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문
우리는 말씀을 혼선시키는 거짓 선지의 영을 대적하여 싸우는 것을 우리가 받은 사명이며 나아가야 할 노선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필요한 무기가 되는 말씀의 칼을 받아서 교계에 내놓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종말적인 영적 혼란을 물리치며 강단에 말씀의 혼선을 없이하는 열매가 될 것을 굳게 믿는 바입니다.
칼 없는 군대는 아무리 다수를 가졌다 하더라도 하등의 아무런 승리를 볼 수 없음 같이 말씀의 칼을 입으로 바로 쓰는 종이 아니고는 앞으로 오는 적그리스도의 앞잡이 거짓 선지의 권세를 깨뜨릴 자는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가장 필요한 것이 말씀의 칼이란 것을 깊이 깨닫지를 못하는 자라면 흑암 속에 빠져서 헤매는 생활이 되고 말 것이니 삶의 길을 바로 찾고 바로 남을 인도하는 종이 되려거든 이 책을 세밀히 조사해 보면서 읽어서 마음 판에 새겨야 되리라는 것을 깊이 깨닫는 마음으로 기록하는 것뿐입니다.
주후 1967년 12월
이 뢰 자 著
간 담 서
할렐루야! 아멘으로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일입니다.
우리는 마귀와 싸우는 군대의 한 몸인 순교자의 형제요, 그의 동무가 되어 말씀의 칼을 들고 붉은 마귀를 쳐 부술 용사로 돌진 할 것을 굳게 맹세하면서 다음과 같은 간담서를 만민 앞에 기록하여 증거합니다.
이 말씀의 칼이란 책은 어떤 인간의 두뇌 속에서 저작된 것은 아닙니다.
이뢰자 목사님이 특별 기도 5, 6개월 기간을 마치는 동시에 그 입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게 되어 홀연히 설교의 본문이 택해지고 제목과 대지가 홀연히 나타나며 입에서 이상하게 말씀이 조리 있게 나타나며 이것을 책에 기록해서 만민 앞에 내 놓되 우리 부흥단이 책임을 지고 출판하라는 뜻이 나타나므로 부흥단원 이,삼 인이 합석하여 붓을 들고 목사님의 입에서 나타나는 말을 일자도 가감 없이 기록하되 삼 인의 기록을 대조하여 조금도 틀림이 없는 확증을 보게 되어 말씀의 칼이란 책의 본문 설교 152 제목을 갖추어 여러 종님들과 성도들 앞에 드리오니 받아서 자세히 읽어 마음 판에 새기시고 시대적인 거짓 선지의 미혹을 깨쳐 버리는 증거자가 되어 주시기를 간원 하나이다.
주후 1967년 12월 말세복음선교부흥단 올림
목 차 말씀의 칼 Ⅱ / 말씀의 칼 Ⅲ
1. 동방 에덴의 새 가정 (창2:4~25)
2. 말씀의 칼을 잃은 인생의 비극 (창3:1~19)
3.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 생활 (사54:9~10)
4. 하나님의 창조적인 3대 위력 (창1:1~5))
5. 첫째아담과 둘째아담 (창5:1~4,눅3:21~23, 롬5:17,고전15:22)
6. 위에서 준 예수 (요9:1~11)
7. 겸손한 왕 (마21:1~11)
8. 예수님의 창세 전의 영화와 말세 영화 (요17:5)
9. 그리스도의 완전 역사 (계1:4~7)
10. 주님의 간절한 소원 (요7:24~26)
11. 주와 우리와의 상관될 이유 (요13:8)
12. 진리를 증거하는 예수 (요18:33~38)
13. 우리의 대언자 예수 (요일2:1~2, 28~29)
14. 성신의 인도로 받는 마귀시험 (마4:1~11)
15. 마귀 일을 멸하려 나타난 예수 (요일3:7~8)
16. 주님의 부활과 우리의 평강 (요20:19~23)
17. 삼일만에 일으킨 성전 (요2:19)
18. 땅의 일과 하늘의 일 (요3:11~15)
19. 참된 해방을 받을 자격 (롬7:22~25, 8:1~7)
20. 진리의 성령의 역사 (요15:25~27)
21. 아버지와 같이 아들을 공경해야 할 이유 (요5:19~29)
22. 택한 자를 찾는 주님의 심정 (요4:1~38)
23. 열매를 바라는 포도원 농부의 심정 (요15:1~5)
24.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자 (마11:25~30)
25. 성경과 신앙 문제 (요5:39~47)
26. 복음에는 외식이 있을 수 없다 (갈2:11~16)
27. 주님의 죽으심과 하나님의 사랑 (요10:7~18)
28.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자 (롬7:6)
29. 기독교 신앙의 위력 (요14:6~13)
30.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차이점 (요12:41~43, 13:12~20)
31. 참된 평안 (요14:23~31)
32. 교훈 안에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 (요이1~11)
33. 예수의 친구된 자격 (요15:7~20)
34. 온전히 담대한 바울 (빌1:12~24)
35. 주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 (요8:12~20, 31~37)
36.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요6:26~40)
37. 신앙과 예비 (사28:14~22)
38. 열매와 심판 (마7:1~21)
39. 성도의 교제적인 생활 (엡4:25~32)
40. 넘어질까 조심할 일 (고전10:1~13)
41. 승리를 이루는 기도 (행4:23~37)
42. 기도 생활의 일곱 가지 요점 (골1:9~12)
43. 열매 있는 기도의 세 가지 요소 (요11:40~44)
44. 희생과 열매 (요12:23~33)
45. 능력의 역사를 따라 수고하자 (골1:24~29)
46. 하나 되게 하는 역사 (요17:11~26)
47. 온전한 것을 이루는 사랑 (요일4:9~12)
48. 축복 받는 비결 (사58:9~12)
49. 소망과 성결 (요일3:1~3)
50.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하는 생활 (빌4:4~9)
1. 동방 에덴의 새 가정
- 창 2:4~25 -
서 론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인공인 사람을 낼 때 사람에게 새로운 가정적인 생활에서 복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땅을 정복하고 충만 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제 동방 에덴의 새 가정은 어떤 가정인가 하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생령으로 이룬 가정 (7)
모든 동물들은 흙으로 지었으나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온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시고 특별히 사람에게 생기를 넣어 줄 때 생령으로 움직이는 활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생령이 되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동물은 생령이 없으므로 가정을 이룰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정이란 깨끗한 양심에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활동이 있는 곳에 아름다운 가정이 있게 된다. 양심적인 절개가 없는 생활의 가정이란 보존될 수가 없다. 부부라는 것은 맑은 양심에서 절개를 지키는 일이 없이 부부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양심 속에서 움직이는 생령이 있는 가정에 하나님은 왕래하신다. 이것은 영적 교회의 상징으로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영적 교회를 가정과 동일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2. 협력으로 이루어진 가정 (18)
하나님은 합심협력 하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에 사람이 홀로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합심 협력한 배필을 축복으로 주었던 것이다. 아담은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서 돕는 배필을 받았던 것이다. 인간의 미라는 것은 돕는 정신의 협력이 없이는 인간의 미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 도와주는 사람을 준 것은 영광으로 주었던 것이다(고전11:7). 가정의 주인공은 남자가 되는 것이 진리요, 여자는 가정의 미를 이루기 위하여 돕는 동시에 영광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지혜와 지식으로 이루어짐 (19~20)
사람은 창작적인 재능을 받았으므로 모든 동물의 이름을 창작할 수 있는 지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창작적인 지혜와 지식은 동물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머리 속에 깨닫는 지혜와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가정이라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가정에 새로이 생각을 해서 창작적으로 일을 연구해서 새로이 할 일이 없다면 그 가정은 아무런 일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4. 일체가 된 가정 (23~24)
가정은 한 몸이니 일심 단합이 있는 동시에 일체적인 열매로 이 땅에 충만할 수 있는 자녀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5. 부끄러움이 없는 가정 (25)
가정이란 서로 부끄러움이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영광의 빛 안에 안겨 있는 생활이니 죄가 없는 가정이요, 공포와 수치가 없는 가정이었던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알파가 되는 동방 에덴의 새 가정을 다시 복구하는 것은 오메가의 새 가정이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이란 동방 에덴에 있던 새 가정의 생활을 다시 복구해 주는 것을 기독교 종말의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사65:23~25).
2. 말씀의 칼을 잃은 인생의 비극
- 창 3:1~19 -
서 론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되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말씀의 칼을 법으로 삼아서 이것을 지키면 너는 영원히 살 것이요, 이것을 지키지 못한다면 영원히 죽을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을 극히 사랑하므로 써 향상의 진보를 가짐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 영생의 생명과를 기업으로 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말씀의 칼을 잃고 마귀의 말을 듣고 순종함으로써 인간에게 슬픔의 눈물의 골짜기 죽음의 비참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제 말씀의 칼을 잃은 사람은 어떻게 되었느냐 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자기의 주관을 잃은 사람이 되었다 (6)
인생은 말씀의 칼이 마음에 새겨져 있는 사람이 아니면 들리는 대로 보이는 대로 흔들리는 자가 됨으로 자기의 주관을 잃고 미혹의 세계에서 허덕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칼을 잃어버린 하와는 선악과를 볼 때에 마음이 끌리고 눈이 혼미한 미혹을 받아 뱀의 말대로 선악과를 먹고 남편까지 먹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와 싸워서 승리할 자가 되려면 말씀의 칼을 마음 판에 새겨서 대항하여야 할 것이다.
2. 인생의 자격을 상실함 (7)
말씀을 떠난 생활을 하고 보니 영광스럽던 그 몸은 수치스러운 몸으로 바꿔지게 되었다.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잃고 보면 벌거벗은 수치와 같이 자기의 존귀한 인격은 낮고 천한 수치스러운 것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사람은 말씀을 지켜서 영광이요, 지키지 못함으로 수치를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3. 담대함을 잃어버림 (8~10)
인생 자체는 하나님을 상대할 수 있는 담력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떠난 생활이 있을 때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공포심이 왔던 것이다. 말씀이 곧 힘이요, 능력이니 말씀을 떠난 인격은 아무 것도 담대히 나갈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4. 심령의 암흑 (12~13)
말씀을 떠난 생활을 할 때 아담과 하와는 각각 자기의 부족을 남에게 덮어씌우는 암흑이 왔던 것이다. 흑암이라는 것은 남의 부족은 알아도 자기의 부족을 모르는 것을 흑암이라는 것이다.
5. 원수를 맺음 (15)
말씀을 떠난 생활에는 원수의 피해를 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책임지고 보호할 수는 있으나 말씀을 떠난 사람은 책임을 질 수 없이 원수에게 피해를 당하는 것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6. 지위를 상실함 (16~17)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아름다운 지위를 아담 하와에게 주었으나 말씀을 떠난 부부에게 수고의 땀과 해산의 고통을 주게되므로 행복된 안락의 생활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7. 자신의 사망 (19)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가 없어져도 변할 수 없는 것이니 아무리 일남 일녀의 귀한 몸으로 창조를 받은 것이로되 말씀의 법대로 다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결 론
인생은 최고의 가치도 말씀에서 가지게 되는 것이요, 최저의 타락도 말씀에서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말씀은 피조물된 인생에게 인격의 향상 발전을 위해서 준 것이니 말씀이 없다면 동물에 불과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체가 사랑인 동시에 말씀을 떠난 사랑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 생활
- 사 54:9~10 -
서 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말씀 없이 움직이는 일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약속의 말씀을 세우시고 말씀에서 부자의 관계를 맺고 화평한 중에서 당신의 가지신 영광을 같이 누리도록 하자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주신 약속의 말씀이다.
이제 약속의 말씀과 인간 생활을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약속과 땅 위에 생활 (9)
하나님은 홍수 심판 후에 노아의 성결한 성물을 향기롭게 받으시고 하나님의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약속을 세우셨다. 하나님께서 땅이 있는 날 동안이라는 것은 지상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동안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약속을 세우셨으므로 책임을 가지고 지구가 도는 궤도가 어기지 않도록 움직여 줄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말씀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참되신 하나님이 될 수 없고 세계를 심판할 권리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어떤 과학자가 아무런 이상한 말을 해도 지구에서 사람이 살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쓸데없는 말이 될 것이다.
사람이 만든 시계는 혹 고장이 있을 수 있으나 무소불능 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움직이는 별세계에 질서 있게 돌고 있는 궤도는 조금도 탈선되지 않을 것이니 우리는 춘하추동 사시에 변동이 있을까 염려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혹은 흉년이 와서 혹은 기후가 바뀌어서 살지 못하게 될 염려를 가질 필요는 조금도 없을 것이다.
2. 하나님의 약속과 영원한 세계에서 생활 (10)
하나님께서는 세상 인류 전체를 두고 약속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인류 역사적인 지상 생활이라면 영원한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세계를 영원한 천국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산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않으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겨지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영원한 세계를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계21:4~7과 같이 되는 것이니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그대로 책임지고 역사하는 신이심으로 하나님은 진리의 신이다. 참되신 신이다.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말씀의 언약이 아닌 말씀은 성경에 하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당신이 해주신다는 약속이니 우리가 지상에서 사는 생활도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역사해 줌으로써 기거 동작 사업 경제 체계를 움직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죽지 않을 몸으로 저주, 사망, 고통, 눈물이 없는 세계를 얻도록 해 주시겠다는 것도 하나님께서 현 생활을 하도록 해주심 같이 이루어 줄 것을 우리는 믿고 나가는 것을 신앙이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류역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 인류 6천년 역사라 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천년시대가 오고 무궁시대가 온다는 것은 추호도 의심할 문제없는 합법적인 진리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생활을 약속의 말씀대로 움직여 주는 것은 이 땅을 없이하고 신천 신지가 이루어 주는 때에 그 땅에서 영광을 누릴 사람의 인격을 이루는 동시에 그 수를 채우고자 하는 것이 땅에서 약속대로 움직여 주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런 목적 없이 자연계나 시대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든다면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이나 말 못하는 동물도 조직적으로 되어 있거든, 하물며 최고의 인간이란 세계에 움직이는 시대의 변천이 무질서한 변천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결 론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비밀을 아는 것이 인간의 최고의 지혜와 지식이며, 그 약속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을 인간의 최고의 의요 행복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로우신 신이시요, 복의 근원이시니 그 약속을 따르는 생활이요 축복이 될 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다.
4. 하나님의 창조적인 3대 위력
- 창 1:1~5 -
서 론
우리 인생은 조물주의 창조적인 3대 위력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바로 아는 데서부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초점이 될 것이다. 만일 이 진리를 모른다면 성경을 읽어도 들어도 알 수 없는 자리에서 허덕이게 될 것이다.
이제 창조력의 3대 위력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1. 태초의 창조력 (창 1장)
여기에 태초라는 것은 창조적인 태초를 말했으니 이 창조라는 것은 물체적인 창조를 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물체에 창조의 위력을 들여보내어 역사한 것이 첫째 날에 된 일이다. 땅이 혼돈, 공허, 흑암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물체라는 자체는 힘이라는 것이 절대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조물주의 창조력의 힘이 아니라면 물체는 자동적으로 혼돈, 공허, 흑암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람의 몸을 흙으로 만들고 생기를 불어넣으니 흙덩어리가 움직이면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힘을 거둬 가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서 인형(人形)은 혼돈, 공허, 흑암이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위력이라는 것은 목적이 없이 움직이는 일은 절대 없는 것이다. 태초에 창조력이 물체에 들어와 움직이는 것은 그 목적은 하나님의 미의 세계를 이루자는 목적이다.
미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이루되 미의 사람으로 미의 생활로 미의 세계를 이루어서 하나님이 만족한 세세 영광으로써 사람과 동거 동락 하겠다는 것이 태초의 창조력을 움직인 목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거대한 일을 시작했으니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무리 사람이 부족해도 이루어 놓고야 만다는 것이 조물주의 무소불능한 힘의 활동일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은 조물주 하나님께서 인생을 어떻게 하든지 그 목적을 이루고야 만다는 뜻을 발표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첫째 아담의 범죄로 죽었던 인생을 다시 살릴 능력도 있고 살아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영접할 자는 영원히 죽지 않도록 변화시킬 능력도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한 번만 말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시대 시대를 따라서 말씀한 것은 오메가를 완전히 이루는 끝을 이루기까지 되어 있는 것이다.
2. 천지를 없애는 위력 (계20:11)
하나님의 창조는 영원을 목적한 것도 있고 한 사업적인 목적을 이루는 것도 있으니 물질 세계를 창조한 것은 영원한 천국으로 창조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영원한 천국을 위해서 사업적인 창조이기 때문에 사업을 완성하는 그때에는 창조력의 역사로 다시 없앨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흙으로 사람을 만들어서 흙에서 나는 소산을 먹고 흙에서 나는 물을 먹고 양육하고 번창해서 그 씨로 하늘의 별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낸 목적은 영원한 천국에서 세세왕국을 이루자는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이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물체적인 지구의 효과를 발휘하여 그 목적인 축복을 인간에게 다시 찾아 주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왕국의 건설이 땅에 먼저 이루어지는 것은 첫째 아담의 실패로 잃었던 축복을 누리기 위한 성도의 왕국이다.
그러나 목적을 다 이룬 천년왕국을 천년이 찰 때 이것을 없애는 것은 신천 신지의 영원한 왕국을 목적했기 때문에 죽은 자는 부활하고 살아 남은 자를 무궁세계로 옮기기 위해서는 대 심판을 거칠 적에 사업적인 목적으로 창조한 물체는 다시 혼돈, 공허, 흑암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물체 속에서 역사하던 창조주의 위력이 물체에서 옮겨가기 때문에 다시 근본적인 혼돈, 공허, 흑암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창1:1~2).
3. 신천 신지를 이루는 창조의 위력 (계21:5~7)
하나님께서 신천 신지의 화려한 도성은 이기는 자를 위해서 창조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물질세계는 사람을 생육하기 위한 목적이라면 신천 신지의 영원한 천국은 이기는 자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다. 그러므로 생육하는 물질계에서 마귀를 대적하여 승리한 자는 아름다운 도성의 왕권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잠간 동안인 생육적인 물질계에서 바로 자라서 바로 열매를 맺었다면 영원한 무궁 세계에 영원한 만물을 기업으로 누린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만물을 새롭게 하는 것은 영원히 살 수 있는 부활체를 가진 신령한 몸으로써 먹고 마시고 누리는 생활에 필요한 생명으로써 이루어진 것뿐이다. 생명나무, 생명물이 식물이 되고 열두 진주보다도 좋은 보석으로 쌓은 성이요 정금보다도 더 맑은 유리 같은 것으로 바닥을 깔았고 해와 달이 쓸데없는 빛의 세계이다. 영원히 보전되는 것으로 지은 도성이다. 이 성에는 소제도 필요없고 죽음, 고통, 슬픔이 하등에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체가 영광이요, 미요, 거룩이요, 평강이니 이것을 피조물된 사람으로 함께 누려보자는 것밖에는 하나님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주의 활동으로 되는 영원한 무궁세계라는 것이다.
결 론
창조란 것은 하나님 본체의 이름은 아니다. 이것은 사람을 위하여 이렇게 활동했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인 동시에 창조력을 가졌으니 그 사랑의 본성을 나타내고 본 힘을 발휘시켜서 열매로 이루어진 것이 사람이 영원히 복락을 누리는 무궁 세계를 이루어 준다는 것이다.
5. 첫째아담과 둘째아담
- 창 5:1~4, 눅 3:21~23, 롬 5:17, 고전 15:22 -
서 론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은 것은 하나님 자체가 영광을 받기 위한 목적이었다. 왜냐하면 신으로만이 완전한 영광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완전한 몸이 있는 사람으로만이 완전한 영광을 누리기도 하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적인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은 실패했으므로 그의 계통으로 내려오는 셋의 계통을 따른 아브라함의 계통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가운데 탄생케 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이 그리스도의 탄생이다.
이제 첫째 아담과 둘째아담에 대한 진리를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1. 첫째 아담 (창5:1~4)
하나님은 복의 근원인 동시에 생명의 자체요, 생명의 자체인 동시에 사랑의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복을 주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창조 원리의 요점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내기 전에 먼저 만물을 지은 것은 사람의 축복으로 창조했던 것이다. 그 축복을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야만 된다는 것이니 그 형상이라는 것은 정신, 사상, 중심, 몸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 선악과의 법을 세운 것은 몸에 완전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 사상, 중심은 하나님께로 직접 받았으나 몸은 흙으로 지은 몸이니 그 몸은 생명과를 통하여서만이 흙에서 난 몸을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을 주는데는 법을 지켜야만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고의적이 아닌 실수 즉 아내가 주는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그러므로 몸은 완전을 얻지 못하고 930세를 세상에 살다가 몸은 흙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사상, 정신, 양심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가인은 사상, 정신, 그 마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악에 속한 자로서 아벨을 죽인 자리에 들어갔다. 그러므로 다시 딴 씨가 나오기 전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아담의 계통자는 억울하게 죽어서 없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130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꼭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하였다.
이것이 즉 둘째아담 그리스도가 탄생한 계통이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근본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지 않고 내려오는 그 사상, 정신, 양심 이것이 계속해 내려온 것이 역사적인 종교라는 것이다(딤후1:3).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공경하는 종교라는 것은 어떤 의식, 어떤 교훈, 이것을 가진 것이 아니고 아담으로부터 모세 때까지 순수한 양심적인 종교였던 것이다(롬5:14, 고전15:47).
그때는 아무런 교훈적인 성경도 없고 정해진 의식적인 제사법도 없고 순수한 아담이 하나님께 받은 양심, 이것이 계통으로 바울에게 유전되어 내려오면서 하나님을 공경한 것뿐이다. 그러나 양심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만은 영이 죽었던 것이다.
2. 둘째아담 예수 (고전15:45)
둘째아담 예수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피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피를 받으면 썩지 않고 하늘 형체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으로써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것은 성령이 마리아의 몸에 역사해서 죄가 없는 몸으로써 나게 했던 것이다. 이 몸은 흙에서 나온 계통이 아니요, 하늘의 신의 역사로 썩지 않을 살, 썩지 않을 피, 이것으로써 난 것을 둘째아담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떡”이라고 한 것은 당신의 몸을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몸은 만민의 죄를 대신할 수 있는 피를 가진 몸이었다. 이 피는 신으로부터 받은 피다(요1:14, 요一5:6). 피도 사람의 부정으로 받은 피도 있고 성령으로 받은 피도 있는 것이다. 우리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은 피를 받게되므로 썩지 않고 들림 받게 되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성령을 모든 육체에 부어 준다는 것은 썩지 않을 피로 썩지 않을 몸으로 영생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형체와 같은 몸을 이루어 주는 것이다.
말세에 썩지 않고 들림 받을 종들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를 받도록 역사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사4:4). 그러므로 욜2:30에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고 한 것은 29절에 내 신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주는 일이 있으므로 되는 일이다.
결 론
우리는 첫째 아담의 피의 계통으로 난 몸은 선악과를 먹은 죄의 씨를 받았으므로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째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육체에 부어 주는 성령을 받으므로 예수님과 같은 몸을 받게 된 것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고 하신 것이다. 주님 강림시에 죽은 자도 부활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을 통하여 다시 일어나는 것이요, 살아 남아 있는 종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썩지 않을 영생체로 들림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욜2:30은 살아서 들림 받을 종들에게 임하는 역사를 가르친 것이다. 변화성도는 죽지 않고 살아서 영생의 피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말세의 남은 종에게 부어 주는 신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역사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낸 목적을 첫째 아담으로는 이루지 못했으나 둘째아담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을 기독교의 종말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첫째 아담은 간교한 뱀을 이기지 못하므로 사망이 들어왔고 둘째아담 예수는 승리함으로써 생명과를 따먹을 수 있는 몸으로 다시 이루어지는 역사이다. 우리는 에덴 동산의 아담이 뱀과 싸워서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결부됨과 같이 말세에도 들림 받을 종들은 붉은 용을 앞에 놓고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싸우는 것이 증인이 권세 받고 나와서 역사하는 기간이다.
6. 위에서 준 예수
-요 19:1~11-
서 론
우리는 무엇이든지 위에서 준 것이 아니고는 기거 동작, 생활 전체를 보전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이것으로써가 아니고 위에서 준 예수만이 인생 난제를 일조에 해결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위에서 준 예수의 비밀을 모른다면 본문에 나타난 빌라도와 같은 인물이 되고 말 것이다.
이제 위에서 준 예수의 걸어간 길을 다음과 같이 생각하여 볼 것이다.
1. 진리를 위하여 주신 예수 (요18:37)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전부가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 진리라는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마귀가 왕 노릇 하는 세상을 예수가 왕 노릇 하는 세상으로 이루어지는 시대를 목적한 것이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위하여 주신 예수님은 어떠한 길을 걸어갔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깊이 생각할 문제이다.
그는 진리 하나를 바로 증거하기 위해서 지극히 낮은 말구유, 지극히 빈곤한 목수의 생활, 지극히 낮은 죄인을 찾아가는 전도의 길, 지극히 참혹한 쓰라린 고통을 받는 겟세마네와 골고다의 길, 지극히 존귀한 몸을 가지게 된 부활의 길, 지극히 높은 영광을 가지고 승천한 길, 이것이 위에서 준 예수가 간 진리를 위한 길이었던 것이다.
2. 순종하는 주님의 인내 (요19:16)
우리는 주님이 당한 쓴 고난과 수치를 생각할 때에 머리는 찌르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몸에는 억울한 매를 맞고 입에는 쓴 초를 받고 손과 발에는 쇠못을 박고 귀로 들리는 소리는 저주, 악담, 비방, 조롱의 소리를 들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진리 하나를 위하여 이런 고난을 참았다는 것이 마귀를 이기는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고난을 당하신 예수를 구주로 받았다면 원망할 일은 하나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3. 사랑에 불타는 주님의 간구 (눅22:44, 23:34)
우리는 기도가 자기 죄를 자복하는 간구도 있고 또는 남을 위하여 하는 간구도 있지만 주님의 간구와 같은 간구는 인간으로서 있을 수 없는 간구이다. 겟세마네 간구는 인간이 당할 심령고통을 짊어진 데서 호소하는 간구요, 십자가상에서 간구는 인간이 받을 죄악에 사망의 고통을 몸에 받는데서 구하는 간구이다. 이 간구라는 것은 세상만민의 죄값의 영적 고통과 육적 저주에 사망고통을 짊어지고 대신 간구 하는 것이다. 이 간구의 열매는 금일에 우리를 구원해 내는 역사가 되는 것이다.
4. 승리의 호소 (19:30)
우리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호소의 말씀으로 세상에 온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주신 어린 양 제물된 몸으로서의 맡은 사명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 말 한마디는 율법적인 엄한 죄악의 대가를 지불하는 공의의 법칙을 이루는 동시에 인간을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도 이루었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공의와 사랑을 다 이룬 십자가다, 십자가 하나로만이 인생의 무서운 죄악의 댓가인 사망 문제와 영혼이 살 수 있는 영생의 문제도 다 해결된 것이다. 이제부터는 십자가 하나에서부터 새로운 법 새로운 시대를 이루게 된 것이다.
결 론
위에서 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계를 통일할 권세가 있고, 영원한 천국을 이룰 공로가 되는 동시에 마귀를 없이할 심판의 재료가 완비된 것이다.
7. 겸손한 왕
-마 21:1~11-
서 론
세계를 통일할 왕은 겸손한 왕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를 통하여 말씀했던 것이다. 세계를 통일할 수 있는 인격은 초인간적인 왕의 겸손이 없다면 벌레 같은 인간과는 하등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 왕은 자진적으로 겸손을 택했던 것이다.
1. 출생의 겸손 (눅2:6~7)
만왕의 왕이 말구유에 탄생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인류 역사상 이러한 겸손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출생의 겸손이 아니라면 그는 세계 인류의 왕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극도로 낮은 인간을 극도로 높은 데로 올리자는 목적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2. 장성의 겸손 (눅2:51)
그리스도는 어떤 학교나 훌륭한 선생의 교훈도 없는 빈촌인 나사렛 동네에서 목수의 생활을 하는 가정을 택하여 순종하며 받들어 봉사하는 일로 자라났던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신성을 가지신 인격이니 고등 학문도 고등 교육도 그에게는 필요가 없고 오직 어려서부터 노동 봉사를 하는 것으로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3. 사업의 겸손 (눅5:31~32)
주님께서 죄인을 부른다는 것이 그의 목적한 사업이니 그는 자기가 옳다는 바리새교인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의인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의인이라는 교만을 가진 자는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를 택해도 낮은 자를 택했고 주무실 때에도 죄인의 집을 택했고 음식을 잡수셔도 죄인의 집을 택했던 것이다.
4. 기도의 겸손 (눅22:42)
주님은 겟세마네 기도 시에 자신이 있다는 기도는 없었고 자신이 십자가를 원치 않는다는 뜻을 표시한 것은 완전하신 분은 아버지밖에 없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라는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만일 주님도 자신이 있다는 태도를 가졌다면 이것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 사람으로서는 십자가 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표시를 주기 위한 것이다.
5. 죽음의 겸손 (눅23:46)
주님은 임종시에 일언반구의 불평 없는 태도에서 아버지께 영혼을 부탁했던 것이다. 죄 없이 고통을 당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임종시까지 겸손한 태도로 죄인을 불쌍히 보는 태도 어머니를 동정하는 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를 가지고 운명을 하셨다.
6. 부활의 겸손 (막16:7)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하늘의 형체를 입으시고도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그 형체를 보이신 것은 겸손의 주님으로 보이신 것이다. 주님은 외모를 보지 않는 동시에 자체를 겸손한 자에게 지금도 나타내시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주님의 출생으로부터 부활 승천까지 걸어가신 겸손의 길을 가야만 할 것이니 이 길만이 왕권을 소유하는 정로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왕권을 가질 자라도 이 길을 가지 않고는 동등한 왕권의 자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겸손은 최대의 세력을 가져오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8. 예수님의 창세 전의 영화와 말세 영화
- 요 17:5 -
서 론
하나님의 영화라는 것은 스스로 있는 창세 전의 영화도 있고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서 이루어지는 영화도 있으니 이것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 창세 전의 영화 (요17:5)
성경에 창세기 1장의 태초라는 말과 요한 복음 1장의 태초라는 말은 같은 태초가 아니다. 창세기 1장의 태초는 창세 전의 영원한 태초가 아니다. 그러면 창세 전의 영화라는 것은 어떠한 영화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스스로 있는 영화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피조물을 통하여 받는 영화도 아니요, 피조물에게 주는 영화도 아닐 것이다. 신의 자체는 거룩이요, 사랑이요, 영생이요, 평화요, 미이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자체는 미의 하나님이니 그 미라는 자체가 피조물이 아니다. 신의 본체에 속한 것은 전부가 스스로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2. 말세에 나타난 영화 (요12:28, 17:1)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손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기도 중에 한 말씀이 나를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했던 것이다. 그러면 창세 전의 아들과 말세에 나타난 아들과는 인격적으로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에는 신성뿐인 아들이나 말세에 나타난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가진 아들이니 사람된 자격으로서 받는 영화를 말한 것이다. 그러면 사람된 자격의 영화라는 것은 만왕의 왕이 될 수 있는 영화이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만민을 살리 수 있는 인격은 신성만이 아니고, 인성을 가진 인격이다. 그러므로 만물을 창조한 영화보다는 더 놀라운 영화는 십자가의 승리로 이루어진 영화일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 전의 영화가 신에게 만족을 준 영화는 아니었고 인류를 창조하여 피조물 된 인간을 통하여서 완전한 천국을 이루어 당신의 영광을 혼자 누리는 것보다도 만민이 같이 누리게 되는 것을 원하는 사랑의 심정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무형적인 영화보다도 실체적인 영화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무형적인 신으로써만이 이루어지는 영화라면 육을 쓴 실체에 영화를 받아야 될 사람은 만족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러므로 예수님이 사람된 자격으로서 영화를 얻을 것은 땅에 사는 인간들에게 큰 소망이 되는 동시에 세세의 왕국의 기업을 이루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을 가진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영화로운 것을 피조물된 사람이나 만물까지도 같이 누려보자는 것이 광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화만이 인간의 최고 행복을 이루는 것이다.
9. 그리스도의 완전 역사
- 계 1:4~7 -
서 론
완전 역사라는 것은 그리스도밖에는 한사람도 없는 것이다. 하늘 위에도 없고 땅위에도 없다. 완전히 타락한 인간들에게 완전한 역사가 계신 분이 아니고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완전한 역사라는 것은 완전치 못한 자를 신앙한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그것은 신앙 자체가 불완전한 동시에 신앙하는 자체도 완전을 소유할 수가 없는 것이니 이제 우리는 완전 역사 하시는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이다.
완전 역사에 대한 것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본문으로 알 수 있다.
1. 자신이 완전해지는 역사 (4~5상반절)
그리스도는 자신이 완전해지는 역사가 있었다. 만일 자신이 완전해지는 역사가 없는 자라면 완전한 신앙의 대상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주는 충성된 증인의 자격을 이루었다. 이 땅에 많은 선생의 교훈이 있으나 조금도 거짓이 없고 희미한 것이 없이 똑똑히 인생관을 바로 가르쳐 증거하시고 또는 자신이 친히 걸어가셨고 친히 증거를 보여주신 분은 예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일생 동안 자신 하나를 위하여 일했다면 그 자신은 완전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서 사명적인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인간이 알도록 분명히 증거해 주시고 뜻을 이루기 위하여 친히 만민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부활한 몸으로서 이 땅의 임금의 머리가 되는 만 왕의 왕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 부활 승천한 일이 없다면 그 자체도 완전을 이루었다고 볼 수 없다. 세상 인간 성인 이라는 것은 죽어서 그 자체가 흙이 되었지만 주님은 인간을 위하여 완전한 속죄제를 드리는 죽음이 있었고 인간을 완전히 구원한 사람으로서 다시 부활 승천한 것은 그 자체가 완전하게 된 것이다.
2. 남을 완전케 만드는 역사 (5하반절~6)
우리를 완전케 하는 역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니 첫째는 죄에서 해방이요, 둘째는 하늘 나라에서 완전한 시민권을 가지는 것이요, 제사장의 왕권을 주는 역사이다. 이것을 우리에게 주는 자는 그리스도밖에 없다. 우리는 죄의 종 된 자리에서 해방을 주는 이가 없다면 인간 자체는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인간 자체는 완전해 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완전케 해주는 이의 역사만으로 되는 것이니 해방은 그리스도가 주고 왕권을 주는 것도 그리스도가 주는 것이니 우리는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완전이라는 것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은혜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3. 세상을 완전케 하는 역사 (7)
세상의 완전 평화, 완전 안식은 다시 오시는 주님의 역사를 통하여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완전케 만드는 역사가 있는 동시에 세상을 완전케 만드는 심판도 있는 것이다. 세상을 완전케 하는 것은 이 땅에 악한 모든 족속을 다 없이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족속만이 살 수 있는 시대를 이루는 것을 세상을 완전케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인류 역사상 지도자들이 악을 없이하려고 노력해본 일도 있었으나 악을 없이할 역사는 이루지 못하고 자기 자체도 악의 세력에게 쓰러지고 만 것이 지도자의 종말이다. 오직 악의 세력을 전부 없애고 새 나라를 이룰 완전 역사를 가진 분은 그리스도밖에 없다.
결 론
우리는 이와 같이 3대 완전을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이를 믿는 신앙은 그리스도가 완전하다는 것은 그를 통하여 직접 죄에서 해방 받고 사명 받은 자로서 나가서 증거할 수 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현재 증거의 확증은 삼대 완전 역사의 두 가지는 이루어진 것이니 이 땅의 완전한 심판은 완전한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삼인 보증이 있는데 이 인이 완전히 증거 된다면 한사람은 필연적으로 따르게 될 것은 사실이다. 이 땅의 악의 세력을 몽땅 없앤다는 것은 자신 속에 있는 죄를 완전히 없이함을 받은 자 밖에는 알 자가 없을 것이다.
10. 주님의 간절한 소원
- 요 17:24~26 -
서 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따라서 믿어야 할 것이다. 주님을 알기도 하고 믿기도 하고 섬기기도 한다면서 간절한 소원을 모른다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남편을 섬기는 아내가 남편의 간절한 소원을 알아주지 못한다면 그 가정은 참된 평화의 행복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영적 신랑인 주님을 모시는 신부된 자로서 그 소원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참된 평화와 행복을 소유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주님이 우리를 향하여 간절히 소원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주님 계신 곳에 함께 있기를 원하심 (24)
우리는 이 사랑의 심정을 믿는 신앙이 강해야만 될 것이다. 주님은 인간을 볼 때 당신이 계신 영광의 화려한 나라를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인간을 그 나라로 인도하기 위한 목적에서 불타는 마음을 금할 수 없는 심정에서 세상에 오셨고 또 십자가를 앞에 놓고 만찬석을 베푸신 후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 올린 것이 내게 주신 자를 나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었으므로 이미 성경이 응하기 위한 가룟유다 외에는 한사람도 떨어지지 않고 그 나라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된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조금이라도 희미하게 안다는 것도 주님이 노할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나의 나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뿐이라는 것을 어디 가나 자랑했던 것이다.
이 소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참으신 것이니 소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20세기 반기가 지나도록 참고 기도하는 심정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누구는 구원을 받는다 못 받는다 판단한다는 것은 교만 중에도 교만이요, 주님보다도 더 높다는 교만이 될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이 소원을 위하여 죽으셨다면 우리도 형제를 이 곳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종의 심정일 것이다.
또는 주님께서 이 날까지 실수가 있어도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도 이와 같은 심정이 있어야만 될 것이다. 주의 종이 자기만 구원받을 자신이 있다고 하며 남은 구원 못 받는다고 판단하는 것은 사단의 자식의 행동일 것이다.
2.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를 원하신다 (25~26상반절)
주님은 당신의 사랑이 그 마음에 있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 있는 자의 기도라면 그 기도를 듣고 싶어하는 심정이요, 구하는 것 외에 더 주고 싶은 심정이 주님께 있는 것이다. 기도란 주님과 인간과의 교통하는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임할 때 오르락 내리락하는 영적 교통은 어느 곳이나 장소의 차별 없는 교통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하나 주님에게만 사랑이 있다는 것이 아니요, 그 사랑이 각 사람의 마음에 임재하여 역사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포도나무 그루터기에서 오는 진액이 순에 충만함 같이 예수님께 있는 사랑이 마음에 충만해 질 때 열매는 자동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3. 주님이 우리 안에 있기를 원하심 (26하반절)
주님은 거룩하고 위대하신 주님으로서 죄인의 마음 가운데 함께 있기를 원하는 심정이다. 죄인의 마음에 와서 거해 달라고 하여도 올 수가 없는 것이 주님 자체다. 그러나 주님은 자청하여 마음 가운데 오기를 원하는 것이다(요一4:13).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는 것은 당신과 같은 형태를 이루기 위한 소원이니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은 어떤 우리의 노력이 합하여져서가 아니고 먼저 주님이 내 마음 안에 오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 것은 행함으로 받는 것은 아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시는 것은 우리가 완전하기 때문에 오시는 것은 절대 아니다. 완전치 못한 사람을 완전케 만들려는 심정에서 찾아오는 것이니 누구든지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이 오셔야만 내가 산다는 마음 하나 뿐이라야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은 이러한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 자기라는 것을 그대로 두고 주님을 오시라고 할 때는 들어 올 수가 없을 것이다. 주님 한 분밖에 없다는 마음에 오시는 것이니 영광도 생명도 축복도 주님 내 마음에 오심으로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족함이 없다 함으로 주님은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셨던 것이다.
결 론
우리의 완전이라는 것은 자체로써는 추호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주님이 소원하는 바를 믿음으로써 완전한 것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신자가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주님과는 원수가 될 것이다. 주님은 당신이 계신 나라를 주고 싶어서 죽기까지 애를 쓰시는데 그 나라 것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다면 십자가의 원수가 될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오는 것보다도 어떤 사람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요구한다면 이것도 주님과는 원수가 된다. 주님이 마음 가운데 오시는 것을 원하는 것보다도 자기를 숭배하고 영화롭게 할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자동적으로 바벨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은 주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세 가지 요소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11. 주와 우리와의 상관될 이유
- 요 13:8 -
서 론
우리는 죄를 지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 되어 주님이 행하신 일을 우리가 행한다는 것은 그 상관된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모른다면 참된 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주님 앞에 수제자 되는 베드로에게 내가 네 발을 씻지 아니하면 너와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진리가 있는 것이다.
1. 주님께서 자청해서 제자의 발을 씻는 심정이 있으므로 상관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동적인 심정에서 어린 자녀에게 단 마음으로 종이 된 생활을 함과 같다. 주님은 당신이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대하여 이러한 심정을 가졌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를 위하여 집을 떠나고 직장을 떠난 베드로에게 이런 심정을 가지고 귀엽게 본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도 존귀하게 대해 준다는 것이다.
2. 당신을 대신하여 나서는 종이라면 주님은 봉사하는 심정 속에서 그를 받들어 주겠다는 심정이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그와 같은 심정을 가진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이러한 심정이 없다면 주님의 종이 될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종노릇하는 것보다는 거룩한 만왕의 왕 앞에 종이라는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 당신의 사람을 자기보다도 더 크게 쓰겠다는 심정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그 발을 씻어 주는 것은 “너는 나보다도 더 큰 역사를 일으키는 종이 세상에서 되어 달라”는 심정이다.
4. 최고의 높은 자리를 주겠다는 심정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발을 씻어 주겠다는 것은 얼마나 높으냐 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님의 소원은 당신 앞에 쓰여지는 종으로 극도로 높은 영광을 받는 자리를 요구하는 심정이니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랑을 받은 대로 남에게 줘야 된다는 것이 새 계명이다.
결 론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받는 종으로서의 할 일은 주님께서 귀하게 보는 것이 하나님의 종이니 종을 그만큼 존귀하게 여겨 주라는 뜻을 가르친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주의 종을 업신여기고 무시한다면 예수님보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겠다니 자동적으로 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이 있는 자는 주의 종을 대접하라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했던 것이다.
12. 진리를 증거하는 예수
- 요 18:33~38 -
서 론
진리는 증거 없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숨은 어떤 비밀의 뜻이 있고도 이대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노력이 없다면 이것은 쓸데없는 공상에 불과할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친히 그 진리를 증거하려고 피를 흘리는 생활이 없다면 진리가 이론적이나 또는 사람에게 호감을 줄 만한 소망을 말하였다 하여도 그 진리는 열매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진리를 바로 증거하는 일이 없이 이적을 행한다 해도 그 기적은 필요가 없고, 아무리 진리를 증거한다 해도 초인간적인 능력의 역사가 없다면 이 진리는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진리를 증거하는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담대히 말씀한 이 말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1. 세상 나라를 목적하지 않았다 (36)
만일 예수님이 세상 나라의 어떤 정치적인 야욕이나 또는 어떤 세상의 물질적인 발전을 중심한 일이 추호라도 있었다면 이것은 참된 메시야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 나라의 것을 탐한다는 것은 더 좋은 나라를 이룰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 인격은 세상 나라에 속한 것이니 우리는 그러한 자를 신앙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세상 나라에 추호도 국한된 것이 없기 때문에 세상 나라 사람과 조금도 싸운 일이 없다. 만일 주님께서 세상 나라 사람들과 싸우다가 잡혀 죽었다면 그 십자가는 구속의 십자가일 수가 없다. 이것은 그 힘이 세상에 국한된 힘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종이 세상 정치적 배경을 둔다든지, 어떤 세상의 물질적 배경을 둔다든지, 이러한 자라면 진리를 증거하는 종은 아닐 것이다.
2. 예수님은 자기가 왕이란 것을 말했다 (37상반절)
이것은 세상 나라에 국한된 왕이란 것은 아니요, 초인간적인 즉 영원한 왕국을 위해서 왔다는 뜻이다. 주님은 세상 왕으로서 왔다가 죽었다면 이것은 실패 중의 실패였을 것이다. 그는 만민을 위하여 희생을 자취하는 자격으로서 온전한 왕국을 이루는 왕이다. 기독교의 진리라는 것은 전체의 대지가 예수가 왕이 된다는 이것이 원 대지가 될 것이다.
첫째 아담이 실패함으로 죄악이 왕 노릇한 이 땅에 둘째아담 예수로 말미암아 의의 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진리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롬5:17). 세계 문제는 그리스도가 왕으로 다시 나타난 것만으로 일조에 해결될 것이다. 인생 난제는 이것으로만이 해결된다.
3. 진리에 속한 자만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37하반절)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낼 때부터 그 심령이 진리에 속한 자로 택함을 입은 자도 있고 악에 속한 자로 택함 받은 자도 있으니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진리에 속한 자를 위하여 오신 것이다(요10:27). 진리의 증거라는 것은 택한 자를 찾기 위하여 있는 것뿐이다.
예를 들면 목자가 음성을 내는 것은 자기 양을 들으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셔서 증거하신 것은 마귀의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바리새교인 더러 “너희는 내 양이 아니니 듣지 않는다”고 했다. 만일 주님께서 마귀의 자식에게 맞도록 증거했다면 이것은 참된 증거가 아닐 것이다. 증거하는 목적은 택한 자를 찾자는 목적밖에는 아무런 딴 것이 없는 것이 예수의 증거인 것이다.
결 론
진리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도 있으니 무엇이든지 그 속의 내막을 진리라고 말하는 것도 있다. 심지어 공산당은 자기네 공산주의 이론을 거룩한 진리라고 말하는 사실도 있다. 어느 교파 각자가 다 자기 진리가 옳다고 말한다. 그러나 간단하고도 명랑한 주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이것이 없다면 아무리 이론화시켜도 주님이 목적한 진리는 아닐 것이다. 기독교라는 간판 밑에서 세상과 조금이라도 타협이 있다해도 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왕이 된다는 것이 아니며, 택한 자만을 위해서라는 진리가 아니라면 이것은 거짓 선지요, 적그리스도의 영이 될 것이다.
13. 우리의 대언자 예수
- 요일 2:1~2, 28~29 -
서 론
주님은 십자가에서 승리한 자이심으로 우리의 대언자로서 다시 올 때까지 역사하는 것이다. 이 대언이라는 것은 어떠한 사람을 위해서 대언 하느냐에 대해서 본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1. 양심적인 고백이 있는 자 (1:9)
하나님은 죄를 사해 주는 것이 마땅한 의무이지만, 고백이 없는 사람을 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미 화목제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고백을 받고, 하나님 앞에 고백한 자를 위하여 대언기도 해주는 것은 고백할 공로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죄 값은 용서 없이 죽는다는 율법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2. 실수한 자 (2:1~2)
이미 자백을 하고, 속죄를 받은 자라도 또 다시 실수가 있는 경우에 그 사람이 이미 올라간 기도가 있기 때문에 대언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여, 나를 죄를 짓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라고 이런 기도를 할 때 그는 대언기도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성령을 보내서 다시 부흥을 주고, 시험에서 다시 이기는 큰 힘을 주기 위해서 주님은 대언기도 하는 것이다.
3. 주 강림시에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하여 대언기도 하는 것이다 (2:28~29)
우리의 완전이라는 것은 주님의 대언기도로 되는 것이다. 약한 자를 능하게 하기 위하여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하기 위하여 심지어 잠든 자를 깨우치기 위하여 문을 두드리는 심정을 가지신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문 밖에서 재촉하는 것이다(계3:19~20).
주님은 당신의 택한 종이 쓰러지고 피곤해 어찌할 줄 모를 적에 여호와만 바라봐도 새 힘을 받도록끔 역사하는 것이 대언기도로 되는 것이다(사40:30).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마귀 압력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강권역사로 나리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주 강림 시기는 마귀도 극도로 참소하고 주님도 극도로 강하게 대언기도를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안에만 있는 자라면 된다는 것이다.
결 론
주님은 일천 구백년 동안을 대언기도로써 승리를 이루어 온 것이다. 만일 주님의 이와 같은 간구가 아니라면 마귀 참소를 벗어날 종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바울이 이것을 믿고 누가 나를 그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는 용기를 가지고 나섰으므로 그는 승리의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롬8:34~35). 우리도 이와 같은 용기를 가지고 나서지 않고는 도저히 승리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
14. 성신의 인도로 받는 마귀시험
- 마 4:1~11 -
서 론
하나님께서는 만왕의 왕권을 받을 그리스도를 성신으로 이끌어서 마귀의 시험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죄가 있어서 받는 시험은 아니다. 이는 오직 성신의 법에 따라서 통과하는 시험이니 하나님의 아들도 사람으로 났기 때문에 이 시험을 통과시킨 것은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성도들에게 표본이 되는 것이다.
시험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놀라운 이적을 통하여 시험을 통과시킴 (3~4)
하나님의 아들이 돌로도 떡이 되게 할 수 있으나 말씀을 중심하지 않는 기적이라는 것은 마귀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이 시험은 떡을 먹는 어떤 식욕이 생기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이적을 나타내어 보라는 시험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무리 은혜를 받고도 말씀을 중심 하지 않고 이적을 나타내서 자기를 세상에 알리려하는 것은 탈선된 길이란 뜻을 보여준 것이다.
2. 말씀의 칼을 혼선시키는 시험이다 (6~7)
하나님의 말씀을 마귀도 사용하지마는 말씀의 칼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혼선을 주는 것이다. 시91:11~12은 환난과 재앙의 날에 당신의 사람을 절대적으로 보호한다는 뜻으로 가르친 말씀인데 이것을 이용하여 높은 성전에서 뛰어 내려보라는 것은 말씀에 맞지 않는 행동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보호라는 말씀을 함부로 사용한다는 것은 혼선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환난시대에 대한 보호의 말씀을 은혜시대에다가 걸어서 사용한다는 것은 시대적인 모순이요, 또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해주마하는 말씀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다 붙여서 하나님이 역사해 주기를 바라고 자기가 주의할 일을 주의치 않고 나가는 것도 행동으로 말씀을 혼선시키는 것이다. 말씀의 칼이라는 것은 그 말씀을 어디다가 써야할 말씀이라는 것을 바로 찾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이 말씀을 그때 사용하고 나가셨다면 예수님도 탈선이 되는 것이다.
3. 타협적인 사상을 침투시키는 것이다 (8~11)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온 목적은 만민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함으로써만이 만국을 구원하는 동시에 만왕의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인 계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한 번만 절한다면 네가 그렇게 고생을 하지 않고도 세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타협하자는 미혹이다. 만일 금일에 말세의 종이 붉은 세력과 끝까지 싸워야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인데, 붉은 세력의 앞잡이 거짓 선지는 절만하고 표만 받으면 싸우지 않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마귀의 시험이 아닐 수 없다.
결 론
우리는 성령의 인도라는 것을 덮어놓고 쉽게만 되게 하는 인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가 생각할 때 세상이 환영하고 핍박이 없고 시험이 없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 가면 이 것만이 성신의 인도로 안다는 것은 모순이 되는 것이다. 성신의 인도는 반드시 마귀의 세력과 싸우도록 인도하는 것이 사명자의 나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예수님도 마귀에게 끌려 성전 꼭대기 높은 산꼭대기까지 올라간 일이 있는 것은 마귀에게 그만한 권리를 맡겼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정식으로 역사할 때 가서는 마귀가 한마디 말하는 것도 허락지를 않았던 것이다. 마귀를 쫓아내고 책망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험기에는 예수님도 마귀를 말씀으로만 대적하고 마귀에게 시련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누구든지 역사할 종이 시험을 통과할 때는 말씀 하나만을 바로 붙드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15. 마귀 일을 멸하려 나타난 예수
- 요일 3:7~8 -
서 론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는 것은 마귀 일이다. 하나님께서 마귀도 일할 수 있게 허락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로서 충성과 진실을 보자는 것이었으나 인간들이 모두 마귀에게 먹힘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은 슬퍼하는 것보다도 마귀를 없애자는 진노가 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제 마귀의 일은 무엇인가 하는데 대하여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1. 범죄하도록 미혹하는 것이다 (7~8)
인간이 미혹을 받는다는 것은 중생한 자녀를 미혹하려는 마귀에게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중생치 않은 마귀의 자녀는 미혹을 할 나위조차 없는 것이다(4~7). 미혹이라는 것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이 나게 만드는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생각에 붙여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믿음이란 문제를 가지고 자기 어떤 주관적인 소욕에 붙인다면 믿음도 유혹의 믿음이 되는 것이다.
2. 의로운 일을 미워하는 일이다 (3:12)
사람이 의를 사랑하면서도 미혹을 받는 죄도 있고, 의를 미워하여 악에 속한 자도 있는 것이니 고의적으로 의를 박해하고 의를 미워한다는 것은 마귀에게 완전히 속한 자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가인의 범죄라는 것을 본문은 말하고 있다.
3. 예수님의 도성인신을 부인하는 일이다 (4:2)
마귀는 인간 지식을 끼고도 역사하는 것이니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것이 마귀의 일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인류가 당하는 범죄다. 인간이 죄를 취급할 수 없고, 정당화시키는 것이니 이것을 가르쳐 흑암이라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아니고는 마귀를 멸할 자는 인간에게 전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자는 다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마귀를 없애게 하는 일은 죄악의 권세를 깨뜨리는 속죄의 법으로만이 개인 개인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날까지 주님이 나타나서 행하신 일은 각인의 중심 속에서 역사하는 마귀의 역사를 없애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구름 타고 다시 올 때 전 세계의 인류를 미혹하던 마귀를 없애는 반면에 그 때까지 회개치 않고 마귀에게 속하여 사는 자는 전멸되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첫째, 인격을 이루기 위한 것이요, 둘째, 새 시대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계20:1~3).
16. 주님의 부활과 우리의 평강
- 요 20:19~23 -
서 론
주님께서 승리의 부활을 하신 아침에 인간에게 주는 것은 평강이었던 것이다. 만일 주님의 부활이 없다면 아담으로부터 오는 사망 아래 있는 인간들에게 참된 평강을 가져올 수가 없는 것이다. 평강이라는 것은 영원한 평강을 말한 것이다. 평강의 하나님은 평강을 잃은 인생에게 참된 평강을 주자는 목적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인류의 평강을 가져오는 새 아침을 맞이한 7일 중 첫날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숭배하던 성민의 안식이 아니요. 율법의 저주를 친히 받으시고 승리의 부활하신 주님이 평강을 가지고 오신 칠일 중 첫 날을 중생한 성도는 안식일로 받는 것이 복음적이라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중생 받은 성도는 부활을 통해서 받았기 때문이다(벧전1:3).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평강이 오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경으로 알 수 있다.
1.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한 것이다 (20:21)
이것은 모든 권리를 맡기는 뜻이 있다. 이 날까지는 메시야가 율법적인 저주 아래 있는 인생의 죄를 걸머지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세상에 온 목적을 다 이루는 십자가와 부활로 끝을 맺고 이는 율법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새로이 중생 받은 제자들에게 명령을 인계하는 뜻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땅에서 역사할 책임은 나에게 있지 않고 너희에게 있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활동하고 얼마든지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일을 너희에게 준다는 것이다. 율법의 저주 아래서 떨던 제자들은 이제 성신의 자유의 율법아래서 참된 평강을 얻어 가지고 나가서 역사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2. 성신을 받게 되는 것이다 (20:22)
인생의 참된 평강은 성신을 받는 일이다. 평강의 신인 성신이 내게 올 때 아무리 악의 세력이 강하여도 성령의 역사는 필연코 승리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요일4:13). 그리스도께서 승리의 부활이 없다면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줄 수 없고, 또는 부활을 믿는 신앙이 아니고는 성령을 받을 수도 없다(롬8:11).
3. 정죄 사죄권 (20:23)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행자인 특명을 받은 종들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 진리를 받은 자들이다(마28:19). 주님의 직접 명령을 받은 종은 친히 성신이 같이 하는 종으로서 능히 판단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죄를 사함을 받았다면 사해지는 것이요, 사함 받지 못했다면 사함 받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이 죄를 사한다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자로서 하나님과 직접 통하는 신의 역사로 되는 것이다(고전2:15).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신이라고 말했으니 직접 성경을 쓴 사도들은 신과 같이 쓰여지는 종이었던 것이다(요10:34~35). 세밀히 말하자면 강변에서 고기 잡던 어부의 한 사람이 이러한 권리를 주님께 받는 다는 것은 큰 평강을 누리는 축복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언제나 시대적인 말씀을 직접 받는 자는 이러한 권리를 맡기는 것이다(계11:3).
결 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마귀를 이기는 권리를 아들에게 주는 동시에 누구든지 그 복락을 믿는 사람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받고 참된 평강을 누리게 하는 역사는 부활하신 그 날부터 시작된 것이다.
안식일이란 천지만물을 창조한 후 첫째 아담에게 축복하신 날이라면 주님의 부활하신 날은 둘째아담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참된 평강의 왕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첫날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평강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계인류의 새로운 축복을 가져오는 날이 7일 중 첫날이다. 우리는 이 날을 예배의 날로 지키는 동시에 안식의 복락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17. 삼일만에 일으킨 성전
- 요 2:19 -
서 론
하나님께서 영자적인 예루살렘 성전을 헐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써 폐지된다는 뜻을 가르킨 것이요, 삼일 동안에 다시 일으킨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부활로 말미암아 영적 열매가 되는 교회가 이루어질 것을 가르친 것이다.
이제 신약 시대에 와서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루어진 성전은 어떠한 것이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영원한 속죄로 이루어진 교회 (히9:11~12)
이것이 구약 교회에 제사장들에게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를 씻는 제사법을 행하는 것이 직업화되었기 때문이다. 진리적으로 시대를 그들이 구분한다면 주님께서 삼일만에 짓는다는 이 말을 고맙게 생각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영원한 속죄를 믿고 자기들의 직분을 폐해야만 될 것인데 오히려 이 말을 큰 문제시 삼아가지고 예수를 죽이는 그런 악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것이 소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사람의 흑암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역사적인 속죄의 제사의 끝을 맺는 영원한 속죄의 제물의 몸을 가르쳐서 삼일만에 부활함으로써 완전한 새로운 시대의 역사가 이루어 질 것을 가르쳤다. 그리스도는 단번에 영원 속죄를 드리시고 하늘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 역사하신 것이다.
2. 율법적인 것을 폐지하고 영원한 성령의 법으로써 다스린다 (히9:14, 롬8:2~4)
하나님이 율법을 세운 것은 사람의 죄를 알도록 하는 몽학선생인 교훈이요,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완전하게 할 힘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함으로써 성령을 부어 주는 역사로 율법적인 교회가 폐지되었고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열매의 영적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속죄로 이루어지므로써 영원한 성신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도록 성령은 역사하는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율법이라는 것은 죄인대로 두고 법을 범하면 죽인다는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부활로 이루어진 교회는 성령으로써 심령을 부활시켜서 능히 율법을 초월한 생활로써의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을 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교회는 율법과는 하등의 관계없는 은혜의 세계에서 역사하게 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할례인 세례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골2:11~15, 롬2:28)
이제부터는 할례의 성민의 주권이 폐지되고 그리스도의 할례인 세례를 받은 자로서의 천국의 시민권을 가짐으로 할례 받은 유대인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과에 하등의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 세례라 하는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물에 잠기는 시간은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을 의미하고 물에서 다시 올라올 때는 부활의 생명에 접붙은 것을 표시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악과를 먹고 죽게된 아담의 피에 속한 몸이 장례를 받고 죽지 않은 영생의 몸으로서 부활한 주님의 몸과 일체가 된다는 뜻이다.
결 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므로써 역사적인 속죄제와 율법의 교훈과 할례의 법은 완전히 폐지되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 영원한 성신 영원한 세례의 법으로써 완성된 교회를 가르쳐 삼일만에 일으킨 성전이라 하셨던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교회가 아직도 구약적인 속죄나 율법의 교훈이나 할례의 법을 폐지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헌 옷에다 새 베를 깁는 거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된다는 것이다. 구약적인 교회는 완전히 무너뜨리고 신약적인 교회로 완전히 서야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18. 땅의 일과 하늘의 일
- 요 3:11~15 -
서 론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을 아울러 믿는 것이다. 만일 땅의 일만 있고 하늘의 일이 없다해도 불완전이요, 하늘의 일만 있고 땅의 일이 없다해도 불완전일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땅에서도 믿을만한 증거가 있고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증거도 가지게 되는 것이다.
1. 땅의 일 (11~14)
우리는 친히 듣고 보고 만진 바를 믿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만일 땅에서 이루어진 일이 분명치 않다면 하늘의 일도 분명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신앙에 땅의 일이란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십자가 부활 승천, 성신강림, 세계적인 복음 전파, 이것이 현재 확실한 믿음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2. 하늘의 일 (15)
우리는 땅에 있는 동안 십자가와 부활 승천, 성신 강림을 믿음으로 중생이란 똑똑한 산 체험을 받게 되는 동시에 성신의 합법적인 진리의 역사로 완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소유함으로 하늘로 승천한 예수와 같은 몸으로 세상의 영광을 천국에서 이루는 것이니 하늘의 일은 영원이라면 땅의 일은 잠간인 것이다.
잠깐이란 생활에서 중생을 받고 성결을 받고 생활한 모든 것은 영원한 천국의 생활을 준비하는 과정의 하나일 것이다. 만일 어떤 교인이 땅에서 되는 일을 맛보지 못한 니고데모와 같다면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하여도 천국은 그 사람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 천국은 땅에서 이루어진 일에서 끝을 맺는 열매가 될 것이다(계21:1~2).
결 론
기독교의 특색은 땅에서도 타종교보다 특별한 산 증거가 있고 하늘에서 될 일도 뚜렷한 진리의 똑똑한 증거로 되어 있다. 이것이 이교 아닌 참의 종교라는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다.
19. 참된 해방을 받을 자격
- 롬 7:22~25, 8:1~7 -
서 론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은총을 받는 것도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도 법을 따르기 때문이다. 용서도 법을 따라 있고, 성신의 역사도 법을 따라 있기 때문이다.
1. 중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자 (7:22~23)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는 것이다. 사람 앞에 실천은 못하나 중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참된 해방인 성신의 역사를 받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2. 죄악의 고통을 느끼는 자 (7:24)
죄를 가슴 아프게 알고 괴로워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그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의무를 가지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병든 사람에게 라야 의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당신께서 죄악의 고통을 당하는 자를 고치러 오셨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3.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오는 자 (8:1)
누구든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품안을 찾아만 온다면 그리스도는 결단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탕자가 아무리 실패를 했지만 아버지 품안으로 돌아올 때 즐거운 잔치를 하며 환영한 사랑 같은 것이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다.
4.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 (8:4)
누구든지 성신의 인도를 받아 보려고 하는 자라면 성령은 책임지고 인도하고 다스리되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역사해 주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은 피조물된 인간들이 마귀의 권세 아래서 포로된 것을 보시고 그저 있을 수 없는 뜨거운 열심을 가진 신이시니 누구든지 위의 네 가지와 같이 행하려는 자를 절대로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20. 진리의 성령의 역사
- 요 15:25~27 -
서 론
성령은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역사하기 위하여 보내는 영이므로 진리의 영이라고 한 것이다. 진리의 영의 역사라는 것은 어떠한 역사라는 것을 주님은 분명히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영계 분별을 진리에 의해서 분별하는 것 외는 함부로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진리의 영의 역사에 대한 주님의 교훈을 찾아보기로 하자.
1. 진리의 성령이 와야 할 이유 (16:7)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는 것은 예수님이 승천함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에 와서 역사한 것은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 줄 수 있는 일을 이루어 놓기 위한 것뿐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피가 아니고 부활의 승리가 없다면 성령은 와서 역사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피를 믿고 부활의 생명을 받은 자에게 성령은 역사하기 때문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성령은 천국의 건설을 위하여 인격을 이루어 주는 선물적인 역사를 하는 것이다. 성령은 십자가의 피를 믿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는 역사를 하고 있다.
2. 책망하는 역사 (16:8~9)
성령은 조금이라도 불의를 용납할 수 없는 책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망은 사랑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소망이 있는 자식을 더 책망하는 부모의 사랑과 같은 사랑의 신의 역사이다.
3. 진리로 인도하는 역사 (16:13)
성령 자체가 진리의 영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진리로 인도하기 위하여 역사하는 것이니 진리의 보혜사이다.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숨은 비밀이 있는 것이니 성령의 인도로만이 진리의 비밀을 바로 알도록끔 역사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자의적으로 절대적인 말이나 행하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주님의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의 뜻에만 따라서 움직여 줄 것뿐이다.
4.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15:26)
만일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바로 신앙할 자는 없을 것이다.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바로 알도록끔 하고 또는 그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증거하도록끔 역사해 주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데 전력을 두지 않는다면 이것은 성신의 역사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5. 성령은 영원히 같이 해주시는 역사이다 (14:16)
선물이라는 것은 영원히 소유가 된 것이니 성령이 오셔서 내주하는 것은 영원히 함께 해주는 선물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받은 영체는 영원히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거룩하고 신령하고 지혜롭고 능력 있고 권세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나뭇가지의 순이 진액을 받아 자랄 때 그 진액은 순의 자체를 완전케 하는 것으로써 그 진액을 소유하게 되는 것과 같다.
결 론
하나님은 영이 풍부하신 신이시니, 무한의 영을 사람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한 생명을 냈지만 꼭 같은 영이 천하 만민이 역사적으로 그 영을 타고난 거와 같다. 그러면 영혼이란 것은 그 마음이 사람의 본체 하나로 되어 있다면 성령은 완전한 사람을 만들되 영만이 아니라 그 몸까지 영체가 되도록 와서 역사해 주는 것이다. 다시 예를 들면 육체의 생활이 땅에서 식물을 먹고 자랄 때 이것이 식물로 말미암아서 완전한 몸을 이룸 같이 성령이 몸에 오시므로 영체를 완전히 이룬 것으로 되는 것이다(롬8:9).
21. 아버지와 같이 아들을 공경해야 할 이유
- 요 5:19~29 -
서 론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아들을 공경하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기를 기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1. 아무 일이든지 스스로 하지 않는 것이므로 (19)
우리가 아들을 공경할 이유는 그가 절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 외에는 조금도 스스로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주님께서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시키시는 일이 아닌 것을 행한 일이 있다면 그 십자가도 우리를 구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한 것은 양같이 순종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들을 공경하는 사람은 스스로 행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주님께서 당신도 양이요, 따라오는 사람도 양이라고 말한 것이다.
2. 아버지께서 인간에게 나타날 일을 아들로 나타내 주신 것이다 (20)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세상에 와서 똑똑히 보여주는 사실이 없다면 확신이 있는 신앙을 가지고 아들을 공경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무조건 아들을 공경하라는 것은 아니다. 합법적인 진리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큰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 예수의 행적이다.
3. 살릴 수 있는 권리를 아들에게 주신 것이다 (21)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심 같이 아들도 원하는 자를 살릴 수 있게 하신 것이다. 만일 살릴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 받은 아들이 아니라면 그를 공경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4. 심판할 권리를 맡긴 것이다 (27)
하나님은 심판을 아들에게 맡긴 이유는 인간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몸을 가지신 아들이 되었으므로 맡긴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공로를 가진 자 이외는 심판할 권리도 없기 때문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온 세계 만민을 다스리사 나게도 하고 죽게도 하고 또는 길흉화복을 주관하시되 공중의 나는 새까지도 지배하신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타락된 인간을 죄에서 해방을 줄 만한 일은 예수님밖에 다른 이는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아들을 아버지와 같이 공경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22. 택한 자를 찾는 주님의 심정
- 요 4:1~38 -
서 론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은 그의 외형적 인격이나, 표현적 이적이나 모범적인 생활을 보고 믿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먼저 아는 것이 신앙의 요소가 될 것이다.
이제 주님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1. 겸손한 심정 (1~9)
인간의 겸손한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주님같이 겸손한 자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음란한 여자를 찾아가는 일, 또는 거룩한 손을 내밀어 더러운 손에서 주는 물을 요구하는 일,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여자에게 먼저 가까이 하여 말씀을 요청하는 일, 또는 그를 대하여 존경하는 태도를 가진 일, 이것이 주님의 겸손이다.
2. 영생의 물을 주고 싶은 심정 (13~14)
주님은 죄를 보는 것 보다 그 중심을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영생이란 것은 값없이 주는 것이니 차별을 둘 수 없고 택한 자라면 주고 싶어하는 심정을 가진 것이다. 인간은 요구하는 것이 물질의 것을 요구하나 주님은 그 요구 외에 더 좋은 영생의 물을 주고싶어 하는 것이다.
3. 인격을 아끼는 심정 (17~18)
주님께서는 사람을 대할 때에 아버지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어린아이까지라도 대우를 했던 것이다. 심지어 자기 죄를 가리워 보려는 이 여자에게도 그 인격을 아껴서 자진적으로 깨닫도록 말씀을 했던 것이다. 만일 억압적인 탄압으로 죄를 깨우쳐 준다는 것은 주님의 심정은 아니다. 양심에 거리낀 죄를 지은 자를 그 양심에 자유를 주어서 양심이 움직이는 데서부터 깨닫게 하는 것이 아끼는 심정이다.
4. 알려 주고자 하는 심정 (21~26)
주님은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하든지 알려주는 것으로써 그를 인도하는 것이 주님의 심정이다. 억지로 나를 따르라는 것은 절대로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비천한 여자에게라도 자기의 자체를 알려 주었던 것이다.
5. 불타는 심정 (31~34)
주님은 한 마리 양을 찾는 선한 목자의 심정이니 사마리아의 여자 하나를 찾고도 이것이 나의 양식이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6. 바빠하시는 심정 (35)
주님은 세상에 계셔서 잠시도 쉬지 않는 안타까운 심정 속에서 최고의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추수기에 추수꾼의 심정을 가지고 말했던 것이다. 알곡을 아끼는 추수꾼의 심정은 바빠하는 심정이다.
결 론
만일 주님께서 이러한 심정이 없는 분이라면 우리와 주님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양심과 하나님을 상대할 때에 사마리아 여인의 생활보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심정을 가진 예수님을 따를 자라면 이와 같은 심정을 우리도 가져야만 될 것이다.
23. 열매를 바라는 포도원 농부의 심정
- 요 15:1~5 -
서 론
하나님께서는 택한 이스라엘이 축복 받는 열매가 있기를 바라는 심정을 포도원 농부의 뜻으로 말씀 하셨다. 열매를 바라는 농부는 얼마나 노력이 심하다는 것은 성경을 보아서 알 수 있다.
1. 심을 때의 노력 (사5:2)
농부가 포도를 심을 때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땅을 깊이 파고 돌을 제해 버리고 포도나무가 뿌리를 깊이 박도록 노력함 같이 하나님께서는 참된 이스라엘인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인간 죄악을 대속하는 십자가의 희생이 근본 이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희생의 피를 흘려서 교회를 세운 것은 열매를 요구하는 농부의 심정과 같다.
2. 가꿀 때의 노력 (사5:6)
포도원 농부가 포도원을 재배할 때 북을 돋우고 물을 대고 비료를 주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고 참된 종들을 품꾼으로 사용하여 그들로 눈물과 땀과 피를 흘리기까지 노력케 하신 것은 열매를 구하는 농부의 심정과 같다.
3. 열매를 맺을 때의 노력 (요15:1~2)
농부가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가 발견될 때 이것을 제해 버리고 열매가 많이 달린 가지는 더 많이 맺도록 배양함 같이 하나님께서도 말세에 제할 자를 제하고, 가꿀 자는 가꾸는 것은 열매를 얻기 위한 농부와 같다.
결 론
우리는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은 인간에게 말씀하신 말씀을 좇을 뿐 듣고 따라가는 자는 열매를 맺게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요15:7, 고전3:5~6).
24.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자
- 마 11:25~30 -
서 론
주님은 자체가 생명이요, 능력이요, 사랑인 만큼 당신의 사람을 가르치되 이론으로써가 아니고 실천적인 체험에서 배워지게 하는 것이 주님의 교훈이다. 만일 주님께서 이론으로만 말하고 실천에서 배워지게 하는 역사가 없다면 생명의 구주된 자격을 가질 수가 없을 것이다. 배워지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가 있다.
1. 주님은 온유한 인격을 가지고 멍에를 메는 자에게 배워주고 있는 것이다 (25)
아무리 당신의 사람이 실수가 있다 해도 온유하게 대하는 것이 주님이 가르치는 교훈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어도 주님은 온유한 심정으로 그를 대하여 바로 배워지도록 하였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천 구백 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을 두고 항상 온유로 대하시는 역사이다. 사람이 참으로 배워지는 것은 억압적인 교훈에 있는 것은 아니다.
2. 주님은 겸손한 자리에서 멍에를 멘 자에게 배워지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28~29)
겸손이라는 것은 더러운 죄인을 불러서 주님 대신 역사하는 위대한 인격을 만들어 놓겠다는 것이 주님의 겸손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당신의 사람을 쓸 적에 그 사람을 받들어 주는 봉사의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약한 자를 강하게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피곤한 자를 소성케 하기 위하여 항상 받드는 심정에서 기도하는 것을 겸손이라 하는 것이다.
3. 책임감을 가지게 하시면서 배워주는 것이다 (30)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약할 때에 강하다고 한 것은 극도로 약해져도 필연코 승리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금일에 주님께서 우리가 피곤해서 쓰러져 넘어지게 한 주님이라면 그는 완전하신 주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 같으나 주의 멍에를 메고 나가는 사람은 결국 가볍고 쉽게 이루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체험케 할 것이다.
결 론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은 완전한 사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불러서 완전하게 역사하는 것이 기독교의 완전한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멍에를 메고 배우는 것이 생명의 말씀으로 오는 교훈이다.
25. 성경과 신앙 문제
- 요 5:39~47 -
서 론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 자체에 영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 믿도록 가르친 것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이제 성경과 신앙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본문을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1.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중심에 영생 얻기를 원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런 효과를 성서에서 찾지는 못하는 것이다(40)
왜냐하면 성경은 영생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혼인잔치에 오라는 편지를 받은 자가 편지를 읽기만 했다고 잔치를 먹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니 영생을 얻기 위한 사람에게만 양식이 되는 것이다(42).
2.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극진히 사랑하므로 주신 말씀이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자는 아무리 읽어도 필요가 없게 된다(43)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어떻게 죄를 용서하며 어떻게 성령을 부어 주며 어떻게 구원하되 어떠한 축복을 주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인생이 같이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세상에 보낸 말씀이니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자는 아무리 읽어도 필요가 없는 것이다 (44)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의 영광보다 더 크고 완전한 나라의 영광을 주고자 하는 것을 무시하고 썩어질 세상 영광을 구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결 론
바리새교인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가르치고 숭배하지마는 실지는 구원을 목적한 것이 아니고 한 직업적 삯꾼의 행동을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면 나를 믿었을 것이라. 그도 믿지 않거든 내 말을 믿겠느냐고 탄식했다. 금일에 성경을 들고 가르치는 목사나 장로가 되었다 하더라도 중심에 간절히 원치 아니하던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치 않는다든지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자동적으로 바리새교인의 행동이 될 것이다.
26. 복음에는 외식이 있을 수 없다
- 갈 2:11~16 -
서 론
복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는 능력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니 이 복음을 받고도 외식이 있다고 하면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능력의 역사가 따르기 때문이다.
이제 복음을 따르는 자의 외식과 하나님의 경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경을 찾아본다.
1. 성금에 외식을 용납치 않음 (행5:1~5)
하나님은 얼마든지 죄인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축복을 주기를 기뻐하지마는 성금에 외식하는 아나니아를 용서없이 죽게 한 것은 복음에는 성금에 외식이라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증거로 보여 주었다. 이것은 왜냐 할 때 성령을 속이는 죄가 되기 때문이다. 성신의 역사를 체험하고도 짐짓 성금을 감추고 외식하는 죄를 용서치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단의 자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2. 설교의 외식은 용납할 수 없다 (마24:48~51)
만일 어떤 종이 공연히 종을 인신공격하고 공연히 남을 쳐서 설교를 하는 자라면 이것은 설교의 외식이니 심판 날에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강단의 설교라는 것은 양을 살리겠다는 눈물겨운 심정이 아니고는 전부가 외식의 설교가 되는 것이니 악한 종이라는 것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는 태만과 동역자를 공연히 치는 교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동적인 외식의 행동이 될 것이니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3. 의식적 외식은 있을 수 없다 (갈2:11~13)
우리는 의식적으로써 체면을 세우고 위신을 세워 보려는 것도 복음을 받은 자로서 합당치 않다는 조건에서 바울은 게바를 책망한 것이다. 복음을 받은 자는 의식을 초월하여 진리를 따라 행한 것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가 율법적인 의식에 따라서 할례자를 두려워하며 외식한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을 바울은 말한 것이다. 만일 복음적인 교회가 어떤 사람이 무서워서 형식적인 의식을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은 성신이 기뻐하는 일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4. 교제적 외식은 있을 수 없다 (골2:18)
복음을 받은 기독교 신자로서 세상 친구의 교제적인 겸손이나 어떤 학설이나 어떤 숭배를 따른다면 여기에서는 영적 손상을 받을 뿐 아니라 상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으로 교제하는 것밖에는 다른 교제를 따른다는 것은 교제에 외식이 따를 것이니 여기에는 사단이 기회를 탈것이다.
결 론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이루어진 열매이니 이 복음을 받은 자는 외식 없는 중심의 뜨거운 사랑을 떠난 일은 전부가 외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계명의 큰 대지가 되는 것이다.
27. 주님의 죽으심과 하나님의 사랑
- 요 10:7~18 -
서 론
하나님은 아들을 특히 사랑하게 됨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더욱 큰사랑을 베푸신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으심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당신의 경륜과 작정을 도저히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주님께서 하나님께 받은 계명을 순종치 않으셨다면 이 사랑을 베풀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랑이라는 것은 공의를 완성한 사랑이니 이 사랑으로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님의 죽으심을 인하여 사랑할 이유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주님 한 분이 죽으심으로 당신의 양을 살리게 될 것임으로 (9~10)
하나님은 주님 한 분이 죽은 것으로 잃었던 양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 큰 승리를 이루는 것이니 예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더 사랑을 베풀게 되는 것이다.
2.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계 인류가 하나가 됨으로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이다 (15~16)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한데 모아 한 무리가 되는 것을 기뻐하고 원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희생을 기뻐하는 것이다. 만일 십자가의 죽으심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을 한데 모을 수 없을 것이니 세계인류는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한 무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다.
3. 주님은 자원하여 십자가에 순종하셨음으로 그 계명을 지킨 것이다 (18)
만일 주님께서 억지로 마지못해 죽으신 것이라면 이것은 제사가 될 수 없다. 대속이란 것은 자원해서 피 흘린 십자가임으로 대속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누가 마지못해서 할 수 없이 원수에게 잡히어 죽었다면 이것은 순교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순교란 것은 먼저 정신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동적으로 만민을 위해 죽으심이 속죄가 되는 것이요, 자동적으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죽은 것은 순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한의 사랑을 가지셨지만 희생의 피를 흘리는 것을 따라서 모든 권리를 맡기는 사랑이 베풀어지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써 받는 그 사랑을 우리도 받기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사랑은 받기를 원하면서 죽기까지 순종이 없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을 가진 자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도 죽음으로써 사랑을 받았거든 하물며 죄인된 자로서의 속죄를 받고 성신을 받고 사명을 받고 죽기까지 충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명령을 받고 충성을 다하지 않는 자를 조금도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대적하는 사람이니 묵인할 수 없을 것이다.
28.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자
- 롬 7:6 -
서 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유형적인 제물이나 의식적인 규례나 율법적인 교훈으로써가 아니요, 오직 영의 새로운 것으로써 섬기는 것을 완전한 그리스도의 참된 신앙이라 하는 것이다.
이제 영의 새로운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경을 통하여 말한다.
1. 죽을 것이 죽어야 될 것이다 (롬7:6)
여기에서 죽는다는 것은 육체의 정욕이니 영적 생명은 아니다. 인간 자체의 죄악의 본질인 그 정욕이 죽은 것을 가르친 것이니 이것이 육체 속에서 역사함으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영의 새로운 것이란 것은 율법적인 신앙으로가 아니고 순수한 복음적인 그리스도의 생명으로써만 영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2. 진리의 젖을 사모하는데서 새로워지는 것이다 (벧전2:2)
영의 새로워지는 것은 신령한 젖을 사모함으로써만이 새로워져 자라는 것이다. 만일 어떤 신자가 사모하는 마음이 없이 되어 있다면 이것은 원체로 오는 진액을 받지 못한 나뭇가지와 일반일 것이다. 나뭇가지가 진액을 받게 됨으로 더 무성할 수 있는 진액을 흡수함과 같이 항상 중심에 사모하는 것이 있다면 영의 새로운 것이 날마다 풍성하여질 것이다.
3. 지식이 새로워지는 일 (골3:10)
우리의 영이라는 것은 지식을 따라 새로워지나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랄 때 영은 새로워지느니라(참고, 골1:10). 사람의 키가 자람에 따라 육적 지식이 새로워짐 같이 영이 자라는 동시에 영적 지식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4. 원망과 시비가 없이해야 할 것이다 (빌2:14~15)
아무리 은혜를 받고도 남을 원망하고 시비하는 자가 된다면 그 영은 새로워지는 빛을 나타낼 수가 없는 것이다. 영이라는 것은 원망이란 것이 있을 때 스스로 죽고 마는 것이다.
5. 상 주심을 믿고 일하는 것이다 (히11:26)
영이란 것은 아무 활동이 없으므로 둔해지고 활동이 있으므로 새로워지는 것이니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상 주심을 믿고 싸우는 생활이라야 할 것이다(빌3:14~15).
결 론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사는 생활을 떠나서 영의 새로움으로써 섬기는 생활이 산 생활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육으로 떨어지면 동물에 지나지 않는 타락이 있을 것이요, 영이 새롭게 됨으로 섬기는 생활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이룸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을 볼 것이다(엡4:13). 이제 영이 새로워지는 일이 있음으로 그 인격은 장부와 같이 승리를 이룰 수 있는 열매를 갖게 될 것이다.
29. 기독교 신앙의 위력
- 요 14:6~13 -
서 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자체로 오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명을 통하여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아버지께서 영광을 얻게 하려는 목적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어떠한 것이냐에 대하여 본 성경을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1.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아버지 앞에 갈 자가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6~7)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체는 첫째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생의 앞길을 생명 길로 인도할 자는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사망의 길이 생겼고, 둘째아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영생 길을 찾게 된 것이니 이것은 그리스도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리라는 것은 죄값으로 죽은 인생을 다시 살려주는 일, 사람을 망케 하던 마귀를 없이 하는 일, 저주받았던 이 땅을 다시 새롭게 하는 일, 이것이 큰 뜻이 되는 것이니 이 것은 그리스도 한 분으로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 생명이라는 것은 육체적인 생명보다도 죽을 몸이 죽지 않도록 하는 영원한 생명이다. 죽어도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2.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일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9~11상반절)
만일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든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든지 하면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일체인 동시에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을 아드님이 그대로 행하고 아드님이 하는 일을 아버지가 그대로 받아 응답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이루어진 일이다(요15:10).
3. 예수의 행하신 일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11하반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실천한 일이 조금이라도 불완전이 있다면 그를 믿을 수는 없다고 본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행한 일을 만족히 아심으로 아드님으로 무엇이든지 예수의 이름이면 다 구하는 대로 시행하시는 것이다(13). 만일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의 행하신 일을 다 믿지 않는 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적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존경한다 하면서 그 사람의 행한 일을 반대한다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거짓이 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인생에게 요구하는 바는 이와 같은 신앙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신앙을 통하여서 만이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날까지 이 신앙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이 사실인 동시에 앞으로도 더 큰 일을 행할 것이니 원수를 무찌르고 나가는 강한 권세의 역사도 이 신앙을 통하여 나타날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께 받는 것이니 다시 둘도 없는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30.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차이점
- 요 12:41~43, 13:12~20 -
서 론
기독교 신앙에는 다 하나같다고 볼 수는 전혀 없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동일하게 본다는 것은 성서적이 아니다.
이제 믿음에 있어서 본 성경과 같이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1. 믿음이 있고도 교권을 무서워하는 자 (12:42~43)
믿음이라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미약한 자도 있고 장부와 같은 자도 있는 것이니 믿어도 교권주의를 무서워하는 그 믿음은 아무런 역사를 할 수 없는 신앙이다. 이것은 소위 숨어서 마음으로 믿는다는 정도에 있는 사람이다. 만일 이런 사람만 교회에 있다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교회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앙을 가진 자에게 역사를 나리는 것은 절대 아니다. 과거도 지금도 장차도 있을 것이다. 평교인으로서 이런 자가 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소위 사명자라는 자로서 이러한 자가 된다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적군이 무서워서 골방에 가서 숨어 있는 군대와 같다.
2. 사랑을 받으면서 감사할 줄 모르는 자이다 (13:18)
이러한 분자는 가룟유다와 같은 독사의 자식이다. 성찬에 참석하여 떡과 즙을 받고도 짐짓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 자이다.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 자는 사단이 그 속에서 자리잡고 역사하는 것임으로 13:26~27과 같이 멸망을 자취하는 자가 된다.
3. 주님의 겸손을 본받는 자가 될 것이다 (13:14~17)
신앙이라는 것은 주님께 받은 사랑을 남에게 주는 것이 열매 있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소유한 종된 생활이다. 신앙이 크다는 것은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가장 겸손한 신앙이 있으면 가장 높은 자리를 점령하는 큰 역사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극도로 겸손한 자리에 떨어뜨리고 극도로 높은 자리를 주신 것이 아들을 사랑하는 증거이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사랑하는 참된 종을 극도로 낮은 자리에서 높은 자리로 올려놓는다는 것이 사랑하는 자에게 있는 비밀의 하나이다. 너희 믿음이 겨자씨만 하면 산이라도 옮겨진다는 것은 지극히 겸손한 믿음을 가리킨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믿는대로 역사해 주시는 하나님이니 사람을 두려워하는 신앙에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없고 물질을 사랑하는 자의 믿음에 성령 충만을 줄 수 없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섬기는 믿음에 섬김을 받을 수 있는 왕권을 주는 것이다.
31. 참된 평안
- 요 14:23~31 -
서 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하는 자에게 참된 평안을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 중심의 사랑인 것이다. 하나님 자체가 평안의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에게 참된 평안을 주기 위한 활동은 초자연적인 신의 역사라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마귀역사가 불안과 공포라면 하나님의 역사는 참된 평안과 기쁨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낸 것은 당신에게 있는 평강을 같이 누리자는 것이 창조주의 목적이다.
사람이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고도 평안히 살 수 있게 한 것이 에덴동산의 축복이요,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히 죽지 않을 생명과를 먹게 하자는 것이 인생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계 인류는 참된 평안을 요구하는 것이 동일한 소망일 것이다. 그리나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 평안을 어디 가서 찾느냐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므로 평안을 구하다가 죄를 짓고 마는 것이다.
이제 참된 평안은 어디서 어떻게 오느냐 하는 것을 주님의 교훈을 통하여 우리는 받게 되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데서이다 (23)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예수같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에게 와서 동거동락 함에 평안이 있는 것이다. 이 평안은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2.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25~26)
사람의 심령이란 것은 모든 것을 알게 되는 데서만이 발전을 가지고 오는 것이니 성령이 우리에게 옴으로 우리들도 앞으로 될 모든 일을 가르쳐서 알게 함으로써 평안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신자가 성령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사람의 교훈을 존중히 한다면 자동적으로 그 마음은 하나님과 멀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겸손히 자기의 지식을 포기하고 성령님의 가르친 것을 중요시할 때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온다 하더라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식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심령이라는 것은 참된 도리를 바로 깨달아 아는 지각이 있음으로써만이 참된 평안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3. 주님께서 하늘나라에 갔다가 다시 오시는 일이 있으므로 참 평안이 있다 (28)
만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시체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서 승천하여 가신 일이 없다면 그를 믿는 신앙에서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신앙의 확실한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예수님이 부활해서 하늘나라에 승천하신 것이 확실하고 또는 우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예비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순교하는 스데반도 낯빛이 천사같이 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도 “항상 기뻐하라”는 말을 한 것은 위에서 역사하는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가셨다 오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로서 영원한 평안을 소유할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4. 세상 임금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다 (30~31)
만일 기독교의 신앙이 어떤 세상 정치에 국한된 것이라면 참된 평안을 보전할 수 없다. 이 평안은 세상 나라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늘 나라의 지배를 받는 평안이라는 것이니 세상 임금이라는 것은 그 자체에 평안을 줄 만한 인격이 없는 임금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 평화의 완전한 평안의 안식 시대를 이루는 임금은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이다.
결 론
우리에게 평안을 주려고 괴로움과 죽음을 맛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인류적인 참된 평안은 필연코 영원한 것으로 온다는 것이 기독교 종말의 안식의 시대라 하는 것이다. 지금은 개인적인 중심 평안을 주는 것은 안식의 시대에 왕권을 소유할 인격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다. 만일 중심적 평안이 없다면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를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심적 평안을 소유 한자가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 가는 동시에 안식 세계의 세세 왕권을 누리는 것을 기독교의 신앙의 길이라 하는 것이다.
32. 교훈 안에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
- 요이 1~11 -
서 론
하나님은 교훈대로 역사하는 신이시니 교훈 안에 모시고자 하는 자라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교파 안에만 하나님이 역사한다고 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그 안에서 도저히 역사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교훈 안에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은 하나님의 교훈을 존중히 알고 교훈대로 실행하시는 참 신이신 것을 믿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이제 어떤 생활이 교훈 안에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인가에 대해서 본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1. 진리를 위한 사랑 안에서 행하는 생활이다 (1~2)
하나님은 진리를 위하여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은 똑같이 역사해 주므로써 한 지체를 이루는 교회를 구성케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남녀에 진리를 위한 사랑이 아닌 것이 있다면 마귀가 틈을 탈 것이로되 진리를 인한 사랑에서의 교제는 하나님이 같이 함으로써 열매를 나타낼 것이다. 사랑은 마귀를 청하는 사랑도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사랑도 있으니 진리를 위한 사랑에서만이 하나님은 역사해 주는 것이다. 교회라는 것은 진리를 위한 사랑의 계명을 지킨 단체를 교회라 하는 것이다.
2. 온전한 상을 잃을까 삼가하는 생활 (7~8)
하나님의 신은 우리의 구원만을 목적하여 역사하시는 신이 아니요, 온전한 상을 이루도록 지혜와 능력으로써 미혹을 받지 않도록 역사해 주는 신이시니 온전한 상을 잃을까 삼가하는 사람은 돕기도 하고, 깨우치기도 하고, 더욱 열매를 맺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돕는다는 믿음은 있으나 상을 잃을까 봐 삼가하는 것이 없다면 하나님은 거기서 역사하지를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생활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사람의 할 일을 힘써 하기를 기다리면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3. 교훈 안에서 싸우는 생활이 있어야 할 것이다 (10~11)
우리가 교훈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싸워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훈을 주시고 그 대적이 따르게 한 것은 싸우는 자에게 더 축복을 하고, 완전한 승리를 이루도록 역사하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훈을 위해 싸우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싸우는 생활이니 하나님은 기뻐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하나님의 교훈을 중심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이 말씀을 이용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일 것이다.
하나님의 교훈을 그대로 가지지 않는 자는 죄인만이 아니요, 악한 일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싸워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교훈 안에서 싸우는데 있어서도 두 가지로 보게 된다. 어떤 형제가 그 교훈을 바로 믿고 그대로 활동을 하다가 실수하는 사람은 그 사람을 건져 주기 위해서 싸워야 할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찾기 위해서 싸우는 싸움도 있고, 막기 위한 싸움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전쟁이란 것은 포위에 든 사람을 건져내기 위한 싸움도 있는 것이다. 어떤 형제가 옳은 교훈을 가진 자로서 탈선된 교훈에 미혹을 받을 때 찾기 위해서 싸워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의견과 자아의 고집을 위해서는 강하게 나가서는 안 될 것이로되 교훈을 위해서는 사자같이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 론
교훈이 없이 신을 모시는 것은 자동적인 우상이 되는 것이다. 우상이라는 것은 무엇을 만들었다고만 우상은 아니다. 교훈이 아닌 것을 숭배하는 것이 우상이다. 다시 말하면 교훈 안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 외에는 하나님을 찾아도 우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지켜 우상을 멀리하라고 말한 것이다(요一5:21).
33. 예수의 친구된 자격
- 요 15:7~20 -
서 론
우리 인생의 최고의 기쁨과 아름다운 생활은 친구로 말미암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부모보다도 처자보다도 친구의 관계라는 것은 큰 산이라도 무너뜨릴 만한 새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친구가 좋고 나쁘고 귀하고 천한 관계에서 인격은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친구된 자격이라는 것은 얼마나 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만왕의 왕 예수의 친구될 자격은 다음과 같이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1. 예수의 말씀이 마음 안에 역사 하는 사람이다 (7~8)
만일 친구를 사귄다 하더라도 물질이나 어떤 오락적으로 사귄 친구는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이로되 참된 진리의 말씀으로 사귄 친구는 진리대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으므로 좋은 열매를 가져올 것이다.
그렇다면 만왕의 왕 예수의 진리의 말씀이 내 마음에 믿어지고 그 말씀이 내 마음에서 역사할 수 있는 생활이라면 예수와 같은 동등한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씀은 생명이니 말씀을 통해서 포도나무 그루터기 되시는 예수님께로 생명의 능력의 힘이 내게 와서 역사하므로써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인격을 이루는 것이다.
2. 주님의 사랑에 거하는 자이다 (9)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고 우리가 그 계명을 지킴으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은 계명을 명하시고 인간이 홀로 행하라는 주님이 아니시다. 법적인 계명은 사람이 행하라는 몽학선생에 불과한 계명이다.
주님의 계명은 우리를 향하여 성령의 역사로 사랑의 은사를 주어서 남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불타도록 만들어서 그 계명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니 사람을 죽이던 바울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사람이 무서워서 떨던 베드로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 이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내 계명을 지키는 자는 내 친구라고 한 것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싸우는 자에게 해당된다.
3. 사명적으로 택함을 받은 자이다 (16)
하나님은 예지와 예정이 계신 반면에 사람을 택할 때 어떻게 쓰겠다는 예정 밑에서 택하여 쓰는 것이니 택함을 받은 자는 열매를 맺도록 하겠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택했다는 것이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홀로 하시기를 기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택해서 당신의 할 일을 대신해서 그 사람으로서 친구적인 영원한 왕권에 동참자로서 영광을 누리기를 기뻐하시는 것이 주님의 완전한 사랑의 심정인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선지 이사야를 통하여 갈릴리 해변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씀이 응하기 위해서는 그 해변에서 어부의 생활을 하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택하여 세워서 그들로 시작된 교회가 창대 하여 세계를 정복하게 한다는 예언의 말씀이 응하기 위한 뜻에서 그 제자를 택하였던 것이다.
4.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게 되는 것이다 (19~20)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증거는 예수를 핍박하던 세상이 우리를 핍박하는 것은 예수의 친구가 된 표적이다. 만일 어떤 종이 세상 사람에게 대환영을 받는 종이라면 그 종은 세상에 속한 자라고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밀접한 친구의 생활이 될 때 자동적으로 세상에서는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는다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택함을 받은 증거이니 우리는 필연코 열매를 맺는 자리에 이르게 될 것을 굳게 믿고 나가야 될 것이다. 만일 주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완전케 해줄 것을 믿지 않는다면 자동적으로 주님의 친구가 아닌 생활이라고 보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제일 기뻐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이 틀림없이 내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담대히 증거하는 자이다. 이 일에 목숨을 바친 자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다 예수의 친구일 것이다.
34. 온전히 담대한 바울
- 빌 1:12~24 -
서 론
주님께서는 택한 종을 쓰시는 방법은 온전히 담대한 종을 만들어 쓰겠다는 것이 사랑하는 자에게 목적을 둔 비밀이다. 인간이 볼 때는 실패, 낙망, 공포, 수치를 당하게 하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은 사랑하는 종은 완전히 담대한 사람을 만들어서 더 큰 역사를 할 수 있는 영계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제 사도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온전히 담대한 바울이 된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진보가 된 줄 생각하는 마음이다 (12)
이것이 사도 바울이 넓고 높고 깊은 영계를 체험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인간이 볼 때는 자유를 잃고 로마 옥중에 있는 것이 복음 전파에 퇴보 같으나 바울은 더 진보라고 깨달아졌던 것이다. 이것은 어떤 환경이냐 할 때 형제 다수가 바울이 매임을 당할 때 겁 없이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14).
또 어떤 자들은 그와 반대로 시기하고 분쟁으로 악평적인 말로써 선전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어떻게 되었든 악평으로 말했다 해도 그리스도를 알려 주니 고맙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란 것은 악화를 시켜서 쓰는 일도 있고 성령으로써 담대히 만들어 쓰는 것이니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일에는 진보가 되리라는 것을 그는 믿었던 것이다.
2. 성령의 도우심으로써 될 것을 믿고 나아갔던 것이다 (19)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와도 성신의 역사만이 떠나지 않으면 필연코 승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있어야 될 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환영을 하고 천사같이 대접해도 성신의 역사가 아니라면 아무런 승리를 거둘 수 없는 것이니 바울은 이러한 때를 당하여 더 큰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온전히 담대하게 되는 원동력이다.
3. 그리스도만 존귀케 된다면 무엇이든지 유익으로 아는 바울이었다 (20)
죽어서 존귀케 된다면 죽어도 좋고 살아서 존귀케 된다면 살아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하나님의 종은 죽고 사는 문제에 국한되어 있다면 큰 담력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것도 저것도 다 내게는 만족이라는 것밖에는 없다. 내가 살고자 함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죽고자 하므로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만이 온전히 담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마음 가운데 내가 세상에 있어서 좀 더 일하는 것이 양떼를 위하여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24).
하나님의 종은 살아도 남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살아보자는 것밖에는 딴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종이 “세상이 귀찮으니 어서 세상을 떠나가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합당치 못하다. 이건 왜냐 할 때 양떼를 아끼는 마음이 없는 종이기 때문이다. 담대한 힘을 얻는 것은 절대 하나님이 나를 쓰려고 죽지 않게 한다는 것을 믿고 나서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내 양심을 아신다는 데서 오는 힘일 것이다(빌1:8).
결 론
온전히 담대하다는 것은 사도 바울과 같은 정신과 사상 양심이 있는 자에게만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말세 비밀을 증거하기 위한 사도 바울 정신을 모방하고 그를 따르는 후계자가 되는데서 온전히 담대한 종이 될 것이다.
35. 주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
- 요 8:12~20, 31~37 -
서 론
하나님은 생명의 원동력을 가지신 신이시니 무엇이든지 자유를 줄 수 있고 자유로 활동하게 해서 열매를 맺게 하는 신을 하나님의 신이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지은 것도 다 자유롭게 되게 한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이나 말 못하는 동물이나 또는 하나님과 동등한 형상을 가진 사람이나 다 참된 자유를 주어서 자유로운 발전을 가지는 동시에 자유롭게 열매 맺게 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신이시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주는 자유는 무엇이냐라는 것을 성경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1. 생명의 빛을 얻게 하는 자유다 (12)
주님께서는 어두움에서 헤매는 인간들을 억지로 끌고 가는 주님은 아니다. 생명의 빛을 마음에 비춰 주고 깨닫게 해서 자동적으로 회개케 하고 자동적으로 옳은 길을 가도록 만드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음란한 여자를 돌로 쳐죽여야 마땅하냐는 질문에서 주님은 누구든지 죄가 없는 자는 돌로 치라고 하실 때 주님의 생명의 빛이 그 가운데서 역사했던 것이다(요8:7~11).
그러므로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은 다 자진적으로 물러가고 여자를 정죄하지 아니하고 다시는 범죄치 말라고 하시면서 말씀으로 여자에게 자유를 주었던 것이다. 절대적으로 그리스도는 죄인을 억지로 회개시키는 일은 없고 억지로 따라오라고 한 일도 없다. 자동적인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따라오게 한 것이 그리스도가 주는 자유의 역사라 한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실천하므로써 남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28)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반대할 때 내가 십자가에 죽은 후에야 너희들이 내가 누구인줄을 스스로 알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아무리 옳은 진리를 말했다 하더라도 십자가에서 죽은 실천이 있은 후에 그를 반대하던 자들도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면서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마27:54). 이것이 참된 자유를 주는 역사였던 것이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못박아 죽인 악한 원수들도 자동적으로 회개하며 가슴을 치며 돌아왔던 것이다(행2:36~38).
3. 진리를 앎으로 자유를 얻게 한다 (31~32)
기독교의 진리라는 것은 누구든지 바로만 알면 참된 자유를 얻게 된다. 이것은 옳은 진리의 노선을 찾되 참된 생명의 소망을 알게 되니 자유롭게 죄를 버리고 성결을 찾고 있는 것이다(요一3:3). 이 자유라는 것은 양심에서부터 맑아지고 또는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생명이 있는 자유를 찾게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떠한 신자가 무엇을 할 적에 하나님이 무서워서 억지로 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마귀와 우상을 섬기는 그 생활에 불과할 것이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진리를 바로 알고 자유롭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유롭게 죄를 이기고 나가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율법적인 바리새교인을 보고 너희는 아직까지 죄의 욕심을 따라 행하니 마귀에게 속했다고 말했다.
결 론
그리스도께서 주는 자유는 영원한 자유가 된다. 왜냐하면 영생의 생명을 따라서 오는 자유니 완전한 끝을 이루기까지 하나님은 계속적인 성령의 역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나뭇가지에서 순이 나서 열매가 되도록 계속적인 진액이 그루터기로부터 보급됨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주는 자유는 당신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끊임없이 역사해 주는 것이니 완전한 자유를 가지되 자유로운 권세를 얻어서 세세왕국의 영광을 누리기까지 역사해 주는 것을 주님이 주는 자유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종된 자에게 주는 자유의 열매이다.
36.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 요 6:26~40 -
서 론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을 하라고 명령하셨지만 사람이 범죄하므로써 기능을 상실하고 다 죄의 종이된 인간이 됨으로 썩어질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벌레 같은 인간이 된 것을 불쌍히 보고 너희는 믿기만 하면 내가 이렇게 역사해 주겠다는 것이 복음이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가 오셔서부터는 참으로 믿는 자를 들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역사하겠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다.
이제 어떤 믿음을 가진 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일하시겠느냐에 대하여 성경을 찾아보기로 하자.
1.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친 자라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27)
하나님이 인 친다는 것은 전권을 아드님에게 맡겼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모든 결재를 아드님을 통하여 끝을 맺도록 한다는 것을 뜻한 것이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복을 받는 것도 화를 받는 것도 모든 자유로운 권리를 행할 수 있는 인을 쳤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모든 행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특권을 맡겨서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란 뜻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해도 인을 친 예수님을 모르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2. 예수는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35)
사람이 떡이 없으면 육체의 생명을 보전할 수 없음같이 생명의 떡인 예수를 바로 믿는 자 외에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떡이라는 것은 보는데서 효과를 주는 것은 아니다. 먹는 데서야 맛을 알고 맛을 얻는 것과 같이 예수를 믿는 일은 관능적인 외식적인 것을 떠나서 예수를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내 마음에 들어와서 약동하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생명이 살아나는 새로운 무엇이 없다면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산 생명의 체험적인 신앙이다. 유대인들은 보리떡을 줄 때는 좋다고 먹더니 예수님이 자기가 생명의 떡이라니 다 물러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 무리들이 구경거리로 따라오던 증거다. 금일도 많은 사람이 교회에 왕래하지만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써 먹고 체험하는 자는 많지 못하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아무리 교리나 의식이나 모든 도덕적인 생활이 충만하다 해도 생명의 떡인 예수님을 직접 먹어서 체험을 받는 개인적인 신앙의 비밀이 없다면 이것은 생명의 종교는 아닐 것이다. 떡을 먹는 사람이 자기에게 얻은 맛의 체험은 먹는 자 밖에는 모르는 것과 같다.
3. 결코 버리지 않는 사랑을 믿어야 한다 (37)
마귀는 믿는 자에게 와서 주님은 너를 버린다는 의심을 갖다 주는 일이 있는 것이니 이것이 흑암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절대 내게 오는 사람을 결코 쫓아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버릴까 봐 항상 의심을 한다면 주님을 참되신 주로 믿지 않는 것이니 주님은 이런 신앙을 원치 않는 것이다.
4. 주님은 자기 뜻대로 행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38~40)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행하려고 오신 것이니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자는 예수를 바로 믿는 신앙은 아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믿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하등에 필요가 없다고 보면 이것은 망령된 신앙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날까지 하나님의 예언하신 말씀을 순종하되 십자가의 죽으시기까지 순종했고, 오늘도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다시 오시는 것이다. 금일에 신앙의 큰 병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예수님대로 믿는다 하면서 예언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 큰 병인 것이다.
결 론
신앙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역사하는 일을 순종하는 양떼의 심정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신자를 양이라 한 것은 목자의 말대로 순종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만 가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역사하는 일을 순종하는 것은 약해도 강하게, 어리석어도 지혜롭게, 더러워도 성결하게 되는 일은 주님의 역사에서 되는 일이니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던 것이다.
37. 신앙과 예비
- 사 28:14~22 -
서 론
하나님은 언제나 신앙이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급절하게 되지 않도록 예비시키는 것이다. 모든 세상에 되는 일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일이니 참으로 신앙을 가진 자에게 환난을 면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킨다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은 믿음 있는 자에게 시대적인 비밀을 알려주고 심판 날에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역사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또는 아니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문제로 둘 것뿐이다. 준비가 있는 신앙에 들어가려면 본문을 보아 알 수 있다.
1. 경만한 자가 되지 말 것 (사28:14)
신앙이란 예지와 예정이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니 무슨 일이나 너무 경솔히 하는 자는 돌밭에 뿌린 씨와 같이 되고 말 것이다. 경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하고 신앙을 중심해서 움직이지 않고 자기의 수단 방법을 넣는 것이다(15).
우리는 심판의 돌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앞으로 오는 재앙을 자기 어떤 수단 방법으로 피해보려고 계획한다는 것은 심판의 돌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라고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망과 언약한다고 한 것은 인간의 마귀 앞잡이 그 세력과 타협하는 것을 말한다. 신앙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믿고 나가는 것이 신앙이다. 어려운 일을 미리 피해 보려고 어려운 일을 가지고 오는 원수와 협상을 하는 일은 멸망을 자취하는 음녀적인 신앙이 될 것이다.
2. 극도로 미약할 때 하나님이 역사할 것을 믿어야 한다 (사29:4~5)
우리는 하나님은 무소불능하시니 아무리 티끌에서 굴러다니는 신접한 자 같이 남에게 멸시를 받아도 거기에서 낙심치 않고 하나님의 역사는 필연코 홀연히 온다는 것을 믿는데서 준비가 된다. 준비라는 것은 인생 자체가 환난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극도로 미약해질 때 떨어지지 않고 나가게 되면 준비에 들어간 신앙이라고 볼 수 있다.
3. 마음이 둔해질까봐 조심하는 생활 (눅21:34~36)
우리의 준비는 심령이 둔해지지 않고 항상 조심하는 마음에서 깨닫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닫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항상 깨어서 기도하는 것이다. 주 재림시도 떨어질 자는 마음이 둔해진 자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둔해진 자라는 것은 감각이 없는 심령 상태를 말한 것이다.
4. 맡은 일에 충성을 다 하는 일 (마24:44~46)
누구든지 참된 신앙이 있는 자라면 주님이 다시 올 때까지 맡은 일에 충성을 다 해보려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날이 가까움을 아는 신앙에서 게을러진다는 일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자기의 직책을 감당하는 일은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는 복음 증거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이사야 28장은 심판의 대상자를 말했는데 인간 향락에 도취가 된 자,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혼선된 자, 경솔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운데 남을 자는 시온의 도를 바로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다시 오시는 주님을 가르킨 것이다.
누구든지 참된 신앙이 없는 자라면 심판의 대상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본문은 말한 것이다. 심판이란 참된 알곡된 믿음을 가진 자를 아끼는 심정에서 오는 심판이니 한 사람인들 급절하게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사28:26~28).
38. 열매의 심판
- 마 7:1~21 -
서 론
하나님은 열매 없는 심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어떤 농부가 열매 맺기 전에 추수한다면 이것은 완전한 정신이 있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열매를 맺기를 기다리는 것이 사랑의 심정이요, 열매 맺은 다음에 심판하는 것을 공의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열매 맺기를 기다리는 것이 있는 다음에 심판이 온다는 것을 본문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자에게 좋은 열매가 맺혀 지느냐에 대하여 본문 성경에서 알 수가 있다.
1. 양심적인 회개가 있어야 한다 (5)
회개란 입에 있는 것도 아니요, 어떤 도덕 의식 수양이 아니라 이것은 양심속에 감추인 죄를 청산하는 것이다. 아무리 바리새교인의 교리가 옳고 도덕이 높고 수양이 높다 하여도 네 눈에 들보를 빼라고 주님은 책망했던 것이다. 예수님을 안식일 범죄자로 보는 바리새교인 마음속에는 근본적인 죄의 보장이 되는 욕심이 꽉 찼던 것이다.
들보란 정욕을 말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고 했으니 근본적 야욕 이것을 들보라 한다(요8:44). 만일 어떤 종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보려는 양심은 있으나 사람 앞에 열매가 좋지못한 문제보다도 사람 앞에 모든 것이 옳은 것 같으나 마음속에 야욕이 있다면 양의 옷을 입고 이리의 마음이 있는 거짓 선지일 것이다
2. 양심적인 봉사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12)
만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대접하는 마음이 없이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바리새교인의 기도다. 아버지의 심정은 양심적으로 남을 대접하고자 하는 양심을 가진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먼저 주고 싶어하는 심정을 가졌다는 것을 비유로 주님은 말씀할 때 아들이 생선을 달라면 뱀을 줄 자가 있겠느냐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남에게 대접하라고 하셨다. 만일 어떤 종이 양떼가 기갈을 당할까 봐 안타까운 심정에서 눈물겨운 심정을 가지고 강단에 선다면 이 종을 통하여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누구든지 중심에 남을 잘되게 유익하게 해 보겠다는 마음만 간절하다면 이것은 열매맺는 나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남이 대접하면 화평을 말하고 대접하지 아니하면 불평을 둔다는 것은 거짓 선지의 행동이라고 미3:5에 말한 것이다.
3. 항상 조심하는 마음이 있는 자다 (13~14)
이 조심이란 소망이 확실한 빛의 양심에서 적은 일 하나라도 잘못이 있을까봐 삼가는 신앙노선은 좁은 길이라, 험한 길이라 하는 것이다. 만일 신앙노선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험해도 가고 좁아도 간다는 이것이 없이 자기 멋대로 한다는 것은 방랑적인 넓은 길이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잘못될까봐 조심하는 사람에게 지혜도 주고 또는 인도하기도 하고 붙들어 주기도 하는 것이다(눅21:34).
만일 어떤 종이 은혜를 받고 사명을 맡고도 항상 삼가고 조심하는 것이 없다면 이 사람은 생명 길을 걸어가는 생활을 도저히 갈 수가 없을 것이다. 진보란 항상 조심하는 그 마음과 바로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은 넘어지지 않도록 인도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길이 협착하다고 가르치셨다.
열매라는 것은 그 사람 자체에서 있을 수 없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본질만 가진 자라면 필연코 열매 맺도록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나무라야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친 것이다(17). 우리는 열매가 맺어지지 않는다고 낙심말고 좋은 나무가 되는 양심적인 생활이 있느냐 하는 것을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결 론
주님은 영안이 밝으시고 무소부지하신 신이시지만 금일에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일은 경솔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것은 주님께서 중심적인 회개와 중심적인 봉사와 중심적인 조심하는 일이 있는 자라면 열매를 맺도록 역사해 준다는 것이 본문성경에 지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과 뜻을 살피신다는 것은 마음과 뜻을 보시고 역사 해주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농부가 못된 나무인줄 알면서 가꾼다면 실패 중 실패일 것이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라면 하나님은 열매맺도록 해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요15:1). 심판이란 좋은 열매를 거두어서 새로운 시대를 이루기 위한 목적 밑에서 행하는 것을 심판이라 하는 것이다.
39. 성도의 교제적인 생활
- 엡 4:25~32 -
서 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된 성도의 생활에 있어서 교제적인 생활이 있으므로 구속의 날까지 교회는 활동하는 동시에 승리를 이루는 열매 있는 성도가 될 것이다. 성도는 독립적인 생활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나무의 한 가지가 독립할 수 없고, 몸의 지체의 한 부분이 독립할 수가 없는 것과 같은 교제적인 인연을 가진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아시아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썼던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성도의 교제적인 생활이냐 하는데 대하여 본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1. 참된 것을 말하여야 된다 (25)
만일 우리 성도가 성도를 속인다는 것은 자기 손으로 자기 몸을 해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도의 교제는 어떤 물질이나 또는 사업적인 것에 국한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한 양심적인 교제니 참이라는 것을 떠나서는 안 될 것이다.
2. 분을 내어도 해지도록 품지 말 것 (26)
우리는 신이 아니요, 사람이니 만큼 혹 감정 날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분을 오래 품고 있을 때 성도의 교제를 깨지게 하는 마귀는 틈을 타는 것이다. 무엇이나 우리 성도의 목적은 서로 합심해서 마귀와 싸워 이기라는 것을 목적한 것이니 이해를 막론하고 서로 오해를 풀고 속히 합심되기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성도의 교제는 마귀에게 파탄을 당할 것이다.
3. 손으로 수고하는 일 (28)
우리는 서로 수고하는 봉사 없이 성도의 교제는 있을 수가 없다. 만일 어떤 신자가 자기는 일하지 않고 형제의 덕을 보려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지체된 정신을 떠났다고 보게 된다. 우리는 천국에 보물을 쌓아 두고 생활하는 정신에서 각자가 노력하며 남을 돕고자 하는 정신에서 형제의 교제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4. 서로 덕을 세우기 위하여 말할 것 (29)
우리는 말할 때에 성도의 위신을 세워 주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다. 만일 형제에게 누명을 씌우는 말을 하기를 좋아한다면 정신병자가 자기 몸을 망치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형제에게 은혜가 되도록 해보려는 목적 밑에서 말하는 것이 있어야만 될 것이다.
5. 성신을 근심케 말 것 (30)
성도의 교제란 성령을 통해서 영적으로 되는 교제니 아무리 서로 육적으로는 친분이 있게 나가도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일이 있을 때는 성도적인 영적 교제는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육에 속한 교제가 아니요, 성령에 속한 교제이니 성령을 근심케 하는 자와 사귀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6. 서로 불쌍히 보고 용서해 주는 것이다 (32)
예를 들면 어느 지체가 괴로울 때 그것 하나를 위하여 온 몸이 고통을 당하게 될 때 전력을 다하여 그 지체의 괴롭게 하는 것을 없애 보려고 하는 것이 지체된 자의 자동적인 행동이다. 이와 같이 어떤 형제가 죄를 짓고 괴로워 할 때에 불쌍히 보고 서로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 교제를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완전한 몸이 없이 싸울 수도 없고 완전한 몸 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성도의 지체적인 완전 교제 없이 교회에 들어오는 마귀를 이길 수 없다. 또는 목적지가 되는 새 시대를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니 성도의 교제적인 생활로 이루어진 교제는 신령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40. 넘어질까 조심할 일
- 고전 10:1~13 -
서 론
우리는 넘어진다는 것은 누워있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걸어가는 자에게 오는 시험이니 모든 일의 승리의 길을 가는 길에는 조심이 없이는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적하는 세력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노릇 할 때는 넘어지는 것이 없는 생활이었다. 넘어진다는 것은 소망 있는 길에서 넘어지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 생활은 아무런 소망 없는 생활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노동을 해도 수입이 없고 아무리 자녀를 낳아도 기를 수 없는 이러한 압박 속에 있는 민족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마귀의 권세 안에 사는 생활이 그와 같은 생활이었다. 열매 없는 무가치한 생활이 애굽의 생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영적 지도자를 강권으로 보내어 소망 없는 민족을 소망 있는 길로 인도한 것이 출애굽이라 하는 것이다. 소망 있는 길을 떠난 그들은 어려운 난관이 부딪힐 때마다 하나님은 크게 역사하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앞길을 막고 있던 바다가 갈라진 일, 식물 없는 사막에 만나가 나린 일, 음료수 없는 마른땅에 샘물이 난 일, 이것이 소망을 주는 그들의 체험적인 신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생명의 산 체험을 받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조심치 아니하므로 60만 대중은 다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리 생명의 떡을 먹고 생명의 물을 마셔도 조심 없는 생활에는 비참을 이루는 일이 말세에 있다는 것을 거울로 보여준 것이다. 그들은 무슨 일에 조심 못했던가 하는 것을 본문에서 알 수 있다.
1. 우상을 숭배하게 된 일 (7)
이것은 모세가 40일간 이라는 기간을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금식하며 기도 중에 십계명을 쓴 비석을 받았던 것이다. 잠깐동안 지도자 떠난 대중에는 마귀의 미혹이 왔던 것이다. 눈에 보이던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대신 금송아지를 만든 일이다. 이것은 너무 경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의뢰하는 정신은 우상숭배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이들이 만일 모세를 바라보지 않고 여호와만 바라보는 신앙이 강하였던들 이러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2. 간음한 일 (8)
이것은 발람과 발락이 합심하여 이스라엘을 망치고자 할 때 아름다운 모압 여자를 보내어 꼬이었던 것이다. 언제나 넘어뜨리려는 마귀의 시험은 여자를 통해서 쓴다는 것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여자를 조심치 아니한 결과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던 것이다.
3. 주를 시험하는 일 (9)
그들은 길을 가다가 피곤하다는 것으로 마음이 상해서 애굽 땅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가지다 불뱀에게 물려 죽은 사실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감사한 줄 모르고 짐짓 뒤를 돌아보는 일이라는 것은 지극히 조심할 일이다.
4. 원망하는 일 (10)
그들은 배가 고파도 원망이요, 목이 말라도 원망이요, 조금만 괴로워도 지도자를 원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멸망한 원망은 무엇인가 할 때 하나님께서 40일 동안에 가나안 복지를 점령해 준다는 것을 믿지 않고 악평하는 열 정탐꾼의 충격을 받고 하나님께서 세운 여호수아와 갈렙을 원망하고 대적하다가 전멸을 당한 것이다. 괴로울 때 무엇을 달라고 원망하는 일은 용서를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일을 무시하고 반박하는 원망을 할 때는 용서가 없었던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소망 있는 길로 인도하는 동시에 시련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시련을 통과할 때 조심이 있는 사람을 보호하고 지켜서 목적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 있는 사랑이다. 다시 말하면 소망 있는 길에서 겪는 시련은 하나님이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일이 있는 동시에 통과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험이란 소망 있는 자기 백성에게 더 진보를 주는 동시에 완전한 것을 이루는 인격을 구성하는 방법이다.
41. 승리를 이루는 기도
- 행 4:23~37 -
서 론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들어서 승리를 이루는 열매를 가져올 때 대적의 세력을 강퍅케 하는 동시에 당신의 종들을 더 강하게 일으켜 승리를 이루도록 역사하는 것은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 기도가 있지 않고는 하나님은 역사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는 나라를 좌우하고 있는 신의 본부니 신의 본부의 활동은 땅에 있는 종들의 강한 기도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제 승리를 이루는 기도에 대한 비결을 본문에서 배울 수 있다.
1. 일심 호소 (23~24)
일심이라는 것은 기분 좋고 환경이 좋을 때 있는 것이 아니다. 원수에게 죽게 될 난관에 부딪히고 전도문이 꽉 막혀서 어찌할 수 없는 가운데 그들은 조금도 동요를 받지 않고 낙심이 안되고 더욱 일심으로 소리를 높였던 것이다. 만일 어떤 교회가 교회 지도자를 어떤 법관이 잡아다가 때리고 전도하지 말라는 일이 있을 때 겁을 내고 그 교회가 일심으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면 이는 하나님이 있는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종이 누가 환영을 하면 힘을 내고 박해하고 어떤 교권이 탄압을 할 때 용기를 잃으면 하나님의 종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 세력에 굴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면 하나님은 사람만도 못하니 무슨 필요가 있는가 할 것이다. 정권, 교권을 초월한 힘을 하나님께 받는 호소가 있어야 되는 것이다. 마귀가 강할 때 더 일심 단결해서 하늘을 우러러 호소하는 일이 없이 승리를 볼 수 없는 것이다.
2. 예언을 기억하는 기도 (25~26)
그들은 무서운 박해를 당할 때 시편 2편에 이방이 분노해서 그리스도를 대적한다는 말씀이 응한다는 사실을 볼 때 필연코 승리는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대적이 일어나는 것이 예언의 말씀이 응하는 것이라면 시온산 정부가 이루어지는 것이 필연코 있을 것이라는 굳은 신앙의 힘을 소유했던 것이다.
금일의 붉은 세력이 이 땅 3분지1을 점령하고 세계를 침투해 나오고 마귀의 앞잡이 거짓 선지의 세력이 교회를 침투하는 것이 예언이 이루어지는 사실이라면 동방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일어나서 원수를 짓밟게 하겠다는 것을 믿고, 필연코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호소해야 될 것이다. 즉 원수가 강하여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님 편이 승리한다는 말씀도 문제없이 될 것은 사실이다.
3. 하나님이 하감 한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기도 (29)
우리는 사람이 나를 안다는 것보다도 무소불능 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하감 하시되 내 양심을 아시고 우리 사정을 더 분명히 아시고 우리 자체가 우리 앞길을 모르나 하나님은 미리 하감 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양을 인도하는 목자는 앞길을 다 보면서 인도하는 것이다. 양은 아무리 위험해도 따라만 가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아신다는 마음에서 불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4. 하나님이 역사하면 된다는 마음에서 기도한다 (30)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하느냐 안 하느냐는 것을 문제시 할 것이니 당장 위험하다 또는 소망이 없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니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역사하면 승리는 필연코 있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결 론
이와 같은 기도가 있는 교회에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는 큰 역사가 떨어졌던 것이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나 아울러 큰 축복이 왔던 것이다. 인간의 어느 정권이 이 교회를 다치지 못할 큰 단결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31~35). 우리의 뭉쳐지는 힘이란 기도의 열매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교회의 경제가 곤란하다고 압력을 받는다든지 또는 교인이 합심이 안 된다고 낙심한다는 것보다도 나의 기도가 부족하다는 것을 눈물겹게 깨닫는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기도의 열매가 아니고는 아무런 가치를 세상에 발휘할 수가 없을 것이다. 앞으로 세계를 정복할 힘은 기도라는 것을 계5:9~10에 말했다. 승리의 기도가 있는 교회로 끝을 맺는 새 시대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42. 기도 생활의 일곱 가지 요점
- 골 1:9~12 -
서 론
우리는 기도하는 것은 진리의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을 기독신자의 기도라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신자가 기도를 하지만, 기도의 요점을 모른다면 이교도의 기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기도 생활에 있어서 떠날 수 없는 요점을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알 수 있다.
1. 지혜와 총명의 하나님의 뜻을 알 것 (9)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기도의 요점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을 아느냐에 요점이 있다. 무엇을 달라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 아닐 수 없으나 먼저는 지혜롭고 총명스러운 하나님의 뜻은 어떠한 뜻이라는 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불타야 될 것이다.
2. 범사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데 요점이 있어야 됨 (10상반절)
만일 어떤 사람이 기도할 때 자기를 기쁘게 해보려는 욕망이 있다면 이 기도를 통하여서는 큰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범사에 기뻐하는 일은 우리 생각밖에 더 미리 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범사에 주님을 기쁘게 하려는 기도라면 범사에 열매가 있을 것이다.
3. 선한 일에 열매를 맺으려는 것 (10중반절)
우리는 시작이 좋다 하더라도 열매가 없다면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니 열매를 맺게 하는 이는 하나님이신 줄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것뿐이다.
4. 지식을 자라나게 하기 위한 것 (10하반절)
신앙은 지식을 떠난 신앙은 미신에 가까운 것이니 이 지식이라는 것은 과학적인 물체의 요소를 아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다. 우리의 인격 향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나는데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5. 능력으로 능하게 되는 일이다 (11상반절)
현재 과학자는 과학만능을 의지하지만, 기도의 사람들은 물체 밖에 하나님의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되는 것을 목적하는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이 오는 증거가 될 것이다.
6. 모든 일에 오래 참음에 이르는 것 (11하반절)
사람의 인격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오래 참음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초인간적인 큰 역사는 오래 참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것은 기도가 아니고는 있을 수가 없다.
7. 성도의 기업을 얻기에 합당하게 되는 것 (12)
우리가 인간의 어떠한 기업을 얻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물며 성도의 영원한 기업을 얻기 위해서는 합당하게 하는 이는 하나님인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뿐이다.
결 론
기도는 사람을 완전케 하는 생명선이 되는 것이니 아무리 저 편에 올 만한 요소가 있어도 통하는 선이 없다면 이 편으로 올 수가 없음같이 영원하고 완전한 신의 세계에서 인간으로 옮겨지는 일에 그 선은 기도밖에 없는 것이다.
43. 열매 있는 기도의 세 가지 요소
-요11:40~44-
서 론
하나님께서 무슨 일이든지 기도를 통하여서만 역사하는 것이니 어떠한 기도를 해야 하나님은 역사하신다는 것을 본문에서 세 가지로 배울 수 있다.
1. 이미 들으신 것을 감사하는 기도 (41)
하나님께서는 일을 나타내기 전에 먼저 뜻하시고 계신 경륜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택한 자에게 어려운 일이 없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게 하시는 것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받고자 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사로를 향하여 기도할 때에 먼저 감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하든지 기도할 때에 먼저 하나님의 뜻과 경륜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도할 것이다.
2. 항상 들으시는 줄 아는 것이다 (42상반절)
하나님은 예지와 예정이 계신 반면에 그 뜻을 이루는 것은 그 때 그 때에 따라서 호소하는 기도를 요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호소 없는 일에 역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운 법이기 때문에 예를 든다면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 백성이 단결하여 호소하는 것을 따라 움직이는 일이 있는 것과 같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호소가 없다면 그 일을 막기 위하여 법에서 출동할 수 없는 것과 같다.
3. 기도는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위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42하반절)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려내기 위한 기도는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만일 기도하는 정신이 대중적인 유익을 목적하지 않고 개인적인 욕망을 가진다면 큰 역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무소불능의 힘을 나타낼 때 인간은 절망 낙망의 슬픔을 머금고 있는 자리에서 영광을 받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큰 뜻이 되는 것이다.
44. 희생과 열매
- 요 12:23~33 -
서 론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희생과 열매라는 떠날 수 없는 관계가 있게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만물은 사람을 위하여 희생을 당하도록 창조한 것이다. 희생자가 없다면 생명을 이 땅에서 보존할 수 없다는 것이 자연계의 진리다. 간단히 말하면 물이 희생을 당하지 않으면 사람이 목마름을 면할 수 없고 식물의 열매가 희생하지 않으면 사람은 배고픔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세밀히 말하면 식물이나 동물도 서로 희생이 있음으로 식물도 열매가 있고 영계에 대한 진리도 희생이 있음으로써만 열매가 있다는 것을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1.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린다고 말했다 (25)
이것은 이 땅에서 진리를 대적하는 원수가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 득죄하므로써 세상은 극도로 악화된 것이므로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의를 위하여 싸우는 자를 영생하도록 보전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영생을 아무에게나 줄 수 없고 희생적인 충성과 진실이 있는 자에게만 주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자기 목숨을 ‘바치느냐’‘안 바치느냐’ 라는 것을 알아보려는 모략적인 시험을 주는 것이다.
2.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니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종이 된 그 정신을 가진 자라야 주님을 따라 간다는 것이다 (26)
만일 어떤 종이 자기가 섬김을 받아 보려는 정신이 있다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적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 아들을 섬기는 자들을 아무리 죄가 있어도 귀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의식이 아니요, 양심이니 이 양심은 남을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섬기는 양심이다. 섬긴다는 것은 희생이 따르지 않고는 외식이 될 것이다.
3. 인간 최대의 영광은 희생에 있다는 것이다 (27~28)
그러므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하늘을 향해 호소하기를 “아버지여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할 때에 하늘로부터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음성이 우뢰같이 들렸던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희생하므로써 영광스러워 진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와서 십자가의 희생이 있으므로 영광스럽게 된 것이니 이것은 최대의 영광이다. 우리는 최대의 영광은 진리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데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결 론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볼 때에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되 자기를 위하여 희생적인 각오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검토한 후에야 사람으로 열매를 맺도록 역사를 해주는 것이 공의가 있는 주님의 사랑이다. 만일 그리스도를 따른다 하면서 자아를 희생하는 것이 없다면 이 사람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쭉정이가 되고 말 것이다.
45. 능력의 역사를 따라 수고하자
- 골 1:24~29 -
서 론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한 역사는 능력이 없이 세울 수 없는 것이요, 능력이 없이 발전할 수 없는 것이요, 능력이 없이 복음을 전파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능력의 역사는 어떤 곳에서 역사하느냐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괴로움을 기쁘게 알고, 나아가는 종을 통하여 (24)
하나님은 무소불능의 능력이 있지만, 아무 사람이나 아무 곳에서 역사하는 것은 아니다. 능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가 아니고, 인간이 할 수 없는 가운데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는 자에게라야 있을 것이다.
2.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말씀을 이루려 할 때 (25)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경륜이 이루어지기 위한 말씀을 따라 역사하기 때문에 말씀을 이루려 하는 것이 없는 자에게는 조금도 있을 수가 없다. 이는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3. 감추었던 비밀을 나타내기 위하여 (26)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은 그 속에 숨은 비밀이 있는 것이니 이 비밀을 인간이 알도록끔 하는 데는 능력의 역사가 없이는 안 되는 것이다. 비밀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만 나타내기 위하여 역사하는 것이다.
4. 영광의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27)
영광의 소망을 이루는 것은 인간의 힘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능력의 역사가 아니고는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 바라는 영광은 인간의 노력으로써 되는 일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영원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소망은 인간의 힘이 조금도 가입될 필요가 없고 전혀 능력의 역사만으로 되는 것이다.
5. 지혜로 남을 가르치는 자에게 역사한다 (28)
하나님은 능력으로 역사하시되 어리석은 자에게 역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지혜가 따르는 동시에 완전한 것을 이루는 능력이 역사하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동시에 인간의 힘을 다하는 수고도 필요한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능력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기가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것이 없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다. 또는 자기 힘으로 된다고만 생각하고 능력을 무시한다면 이것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이 될 것이다.
46. 하나 되게 하는 역사
- 요 17:11~26 -
서 론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도 세계 인류가 하나 되게 하여 사상, 정신, 중심 생활 정치를 다 통일시켜 세상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하나가 되게 하는 역사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본문을 읽음으로써 알 수 있다.
1. 보전하여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11)
이 땅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대적이 많으므로 특별히 주님께서 보전하여 주는 일이 아니라면 하나가 될 수 없다. 예를 들면 선한 목자는 양을 하나같이 보전할 책임이 있는 것과 같다.
2. 기쁨이 충만케 하므로 하나가 되게 한다 (13)
우리 주님은 어떤 억압적인 정책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사람마다 기쁨이 충만하여 자동적인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3. 진리로 거룩하게 하므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17~19)
하나님은 진리를 하나같이 알고 믿게 하는 동시에 진리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역사가 있다. 사람이 거룩하지 못하므로 하나가 못되고 거룩하여짐으로써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4. 영광을 주어서 하나가 되게 한다 (22)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믿는 자에게 주고 싶어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영광을 받는 자리에서 자동적인 하나가 되는 것이다.
5.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한다 (23)
하나님은 온전케 만들어서 알곡이 되게 하는 동시에 알곡된 자로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아직까지 기독교가 하나를 이루지 못한 것은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 까닭이다. 온전이라는 것은 인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받는데서 온전을 이루는 것이다.
결 론
하나라는 것은 최대의 목적을 이루는 열매이다. 아무리 역사적으로 강대국이 있지만 그 정권이 하나를 이룬 것은 전혀 없다. 아직 세계적인 하나를 이루는 역사는 그리스도의 역사밖에 없는 것이다.
47. 온전한 것을 이루는 사랑
- 요일 4:9~12 -
서 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온전을 이루어 주시는 것은 당신이 먼저 자진하여 인생을 찾아오는 사랑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온전이 아니요,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온전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사랑도 있고,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는 사랑도 있으니 생명이 있는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형제를 사랑한다 하여도 하나님께로 온 사랑으로 준 것이 아니라면 그 속에는 생명을 주는 열매는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온 사랑을 먼저 받고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한다면 다음과 같은 열매가 있을 것이다.
1. 성령이 역사해 주는 것이다 (13)
성령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주기 위하여 역사하는 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께로 오는 사랑이 없는 교회라면 성령은 계시지 않는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하되 하나님께로 받은 사랑에 녹아진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면 성령은 강하게 역사할 것이다.
2. 하나님께로 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는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한다 (17)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그 사랑의 법칙에 의하여 베풀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종이 남을 사랑한대도 인간적인 어떤 편파적인 사랑을 가진 종이라면 심판 날에 설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심판이라는 것은 네가 참으로 남을 사랑했느냐 안 했느냐는 것으로 심판을 내리기 때문이다(마18:35).
3. 이와 같은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면 환난이나 사망이나 그밖에 아무런 것도 그에게 두려움을 줄 수 없을 것이다 (18)
이것은 왜냐하면 모든 재앙은 사랑을 떠난 자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 사랑 속에 있는 자라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보호와 축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결 론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며 형제를 미워한다면 이것은 자동적으로 외식의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한다면 형제를 미워할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48. 축복 받는 비결
- 사 58:9~12 -
서 론
하나님은 복의 근원인 동시에 복을 주고 싶어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나 아무런 조건 없이 복을 준다는 것은 아니다. 이제 어떤 자가 되어야 말세에 큰 축복을 받는다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1. 버릴 것을 버려야 한다 (9)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해버려야 한다. 이것은 무거운 멍에를 자기가 벗고 남에게 메우려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남의 잘못을 볼 때에 고치려는 마음이 없고 손가락질 하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허망한 말로 남을 해치려는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기도하고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여도 이 세 가지가 있는 자는 도저히 응답을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축복을 받으려는 것도 마땅한 일이지만 버릴 것을 먼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2. 주린 자에게 심정을 동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10상반절)
만일 남의 주린 사정을 보고도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양심이라 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남의 딱한 일을 볼 때에 마음이 동하여 하나님을 향할 때 하나님은 그 심정을 보고 움직여 주시는 것이다.
3.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는 일이다 (10하반절)
우리는 타인의 심정을 알아주는 것이 첫째 할 일이다. 아무리 남에게 육적으로 도움이 있다 하여도 그 마음을 만족케 하는 일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기뻐하시지를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의 종이 양떼의 마음을 만족케 못하고 괴롭게 한다면 자동적으로 흑암이 올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은
첫째: 항상 인도하되 심령의 만족을 받게 하는 것이다. 만일 모든 것이 잘되는 것 같으나 영혼이 만족치 못하는 일이라면 이것은 하나님께로 오는 축복일 수 없다.
둘째: 뼈가 견고케 되는 것이니 이것은 소성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11). 하나님의 축복은 피곤에 잠긴 것이 아니고 정상적인 샘물같이 솟아오르는 일이 있는 것이다.
셋째: 황폐한 곳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이것은 아름다운 새 시대를 가르친 것이니 완전한 축복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축복 받은 종을 통하여 아름다운 새 시대를 건설할 자를 일으키게 된 것을 완전한 축복이라 한 것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화려한 생활이 있다 하여도 이것은 황폐될 날이 있을 것이다.
49. 소망과 성결
- 요일 3:1~3 -
서 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적에 특수한 것은 소망이다. 소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 외에 동물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로 소망을 잃고 보니 금수보다 더 악해 진 것이 인간의 타락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신 것은 소망을 잃은 인생에게 산 소망을 주는 동시에 자동적인 성결이라는 인격을 가지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을 기독교의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소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된 것이다 (1)
우리의 소망은 영생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데서부터 싹트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의 씻음을 받을 때부터 확실한 증거로 받은 것이다(롬8:15~17). 증거라는 것은 성신이 오셔서 아버지를 찾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생의 기업을 상속할 권리를 받은 것이다.
2. 주 예수님과 같이 될 소망이다 (2)
우리는 자녀 된 것으로만 끝을 맺는 것이 아니고 자녀 된 자로서의 자기가 할 직책을 다할 때 아버지께서 큰 사명을 맡기어 역사하도록 하되 예수님과 동등한 왕권을 받도록 해준다는 것이 종 된 자의 소망이다. 첫째 아담과 같이 죽게 되었던 몸이 예수님의 몸과 같이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3. 무엇이든지 구하면 받는다는 소망이다 (22)
무엇이든지 구하면 받는다는 소망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특권이 있으니 요청을 얼마든지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풍부한 소망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주마는 약속이 있는 동시에 구하는 자에게만 준다는 것이니 하나님 앞에 담대히 구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결 론
하나님께서 소망을 주지 않고 깨끗하게 살라고만 한다면 이것은 세상 도덕적인 의식적인 종교에 불과한 것이다. 완전한 소망을 주므로서 산 생명의 생활이 있는 행동에서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양심 중심 사상 생활이 깨끗해지는 것을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성결이라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 신자로서 중심에 불결한 마음을 고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사람은 완전한 소망을 얻은 자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50.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하는 생활
- 빌 4:4~9 -
서 론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다. 참된 평강은 하나님 한 분만이 주관하는 것이다. 인생은 범죄하였으므로 참된 평강을 잃었으나 하나님은 참된 평강을 인간에게 주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날 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였다.
이제 어떠한 자에게 평강이 함께 하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읽어서 알 수 있다.
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자이다 (4~5)
우리는 항상 기뻐하는 일이 없다면 그밖에는 사단이 기회를 타는 것이니 마음이 항상 기뻐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하는 것이다. 만일 관용심이 없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과 하등에 관계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용서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2.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기도하는 자이다 (6~7)
우리는 염려하는 일이 없음으로써 평강을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염려되는 일을 하나님께서 해결시킬 것을 믿음으로써만 평강이 함께 하는 것이다. 만일 염려되는 일을 당할 적에 하나님께서 해결할 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3. 말씀을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는 자에게 (9)
우리는 아무리 배우고 들었다 하더라도 그 것을 실천에 옮기지 않은 자는 평강을 소유할 수 없을 것이니 말씀을 받고 듣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행하는 자에게 평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우리가 평강을 바라는 것보다 평강이 함께 하는 생활을 가르쳐서 하나님이 동거하는 것으로 알게 된다. 어디 있든지 이 평강이 같이하는 곳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옥중이나 황폐한 빈들에서도 그는 평강을 누리게 될 것이다.
목차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