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인의 깊은 생각과 실천 (마1:18~25)
2. 복된 가정을 이룬 비결 (마1:18~25)
3. 신앙노선의 차이점 (마2:1~23)
4. 주의 인도를 따르는 복된 가정 (마2:13~23)
5. 성신의 인도로 받는 마귀시험 (마4:1~11)
6. 제일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 (마5:11~12, 계18:20, 19:6~9)
7. 아버지의 온전하신 것 같이 온전한 자가 되자 (마5:43~48)
8. 마음의 위치를 바로 두는 자가 되자 (마6:19~21)
9. 눈이 밝은 사람이 되자 (마6:22~24, 7:1~5)
10. 한 날의 괴로움을 가치있게 살자 (마6:25~34)
11. 한날에 수고가 족한 생활 (마6:19~34)
12. 참된 기도의 열매 (마 7:1~12)
13. 기도 생활에 있어야 될 원칙 (마 7:1~14)
14.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의 법 (마7:7~12)
15. 두 가지 인도와 두 가지 길 (마7:13~14)
16. 열매를 보고 알아야 할 일 (마7:15~21)
17. 열매와 심판 (마7:1~21)
18. 불법을 행하는 자의 비극 (마 7:22-23)
19. 지혜로운 일과 인간 종말 (마7:24~27)
20. 세례요한의 인격과 축복 (마11:2~15)
21.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자 (마11:25~30)
22. 주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자 (마11:28~30)
23.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죄 (마12:22~37)
24. 허락이 있어야 아는 비밀 (마13:10~17)
25. 깨닫는 자의 열매 (마13:18~23)
26. 택한 자를 위한 천사의 역사 (마18:10)
27. 땅위에서 합심할 일과 하늘의 응답 (마 18:15~20)
28. 합심된 교회가 되자 (마18:15~20)
29. 위대한 인격은 섬기는 자이다 (마20:20~28)
30. 겸손한 왕 (마21:1~10)
31. 인간 종말의 미혹 (마24:10~14)
32. 참는 자가 받는 구원 (마24:10~14)
33.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의 복 (마24:42~47)
34. 지혜로운 일과 어리석은 일 (마25:1~13)
35. 승리의 기도 (마26:36~46)
36. 재림을 증거하는 예수의 고난 (마26:57~68)
37. 버림받은 예수 (마27:27~46)
38. 사명과 인격 문제 (마28:11~20)
의인의 깊은 생각과 실천
- 마 1:18~25 -
하나님의 사람은 어려운 일과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가 안되는 일, 답답한 일, 원망스러운 일 이러한 일들을 당해도 깊이 생각을 하는 일이 있을 적에 하나님은 역사하셔서 실천이 잘못되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제 의로운 요셉의 깊은 생각과 실천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1. 요셉의 깊은 생각
요셉은 자기와 정혼한 처녀 마리아가 잉태하였다는 말을 들을 적에 그는 경솔히 움직이지 않고 깊이 생각을 하여 가만히 끊고자 하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마리아가 처녀 몸으로 잉태했다는 것은 인간이 말해 보았던들 누구에게 인정을 받을 일은 못된다. 왜냐할 때에 사람이 성령으로 잉태된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 비판해 볼 때 이것은 도저히 이론이 서지 않는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의 아내 될 마리아의 신앙을 존경하는 동시에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가만히 끊고자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어려운 일이 올 때 경솔히 움직인다면 실패 중의 실패가 될 것이다. 요셉은 하나님을 향하여 깊은 묵상도 많이 하여 보고 이것을 어떻게 하면 될 것이냐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마리아의 잉태를 이해하도록 지시했던 것이다.
왜냐 할 때 이 일은 하나님만이 보증할 일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급히 천사를 청년 요셉에게 보내셨던 것이다. 요셉은 만족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역사적인 하나님의 섭리가 자기 가정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깊이 믿었을 것이다. 이것은 성경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오히려 더 힘을 얻고 기쁨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2. 요셉의 실천
요셉은 서슴치 않고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동할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이전보다도 아내 될 마리아를 더 존경하는 마음으로 모시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마리아의 거룩한 몸을 조금도 침범한 일이 없이 해산하기를 기다리며 친히 봉사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예지와 예정이 계시기 때문에 요셉 같은 의로운 청년을 마리아의 남편으로 정했던 것이다. 비록 목수의 한 사람이었으나 하나님 앞에는 의로운 청년이었다. 그야말로 인간 사회가 볼 때에는 조롱거리가 된 불행스러운 가정 같으나 하나님 앞에는 역사적인 축복을 받은 가정이 되었던 것이다.
결 론
우리는 기독교의 알파가 되는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을 오메가 될 말세의 성도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를 가져야 한다. 말세 복 받는 가정이 되려 할 때 억울한 일, 원통한 일, 답답한 일, 고생스러운 일, 조롱 받는 일, 훼방을 받는 일, 이러한 것들이 요셉의 가정에 있던 것 같이 우리에게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니 하나님을 중심하는 깊은 생각과 실천이 있어야만 될 것이다. 깊은 생각과 지혜로운 행동이라는 것은 전화위복이라는 큰 변동을 일으키는 열매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복된 가정을 이룬 비결
- 마 1:18~25 -
가장 복된 가정은 그리스도께서 탄생한 가정이라고 보게된다. 예수님께서 자라나 역사하시므로 세계 인류를 구원하는 대 사업의 시발점이 되는 가정은 인간이 볼 때에 빈약하고 아무런 권리가 없는 목수의 가정이었다.
그런데 어찌해서 이와 같이 복된 가정이 이루어졌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비결이 본문에 있다.
1. 성남 성녀로 이루어진 가정 (18~19)
본문에 마리아에게는 성신으로 잉태가 되었고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였다. 거룩한 성신의 잉태가 이루어졌고 의로운 요셉에게 복된 여종을 아내로 주었던 것이다. 가정이라는 것은 먼저 거룩한 믿음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축복의 가정이라는 것은 물질이 많은 것보다도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의 신이 같이 하는 가정이니 하나님께서는 그 가정을 비롯하여 대 사업을 개척하시는 것이다.
부부는 만복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거룩한 믿음의 토대를 삼은 부부가 만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복된 가정을 이루므로 이스라엘 왕국이 이루어졌고 요셉과 마리아가 복된 가정을 이루므로 세계적인 대 종교를 이루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은 거룩한 남자와 여자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일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성남 성녀의 결합이 없이는 아무런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가 되었다하더라도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면 마리아에게는 큰 불행을 가져올 위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왜냐하면 정혼하고 결혼하기 전에 잉태가 되었다는 것은 남편 될 요셉이 큰 노를 발할 일이기 때문이다. 남편은 여자가 자기 몸에 동침이 없이 잉태가 되었다 할 때에 아무리 온유한 자라도 분 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복된 가정을 이루게 된 것은 다음과 같다.
2. 주의 천사가 도와주는 가정 (20~21)
인생이라는 것은 알지도 못하고 일을 바로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모르는 일을 알려 주기도 하시고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도 해 주시고 항상 택한 자에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세상 학식이 풍부한 사람끼리 부부를 이루었다하여도 복된 가정이 될 수는 없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주의 천사를 보내어 도와주는 일이 있어야만 복된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노아의 가정이 복된 가정이 된 것도 아브라함의 가정이 복된 가정이 된 것도 다 하나님의 역사가 천사를 통하여 도와주기 때문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무리 믿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하더라도 천사의 돕는 일이 아니었던들 마리아는 생명이 위태한 자리에 놓이게 되었다.
왜냐하면 요셉이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천사가 현몽하여 가로되 네 아내 마리아를 데려 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거든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였다. 이러한 지시가 있으므로 가만히 끊고자 하는 마음에 오해를 풀고 복된 가정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도 앞으로 주의 천사가 지시하고 인도하는 일이 없다면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을 일을 바로 알아 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알 자가 없다고 말씀하시었던 것이다(마11:27).
3. 말씀을 깨달아 순종하는 가정 (22~25)
하나님의 말씀을 제일 먼저 깨달은 일은 요셉의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7:14을 분명히 깨달아서 요셉은 기쁨으로 모든 일을 진행할 때에 여러 가지 난제가 많이 있지만 돌파하고 거룩한 가정을 이루었던 것이다.
요셉과 결혼을 하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해서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그때의 사회에 큰 문제거리가 되는 일이다. 지금은 남녀의 결혼식이 있기 전에 동침하는 것을 양심에 거리끼게 생각을 하지 않지만 과거 거룩한 신앙을 가진 자들은 큰 범죄로 알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결혼을 하기 전에는 완전한 부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셉은 사회 앞에 자기가 책임을 지고 마리아를 보장했던 것이다. 이렇게 한 것은 처녀가 잉태하는 경우에는 돌로 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의 잉태를 믿어줄 자는 요셉밖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요셉은 아무런 비소와 조롱이 있다하여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성신의 잉태를 철저히 믿고 사7:14을 기억하고 싸워 나갔던 것이다.
복된 가정을 이루려면 진리를 모르는 인간들에게 비방을 받는 일이 있다하여도 말씀을 믿고 합심 단결하는 가정이 되어야만 될 것이다.
결 론
가정이 없이 사회가 있을 수 없고 가정이 없이 교회가 있을 수 없다. 기독교의 진리는 복된 가정이 이루어지므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으니 복된 가정이 이루어지므로 새 시대가 이루어질 것이다. 새 시대라는 것은 복된 가정이 새로운 나라를 이룬 것을 말한다.
신앙 노선의 차이점
- 마 2:1~23 -
하나님의 아들이 베들레헴에 탄생할 때 되어진 일의 신앙의 차이점은 재림의 주가 올 때에도 반드시 이와 같은 신앙의 차이점이 있을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언제나 신앙 노선이라는 것은 완전한 왕국이 이루어질 때까지는 그 노선이 하나가 못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의 탄생시에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우리의 신앙 노선의 정로가 무엇인 것을 알 수 있다.
1. 징조를 보고 움직이는 믿음 (1~3, 9~12)
동방의 박사들은 하늘의 별 징조를 보고 큰 격동을 받고 밤낮으로 수고를 무릅쓰고 예루살렘을 찾아갔던 것이다. 이 사람들은 성경은 모르며 또는 어떤 뚜렷한 종교의 획선을 가진 일도 없이 이상한 징조를 보고 움직였다는 것은 맑은 양심의 작용이라고 본다. 아무리 이방 사람이지만 양심으로 옳은 사상과 양심을 가졌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나타나는 왕권의 징조를 볼 때 그 왕권을 양심으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내가 아무리 박사이지만 이러한 위대한 인물을 존경한다는 뜻이다.
지금도 이러한 자들이 있다고 본다. 비록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양심적인 사상이 그 위인을 숭배하고 또는 자기네 사상과 양심과 정신에 의하여 국경을 초월한 활동을 목적 두는 사람도 있으니 이러한 자들은 반드시 옳은 신앙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상 양심이 구비된 자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동방 사람 중에서 이러한 인물들이 많이 나타날 것을 믿는다.
2. 성경 교리화 된 인격 (4~6)
소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난다는 것을 교리로 배운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실지 체험적인 신앙도 없고 확실한 메시야의 소망관에 불타는 마음도 없고 한 교리를 자기의 교제로 이용하여 자기의 직업화된 인물들이다. 이들은 자기의 인격과 위신과 권리를 세우기 위한 데 불과한 종교인이다. 그러므로 박사들이 움직이는 일에 대하여 하등에 충격이 없고 한 교리를 듣고서 말한 것뿐이고 마음에 어떤 적극성을 띠는 것이 없이 두고보자는 태만에 불과한 신앙이었던 것이다.
금일에도 이러한 인물들이 많다고 본다. 종교를 믿되 한 이지적인 신앙에서 생명 없는 마른나무같이 아무런 발전 없는 의식적, 교리적인 신앙 체계에서 초인간적인 신비의 활동을 하등에 관심조차 두지를 않고 마음이 굳어진 마른 흙덩이같이 되어있는 자들이다. 이런 무리들이 진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바친다는 것보다도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한 직장화 되는 생활에서 움직이는 인물들이다.
3. 정치적인 야욕에서 움직이는 인격 (7~8, 16)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여도 정치적인 야욕이 있는 자는 언제나 인간의 방법으로써 자기의 권리를 보장해 보려는 자들이다. 헤롯은 이방적인 로마의 정권을 배경 삼고 자기의 세력을 내세워 보려는 자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징조가 있고 성서에 있는 말씀이 응한다 하여도 거기에는 아무런 감화를 받을 수 없는 인격이라고 본다. 예를 든다면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는 말씀과 같이 이러한 정치야욕이 있는 자라면 아무리 보배로운 말씀이 있고 놀랄 만한 징조가 있다하여도 오히려 그 마음은 더 강퍅해지는 것이다.
4. 말씀에 순종하는 인격 (13~15, 19~23)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잉태할 때도 무조건 순종한다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요셉도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한다는 것으로 된 인격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와 그 마리아를 절대 의심하지 않고 도와주는 요셉과 한 가정이 되어 순종의 걸음을 걸어간 것이 이상적인 신앙 부부의 생활이었다.
천사는 날마다 그 부부와 같이해서 모든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것이다. 아무리 인위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헤롯이 정치적인 야욕을 가지고 왕으로 나신 예수를 죽이려 하였지만 철저히 순종하는 신앙을 가진 요셉의 가정은 대 승리를 보게 되었다.
오늘도 여러 가지의 난제가 닥쳐오지만 요셉과 마리아 같이 합심하여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가정이 되면 천사가 같이하므로 모든 난제를 해결하고 나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초림의 주를 영접한 신앙의 가정이나 재림의 주를 영접할 신앙의 가정이 한 계통적인 신앙이라고 보게 된다. 이제 앞으로 오는 난국을 돌파할 가정은 합심하여 말씀에 순종하는 가정이라고 보게 된다.
결 론
신앙은 어떤 흥분이나 교리나 주권을 떠나서 자기의 위신을 떠나서 그리스도의 비밀의 말씀을 깊이 믿고 순종해 나가는 길밖에는 승리의 길이 없는 것이다.
주의
인도를 따르는 복된 가정
- 마 2:13~23 -
서 론
역사적인 인류생활의 호화롭고 복된
생활을 한 가정이 많지마는 가장 빈한하고 쓸쓸한 목수 요셉의 가정은 인류역사에 제일 복된 가정이라는 것을 그 시대에 아는 자는 심히 적었던
것이다. 육안으로 볼 때 멸시, 천대, 빈곤, 피난의 길을 걸어가는 가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의 인도를 따르는 그 가정은 어디를 가나 평화,
승리를 이루는 가정이 되었던 것이다. 이제 복된 가정은 무엇이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1. 천사가 왕래하는 가정
(13)
금일에 어떤 정치요인의 집에 군대가
파수를 보고 있는 것을 안전이라 복되다 하는 일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천사가 지시하고 인도하고 보호한다는 가정은 얼마나 복된 가정이냐 하는
것을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산 높고 물 맑은 빈촌에 빈한한 목수의 가정에 천사는 왕래하고 인도하고 보호한다는 것은 그 집에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이었다.
요셉의 복된 가정이 알파라면 우리의
가정은 오메가적인 교회에 끝을 맺는 복된 가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시91:10~11). 앞으로 오메가의 끝을 맺는 것은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는 가정일 것이다. 어린아이로 온 예수를 모신 가정도 복되다 하거든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는 주님을 영접하는 가정은 얼마나 복된 것인가
2. 합심하여 순종하는 가정
(14~15)
아무리 하나님은 롯의 가정을 유황불에서
건져내고자 하여 천사가 와서 인도해도 순종치 않을 적에 불행스러운 비참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어린 예수를 앞에 놓은 요셉과 마리아는 밤을
세우며 찬이슬을 맞으면서 길을 떠나는 그 부부의 절대적인 순종의 걸음은 복된 가정이 되고야 만 것이다. 고향을 떠나라는 지시를 받은 아브라함은
정처 없이 떠날 때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다는 축복의 음성은 그 가정에 들려왔던 것이다.
이와 같이 쓸쓸한 피난의 걸음을 걷는
그 가정은 헤롯왕을 이기는 승리의 발걸음이 되고야 만 것이다. 말세에도 아무리 악한 정치가 성도의 가정을 해치려고 병력을 동원해도 합심하여
순종하는 가정에는 아무 피해도 없을 것이다. 만일 순종의 발걸음이 하루라도 더디었던들 화를 만나는 가정이 될 것이었으나 철저한 순종이 있는
가정이니 필연코 승리한 것이다.
3. 안정한 생활의 회복된 가정
(16~23)
아무리 비참한 환난을 겪었으나 어린
예수는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고 정든 고향을 다시 복구할 때 그 가정에 행복스러운 생활은 매일같이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귀여움을 더하는
그리스도의 장성은 세계인류를 구출시키는 인격을 양성시키고야 말았던 것이다. 아무리 물질의 부요, 명예, 화려가 있다한들 이러한 인격을 길러내는
가정은 인류역사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가정에서 만왕의 왕이 오실 때
그의 국왕의 한 보좌를 차지하는 주의 종이 나온다는 가정은 얼마나 복된 가정일까! 세상 정치, 문화가 이 자리를 줄 수 없고 오직 합심하여
순종하는 가정에만이 세계를 움직일 하나님의 종은 나올 것이다. 우리의 축복이라는 것은 세세왕권을 가질 종을 길러내는 것이라는 것을 인간이 알
자는 심히 적다.
결 론
복된 가정은 세계를 천국으로 이루어
놓는 역사의 원천이며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시키는 학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소식이 연락되는 가정, 하나님의 보호가
같이하는 가정, 세계 만왕의 왕을 길러내는 가정, 인류 역사에 둘도 없는 복된 가정은 어느 가정인가. 목수 요셉의 가정인 것이다. 우리는 노동을
부끄러워 말고 빈곤을 원망하지 말자. 복된 가정은 무엇이라는 것을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이다.
성신의
인도로 받는 마귀시험
- 마 4:1~11 -
서 론
하나님께서는 만왕의 왕권을 받을
그리스도를 성신으로 이끌어서 마귀의 시험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죄가 있어서 받는 시험은 아니다. 이는 오직 성신의 법에 따라서
통과하는 시험이니 하나님의 아들도 사람으로 났기 때문에 이 시험을 통과시킨 것은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성도들에게 표본이 되는 것이다.
시험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놀라운 이적을 통하여 시험을
통과시킴 (3~4)
하나님의 아들이 돌로도 떡이 되게 할
수 있으나 말씀을 중심하지 않는 기적이라는 것은 마귀를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이 시험은 떡을 먹는 어떤 식욕이 생기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이적을 나타내어 보라는 시험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무리 은혜를 받고도 말씀을 중심 하지 않고 이적을 나타내서 자기를 세상에 알리려하는 것은
탈선된 길이란 뜻을 보여준 것이다.
2. 말씀의 칼을 혼선시키는
시험이다 (6~7)
하나님의 말씀을 마귀도 사용하지마는
말씀의 칼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혼선을 주는 것이다. 시91:11~12은 환난과 재앙의 날에 당신의 사람을 절대적으로 보호한다는 뜻으로 가르친
말씀인데 이것을 이용하여 높은 성전에서 뛰어 내려보라는 것은 말씀에 맞지 않는 행동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보호라는 말씀을 함부로
사용한다는 것은 혼선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환난시대에 대한 보호의
말씀을 은혜시대에다가 걸어서 사용한다는 것은 시대적인 모순이요, 또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해주마하는 말씀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다 붙여서 하나님이 역사해 주기를 바라고 자기가 주의할 일을 주의치 않고 나가는 것도 행동으로 말씀을 혼선시키는 것이다. 말씀의 칼이라는
것은 그 말씀을 어디다가 써야할 말씀이라는 것을 바로 찾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이 말씀을 그때 사용하고 나가셨다면 예수님도
탈선이 되는 것이다.
3. 타협적인 사상을 침투시키는
것이다 (8~11)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온 목적은
만민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함으로써만이 만국을 구원하는 동시에 만왕의 왕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인 계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귀는 한 번만 절한다면 네가 그렇게 고생을 하지 않고도 세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타협하자는 미혹이다. 만일 금일에 말세의 종이 붉은 세력과
끝까지 싸워야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인데, 붉은 세력의 앞잡이 거짓 선지는 절만하고 표만 받으면 싸우지 않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마귀의 시험이 아닐 수 없다.
결 론
우리는 성령의 인도라는 것을 덮어놓고
쉽게만 되게 하는 인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누가 생각할 때 세상이 환영하고 핍박이 없고 시험이 없고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어 가면 이것만이 성신의 인도로 안다는 것은 모순이 되는 것이다. 성신의 인도는 반드시 마귀의 세력과 싸우도록 인도하는 것이 사명자의 나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예수님도 마귀에게 끌려 성전 꼭대기
높은 산꼭대기까지 올라간 일이 있는 것은 마귀에게 그만한 권리를 맡겼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정식으로 역사할 때 가서는 마귀가 한마디 말하는 것도
허락지를 않았던 것이다. 마귀를 쫓아내고 책망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험기에는 예수님도 마귀를 말씀으로만 대적하고 마귀에게 시련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누구든지 역사할 종이 시험을 통과할 때는 말씀 하나만을 바로 붙드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제일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
- 마 5:11~12, 계 18:20,
19:6~9 -
인생이라는 것은 제일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이 무엇인 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사람이며 복된 사람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을 하실 때에
인간으로는 낙망하고 두려워할 일이 올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 가장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었다. 그러면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은 무엇이냐는 것을 성서로 증거한다.
1. 주를 위하여 핍박과
훼방을 받는 일 (마5:11~12)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입을 열어
말씀하실 때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하셨다. 우리 인간이 볼 때에는 분명히 억울한 일이지만 이것이
사람으로서 제일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이라고 말씀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첫째 : 예수와 같이 되는
일이다.
둘째 :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다.
셋째 : 왕국을 이루는
일이다.
세상에서 핍박을 제일 많이 받고
욕하는 말을 제일 많이 들으신 이는 우리 주님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시므로 마귀의 자식들은 제일로 미워하고 욕하고 핍박할 일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길을 예수님이 가지 않으셨다면 우리 인생은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맛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 예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천하에 제일 위대한 일이라고 본다. 일국의 왕을 위하여 충성을 다해도 충신이라고 하고, 한 집의 남편을 위하여 절개를
지켜도 열녀라 하고 한집의 부모를 위하여 성의를 다해도 효자라 하거든, 하물며 만왕의 왕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일은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이것은 세세 왕권을 받는 일이니 제일로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이 된다.
주님께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세상에서 이 길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걸어가신 길이 이 길이요 모든 선지나 사도나 성도들이
걸어간 길도 다 이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제일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을 바로 알고 용기있게 나가야 할
것이다.
2. 원수를 갚아 주는 일
(계18:20)
세계 인류가 한 시간에 불사름을
받는 날에 즐거워할 자는 억울하게 핍박을 받고 비방을 받고 나가던 종들이라고 하였다. 이날까지 이 세상은 참된 즐거움의 날을 볼 수 없는 사망,
고통, 전쟁, 흉년, 질병으로 내려왔지만 이 세상이 한 시간에 불타는 일이 있을 때부터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할 자는 선지와 사도와 성도들이라
말씀했다. 왜냐하면 다시는 괴로움과 사망이 없는 시대가 오기 때문이다.
가장 복 있는 자는 원수를 갚아
주는 날에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은 남을 속이고 압박하고 자기의 정권이나 물권이나 교권을 가진 자들이 향락을
누리는 세상이지만 이것은 풀의 꽃과 같이 쓰러지고 말 것이요, 오직 세상에서 의를 위하여 억울함을 당하던 사람들만 즐거워하는 세세 왕국, 영원한
천국이 올 것이다. 땅에서도 천년 동안 즐거워하고 천국에서도 영원히 즐거워할 자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던
자들이다.
3.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일
(19:6~9)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된
인생에게 가장 즐거움을 주는 일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라고 본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다 하나님을 괴롭히는 일을 했는데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을
순종하기 위하여 죽도록 충성을 다하던 자들을 한데 모아 놓고 즐거운 잔치를 베풀어주고 그때부터 영원히 왕권의 영광을 누리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간교한 마귀를 들어 꾀어
보기도 하고 마귀의 강한 세력을 허락해서 당신의 종들을 핍박하기도 하고 죽이게도 한 것은 가장 즐거운 잔치를 베풀어서 그들을 즐겁게 하는 동시에
영원한 영광의 나라의 왕권을 누리게 하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영광을 받기도 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길이 누리게
되는 것이다.
결 론
인생이 제일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은
무엇이냐는 것을 우리는 이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 인류가 한시간에 불탈 수밖에 없는 위기를 만난 이 때에 제일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는 각자 각자가 준비하여야만 될 것이다.
아버지의 온전하신 것 같이 온전한 자가
되자
- 마 5:43~48
-
세상에 많은 부모가 자식을 양육하고
있지만, 온전한 부모가 없으므로 온전한 자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공경하는 아버지는 온전하시므로 우리도 온전할 수 있다. 만일 어떤
부모가 자기는 온전하다 하면서 자식을 온전하게 하지 못한다면 그 부모는 온전하다고 볼 수 없다. 온전이라는 것은 스스로 자기가 온전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요, 남을 온전케 할 수 있는 자를 온전한 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온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한 것은 우리 사람 자체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온전하신 것과 같이 되도록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할 때에 온전하게 창조한 것이 아니고 온전한 것을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창조하셨다.
동물은 온전한 것을 받을 자격이 없지만 사람은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는 언약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1. 참된 기도로
(44)
기도라는 것은 정욕을 따라 구하는
기도는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지만 내가 손해를 보아도 남을 살리기 위하여 하는 기도는 남을 살릴 수 있는 역사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므로써 온전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깨닫지 못하는 자를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시는 역사를 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어 대신 죽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법이 아니라면 천국을 이룰 수가 없으므로 온전한 것을 인간에게 주기 위해서는 참된 기도를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
참된 기도라는 것은 아버지의
원하시는 뜻대로 하는 기도이니 아버지께서는 당신을 반대하고 핍박하는 자라도 깨닫고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서도 남을 살리기
위하여 기도하는 자에게 온전한 역사를 내리시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체험을 너무나 많이 가졌다. 억울함을 당할 때에 그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기도하다가 뜻밖에 의심날 정도로 받았기 때문에 나를 억울하게 하는 자를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할 정도로 은혜를 받은 체험이 있으므로 참된 기도는
억울함을 당하면서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참된 사랑으로
(45~46)
참된 사랑이라는 것은 조물주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편벽된 사랑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 하여도 편벽이 있고, 친구가
친구를 사랑한다 하여도 편벽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편벽이 없는 사랑이니 우리가 그 사랑을 받으므로써 온전하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낼 때에 제일로 가난하고 비천한 자리에 나게 하시어 비천한 생활을 하시었고, 가장 비천한 사람을 친히 찾아가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시었고,
그를 택해 세워서 존귀한 종이 되게 하시기도 하시었고, 죽기까지 가장 비천한 악형을 받으시면서 끝까지 천한 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비천한 죽음을
하는 살인 강도까지 구원을 하셨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에도 가장 비천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나타나셨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아무리 인간들이 부족해도
하나님께서는 공평하게 사랑하시되 죄를 진 인간이 원치 않아도 친히 찾아 오셔서 사랑을 베풀어 준 것이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억지로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 친자녀에게도 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 사랑을
남에게 주는 것은 도덕이 아니요, 도덕을 초월한 신앙 양심에서 참된 사랑을 남에게 주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에서 났으므로 그 사랑을 남에게 주는 열매가 아버지 사랑에서 받은 대로 남에게 주는 것이다. 만일 이 사랑이
없는 자라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랑에 속한 심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바리새인들에게 네 아비는 마귀라고 한 것은 마귀에게 있는 욕심이 네게도 있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이다(요8:44).
3. 참된 도덕으로
(47~48)
인간이라는 것은 이방적인 도덕도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가져야 할 도덕도 있는 것이다. 이방적인 도덕이라는 것은 자기를 나타내려는데 속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자녀의 도덕이라는
것은 자기를 낮추고 남을 존경하는 것이니, 아무리 남이 내게 대하여 문안을 하지 않고 무시한다 하여도 나는 그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먼저 그
사람에게 대하여 친근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가져야 할 도덕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 다른 사람이 내게 냉정히 한다고 해서 같이 냉정히 대하는 것이 있다면 이 종은 온전한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끌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이 냉정히 대하든지 멸시하든지 거기에 감정에 끌리지 않고 친근히 대하는 태도가 있는 인격이라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인격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인간들이
반대한다 하여도 사람에게 먼저 찾아 오셔서 역사하는 신이시다. 택한 자가 아무리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섬긴다 하여도 하나님은 그를 향하여
깨닫도록끔 역사해서 당신의 자녀의 명분을 얻도록끔 역사 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온전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언약을 세우셨고 그 언약의 말씀대로 역사하는 신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기도, 참된 사랑, 참된 도덕의 인격을 가져야 한다.
이 인격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받은 자녀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의 위치를 바로 두는 자가
되자
- 마 6:19~21
-
사람마다 자기에게 필요한 보물이
있다. 그러므로 그 보물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이므로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의 위치를 두게 된다. 예를 든다면 개는 먹는 것밖에는
없으므로 작은 빵 한 조각을 땅에 던지고 귀한 보석을 땅에 던진다면 작은 빵 한 조각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보석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같은 사람이라도 그
마음의 위치는 각각 다르게 둘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것은 마음의 위치를 두는데 따라서 그 인격과 생활이 좌우되는 것이다. 이제 마음의
위치를 바로 두는 자가 되려면 어떠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한다.
1. 마음의 위치를 이 땅에
두지 않아야 한다 (19)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할 때에
목적은 천국을 이루기 위하여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 마음의 위치를 둔다는 것은 조물주의 대적이 되는 일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주인이
종을 타지방에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보냈더니 그 종은 주인의 집을 마음에 두지 않고 다른 사람의 집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그 종은 주인에게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잠깐동안 사명을 가지고
일할 세상에 마음을 두고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하늘 나라를 위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무리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라도 땅의 것을 생각하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지 않을 때에 “사단아 물러가라”고 책망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일을 방해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배를 드린다 하여도 땅의
것만을 생각하는 자의 예배는 절대로 받지 않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의를 힘입어 예배한다는 자들이 십자가와는 대적이 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땅에다 마음의 위치를 두는 자라면 예수님의 마음과는 대적이 되는 것이다.
2. 마음의 위치를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데 두어야 한다.(20)
가장 어리석은 자는 보물을 땅에
쌓아 두는 자요, 가장 지혜로운 자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데 마음을 다하는 자이다. 누구든지 중심 보시는 하나님 앞에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자라면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역사를 나려 주시는 것이다. 나의 체험을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 15세 소년으로 세상
만사를 다 허사로 보고 고민하게 되어 영생을 알아보기 위하여 성경을 읽기 좋아한 것이 내가 중생을 받는 단계가 되었던
것이다.
둘째 : 20세 청년으로 먹을 것을
위하여 땀 흘리는 것을 고민하고 주를 위하여 고생하기를 소원하는 기도가 나를 주의 종으로 이루어 놓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 : 30세 장정으로 순교
생활을 원하고 나선 것이 개척 교회를 많이 세우는 열매가 되었던 것이다.
넷째 : 50세 장년으로 쉬지 않고
일해 보려는 것이 오늘에 축복이 된 것으로 믿는 바이다.
그러므로 나는 알아보려는 데서
중생을 받았고, 고생해 보려는 데서 주의 종이 되었고, 순교해 보려는 데서 많은 교회를 세웠고, 쉬지 않고 일해 보려는 데서 얼마든지 일할 수
있는 인격을 하나님께 받게 되었다. 누구든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려는 마음만 있는 자라면 얼마든지 하나님께 받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3. 마음의 위치를 참된
보물에 두어야 한다 (21)
보물이라는 것은 다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제일 유익을 많이 주는 보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완전한 지혜이다. 세계를 움직이는 인격을 가진 자는 세계
땅덩어리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보물에 마음을 둔 자이다.
“미국의 어떠한 위대한 부흥사가
화재를 만나서 거지가 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친구가 찾아 와서 크게 근심하며, 염려할 때에 부흥사가 말하기를 제일 큰 보화는 조금도
피해를 받지 않았으니 내게 대하여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때에 친구는 기쁜 낯으로 어떻게 다행으로 제일 귀한 보화를 간직했느냐고 물어
보았다. 부흥사가 대답하기를 내게 있는 가장 큰 보화 되시는 예수님은 불타지 않았으니 만족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우리의 참 보화가 되시는
예수님이 있을 곳을 예비하고 있는 그 곳에 마음을 두고 있는 자라면 예수님과 연합된 자로서 큰 열매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완전한 것이 없다 하여도 완전한 것을 줄 수 있는 신앙의 대상자에게 마음을 둔다면 완전한 것을 받는 신앙의 산 체험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마음의 위치를 바로 둔 사람끼리 뭉쳐진 단체인 것이니, 이 단체로만 완전한 열매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결 론
인생이라는 것은 동물이 아니요,
신의 형상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위치를 땅에 두지 않고 하늘에 둠으로써 하늘에 속한 형체가 이루어지는 동시에 천국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눈이 밝은 사람이 되자
- 마 6:22~24, 7:1~5
-
사람이라는 것은 먼저 눈이 밝아야
한다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예루살렘 거리에 왕래하고 있는 소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거룩한 사람들이 다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아들이
누군지를 모르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성전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을 모르고 바리새교라는 정통자들도 하나님의 아들을 모르고 제사장이라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아들을 몰라 이단이라고 할 때에 주님께서는 입을 열어 가르치기를 눈이 밝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눈이
어두운 종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죄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인줄 알았는데 거룩한 사람이라고 하는 무리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모르고
바알세불이라고 하며 나사렛 이단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1. 섬기는 일에 눈이 밝아야
한다 (6:22~24)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사람들이 물질을
따라 가게 되면 눈이 어두워지는 것이요 물질을 바로 사용하게 되면 눈이 밝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여도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생활이 없다면 모든 것은 다 허사가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셔서 그 만물을 사람에게 주신 것은 그 물질을 섬기라고 준
것이 아니요, 물질을 바로 사용하되 현 세상을 위하여 쓰지 말고 천국을 위하여 쓰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눈이 밝은 자는 날마다 사는
생활에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생활을 하는 자이다.
바리새 교인들은 말로는 정통을
부르짖으면서 돈을 가지고 사람을 사기도 하고 이용하기도 하는 일을 했다. 이것은 멸망의 자식들이 하는 짓이라고 본다. 우리는 물질을 섬길 때에
멸망이요 물질을 바로 사용할 적에 축복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물질을 바로 사용하는 사람에게 오는 축복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 하늘에 보화가 있게 된다.
둘째 : 땅위에 축복이 있게
된다.
셋째 : 항상 주의 축복 속에서
기쁨이 있게 된다.
거짓 선지라는 것은 자기에게 돈을
주면 기뻐하고 돈을 주지 않으면 노여워하는 것이요, 참된 선지라는 것은 돈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진리를 위하여 물질을 희생하고 몸을 희생하고 전
생활을 바치는 것이다. 삯을 바라고 진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진리를 이용하는 자요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나가는 자는 말씀의
용사이다.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집이나 전토나
형제나 부모나 모든 것을 버리는 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이로되 그렇지 않은 자는 자동적으로 삯군이 될 것이다. 초림의 주가 오실 때에 삯을
위하여 교훈하는 자들이 눈이 어두워 참된 진리를 대적하였고 재림의 주가 오실 때에도 삯을 위하여 교훈하는 자들이 참된 진리를 대적하다가 망하게
될 것이다(미3: 5, 11).
2. 보는 일에 눈이 밝아야
한다 (7:1~5)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 부족을 모르는
사람이 남의 부족을 모르고 자기 부족을 아는 사람이 남의 부족도 알게 된다. 바리새교인들은 자기 부족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정죄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죄인을 찾아가서 전도할 때에 그것을 불의한 일로 보았고,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친다고 해서 범죄자로 판정했고,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먹기를 탐하는 자라고 하였고,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 낼 때에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였다.
눈에다 검은 안경을 쓰면 다 검게
보이듯이 마음에 욕심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옳은 일을 하는 걸 보아도 옳게 보이지 않고 다 자기 마음같이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네 눈 속에 티를 빼라 하느냐. 먼저 네 눈 속의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티를 빼리라 하셨다. 이것은 자기 마음 가운데 욕심이라는 들보를 뽑아서 없애는 자라야 사람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먼저 자기 자신의
죄악성을 없애 버리는 일이 있어야 눈이 밝은 종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의 들보를 뽑은 자의 영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 천국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진다.
둘째 : 성경에 눈이
밝아진다.
셋째 : 모든 일에 눈이 밝아진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입을 열어
말씀하실 때에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볼 것이라고 하였다. 오늘날 과학 문명이라고 하지만 실지는 흑암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과학 문명은 죄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회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눈이 밝은 자가 볼 때는
분명히 심판기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지는 인간 종말의 심판기는 이방의 빛이 되는 그리스도의 교훈이 세계에 전파된 후에 극도로 진리를 대적하는
강한 세력이 북방으로부터 올 것과 미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설 것과 사랑이 식어지므로 불법이 성하게 될 것과 모든 사람이 짐승의 세력 앞에
머리를 숙일 것과 빈민이 부자 앞에 억압을 당할 것과 세상이 한 시간에 불타게 되는 위기가 올 것을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자세히 보고
세상을 본다면 분명히 심판기로 보게 된다. 누구든지 섬기는 눈이 밝고 보는 눈이 밝은 자는 하나같이 이 시대를 분별하게 될
것이다.
결 론
가장 슬퍼할 자는 눈이 어두운 자요
가장 기뻐할 자는 눈이 밝은 자라고 본다. 눈이 밝으냐 어두우냐 하는 것은 죽느냐, 이기느냐 하는 문제가 결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섬기는 눈이 밝아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야 할 것이며 보는 눈이 밝아서 잘못 판단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을 가치있게
살자
- 마 6:25~34
-
인간의 괴로움 중에도 가치있는
괴로움이 있고, 화를 받을 괴로움도 있다. 오늘 우리가 한 날의 괴로움을 가치있게 살아 나간다면 이것이 천국 건설 운동의 용사적인 생활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하신
것은 한 날의 괴로움을 가치있게 살라는 말씀이다. 사람이 몸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인격으로 사는 생활이라는 것은 모든 일이
다 헛된 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
이제 한날의 괴로움을 가치 있게
살려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먹고 입는 일에 끌리지
않는 자 (25~29)
사람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인격이라는 것은 아무런 가치를 발휘할 수 없는 생활을 하게 된다. 왜냐 하면 이방적인 생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은
먹고 입는 것 하나만을 생각하고 그 밖의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믿는 것이니 하나님의 완전한 역사를 체험하는 생활에서 물질 문명을 초월한 인격을 받게 될 때에 먹고 입는 일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 보다도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수고하게 된다.
누구든지 완전 개조, 성결 변화,
능력을 받은 자라면 그 밖에 모든 것은 염려할 필요조차 없고 필연적인 열매가 되는데서 자동적으로 먹고도 입고도 남음이 있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먹고 입는 일에 대하여 염려하는 것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종된 인격을 갖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2.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자 (30~33)
인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자가 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모든 것을 더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하늘 나라를
그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역사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오히려 그것을 반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천국의 진리를 가르쳤으므로 그 교훈을 믿는
자가 적게 되었고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역사하셨기 때문에 그 역사를 반대하는 자가 세상에서 더 많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영광을 주고 싶은 그 사랑의 심정을 오히려 노엽게 하는 것이 인간들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의합이 되려면
생활 전체를 천국을 위하여 사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천국을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셨고, 천국을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고,
천국을 위하여 성신을 보내셨기 때문이다. 가장 어리석은 자라는 것은 천국이 없다는 자이며, 가장 가증한 자라는 것은 천국이 있다 하면서도 세상
명예와 권리를 얻기 위하여 싸우는 자이다. 누구든지 모든 일 전부를 천국을 위하여 사는 생활이 있는 자라면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될
것이다.
3. 한 날 괴로움을 그날에
족한 줄 아는 자 (34)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첫째 : 마귀와 싸우는 전쟁에
군사된 생활이므로
둘째 : 남을 살리기 위하여 사는
생활이므로
셋째 : 왕권을 목적하고 나가는
생활이므로
우리는 날마다 그날 그날에 부딪혀
오는 모든 문제를 바로 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만왕의 왕을 따라 가는 생활이니 염려할 것은 전혀 없고
날마다 주님을 따라 나가는 생활에서 십자가를 질 것뿐이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염려해야 된다고 하셨다면 족한 생활을 할 수
없겠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너희 천부께서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내 사정을 내가 아는
것보다도 아버지께서 먼저 아신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아버지 집에서 매일 같이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할 것뿐이다. 이렇게
된다면 그날에 괴로움을 족하게 사는 생활이 되므로 모든 일이 다 열매가 될 것이다.
결 론
인간 생활이라는 것은 아무런 수고가
없는데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요, 수고를 바로 하는데서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수고를 바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한
날의 괴로움을 가치 있게 살아야 할 것이다.
한날에 수고가 족한 생활
- 마 6:19~34 -
서 론
인간의 수고는 없음으로가 족한 것은
아니다. 수고가 바로 있음으로써 족한 생활이 있어야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 수고 없이 사는 생활을 바라본다면 이것은 식충에 불과한
동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한날의 괴로움을 그날에 족하게 여기라 했던 것이다. 조물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격을 존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이제 한날의 괴로움이 족한 생활은
어디서 있을 것이냐에 대하여 본문은 말하고 있다.
1.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기 위해
수고하자 (19~21)
우리는 가장 가치 있고 열매가 있고
영원한 기쁨의 생활을 원한다면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기 위한 수고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왕의 왕 예수님도 이것을 위하여 매일같이
수고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요14:2~3). 주님은 우리의 있을 곳을 예비하기 위하여 역사하고 있다면 우리도 그 것을 위하여 수고하는
생활이 있어야 될 것이다.
만일 이런 수고를 원치 않는 자라면
주님이 다시 올 때 그 사람과는 하등에 관계가 없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너를 알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신랑 예수님은 신부를 영접하기 전에
동거동락할 그 세계의 모든 화려한 집을 준비하는 것이라면 신부는 여기에 같이 수고하기를 원하는 자라야 맞이하게 될 것이다.
2. 몸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25~26)
만일 세상에 사람이 났다가 몸을 위해
염려하다가 죽는다면 제일 무가치한 생활이란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동물에 불과한 생활이다. 모든 동물은 밤낮 자기 몸을 위해 사는 것은
동물의 생활이요, 몸을 희생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생활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또는 세계를 지배할 왕 될 자격을 이룬 생활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낸 것은 모든 만물을 미리 창조하고 사람의 몸을 낸 것이니, 몸을 위하여 염려하는 것은 퇴보의 생활일 것이다.
우리는 진보적인 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몸을 낸 그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바로 알고 활동하는 생활이라고 보게 된다. 세밀히 말하자면 몸을 위하여 염려하는
것은 썩어질 양식을 위한 것이요, 몸을 주님께 바쳐 사는 생활은 영생할 양식을 위해 사는 생활이 될 것이다. 사람의 몸이란 것은 천양지차별을 둘
수 있는 것이다. 그 몸이 바로 움직이면 신과 같이 될 수도 있고 잘못 움직이면 동물보다 무가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했던 것이다.
3.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움직여야 할 것이다 (32~33)
우리는 하나님을 계시다고만 하는 것이
지식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 적에, 우리가 우리를 생각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먼저 아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며, 또는 우리가 먼저 할 일을 먼저 할 때에 모든 것을 더 풍성히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선후가 있는 것이니 먼저
할 것을 먼저 하는 그 수고가 있기 전에 아무런 열매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고가 필요하되 무엇을
위하여 먼저 수고하느냐 하는 것을 매일 같이 바로만 한다면 그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수고가 없이 되기를 바라는
것도 게으른 사람의 하나요, 수고를 하되 덮어놓고 일한다는 것도 어리석은 사람의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먼저 할 것만
시작하면 작은 데서 큰 것을 이루는 열매는 하나님의 축복에서 될 것이다. 큰 일을 기대하고 있는 생활보다도 작은 일을 바로 해야 된다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의 생활이라고 볼 수 있다.
결 론
하나님은 사람에게 수고할 수 있는
지혜를 준 것이다. 이것은 수고의 열매를 하나님께서 맺게 해 주마는 뜻에서 사람은 수고할 수 있는 지혜를 준 것이다. 최고의 가치는 그날의
수고가 족하리만큼 사는 생활이 왕권을 이루는 종의 생활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니 내일 일을 꿈꾸지 말고 그날에 시키는
대로 충성을 다할 것뿐이라는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종이 그날에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고 내일 일을 생각하고 염려하고 맥 떨어져 있다면 이것을 망령된 종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주인이 얼마만큼 계획이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교만의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예지와 예정과 무소불능의 하나님을 믿는 종이라면 그날에 괴로움을 족하게 아는 생활이 자동적으로 있게될
것이다.
참된 기도의
열매
- 마 7:1~12
-
기도라는 것은 참되신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기도가 아니고는 다 헛된 우상적인 종교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66:3이하를 보면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의 기도는
가증하게 보고 우상과 같이 취급한다고 말씀했다. 오늘에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지만 그 기도가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줄 수
있는 기도가 되느냐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참된 기도가 무엇이냐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1. 마음에 들보가 없는
기도이다 (1~5)
만일 어떤 사람이 마음에 자기라는
주관을 내세우는 들보가 있다면 하나님과 상대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자기라는 주관이 앞서는 자가 될 때에 자칭 선지라는 교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기도는 자기라는 자체를 뽑아버리는 희생적인 것이 없다면 도저히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를 가질 수 없다. 자기라는 들보가 없어지고
하나님만으로서 중심에 소유하게 될 때에 밝히 볼 수 있는 영안이 밝아지는 것이다. 인생 자체에는 빛이 없고 밝히 볼 수 있는 빛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자라 하여도 자기라는
중심에서 남을 판단한다는 것은 완전한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 심판에 해당하는 생활이 된다. 그러므로 오직 참된 판단은 하나님께만 있다는
마음에서 남을 판단하는 것보다 먼저 자기가 주 앞에서 판단을 받는 양심적인 회개의 기도 생활이 있어야만 될 것이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판단을 받는 회개의 생활이 없다면 그 자체가 자동적으로 형식을 따르는 일이 있게 된다. 언제나 자기를 없애 버리는 사람의 기도라면
시간 시간마다 깊은 영계를 체험 할 수 있게 된다.
2. 애써 노력하는 기도가
있어야 한다 (7~11)
아무리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더라도
사람편에서 노력하는 것이 없다면 줄 수가 없다. 하나님의 약속은 해산의 수고를 다하여 구하는 자에게 준다는 약속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행하는 신이시니 기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 있는데 하나님께로 받아야 할 인생이 먼저 필요성을 느끼고
구할 때에 두드리면서 찾아오는 심정이 생기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환경에 떨어뜨리는 일이 있는 것이다(사26:16~17).
이것은 하나님의 선한 방법이니 하나님의
약속을 참으로 믿나 의심 하나를 보자는 모략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참된 기도가 있을 때는 반드시 어려운 환경에 떨어뜨리는 것이 더 큰 것을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모략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역사를 보아도 큰 역사를 일으키는 종들에게는 다른 사람보다도 더 어려운 난관이 닥쳐왔던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요, 할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무소불능의 역사를 일으키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가 될 것이다.
3. 남을 대접하기를 목적 둔
기도이다 (12)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택한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주어서 남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서 세세 왕권을 누리도록 하자는 것이 하나님의 큰 뜻이니 누구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보다도 남을 대접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인간을 초월한 하늘의 것을 주어서 기도의 사람을 통하여 남에게 만족한 것을 얻도록 한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이다.
모든 선지와 사도들이 다 이러한
신앙 사상에서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마땅하게 생각하고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그들은 조금도 사람에게 대접받기를 원한 것은 조금도
없고 하늘에서부터 주는 것 하나만을 목적했던 것이다(빌3:14~15). 그러므로 이러한 인격을 가진 자라야 조물주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결
론
가장 어리석은 자는 기도를 하되
헛되이 구하는 자요, 가장 지혜로운 자는 참된 기도를 드리는 자로서 하나님께 더 좋은 것을 받아 길이길이 누리는 자라고 보게
된다.
기도 생활에 있어야 될 원칙
- 마 7:1~14
-
기도 생활에는 원칙을 떠날 때에 그
기도는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는 진리의 하나님께 상달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기도를 받으시기를 원하시고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이기 때문이다.
이제 기도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3가지 원칙을 본문을 통하여 말한다.
1. 마음의 원칙
(1~6)
마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문이요, 제단의 위치라고 본다. 기도의 사람이 마음에 죄가 있다면 도저히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라고
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죄를 숨기고 남의 잘못을 판단한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과 상대가 될 수가 없을 것이로되, 먼저 자기의 마음 가운데
숨은 죄를 회개하면서 형제를 대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상대 할 수 있는 마음의 위치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도의 사람의 마음은 항상
자기 마음속에 숨어있는 들보와 같은 정욕을 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만을 바라보는 마음의 터가 확정되어야 되는 것이다. 금일에 많은 사람이
기도를 하지만 기도의 열매가 나타난 일이 적은 것은 그 마음과 하나님과에 가까이 부딪쳐지는 위치에 있지 못한 원인이라고 보게 된다. 항상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되 하나님께 은밀히 보시는 마음에 숨은 죄를 항상 통회하는 애통이 있는 마음에 여호와의 신은 응답의 역사를 내리시는 것이다.
2. 생활의 원칙
(7~12)
기도는 실천의 생활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중심에 원함이 있다 하여도 실천이 없는 생활이라면 기도는 응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구하라 문을 두드리라 찾으라 하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 두드리고 찾는 목적이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고 남을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움직이는 활동이 있어야 된다. 예를 든다면 나무
가지가 진액을 받아서 열매를 맺는 것은 사람을 대접하는 열매가 되듯이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하나님이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일에 완전한 열매를
구해야만 될 것이다.
어떤 종이 기도 할 때에 자기의
만족이나 영광을 목적했다면 그 사람에게는 있던 것도 다 빼앗기게 될 것이로되 마음에 어떠하든지 형제를 살리는 열매를 구하는 종이라면 생각 밖에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란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택한 자에게
무엇을 주실 적에는 직접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고 모든 종들을 통하여 주시는 것이니, 과거에 선지들이 기도하다가 묵시의 글을 쓰게 된 것은 억울한
사람에게 압박을 받고 배척을 받는 자리에서, 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뜻밖에 홀연히 묵시의 글이 나타나서 그 글을 기록하게 된 것이니,
이글로 말미암아 많은 생명이 참된 진리를 찾게 되었고, 새 시대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을 생각할 때에, 남을 대접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종에게 묵시를 보여 주기도 하시고, 또한 그 말씀대로 역사하는 종들이 신약 시대에 예수님을 비롯하여 사도들을 통하여 모든 성도가 하나같이 그들이
기록한 진리를 받으므로 하나같이 큰 구원의 축복을 받고, 하나같이 새로운 시대에 왕권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왕국 반열이 이루어질 것은 어떤
사람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축복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본문에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했던 것이다.
3. 노선의 원칙
(13~14)
우리의 신앙 노선에는 언제나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넓은 길이라는 것은 세속화된 노선이요 좁은 길은 성별된 생활에서 순교적인 노선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세속화된 노선은 다수가 가는 것이요.
순교적인 노선에는 언제나 적은 수가
가는 것이니 주님께서 너희가 내 제자가 되려면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했고 부모나 형제나 처자를 나보다 더 사랑해도 내게 합당치
않다는 것은 좁은 길을 뜻한 것이다.
언제나 많은 사람이 기도하지만
기도의 응답을 받고 승리의 생활을 하는 자는 구약 때나 신약 때나 심히 소수의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그러므로 좁은 길, 좁은 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첫째 : 양심에서부터 신앙 지침에 획선이 바로 서야 한다. 예를 든다면 태평양 바다를 건너가는 큰 기선은
지남침의 획선에 따라서 방향을 바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물결치는 파도가 많은 세상에서 좁은 문, 좁은 길 같은 그 획선을 양심에서 바로
가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는 신앙이라면 파선된 배와 같다(딤전1:19~20). 하나님은 위대한 신이시요 가장 세밀한 신이시니 양심 속에
조그마한 티와 같은 것이라도 잘못된 획선을 가진다면 하나님은 응답의 역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 싸우는 생활에서 가장 날카로운 말씀을 써야 한다. 만일 어떤 종이 말씀에 날카로운 칼이 없이
하나님 말씀을 아무렇게나 제 마음대로 이리 저리 갔다 붙여 이용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 사람은 밝은 진리 획선을 잡지 못한 자로서 자기도 죽고
대중을 죽이게 될 것이다.
셋째
: 분별력이 강해서 영적으로 멀리
내다보는 획선이 있어야 한다. 영계라는 것은 반드시 그 획선을 바로 찾지 못하면 얼마든지 혼란한 영계가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일4:1에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그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했던 것이다.
우리 영계 분별이라는 것은 먼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된 그 역사에서부터 금일에 우리에게 역사하는 그 영계의 획선이 있는 것이니 언제나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역사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마리아 몸에 잉태될 때부터 재림의 주를 맞이할 때까지 진리가 조금도 하나님의 말씀에서 혼선되지 않도록 역사하는
진리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영계를 분별할 때에 말씀의 획선을 바로 찾는 지식에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역사를 바로 분별해서 나갈 수
있다.
결 론
하나님은 기도의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할 일을 알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신다. 그러므로 기도의 사람은 양심의 원칙, 생활의 원칙, 노선의 원칙을 바로 찾아야 열매있는 생활이
있게 될 것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의
법
- 마 7:7~12
-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다 완전한
신이신 동시에 이것을 사람에게 주기 위하여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낼 때에 당신이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될 때에 아버지께서는 그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법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구하여야 준다는 법이다
(7, 8상반절)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준다는
것은 당신의 것을 당신과 의합된 자에게 준다는 것이다. 구하는 자에게 주는데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3가지 법이
있다.
첫째 : 자기의 부족을 깨닫는
마음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완전케 해 주실 것을 믿고 구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둘째 : 나 자체는 힘이 없고
아버지께서 힘을 주셔야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구하는 것이다.
셋째 : 나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인간이므로 아버지께서 알게 해 주므로만 알 게 된다는 것을 구하는 것이다.
자기 부족을 깨닫고 미약을 깨닫고
무식한 것을 깨닫고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받고 보니 감사할 것 뿐이라는 데서
일하게 되는 것이다.
2. 찾아야 찾는다는 법이다
(7, 8중반절)
사람이 무엇을 찾는 것이 없다면 그
사람은 완전한 정신을 가지지 못한 자라고 볼 수 있다. 동물이라는 것은 먹을 것만을 찾는 것이요 식물이라는 것은 수분을 찾는 것이요. 사람이란
자기의 만족을 찾는 것이다. 인생은 자기의 만족을 구할 때에 돈이 있다 하여도 만족이 없고 이 세상에서 명예가 높다 하여도 만족할 수 없고 많은
대중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가졌다 하여도 만족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보다도 더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땅의 것을 찾지
말고 위의 것을 찾으라고 골3:1에 말했다. 위의 것을 찾을 수 있는 인격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라고 하였다. 사람이라는 것은
그 인격 여하에 따라서 찾는 것이 있으니 위의 것을 찾는 인격을 가진 자라야 마음에 만족을 가질 수 있는 것을 찾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위의
것을 찾는 것이 있는 자라면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법이다. 왜냐하면 위의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인간은 알지 못하므로 위의 것을 찾는
자가 받는 것은 땅에 있는 사람이 찾는 것 이상에 더 좋은 것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3. 두드려야 열어 준다는
법이다 (7, 8하반절)
두드리는 심정을 가진 자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진 자이다. 남의 문을 두드리면서 열어 달라는 것은 그 만큼 강한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한 사명자가 되려면 인간이
감히 알 수 없는 세계로 들어가야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급한 사정이 있어서 무엇을 하려고 할 때에 주어야할 편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다하더라도 그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면서 달라는 것과 같다.
눅11:5이하를 보면 어떤 친구가
떡 세 덩이를 빌려 달라는 것이다. 밤중에 손님이 왔는데 대접할 것이 없으므로 친구의 집을 찾아 갈 수밖에 없었다. 친구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며 강청할 때에 친구를 보아서 주는 것보다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준다는 말씀이 기록되었다. 내가 먹기를 위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고 남을 대접하기 위해서 강청하는 것이니 그 사정은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양떼를 살리기
위하여 강하게 부르짖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 주모가 되는 일을 많이 한 이 기선 목사님은 은혜가 없다고 소문이
나서 교역자로 모셔 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한문 서당에 훈장을 하다가 산에 올라가서 나무 그루터기를 끌어안고 이레 동안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기도할 때에 양떼를 살릴 수 있는 종이 되게 해달라고 구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되는 날 큰 역사가 그에게 오므로
그때부터 놀라운 대 부흥사가 되어 이적 기사가 나타나고 간데 마다 대 부흥이 일어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강한
기도를 가르쳤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되 더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모략이있다. 이 모략이라는 것은 구하는 일과
찾는 일과 두드리는 일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환경에 몰아 넣고 그 환경 속에서 구하는 대로 찾는 대로 두드리는 대로 주시되 더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이다(9~12).
결 론
더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의 법은
총 대지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법은 인간에게 더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것이니 남을 대접하고자 하는 자에게 얼마든지 모든 것을 더 좋게 주신다는 것이다. 상급이라는 것은 남을 대접하는 자에게 주는
상급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인도와 두 가지
길
- 마 7:13~14
-
하나님은 자유의 신이신 동시에
인생에게 두 가지 인도와 두 가지 길이 있게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첫째 : 순종의 여부를 따라서
갚아준다는 뜻이요,
둘째 : 하나님께 합당한 자를
찾자는 것이요,
셋째 : 사람에게 요구하는 대로
이루어 주는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은 의로운 사람을
찾는 동시에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창조할 때에 두 가지 길을 갈 수 있는 인격을 주는 동시에 두 가지 인도가
있게 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두 가지 인도자
(슥3:1~5, 마4:1~11)
이 성경을 보면 반드시 대표적인
사명을 가진 종들에게도 사단의 피해도 있고 천사의 인도도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마귀도 천사도 하나님이 부리는 영이라고 본다. 왜
이렇게 하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첫째 :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인격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요,
둘째 : 하나님의 말씀으로 승리하는
역사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요
셋째 : 완전한 대표를 삼기 위한
목적이다.
예수님께서도 신성만이 아니요,
인성만도 아니요,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인격이지만 성신의 인도를 따라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에 나가서 오직 좁은 길을 가느냐, 넓은 길을
가느냐하는 두 가지 시험을 가지고 시험해 보았던 것이다. 아무리 이적을 행한다 하여도 넓은 길을 가게 된다면 불법이 되는
것이다(마7:22~23).
우리가 주의할 바는 아무리 사명을
맡은 자라도 두 가지 인도자가 나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알아서 잘 분별하되 이것이 하나님 말씀에 탈선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분별해야 될
것이다. 사단도 주의 종을 얼마든지 이끌고 갈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성신도 인도할 권리가 있는 데는 마귀도 법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요, 성신도 천사도
법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다. 불신자에게는 마귀 인도가 따로 있을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그들은 마귀에게 정복을 당해 있기
때문이다.
마귀는 어떤 방법으로 인도하느냐
하면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것 같이 하면서 미혹을 주는 것이요, 성신의 인도는 구속을 받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지는 자유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부모가 어린아이에게 무조건 자유를 준다는 것은 오히려 그 아이를 망치게 하는 것이요, 그 어린아이를 자유를 주지 않고 어머니가
붙들어 주고 안아주고 업어주는 것은 그 어린아이에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피해를 당하기 때문에 붙들어 주고 업어주고 안아서 보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신은 어린아이 같은
심령을 길러주기 위하여 조금도 잘못된 길에 서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항상 구속을 주는 것 같이 하지만 실지는 그 길은 사는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귀는 마음에 허황한 마음을 넣어주고 마음이 공연히 쓸데없는 일에 기울어지도록 만들어 놓고, 또는 하나님 말씀에 대하여 이상한 해석을
해서 사람의 마음에 임시 기분을 주는 일을 하므로, 사람들은 마귀의 인도하는 길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마귀의 역사는 사람의 마음을
붙들어 주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공연히 여러 가지로 치우치게 하는 마음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은 한 가지 획선이 있는데 그것을
생각지 못하게 하고 여러 가지로 이것 저것 생각이 나게 해서 이리 저리 치우치는 생활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을 마귀 미혹이라는 것이다. 하와에게도
이러한 시험으로 왔던 것이다.
첫째 :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볼
것이 아니라는 것,
둘째 :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
셋째 : 사람에게 절대로 피해가 오는
일은 없이 잘 될 수 있다는 것으로 꾀었던 것이다.
이러한 꾀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 오는 것이니 우리가 참으로 나를 인도하는 신은 어떠한 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친히 체험하는데서 분명히
분별해야 될 것이다.
금일에 많은 종들이 있지만 이것을
분별치 못하는데서 영계 혼선을 가져오게 되고 큰 실패를 당하게 되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무조건 다 하나님이 인도할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사랑하는 자에게 그 법대로 역사하는 것이니 언제나 두 가지 인도자를 들어 역사하면서
당신의 사람으로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되 여러 가지 시험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2. 두 가지
길
우리의 신앙 노선이라는 것은 두
가지 노선이 있는 것이니 여러 가지 방면으로 타협적인 노선을 갈 수도 있고 절대 타협이 없는 순교적인 노선도 있는 것이다.
모든 선지나 사도들이 걸어간 노선은
순교적인 노선에서 인정을 받고 묵시를 받아 글을 쓸 적에 모든 선지는 하나같이 같은 야곱이요, 시온의 자녀이지만 반드시 두 가지 노선이 있다는
것을 말할 때에 타협적인 노선은 심판 날에 망한다고 하였고 순교적인 노선을 승리의 왕권 받는 노선인 것을 가르친 것이니 언제나 소수의 사람이
순교의 길을 갔고 다수의 무리가 세상의 권리를 쥐고 세상 향락에 도취가 되어 순교적인 신앙 노선을 걷는 자를 오히려 무시하고 어리석은 사람의
하나로 인정했던 것이다.
홍수 심판시에도 수많은 셋의 후손이
다 노아의 방주를 부인하고 넓은 길을 갔던 것이다. 다윗 왕국의 말기에도 많은 사람이 참된 선지 예레미야를 무시하고 넓은 길을 가다가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메시야를 영접하는 때에도 많은 사람이 다 넓은 길을 가고 십자가의 길을 무시하다가 예루살렘이 다시 멸망을 한 것이다.
언제나 흑암의 인도라는 것은 자세히
성경이 읽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요, 또는 성경을 해석하되 비밀에 탈선된 해석을 하도록 하여 인생에게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마귀가 끌고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언제나 시대가 변천될 때에 소위
하나님만 공경한다는 자들이 다 속화되어서 넓은 길을 가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나타나서 역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알려주는 일이 없이는 그 비밀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지금 기독교가 소위 평화주의라는 간판 밑에서 소위 기독교의 사랑이라는 것을 가지고 세속화
신학이라는 것까지 말하게 된다는 것은 넓은 길이라고 본다.
이제 동방 땅 끝 한 모퉁이에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입에 말씀이 임하여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월간지를 내게 되는 것은 현 교계가 볼 때에 도저히 찾기가 어려운 세계의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어진다는 신앙 노선이다.
과거 선지시대에도 좁은 길이요,
은혜시대에도 좁은 길이요, 재앙의 날에도 좁은 길이 되는 비밀을 말한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란 것이다. 말세 재앙의 날에 남을 자는 쫓겨나는
자요, 미움받고 멸시받고 억압을 받고 지렁이 같이 짓밟혀 무시를 당하는 자가 새 시대를 이루는 역사의 선구자가 될 것을 말한 것은 기독교는
끝까지 좁은 길을 가는 자로 새로운 시대를 이룰 것을 뜻한 것이다.
결 론
의로운 심판이 있게 되는 것은 두
가지 인도자를 내세워서 두 가지 길을 가게 한 후에 심판을 내리는 것이니 심판 날에 남을 자가 되려면 좁은 길로 인도하는 인도를 받아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간 자에게 지상 왕국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과거에 모든 선지나 사도나 성도들이 다 좁은 길을 가다가 순교를 했고 이제
남은 종이 될 변화 성도도 좁은 길을 가다가 변화 승천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이라는 것은 좁은 길을 가던 자에게 왕권이 있게 되므로
성도의 나라가 오게 될 것이다.
열매를 보고 알아야 할 일
- 마 7:15~21
-
오늘날 많은 종들이 강단에 서서
자기가 가장 정통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정통이라고 하면서 열매가 없다는 것은 기독교의 큰 수치가 되는 일이라고 본다. 만일 어떤
농부가 농장을 경영하는데 무성하기만 하고 열매가 하나도 없다면 그 비극이야말로 누가 위로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많은 종들이 강단에
서서 많은 교인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열매가 되는 일이 없다면 가장 가련한 것이 기독교이다.
이제 열매를 보고 알아야 할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1. 거짓에는 열매가 없음
(15~16)
종교라는 것은 신앙 대상자의 역사가
없이는 아무런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라는 것은 겉모양을 내는 것이 목적이므로, 처음에는 옳은 것 같으나 다음에는 그 근본이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것이니 겉모양은 아름답지 못하다 하여도 중심이 하나님을 향한 자라면 처음에는 사람에게
오해를 주는 일이 있어도 다음에는 오해를 했던 사람들이 나타나는 열매를 보고 오히려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참된 종이 되려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조금도 없어야 하며, 하나님께만 보이려고 하는 중심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외식이 없는 사람에게만 열매를 맺도록
응답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외식이 있다면 그 때부터 하나님 앞에 큰 과오를 범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중심을 보시는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을 하신 것은 진실한 하나님과 대적이 되는 마음을 그들이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열매를 보고
알라고 하신 것은 외식이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역사도 하지 않기 때문에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2. 진실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있음 (17~18)
열매를 맺도록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려면 진실하신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아야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을
해 주시겠다는 언약이니,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일이 없다면 말씀대로 열매를 맺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좋은 나무가 되어야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서 살 때에 조물주
하나님의 역사가 없이는 완전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진실한 사람이 될 때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열매라는 것은 도덕을 초월한 하나님의 역사로 나타나는 것을 가르쳤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대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역사 아래서만 사람도 동물도 아름다운 열매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스스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하신 것이 아니요, 독생자 예수의 이름으로 구할 때에만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끔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역사로써만 좋은 나무의 가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좋은 나무는 인생 자체가 있을 수 없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있게
된다.
3. 열매를 따라 심판하심
(19~21)
심판이라는 것은 열매를 맺는 대로
갚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주님 다시 오시는 날에는 열매가 완전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많은 종들이 서로가 자기 신앙이 옳다고
주장하지만 주님 다시 오시는 날에 가서는 참된 종과 거짓된 종을 완전히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지금도 열매를 보아서 참된
종과 거짓된 종이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무가 좋으면 좋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며, 나무가 나쁘면 나쁜 열매를 맺게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참된 선지는 참된 사람을 열매로 나게 할 것이요, 거짓 선지는 거짓된 사람을 열매로 나게 할 것이다. 누가 참된
종인지 알려면 그 종을 통하여 나타나는 열매를 보면 된다.
오늘의 교회가 강단에 선 종들이
말씀을 증거할 때에 교인들에게 흡족한 은혜가 내린다면 열매는 자동적으로 맺게 될 것이다. 과거 사도들이 복음을 전한 후에도 사도의 계통을 밟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많은 열매를 맺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오늘의 종들이 그 계통의 사람이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어 그들과 함께 열매대로
갚아 주시는 재림의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계18:20).
결 론
좋은 나무의 그루터기는 예수님이요,
가지는 우리들이다. 그러므로 그루터기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 승천하셨고,
지금은 한량없는 은총을 나리시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좋은 나무의 그루터기 되시는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진액을 받으므로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
열매의
심판
- 마 7:1~21 -
서 론
하나님은 열매 없는 심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어떤 농부가 열매 맺기 전에 추수한다면 이것은 완전한 정신이 있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열매를 맺기를 기다리는 것이
사랑의 심정이요, 열매 맺은 다음에 심판하는 것을 공의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열매 맺기를 기다리는 것이 있는 다음에 심판이 온다는
것을 본문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자에게 좋은 열매가 맺혀 지느냐에 대하여 본문 성경에서 알 수가 있다.
1. 양심적인 회개가 있어야 한다
(5)
회개란 입에 있는 것도 아니요, 어떤
도덕 의식 수양이 아니라 이것은 양심속에 감추인 죄를 청산하는 것이다. 아무리 바리새교인의 교리가 옳고 도덕이 높고 수양이 높다 하여도 네 눈에
들보를 빼라고 주님은 책망했던 것이다. 예수님을 안식일 범죄자로 보는 바리새교인 마음속에는 근본적인 죄의 보장이 되는 욕심이 꽉 찼던 것이다.
들보란 정욕을 말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는다고 했으니 근본적 야욕 이것을 들보라 한다(요8:44). 만일 어떤 종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보려는 양심은 있으나 사람 앞에 열매가
좋지못한 문제보다도 사람 앞에 모든 것이 옳은 것 같으나 마음속에 야욕이 있다면 양의 옷을 입고 이리의 마음이 있는 거짓 선지일 것이다
2. 양심적인 봉사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12)
만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대접하는 마음이 없이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바리새교인의 기도다. 아버지의 심정은 양심적으로 남을 대접하고자 하는 양심을 가진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먼저 주고 싶어하는 심정을 가졌다는 것을 비유로 주님은 말씀할 때 아들이 생선을 달라면 뱀을 줄 자가 있겠느냐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주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남에게 대접하라고 하셨다.
만일 어떤 종이 양떼가 기갈을 당할까 봐 안타까운 심정에서 눈물겨운 심정을 가지고 강단에 선다면 이 종을 통하여 하나님은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누구든지 중심에 남을 잘되게 유익하게 해 보겠다는 마음만 간절하다면 이것은 열매맺는 나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남이 대접하면 화평을
말하고 대접하지 아니하면 불평을 둔다는 것은 거짓 선지의 행동이라고 미3:5에 말한 것이다.
3. 항상 조심하는 마음이 있는
자다 (13~14)
이 조심이란 소망이 확실한 빛의
양심에서 적은 일 하나라도 잘못이 있을까봐 삼가는 신앙노선은 좁은 길이라, 험한 길이라 하는 것이다. 만일 신앙노선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험해도
가고 좁아도 간다는 이것이 없이 자기 멋대로 한다는 것은 방랑적인 넓은 길이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잘못될까봐 조심하는 사람에게 지혜도 주고
또는 인도하기도 하고 붙들어 주기도 하는 것이다(눅21:34).
만일 어떤 종이 은혜를 받고 사명을
맡고도 항상 삼가고 조심하는 것이 없다면 이 사람은 생명 길을 걸어가는 생활을 도저히 갈 수가 없을 것이다. 진보란 항상 조심하는 그 마음과
바로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은 넘어지지 않도록 인도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길이 협착하다고
가르치셨다.
열매라는 것은 그 사람 자체에서 있을
수 없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본질만 가진 자라면 필연코 열매 맺도록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나무라야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고 가르친 것이다(17). 우리는 열매가 맺어지지 않는다고 낙심말고 좋은 나무가 되는 양심적인 생활이 있느냐 하는 것을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
결 론
주님은 영안이 밝으시고 무소부지하신
신이시지만 금일에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일은 경솔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이것은 주님께서 중심적인 회개와 중심적인 봉사와 중심적인 조심하는
일이 있는 자라면 열매를 맺도록 역사해 준다는 것이 본문성경에 지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과 뜻을 살피신다는 것은 마음과 뜻을 보시고
역사 해주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농부가 못된 나무인줄 알면서
가꾼다면 실패 중 실패일 것이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라면 하나님은 열매맺도록 해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요15:1). 심판이란 좋은 열매를
거두어서 새로운 시대를 이루기 위한 목적 밑에서 행하는 것을 심판이라 하는 것이다.
불법을 행하는 자의 비극
- 마 7:22~23
-
가장 불행스럽고도 부끄러운 일을
당할 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불법을 행한 자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수고를 하고도 제일 큰 화를 받기 때문이다. 차라리 하나님을 모르고
종교를 모르고 살던 사람보다도 하나님을 안다하며 종교적인 지도자라 하면서 불법을 행했다는 것은 큰 비극이라고 보게 된다. 선지 국가의 왕조가 될
사울 왕이 불법을 행하므로 받은 화나, 엘리 제사장이 불법을 행하므로 받은 화나 다 비극의 하나라고 보게
된다.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한다 하면서
불법을 행하는 자는 어떠한 자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은혜를 악용하는 일
(22상반절)
아무리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성직을 이용하여 자기의 주권이나 명예나 물질이나 안락을 취했다면 이것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집에 도둑이 되기 때문이다.
은혜로써 성직을 받았다면 끝까지 은혜로써 끝을 맺어야 할 것이다. 불법이라는 것은 원칙을 떠나는 것을 가르쳤다.
종된 자의 원칙이라는 것은 세 가지
원칙을 떠나면 불법이 된다.
첫째 : 하나님만 영화롭게 한다는
원칙이 있어야 된다.
내가 괴로워도 죽어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절대로 순종한다는 원칙을 떠나면 불법이 된다. 종된 자는 주인이 하라는 것 외에 자기의 주관을 세운다든지 자기의 이익을 탐한다는 것은
불법이 되는 것이다.
둘째 : 남을 살리는 일에 원칙을
세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낸 목적은
죽을 인생을 살리겠다는 것이 목적이다(요일4:9~11). 누구든지 인생을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원칙을 떠나면 불법이 된다.
셋째 : 진리를 사수한다는 원칙을
떠나면 불법이 된다.
아무리 진리를 증거한다 하여도 그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희생이 없다면 그 진리의 자체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 불법이 되는 것이다.
2. 이적을 악용하는 일
(22하반절)
하나님께서 이적을 행할 수 있는
은사를 주신 것은 이적을 위한 이적이 아니고 진리를 위한 이적이다. 그러므로 이적을 악용하는 일은 무엇이라는 것을
말한다.
첫째 : 이적을 행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자기 앞으로 이끌어 보려는 일이다.
주님께서 이적을 나타내는 것은 어떤
종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 목적인데 이적을 행할 때에 나는 이 만큼 영계가 높은 자라 하는 것을 내세우든지 내가 어느 종
보다 옳다는 것을 내세워서 양떼들이 자기만을 따라오게 만드는 것을 목적 둘 때에 사단은 기회를 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이적이 나타날
때에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까지 말한 것은 이적을 보고 많은 사람이 공연히 따라 오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다. 진리를 목적하지
않고 이적을 보고 따라 오는 무리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둘째 : 이적을 행하므로써 자기의
어떤 영리를 취하는 일이다.
연보를 많이 내면 기뻐하고 적게
내면 많이 내라고 강조하면서 병을 고침 받고도 감사 할 줄 모르면 오히려 저주가 된다고 하는 말을 써서 위협을 준다는 일은 결말은 불법적인
행동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원칙을 세우자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준 것이니 거저 주는 것 뿐이요, 그 밖의 무엇을 요구한다는 것은 불법이 되는
것이다.
셋째 : 이적을 행할 때에 그
사람의 생명을 구원해 낸다는 진리 운동을 목적하지 않고 이적이 나타나면 하나님께서 내게 역사하니 나는 조금도 진리에 잘못된 것이 없는 사람인 줄
생각을 하고 하나님 말씀의 깊은 도리를 바로 전하는 일에 전력을 두지 않으면 불법적인 일이 될 것이다.
이적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바로 전하기 위한 목적에서 보여준 것인데 진리의 도리를 바로 가르치는 일을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 적극 순종해야만 될 것이다.
3. 주께서 인정할 수 없는
일 (23)
주께서 베들레헴에 나신 것은,
말씀대로 죽기까지 순종하려 오셨고 다시 오시는 것은 말씀대로 순종한 자를 일한 대로 갚아 주려고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에 떠는 자라야
재림의 날에 설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이제 말씀대로 갚아 주시는 일에
있어서 세 가지로 되어 있다.
첫째 : 말씀대로 중심이 성결한
자라야 주 앞에 설 수가 있다.
마음에 성결이 없다면 벌써 그
마음이 하나님 말씀과 합치된 마음이 못되기 때문이다.
둘째 : 활동한 일이 말씀에 맞아야
한다.
아무리 활동을 했다해도 그 활동이
그 진리에 합한 일이 못된다면 그 한 일에 대하여 주께서 인정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셋째 : 말씀을 전했다 하더라도
전한 사람의 그 생활이 그 말씀과에 합치된 생활이 못된다면 말씀을 전했다 하더라도 그 일에 대하여 주께서 말씀을 전한 자에게 갚아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말씀과에 대적이 되는
생활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자는 그 말씀이 인격화되고 생활화 되므로써 전한 자라야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결 론
인생이라는 것은 진노의 날에 인정을
받는 인격이 될 때에 큰 축복이요 인정을 받지 못할 때에 영원히 화를 받는 비극이 될 것이다.
지혜로운 일과 인간 종말
- 마 7:24~27
-
지혜로운 일이라는 것은 종말에
가서야 알 수 있다. 오늘날 모든 인간들은 현재의 것만을 보고 머리를 쓰고 기술을 부리고 자기의 전생을 바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하는 일의
종말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성서에 비추어 본다면 어리석은 자의 하나인 동시에 가장 불행스러운 생활인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수고가 오히려 불행을
이루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일과 인간 종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서를 들어서 증거한다.
1.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마13:23)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생활이 있는 자이다. 우리 인간의 지혜라는 것은 과학에 국한된 지혜이므로 하나님이 창조한 물질을 편리하게 사용하는 일 밖에는
더 발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들이 물과 불을 바로 쓸 때에 땅으로 달릴 수도 있고 공중으로 나를 수도 있고 사람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무엇을 만들 수도 있게 되었다.
모든 일을 인간 노력으로 하는 것
보다도 물과 불의 힘을 통하여 사용하는 지혜이다. 과거 사람들은 물과 불로는 음식을 만드는 일에 쓰는 것 뿐이었으나 오늘날 인간들의 지혜는
자기의 힘으로 하지 않고 물과 불을 사용하여 그 몸까지라도 이 힘에 의하여 활동하고 있는 단계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 인생의 가치가 무엇인 것을
알게 되고,
둘째 : 인간의 할 일이 무엇인
것을 깨닫게 되고,
셋째 : 앞으로 나갈 방향이 어느
길이 가장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동시에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계에 들어가게 되므로 하나님의 역사의 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깨닫는 길이 두 가지가
있다. 정신 작용으로 깨닫는 일이 있고 영적으로 깨닫는 일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는 영의 사람이 되므로 무슨 일이나
하나님의 신의 교통을 받게 되니 신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간 종말이라는 것은 말씀을 세계적으로 전한 다음에 바로 깨닫는 자로서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2. 말씀을 증거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자 (계20:4)
가장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증거 하다가 목숨을 바친 자이다. 인간이 볼 때는 어리석은 자 같으나 가장 복되고 영화로운 자는 말씀을 깨달아서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던 자이다. 왜냐하면 세세 왕권을 받을 자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다가 평안히 죽는 사람을 복 있는 자라고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가장 어리석은 자가 부요한 생활을 하면서 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이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고 가치 있는
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증거하기 위하여 부모와 처자와 전토를 버리고 목숨까지 버린 자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집을 짓는 건축자가 영구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영구한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집을 짓듯이 영원한 세세 왕권을 목적으로 하고 생애를 바치는 자가 가장 지혜로운 일을 하는
자이다.
3. 주님 오실 때까지 진리를
바로 전하는 자 (마24:45~47)
이미 죽은 자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숨을 바친 자가 복 있는 자요 살아서 주님을 영접할 자는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 되어 때를 따라 진리의 양식을 나누어주는
종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가장 지혜로운 자는 진리를 바로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재림시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종은 더욱 지혜로운 종이 되어서
일을 하여야만 된다. 가장 복 있는 자는 주님 재림시에 지혜롭게 행하는 종이라고 모든 선지는 가르쳤다. 그러므로 성경에 중점을 두고 가르친
말씀은 진노의 날에 지혜롭게 일을 하다가 남은 자가 되어 새 시대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결 론
가장 지혜로운 자는 말씀을 듣고
행한 자라고 주님은 가르쳤다. 아무리 어리석은 인간이라도 말씀 그대로 순종하는 자라면 가장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이니 어리석은
인간들은 멸시를 하지만 가장 큰 축복을 인간 종말에 받을 자이다.
세례요한의 인격과 축복
- 마 11:2~15 -
서 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신이 아닌지라 실족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말할 때 주님을 향하여
실족치 않아야 된다는 것을 말했다. 세례요한은 어떠한 인격이 있었다는 것을 본문은 증거하고 있다. 주님은 인생의 약점을 아시기 때문에 요한을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큰 자라 했던 것이다. 즉 사람 중에 큰 자라하는 것이다.
이제 요한의 인격에 대하여 본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경홀치 않는 인격 (2~3)
요한은 예수께 대한 소문을 옥중에서
들었다. 사람에게 전해온 말을 들을 때 신이 아닌 요한은 마음에 의문되는 점이 있었다. 이것은 전해지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말이란
예수께 대한 좋지 못한 평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요한은 악한 헤롯왕에게 억울하게 옥에 갇힌 것은 헤롯왕이 동생의 아내에게 장가들은 것을
책망한 죄로 옥에 갇혔기 때문에 극도로 헤롯왕은 요한을 미워하고 예수를 악평하는 무리들을 통하여 말을 들을 때 먹기를 탐하며 병을 고치되
안식일을 범하고 또는 아무런 가치 없는 사람들만 가까이하고 사귄다는 이러한 말만 듣게 된 것이다.
그는 전하는 말에 경홀히 움직이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비밀로 사람을 예수께 보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행하신 그 사실을 분명히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종들이
전하는 말만 듣고 경홀히 비판하면 그 말에 충동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요한에게 배워야 될 것이다. 만일 요한이 사람을 보내지 않고 전하는
말만 듣고 움직였다면 크게 실족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2. 선지자 보다 나은 인격이다
(9)
모든 선지는 앞으로 될 일을 미리 보고
글을 기록한 것 뿐이다. 세례요한은 직접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준 사람이니 선지자보다 높다. 다시 말하자면 주님의 길을 직접 예비한 자다. 과거의
선지자는 이러한 사람이 오리라는 예언을 하였지만 세례요한은 오는 사람을 직접 영접하고 인도하고 소개해준 자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선지자 보다
낫다는 것은 그만큼 귀한 사명을 가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은혜시대의 영계 사명자보다도 재림의 날에 살아서 주님을 영접하는 자의 영계가
높다는 것과 같다.
3.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제일
큰 자다 (11)
세례요한은 여자가 낳은 모든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눅1:15에 보면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다고 하였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가 되었지만
세례요한은 모태부터 성신의 충만함을 받았다. 예수님은 신성으로 잉태되었지만 세례요한은 인성으로 출생을 하되 모태로부터 성령을 충만히 받았다는
것이다. 눅1:42를 보면 성모 마리아의 문안하는 소리를 엘리사벳이 들을 때 태중에서 요한은 기쁨으로 복중에서 뛰놀았다고 하였다.
이것은 성령으로 역사된 것이며, 이것을
본다면 세례요한은 보통 속된 사람과는 달라서 모태에서부터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함은 세례요한의 역사는 율법시대 역사의 끝을 맺는 것뿐이니 하늘 왕권의 최고의 왕위에는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은
잠깐 증거하고 예수님을 소개한 것뿐이고 여기에 작다는 것은 왕권을 받는 지위에 국한된 것뿐이다.
4. 축복 (14)
세례요한이 인간 중에는 복 있는 자라고
보게된다. 날 때부터 거룩하게 살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위하여 앞길을 여는 사람이 되었으니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많은 제자를 전도하여
예수께 인도한 것이니 복 있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만일 세례요한이 경솔히 움직였다면 요한도 실족한 자로서 실패에 들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를 소개하되 정직하고 겸손한 분이라고 소개하였고 또한 경솔하지 않고 끝까지 옥중에서 참은 사람이니 성신강림 되기 전 율법시대
사람으로는 복 있는 자라고 볼 수 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자
- 마 11:25~30 -
서 론
주님은 자체가 생명이요, 능력이요,
사랑인 만큼 당신의 사람을 가르치되 이론으로써가 아니고 실천적인 체험에서 배워지게 하는 것이 주님의 교훈이다. 만일 주님께서 이론으로만 말하고
실천에서 배워지게 하는 역사가 없다면 생명의 구주된 자격을 가질 수가 없을 것이다. 배워지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가 있다.
1. 주님은 온유한 인격을 가지고
멍에를 메는 자에게 배워주고 있는 것이다 (25)
아무리 당신의 사람이 실수가 있다 해도
온유하게 대하는 것이 주님이 가르치는 교훈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어도 주님은 온유한 심정으로 그를 대하여 바로 배워지도록 하였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천 구백 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을 두고 항상 온유로 대하시는 역사이다. 사람이 참으로 배워지는 것은 억압적인 교훈에 있는
것은 아니다.
2. 주님은 겸손한 자리에서
멍에를 멘 자에게 배워지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28~29)
겸손이라는 것은 더러운 죄인을 불러서
주님 대신 역사하는 위대한 인격을 만들어 놓겠다는 것이 주님의 겸손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당신의 사람을 쓸 적에 그 사람을 받들어 주는
봉사의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시는 것이다. 약한 자를 강하게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피곤한 자를 소성케 하기 위하여 항상 받드는 심정에서 기도하는
것을 겸손이라 하는 것이다.
3. 책임감을 가지게 하시면서
배워주는 것이다 (30)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약할 때에
강하다고 한 것은 극도로 약해져도 필연코 승리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말하게 하는 것이다. 금일에 주님께서 우리가 피곤해서 쓰러져 넘어지게 한
주님이라면 그는 완전하신 주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 같으나 주의 멍에를 메고 나가는 사람은 결국 가볍고 쉽게 이루어지고
만다는 사실을 체험케 할 것이다.
결 론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은 완전한 사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불러서 완전하게 역사하는 것이 기독교의 완전한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멍에를 메고 배우는 것이 생명의 말씀으로 오는 교훈이다.
주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자
- 마 11:28~30
-
인간생활의 가치는 배움에 있다고
본다. 정신 작용으로 배워지는 활동에서 물질계가 화려해질 수 있고, 영적으로 배워지는 생활에서 화려한 세계를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신
작용으로나 영적으로나 배워지는 생활에서 인간의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조그만 그릇에 담긴 물이 불의
힘으로 끓는 것을 깊이 생각할 때에 배워지는 것으로 오늘날 물과 불의 힘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빨리 다닐 수 있는 세계를 이루었고, 작은 골방에서
책 하나를 들고 배워지는 생활은 정신작용으로 배워진 것보다도 더 빠른 교통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을 영계 생활이라고 한다.
그러면 주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는 생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본문을 들어서 말한다.
1. 무거운 짐을 벗어야 함
(28)
인생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무거운
짐을 지었다고 본다. 이 짐이라는 것은 지고 싶어서 지는 것이 아니고, 벗고자 해도 벗을 수 없는 무거운 짐이다. 이 짐을 지고 가는 자들은
인간의 가치를 상실한 생활을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 짐
하나를 벗겨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많은 영도자가 있지만 이 짐을 벗겨 줄 자는 오직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왕의 아들로서
옥중 방문을 한 일이 있었다. 옥에 간 왕자는 죄수들에게 “무슨 죄를 짓고 이렇게 옥에 와서 고생을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모든 죄수들은
왕자 앞에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인데 억울하게 옥에 갇혔다”고 하는 것이다. 그 때에 죄수 한 사람은 왕자 앞에 공손히
엎드려서 하는 말이 “저는 백 번 죽어도 마땅한 죄를 지었는데, 이날까지 내 생명이 살아서 있다는 것은 임금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자는 이 죄인에게
말하기를 옳은 사람만 사는 옥중에서 죄인 혼자 있을려니 얼마나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냐고 하면서 당신은 이곳에서 나가 자유롭게 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에
오실 때에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시면서 인간들의 무거운 죄의 짐을 벗겨 주기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죽어서
죄인들에게 참된 자유를 주는 역사를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무거운 죄의 짐을 벗어버린 자는 주님의 멍에를 멜 자격이 있다. 죄 값으로
헛된 수고를 하다가 영원히 멸망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 사망의 법을 벗어나서 주님의 멍에를 메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2. 주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심
(29)
주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사람을
향하여서는 항상 온유하시고 겸손하시다. 택한 사람이 아무리 주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 있다 하여도 온유하게 대해 주시는 것은 택한 사람을 바로
깨닫게 하여야 될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요일5:20).
그러므로 사울이 아무리 주님을
핍박하는 사람으로 다메섹을 향하여 갔지만, 주님은 나타나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서 말씀하실 때에도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깨닫게 해주셨다. 주님께서 바리새교인을 대할 때에는 독사의 자식이라고 하시면서, 죄인들을
대할 때에는 온유하게 대해 주신 것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죄가 없어도 당신을 대적하는 자는 화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시었고, 알지를 못하고 죄를 지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대하실 때에 언제나 눈물 흘리는 심정으로 대해 주셨던
것이다.
주님께서 온유와 겸손이 없이
대하신다면 우리는 감히 주의 멍에를 메고 배울 수가 없는 인간들이다. 나는 40년간 신앙 생활에 19세에 교회의 성직을 맡아 가지고 오늘까지
배워진 것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이다. 내가 주를 위하여 일을 하다가 넘어지고 실수가 있을 때에 은혜를 더욱 풍성히 내려 주시는 그 은혜를
받았으므로 믿는 형제가 아무리 실수가 있어도 그 형제에 대하여 조금도 무시할 수가 없다. 이것은 주님께서 나에게 그렇게 대해주셨으므로 나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형제의 실수를 보고
혈기를 낸다든지, 무시를 한다든지, 악평을 한다면 이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의 멍에를 멘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아무리
주의 일을 한다 하여도 자기 멍에를 멘 사람이지, 주의 멍에를 메고 나가는 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멍에를 메고 밭을 가는 소는
쟁기를 쥔 주인의 원하는 대로 움직일 것뿐이다.
이와 같이 주의 멍에를 멘 자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께서 지도하시는 대로 순종할 것뿐이지, 한 사람이라도 주님이 용서하는 자를 멸시하거나 압박하거나 저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주의 멍에를 메었기 때문이다.
3. 쉽고 가벼워짐
(30)
주님께 배우는 생활은 극도로
쉬워지고 가벼워지는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 주의 멍에는 승리의
멍에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으므로 그 멍에는 주님의 승리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힘이 하등 필요가 없고, 주의
승리의 능력이 오므로써 배워지는 인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둘째 : 주의 멍에는 능력의
멍에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당신이 승리하신 다음에 능력을 주어서 역사하시는 것은 왕권 받을 인격이 이루어 지도록 역사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자는 인격적인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역사로 말미암아 배워지는 생활이 있게 된다.
셋째 : 주의 멍에는 사랑의
멍에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역사라는 것은 하나도 억지가
없고 불타는 사랑에서 오는 역사이니 그 사랑에 이끌려 가는 자는 무슨 일을 당하든지 가벼워지는 힘을 얻는 것은 우리 주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사람은 주의 대행자가 되는 것이니 주의 명령에 순종할 것뿐이다.
결 론
주님께서는 택한 자를 배워 주실
적에 쉽고 가볍게 일하도록 배워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의 능력의 역사가 우리에게 와서 역사하시므로 배워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말로 성령을 거역하는 죄
- 마 12:22~37
-
사람의 입이 여러 가지로 죄를 많이
짓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 하나님의 말씀을 혼선시키는
말을 하는 일이다.
이것은 하와가 마귀에게 미혹을 받을
때에 당한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가감하는 말을 할 때에 마귀에게 먹힘을 당할 첫째 조건이 되는
것이다.
둘째 : 남을 판단하는
말이다.
이것은 경솔히 보는 대로 듣는 대로
말하는 일인데 망령된 말이 되므로 자기가 스스로 망하는 일이 있게 된다. 미리암이 모세를 판단하다가 자신이 저주를 받게 된 거와 같이 되는
일이다.
셋째 : 성신을 거역하는 말인데
이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들어서 말한다.
1. 성신의 역사를 마귀의
역사라고 하는 말이다 (22~25)
예수님께서 귀신이 들려 눈이 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칠 때에 바리새 교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마귀를 쫓아낸다고 한 말이 성신을 거역하는 말이다. 이것은 직접 성신의
역사를 보고도 짐짓 반대하기 위하여 마귀의 역사라고 말하는 일인데, 이런 자들은 금생 내생에 사함 받을 길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남을 함부로 마귀라고 하는
것은 가장 크고도 두려운 말이다. 우리는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진리를 가감하는 자에 대해서는 진리가 혼선되지 않게 분명히 말해야 된다. 하와는
말씀을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데서 마귀에게 미혹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분명히 밝혀 본문대로 말해서 이 말씀에 가감되는 것을
반대하는 것 외에는 공연히 남이 역사하는 것을 마귀라고 한다는 것은 삼가 조심할 일이다.
2. 참된 종을 유혹하는
자라고 하는 말이다 (마27:62~64)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사람을
유혹하는 거짓 선지라고 정죄의 말을 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메시야는 이럴 수가 없고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올 것이라는 생각에서
예수님의 하는 일을 유혹하는 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네가 볼 때에 어리석은
죄인들이 따라가서 어리석어서 미혹을 받았다고 생각하여 자기네 정통 교파가 되는 바리새교는 이런 일에 절대로 유혹을 받지 말라고 강조했던
것이다(요7:12). 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니 저주를 받으리라고 했던 것이다(47~49). 왜냐하면 율법에 어긋난 일인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길을 가고 죄인의 집에 함부로 가는 것을 보면 율법을 모르는 것이라고 판단을 나렸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성신의 역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소위 학사, 박사라는 지위에서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은혜를 받는 것을 볼 때에 떠들고 날뛰는 것은 다 마귀 미혹이라고 보는 자들이
있다. 아무런 것도 체험을 못한 교만한 자들이 성신의 체험을 받는 일을 미혹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크게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말이다 (행24:5)
소위 정통파라는 자들이 자기네
교파를 지지하지 않으면 덮어 놓고 이단이라고 정죄한다는 것은 성신을 거역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바리새교인들이 바울을 염병 같은 이단이라고
정죄한 이유는 자기 교파에 있던 사람이 자기 교파를 거역하고 나갔다는 조건에서 정죄했던 것이다.
4. 의인을 죄인이라고 하는
말이다 (요9:24~25)
바리새교인들은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인정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대제사장의 정한 규례를 지키지 않는다는 조건에서였다. 오늘날에 와서 함부로 남을 죄인이라고 판단을 나리며 자기의
주권에 순종치 않으면 나쁜 사람이라고 인정을 하는 것은 성신을 거역하는 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죄인이라고 인정을 하였다는 것은
얼마나 교만한 사람들이며 마음이 어두운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성신을
거역하는 말을 하지 않도록 해야 된다. 누구든지 말로 성신을 거역하면 금생과 내생에 사함이 없다는 것을 볼 때에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네 말이 네 죄를 정하고 네 말이 너를 의롭다 한다는 말씀을 깊이 생각을 하고 성신을 거역하는 말을 할까봐 조심해야 되는데 함부로 말을
하기 때문이다(마12:32~37).
누구든지 마음에 성신이 충만한 자는
말을 할 때에 성신으로 말을 하게 되고, 사단이 충만한 자는 말을 할 때에 사단으로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니 함부로 남을 마귀라, 미혹하는 자라,
이단이라, 죄인이라 하는 말은 사단이가 많이 하는 것이다.
결 론
세상에 제일 악한 자는 성신을
거역하는 말을 하는 자이다. 이 말은 대부분 교회 안의 지도자 측에서 많이 한다. 이것은 교회를 망치는 일이
된다.
허락이 있어야 아는 비밀
- 마 13:10~17
-
비밀이라는 것은 일을 새로이
계획하고 행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다. 악한 자는 악한 계획을 할 때에 숨은 비밀이 있고, 선한 자는 선한 일을 새로이 하려고 할 때에 비밀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언제나 새로운
역사를 할 시대가 올 때는 그 시대의 비밀이 있는데 그것을 먼저 합당한 자에게 알도록 허락한 다음에 그 허락을 받은 사람이 선구자가 되게 하여
그 시대의 빛이 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먹고 입고 사는 것은 세계 인류에게 다 같이 허락한 것이지만 당신의 비밀을 아는 것만은 누구든지
다 알게 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택한 자에게 알도록 허락이 있으므로 알게 되는 것이다.
택한 자에게 비밀을 알도록 허락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진실함이 있는 자에게
알게 하심 (10~11)
택한 자라는 것은 진실한 자이다.
아무리 인격과 지식이 훌륭하다 하여도 택함을 받지 못한 자는 진실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거리에 수많은 사람이 왕래하고 있었지만
참으로 진실한 사람이 아니고 교권, 명예, 안락을 도모하는 종교인들 이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 시대의 숨은 종교인의 하나가 되는 어부들을
택하여 그 비밀을 알게 했던 것이다. 비밀이라는 것은 새로운 일을 계획한 자가 알려주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나사렛 목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민의 구주요, 그로 말미암아 온 세계 인류가 구원을 받고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진다는 비밀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
비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비밀을 알려주는 자가 아니고는 예수를 믿을 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마24:25~27). 인간이 볼 때는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라고 보게 된다.
만일 하나님의 비밀을 인간의
두뇌로서 허락이 없이 안다면 하나님과 인간과는 동등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조물주 하나님의 비밀을 두뇌로 안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허락해 주어야만 알게 된다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 운동이라는 것이다.
2. 완악한 자가 깨닫지
못하도록 하심 (13~15)
하나님께서는 완악한 자들에게는
오히려 깨닫지 못하는 신을 부어 주신다(사29:10~12, 사 66:4). 하나님께서 법을 세울 적에 순종치 않는 자는 마귀가 지배하도록 법을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하나님의 종이라도 하나님을 순종치 않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마귀가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장 거룩한 신이시니 거룩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만 당신의 비밀을 알도록 하기
때문이다.
3. 정한 때가 될 때에
비밀을 알려 줌 (16~17)
모든 선지는 메시아를 영접하기를
원하는 마음 간절하였으나 그들은 메시아가 올 것을 받아 기록하고도 때가 아니므로 다 세상을 떠나가고 주님 탄생시에는 아무런 선지의 역할이
400년 동안 없었던 것이다. 너무나 잠잠하고 희미한 상태에 내려간 것이 400년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극도로 예루살렘 성전은 부패하였고
참으로 진실한 사람을 찾아 볼 수가 없는 예루살렘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갈릴리에 있는
어부들에게는 비밀을 알게 해 주시고 예루살렘에 왕래하는 대제사장, 유사, 장로 등의 무리들은 이 비밀을 아는 것은 허락지 않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바알세불이 들렸다고 까지 말했던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 말하여도 짐짓 더 악해진 것이 비밀을 모르는 유대교인들의 행한 일이라고
본다.
하나님은 언제나 역사할 때에 당신의
비밀을 알려 주되 미약한 자, 어리석은 자에게 알려주고 교만한 자, 부(富)한 자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으므로 권리를 가진 종교인과 정치인이 그들을
반대하고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모든 선지에게 비밀이 묵시로 나타날
때에도 모든 부패한 정치인들과 종교인들이 그 종을 반대하게 되었고 그 선지 예언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때에도 메시아 탄생을 모르고 반대하는
무리들과 비밀을 안 사람들과 큰 싸움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비밀을 아는 종과 모르는 자와의 큰 싸움이 있어서 교회는 반드시 갈라지게 될
것이다.
결 론
가장 복 있는 자는 그 시대의
비밀을 알도록 허락을 받은 사람이라고 본다. 알게 허락한 것은 그 복을 주기로 작정한 증거라고 본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비밀이 깨달아지는 자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자라고 본다.
깨닫는 자의
열매
- 마 13:18~23
-
피조물된 인간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인격을 가진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데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인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깨닫는 자라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받는
일이 없이는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니, 그 말씀을 깨닫기만 하면
열매가 나타나는 것은 말씀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이제 깨닫는 자의 열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증거한다.
1. 감정적으로 각오한 자의
생활 (20~21)
감정적인 사람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결국에는 감정으로 끝을 맺고 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좋은 말을 할 때에 자기의 인격에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못하고
좋게 된다는 그 말에만 감정을 받는 자의 생활은 뿌리 없는 꽃과 같다. 땅에서 자라는 꽃과, 병에 꽂힌 꽃이 같은 시간에 아름답게 피었다하여도
꽃병에 꽂힌 꽃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잠깐 후에는 시들어 버릴 것이다.
이와 같이 돌밭에 뿌린 씨와 같은
사람의 생활이라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 독립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남의 감정에 끌리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데 돌밭에 뿌린 씨는 비가 올
때에는 그 수분을 흡수하여 싹이 나서 자랄 수 있지만 위에서 오는 수분이 없는 가뭄이 올 때에는 그 땅 자체에 수분이 없으므로 말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 때 그 때에 부딪히는 환경에 따르고 어떤 사람의 힘에 끌리는 인격이라는 것은 완전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감정에 끌리는
피동적인 인격에서 일생을 보내고 마는 것이다.
2. 유혹에 끌리는 자의 생활
(22)
유혹에 끌리는 사람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잘못을 범하는 생활을 하는 자이다.
첫째:보는 일에 있어서 바로 깨닫지
못하고 끌리는 대로 생활하는 자이며, 둘째:먹는 일에 있어서 바로 깨닫지 못하고 끌리는 대로 생활하는 자이며, 셋째:육적 정욕에 끌려서 바로
깨닫지 못하고 마음대로 생활하는 자이다.
자기 마음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보는 대로, 먹는 대로, 육의 정욕이 발생하는 대로 끌려가는 것은 유혹에 끌린 자의 생활이다. 이런 자의 생활은 아무런 주관도 없이 닥치는
대로 살아가자는 것이다. 가시덤불에 뿌린 씨는 자라기는 하지만 자유롭게 자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말씀을 믿으면서도 말씀을 통하여 오는 역사를
받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과 그 마음 사이에 유혹의 역사가 가리워있는 증거이니, 이러한 자는 자유로이 활동을 하지를 못하게 된다.
3. 깨닫는 대로 열매를 맺는
자의 생활 (23)
이 사람은 깨닫는 자체가 인격적인
체험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의 확실한 소망을 가지게 되므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싸우는 생활에서
승리의 열매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세 가지로 구분을 지을 수 있다. 정신 작용으로 깨닫는 일도 있고, 기술적인 방면으로
깨닫는 일도 있고, 영적 체험으로 깨닫는 일도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영적 체험으로 깨닫게 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깨달음이라는 것은
정신 작용이나 인간의 노력을 초월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체험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자력에 국한된 세계에서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신의 세계에서 오는 것을 받게 되는 데서 열매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조물주 하나님의 신의
역사를 말씀대로 체험하는 인격을 가지는 동시에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생활에 들어갈 때에 초인간적인 열매를 맺으므로 모든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생활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이 열매로만 최고로 발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신 작용이나
인간 노력에 국한된 생활에서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열매가 없고, 오직 조물주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역사를 받으므로 만족한 생활에서
영원한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결 론
완전한 열매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바로 깨닫는 사람에게 있다. 그러므로 완전한 그리스도의 왕국은 완전한 열매를 맺은 사람으로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택한 자를 위한 천사의
역사
- 마 18:10
-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비록
소자라도 택한 자라면 저희 천사가 하늘에서 하나님 앞에 역사하고 있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택한 사람은 세상에서 사는 생활의 전체를 하늘에서
천사가 맡아서 도와 주기도 하고, 그의 되어지는 모든 일을 간섭하되 상 받을 일이나 책망 받을 일을 보살피고 있는 것이다. 택한 사람이 세상에서
살면서 일한 모든 것은 다 하나님 앞에 가서 쌓여지는데 이것을 위하여 천사는 쉬지 않고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인간들이 볼
때에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택한 자녀라면 하늘에서는 그를 위하여 천사들이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정부가 아무리
세밀하게 국민들을 다스린다고 하여도 하늘 보좌 앞에서 택한 자를 위하여 다스리는 것처럼 세밀하지는 못하다고 본다. 아무리 강한 나라의 정부라도
시민 한 사람에 경찰 하나씩 두고 살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 한 사람에 천사를 하나씩 세워서 보살피게 하신다.
이제 택한 자를 위하여 천사가
역사하는 일은 다음과 같다.
1. 진리의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역사함 (행10:3~6)
택한 자를 위하여 역사하는 천사는
시대가 변천됨에 따라 그 시대의 진리를 따라가도록 지시하고 인도한다. 구약시대에 한 민족적인 종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확장시키고자 했을 때에
몽매한 인간들은 주님의 명령을 받고도 세계적인 복음 운동을 못하고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었다. 그러므로 하늘의 천사는 이방 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기 위하여 역사했던 것이다. 만일 천사의 역사가 없었다면 이방의 전도문이 열리지 않았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천사가 고넬료의 가정에
나타나서 욥바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여 생명의 말씀을 받으라고 지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넬료가 베드로를 청하여 복음을
받게 되고 그 때부터 이방 땅에 전도의 문이 열려 오늘날 세계 열방에 복음이 확장되었다. 그리고 사도요한에게 시대적인 비밀을 알려주기 위하여
천사가 지시한 일도 있다(계1:1, 22:6).
2. 말씀 전하는 종을
도와주기 위하여 역사함 (행5:19)
하늘의 천사들은 각각 자기가 맡아
보호하고 있는 종이 있는데, 그 종이 위험한 일을 당할 때에는 와서 도와주고 사명을 감당하도록 역사해 주는 것이다. 소위 대제사장들이 사도들을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옥에 가두었을 때에 천사가 와서 옥문을 열고 이끌어 내어 성전에 가서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라고 하면서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천사는 하늘에서 마귀와 싸우는 일도 하고 있다(계12:7).
마귀는 종들이 일하지 못하도록
방해할 권리를 가졌고, 천사는 일하는 종들을 도와줄 권리를 가졌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자라면 주의 천사가
도와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누구든지 천사의 보호가 없이는 마귀와 싸우면서 복음을 전할 수가 없다.
3. 영혼을 잘 받들어 주기
위하여 역사함 (눅16:22)
천사는 택한 자가 죽지 않도록
보호할 책임도 있고, 죽을 때에 그 영혼을 하나님 앞으로 받들어 갈 책임도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택한 자는 세상을 떠날 때에 그의 천사가
와서 그 영혼을 잘 받들어 낙원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 사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천사에게 달렸다고 본다. 천사가 보호하면 위험한 곳에서라도 죽지 않는 것이요, 천사가 그 영혼을 데리고 가면 어디서든지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죽고 사는 것을 문제시 할 필요가 없고 날마다 맡은 사명에 충성을 다할 것 뿐이다. 왜냐 하면 천사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택한 자를 지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4. 행하는 일을 하늘에
쌓아두기 위하여 역사함 (마18:10)
우리 사람이라는 것은 과거에 자기가
했던 일을 다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택한 자를 맡은 천사는 그 사람이 세상에서 하는 일을 모두 간섭하며, 그 상을 하나도 잃지 않도록 하늘에
쌓아두는 역사를 하고 있다. 택한 사람이 날마다 하는 일이 자기 이름이 있는 생명 책에 기록되는 것은 택한 자를 맡은 천사의 활동이 있으므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택한 자가 매일같이 사는 생활의 전부는 하늘에 상급으로 쌓여지게 된다. 그리고 천사는 자기가 맡은 사람의 계급이 올라가면
갈수록 더욱 기뻐하는 것이다.
슥3:1~5에 하나님의 종에게
사단의 피해가 있었지만 정한 관을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가 같이 했다는 것은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종에게는 천사가 항상 받들어 섬길
책임이 있다는 것을 뜻한 말이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마귀 시험을 이긴 다음에 가서야 천사가 수종들었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시험을
통과해야만 천사가 같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마4:11).
사람이 세상에 나서 사는데 있어서
택한 사람에게는 천사의 역사가 항상 같이하므로 바른 길을 가게 되고, 원수를 이기게 되고, 완전한 왕권을 받는 데까지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결 론
하늘의 천사라는 것은 하나님의 택한
자를 위하여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택한 자를 꾀어보는 마귀도 허락하고 도와주는 천사도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택한 자를 꾀어보는 일도 하시고, 인도하고 보호하는 일도 있게 하셔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마귀가 시험하는 것도 다 상급을
받는 조건이 되게 하며, 천사가 수종드는 일을 하게 해서 영광을 받게 하시는 것이다.
땅위에서 합심할 일과 하늘의
응답
- 마 18:15~20
-
기독교는 하늘의 응답이 있고 없는데
따라서 모든 일이 좌우되는 것이다. 응답이 있으므로 승리요 응답이 없으므로 부패를 가져오는 것이다. 교회는 완전한 사람을 찾기 위한 것이 아니요
죽을 죄인들을 완전하게 만들어서 영원한 나라를 이루는 것이 사명이니 하늘에서 응답을 내리는 교회가 되려면 어떠한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권고가 있어야 한다
(15)
우리는 죄를 용납하는 것도 불법이요
죄를 범하는 자를 무조건 버리는 것도 불법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죄와 싸우는 것이 합법적인 교회이다. 그러면 죄를 용납하지도 말고 또는
범죄자를 멸시하지도 말고 권고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속죄의 법이 없다면 권고할 필요가 없겠지만 얼마든지 죄를 사해 주는 예수님의
피로 산 교회는 항상 권고하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이다.
어떤 형제가 실수가 있을 적에 그
사람을 조용히 권고하지 않고 그 죄과를 폭로시키어서 악선전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보다도 마귀 편에서 하는 행동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죄가
교회에 들어 올 때에 이것을 막는 방법은 은밀히 들어오는 죄를 은밀히 권고하는 일이 있어야 될 것이다. 은밀히 들어오는 죄의 역사를 은밀히
말살시켜 없애는 방침을 하지 않고 떠들며 광포하는 것은 마귀를 더 청해 들이는 행동이라고 보게 된다.
왜냐 할 때에 마귀는 언제나 교회를
어지럽히고 더럽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하는 것이 목적인데 눈물겨운 권고가 없이 남의 죄과를 함부로 대중 앞에 폭로한다는 그 자체가 책임을
질 일이 된다. 왜냐하면 교회를 소란케 한 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죄, 형제의 믿음을 손상케 한 죄가
된다.
그러므로 교회가 합심된 교회가
되려면 죄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죄의 세력이 발동을 못 하도록 하는 방침은 개인 방문으로 간곡히 권고해서 교회의 덕이 되도록 형제에게 은혜가
되도록 하기 위한 목적에서 개인 방문의 권고를 힘써야만 될 것이다.
2. 성별이 있어야 한다
(16~18)
성별이라는 것은 완전한 사람만
집결한 것을 가르친 것보다도 거룩한 사랑으로 성별되어야 한다. 거룩한 사랑이라는 것은 진리를 대적하는 자를 용납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형제라도 회개할 기회를 주어도 짐짓 진리를 대적할 때는 성별시켜 이방인과 같이 여기라는 것이다.
금일에 기독교 사랑이라는 간판
밑에서 회개할 일을 회개치 않고 덮어놓고 하나가 된다는 것은 쑥물과 단물을 한데 섞는 것과 같으므로 교회를 망치는 행동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사랑은 죄를 위하여 피 흘린 십자가의 사랑이니 죄를 회개치 않는 자에게 그 사랑은 하등의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회개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사랑해 준다면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은 죄를 용납할 수 없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완전 성결을
목적한 십자가이니 아무리 죄가 많아도 회개하면 성결이요, 작은 죄라도 회개치 않으면 정죄를 하는 것이다. 죄를 없이 하는 방법이 십자가의 승리며
완전 성결을 이루는 것이 십자가의 권능의 역사이다.
3. 합심 기도가 있어야 한다
(19~20)
기도라는 것은 자기 부족을 깨닫는
마음에서 합심이 될 때에 그 기도는 즉시로 응답이 내리는 것이요 또는 남을 살리기 위하여 합심 기도할 때 그 기도는 주님 다시 올 때까지
이루어진다. 이 땅에 합심 기도의 힘이 아니고는 하늘의 응답이 나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합심이 없이는 응답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응답을 하시되 법을 따라
응답하는 것이니 세계 만민에게 꼭 통일된 법으로 응답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이렇게도 주고 저 사람은 저렇게도 준다면 하나님은 하나를 이루는
것이 못되고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라도 합심이 되면 응답이 내리는 것이다.
결 론
이 땅에서 사는 인간은 아무리
지렁이 같은 인간들이라도 하늘의 응답을 받을 때에는 새 타작기가 될 수가 있다. 어리석어도 지혜를 응답하고 약해도 능력을 응답하고 아무리
주홍같이 붉은 죄라도 흰 눈같이 응답을 나리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십자가의 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중에 큰 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응답을 받는 일이요, 죄 중에 큰 죄는 남의 죄를 용서할 줄 모르고 남을 압박하는 죄일 것이다.
합심된 교회가 되자
- 마 18:15~20 -
서 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의 피로 산 교회에 대하여 요구한 바가 합심이라고
보게 된다. 만일 수천 명이 모이는 교회라도 합심이 없으면 주님은 떠나시고 두 세 사람이라도 합심된 교회면 함께 계신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교회는 주님이 떠나면 아무 필요 없는 원두막같이 빈 깍지만 있는 교회일 것이다. 이제 합심된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하여야 된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범죄한 형제를 아끼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15)
주님은 범죄한 자녀를 위하여 은밀히 하늘에서 고요히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주님이시니 땅에 있는 교회도 그와 같은 방침을 취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없이 형제의 단점을 대중 앞에 함부로 말한다는 것은 사단을
청해들이는 연락이 될 것이다.
2. 불의한 자를 용납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17)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니 회개할 기회를 주어도 짐짓 회개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니 교회에서 용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런 분자가 있음으로 합심된 교회가 되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3. 교회는 본부가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것이니 하늘에서
원하는 뜻은 땅에서도 행해야만 될 것이다 (18)
만일 어떤 교회가 하늘 본부와 연락이 없는 결재가 된다면 이것은 사단의
회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본부에 원치 않는 것을 행하는 단체는 본부와 대적이 되기 때문이다.
4. 주의 이름으로만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20)
교회는 주님의 이름으로 전부가 되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는
예수의 이름이 없이는 기도도 연보도 사업도 하등의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5. 너그러이 용서하는 교회가 되어야 될 것 (22)
교회는 죄의 권세 잡은 마귀와 대결하여 싸우는 기관이니 너그러히 형제를
용서함이 없다면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운 목적은 완전한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은 아니다. 죄인을 불러
완전케 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니 용서가 없이는 교회는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세계 인류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살 수 있는 시대를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교회를 세운 것이니 합심이 없는 교회는 새 시대와는 하등에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합심한 곳에 주님도 함께 하시니 이런
교회는 새 시대를 이루는 승리를 거둘 것이다.
위대한 인격은 섬기는
자이다
- 마 20:20~28
-
주님을 따라 가던 제자들은 다 하나
같이 위대한 사람이 되어 보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주님께 요청하기를 주의 나라에서 우리 두 아들이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하였다.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하셨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겼던 것이다. 이것을 본 주님께서는 너희가 큰 자가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섬기는 자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아버지께서 예비한 자라야
위대한 자가 된다 (22~23)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에 위대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로 하늘 나라를 세우고자 하시는 경륜이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직접으로 역사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택해 세울 적에 대중을 위하여 눈물과 땀과 피를 흘리지 않고는 그 사명을 할 수 없는 난국을 당하게 하셨던 것이다. 주님께서도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가장 간교한 마귀를 들어 쓰는 것은 누가 괴로워도 섬기는 자가 되느냐 하는 것을 보자는
것이다.
과거의 선지들도 아무리 동족에게
압박을 당하고 동역자에게 억압을 당해도 끝까지 자기 민족을 위하여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신 것은 그들로
위대한 종을 만드는 모략적 방법이었다. 하늘에서 영원한 왕권을 예비하는 동시에 이 땅에는 당신의 종을 괴롭히는 마귀를 들어 썼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들은 하나같이 고난이 올 때에 더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간 것은 성신의 역사라고 본다.
2. 섬길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위대한 인격이다 (24~28)
이 땅에 모든 사람들은 다 섬김을
받는 것을 위대한 자라 본다. 이것은 마귀의 자식들이 하는 행동이다. 하나님의 종은 섬길 수 있는 인격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세상에 탄생하실 때에 섬길 수 있는 인격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몸이었다.
예수님께서 아담의 피를 받은
몸이라면 섬길 수 없는 몸이겠지만 물과 피로 임한 몸이니 그 몸은 죄와 상관이 없으므로 죄인을 섬길 수 있는 대속물이 될 수 있었다. 예수님의
귀한 몸 하나가 대속물이 되므로 수많은 사람이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은 가장 위대한 인격이다. 한 몸이 죽으므로 세계 인류가 살아난다는 것은
예수님 한 분만 가진 인격인 것이다.
그런데 섬기는 것도 두 가지가
있다. 진리를 떠나 섬기는 일은 우상이 될 것이고 진리 안에서 섬기는 일은 큰 상급을 받는 일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계 인류를 살리기
위하여 섬기신 그 일은 예수님 한 분만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종들이 예수님께서 세계
인류의 죄를 위하여 대속물이 되신 그 십자가를 증거해서 많은 사람을 살려 주고자 하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섬기신 그 사랑의 법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많은 대중을 섬기는 것이니 이것이 주의 종 된 생활이다. 참된 사랑의 심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시간을 아끼지 않으며 물질을 아끼지 않는 자는 예수님의 대행자인 인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섬기는 법칙은 진리에 가감된
일에 대한 것이 아니고 진리를 위하여 섬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진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아들을 대신 죽게 하신 것이 진리이며
아들을 통하여 많은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역사를 은혜시대의 진리라고 하고 환란과 재앙 가운데서 모든 백성을 새 시대로 인도하는 것을 인류
종말의 다림줄의 진리라고 한다. 어떤 사람에게 옷과 먹을 것을 주는 것보다도 진리 하나를 바로 전해주는 것이 참으로 섬기는 일이요 이것이 가장
위대한 인격을 가진 자의 섬기는 일이다.
그러므로 왕권이라는 것은 진리로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섬기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진 자를 말한다. 가장 복 있는 자는 진리로도 남을 살리고 물질을 가지고도 남을
살리고 자기 몸으로도 남을 살리는 사람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영으로도 물질로도 남을 섬길 수 있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결 론
가장 위대한 인격은 무엇으로든지
남을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위대한 인격이라고 보며 이러한 자의 생활이라야 가치 있는 생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위대한
사람이 되려면 남을 섬길 수 있는 인격을 가지기 위하여 노력하는 생활이 있어야 될 것이다.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고도 가치 있는 생활은
이러한 자의 생활이라고 본다.
겸손한 왕
-마 21:1~10-
서 론
세계를 통일할 왕은 겸손한 왕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를 통하여 말씀했던 것이다. 세계를 통일할 수 있는 인격은 초인간적인 왕의 겸손이 없다면 벌레 같은 인간과는 하등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 왕은 자진적으로 겸손을 택했던 것이다.
1. 출생의 겸손 (눅2:6~7)
만왕의 왕이 말구유에 탄생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인류 역사상 이러한 겸손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출생의 겸손이 아니라면 그는 세계 인류의
왕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극도로 낮은 인간을 극도로 높은 데로 올리자는 목적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2. 장성의 겸손 (눅2:51)
그리스도는 어떤 학교나 훌륭한 선생의
교훈도 없는 빈촌인 나사렛 동네에서 목수의 생활을 하는 가정을 택하여 순종하며 받들어 봉사하는 일로 자라났던 것이다. 이것은 완전한 신성을
가지신 인격이니 고등 학문도 고등 교육도 그에게는 필요가 없고 오직 어려서부터 노동 봉사를 하는 것으로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3. 사업의 겸손
(눅5:31~32)
주님께서 죄인을 부른다는 것이 그의
목적한 사업이니 그는 자기가 옳다는 바리새교인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의인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의인이라는 교만을 가진 자는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를 택해도 낮은 자를 택했고
주무실 때에도 죄인의 집을 택했고 음식을 잡수셔도 죄인의 집을 택했던 것이다.
4. 기도의 겸손 (눅22:42)
주님은 겟세마네 기도 시에 자신이
있다는 기도는 없었고 자신이 십자가를 원치 않는다는 뜻을 표시한 것은 완전하신 분은 아버지밖에 없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라는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만일 주님도 자신이 있다는 태도를 가졌다면 이것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 사람으로서는 십자가 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표시를 주기 위한 것이다.
5. 죽음의 겸손 (눅23:46)
주님은 임종시에 일언반구의 불평 없는
태도에서 아버지께 영혼을 부탁했던 것이다. 죄 없이 고통을 당하는 예수님의 심정은 임종시까지 겸손한 태도로 죄인을 불쌍히 보는 태도 어머니를
동정하는 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를 가지고 운명을 하셨다.
6. 부활의 겸손 (막16:7)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하늘의 형체를
입으시고도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그 형체를 보이신 것은 겸손의 주님으로 보이신 것이다. 주님은 외모를 보지 않는 동시에
자체를 겸손한 자에게 지금도 나타내시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주님의 출생으로부터 부활
승천까지 걸어가신 겸손의 길을 가야만 할 것이니 이 길만이 왕권을 소유하는 정로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왕권을 가질 자라도 이 길을 가지
않고는 동등한 왕권의 자리를 얻지 못할 것이다. 겸손은 최대의 세력을 가져오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 종말의 미혹
- 마 24:10~14
-
인간 종말이라는 것은 큰 미혹이
있고 심판이 있고 새로운 시대가 오는 것이니 이 마지막 시험을 이기는 자에게 큰 축복이 있고 이기지 못하는 자에게는 큰 화가 있다. 마지막
시험이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전 세계 인류에게 천국의 복음을 전하였으므로 미혹이 있게 된다. 천국 복음을 전하는 기간은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세계 인류적인 큰 시험과 큰 심판이
있는데 있어서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받아서 그 영혼이 구원을 받았고 큰 시험을
이기므로 이 땅에서 큰 축복을 왕권으로 받는 일이 있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를 시험해서 시험을 이기는 자로 새로운 성도의 왕국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법인 것이다. 큰 시험이 오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1. 서로 미워하는 일
(10)
인류 종말의 큰 시험은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는 것은 큰 시험을 받은 원인이니 사랑이 있는 기독교 안에 서로 미워하는 마음은 미혹이 오는
증거라고 보아야 한다. 남을 살리고자 하는 불타는 마음이 있는 자에게는 마음에 시험이 들어올 수 없고 교회 안에 서로 파당이 생기는 데서 자기도
모르게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연히 미워하는 사람을
같이 미워하지 않으면 시험을 이길 것이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 마귀가 내 마음에 온 증거로 알고 주의하여야 된다. 우리가 앞으로 오는
미혹을 받지 않으려면 항상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사랑 안에 안기워 있어야 할 것이다. 미혹이라는 자체는 하나님의 사랑을 잊게 될 적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깊이 깨닫는 마음이 있어야만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는 시험에 빠지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서로 미워한다는 자체는
하나님의 사랑을 잊으리만큼 마음에 미혹이 온 증거라고 본다.
2. 거짓 선지가 많아지는 일
(11)
인간 종말이라는 것은 지도자 부패를
없애는 재앙이 오는 때를 말한다. 구약 종말에도 거짓 선지들이 많아질 적에 하나님의 큰 재앙이 북방으로 오게 되었고 인류 종말에도 거짓 선지가
많아질 적에 이것을 없애기 위하여 큰 화가 오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는 가장 간교한 뱀이
직접으로 사람을 미혹하였고, 인류 종말에는 붉은 용의 앞잡이 즉 거짓 선지인데 계13:11을 보면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는데
누구든지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매매를 못하게 하고 그 앞에 절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잡아죽인다고 한 것은 거짓 선지가 많아져서 세상 권리를
쥐고 행할 것을 말한 것이다. 인간 종말에 거짓 선지가 많아지는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 교회가 확장됨에 따라 거짓
선지가 교권을 쥐게 되므로 참된 종은 쫓겨남을 받고 거짓 선지는 한 단체를 이루게 된다.
둘째 : 마귀가 허락을 받게 되므로
거짓 선지가 많아진다.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다 미혹을 시켜 보고 심판하기 위한 방법으로 거짓 선지를 많이 일어나도록 허락한
것이다.
셋째 : 거짓 선지를 대중이
환영하게 되는 조건은 극도로 위기를 만날 때에 가면을 쓰고 그 위기를 면케 해 준다는 간판 밑에서 미혹을 하게 된다. 거짓 선지에게 미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시대가 오는 것을 인간 종말이라는 것이다.
3. 사랑이 식어지는 일
(12)
기독교 안에 사랑이 식어지는 일은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첫째 : 거짓 선지가 강단에서 서게
될 때에 일반 양떼는 다 심령이 메말라지므로 마음이 식어진다. 이것은 성신이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 거짓 선지를 따르는 무리가
다수가 될 적에 교회의 모든 일은 성신을 근심케 하는 일로 결정이 되므로 교회의 사랑이 식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계에서 이기고 나가는
자라야 재림의 주를 영접할 수가 있을 것이다.
결 론
거짓 선지의 미혹을 받지 말라고 한
것은 누구나 다 하나같이 시험을 해 보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니 그 미혹을 받지 않아야만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믿음으로만 들어가는 것이고, 주님 재림할 때에는 미혹을 받지 않고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라야 환란에 떨어지지 않고 새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인간 종말에 미혹을 이기는 자는
지상 축복을 자자손손이 받게 되는 것이다. 죽어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범죄에서 사죄를 받으므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이 몸이 살아서 새 시대의
영광을 보는 것은 미혹을 이기게 되므로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참는 자가 받는 구원
- 마 24:10~14 -
서 론
하나님께서 어려운 시련을 통과시킨 후에
기독교 종말의 구원은 끝을 맺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진리만 알고 끝까지 견디어 나가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모른다면 이 사람은 환난 날에 나가서 설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시대적인 진리를 따라서 역사하는
것이니 환난 날에는 끝까지 견디어 보려는 데서 예언을 지키는 자라야 만이 구원을 얻도록 역사해 주실 것이다. 이제 어떠한 환난에서 참아야 된다는
것을 본문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1.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지는
일이다 (10)
우리는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서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할 때 거기에 동참치 않으면 부득불 쫓겨나는 일이나 또는 그들에게 잡히는 일도 있을 것이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 끝까지 견디어야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한다는 것은 기독교 안에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니 이러한 시험이 교회 안에 들어올 때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끝까지 참는 자다.
2. 거짓 선지의 세력이 극도로
강할 때 (11)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의 세력을 강하게
하는 것은 누가 참된 예언의 말씀을 바로 지키나 보자는 것이니 미혹이라는 것은 말씀대로 참고 살려는 것이 없는 자에게 필연코 있게 될 것이다.
미혹을 받는 자는 많은 사람이요 받지 않는 사람은 소수일 것이니 다수가 소수를 압박할 것은 정해 놓은 일이다.
3. 기독교 사랑이 다 식어질 때
(12)
우리는 남이 사랑하니 나도 사랑한다는
정도를 가지고는 끝까지 참을 수가 없을 것이다. 참이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와도 그 사랑이 식어지지 않는 것을 참이라고 한다. 만일 어떤 형제가
기분이 좋을 때는 사랑하고 환경이 나쁘고 기분이 나쁠 때는 사랑이 식어지고 만다면 이런 사람은 알곡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에게서 오는 사랑을 가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어려운 환난이 올 때 더욱 눈물겨운 심정으로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나가는 자 만이 남는 종이 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끝까지 견디는 자를 구원해
주기 위해서 첫째로 천사를 동원한다(단12:1).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네 민족을 호위하기 위하여 대군 미가엘이 일어난다고 말 한 것은
다니엘같이 끝까지 견디는 사람을 네 민족이라고 했다. 예를 든다면 추수기에 끝까지 견디고 남는 알곡은 아끼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보호를 반드시
받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에 끝까지 견디는
자라야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했으니 끝까지 참지 않으면 구원 받을 수 없는 어려운 일이 우리 앞에 올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만일 어떤 종이
우리 신자는 절대 어려운 환난이 없이 평안히 있다가 들림을 받는다고 말한다면 이는 말씀과 대적이 되는 말이다. 분명히 이런 때가 오는 것은 먼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후에야 이러한 때가 온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의 복
- 마 24:42~47
-
인생 중에 가장 복 있는 자는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의 생활이라고 본다. 인간이 세상에 났다가 단지 자기를 위하여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지극히 작은 인간의 무가치한 생활이라고
본다.
아무리 충성을 해도 참된 진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아무리 지혜가 있는 것 같아도 그 지혜가 참된 진리를 아는 지혜가 아니라면 스스로 속는 지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지혜는 뱀 같이 하라 한 것은 마귀도 극도로 지혜롭다는 것을 뜻한 것이다(마10:16). 그러므로 참된 진리를 위하여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 된 자의 축복을 본문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예비가 있어야 된다
(42~44)
예비라는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로 자기 안락을 위하여 예비하는
자가 있다(눅12:16~22).
어떤 부자가 물질을 많이 쌓아 놓고
그날 밤 말하기를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할 때에 하나님은 그날 밤에 그 영혼을
도로 찾아갔다. 이것이 헛수고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쓸데없는 허영심을 가지고 집 위에 집을 짓고 물질에 대하여 애착심을 가지고 쌓아
놓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볼 때에 가장 어리석은 자로 보게 된다.
둘째로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의
예비라는 것은 아무런 마귀 미혹이 와도 물리칠 수 있는 진리의 지식을 갖추는 일
아무리 환란이 와도 그 환란의
피해를 당치 않을 인격을 갖추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는 종은 항상 게으르지 않고 앞으로 오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리
예비하는 일을 목적 두고 전력을 둘 때에 무소불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종에게 완전 무장을 주시는 것이니 하나님의 종된 사람은 항상 자기 부족을
깨닫고 어떻게 하든지 아무런 난관이 와도 난관을 돌파하고 나갈 수 있는 그 목적을 두고 진리로 완전 무장을 해야만 될 것이다.
2. 모든 사람에게 만족함을
주는 종이 되어야 한다 (45~46)
세상에 제일 큰 일은 참된 진리로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세상에 여러 가지 자선 사업을 많이 하는 자도 있지만 그 자선 사업으로써 완전한 천국을 이룰 수가 없고
천국을 이루는 일은 오직 진리로 남을 살리는 일로 만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일은 조물주 하나님께서 영원한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하시는
일이니 가장 복 있는 자는 이 대 사업에 완전히 끝을 맺는 종이라고 보게 된다.
주님 다시 올 때까지 진리로 남을
살리는 자는 성경 전체를 다 가르치는 지혜를 받는 동시에 전무후무한 환란이 와도 변치 않고 충성을 다 하게 되는 종이라고 보게 된다.
3. 모든 소유를 다 맡게 됨
(47)
이 천지 만물은 첫째아담의 범죄로
다 저주를 받았지만 둘째아담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소유는 주님 올 때까지 진리를 옳게 증거하던 종이 모든 복된 소유를 다 누리게
된다. 이 소유라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왕국의 축복을 가르친 것이다. 지상 왕국이라는 것은 재림시까지 남은 종이 되는 변화
성도의 소유가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 종이 증거하는 진리로 말미암아 나라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
하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이 본문에서 우리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된 우리는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 되는 것 하나만이
축복을 받는 요소가 될 것이다. 공연히 스스로 남을 판단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종이라고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들어 쓸
적에 언제나 그 시대에 비밀을 남에게 알려 주어서 그 종을 통하여 대중을 살리자는 것이 목적이니 재림시까지 남은 종이 되려면 시대를 분별하는
지혜를 받아 가지고 그 시대 사람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줄 때에 그 종을 통하여 모든 난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것이다.
주님 다시 올 때에 큰 문제가 되는
일은 재림의 주가 오실 때에 그 종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남은 자가 되느냐 못 되느냐 하는 것이 큰 문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는 종을 통하여 완전히 주의 일에 끝을 맺는 일이 있을 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런데 때가 멀었다느니 함부로 남을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자들은 자동적으로 주님 올 때에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외식이라는 것은 그 시대의 비밀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나 설교나 모든 하는 일은 자동적으로 외식이 되기 때문에 큰 화를 받게 될
것이다(마24:48~51).
지혜로운 일과 어리석은 일
- 마 25:1~13
-
주께서 가장 중대한 일은 무엇이냐는
것을 말씀하실 때에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는 일을 가르쳐서 기독교 종말의 역사를 말씀하셨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도 중대한 일을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대 사업을 신랑과 신부가 한 몸이 되어 실천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제일 큰 뜻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혜로운 일과 어리석은 일이 무엇이냐는 것을 본문의 말씀으로 증거한다.
1. 지혜로운 일 (2,
4)
지혜라는 것은 그 이치를 바로 알아
그 이치에 꼭 맞도록끔 하는 일을 지혜라는 것이다. 등불이라는 것은 기름이 많기 전에는 완전한 효과를 낼 수가 없다. 아무리 등이 있다하여도
기름이 없이는 아무런 효과를 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등불을 드는
것으로 만족을 삼는 것이 아니요, 앞으로 그 불이 꺼지고 꺼지지 않는 것을 큰 문제로 알았던 것이다. 무엇이나 앞으로의 문제를 바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 일은 시작을 했다 하여도 결국은 어리석은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등불이 어두운 밤에 필요하다고 아는 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요,
이 등불이 밤에 절대로 꺼지지 않고 있는 것이 완전일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아는 것만으로 전부가 아니며 실천에서 완전히 목적을 이루는 것이 없다면 그 신앙은 헛된 일을 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그 결과를 목적으로 두고 나가는 것인데 그 결과를 이룰만한 준비가 있어야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계속하여 은혜를 내리는
것은 앞으로 완전한 열매를 이루게 하자는 것이 목적이다.
누구든지 앞으로 여러 가지 난제를
돌파하고 나가겠다는 결심에서 구할 때에 그 난제를 해결하도록 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게 된다. 우리가 쉬지 않고 일하는 목적은 완전 열매를
이루자는 것인데 열매라는 것은 주님 재림시에 일한 대로 갚아주는 그 날에 가서야 완전한 열매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말씀을
세밀히 가르칠 적에 재림의 주가 오는 날에 남은 종으로서 하여야 할 문제를 제일 큰 문제로 말씀을 하신 것이다. 선지서 전체를 보면 초림의 주가
오실 때에 맞이하는 것을 세밀히 말하지 않았고 재림의 주가 오실 때에 종들의 역사가 잘못 되지 않도록 세밀히 말씀해 놓았다. 영혼 구원이라는
것은 죽은 영이 중생 받는 시간에 얻는 것이요, 하나님의 종들이 앞으로 오는 어려운 문제를 돌파하고 나가서 새 시대를 완전히 성도의 나라로
이루어 놓는 것을 큰 문제로 말씀한 것이 여호와의 책이다.
모든 성도의 기도는 지상왕국이
이루어지므로 완전한 열매가 되는 것이니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는 것도 재림의 주가 오는 날에 될 일을 큰 문제로 여기시는 주님께서 비유로 가르친
말씀이다. 언제나 성신의 역사는 재림의 주가 오실 때에 맞이할 인격을 완전히 이루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2. 어리석은 일 (3,
5~9)
어리석은 자라는 것은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방심하고 있다가 일이 이루어질 적에 급하게 무엇을 해보려고 하는 자이다. 이러한 자들은 앞으로 올 문제를 깊이 생각조차 하지를
못하고 그때 그때 임시 평안을 따라가는 것이다. 사람의 생활이라는 것은 아무런 준비가 없이 그날 그날을 허송 세월 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생활이다. 누구든지 자기 앞에 급한 일이 올 때에 잘못을 깨닫는 것은 다 가지는 일이지만 앞으로 올 문제를 위하여 완전 준비를 갖추는 사람은
무슨 일에서나 심히 적다.
주님께서 제일로 기뻐하지 않고
노여워하실 사람은 앞으로 오는 어려운 문제를 등한히 알고 방심과 태만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예를 든다면 남편이 중대한 일을 놓고 노심초사하고
전심전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아내 되는 사람이 여기에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고 등한히 알아 남편의 보조를 맞추어 주지 않는 다면 남편에게 그
아내는 큰 원수같이 여겨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처녀는 신랑을 노엽게 하는 처녀라고 볼 수 있다.
3. 주의 날에 큰 문제가
되는 일 (10~13)
인간에게 제일 큰 문제가 되는 일은
주의 날이다. 지금 인간들은 큰 문제를 문제로 생각지 않고 작은 문제를 문제로 알고 날뛰고 있다. 어리석은 자들은 문을 닫은 후에야 열어달라고
하는 자인데 이러한 자들은 후회 막심이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한 번 문을 닫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문을 닫기 전에 시간을
아끼고 아껴서 준비한 자들이 기뻐할 날이 올 때에 때를 잃은 자들은 다 슬퍼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준비가 없이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같이 보이지만 주의 날이 올 때에 가장 지혜로운 자는 주의 날에 설 수 있는 준비를 갖춘 자이다. 지금 세상은 쉬지 않고 준비하는
자들을 볼 때에 가장 어리석은 자로 보는 것이다. 주의 날에 주님을 맞이하느냐 못하느냐는 문제가 제일 크다는 것을 생각하고 노력하는 자를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가르친 것이 열 처녀 비유의 말씀이다. 이것은 절반만 준비하게 된다는 말이 아니고 준비가 있고 없는데 따라서 어리석고
지혜롭다는 것을 가르친 말씀이다.
결 론
인간 종말의 비극은 어리석은 자에게
있고 가장 즐거운 일은 지혜로운 자에게 있다는 것을 주님은 비유로 말씀하셨다. 우리는 기름과 등을 준비하는 인격을 가장 복되고 존귀한 인격이라고
본문을 통하여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역사할 수 있는 완전 무장이 없는 자라면 도저히 남을 수가 없는 날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주의 날이라는 것은 흑암의 날이므로 완전 준비를 가진 자 외에는 남을 수가 없다.
승리의
기도
- 마 26:36~46
-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사랑하는
독생자라도 기도로 승리하도록끔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하는 일에 있어서 반드시 기도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만민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의 승리를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신 일은 세계 인류의 대표적인 기도가 되는 동시에 기도의 표본이 된다. 기도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타협이 있을 때는 필요가 없고, 완전 승리를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이제 승리의 기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증거한다.
1. 마음에 고민이 심한 중에
하는 기도 (36~38)
승리의 기도라는 것은 아무런 고민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큰 문제를 앞에 놓고도 마음에 고민하는 것이 없고 오히려 태만하게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심이라고 볼 수 없다. 예수님께서 인간 죄악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기 전에 마음에 큰 고민이 온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인간 죄악의 고통을 느끼는
마음이다.
죄값으로 수많은 영들이 죽는 것을
생각할 때에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고민을 가지게 된 것이다. 수많은 양떼가 쓰러져 죽게 되는 것을 보고도 마음에
고민이 없는 목자라면 참으로 양을 사랑하는 목자라고 볼 수 없다. 남이 망하는 것을 볼 때에 마음에 고민이 없이 오히려 비웃는 사람이라면 사랑을
떠난 마음을 가진 것이다.
둘째는 인간 죄악 고통을 짊어지는
마음이다.
어떤 사람이 잘못된 일을 행하였을 때에
책임을 그 사람에게만 지게 한다면 마음에 아무런 고민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잘못된 일을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할 형편이라면 마음에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셋째는 공의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공의의 법이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용서가
없는 것이다. 어떠한 잘못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대로 묵인해 버린다면 이것은 공의라고 할 수 없고 그 법을 파괴시키는 일이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고민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인간의 모든 잘못을 짊어지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참된 기도라는 것은 잘못된 일을
바로 잡기 위하여 애원하는 것이다. 자기 잘못을 고치기 위하여 애원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해야할 기도이다. 그러나 전 세계 인류의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하여 심히 안타깝게 부르짖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은 자가 다른 사람이 망하는 일을 보고
고민하는 마음이 생겨 눈물 흘려 기도하게 될 때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응답이 내려오는 것이다. 누구든지 남을 살리기 위하여 애쓰는 종은 남보다도
마음에 고민하는 것이 많게 되므로 건전한 기도를 하게 된다.
2.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기도 (39)
기도라는 것은 자기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하는 것 보다도 내 소원을 없이 하고 아버지의 소원만 이루어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치 않고
자기의 소원만 이루어달라고 한다면 오히려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대적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없이 하고 자기의 뜻을 내세우려고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괴로워도, 수치스러워도, 죽어도 순종한다는 것이 참된 충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에만 순종한다는 것을
목적하고 아무리 쓴 것이 내게 와도 오히려 이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때에 승리의 기도가 된다.
우리의 승리 기도라는 것은 먼저
“나”라는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에게 인간의 죄악을 짊어지게 해서 죽게 하시고 그 의로운 행실로 말미암아 세계 인류가 다
하나가 되는 나라를 이루자는 것이 소원이다. 제일 높은 영광도 독생자에게 있게 하시고 제일 높은 의도 독생자에게 있게 하셔서 우리에게 그 안에서
세세 영광을 누리도록 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어
만민의 죄를 대속하는 일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의도, 독생자의 의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아버지의 의와 아들의 의가 세상에 나타나는 일이다. 세상에서 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이 있다 하여도 그것은 도덕적 의는 될지언정 세계 인류를
살리는 의는 될 수 없다. 세계인류를 살리는 의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다. 이것이 세계 통치권을 가질 수 있는 만왕의 왕이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승리의 기도라는 것은
십자가의 의를 완성하는 것을 목적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십자가 의를 이루기 위한 것만을 목적하면 승리의 기도가 될
것이다.
3. 남을 동정하는 기도
(40~46)
주님께서 밤새도록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은 그 옆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신 것은 제자들에 대하여 동정하는
마음이다.
언제나 승리의 기도를 하는 사람은
약해서 쓰러지는 사람을 동정하는 마음이 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많은 기도를 한다고 해서 약한 사람을 업신여기고 동정하지 않는다면 승리의
기도를 할만한 자리에 들어간 자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도 예수님은 항상 대언 기도하시면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쓰러지는
사람을 동정하여 쓰러지지 않도록끔 해 주시는 응답을 내리신다.
언제나 양떼를 인도하는 종이 되려면
마음에는 원이로되 실천을 못하는 사람들을 아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라고 한
것이다(롬7:24~25).
결 론
기도 생활이라는 것은 위와 같은 세 가지가 항상 있어야 한다. 자기를 위한 기도가 승리할 수는 없고, 남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제물이 된 기도라야 승리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하시되 참된 기도를 통하여 승리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재림을 증거하는 예수의 고난
- 마 26:57~68
-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메시야를 고대하는 정통신앙을 가졌다는 소위 대제사장, 제사장, 유사, 장로들에게 비소와 조롱과 무시를 당하신 이유는 이후에 내가 권능의 우편에 앉으며,
하늘 구름을 타고 세상에 온다고 증거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려는 최후 발악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메시야를 믿는다는 간판
아래서 메시야의 사상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던 자들이었으므로 예수님께서 증거하시는 말씀이 자기들의 사상과 대립이 된다는 조건에서
이단이라, 바알세불이라 하는 말로 정죄를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메시야를 믿는 자라도 그
사상과 정신과 마음이 메시야의 사상과 정신과 마음에 합치가 되어야만 그가 하신 일을 따라하게 될 것이다. 이제 재림을 증거하는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본받을 점을 다음과 같이 본문에서 말한다.
1. 잠잠할 일에 잠잠하심
(57~6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사흘만에 짓겠다고 말씀하신 일이 있었다. 이것은 당신이 십자가에 죽어서 무덤에 장사 된지 사흘만에 부활하므로 예언적인 성전은
폐지가 되고 신령한 교회가 열매로 세상에 세워질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비밀을 모르는 그들은 이것을 큰 문제 거리로 알고 예수를 귀신
들린 사람으로 취급했으며, 미친 사람으로 여겼던 것이다. 분별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말 한 마디를 근거로 해서 예수님을 책잡아 보려고
했다.
성경에 기록된 비밀은 이 육적
이스라엘 그대로 왕국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완전히 폐지시키고, 십자가 부활로 말미암아 완전한 교회가 서게 되므로 메시야 왕국이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밀을 모르는 교만한 인간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것을 가지고 책을 잡아 이단이라고 정죄했던
것이다.
오늘에도 분별할 줄 모르는 교만한
인간들이 성경의 비밀을 알고 증거하는 사람을 마귀라, 이단이라 하고 정죄하는 일이 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성금을 가지고 생활하는 대제사장과
제사장의 무리들이 그 성전이 그대로 있어 메시야 왕국이 올 줄로 알았다는 것은 흑암 중에서도 흑암이라고 본다.
이와 같이 지금 교회가 이대로 있어
메시야 왕국이 이루어질 줄 안다는 것도 흑암이다. 그러므로 소위 신앙자들이 자기의 부족을 모르고 자기만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점에서 이와
같이 망령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의 성전을
받든다 하면서 자기의 권리나 안락이나 명예를 탐하는 일인데 지금도 이러한 자들이 구름타고 오실 예수님을 괴롭히게 된다.
그러므로 과거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이러한 악당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입을 열지 않으시고 잠잠히 계셨던 것이다. 지금도 주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에 그것을 듣고 대적하는 자에게는
주님께서 아무런 답도 없이 잠잠히 계신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아무리 증거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이 잠잠히 있는
것이 참된 증인의 인격이라고 본다. 왜냐 하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줄 필요가 없으며, 진주를 돼지에게 던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2. 증거할 일에 증거하심
(64)
예수님께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는 대제사장에게는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증거하셨다. 이것은 마땅히 증거해야 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지을 수 있다고 했느냐고 묻는 대제사장에게는 입을 열지 않으시고 잠잠히 계셨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는 일에는
담대히 사실대로 증거하셨던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할 때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잠잠히 계셨다면 참된 증인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듣든지 말든지 증거하셔야만 될 일이다. 왜냐 하면
그들은 믿지를 않았지만 우리는 확실히 이 말씀을 믿기 때문이다.
소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대
제사장이라는 사람이 구름 타고 온다는 말을 듣고 무슨 뜻인지 몰라 발악적인 행동을 했다는 것은 말만 대제사장이지 사단의 자식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예수님께서 이런 배척을 받으면서도
그때 사람이 믿지 못할 말씀을 증거하신 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만 위하여 증거하신 것이 아니요 우리를 위하여 증거하신 것이라고 본다. 왜냐 하면
그때 사람이나 우리나 다 구름을 타고 오실 예수님을 영접할 예비를 갖춰야 되기 때문이다.
3.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심
(65~68)
예수님께서 자기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것을 증거했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인 그 몸에 사형이 해당된다는 처벌을 받고 얼굴에는 침을 뱉기우고, 매를 맞고, 비소를 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볼 때에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구름 타고 온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할
말을 못하는 인격을 주님께서 가졌다면 완전한 인격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에게 이러한 일이 있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시면서 담대히 원수들
앞에서 증거하셨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말씀을 증거하면서
악당들이나 인간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할까봐 주저하고, 악한 행동이 있을까봐 겁을 낸다는 것은 벌써 그 악당들에게 영적으로 눌림을 받은 인격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어디를 가든지 악령의 역사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배를 받는 일이 없이 나가야만 승리하게 될 것이다.
악한 사람들이 때리려고 한다고 해서
두려워한다든지, 더러운 말을 한다고 해서 부끄러워한다든지 하면 그것은 완전한 인격이라고 볼 수 없고 악령에게 이끌리는 인격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가 구름을 타고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려면 고난을 고난으로 생각지 말고 오히려 영광으로 아는 인격을 가져야만 될 것이다. 모든 순교자들도 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인격을 가졌으므로 승리의 길을 걸어 간 것이다.
결 론
구름 타고 다시 오실 예수님이
이것을 증거하시고 고난 받으신 것을 생각하고 우리는 완전한 승리를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는 고난을 영광으로 아는 인격을 가져야만 왕권 반열에
들 수 있는 것이다.
버림받은 예수
- 마 27:27~46
-
하나님은 공의의 신이시니 공의의 죄
대가를 아들에게서 받으실 적에 사정없이 아들을 버리셨다. 이것을 본다면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는 말을 했던 것이다. 이제 하나님 앞에 버림을 당하는 예수의 고난을 우리는 본문으로 깊이
생각한다.
1. 머리의 괴로움
(27~31)
가장 괴로운 것은 머리가 괴로운
것이라고 본다.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고 갈대 몽둥이로 머리를 칠 때에 그 괴로움은 무엇으로 표현 할 수 있을까? 어찌하여 하나님은 아들에게
이런 괴로움을 주셨는가! 무엇보다도 인간이 머리의 정신작용을 죄 되게 사용하면서 간사한 죄를 많이 진 대가를 친히 받으신 것이다. 가장 큰 죄는
짐짓 머리 속으로 연구하므로써 지은 죄가 너무 큰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간의 죄를 위하여 목이 잘린다든지
간단한 사형을 한다는 것보다도 갖은 괴로움을 당하게 할 때에 먼저는 머리에 괴로움을 당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는 머리의 정신 작용으로 죄를 짓는
일을 했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라는 것을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기독교 안에서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 머리에 생각으로 악한
계획을 하는 자들도 있다고 본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책잡기 위하여 갖은 모략의 방법을 쓴 일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
2. 입의 괴로움
(33~34)
인간들이 입으로 지은 죄라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에 신자라 하면서 심지어 주의 종이라 하면서 입으로 하지 못할 말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가증한
일인가?
우리 주님께서 쓸개 탄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은 입술로 지은 죄를 위하여 당하는 괴로움이다.
3. 수족의 괴로움
(35)
가장 무서운 죄는 손과 발로 지은
죄인 것이다. 손과 발에 못박혀 장정된 몸이 허공에 달려 있을 때에 못자욱은 찢어지고 쓰라리고 아픈 그 고통은(시22:16)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가장 괴로운 것은 사정없는 쇠못으로 힘줄을 뚫어 나무에 못박은 그 자리 얼마나 쓰라릴까.
나는 1953년 5월에 조용한 산을
찾아가 기도할 적에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된 모양이 똑똑히 나타났다. 못자욱에서 흐르는 피는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못자욱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뼈마디가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주님이 고통 중에 시달리는 모양으로 나를 바라보며 나는 너를 인하여 이렇게 고난을
받았는데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했느냐 하는 음성이 거듭 들려왔다. 이러한 광경을 약 3시간 동안이나 나타나 보일 때에 그때에 나는 작정하기를
아무리 괴로운 일이 오고 억울한 일을 만난다 해도 나는 원망치 않고 강한 마음으로 일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그 후로부터 이날까지 20여년 간
이상하게도 사람에게 버림을 당하는 것과 같은 원망스러운 일을 계속으로 당하게 될 때에 십자가 앞에서 작정한 그 마음 잃지 않고 나오는 중에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은총을 너무나 많이 받을 때에 더욱 감사 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아무리 억울함을 당한다 하여도 우리 주님의 당하신 고난에
비교할 수가 없다.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을 참을 자격은 없지만 억울함을 당할 때에 십자가를 바라만 보면 괴로움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4. 귀의 괴로움
(39~44)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
싫어하고 마귀의 말을 듣기를 좋아하는 인간이 많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극도로 괴롭히는 모욕과 훼방을 받게 되었다.
지나가는 자마다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하는 말이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이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희롱하는 말이 남은 구원을 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가 없도다 하면서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하였다.
인간이 볼 때는 이러한 자리에
들어간 것이 십자가이다.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누가 이 때에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자가 있으리요, 사정없이 매를
맞고 사정없이 쓰라림을 당하고 사정없이 버림을 당한 십자가였다.
5. 고통의 큰 소리
(45~46)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이 슬픈 소리, 고통의 소리, 천지가 캄캄하고 산천이 슬퍼할 고통의 소리였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할 때에
조금인들 죄를 용납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조금이라도 죄를 용납한다면 죄 값으로 고통을 당한 예수님의 저주가 되는 일이라고 본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버림당한 그 일은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주는 열매가 되었다.
결 론
공의로우신 하나님 공의의 죄 대가를
아들에게 짊어지우고 사정없이 버린 하나님의 사랑 절대로 택한 자를 버리지 않는 사랑이 되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에게 무엇을 아낄 것이 있겠는가. 우리는 그 사랑 속에서 넉넉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그 능력을 받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버림을 당했기 때문이다.
사명과 인격
문제
- 마 28:11~20
-
인생이라는 것은 사명과 인격과의 큰
관계를 가지고 있다. 신, 불신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사명 아래서 그 인격은 좌우된다. 어떤 사람은 사단의 세계로부터 사명을 받게 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로부터 사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사단의 세계로부터 받은 사명과 하나님의 세계로부터 받은 사명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
1. 마귀로부터 받은 사명
(11~15)
마귀로부터 오는 역사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것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소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대제사장들이 예수가 부활했다는 말을 듣고 자기의 교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는 일을 했다. 사단의 역사라는 것은 언제나 돈을 가지고 사람을 매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돈을 먼저 주면서 사명을 맡기는
것은 분명히 사단의 세계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본다.
사단의 세계로부터 오는 역사는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있다.
첫째 : 궤휼적인 음모가 있다.
둘째 : 세상 권리를 교섭하는 일이
있다.
셋째 : 빠른 시간에 널리 퍼지는
일이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 마귀의 세력이
가득하므로 궤휼적인 세력은 강해지고 세상 권리를 교섭하는 일이 강해지고 회개 없이 충동을 받는 일이 강해지므로 사단의 세계에서 오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 교권과 물권과 정권을 쥐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가 세상에 탄생하면서부터
마귀의 세계에서 역사하는 일도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부활을 거짓이라고 하는 사단의 음모는 오늘날에도 대중의 심리를 끌고 있는 것이다. 거짓
선지라는 것은 언제나 이 세 가지가 따라오는 것이니 이 역사가 오늘날 세계적인 거짓 선지의 세력을 이룬 것이다.
2.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
(16~20)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명은 인간이
볼 때는 너무나 미약하고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고 인간의 방법으로는 너무나 허무한 일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사단의 세계로부터
오는 역사는 대중을 움직여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역사는 큰 박해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필연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명을 받은
사람에게 있게 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으므로 (18)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고 부활을
전하는 것을 반대하고 교권과 물권과 정권을 가지고 나선 무리가 기독교를 없애기 위하여 최선의 방법을 다했지만 이미 그리스도에게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므로 마귀의 세력은 그리스도의 장중에 들어가고 만 것이다(계1:18~19).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사명은 영원한
왕권을 이루기 위한 사명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의 통치권을 받으시고 사명을 맡으셨으므로 아무리 마귀의 역사가 강하다 하여도 승리는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다. 인간이 볼 때는 예수님이 실패를 한 것 같으나 만민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세계를 정복한 마귀 세력은
완전히 망하게 되는 일이 시작되었다.
둘째 :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는
역사가 있으므로 (19)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역사가 세계를 정복하는 역사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죄에서 마귀의 권세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을 적에
완전히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세례라는 것은 마귀의 종이 되었던 몸은 완전히 없어지고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뜻에서 물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므로 마귀와는 하등에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세례에 있어서
속화되었다는 것은 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세례는 있으나 없으나 같다고 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세례는 의식이 아니요 완전히
마귀 권세를 벗어나는 의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의를 이루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시는 것을 말씀하셨다(마3:15). 하나님께서
세례를 인정한다는 뜻으로 하늘이 열리고 성령을 비둘기 같이 나려 세례를 받는 예수님 위에 임했던 것이다. 또 내가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것은
인간 죄를 걸머지고 대표로 물에 잠겨 올라오는 것은 모든 의를 이루는 일이라는 것을 증거하신 것이다.
오늘날 마귀의 역사는 이 세례를
속화시키는 일을 한다. 인간이 볼 때는 이 몸이 물에 잠겼다 올라오는 것이 대수롭지 않는 일로 보이지만 이것은 마귀를 완전히 이기는 법이 되는
것이다.
셋째 :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이
있으므로 (20)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사명은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이다. 오늘날 마귀의 미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 보다도 세상 학문을 더 존중히 여기는 일을 가지고 교회에
침투하여 소위 학사, 박사를 하나님의 기름 부은 목사보다도 더 존중시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사명이라는 것은 세상의 어떤
권세나 지식을 초월한 인격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하늘 권세와 땅의 권세를 받는 일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로 세계를 정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킬 수 있는 사명을 주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항상 우리와 같이 할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결 론
사명과 인격이라는 것은 전 세계
인류를 정복하고 있는 것이다. 사단의 세계에서 오는 사명을 받은 자도 세계적이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명을 받은 자도 세계적이니 최후의 승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명을 받은 자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