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에스겔 설교

   

 

     예레미야  설교

만국 위에 세운 예레미야 (렘 1:4-10)

복 받는 길과 화 받는 길 (렘 7:21-28)

 

에스겔 설교 

궁창 밑의 역사와 궁창 위의 역사 (겔 1:22-28)

 

 

 

예레미야 설교

 

만국 위에 세운 예레미야 

( 렘 1 : 4 - 10 ) 

 

서 론 

하나님께서 육적 이스라엘이 말기를 당하여 바벨에게 먹힘을 당할 일을 앞에 놓고 눈물의 선지 예레미아를 부를 때 “너를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무너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고 하시었다. 이것은 예레미야 한 사람을 가르친 말이 아니고 영적 이스라엘이 바벨화 되는 심판기에 사명자를 가르친 예언적인 표증이라고 볼 수가 있다. 우리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명령할 때 하신 일은 우리에게 해당된 것임을 뜻깊이 알아야 할 것이다. 

 

1. 태에서 나기 전에 구별했다 (5)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되는 일은 사명자가 나기 전에 말씀한 대로 사명자를 그 위치에서 탄생케 하는 것이다. 말세에 동방 땅끝에 종을 세운다는 일도 땅끝에 종이 나기 전에 미리 말씀한 것이다. 말세의 종이 어머니 뱃속에서 나기 전에 예정하신 섭리가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속에서 이 땅에 출생되었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할 것이다. 

 

2. 예레미야의 겸손 (6-7)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적에 마음이 겸손할 대로 겸손했던 것이다. “나는 아이라 말할 줄도 알지 못하나이다.” 하는 대답을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 크게 쓰여질 종이 되려는 사람은 자기에게 역사가 임할 적에 마음이 더 겸손해지며 자신이 없는 생각이 나야만 된다는 것은 자기에게 역사가 임할 적에 자신이 만만한 생각이 난다면 이 사람은 아직까지 만국을 위하여 쓸 만한 종이 되었다고 볼 수가 없다. 이 사람은 한 번 넘어지고야 일어날 사람이다. 예수를 용기 있게 따라가던 제자들도 자기가 서로 높아지겠다고 생각이 들 때 다 한번 넘어지고 실패를 당한 후에야 일어났던 것이다. 

 

3. 순종할 것뿐이다 (7)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 것이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크게 쓰여질 종은 하나님께 순종할 것뿐이라는 것 이외는 딴 것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자기의 주관과 자기의 포부를 앞에 품고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이 사람은 만국을 위하여 세우는 종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순종을 제사보다 낫게 여긴다는 것은 이것을 두고서 말한 것이다. 

 

4. 담대할 것이다 (8)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구원하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니 나는 두려울 것이 없다는 담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원수를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종은 만국 위에 설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심하는 불완전한 신앙이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 임해야 될 것이다 (9) 

여호와께서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며 “내 말을 네 입에 두노라”고 하시었다. 만일 어떤 종이 입에 말의 실수가 많고 횡설수설하는 입이라면 만국 위에 설 종은 못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입에 임함으로서만이 세계적인 사명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 론  

이러한 종이 된 자라면 파괴할 수 있는 권세도 있고, 건설할 수도 있는 권세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은 말세 종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국부적인 활동은 하였지만 만국 위에 나선 종은 실지 아니었다. 예루살렘 거리를 다니면서 울던 예레미야였다.

예루살렘 거리에 빨리 왕래하며 찾아봐도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했다. 이것은 예언적인 일이 된다(렘5:1). 그때는 예루살렘에만 성전이 있으니 예루살렘에서 그는 울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세 종을 만국 위에 교회가 섰으니 만국을 위하여 외치는 일을 해야만 될 것이다. 예레미야는 육적 성전이 황폐될 것은 슬퍼했지만 말세 종은 영적 교회가 황폐될 것을 보고 슬퍼해야 할 일이다. 

 

 

복 받는 길과 화 받는 길 

( 렘 7 : 21 - 28 ) 

 

서 론 

가장 악한 일은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고도 짐짓 그 말씀을 순종치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보다도 하나님을 안다는 백성이 이 말씀을 순종치 않을 때에 이것은 짐짓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니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된 것이 축복이 아니요, 복받는 길을 가느냐, 화 받는 길을 가느냐 하는 것이 큰 문제이다. 이제 복 받는 길과 화 받는 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증거한다. 

 

1. 복 받는 길 (21-23)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라고 하여서 무조건 복을 주신다면 이것은 공의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인도를 받아 나왔지만 복을 받은 자는 심히 적고, 그밖에 대중적으로 큰 화를 받게 된 것은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복 받는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첫째 : 제사보다도 순종이 필요하다(21-23상)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도 순종하는 자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순종치 않으면 하나님은 역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명령을 내려 그 명령을 순종하는 자에게 역사하신다. 제사라는 것은 순종하기 위한 목적에서 드리는 것이니, 제사를 드리고도 순종치 않는다면 제사의 본의를 떠났기 때문에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희생의 제물이라는 것은 부족한 인생이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것으로 드리는 것인데, 순종이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제사를 받을 필요가 없게 된다. 아무리 독생자가 십자가에 죽어서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 하여도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예수의 십자가의 제사라는 것은 효과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제사가 순종하는 자에게만 응답을 나리는 것은 죄를 위하여 죽은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자에게 효과를 줄 수 없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만 효과를 주시는 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제사이다. 구약 시대에 제사를 드려도 순종치 않는 자는 그 제사가 무효가 된 것 같이 지금도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주님의 십자가를 받는다 하여도 그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이 무효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자가 십자가를 바로 알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나는 네 하나님이라는 응답을 나리시므로 하나님의 역사가 항상 같이 하는 것이다. 

둘째 : 귀로 듣는 것보다도 모든 길로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23하) 

말씀을 듣고라도 그 길로 행치 아니하면 들은 것이 무효가 될 것이로되 듣고서 그 길로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복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복을 받으므로 행한다는 것보다도 괴로워도 그 말씀대로 따라오는 자를 절대로 보호하시고 복을 주시되 만족히 주시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 받는 길은 제사보다도 그 말씀을 듣고 그 길로 행하는 것이다.

제사라는 것은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것이 제사라면 우리 성도의 생활은 말씀대로 따라가는 것이 생활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백성에게 주시되 말씀대로 행하는 자에게 주는 것이 공의의 역사라는 것이다. 만일 실천이 없어도 복을 준다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아무런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에 귀하다는 것이다. 

 

2. 화 받는 길 (24-28)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 그 말씀을 청종치 않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시키는 행동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그 말씀을 청종치 않을 때에 용서 없이 화를 내리는 것이다. 이제 화 받는 길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첫째 : 악한 마음의 꾀와 강팍한대로 행하는 일이다(24)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이 악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을 때에 하나님의 역사가 떠나가고 악한 마귀가 대신 들어와서 강하게 역사하기 때문이다. 마귀에게 속한 사람보다도 하나님의 자녀가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면 마귀가 더 강하게 마음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옛날보다 더 악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군대가 자기의 영토보다도 남의 나라 영토를 점령하게 될 때에 더 강하게 가는 것과 같다. 마귀에 속한 사람에게는 마귀가 발악적인 행동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을 순종치 않을 때에는 마귀가 발악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씀을 순종치 않는 백성은 악한 마음의 꾀와 강팍이 있게 되므로 하나님과 대적이 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 참된 선지의 말을 거역하는 일이다(25-28) 

육적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바벨론에게 멸망할 때까지 참된 선지의 말을 듣지 않는 백성이었다. 거짓선지의 말은 잘 들으면서도 참된 선지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을 받은 것이다. 이와같이 만일 오늘에 교회가 거짓선지의 말은 듣기를 좋아하고 참된 선지의 말은 듣기 싫어한다면 이것이 화 받을 길이다. 참된 선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든지 말든지 그대로 전하되 조금도 생명을 아끼지 않는 것이니 누구든지 참된 선지의 말을 순종치 않는 자는 큰 화를 받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말씀을 순종치 않을 때에 버리게 되는 것은 하나님은 말씀대로 심판하는 일이 없이는 마귀를 이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들어 쓰시는 것은 말씀대로 순종하고 따라 오는 자에게 말씀대로 복을 주고, 말씀대로 순종치 않고 따라 오지 않는 자에게 말씀대로 화를 주므로 완전한 나라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양의 피로 애굽에서 해방을 받은 것은 기독교가 세계에 전파되는 해방 운동을 뜻했고, 말씀에 순종치 않는 자를 원수의 나라에게 먹힘을 당하게 하고 순종하는 자로 원수를 이기고 예루살렘을 복구하게 한 것은 기독교 종말에 심판과 새시대를 교훈한 것이다. 

 

결 론 

영혼 구원은 죄 사함을 받는데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복을 받는 것과 화를 받는 것은 선지의 예언을 순종하고 순종하지 않는데 있다. 우리는 복을 받느냐, 화를 받느냐 하는 시험기에 처해 있는 것이니 말씀을 떠는 마음에서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지상 왕국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궁창 밑의 역사와 궁창 위의 역사 

( 겔 1 : 22 - 28 ) 

 

서 론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의 한 사람인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줄 때에 궁창 밑의 역사와 궁창 위의 역사를 보여 주셨다. 사람은 누구나 다 궁창 밑의 역사가 무엇이며, 궁창 위의 역사가 무엇인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창1:6-8을 보면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을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된지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고 정하시었다.” 고 하였다. 그러므로 궁창 위의 역사와 궁창 밑의 역사가 어떻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궁창 밑의 역사 (22-26) 

인간의 세계와 하나님의 나라는 궁창으로 한계가 정해졌다. 궁창 아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요, 궁창 위에는 하나님께서 계신 세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궁창 아래의 모든 활동은 생물을 통하여 하게 하셨다. 본장의 20-21을 보면 “어디든지 신이 가려 하면 생물도 가려 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신이 그 바퀴 가운데 있음이라 저들이 행하면 이들도 행하고 저들이 그치면 이들도 그치고, 저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신이 바퀴 가운데 있음이더라” 하였다.

이것을 본다면 하나님의 역사에는 반드시 생물체가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퀴 같은 것이 돌아가는 모양이 나타난 것은 우주 안의 대 자연계를 움직이는 힘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안에 생기가 있는 것은 생물체의 힘에 의하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주 안의 생기라는 것은 자연히 있는 것이 아니고, 생물체의 힘이 바퀴 같이 돌아가는 그 역사에서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든 생물이 존재할 수 있고, 자연계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4장의 네 생물과 같다.

생물체의 역사가 궁창 밑에서 날개와 같은 힘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이 보여진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대 자연을 움직이며, 삼라만상의 되어지는 일을 움직여주는 것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께서 입히시고 공중에 나는 새도 하나님께서 기르신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백합화를 입히고 새를 기른다는 것이 아니고, 생물체의 활동을 있게 해서 식물계나 동물계까지 그 움직이는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다. 오늘이라도 궁창 아래의 생물체의 역사가 없어진다면 이 세계는 아무런 활동이 있을 수가 없다. 이 활동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역사이다. 

 

2. 궁창 위의 역사 (26-28) 

“보좌의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과 같은데, 남보석 같은 푸른 광채는 얼마든지 살려줄 수 있는 생명의 근본이 보좌에서부터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쇠와 같아서 그 속과 그 주위가 불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할 진노의 형편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은 광채가 있는 것은 불변의 언약을 뜻한 것인데, 이것이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이라고 한 것은 얼마든지 살려줄 수 있는 생명의 자체가 되시며, 심판하여 없이할 공의의 자체가 되시며, 불변의 언약인 진리의 자체가 되시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므로 보좌 위의 역사는 영원한 영생의 생명으로 진노의 심판으로 불변의 약속의 말씀으로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말씀을 주시고 역사하시되 순종하면 생명의 역사를 부어 주시는 신이시요, 순종치 않으면 진노의 역사를 부어 주시는 신이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말씀을 순종하는 자라면 변치 않는 언약의 말씀대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푸른 빛 같은 생명의 역사를 풍성하게 주시는 것이다. 

 

결 론 

사람이 궁창 아래의 활동만 알고, 궁창 위의 활동을 모르고 있다면 동물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자라고 본다. 유물론자들이 네 생물의 활동에 의하여 되어지는 자연계를 스스로 있는 물체의 힘이라고 본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생각이다. 이것은 산에서 사는 돼지가 도토리를 주워 먹으면서, 이 열매가 위에서 떨어진 것을 모르고, 땅에서 난 줄 알고 땅을 파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유물론자들은 궁창 위의 활동이 있어서 궁창 아래에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우리는 궁창 위의 활동과 궁창 아래의 활동을 바로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