타날 일
- 사 43:2~21 -
서 론
하나님은 이날까지 잠잠히 숨어서 계시므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에게 미혹을 당하고 있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이날까지 나타나지 않았느냐 하면 약속의 말씀을 가감없이 바로 믿고 끝까지 참는 자를 뽑아내는 일을 하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종말에 가서는 새 일을 행하려 세상에 나타나시겠다는 것이다. 나타나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이루기 위한 종말의 역사다. 이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어떻게 역사할 것인가 하는 것을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1. 물과 불이 못 당하게 역사한다 (2~3)
하나님은 이날까지 잠잠히 계시므로 원수들이 사랑하는 자기 자녀를 물과 불에 죽인 일도 있다. 이것은 때가 안된 원인이다. 죽어서 구원받을 그 시대에는 순교를 허락했고 또는 죽는 일은 마땅히 통과할 일이 되었기 때문에 역사를 아니한 것이다. 혹은 당신의 자녀들이 물에 침몰되어 죽고 불에 타서 죽는 것도 하나님은 허락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새 일을 행하는 때에는 물에도 불에도 피해 당하지 않도록 역사해 준다는 것이다.
2. 동방과 서방을 중심한 역사 (5~7)
하나님의 종말의 역사는 동방을 중심하는 동시에 서방으로 건너간다고 말씀하셨다. 북방과 남방은 종말의 역사의 대적이 될 것을 말했다. 여기에 지역적 중심은 예루살렘을 중심한 예언이니 북방 소련과 남방 아프리카는 종말의 역사의 대적이라는 것을 뜻한 것이다. 오직 영광을 위하여 택한 자들은 서방과 동방 땅끝에서 돌아온다는 것이다.
3. 인력이 당할 수 없는 역사 (12~14)
이날까지는 바벨적인 이방 북방 세력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혔으나 종말의 역사가 일어날 때에는 전부 도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수를 갚아 주려고 일어나는 역사이니 원수가 말세 증인 앞에서 다 굴복하는 뜻을 말한 것이다.
4. 과거 모세의 역사에 비할 수 없다 (15~18)
이것은 출애굽의 역사는 예언적인 한 표적이라면 종말의 역사는 완전히 끝을 맺는 새 일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홍해를 건넜던 이스라엘은 다 광야에서 쓰러졌지만 이때의 역사는 완전한 새 시대를 건설하는 새 일의 역사이다.
결 론
하나님은 새 일을 고하는 일이 있고(사42:9) 새 일을 행하는 때도 있으니(사43:19) 새 일을 고하는 역사는 예언적인 역사요, 새 일을 행하는 역사는 이루어지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자는 새 일을 고하는 예언을 믿고 지키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성실과 진실로 택한 백성의 하나님이니 예언을 따라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신자가 새 일의 역사를 믿지 않고 부인한다면 이 사람은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 나타날 때 부끄러움을 당하는 백성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의 어른들이 욕을 보고 야곱으로 저주를 받게 하고 이스라엘이 비방거리가 된다는 것은 새 일의 역사를 순종치 않는 무리들을 가르쳤다(사43:28).
151. 하나님의 아름다운 일
- 사 34:16, 35:1~10 -
서 론
하나님은 아름다움을 기뻐하시는 동시에 아름다움을 이루기 위하여 역사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구속이라는 것은 근본적인 아름다움을 다시 찾게 하는 것을 기독교의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나 사람을 창조할 때 아름답게 창조했고, 아름답게 살게 했고, 아름답게 열매를 맺도록 한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을 다시 찾는 것을 하나님의 신의 역사라 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아름다운 일이라는데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1. 하나님은 아름다운 말씀이 있다 (사34:16, 40:9)
하나님은 아름다운 일을 하시고자 할 때 아름답게 일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하나도 빠진 것이 없이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꿀송이보다 더 달다는 것은 그 속에 진리의 미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많은 서적이 있기는 하지만 참으로 사람에게 아름다운 진리를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책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맛이 나고 더욱 진리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오는 말씀을 통해서만이 온다.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고 짝을 맞추는 자에게 아름답게 역사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서만이 역사하기 때문에 말씀을 사모하고 듣고 지키는 자만이 하나님의 미를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여도 그 책을 자세히 읽기를 싫어한다면 이 사람은 아름다움이란 것을 맛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하는 바리새교인들이 성경을 읽었지만 그 말씀을 자세히 읽지 않고 자기의 직업적인 교훈으로만 읽었기 때문에 성경을 들고도 멸망을 자취했던 것이다. 금일도 많은 사람이 성서를 들고 있지만 자세히 읽어보고 하나도 빠진 것이 없다는 것을 맛보는 자 외에는 하나님은 새 땅을 그에게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한 것은 아름다운 새 시대를 축복으로 받을 자는 내 말을 깨달아 듣는다고 말했던 것이다.
2. 역사가 아름답다 (사35:1~10)
1) 땅을 아름답게 함(1~2)
하나님이 인간의 범죄로 저주받았던 땅을 다시 아름답게 한다는 것을 새 시대라 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땅을 근본적으로 이렇게 했다면 하나님은 아름다운 하나님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극도로 고생에 고생을 해야 만이 땅의 소출을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땅을 창조한 목적은 사람의 노력이 필요 없고 그 땅 자체가 아름다워서 사람을 돕기 위한 본질이 있었던 것이다.
2) 사람을 아름답게 함(3~6)
사람이 세상에 창조를 받을 때 지금과 같이 창조했다면 하나님은 아름다운 하나님이 아니다. 사람이 약하고 어리석고 둔한 것은 본체적인 인간의 근본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약한 손을 강하게 떨리는 무릎을 굳게 겁내는 자에게 굳세게 두려워하는 자에게 참된 평강을 준다는 것이며 보는 것이나 듣는 것이나 걸어가는 것과 혀로 노래하는 것 전체가 완전 개조가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사람의 육이 죽고 영혼만 천당 가는 것은 믿으면 되지만 육이 살아서 새 시대에 가는 사람은 전부 그 몸을 개조시켜서 아름답게 만든다는 것을 가리킨 것이다.
3) 모든 식물이 아름다워지는 것이다(욜3:18, 사49:9)
하나님께서 식물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근본적인 에덴 동산에 있던 그 식물로 다시 회복해 놓는 것이니 하나님은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답게 사용할 수 있는 식물을 주는 것이다. 물도 아름답게 하여 마시게 하고 열매도 아름답게 하여서 먹게 한다는 것이다.
4) 동물이 아름다워짐(사65:25)
하나님은 동물을 창조할 때 사람을 도우라는 아름다운 동물로 냈던 것이다. 사나운 짐승도 아무리 힘이 세고 날쌔지만 그때는 사람을 돕기 위해서 힘과 용기를 사용하게 될 것이다. 지금 동물이 사람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해치고자 하는 것은 동물도 본성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하나님이 동물을 낼 적에 사람을 괴롭히라고 냈다면 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근본적인 창조는 의를 위해 창조했다.
결 론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아름답게 다시 이루어 놓는 것은 사람으로 영영한 희락과 기쁨과 즐거움을 얻게 하려는 목적이다. 이것은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이 얻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사람이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을 영광으로 받으신다는 것이다.
152. 증 인 권 세
- 계 11:3 -
서 론
하나님께서는 시대적인 사명의 대표에게 권세를 맡기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양심 시대에 노아에게 방주 권을 맡겼던 것이다
누구든지 방주에 들어가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조건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권세가 노아의 손에서 생긴 방주에 있었던 것이다(벧전3:19).
2. 언약 신앙 시대의 대표는 아브라함에게 권세를 주되 할례로 주었던 것이다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할례를 통과치 않고는 하나님 앞으로 올 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아무리 큰 사명을 가지고 나오는 종이지만 할례를 지키지 않았을 적에 죽이려고 천사를 보냈던 것이다. 이것은 할례가 법인만큼 엄중하다는 것을 모세에게 보여준 것이었다(창17:10, 출4:24~26).
3. 율법 시대에 모세에게 준 권세
누구든지 모세가 받아 쓴 율법과 계명을 범한 사람은 용서 없이 쳐죽이라는 법이다. 이것은 모세에게 율법 시대의 대표적인 권세를 주었기 때문에 모세가 쓴 글을 엄수하라고 명령했던 것이었다(신27:26).
4. 은혜 시대 그리스도의 시대는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영생을 줄 수 있는 권세를 맡겼던 것이다
아무리 율법 준행자라도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절대 멸망이라는 법이다. 왜냐 하면 영생을 주는 권세를 그리스도에게 맡겼기 때문에 아무리 선행하여도 소용없다는 것이다(요17:2).
5. 환난 시대 증인의 권세
하나님은 진노의 재앙을 악한 시대에 내릴 때 재앙 중에서 살려주는 비밀을 하나님께 받아서 기록한 증인에게 권세를 주는 것은 그 사람이 받아 쓴 예언의 말씀을 기준하여 심판을 내리기 때문에 그 비밀을 받은 증인에게 권세를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증인의 예언을 듣고도 가감하면 구원이 없다는 것은 그 증인에게 권세를 맡겼기 때문이다(계22:18~19). 만일 어떤 사람이 권세를 맡긴 사람의 말을 순종치 않을 때는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린다는 것은 권세를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권세를 따라 움직여 준다는 것이다(계11:3,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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