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제단의 응답과 역사 (눅1:18-17)
2. 야곱의 집에 왕이 되신 예수님 (눅1:26-33)
3. 그리스도의 완전 역사 (눅3:15-17)
4.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눅8:11-21)
5. 재림의 날에 복 있는 종 (눅12:35-48)
6. 산 믿음의 양심 (눅17:1-10)
7. 주 재림을 맞이할 자의 생활 방침 (눅17:22-37)
8. 롯의 처를 생각하라 (눅17:22-37)
9. 택한 자의 기도의 힘 (눅18:1-14)
10. 의롭다 하심을 받을 자격 (눅18:9-17)
11. 재림의 주를 맞이할 성도의 생활 (눅21:25-36)
12. 난국을 돌파할 기도의 힘 (눅 21:36, 계 8:3~5)
13. 성경을 깨닫는 시기(눅24:44-49)
제단의 응답과 역사
- 눅 1:8~17
-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제단의 응답이 있으므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예루살렘 성전에 부패한 자들이 많이 있다 하여도 그 제단에 응답이
있으므로써 은혜시대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소위 제사장이라는 사람들이 너무 부패했지만 그 성전 제단에 응답이 내리므로써 예수님을 위하여
앞서 길을 예비할 세례 요한을 낳게 되었다. 그러므로 참된 제사장 사가랴에게 응답이 오는 거기서부터 메시야를 영접할 준비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제 제단 응답과
역사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1. 간구한 기도가
있으므로 응답이 오게 됨 (8~13)
응답이라는 것은
사람 편에서 간구가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아들이 없으므로 무조건 아들을 구했지만 그 기도가 상달됨에 따라 메시야를 영접할
마지막 선지를 그들에게 주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몽매한 인간들이 구하지 못한 것이라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뜻이 이루어지도록 응답하실 때에 의심할 정도로 주시게
된다. 사가랴는 이미 자기가 간구한 바가 이루어진다고 하여도 너무나 놀라운 일이므로 의심했다는 조건에서 10개월간 벙어리가 되었던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제단에 응답을 내리시되 징계를 하면서라도 역사하시는 것이다. 왜냐 하면 사람은 너무 부족하므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다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사장 사가랴에게 마지막 선지가 나게 되어 메시야를 영접할 줄은 사람으로써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하면서라도 알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이 아무리 황폐화 될 앞을 놓고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제단에 응답을 내려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셨다.
구약 때 예루살렘
성전의 제단과 예수님과에 연결성은 어떠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과거에 율법적인 성전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성전이었으므로 그 제단의
응답으로 잉태된 요한은 메시야를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길을 예비시키는 것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왜냐 하면 구약 시대라는 것은 완전한 역사가
아니요, 완전 역사가 올 것을 위하여 예비에 불과한 성전이기 때문이다.
2. 많은 사람이
기뻐할 일이 됨 (14)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것은 언제나 택한 자에게 기뻐할 일로 오게 되는 것이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사모하던 이스라엘에게 메시야를 영접할 준비를 갖추기 위하여 세례
요한이 온다는 것은 너무나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든다면 귀한
손님이 올 때에 어떤 사람이 앞서 와서 저기에 기뻐할 사람이 오고 있다고 알려 준다면 그 소식을 들은 사람은 집에 가만히 앉아 있지를 않고
일어나 마중을 나가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을 전할 사람이 나게 된다는 것은 인간들의 큰 기쁨이 된다.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를 할 사람은 외식하는
제사장의 가정에서 나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드리는 참된 제사장의 가정에 응답이 있으므로 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재림의
주가 오실 때에도 많은 사람이 강단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참된 기도를 상달시키는 종의 가정에서라야 그 소식을 나가
알려줄 사명자가 나오게 될 것이다. 아무리 같은 교회 안에 있다 하여도 기도가 상달되는 집도 있고 상달되지 않는 집도 있다. 그러므로 제단의
응답이라는 것은 참된 종의 상달되는 기도를 통하여서만 내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서 기도를 하고 있지만 누구든지 다 응답이 오는 것이 아니고 기도가 상달되는 자라야 기뻐할 응답이 오게 된다.
3. 많은 열매가
있게 됨 (15~17)
신약 시대를 완전히
이루는 모든 사도들은 다 세례 요한의 열매라고 본다. 왜냐 하면 세례 요한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따라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열두 사도가
나온 것은 제단 응답이 있으므로써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한
사람만을 위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대중을 위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한 사람의 기도가 상달되므로 대중을 살리는 응답이 오되 제단을 통하여
오게 된다. 재림의 주가 오실 때에도 대중을 살리는 응답이 제단을 통하여 올 것을 사19:19에 말씀했다.
아무리 예루살렘
성전에서 부패한 교권주의자들이 세례 요한을 반대하고 예수를 반대하고 사도들을 반대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응답은 그들에게 내렸던 것이다. 오늘날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자 중에서도 재림의 주를 영접할 응답을 받는 자도 있고 오히려 모르고 반대하는 자도 있다.
결 론
아무리 사람들이
부패했다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적은 소수에게 응답을 내려 새로운 비밀을 알게도 하시고 새로운 역사를 하게도 하시는 것이다. 많은 제사장들이 성전에
왕래하고 있었지만 오직 사가랴가 분향을 올릴 때에 주의 천사가 나타나서 새로운 역사의 비밀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지금도 시대적인
비밀을 바로 알고 역사할 자는 다수가 아니요 적은 소수일 것은 분명하다.
야곱의 집에 왕이 되신 예수님
- 눅 1:26~33
-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할 때의 목적은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인데, 피조물된 인격으로는 세계 통일의 왕국을 이룰 자는 전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지와 예정이
계신 동시에 그 예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두 번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언적으로 이루어지는 야곱의 집에서 왕 노릇 하는 다윗 왕국과 열매가 되는
그리스도의 왕국과의 연결성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야곱의 집과
촛대교회와의 연결성을 말하자면
과거에 야곱의 집이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고 축복을 받기 위하여 싸운 것 같이 기독교 종말에 촛대교회도 성산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싸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씨라도 축복을 등한시하는 에서는 아무리 사람이 볼 때는 강한 것 같으나 예언적인 왕국을 이루지 못하였고 사람이 볼
때 미약한 사람 같으나 축복을 위하여 싸우는 야곱은 예언적인 이스라엘 왕국을 이루어 놓은 것이다.
이와 같이 지금도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강한 세력을 가졌고 하나님의 성산의 축복을 두고 싸우는 자는 극도로 미약한 상태에 있지만 완전한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믿고 싸우는 자를 하나님께서 도와주고 보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은 언약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장 위대한 일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싸우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2) 야곱의 집에
시련과 촛대교회의 시련
언제나 마귀는
축복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 시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축복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편이요, 축복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은
마귀의 편이 되기 때문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본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낼 때에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창조했고 마귀는 얼마든지 축복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피조물로 창조를 받았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지으신 것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니 화를 위하여 역사하는 마귀의 역사와 축복을 위하여 역사하는 성도의 역사와
대립을 시켜서 축복을 받기까지 싸우는 집을 야곱의 집이라는 것이다. 과거에 이스라엘의 왕국은 야곱이 축복을 위하여 싸우는 열매로 이루어졌고
영원한 이스라엘의 왕국도 촛대교회가 끝까지 싸우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3) 야곱의 집의
왕권과 촛대교회의 왕권
야곱이 끝까지
싸우므로 예언적인 다윗 왕국의 축복을 받게 되었고 촛대교회가 왕권을 받으므로 세세 왕국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천사가 마리아에게 지시하기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한 것은 육적 이스라엘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영적 이스라엘을 가르친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이 되는 진리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성령으로
잉태된 몸이므로 왕 될 자격이 있다 (26~31)
첫째아담이 마귀의
말을 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은 그 피를 받은 사람으로는 그 몸이 썩지 않고 왕이 될 자는 전혀 없다. 왜냐하면 사망이 왕 노릇 하는 그 세력 아래
속했기 때문이다(롬6:17). 그러므로 예수님은 잉태할 때에 천사가 나타나서 사람의 몸에서 이루어지는 잉태가 아니고 하나님의 신의 역사로써
이루어지는 것을 말할 때에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면서 야곱의 집에 왕이라고 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몸으로
왕 노릇 하는 것을 인생의 제일 큰 축복이라고 본다(계20:6). 완전한 몸을 가지신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 되시므로 그를 믿는 자들도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살아서 왕국을 이루는데는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순종한 자는 부활해서 왕이 되고 예언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하여 짐승과 거짓선지를 이긴 자는 살아서 변화를 받아 왕이 되는 것이다(계20:4). 우리 사람이라는 것은 타락했지만 야곱과 같이
축복을 믿고 싸워 나가므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2. 큰 자가
되므로 (32)
인류 역사상 제일
크게 된 자는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탄생하여 빈한한 목수의 생활을 거쳐, 피곤한 노방 전도를 거쳐, 쓰라린 심령의 고통을 주는 겟세마네를 거쳐,
쓰라리고 뼈가 저린 십자가의 사형을 거쳐, 캄캄한 무덤을 거쳐, 구름을 타고 올라가서 만민의 죄를 위하여 대제사장이 되어 기도하시며 성신을 부어
주시다가 구름을 타고 강림하여 죽도록 충성한 종들을 부활시키고 쓰러지기까지 싸워 나가던 종들을 변화시켜서 영원한 왕국을 조직하여 이루시는
예수님밖에 더 큰 이가 없으니 우리는 그를 믿고 끝까지 싸워 나가므로만이 복 있는 자가 될 것이다.
3. 왕국이 다함이
없음 (33)
세상에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한 때는 강했지만 바람 앞에 등불 같이 꺼지고 만 것이 인류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야곱의 집에 왕국은 영원히 세세토록
왕 노릇하되 지상의 천년 왕국을 거쳐 천국에 들어가서 세세토록 왕 노릇 한다(계22:1~5).
이러한 왕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신으로 잉태된 몸이 마귀와 싸우는 생활을 거쳐서 만왕의 왕이 된 것 같이 성신을 받은 종들도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싸움을 거쳐
왕국의 반열을 이루게 된다. 가장 복된 자는 왕국의 반열에 들어가는 자라고 보게 된다(계19:9).
결 론
복되도다. 다윗
왕국이여, 산 깊은 골짜기에서 양을 치던 목자 다윗이 만왕의 왕조가 될 줄 누가 알았으며, 나사렛 골짜기 목수의 가정에서 목수 일을 하던 나사렛
예수가 만왕의 왕이 될 줄 누가 알았으며, 갈릴리 바닷가에 그물 한 채를 씻고 있던 시몬이 세계적인 왕국을 건설하는 운동의 선구자가 될 줄을
누가 알며, 어부의 한 사람으로 베드로의 뒤를 따르던 요한이 지상 왕국을 이루는 마지막 역사의 선구자가 될 줄을 누가 알았으리요, 낙심 말자,
우리의 소망은 여기 있다.
이 왕국 건설
운동은 너무나 크고 영원한 일이 되기 때문에 작은 일에 낙심하는 자나 잠깐인 고난을 참지 못하는 자는 들어갈 수가 없을 것이로되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잠깐 동안인 고난을 참고 끝까지 싸워 나가는 자에게는 인간이 볼 때에 실패자 같고 망하는 자 같으나 이 왕국 반열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너무나 크고도 귀한
일이니 하나님께서 이것을 주기 위해서는 모략적인 방법으로 까불어 보는 일이 없이는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다. 까불어 보는 때에 인격을 골라내고
수가 찰 때에 일한 대로 갚아 주는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요, 끝까지 참는 자는 그의 반열에 들 것이다.
그리스도의 완전 역사
- 눅 3:15~17
-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완전 역사를 증거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무리들의 크게 가졌던 기대가 어긋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오면 가장 영광스럽게 나타나고 자기들 나라가 영광스러운 나라가 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그
무리들을 책망하고 그리스도의 완전 역사를 증거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완전
역사라는 것은 영광스럽게 와서 영광스러운 이스라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는 어떠한 역사가 있다는 것을 세례 요한은
다음과 같이 증거 했다.
1.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고 증거함 (15~16)
그리스도의 왕국은
육적 이스라엘로 이루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으므로만 그리스도의 왕국에 가입할 인격이 있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네가 메시야를 영접할 자격이 있는 민족이라고 생각하므로 책망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소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신앙 사상을 버리고 이기적인 교권 야욕을 가지고 세례 요한을 책잡고자 할 때에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하여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리스도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사람이라고 하면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이를 증거했던 것이다.
죄를 지은
인간들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수 있는 그리스도는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자리에까지 이르기에는 너무나 인간이 갈 수 없는 험한 길이었다.
유대땅 베들레헴 말구유에 탄생하시어 애굽의 피난을 거쳐 나사렛 동네에서 빈한한 목수의 생활을 거쳐 정한 때가 왔으므로 세례 요한이 그를 증거하기
위하여 나타났던 것이다. 세례 요한이 나사렛 목수인 예수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고 할 때에 교만한 바리새 교인과 유대인들은 믿지 않고 오히려
세례 요한을 반대하고 미친 사람으로 알았던 것이다.
세례 요한의
증거대로 오늘날 그리스도가 베푼 성령과 불 세례를 우리가 받게 될 때에 세례 요한의 증거는 참된 증거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미리 선지를 통하여 욜2:28에 만민에게 성신을 부어줄 것을 말씀했지만 다시 예언자인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의 완전 역사를 증거했던 것이다. 이
증거를 믿고 따라가는 제자들은 요한의 증거대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어주는 역사를 받았다. 세계 만방이 세례 요한의 증거대로 이루어지는 역사를
받는 동시에 역사가 나리는 일이 사도를 통하여 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세례 요한의 증거대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역사를 체험치 못한 자들이라면 세례 요한의 사명과 계통적인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우리 종된 자의
자격은 말씀만 받는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증거를 받아야 한다. 만일 현재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역사는 완전
역사라고 볼 수 없다.
2.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신다고 증거함 (17상반절)
하나님께서
지금까지는 씨를 뿌려 싹이 나게 하고 가꾸는 것과 같은 역사를 하시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아직은 완전한 교회를 이룬 것이 아니고 완전한 교회를
이룰 수 있는 과정으로 장성하는 발전 단계에 있다. 그러면 완전한 교회라는 것은 어떤 교회냐 하면 조금도 부정이 없는 청결한 교회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어야 된다.
기독교의 역사는
교파를 초월하여 다음과 같이 되는 것이다. 알곡만 모을 수 있는 청결한 교회가 나타나고 쭉정이만 모이는 바벨적인 교회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타작 마당을 정케한다는 것은 거룩하고도 깨끗한 동산인 촛대교회를 뜻한 것이다. 촛대교회라는 것은 손에 키를 들고 쭉정이와 가라지를 날려 버리듯이
주님께서 강한 역사를 행하시어 쭉정이와 가라지를 몰려 나가도록 해서 알곡만 남은 교회를 말한다. 이 강한 역사라는 것은 사단의 세력이 완전
소멸되고 완전 청결의 역사를 뜻한 것이다.
기독교가 추수기를
만난 이때에 타작 마당에 남아 있게 되는 완전한 역사를 받아서 그날에 설 수 있는 무장이 되려면 정케된 교회가 되어야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역사하는 것이니, 지금이 타작 마당을 정케하는 키로 들고 까부는 때가 왔다고 본다. 그러므로 키를 든 주님 앞에 남은 종이요 남은
교회가 되려면 하나님 말씀 하나를 완전히 믿고 단결하는 교회가 되어야만 한다.
주님의 역사는 지금
택한 자를 한 곳에 모으기 위하여 키로 까불어 보는 것은 완전한 교회를 이루기 위한 모략적인 방법이다. 사30:28를 보면 멸하는 키로 열방을
까분다고 하였다. 이때는 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을 하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인데 여호와께서 예정하신 몽둥이를 앗수르 위에 더하실
때라고 하였다(31~32). 지금 멸망의 미운 물건을 들어서 교회를 까불어 볼 때가 왔다고 본다.
3.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임 (17하반절)
하나님께서 멸망의
미운 물건을 들어 쓰는 것은 알곡을 모으는 촛대교회를 세울 모략적인 방법이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때는 모략적인 역사가 없었지만 알곡을
모아들이는 역사에는 하나님의 선한 모략이 같이하는 것이다. 멸망의 자식을 들어서 쓰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요 북방 세력을 들어
쓰고 북방을 없이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한 방법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완전 역사라는 것은 알곡을 모아들이는 역사로써 지상 왕국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암9:9).
결 론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의 완전 역사를 세 가지 법을 들어서 증거한 것은 모든 선지 예언의 전체를 대지적으로 증거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말세의
변화성도는 세례 요한의 사명을 다시 계대 하는 자들이다. 세례 요한이 선지서를 들어 다시 예언의 말을 한 것과 같이 우리는 선지서 전체의 말씀을
예언하게 된다.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
눅 8:11~21 -
서
론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이라는 것은 듣는 데서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이 듣는 것은 입으로 먹는 양식보다도 인생 생활에 큰 흥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입으로 먹는 양식은 하루의 생활이 보존되지 못해도 귀로 듣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좌우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신자가 들을 줄 모르고
있다면 이것은 주님의 양이라고 할 수 없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들을 줄도 모른다면 올바른 인도를 따라갈 수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 주님은
듣는데 삼가란 이유로 다음과 같이 성서를 통해서 말할 수 있다.
1.
말씀을 듣고도 마귀에게 뺏길까봐 삼가라 (12)
만일
듣고도 뺏기는 생활이라면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가 없을 것이다. 예를 든다면 음식을 먹고 즉시 설사해 버리는 자와 같다. 언제나 마귀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시험하는 것보다도 귀로 듣는 것을 시험하기 때문이다.
2.
기쁘게 듣고도 배반하는 자가 되지 마라 (13)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다가 너무 기뻐서 날뛰되 그 말씀을 소화하지도 못하는 자이니 말씀을 빼앗으려는 마귀도 말씀에 조건을 가지고 어려운
문제가 닥쳐오도록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시험은 말씀을 따라서 살아보려고 할 때 따라오는 시험이다. 마귀 역사라는 것은 말씀을 듣고
배반하게 만들어 보려고 대항하는 것을 말한다.
3.
듣고도 결실이 완전치 못할까 삼가야 한다 (14)
마귀는
말씀을 듣고 생활하는 자에게 항상 온전이라는 것을 이루지 못하도록 하는 노력이 있다. 이 마귀는 교회 출입도 허락한다. 너는 교회 다니기는 해도
온전히 되지는 말라고 시험한다. 말씀은 온전을 이루어 주마 하는 것이 말씀인데 세상에 끌리게 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삼가야 된다는 것이다.
4.
말씀을 듣고 인내로 결실 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삼가야 한다 (15)
들은
것이 내 마음에 들어와 결실이 되도록 항상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져야 될 것이다. 말씀은 씨요, 마음은 밭이니 항상 말씀을 들은 자로서
양심적으로 하나님을 공경하기 위해서 삼가야 될 것이다(딤후1: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마음에 말씀을 양심적인 생활에서 간수하는 자는 더 많이
받도록 해 주신다(18). 하나님은 말씀대로 역사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항상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생활한 사람은 말씀대로 이루어줄 책임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항상 더 주기 위하여 역사하는 것이다.
결
론
인생의
최고의 가치는 말씀을 듣고 삼가는 생활이다. 같은 질그릇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서 보존되는데 따라 인격은 향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삼가해서 행하는 사람이라 했던 것이다. 세계를 정복하는 인격은 삼가는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하나님은 그 사람을 책임지고 인도하고 보호하고 승리하게 되기 때문에 왕권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재림의 날에 복 있는 종
- 눅 12:35~48
-
인간 생활 중에서
가장 복된 것은 주의 종된 생활이며 종된 자 중에도 가장 복된 자는 재림의 날에 칭찬을 받는 종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재림의 날에 어떠한
종이라야 복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1. 끝까지
기다리는 종 (35~37)
처음에는 열심이
있고 진실하게 하다가도 그 열심이 식어지고 그 마음이 변하고 마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약점이다. 주님께서 끝까지 기다리고 있는 종이
복있다고 말씀한 것은 주님 재림 하실 때에는 맡은 사명을 감당해 나가기가 어려운 시기가 올 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어두운 밤이라고
하였다. 극도로 피곤하고 감당할 수 없는 압력이 올 때에 끝까지 기다리고 자기 사명에 충성을 다하는 자는 주님이 그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섬긴다는 것은 극도로 높은 지위의 왕권을 받는 것을 뜻한 것이다.
지금은 주님의
재림을 갈망하던 자들도 오히려 그 마음이 식어지고 충성을 다하던 사람들도 타협적인 노선으로 흐르기 쉬운 때이다. 왜냐 하면 극도로 어려운 시련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종이 되려면 인간으로서 도저히 참고 나갈 수 없는 시련이 올 때에 끝까지 이기고 나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살아 나갈 길이 막연한 때에 홀연히 나타나시는 것이다.
2. 예비하고 있는
종 (38~40)
우리가 재림의 주를
맞이할 종이 되려면 그 날에 설 수 있는 예비가 있어야 한다. 왜냐 하면 그날은 인력으로써 감당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닥쳐오는 날이니
하나님께서 특별 역사를 나리는 것이 없이는 남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 주의 날에 나리는 역사라는 것은 택한 자의 원한을 풀어주는 응답의
역사이다. 누구든지 이미 기도가 상달되고 하나님께서 기억하는 일을 한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응답의 역사를 나리시는 것이다.
이 때는 일한대로
갚아 주는 때이니 만큼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다든지 주님께서 갚아줄 만한 일이 없는 자라면 재림의 날에 오는 원수의 피해를 막을 수도 없고
흑암의 세력을 뚫고 나가서 역사할 용기도 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비가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강하게 응답을 나리시므로써 오히려 재림의 날에 더
용기를 얻게 되고 강한 역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 재림의 날에 복 있는 사람은 갚아줄 것이 있는 자이다.
3.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종 (42~44)
주님 다시 오시는
날에는 그날에 적합한 진리를 남에게 전하는 종이 되어야 한다. 그날에 전할 진리는 환란 재앙 속에서 구원 받는 말씀이다. 가장 큰 일은 환란과
재앙 가운데서 양떼를 살리는 말씀을 증거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말씀을 전하고는 다시 전할 기회가 없으며 모든 성경의 비밀을 다 전해야만 될
때가 재림의 날이라고 본다.
재림의 날은
말씀대로 환란과 재앙이 있고 말씀대로 보호가 있고 말씀대로 원수를 이기는 역사가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재림의 날에 말씀 증거가 그때에 맞지
않다면 그 사람은 복 있는 것 보다도 더 큰 화를 받게 된다(사8:20).
가장 복 있는 종은
재림의 날에 많은 사람을 살리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날까지에 모든 성경에 숨어 있는 비밀은 주 재림시기에 나누어 줄 양식이
되는 것이다. 재림의 날에 말씀을 바로 전하는 종이 되려면 완전 무장을 갖추어야 되는데, 이 완전 무장이라는 것은 변화성도의 자격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결 론
가장 복 있는 종은
재림의 날에 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기다린 자이며 응답이 나려 큰 역사를 일으키게 된 자이며 완전한 진리를 바로 전해서 많은 양떼를 살리는
자이다. 우리는 지금 이때에 끝까지 기다리고 참아야 하며 응답의 역사를 받아야 하며 이날까지에 감추어 놓았던 비밀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원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 나갈 수 있는 인격을 하나님께 받아야 한다.
산 믿음의 양심
- 눅 17:1~10
-
믿음이라는 것은
도덕 아래 속한 것이 아니요, 어떤 의식이나, 법도에 속한 것도 아니요 산 믿음이라는 것은 그 양심에 속한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사람을
중심한 것보다도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 양심의 활동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사람에게 자기 옳은 것을 나타낸다 하여도 형제를 실족케 하거나 용서치
않는 것이 있다면 그 믿음은 아무런 열매를 나타낼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기뻐하지 않으므로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게 되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어떠한 양심에서 움직여야 된다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한다.
1. 형제를 실족케
하는 것이 있을까 조심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1~2)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의 생명을 하나 같이 사랑하므로 남을 실족케 하는 일이 있다면 큰 화가 오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대적이 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 없는 것이로되 형제를 실족케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조심해서 형제를 아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진리가 탈선된 길을
가지 않은 형제가 아무리 실수가 있다해도 그 형제를 실족하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다.
나의 체험은 형제가
아무리 실수가 있고 나를 괴롭히는 일이 있다 하여도 그 형제를 아끼는 마음으로 붙들어 주고 일으켜 주는 일을 하고자 할 때에 내가 구하지 않아도
뜻밖의 큰 은혜가 오는 체험을 많이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은 남을 실족하지 않도록 아끼는 사랑으로 대해 주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형제가 나를 억울케 하여도 같이 불평을 두지 않고 그 형제가 복을 받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항상
하늘로부터 강한 은혜가 나리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2. 형제를
얼마든지 용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3~4)
우리는 주님 앞에
용서를 받는 신앙 양심에서 형제의 죄를 너그러이 용서하는 맘이 없다면 십자가의 사랑의 대적이 되는 일이니 하루에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마18:22). 회개치 않은 자를 용납한다는 것은 불의와 동참하는 일이 되지만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큰 죄를 범하는 일이 된다 (마18:28).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도덕에 속한 양심도 아니요 율법 아래 있는 양심도 아니니 너그러이 용서받은 양심에서 남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은 내가 너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이니, 누구든지 형제의 죄를 용서할 때에 십자가에 속한 사람이 되고 형제의 죄를 용서치 않을 적에
십자가의 대적이 되는 사람이다. 산 믿음의 양심이라는 것은 항상 예수님의 사랑의 불이 있는 마음이다.
3. 항상 자기가
하는 일에 부족감이 있어야 한다 (5~10)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산 믿음의 양심을 가진 자는 항상 자기가 수고할수록 자기 하는 일에 부족감을 깨닫는 마음이 있어야 될 것이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생각할 때에 밤낮으로 수고하여도 항상 자기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고 생각나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일을 하고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맘이 있다면 이것은 산 믿음의 양심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를 위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해 보려고 할 때에 일을 할수록 점점 나는 아무런 일도 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나는 것은 점점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될 때에 그 은혜를
보답할 길이 없다는 마음이 점점 많아지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할 것뿐이라는 마음을 가지면 주님께서 가장 큰 일을 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결 론
기독교 신앙
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온 사랑을 받은 자리에서 깨끗한 양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니 그 양심 속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도 없고 원망할 것도
없고 항상 그 사랑을 남에게 주고픈 마음밖엔 있을 수 없다.
주 재림을 맞이할 자의 생활 방침
- 눅 17:22~37
-
누구든지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사람이라면 합법적인 생활을 하여야 된다. 왜냐 하면 재림의 주가 오시는 것은 말씀대로 판단하려고 오시기 때문이다. 초림의 주는
용서하러 오시는 주님이시니 아무리 죄인의 생활을 하던 자라도 영접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용서하되 회개하는
자는 얼마든지 너그러이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재림의 주를
맞이할 자가 되려면 어떠한 생활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한다.
1. 말씀에 굳게
서는 생활이 있어야 된다 (22~24)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말씀대로 오신 예수를 믿으므로 죄사함을 받아서 말씀대로 오실 예수를 기다리되 조금이라도 말씀에 가감된 일에는 치우치지 않고 말씀에 굳게
서서 나가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큰 이적이 일어나며, 기사가 일어나고, 만민이 놀랄 일이 일어난다 하여도 거기에 따라갈 필요가 없고
말씀에 굳게 서야할 것이다. 왜냐 하면 다시 오시는 주님은 번개같이 오시되 온 세계가 다 영접할 수 있도록 오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이미 이루어진 말씀도 세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며, 재림의 주가 오시는 것도 세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지방에 놀랄 만한 일이 생겼다고 해서 그것을 중심하여 따라갈 필요도 없고 그리스도의 재림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에도 따라갈
필요가 없고 오직 그 날에 설 수 있는 인격을 갖추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이다.
주 재림이 온다는
것을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주님이 오시기 전에 해야할 일을 충실히 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필요 없는 일에 공연히 따라갈
필요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고 다만 재림의 주를 맞이하는 준비가 있어야 그날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이 인격적인 무장을 갖추는 일에는 전력을 두지 않고, 어떤 신비적인 일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 끌려간다는 것은 재림의 주를 맞이할 자의
생활에 완전히 섰다고 볼 수 없다. 신앙 생활을 어떤 흥분이나 감정이나 신비에 기준할 것이 아니고 자신이 말씀의 법에 굳게 서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인격과 생활과 사업에 체험적인 생활이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주님 다시 오실 때에는 인격, 생활, 사업에 의하여 보응을 받기
때문이다.
2. 예비하는
생활이 있어야 된다 (25~30)
주님의 재림을
영접할 자는 먼저 그 날이 어떠한 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26절을 보면 주님께서 재림의 날을 두고 말씀하실 때에 “노아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고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 다시 오시는 날에는 예비가 없는 자는 감히 설 수가 없다. 노아 홍수 때에도 방주를
예비한 노아의 가정외에는 다 전멸을 당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 다시 오실 때에도 예비가 된 자 외에는 다 환란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이 예비하는
생활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점이 있다.
첫째 : 말씀을
그대로 믿는 동시에 순종해야 된다.
둘째 :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여야 된다.
셋째 : 합심하는
가정을 이루어야 된다.
노아의 가정은
합심이 되므로 구원을 받았고, 소돔, 고모라에서 나오는 롯의 가정은 합심이 되지 않았으므로 큰 실패를 가져오는 일이 되었다.
재림의 주가 오실
때의 구원은 영, 육이 아울러 받는 것이니, 이것은 반드시 예비가 있는 자라야 받게 될 것은 사실이다. 노아는 물이 샐 틈이 없이 방주를
지었으므로 구원을 받았고 우리는 말씀에 조금도 가감 없이 무장이 되어야 흑암을 뚫고 나가서 주님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예비가 있는 생활은
무엇보다도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것이 있어야만 된다.
3. 순교적인
생활이 있어야 된다 (31~35)
주님의 재림을
영접할 자는 조금이라도 세상을 생각하지 말고 돌진의 걸음을 걸어야 한다. 그러므로 원수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겁내지도 않고, 용기있게 나가는
생활이 있는 자라면 주님을 맞이할 인격이 갖추어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주님 재림의 날은 무서운 시험이 닥쳐오는 날이니 조금이라도
세상의 것을 생각하는 자는 남을 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안에
있는 것이나 모든 물건을 가지려 하는 생각을 버리고 재림의 주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33절에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고 한 것은 자기 목숨을 하나님께 바치고 강하게 나가는 사람이라면 재림의 날에 설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 말씀이다.
다시 말하면 재림의
날은 순교의 사상을 가지고 진리를 바로 증거하던 종들만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재림의 주를 맞이할 자는 순교자의 인격을 가져야 된다. 이날까지
순교를 당한 종들과 주님 재림할 때까지 순교적인 생활을 한 종들이 주님께서 올라 오라 하실 때에 들림을 받게 된다. 이것은 왕권을 받을 수 있는
사람만 재림의 주를 영접하기 때문이다.
결 론
주의 날에 설 자는
중생을 받은 자가 아니요, 중생 받은 사람 중에서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있는 생활을 한 자이다. 그러므로 순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일한 사람은
왕권 반열에 들게 되어 세세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재림의 주를 맞이할
자에 대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함부로 따라가지도 말고 깨어서 예비를 하되 노아 때와 같이 될 것을 알고 철저하게 실천하는 생활이 있어야
된다고 하셨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
-
눅 17:22~37 -
서
론
우리는
주 재림이 임박해서 주를 맞이할 자는 특히 롯의 처를 생각하라는 것은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한 의인 가정이라도 진노의 날에는 어느 때 보다도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어떤 신자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진노의 날에 하등 문제없다고 방심적인 태만을 가지고 있다면 롯의 처와 같이 멸망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1.
확실한 증거를 보고도 태만하는 자가 되지 말라
이것은
롯의 처는 자기 집에 직접 천사가 찾아와서 때가 급했다는 것을 경고했을 뿐 아니라 악당들의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그 가정에 증거를 보여준
것이다. 하나님이 롯의 가정을 특히 사랑해서 말씀으로만 경고한 것이 아니고 실천적인 행동에서 그 가정에 나타났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말세 성도가
직접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여 내 마음에 오셔서 역사하는 증거도 받고 하나님의 보호도 받은 체험도 있는 신앙을 가지고 짐짓 말세 예언을 등한히
한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체험 받지 못한 자 보다도 먼저 죽는 저주가 올 것이다. 짐짓 하나님의 명령을 만홀히 알았기 때문이다.
2.
강권 역사에 끌려가면서 짐짓 마음이 태만하는 자다
천사는
롯의 처의 손을 쥐고 끌고 가는 일이 있었다. 이것은 금일의 강권 역사의 힘을 받아서 나가던 사람도 떨어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노력을
한 일이 없는데도 하나님이 강권으로 이끌어주는 체험을 받고도 세상을 돌아다보는 자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확실한 하나님의 체험을 받고 급했다는
증거자를 통하여 인도를 받아서 나가던 자라도 멸망할 자가 있다는 것이다. 천사가 끌고 가던 자도 떨어지는 자가 있었거늘 사람에게 인도를 받는
사람 가운데도 있을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증인을 통하여 강권적인 역사가 임할 때 절대로 세상일은 돌아다보지 말라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군인이 출전 명령이 내렸는데 뒤로 후퇴하는
자는 쏘아 죽이는 것이 군법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전 삼년반기가 닥쳐와서 사명자가 앞을 향해 나갈 명령을 받고 세상일을 보고 후퇴할 수 없을
것이다. 주 재림이 온다는 경고는 말세의 권세 받은 종이 나타날 때다. 권세 역사라는 것은 천사가 롯의 처를 끌고 가는 것과 같은 강권 역사다.
3.
천사는 롯의 요청대로 가까운 소알 땅으로 편리를 보아주었다
먼
동리에는 미처 급했기 때문에 가까운 그곳만 가면 산다는 편리를 주었다. 하나님의 택한 사람은 급한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하든지 살리겠다는
심정에서 안정처를 알려주고 보여주는데도 그 말을 등한히 여겼던 것이다. 롯의 아내가 사실을 확실히 믿었던들 뒤를 돌아다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진노의 날이란 예언의 말씀을 조금만 가해도 감해도 재앙이라는 것이 여기에 연결된 것이다. 예를 들면 급해서 종을 인도하는 것은 아끼는 심정이다.
사랑
중에 제일 큰사랑은 하나님이 롯의 집에 보낸 천사의 사랑일 것이다. 낮고 더러운 인간들인 롯의 가정을 살려보겠다고 천사가 와서 이렇게도 애를
쓰는 그 사랑을 태만히 하니 다시는 더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노아의 집보다도 롯의 가정은 강권적인 사랑이 임했던 것이다. 노아는 자기
손으로 배를 짓느라고 최선을 다했지만 롯의 가정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무조건 구원해 주겠다는 사랑이다. 말세의 주 재림기에 살아 남아 있는
종들에게는 이와 같은 사랑을 베풀어준다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결
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두 남자가 한 자리에 있으면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 둠을 당한다고 하였다. 또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는데
한 여인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여인은 버려 둠을 당하였다 하였으니 롯의 처와 같이 태만한 사람은 버림을 당한다는 것이다. 롯의 부부가 일생동안
아름다운 부부생활을 했으나 그 처는 태만하니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노의 날에는 싸워야 된다는 것이다(33).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의 명령인 예언의 말씀을 따라 순종의 길을 걷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택한 자의 기도의 힘
- 눅 18:1~14
-
사람의 가장 큰
힘은 기도를 통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가장 큰 일을 하시려고 해도 택한 자의 기도가 없이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은 전부가 택한 자를 위하여 역사하시는 것인데, 택한 자라고 해서 무조건 준다는 것은 공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는 말씀을 하실 때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1. 밤낮 부르짖는
자의 기도의 힘 (1~8)
택한 자의 기도라는
것은 그 즉시에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 기도를 인간 종말에 가서 다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택한 자에게 특별한 것을
주시는 것은 주님 다시 올 때에 주시는 것이니, 그전 생활은 밤낮 부르짖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게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외로운
과부가 억울함을 당하여 재판관 앞에 가서 이 원한을 풀어 달라고 할 때에 아무리 불의한 재판관이라도 처음에는 무시를 하고 말았지만, 계속으로
호소할 때에 억지로라도 요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택한 자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우리 성도의 생활이
외로운 과부가 억울한 생활을 하듯이, 이 세상에서 억울하고 괴로운 일이 오히려 불택자 보다도 더 많을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밤낮 기도하여도
어려운 시험이 계속으로 오는 것은 주님 다시 오실 때에 그 원한을 풀어주므로 왕권의 축복을 영원히 받게 하자는 하나님의 경륜이다.
현재 생활에서는
밤낮 부르짖을 수 있는 그 기도의 힘을 받은 자가 밤낮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사람보다도 불행스러운 것 같지만, 이것이 인간 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된 생활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밤낮으로 부르짖는 기도 생활에서 재림의 주를 맞이할 자는 심히 적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2. 자기를 낮추는
자의 기도의 힘 (9~14)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사람의 기도는 아무리 크고 강한 음성으로 부르짖는다 하여도 하나님은 듣지를 않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보실 때에 의인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기도라는 것은 도덕적 생활에 기준하면 아무런 역사가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바리새인이 도덕적으로 사람에게 보이려는
행동을 하면서, 그것을 만족으로 알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므로 눈물 흘리는 회개가 있는 죄인의 기도보다 못하다는 것을
가르쳤다.
다시 말하자면 손을
들어 기도한다 하여도 중심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기도라면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하고 울면서 중심에 죄를 회개하는 사람의 기도에 따를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고 기도의 응답을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모를 볼 때에는 거룩한 사람이요,
경건한 바리새인이지만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응답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기도하는
사람은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이 없어야 하며, 언제나 자기 부족을 깨닫는 마음으로 올리는 기도가 있어야 여호와께서 응답하신다.
그러면 기도 생활의
세 가지 요소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 중심
성결을 목적하여야 하며,
둘째 :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하여야 하며,
셋째 : 작은 일에
충성을 목적하여야 한다.
기도하는 사람이
마음에 성결을 목적하지 않고 기도한다면 아무런 향상을 보지 못하는 것이요, 중심 성결을 목적한 기도를 한다면 인격적 향상을 기도로서 얻게 된다.
기도하는 사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의 응답을 내려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이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려는 목적을 두고 기도할 때에 큰 일을 할 수 있는 응답을 하나님께서 내리시게
된다.
그러므로 밤낮 쉬지
않고 부르짖는 일이 있는 동시에 항상 자기를 낮추는 인격과 생활에 들어갈 때에 주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응답을 받게 되는 것이다.
결 론
기도라는 것은
불택자에게 특권이 있는 것이 아니고, 택자에게 있는데 있어서는 구원은 일반적인 구원이로되 그 인격이 이루어지는 일과 생활에 열매가 나타나는 일과
영원한 왕권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일은 기도의 분량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밤낮 쉬지 않고 기도를 하되 조금도 낙심치 않아야만 주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의롭다 하심을 받을 자격
- 눅 18:9~17
-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할 때에 완전한 사람을 의롭다 할 수는 없다. 오직 자기의 부족을 깨닫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사모하는 자에게만 의롭다 함을 주게 되는
것이니, 아무리 인간이 볼 때에 옳은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의롭다 할 수 없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아무리 사람이 볼
때에 부족하지만 자기의 부족을 깨닫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믿고 부르짖는 자에게 응답을 나리는데 있어서는 어떠한 자격을 가진 자라야 하나님께서
받아 주신다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한다.
1.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자 (9~13)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가운데서 난 인간들을 불쌍히 보시는 신이시다. 왜냐 하면 억울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그 자손들이
다 죄에서 나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타락한 인생을 불쌍히 보시므로
행하신 사랑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서 죄인이 받을 형벌을 받기를 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할 때에 그 사람을 만족히 아시고 의롭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것 하나를
하나님께서 요구하셨으므로 아들을 보내서 죽게 한 것이다. 아무리 모든 것을 다 잘했다 하여도 하나님의 긍휼을 갈망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대적이므로 오히려 자기가 죄를 진 것을 원통히 아는 자보다도 더 불의한 자로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신다.
2. 자기를 낮추는
자 (14)
인생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는 너무나 어리석고 약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만 하나님의 것을 받을 수 있다. 오늘의 인간들은 너무나 교만해졌다고
본다.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데서 하나님이 높여줄 적에 완전한 인격이 되는 것이다.
자기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마음이 생길 때에 할 수 있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고, 그 믿음을 가질 때에 완전한 것을 주시는 것을 받는
체험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의를 아는 것보다도 직접 받는 인격을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은 인격을 가진 자는 하나님께서 같이하는 생활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진심으로
받드는 자 (15~17)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어린아이와 같이 받드는 자라야 천국에 간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다. 어린아이는 아무런 일을 할 수 없는
인격이지만 조금도 거짓이 없이 진심으로 어머니를 사모하는 거와 같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진심으로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나님은 그 봉사를
제사로 받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하는 일을 보는 것 보다도 중심을 보시는 것이니, 어린아이와 같이 중심이 깨끗하고 완전한 마음이 있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받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가 어린이를 더 아끼고 보호하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중심이 깨끗하고 간절하면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시면서 그를 붙들어 보호하시는
것이다.
결 론
의라는 것은 인간
자체에는 있을 수 없고, 하나님만 의로우신 동시에 의를 행할 자격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을 자격은 어떠한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재림의 주를 맞이할 성도의 생활
- 눅 21:25~36
-
주님께서 가장
어려운 일이 많이 닥쳐오는 때는 재림이 임박할 때라는 것을 말씀했다. 그러므로 주의 재림이 임박할 때에 성도의 생활은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 본문 성경이다. 여호와의 말씀인 선지서를 보면 전체가 천당가는 사람의 생활에 대해서 가르친 것이 아니고 살아서 환란을 이기고 재림의
주를 맞이할 사람의 생활을 가르친 것이다.
어찌해서 영혼
구원받는 사람의 생활을 중심하여 가르치지 않고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사람의 생활 문제를 놓고 세밀히 가르쳤느냐에 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마귀의
세력을 개방시켜 시험을 해 볼 때이므로,
둘째는 절대로
보호를 받아야 될 때이므로,
셋째는 가장
사랑하는 자를 아끼시고 그 밖의 사람은 멸망을 시킬 때이므로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종들에게 미리 세밀하게 말씀하신 것은 그 시대를 지나서는 다시 기회가 없고 용서가 없는 재앙 심판이 오겠으므로 하신 것이다.
1. 징조를 보고
각성할 것 (25~33)
인간 종말의
징조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으나 모든 민족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고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 기절하게 된다고
25~26에 말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을 보거든 너희 구속이 가까웠으니 머리를 들고 각성하라고 하였다. 그밖에 여러 가지 징조를 다 여기에서
말할 수 없으나 이 시국을 볼 때에 극도로 세상이 혼란해진 일과 앞으로 올 일을 생각한다면 한시간 동안에 세계 인류가 전멸될 전쟁이 눈앞에
이르게 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생각만 해도 기절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난제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피해 보려고 생각하던 정치인들은 서로 협상을 부르짖고 있다. 아무리 약간의 손해가 있다 하여도 싸우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 오늘날
가장 지혜로운 정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공산 세력이 세계를 위협하는 이때에 우리가 각성해야 될 것은 무슨 문제보다도 재림의
주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는 일이다.
2. 마음이
둔해질까봐 조심할 것 (34~35)
우리의 생활은
조금만 조심하지 않아도 마음이 둔해지는 것이다. 너무나 방탕한 사회가 되었으므로 신앙의 절개를 잃어 버리기 쉽고 너무나 미혹이 많으므로 독주를
먹고 취하기가 쉽고 너무나 경제 혼란이 심하므로 생활 염려에 마음이 압력을 받고 감각이 없이 되기 쉬운 것이니 우리의 생활은 조금도 불의와
동참하지 말고 성별된 생활이 있어야 될 것이다.
3.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할 것 (36)
우리가 장차 올
모든 일을 피하고 주님 앞에 설려면 항상 기도로 승리하여야 한다. 기도라는 것은 모든 난제를 해결하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종의 인격이
이루어지는 것을 목적하여야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종들에게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경륜한 것이
아니고 우리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을 기도의 응답으로 해결해 주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항상 기도하며 그 기도의 응답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보호가 같이 하고 하나님의 보호가 같이 하므로 모든 어려운 문제를 극복하고 주 앞에 서게
된다.
결 론
재림의 주를 맞이할
성도의 생활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고 기절하게 될 때에 거기서 조금도 세상에 물들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넘어지지 않고 승리해
나가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오는 시국 난제를 모두 해결하고 나가는 생활이 있는 자라야 완전한 구속의 은총을 받으므로 왕권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난국을 돌파할 기도의 힘
- 눅 21:36, 계
8:3~5 -
우리는 난국을 당한
성도로서 어떻게 하여야 이 난국을 돌파하느냐 하는 것이 자나깨나 잊지 못할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난국을 돌파할 힘은 기도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지만 어떠한 기도라야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모른다면 기도하다가 낙심하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이제 난국을
돌파할 기도의 힘에 대하여 성경을 들어서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1.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는 힘이다 (눅21:36)
교회에 다니는 사람
중에서 처음에는 열심히 기도하다가 어려움이 오게 되면 기도를 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마는 사람이 많이 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이 사랑이
식어졌지만 이 사람들도 과거에는 열심히 기도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끝까지 기도하는 힘을 가지고 깨어 있는 자가 아니고는 모든 난국을 돌파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에게 난국을 당하게 하는 것은 세세 왕권의 영광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어려움이 온다 하여도 거기서 기도의 힘을 더 얻고
각성을 하는 자라야 난국을 돌파할 기도의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라는 것은 무조건 준다는 것이 아니요, 끝까지 참고 나가는 자에게 왕권의 영광을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참으로 믿는 자라면
어려움이 올 때에 보통 때보다도 더 기도에 힘쓰며 각성을 하게 된다. 예를 든다면 큰 광산을 하는 사람이 어느 장소에 광석이 있다는 것이 확실히
발견될 때에는 밤낮 쉬지 않고 뚫고 들어가는 일을 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예수를
믿으므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보다 좀더 들어가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종이 되려고 한다면 어려움이 온다 하여도 참고 기도하면서 그 인격을
이루려고 노력할 것은 사실이다. 왜냐 하면 어려움이 와도 왕권 받을 일을 한 자라야 주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세세 왕권을
바라보는 사람이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는 것은 소망이 넘치는 기쁨에서 되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이 기도에 힘을 잃어버리고 잠자는 상태에
있게 된 원인은 주 앞에 설 때에 상 받을 일을 중심 하지 않고 사람 앞에 보이려는 것을 목적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중심해서 일하는 사람은 자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적에 힘이 빠지고 낙심하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 앞에 바로 보이려고 일하던
사람은 난국이 올 때에 더 각성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소망의 확실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어려운
난국을 당하였지만 재림의 주를 사모하는 자는 기도의 힘을 더 얻게 될 것이요 각성을 하게 될 것이다. 만일 지금 각성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오는 난국을 돌파할 수 없고 주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심각히 생각하고 깨닫게 될 때에 자동적으로 강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우리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는 것 외에 다른 것은 할 수도 없고 해야 할 책임도 아니다. 왜냐 하면 기도라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문제를 놓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합해지는
기도의 힘이다 (계8:3~5)
기도라는 것은
합해져야 큰 일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세계 통일에 평화왕국이라는 것은 한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왕권 받을 종들이
합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모든 선지와 사도와 성도들의 기도와 우리 기도가 합해지므로만 종말의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것이다.
종말의 난국이라는
것은 붉은 용과 짐승의 정권과 거짓 선지의 세력을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계시록 13장을 보면 인간 종말에 어떠한
난국이 온다는 것을 보여줄 때에 용은 짐승에게 큰 권세를 주고 짐승은 거짓 선지에게 권세를 주어서 세계를 다 자기의 세력 앞에 굴복하게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기독교 종말에 환란이다.
그런데 계시록
8장을 보면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불 때에 다른 천사가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는데 이것은 모든 성도들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 앞으로 상달됨에 따라 땅에는 무서운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난다고 한 것은 마귀 세력을 없이하는 심판을 뜻한 것인데 성도들의 원한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의 난국 돌파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수를 갚아 주므로만 해결된다. 이날까지 원수에게 핍박을 받고 그 가운데서도 죽기까지 싸웠던 자들의 기도와 현재 원수에게
압박을 받고 해방을 받고 핍박을 받는 종들의 기도가 합해서 진노의 심판이 오므로 이 땅에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일곱째 나팔을 불 때라고
하였다. 모든 난제 해결은 여호와께서 해주시겠다고 미리 언약을 세우셨으니 우리는 기도할 것 뿐이다.
성도가 기도할 호소
성가가 이 미약한 사람을 통하여 20장이나 온 것은 하나님께서 기도에 큰 힘을 주시는 동시에 그 기도대로 모든 난제를 해결시켜 주실 것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난국이 올 때에 두려워할 것도 없고 원망할 것도 없고 낙심할 것도 없이 언약의 말씀대로 행하시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호소를 올릴 것 뿐이다.
새일 성가라는 것은
난제 해결의 기도문이며 승리의 노래이다. 지금 우리가 난국을 돌파하려면 합심하여 호소 기도 성가를 우렁차게 올려야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너무나 마귀 세력이 강하게 일어나므로 개인의 기도로는 어찌할 수 없고 합심 단결하여 호소하는 것이 있어야만 난국을 돌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 론
가장 강한 것은
인간의 어떤 무력이나 정권이 아니요 성도의 기도라고 본다. 우리가 7년간 금식기도를 하면서 호소한 일은 천하를 정복할 위력이 될 것이다. 왜냐
하면 새일수도원에서 420명의 40일 금식자가 이미 기도했고 현재도 30명이 40일을 금식을 하면서 합심하여 호소하고 있는 것은 난국을 돌파할
위력이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깨닫는 시기
-
눅 24:44~49 -
서
론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때가 되기 전에 필요 없이 깨닫게 하는 일은 도저히 없는 것이다. 제자들이 3년 동안 그리스도를 따라가며 이적을 보고 교훈을 받고
심지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하늘의 음성을 듣기도 하고 예수님의 본체의 영광을 본 사실까지 있지만 시기가 되기 전에는 절대 그 말씀을
깨닫지를 못했던 것이다.
만일
성경을 아무 때나 누구든지 마음대로 깨달을 수 있는데 국한된 것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시기가 되기 전에 성경을
억지로 풀려는 것도 실패의 근본이요 시기가 되었는데도 성경을 깨닫지 못하는 것도 멸망을 자취하는 인간이 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어떠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때를 따라 성경을 깨닫게 해 주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해 주고 있다.
1.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을 해 보는 사람에게 (마1:19~23)
아무리
때가 온대도 어떤 학자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는 것은 아니다. 목수의 한 사람인 요셉은 어려운 난제를 앞에 놓고 경솔히 말하지 않고 행동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기다릴 때 천사가 나타나서 성경을 깨닫게 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성경을 깨닫게 아니하였더면
마리아는 큰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때가 될 때 하나님은 가장 의로운 사람에게 당신의 비밀을 깨닫게 해 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요셉같이 의로운 사람, 인내력이 있고
깊은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시대적인 비밀을 알게 할 것이다.
2.
구속을 기다리는 자에게 (눅24:21~27)
아무리
낙심될 일이 와도 낙심치 않고 구속을 기다리는 심정에서 염려하는 자에게 나타나신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참된 메시야로 믿었던 그들이 슬픔에
잠겨서 염려하며 길을 갈 때 홀연히 주님 나타나시어 성경을 가르쳤던 것이다. 누구든지 낙심될 일, 슬픈 일을 당해도 타락하지 않고 염려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자에게 비밀을 알게 해 준다. 만일 어떤 사람이 뜻대로 안 된다고 낙심, 원망하면 안될 것이로되 자기가 도저히 깨닫지 못하는
심정에서 안타까워하는 자에게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3.
공포 속에서 마음이 변치 않은 자에게 (눅24:36)
우리는
낙심될 일을 당할 때 떠는 것이 약점이다. 제자들은 유대인이 두려워서 문을 걸고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주님을 배척하는 마음이 아니요,
비겁한 사람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누구든지 진리를 모르고 떠는 자에게 진리를 알게 해 줄 책임은 주께 있는 것이다. 이때 주님이 그
제자들에게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면 안될 경우에 처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깨닫게 해주는 동시에 사명을 맡겼던
것이다. 세계적인 사명은 내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전하는 동시에 회개를 만방에 알리라고 했던 것이다.
4.
성경 읽기를 좋아하는 자에게 (행8:29~34)
아무리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를 좋아하는 자에게 빌립을 친히 인도해서 성경을 깨닫고 믿도록 했던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서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자는 성경을 누구를 통해서든 지 깨닫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다.
5.
항상 기도를 힘쓰는 자에게 (행10:30~38)
고넬료는
성경을 모르지만 하나님이 계신 줄 알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를 힘쓸 때 하나님은 강권으로 베드로를 인도해서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여 그 가정을
구원했던 것이다. 그때 베드로까지도 고넬료의 가정을 통해 진리를 완전히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할례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성령이 나리는 것을 볼
때 이방인의 집을 가기를 꺼리던 사도들은 완전히 복음의 진리를 확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지금은
누구든지 하나님께 상달하는 기도를 통해서 시대적인 말씀을 분명히 알도록 지시할 것이다. 계11:1을 보면 성전 제단 안에서 경배하는 자를
하나같이 시대적인 비밀을 깨닫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결
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화를 가져오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벧후1:20, 3:15~18). 종이란 주인이 알려주면 주인의
말대로 전해줄 것뿐이다. 만일 어떤 종이 내막을 알려주지 않는데 자기 멋대로 가서 전한다면 이것은 망령된 행동일 것이다. 증인은 시대적인 비밀을
주님이 깨닫게 하는 그대로 증거할 것 뿐이다. 모든 사도와 성도는 십자가의 부활을 그대로 전하기 위해서 피를 흘렸고 말세 증인은 작은 책을 꿀
같이 먹고 배에서 써도 만방에 예언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