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1. 시험을 통해 오는 온전 (약1:1~4)  

2. 시험으로 오는 온전 (약1:2~4)  

3.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생활 (약1:1~5) 

4.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 (약1:5~8)  

5. 시험이 올 때 인정받는 자가 되자 (약1:12~18)  

6. 온전한 인격을 이루는 비결 (약3:1~12) 

7. 입의 말과 인격 문제 (약3:1~12)  

8. 교회 안에 두 가지 지혜 (약3:13~18) 

9. 참된 지혜와 열매 (약3:13~18)  

10.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될까 조심하라 (약4:1~4)  

11.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약4:1~10)

12.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 (약4:13~17)  

13. 주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마음 (약5:7~11)  

14. 주 강림시까지 남을 자의 자격 (약5:7~12) 

 

시험을 통해 오는 온전

- 약 1:1~4 -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온전한 것을 주시기로 작정했고, 또는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온전을 준다는 것은 공의가 아니기 때문에 시험을 해보고 참는 자에게 온전한 것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에 있어서 온전한 것을 이루기까지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1. 시험을 받을 자격 (1)

  시험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된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는 법이다. 왜냐하면 마귀의 자녀가 된 사람은 시험을 통과시킬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라고 한 것은 영적 이스라엘을 가르친 것이다.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하나님 편에 속한 자로서 마귀 편과 싸우는 생활을 하는 것이니 과거에 육적 이스라엘이 이방 사람보다도 시련이 더 많은 것은 이스라엘 나라로 말미암아 참된 영적 이스라엘의 교회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요, 영적 이스라엘에게 여러 가지 시련을 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누구든지 중생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반드시 시험을 통과시키는 것은 완전한 것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2. 온전한 기쁨을 가지게 됨 (2)

  기쁨이라는 것은 일시 흥분의 기쁨도 있고, 소망의 기쁨도 있으니 세상에 오락적인 기쁨이라는 것은 온전한 기쁨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시험이 올 때에 온전히 기뻐하는 것은 소망에서 오는 기쁨이라고 본다. 소망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시험을 통과하므로 이루어진 일을 말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지금 고난을 받는 것은 장차 받을 영광에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롬8:17~18). 인생이라는 것은 온전한 기쁨을 가짐으로써만 발전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더욱 자라나는 지각이 있고 힘을 얻기 때문이다.

 

  3. 인내를 이루게 됨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는 것도 있고, 상급으로 주는 것도 있으니 은사라는 것은 거저 주는 것이요, 상급이라는 것은 참았다는 조건으로 주는 것이다. 참음이 많을 적에 상급이 많고 참음이 적을 적에 상급이 적고 참음이 없을 적에 빈 껍데기만 남는 생활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발전이라는 것은 참음을 통과하므로만 있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반열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악한 마귀를 들어 쓰는 것은 참음이 있나, 없나를 알아보기 위한 목적이다.

 

  4. 부족함이 없게 됨 (4)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게 해 준다는 것이 사랑의 한계가 된다. 그러므로 사람을 낼 때에 부족한 사람으로 창조한 것은 시험을 통과시켜 본 후에 부족함이 없는 과실인 생명과를 먹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부족함이 없게 창조한 것이 아니고, 부족함이 없는 인격을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것이니 이 세상은 부족함이 없는 사람을 이루는 인격 훈련소라고 보게 된다.

 

 결 론

  온전한 것이라는 것은 만물 중에 사람만이 받을 인격이 있고 특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것은 시험을 이길 수도 있고, 이기지 못할 때도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어 참음의 길을 걸어가게 하신 것은 타락한 인생을 구원하는 동시에 참는 자로서 이룰 왕국 부서를 이루기 위하여 역사하는 것을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인데, 마귀를 쓰는 것도, 성신을 주시는 것도 목적은 시험을 이기므로 온전함을 이루는 사람을 만들기 위한 역사이다.

 

 

시험으로 오는 온전

- 약 1:2~4 -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온전한 것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고 시험을 통과해야만 온전을 이루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 기독교의 중생이라는 것은 창조를 받을 적에 생령으로 지음받은 그 영이 죽은 자리에서 다시 생령이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중생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즉시에 온전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온전을 이루는 단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제 시험으로 오는 온전이라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온전한 기쁨을 가지게 됨 (2)

  인간 자체에는 온전한 기쁨을 줄만한 것이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받으므로만 온전한 기쁨이 있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밥을 먹고 배부른 것을 기뻐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평안히 노는 것을 기뻐하고 사람이 알아주는 것을 기뻐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 있으면 기뻐하는 정도라면 온전한 기쁨을 가진 자라고 볼 수 없다.

  온전한 소망의 기쁨이라는 것은 시험이 올 때에 인간 물질계를 초월한 하나님의 세계에서 오는 것을 받으므로만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물질계 안에서 만족을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조물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새로 받는 체험이 없이는 온전한 것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입을 열어 말씀하실 때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크니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하셨다(마5:11~12). 이것을 온전한 기쁨이라는 것이다.

  스데반이 원수에게 돌에 맞아 죽을 때에 그 얼굴이 천사같이 되어 기뻐한 것은 온전한 기쁨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시험이 올 때에 온전한 기쁨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의 생활은 동물의 생활이나 다름이 없다. 왜냐 하면 동물도 배부르면 기뻐하고 몸이 평안하면 기뻐하기 때문이다.

 

  2.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됨 (3)

  믿음이라는 것은 어려운 시험을 만날 때에 하나님의 역사를 더 체험하고 그 사랑의 온전을 맛보게 되므로 신앙이 자라나게 되며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역사를 무엇인지 체험함으로써 믿음이 더 진보를 가지게 된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처음에 사귈 때보다도 어려운 난관을 당할 때에 변치 않는 친구라면 더 믿어지는 마음이 생기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는 시험 가운데서 하나님의 무소불능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때에 그 믿음은 강한 용사와 같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간교한 마귀를 들어서 시험을 해 보시는 것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사랑하는 자에게 더욱 깨달아 믿게 하시므로 온전한 신앙의 인격을 이루게 하셔서 그 사람을 들어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동시에 일한 대로 갚아 주시기 위한 방법이다.

 

  3. 온전 구비함을 가지게 됨 (4)

  하나님에게는 온전 구비한 것이 얼마든지 있지만 그것을 누구에게나 준다는 것은 공의가 아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해 보고 난 뒤에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생활할 수 있는 자리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싹이 나서 자라날 때에 뜨거운 태양이나 찬이슬과 찬비를 맞게 되고 거센 바람에 부딪치고 여러 가지 어려운 가운데서 자라게 되어 온전 구비한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간교한 마귀를 들어 여러 가지로 시험을 해 보고 거기서 그 인격을 자라게 하여 온전 구비한 왕권의 자격을 이루어 그 사람에게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세세토록 영광을 누리게 하는 것을 천지를 창조하신 조물주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결 론

  조물주 하나님의 완전 역사라는 것은 완전한 것을 목적하고 마귀를 들어 쓰시기도 하시고 당신의 종을 들어 쓰시기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된 자로서 마귀의 시험을 받게 하여 그 시험 가운데서 끝까지 충성되게 나가는 자는 완전한 것을 가지도록 하는 것을 하나님의 선한 방법인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생활  

- 약 1:1~5 -  

 

서 론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부족함이 없이 생활하게 하는 것은 인간에게 행하시는 일이다. 완전이라는 것은 땅의 것만으로가 아니고, 땅의 것과 하늘의 일이 결합되는 여기에서만이 부족이 없는 생활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되려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만 되는 것이다.  

1. 온전한 기쁨이란 것이 있게 된 것이다 (2)  

온전한 기쁨은 어떤 흥분, 감정, 오락을 통하여 오는 것은 아니다. 본문 2절과 같이 시련을 받을 때 오는 기쁨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쁨을 얻어 보려고 세상에 무엇을 요구한다는 것은 방탕의 길로 가는 시점이 될 것이로되 어떠한 어려운 시련이 올 때 완전히 기쁘게 여겨보려는 사람은 최고의 영계에 들어가려는 시점이 될 것이다.  

2. 인내력을 기르기 위한 노력이다 (4)  

우리는 노력도 잘못된 노력도 있고, 바로 된 노력도 있는 것이니 어떤 신자가 인내의 힘을 길러 보려는데 노력치 않고, 일시적인 오락적인 수양에 노력한다면 이 신앙은 자동적으로 부패라는 것을 가져올 것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볼 때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 보려는 안타까운 심정을 가졌다면 그 사람에게 하늘의 것으로 채워 주는 것이 필연코 있는 것이다.  

3.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는 자이다 (5)  

사람이 무슨 일을 당할 때 자기의 지혜가 부족한 것을 깨닫는데서 초인간적인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하는 자가 될 때에는 넘치도록 주시는 것이다. 만일 인간 지혜로만이 해결하고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원치 않고, 의심하면 이 사람은 아무 것도 얻기를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결 론  

온전하고 구비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은 인간 자체의 노력으로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현재 없다는 것보다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이루어 보려고 하는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알지도 못하고 덮어놓고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상태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적을 바로 정하는 동시에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는 여기에서부터 만족을 삼고 나갈 때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

- 약 1:5~8 -

 

  하나님 앞에 제일 큰 죄는 의심이라고 본다. 왜냐 하면 의심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마음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자기의 것을 없는 자에게 주고자 할 때에 받는 자가 자기를 의심한다면 자동적으로 마음 가운데 노여운 마음이 있게 되는 것은 인격을 무시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하고도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 자체를 무시하는 것이니 아무 것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아무런 일을 당해도 하나님의 언약을 의심치 않고 믿었다는 것이 믿음의 조상이 되므로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기를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은 주고자 하는 사랑을 가지신 사랑의 자체이신데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는 죄가 된다. 왜냐 하면 주겠다는 것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이제 의심하지 않는 자라야 받는다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자기 부족을 깨닫는 마음에서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5)

  하나님은 자기 부족을 깨닫고 의심없이 구하는 자는 다음과 같이 축복을 하시는 것이다.

  첫째 : 구하는 것밖에 더 넘치도록 주시는 것이다.

  둘째 : 완전하게 하시되 당신의 소원을 의심 없는 자에게 줌으로써 이루는 것이다.

  셋째 : 당신은 참이라는 것을 의심 없는 믿음을 가진 자를 통하여 만민이 알도록 표적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과거에 어느 종이나 특별히 대표적으로 쓰는 종에게 의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몰아 넣고, 까불어 보는 것은 조금도 의심치 않는 자에게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그를 통하여 세상에 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모세도 40년간 미디안의 쓰라린 시련을 겪게 해서 세운 것이요, 아브라함도 백세가 되도록 시련을 주어서 세운 것이요, 모든 선지 중에서 대선지 이사야도 벗은 몸, 벗은 발로 3년 동안 전도하게 하시면서 말씀을 주신 것이요, 사도 바울도 무서운 박해를 당하여 어려운 난관 속에서 수많은 편지서를 쓰게 한 것이요, 사도 요한도 무서운 네로 황제 박해 속에서 쓴 환란을 통과하고 쓰라린 밧모 섬에서 계시를 받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한 것은 그 성경 내막이 다 어려운 난관을 당해도 의심치 않는 자에게 주겠다는 비밀이 기록된 것이다. 그러므로 간교한 뱀을 들어서 하나님 말씀이 의심나게 꾀이는 그 역사는 아담, 하와로부터 새 시대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계20:1~3).

  가장 정상적인 인격은 하나님의 지혜를 풍성히 받은 자에게만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은 아무 것도 더함이 없는 바람잡이 생활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완전한 지혜를 받은 사람은 무엇이나 확정적인 진리에 서게 되므로 한 시간도 헛되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 없게 될 것이며 한 마디의 기도라도 헛되이 기도하는 시간이 없는 동시에 무슨 일이나 다 열매 있는 생활이 될 것이다.

 

  2. 의심하는 자는 무엇이든지 얻을 수 없다 (6~7)

  최고의 불행스러운 사람은 구하고도 받지 못하는 자라고 본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후하게 주시겠다는데 이것을 하나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불행스러운 일인가? 기도하지 않는 사람보다도 기도하고도 받지를 못한다는 것은 더욱 불행한 자라고 본다. 그러므로 가장 행복스러운 사람은 의심 없이 믿고 구하는 자요, 가장 불행한 자는 구해도 의심이 있어서 받지 못하는 자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심치 않는 사람을 찾아서 주고픈 그 사랑을 다 이루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신앙이라는 것은 의심 없는 믿음으로 구하여서 지혜를 풍성히 받는 생활이라고 본다.

  가장 영화로운 일은 지혜를 구하던 솔로몬 왕이라고 본다. 왜냐 하면 그 손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했고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천지 만물을 다 창조한 후에 성전을 제일 먼저 지은 사람은 지혜를 받은 솔로몬이다. 그렇다면 성전을 시작하는 자가 지혜를 받아 시작했다면 완전한 촛대교회를 이루어서 새 시대에 들어가는 자도 지혜를 받은 자가 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구할 것은 지혜라고 본다.

 

 결 론

  지혜를 구하고 의심하는 자는 마귀의 흑암이 올 것이요, 지혜를 구하고 의심치 않는 자는 하나님의 신이 올 것이다. 이제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치 않는 자의 받을 축복은 다음과 같다.

  첫째 : 몸의 영생이다.

  첫째아담은 말씀을 의심했으므로 그 몸이 죽었고 말세의 성도는 예언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순종할 때에 그 몸이 살아서 새 시대를 보게 되는 것이다.

  둘째 : 세계 통일의 통치권을 받는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으므로 통치권을 상실했지만, 말세의 성도는 아무리 마귀 미혹이 강해도 조금도 의심치 않고 말씀을 지키므로 세계를 통치하는 사람이 된다.

  셋째 : 완전한 축복을 받게 된다.

  첫째아담은 말씀을 의심했으므로 축복을 빼앗겼고, 말세의 성도는 의심 없이 말씀을 지켜 나갈 때에 완전한 축복을 영원히 후손까지 받게 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난다고 단12:3에 말했다. 이 날까지도 지혜로운 자가 복을 받았지만, 완전한 축복을 받을 자는 지혜를 풍성히 받은 자라고 본다.

 

시험이 올 때 인정받는 자가 되자

- 약 1:12~18 -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자는 시험을 참는 자라고 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1. 시험이 오는 동기 (12~14)

  시험의 동기가 어디서부터 오느냐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자기가 시험에 들어가는 것이 근본이 무엇인 것을 모른다면 그 자체는 정욕에 속한 자가 될 것이다.

  시험도 옳게 인정할 조건으로 오는 시험도 있고 옳게 인정을 못할 조건으로 오는 시험도 있으니 옳게 인정을 받을 시험은 다음과 같다.

  첫째 : 참는 마음에서 오는 것은 의를 위한 시험이니 정욕을 참지 못해서 받는 시험과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시험을 허락할 때에 인내력을 길러서 그 종을 쓰기 위한 목적이 있으니 이것은 인정을 하기 위한 방법이다.

  둘째 : 시험을 피할 수 있지만 사명을 하기 위해서 당하는 시험이 있다. 이것은 주님께서 시험을 해보는 것보다도 열심히 일하기 위하여 싸우는 조건으로 오는 시험도 있으니 이 시험을 통하여 남을 구원해 주는 일이 있으므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셋째 :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당하는 시험이니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그 시험을 당하지 않을 것인데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당하는 시험은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일이니 이 세 가지 방면으로 오는 시험은 상급이 될 조건이 있다고 보게 된다.

  그러나 욕심에 끌려서 받는 시험은 다음과 같다.

  첫째 : 마음에서 정욕이 발생하므로 받는 시험인데 이것은 마음으로 범죄하는 죄가 되므로 중심적인 개조를 받기 전에는 그 시험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 말에 실수가 있으므로 오는 시험이니 이것은 입을 지키는 일이 있음으로만이 물러갈 수 있는 것이다.

  셋째 : 불의를 용납하므로 오는 시험이니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을 용납한 죄로 큰 시험이 민족적으로 왔고, 베드로가 작은 계집아이에게 말을 용납해서 거기서 공포를 가진 것으로 시험이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게 해 주든지 두렵게 해 주든지 하는 그 말에 충격을 받지 않아야 될 것이다.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의 말을 기분 좋게 받아들임으로 시험받은 일이나 베드로가 작은 계집아이 말을 두렵게 들으므로 실수한 일을 보아서 불의한 자의 말은 절대로 충격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2. 스스로 속지 말아야 한다 (15~18)

  스스로 속는 자라는 것은 자기가 욕심에 끌리고도 옳은 줄 아는 것이라고 본다. 욕심이라는 것은 위로부터 오는 것만을 바라보지 않고, 땅의 것을 생각할 때부터가 욕심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열심이 있다 하여도 위에서 주는 것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고, 사람에게서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열심이 있어도 스스로 속는 일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서 자아의 인격을 완전히 찾는 사람이 되는데는 하나님께로부터 그 인격을 받아야 될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되 그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을 따라 받는 신앙에 들어가야만 열매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믿는다 하는 자들이 자아라는 인격을 바로 찾지 못하고 무조건 믿음으로 된다는 것은 스스로 속는 일이다. 말씀에서 바로 서는 신앙은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첫째 :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는 자가 되어야만 될 것이요

  둘째 : 그 말씀에 떠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요

  셋째 : 그 말씀에서 체험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자가 됨으로써 시험을 참고 나가는 자로 면류관을 받는 왕권에 도달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결 론

  신앙 생활은 시험이 없이 자랄 수 없고, 시험이 없이는 타락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시험을 참음으로 향상이요, 시험을 참지 못하므로 타락이다. 시험이라는 것은 왜 오느냐는 것을 바로 아는 것이 빛이라면 시험을 물리치는 것도 빛으로야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시험이 오되 억울하게 오면 그것 때문에 참지를 못하고 타격을 받는다는 것도 인정받지 못할 일이요, 짐짓 욕심에 끌려 시험을 받으면서 회개할 줄 모른다 해도 이것은 큰 실패를 가져올 것이다.

  이제 시험에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다. 첫째 시험해 볼 사명을 맡은 자는 마귀다. 그러므로 마귀는 얼마든지 시험을 해보는 것이 자기 할 일이므로 마음에 기회가 있으면 마음에 들어가 역사하고, 가정에 기회가 있으면 가정에 역사하고, 교회에 기회가 있으면 교회에 역사하므로 개인과 가정과 교회를 망치는 일이 있게 된다.

  이제 개인의 시험은 개인의 인격 하나를 바로 가지므로 이길 수 있고, 가정의 시험은 그 가정이 단합되므로만이 물러가게 되고 교회의 시험은 교회가 진리 안에서 단결하여 목숨을 바쳐 싸우는 희생적인 순교의 정신이 없이는 교회는 신령한 교회로 보존될 수가 없는 것이다.

 

온전한 인격을 이루는 비결  

- 약 3:1~12 -  

 

서 론  

하나님께서 종에게 요구하는 초점은 인격을 요구하는 것이다. 종된 자의 인격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인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어떤 사회단체 지도자도 그 단체에서 인정을 받는 인격을 요구한다면 적어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가르치는 종교단체에 합당한 인격은 사람이 세울 수 없고, 하나님께서 택해 세우시되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을 상대한 종교단체에서 하나님이 요구하는 인격을 찾지 못하고, 사람이 인정하는 인격에서 움직인다는 것은 종교 부패를 가져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인격은 어떠한 인격이냐 하는 것을 성서를 통해서 알아야 할 것이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인격 (요일2:5)  

우리는 온전한 인격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데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속에 와서 온전하게 되도록 역사해 주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진리에 탈선된 노선에 서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기다린다는 것은 미혹을 받는 사람의 행동이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니 진리를 따르고자 하는 자에게만 역사하는 사랑이다.  

우리가 그 말씀을 지키므로 온전해 지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사랑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사랑의 인격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타락된 인생을 어떻게 구원하시며 축복을 받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만일 말씀이 온전한 사람을 찾자는 말씀이라면 죄를 지은 사람은 지키겠다는 생각조차 가질 필요가 없다. 죄를 지은 사람을 온전케 만들어 주겠다는 사랑에서 약속하신 말씀이니 그 말씀을 순종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이다.  

2. 말에 실수가 없는 자 (약3:9)  

말의 실수라는 것은 본문에 의하면 형제를 저주하는 말이라고 쓰여 있다. 우리는 남을 살려 보려는 목적으로 입을 열어야 온전이라는 인격을 소유할 수가 있다. 그러나 바리새교인들이 율법을 숭배하고, 정통을 찾고 장로 유전을 지키는 거룩한 경건파라고 하지만, 입으로 그리스도를 바알세불에 걸렸다고 말을 할 때 “네 말이 네 죄를 정하리라”고 했던 것이다(마12:37). 금일에 말씀을 전하는 종이 함부로 남을 이단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심판 날에 큰 책임을 질 실수라고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이단이라고 판단했으니 심판 날에 자동적으로 심판을 받는다는 것같이 말세에 참종을 이단으로 판정한다면 그 종이 심판권을 받을 때 자동적으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육을 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종된 자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외에 딴 것을 말할 자격이 없다. 예를 들면 가정에 어떤 종이 주인에게 그대로 전해 달라는 대로 전하지 않았다면 이것도 말의 실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심판을 받을 죄라는 것보다도 성령을 근심케 하는 것이다.  

3. 종말에 시대적인 비밀을 바로 증거하는 종이 되자 (계11:3)  

하나님의 종은 시대를 바로 가르쳐서 시대적인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칠 책임이 있는 것이니 마귀 참소를 이기는 인격은 피와 증거의 말씀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다(계12:11). 즉, 종은 자기를 위하여 입을 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하여 쓰는 입이니 입에는 지식의 말씀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말2:7).

그러므로 완전한 사람이 되려 할 때에 하나님은 입술에 말씀을 주는 것이다(사59:21). 이것은 하나님의 종의 입을 쓰기 때문에 말씀을 입에 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입을 바로 쓰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살고 바로 쓰지 못하므로 죽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시대적인 비밀을 바로 증거하는 종이라면 비밀의 말씀대로 역사하는 하나님께서 그 입을 능력 있게 권세 있게 바로 쓰게 하실 것은 사실이다. 최고의 인격은 입에 실수 없이 바로 말을 증거하는 종을 통하여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다(사11:4~5).  

결 론  

하나님은 완전한 신이시니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는 것만이 완전히 아니요, 입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될 때에 당신의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와가 입에 실수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바로 싸웠던들 인간의 타락을 가져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말하지 못하는데서 시작됐다면 인류가 타락하는데서 최고로 올라가는 마지막 승리는 입에 실수 없는 증인을 통하여 끝을 맺을 것이다.

 

교회 안에 두 가지 지혜  

- 약 3:13~18 -  

 

우리는 교회 안에서 지혜롭게 하는 것이 원칙인 것이다. 그러나 지혜도 마귀로부터 오는 지혜도 있고, 위로부터 오는 지혜도 있는 것이니 이것을 분별할 줄 모른다면 마귀로부터 오는 지혜를 따를 때 교회는 무너지고 말 것이다.  

1. 마귀로부터 오는 지혜는 무엇이냐 하는 것을 먼저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14~15)

    마귀로부터 오는 지혜는  

 1) 마음속에 독한 시기를 품은 지혜다.  

시기라는 것은 사단의 본질이니 바리새교인들이 아무리 정통을 찾고 있었으나 그리스도를 시기하고 자기의 주권을 따라 해코자 하는 마음을 가질 적에 간교한 묘책을 썼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무엇이든지 인간의 묘한 방침으로써 그리스도를 대적했던 것이다. 이는 독사의 행동이라는 것을 주님은 말했던 것이다.  

 2) 다투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위하여 싸운다는 것은 없을 수 없으나 자기의 주권이나 명예나 영리를 위해 다투는 것은 자동적으로 진리를 거스리는 대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망치는 이리의 행동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 15절에 이러한 지혜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라고 했던 것이다.  

 

2. 위로부터 오는 지혜 (17)  

 1) 성결이다.  

이 성결이라는 것은 인간 자체의 수양을 따라 오는 것은 아니다. 위로부터 오는 것이니 참된 지혜가 마음 가운데 들어올 때 정욕이라는 것은 자동적으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참된 섭리를 분명히 깨닫는 동시에 그 뜻을 준행할 수 있는 마음을 받게 되는 것이다.  

 2) 화평이다.  

하나님은 화평의 신이시니 그 자체가 올 때 조금도 불평이라는 생각조차 있을 수 없게 된다.   

 3) 관용이다.  

하나님은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신이시니 그 신의 역사가 임할 적에 자동적으로 형제를 관용하는 마음으로 대하게 된다.  

 4) 양순이다.  

하나님은 자체에는 해코자 하는 것은 전혀 없는 신이시니 이 신의 역사가 임할 때 중심에 조금도 발악적인 행동을 가질 수 없게 된다.   

 5) 긍휼이다.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는 신이 마음에 와서 역사함으로 자동적으로 형제를 긍휼히 보는 마음에서 움직일 때에 선한 열매가 따르고 절대 편벽과 거짓이 없게 될 것이다. 만일 남을 사랑한다 해도 편벽이 있다면 이것은 위로부터 오는 사랑은 아니다.  

결 론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이 하늘과 땅에 있는 진리이다. 참된 지혜로 화평을 심으면 의의 열매가 거두어지고 마귀적인 지혜로 시기와 다툼으로 심어지는 곳에는 요란함과 악한 일이 열매로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 열매를 보아서 알라고 했던 것이다.

 

입의 말과 인격 문제

- 약 3:1~12 -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할 때에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입에 말할 수 있는 특권을 맡긴 것은 그 입의 말에 의하여 보응을 내리시겠다는 법이 있는 것이다(마12:36~37). 그러므로 그 말과 인격과는 떠날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말에 의하여 하나님같이 되기도 하고 마귀같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자기 입이 부정한 것을 떠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성경의 심장이 되는 이사야서를 하나님께 받은 선지는 입이 부정한 것을 떨 때에 하나님은 대표적인 사람으로 세워서 대 선지가 되게 했던 것이다(사6:5~8).

  이제 입의 말과 인격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입에 실수가 있는 선생이 될까봐 떨어야 한다 (1)

  죄 중에 큰 죄는 말에 실수가 있는 선생이라고 본다. 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죄보다는 입으로 사람을 죽이는 죄가 더 큰 것이다. 왜냐하면 입으로 사람을 죽이는 죄는 그 영과 사상을 죽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때려죽이게 하던 바울도 그 입을 들어서 열방을 깨우치는 일이 있었지만 입에 실수가 있는 종은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를 받았다. 입에 실수가 있는 선생은 누구냐는 것을 알아야 한다.

  ① 그릇된 판단을 내리는 종

  ② 성경을 잘못 말하는 종

  ③ 공연히 횡설수설하는 말을 하는 종

  하나님의 종은 입에 법이 있어야 한다(말2:6). 지식을 지켜야 한다(7). 인생 중에 제일 열매가 많은 사람은 입에 실수가 없이 진리를 증거하는 종이요, 제일 열매가  없이 나가는 자는 필요 없는 인간이라고 본다.

  입은 하나님과 상대하는 입이요, 사람을 상대하는 입이다. 하나님을 상대할 때 입에 실수가 있으면 사람을 상대할 때도 큰 실수가 있는 것이요, 하나님을 상대할 때 입에 실수가 없이 되는 사람은 사람을 상대할 때도 입에 열매가 많을 것이다.

 

  2.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입을 조심할 것 (2~8)

  입은 지체 중에 제일 약한 것 같으나 제일 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구든지 항상 자기 인격은 학식보다도 기술보다도 체격보다도 금전보다도 입에 실수가 없는데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생각하고 모든 일을 다 잃어 버렸다 하더라도 입만을 지키는 자가 된다면 그 사람은 모든 것을 초월한 인격이라고 보게 된다.

  물질에 끌리어 말을 할 때 물질의 종이요, 명예에 끌려서 말할 때에 명예를 탐하는 거짓 선지요 세상 지식을 따라서 말할 때에 세상 지식에 속한 사람이요 하나님이 말하게 하는 대로 말할 때에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다.

  앞으로 세계를 정복할 자는 하나님이 말하게 하는 대로 말하는 인격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은 입에 따라서 모든 결말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예를 든다면 혀는 막막한 바다를 건너가는 배를 좌우하는 작은 키와 같고 많은 섶을 불사르는 적은 불같고 영원한 지옥의 불로 가게 하는 도구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말하는 대로 보응을 받을 인격을 하나님께 받았으니 입을 조심해야 될 것이다.

 

  3. 하나님께만 찬송하는 입이 되어야 한다 (9~12)

  누구든지 영원히 찬송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느냐, 영원히 슬피 통곡하는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대로 영원히 찬송하는 사람도 되고 영원히 통곡하는 사람도 될 것이니 지금 하나님께 상달하는 찬송을 제사로 올리는 사람이 되려면 입으로 형제를 저주하는 일이 없어야 될 것이다.

  입으로 범죄하고 입으로 찬송과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오히려 가증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입이 깨끗한 자로서 찬송할 때에 하나님은 그 찬송을 제사로 받으시고 그 찬송대로 이루어지도록 축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복된 입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송을 부르는 입으로 보게 된다.

 

 결 론

  가장 슬픈 일이 입에 있고 가장 기쁜 일이 입에 있다. 지옥 불에서 영원히 슬퍼하는 입이 얼마나 불행이며 천국에서 영원히 기뻐하는 입이 얼마나 행복스러운 일인가? 그러므로 마귀는 항상 입으로 죄를 짓도록 하자는 목적이요, 성신은 항상 복을 받도록 입을 들어서 쓰는 신이시다. 베드로가 입으로 예수를 부인할 때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며 입으로 한번 말할 때에 3천명이 회개할 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50일 전의 베드로의 입과 50일 후의 베드로의 입과는 인격의 큰 차이를 이루어 놓았던 것이다.

 

참된 지혜와 열매

- 약 3:13~18 -

 

  지혜라는 것은 악마로부터 오는 지혜도 있고, 하나님께로 오는 지혜도 있으니 지혜에 대하여 어떠한 것이 참된 지혜인 것은 열매를 보아서 알 수 있다. 이제 참된 지혜에 대한 것은 하나님께로 온 지혜인데, 이 지혜를 받은 자는 다음과 같다.

 

  1. 성결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지혜롭게 나가는 것같이 보여도 성결이라는 것이 없다면 이것은 오히려 죄를 짓는 도구가 되는 지혜가 될 것이다. 참된 지혜의 성결이라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믿는 동시에 그 마음이 성결하여져 하나님의 뜻과 병합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은 성결이 없이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니 마음에 부정이 있을 적에 그 자체는 하나님과 대적이 되는 것이니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도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결이라는 것은 인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혜의 신이 내 마음을 점령할 때에 가장 위대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분명히 알게 되므로 모든 일에 조금도 탈선된 과오를 범치 않는 것이다.

 

  2. 화평이다

  이 화평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핍박이나 고난을 당하여도 조금도 불평이 없는 화평을 말한다. 상대편에서 아무리 불평이 있어도 여기에 충격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닫는 지혜가 충만한 자는 오히려 더 화평스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열매가 있다. 그러므로 지혜를 충만히 받은 스데반은 돌로 때리는 악당을 향하여 화평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볼 때에 그들에게 천사같이 보였던 것이다(행6:15, 7:39~60).

 

  3. 관용이다

  언제나 지혜로운 사람은 남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일이 있게 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실수한 원인을 잘 이해하고 또는 하나님 사랑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형제의 장래를 내다보는 일이 있기 때문에 현재에 실수가 있는 자라도 너그러이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를 잘 지도할 수 있는 자가 되어서 많은 사람을 구원해 주는 열매가 있다.

 

  4. 양순이다

  이 양순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지혜가 충만할 때에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는 동시에 누구든지 악으로 대하지 않고, 양심적인 인격에서 언제나 순조롭게 나가는 생활을 한다. 억지라는 것은 어리석은 자의 행동이요, 양순이라는 것은 지혜로운 자의 행동이니 누구든지 완전히 깨닫는 지혜가 있다면 그 일에 대하여 불평을 둘 수가 없고, 양순이 있게 된다.

 

  5. 긍휼이다

  완전한 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통하여 오는 것이니 남을 위하여 눈물겨운 심정에서 기도하고 붙들어 주는 일이 있게 된다. 누구든지 지혜로운 종은 언제나 양떼를 대할 때에 불쌍히 보는 심정에서 진리를 말하게 된다. 진리라는 자체가 인간을 불쌍히 보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타난 말씀이니 지혜를 받은 자가 진리를 바로 깨달아 증거할 때에 남을 위하여, 살려 보려는 불타는 마음에서 목숨을 바치고 싸우게 된다.

 

  결 론

  완전한 지혜라는 것은 인간이 소유할 수 없고, 위로부터 오는 것이니 이 지혜를 받는 자만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열매를 맺으므로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다.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될까 조심하라

- 약 4:1~4 -

 

  기독교의 흑암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면서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을 하는 것을 종교 부패요, 흑암이라고 본다. 구약 말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다가 이방 바벨론에게 망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자리에 있게 되므로 하나님은 진노의 막대기로 예루살렘을 쳤던 것이다. 주님 당시에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을 하므로 또다시 예루살렘은 망하고 만 것이다.

  이와 같이 금일에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자들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행동을 하게 된다면 무서운 심판이 교회로 올 것이다. 이제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면서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행동은 무엇이냐는 것을 성서로 증거한다.

 

  1. 다투고 싸우는 일이다 (1~2)

  하나님께서 제일 원수로 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람을 대적하고 싸우는 무리들이다. 사41:11~12을 보면 말세에 동방 땅 끝에서 붙들어 쓰는 종을 향하여 다투고 싸우는 자는 다 멸망을 시킨다고 말씀한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운 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가장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은 하나님의 참된 진리의 종을 대적하는 일이나 공연히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일일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면서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다투고 싸우는 자들에게 임하는 것은 이런 무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고 망치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2. 정욕적으로 구하는 일 (3)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하고 기도하는 자에게 주시기를 기뻐하는 동시에 정욕으로 구하는 사람은 오히려 대적으로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보다도 자기의 뜻을 내세우는 패역한 자식이기 때문이다. 종교인의 제일 큰 죄는 종교를 악용하는 일인데 자기의 욕망을 채워 보려는 마음에서 아무리 소리를 높여 기도한다 하여도 오히려 하나님은 낯을 가리우시는 것이다(사1:15, 미3:4, 11).

  기도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있다면 아무리 주의 종이라도 하나님은 대적으로 알고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자들은 내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일을 하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이 항상 있어야 할 것이다. 발람이 기도를 하고 예언을 하고 했지만, 불의한 삯을 따라 갈 때에 망하고 만 것이다.

  종교인의 제일 큰 비극은 정욕으로 하려고 기도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자들은 기도할수록 점점 손해요, 흑암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덮어놓고 구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예를 든다면 나라의 법에 의하여 신청하지 않고, 문서를 위조하고 신청했다는 것은 신청을 하지 않은 사람보다도 더 불행이 될 것이다.

 

  3. 세상과 벗되는 일 (4)

  우리는 세상을 원수시하고 나간다는 것도 탈선이요, 세상과 벗이 된다는 것도 탈선된 일이 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는 범위 안에서 나가야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겸손하게 역사하는 일, 아들을 희생시켜서 역사하는 일, 끝까지 참고 기다리시면서 역사하는 일,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겸손과 희생과 인내, 이것으로써 역사할 때에 하나님과 의합된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언제나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을 하지 않고, 친구가 되는 일을 할 때에는 무엇이나 기도하는 것 밖에의 더 좋은 것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로되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을 한다면 생각 밖에의 두려운 일, 망신하는 일, 크게 수치를 당하는 일이 오게 될 것이다. 금일에 기독교가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덮어놓고 자기가 정통이라는 교만, 자기의 주권을 위한 야욕, 자기의 안락을 위한 물욕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수치를 당하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결 론

  가장 슬프고도 부끄러워 할 일은 종교인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일을 하다가 원수인 마귀 자식들에게 먹힘을 당하고 포로가 되고 큰 피해를 당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라고 본다.

  우리는 육적 이스라엘의 종말을 깊이 생각하고 구약 선지서를 심판의 다림줄로 알고, 자세히 읽어보면서 자아를 반성하며 회개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진노의 날에 먼저 막대기를 맞게 될 것이니 우리 하나님의 종들은 이때에 나 자체가 어떠한 자리에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가는 생활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슬퍼하시면서 떠나가는 일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사상과 마음을 가진 자에게서 떠나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 약 4:1~10 -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을 찾을 수 없으므로 은혜를 주기 위해서는 겸손한 자를 찾으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겸손하게 인간을 찾아오기도 하시고 또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기 위하여 기다리고 사모하기도 하신다. 이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해서 말하고자 한다.

 

  1. 정욕으로 하려는 것이 없어야 된다 (1~3)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시되 그 사람이 이 은혜를 바로 간수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느냐는 것을 먼저 보신다. 어떤 사람이 은혜를 받아서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는 것은 오히려 기도한다 하여도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 된다.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는 뜻을 이루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니 은혜를 악용하지 말고, 은혜를 받아서 자아를 희생하고 순교의 생활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십자가에서 참으셨기 때문에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는 것이니 은혜를 주는 자나 받는 자나 목적이 동등해야 된다. 사도들은 성신을 받아 가지고 그 때부터 피흘리기까지 싸워나갔기 때문에 하나같이 승리하고 왕권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욕심이란 자체는 교만에서 오는 것이니 우리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치 않고, 욕심을 따른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다. 왜냐할 때에 하나님은 택한 자에게 모든 것을 주기로 작정한 것인데 사람이 그 뜻에 순종치 않고, 자기라는 생각을 앞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된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동시에 조물주께서 우리보다 우리 사정을 더 아시고, 인도하시는 그 뜻에 순종하는 것 외에는 전부가 욕심이 될 것이다.

 

  2. 타협이 없어야 된다 (4~5)

  하나님의 심정은 더 큰 은혜를 주고 싶어하는 마음이 간절한 것인데 이 뜻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것을 바라본다면 자동적으로 성신을 대적하는 일이 된다. 우리에게 온 성신은 밤낮으로 우리가 완전해 지기를 사모하는 신이다. 성신이 온 목적은 그 사람을 이 세상의 영광보다도 더 좋은 영광을 세세토록 받게 하자는 목적인데 세상 영광을 바라본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큰 과오라고 보게 된다.

  누구든지 세상의 것을 분토같이 보고 하나님 나라에서 오는 것만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에게는 날마다 더 큰 은혜를 주어 이 땅에서도 부족함이 없고, 앞으로 오는 시대에 세세 왕권을 받게 하는 것이다. 은혜라는 것은 그 분량에 따라서 주고 또 주시고자 하는 것이니 더 큰 은혜를 받으려면 성신의 인도를 따라서 행하는 자라야 될 것이다.

 

  3.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6~7)

  순종이라는 것은 은혜를 받은 자로서 아무리 마귀가 대적해도 마귀를 무서워 말고, 마귀를 물리치면서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을 절개라 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절개 있는 신부가 신랑에게만 순종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마음이 끌리지 않는 것을 정절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무리 간교한 마귀가 꾀어도 하와같이 끌리지 말고, 담대히 물리치고 나갈 때에 성령은 더 강하게 역사해 주신다.

  성령의 인도라는 것은 마귀 시험이 없게 하는 것보다도 마귀를 대적하도록끔 하기 위하여 마귀 시험을 통과시키는 것이다(마4:1이하). 누구든지 겸손하게 순종하는 자라면 모든 전부는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역사해 주시는 것을 하나님의 진리의 역사라는 것이다. 진리라는 자체는 마귀를 대적해서 이기고 순종해야 된다는 것이 진리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결 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항상 주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다(10). 이것은 하나님께서 겸손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 마귀를 들어 역사하는데 사람들이 이 모략을 모르고, 자기 위신을 높이기 위하여 마귀를 대적하지 않을 때에 마귀는 물러가지 않고, 오히려 우리에게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수치를 당하고, 멸시를 받고, 쫓겨남을 당한다 할지라도 자기의 이익을 생각지 않고, 싸우는 자라야 자기를 낮추는 자라고 보게 된다. 누구든지 은혜를 받고도 자기가 불리하고, 명예의 손실과 자기 위신이 폭로된다고 해서 회피한다는 것은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자라고 보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절대 부끄러워하지 않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므로 큰 역사가 인류적으로 이루어진 것같이 말세의 종도 원수를 무서워 말고,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는 자라야 겸손한 자에게 주는 은혜를 더 강하게 받을 것이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

- 약 4:13~17 -

 

  하나님 자체는 생명이요, 빛이요, 사랑이시며 진리의 신이시므로 그 하나님은 선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는 신이시다. 선이라는 것은 자기를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 아니고, 남을 위하여 역사하는 것을 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한 것이나 인간을 낸 것이나 이날까지 끊임없이 춘하추동 사시 절기를 따라 만족한 것을 인간에게 주기 위하여 자연계를 움직이고 계시며, 자연을 초월한 영계 활동을 움직이며 또는 순종하는 자에게 얼마든지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하여 역사하는 일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는 사람이 아무런 것도 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죄가 된다. 죄라는 것은 직접으로 자기가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죄요, 남이 나쁜 일을 하도록 하는 것도 죄요, 남을 살려 주라는 사명을 맡아 가지고, 그 사명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많은 사람을 죽이는 죄와 같다. 그러므로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의 종이 중대한 사명을 맡아 가지고도 그 사명을 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남을 살리고자 하는 주인이 급한 사정을 만난 인간에게 급한 일을 피할 수 있는 소식을 가서 전해 주라고 할 때에 이것을 전해 주지 않았다면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

  이제 선을 행치 않는 죄에 대하여 죄가 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선한 일인데, 그 일이 안되도록 버려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업을 망친 죄이니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대적이 될 것이다(마25:27~30). 하나님이 언제나 선한 일을 하실 적에 사람을 통하여 하도록 하시는 것은 사람에게 더 큰 축복을 주되 왕권을 주기 위한 목적인데, 그 사랑의 법칙을 짐짓 행치 않았다는 것은 자신을 망치는 죄도 된다.

 

  2. 인간을 아끼지 않는 죄다

  사람이 사람을 아끼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사람을 아름답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끼는 사람을 나도 아껴야 선한 일이 될 것인데, 남을 불쌍히 볼 줄 모르고, 사람이 사람을 이용한다는 것은 큰 죄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껴 주는 것이 아니라면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인데, 남을 도와 보려는 마음이 없을 때에 자동적으로 하나님과는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의 죄를 용서할 줄 모르면 처벌을 받게 된다. 제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은 죄로 죽을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마18:33~35).

 

  3. 삯꾼이 되는 일이다 (미 3:10~11)

  삯꾼이라는 것은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것은 다 남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일인데, 희생적인 정신이 없이 주의 일이라 하면서 주의 일을 통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한다면 그 자체는 죄가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죄가 되기 때문이다. 더럽힌다는 것은 거룩한 것을 속되게 한다는 것이다. 거룩이라는 자체는 자기 유익을 위한 목적을 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은 심정에서 움직이는 것을 신의 거룩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 그 뜻을 어기고, 자기 욕망을 내세운다면 자동적으로 도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선한 일이라는 것은 값을 받지 않고, 남에게 주려는 것을 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익을 구하지 않고 일하는 자에게 친히 갚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마음이니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상대하지 않고 인간에게 무엇을 얻어 보려는 것이 있다면 갚아 주시는 하나님 앞에는 불의로 인정된다. 불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는 뜻이다.

 

  결 론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축복하시는 이가 하나님인데 그것을 하지 않는 자는 축복 대신에 화를 받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일한 대로 갚아 주는 것이니 진노의 날에 남은 자가 되려면 선한 일을 행한 자만 남게 될 것이다.

 

주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마음

- 약 5:7~11 -

 

  참된 성도는 누구든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이 불타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의 억울한 사정은 재림의 날에 가서야 해결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과거의 사도들도 재림을 기다렸는데 그 주님이 언제 오실는지 막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 사람들은 어리석은 자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성신이 역사할 때에 억울함을 당하는 종들의 마음에 재림의 주를 기다리게 한 것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억울함을 당한 성도들에게 큰 축복이 있기 때문에 성신은 어느 종이나 꼭같이 재림을 갈망하고 일하게 했던 것이다.

  재림의 주를 고대하는 성도들은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증거한다.

 

  1. 마음을 굳게 하여야 된다 (7~8)

  재림의 주를 고대하는 자라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있지를 않고,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마음을 굳게 하여 나가는 자라야 중심을 보시는 주님 앞에 인정을 받게 된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굳게 하지 못할 때에 마귀에게 정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실 때에 무슨 일을 당하든지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나가는 자라야만 인정하는 것이다.

 

  2.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9)

  재림의 주를 고대하는 사람은 마귀가 극도로 발악적인 행동을 하며 대항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는 왕권 받을 사람을 참소하라는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주 앞에 설 자격을 가지려면 억울함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어려운 시험이 닥쳐오는 것은 왕권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모략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원망할 일을 당해도 원망치 않을 때에 주님은 순교적인 반열에 들 사람으로 인정을 하는 것이다. 과거에 어느 종이나 순교적인 생활을 하는 종들은 원망할 일을 많이 당하게 된 것이다. 일을 많이 하는 종일수록 원망할 일을 많이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망치 않을 영계에 들어간 자라야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있다.

 

  3. 끝까지 참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10)

  재림의 날에 복 받을 성도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참는 것이 없다면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선지와 사도들도 끝까지 참음으로 순교를 한 것이다. 끝까지 참는 자에게 묵시로 주신 책은 하나같이 끝까지 참는 자만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끝까지 참는 자를 인정하시는 것이므로 그 시대의 비밀을 끝까지 참던 선지에게 역사하시던 하나님은 끝까지 참는 자에게 다시 역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같이 된 자를 찾는 것이 아니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치 않고, 끝까지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을 당신과 같이 영원히 영광을 누리도록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심정인 동시에 우리에게 전한 말씀이다.

 

  4. 주께서 긍휼히 여기심 (11)

  주님의 긍휼은 두 가지로 임한다.

  첫째 : 알지 못하고 마귀 흑암에 빠져 있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봄으로 독생자를 보내어 인간의 죄를 위하여 죽게 하셔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회개하는 자에게 그 아들의 대속의 피를 보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중생의 은혜를 주시는 것이요,

  둘째 : 주님의 맡긴 사명을 위하여 어떠한 핍박과 환란이 와도 끝까지 참는 사람을 불쌍히 보시고,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있는 왕권 반열에 들게 하신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시므로 죄를 사하여 주시고 긍휼히 여기시므로 왕권의 영광을 주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총으로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은 재림의 주를 고대하는 마음이 불타게 성령으로 역사하는 것은 재림의 날에 긍휼 함을 받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용서하기도 하시고 축복하기도 하시는 것이니, 재림의 날에 복된 사람이 되려면 마음을 굳게 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지 말고, 조급한 마음을 가지지 말고,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자가 된다면 주님의 긍휼하심이 진노의 날에 임하게 되므로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있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주 강림시까지 남을 자의 자격  

- 약 5:7~12 -  

 

서 론  

주님께서 메시야로 올 때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으므로 메시야는 자기의 죄만 깨닫는 자라면 영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심판주로 강림할 때에 어떤 인격을 갖추는 자라야 주를 영접한다는 것을 본 성경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우리의 인격이라는 것은 그 시대에 오는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인격적인 존재라 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봄에는 봄철에 합당하도록, 여름에는 여름철에 합당하도록, 가을에는 가을철에 합당하도록 자라나는 것과 열매 맺는 것이 없다면 인류 사회는 보존할 수가 없음같이 주님 다시 오실 때는 그 시대에 적합한 인격이 아니라면 그 시대의 인격을 보존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 본문 성경은 이미 은혜 시대가 지나 주 강림시에 남은 자가 될 인격을 가리킨 것이다.  

1. 길이 참는 인격이다 (7)  

참는다는 것도 여러 가지 구별이 있고, ‘끝까지’ 라는 것은 ‘주님 강림할 실 때까지’ 라는 말이다. 참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시험문제가 있다는 것이 결부된다(약1:12, 마24:12~13). 그 때는 불법이 성하므로 사랑이 식어진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인내라는 것은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므로 되는 일이 아니고, 남에게 배척받고 시험을 받을 때 결부되는 일이다. 하나님은 끝까지 참는 자라야 재림의 날에 남는다고 했다.

참을 수 없는 어려운 문제가 오는 것은 계시록에 가르친 것이다. 주 재림시에 참을 수 없는 어려운 난제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끝까지 참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 것이다. 계22:6에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과 동일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2. 마음이 굳센 인격 (8)  

마음이 굳세다는 것은 심지가 견고한 것을 말한 것이다(사26:3). 인격이라는 것은 외형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혹은 위대하다, 혹은 강하다, 충성 되다는 이것은 심지가 견고한 자에게 따르는 열매이다.  

3. 원망하지 않는 인격이다 (9)  

이 원망이라는 것은 가장 가깝고 친한 사이에서 오는 시험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했다. 주님께서 강림할 때는 믿는 형제끼리 서로 원망할 일이 많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시련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만 시련이 오는 것이 아니고, 전체적인 무서운 시련이 옴으로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했다. 예를 들면 온 몸에 한 지체가 괴로우면 온 몸이 괴로운 것같이 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서로 똑같은 시련을 통과시키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고 원망하지 말라는 것이다(계9:5~6).  

4. 앞서간 선지의 길을 따르는 인격이다 (10)  

앞서간 선지의 뒤를 따르는 인격의 신앙이 아니고는 그 선지의 예언이 응하는 때에 남은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간 선지들이 쫓겨남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압박 밑에서 말세를 두고 예언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육적 이스라엘이 망할 때 참된 이스라엘이 자기 민족에게 억울함을 당한 것같이 영적 이스라엘 교회가 심판이 올 때 교회 안에서 극도로 어려운 일이 올 것을 가리킨 것이다.

과거에 성경을 받아서 기록한 자들이 받은 시련을 말세에 그 뜻을 바로 해석하여 전할 종 된 우리도 이와 같은 시련이 온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세밀히 말하면 순교자의 피 값을 갚는 날에 순교자의 뒤를 따르는 자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5. 함부로 경솔히 맹세하지 않는 인격이다 (12)  

이것은 그 때 그 때 양심대로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다른데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하겠다고 자신 있게 맹세하지 말고, 하지 못한다고 자신 있게 맹세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때 그 때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에 양심껏 순종할 것뿐이라는 것이다. 종이라는 것은 주인의 하는 일을 순종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주인이 옳다면 옳은 줄 알고 틀렸다면 틀렸다고 아는 것뿐이다.  

결 론  

다시 오시는 주님은 원수를 갚아 주되 두 가지로 갚아 준다. 주를 영접하는 인격이 있는 자는 상급으로 갚아 주고, 그렇지 못한 자는 다 형벌을 받기 때문이다. 심판은 공의로 갚아 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갚아 주는 일은 사랑이 아니고 공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