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전서

   

목  차

1. 신령한 자의 판단 (고전2:6~16)

2. 일한 공력이 헛될까 조심하자(고전3:10~23)

3.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자 (고전7:1~35)

4. 넘어질까 조심할 일 (고전10:1~13)

5. 성령으로 한 몸 된 교회 (고전12:12~27) 

6. 제일은 사랑 (고전13:11~13) 

7.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는 수고 (고전15:9~11)  

8. 아담 안의 죽음과 그리스도 안의 부활 (고전15:20~28)

9. 인생의 두 가지 형체 (고전15:44~49)

 

갈라디아서

1. 택한 종에게 되는 일 ( 갈 1 : 11 - 17 )

2. 복음에는 외식이 있을 수 없다 ( 갈 2 : 11 - 16 )

3. 예수를 믿는 정로 ( 갈 2 : 15 - 21 )

4. 심판 받을 행위 ( 갈 5 : 2 - 10 )

 

에베소서

1. 그리스도 안의 통일 문제( 엡 1 : 3 - 14 )

2. 예정과 그리스도 안의 통일( 엡 1 : 3 - 14 )

3. 은혜로 되는 하나님의 섭리( 엡 2 : 1 - 10 )

4. 비밀을 알려 주는 사명( 엡 3 : 1 - 9 )

5. 대강 기록한 바울의 편지( 엡 3 : 1 - 9 )

6.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할 일( 엡 3 : 11 - 13 )

7. 지식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 엡 3 : 14 - 21 )

8. 자라는데서 이루어지는 인격( 엡 4 : 13 - 16 )

9. 성도의 교제적인 생활( 엡 4 : 25 - 32 )

10. 거룩한 믿음으로 이룬 가정( 엡 5 : 32 - 33, 6 : 1 - 4 )

  

신령한 자의 판단  

- 고전 2:6~16 -  

 

서 론  

인생이라는 것은 동물이 아니고 영물이다. 그러므로 신령한 것을 가지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바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이 신령해지지 않으면 짐승만도 못한 판단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령한 것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향하여 “소도 그 임자를 알고 나귀도 그 주인의 구유를 알지만 이스라엘은 모른다”고 탄식했다. 사람이란 것은 그 자체 본질의 심령을 하나님께 받았기 때문에 그 심령이라는 것은 신령한 것으로써만이 그 가치를 발휘하게 된 것이다.

동물은 혼만 있기 때문에 거기는 신령이라는 것이 하등 필요가 없다. 예를 든다면 보석은 보석답게 써야 가치가 있고, 나무는 나무답게 써야 가치가 있는 거와 같이 최고의 가치를 가진 생령의 사람은 신령하게 쓰여져야만 가치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제 어떤 자가 되어야 신령해 지느냐 하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1.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받아야만 될 것이다 (6)  

인간 지혜와 지식으로 날뛰면서 성신의 지혜 받은 스데반을 이단이라고 판정을 내려 돌로 치라고 했던 사도 바울은 회개하고 성령의 지혜를 받고 볼 적에 아무리 세상 지혜가 있어도 하나님의 지혜를 받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는 것을 그는 말했던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로 타고난 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배워야 될 의무가 있고 받아야 될 책임이 있는 것이다. 다시 예를 든다면 육신의 자식이 부모의 교훈을 받음과 같이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이 하나님의 지혜와 교훈을 받아야만 될 것이다.  

2. 통달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10~11)  

통달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사람은 깊이 연구하고 무엇을 알려고 할 때 물체에 대한 이치는 통달할 수 있는 것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하는 것은 성령의 충만을 받은 자 외에는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물체의 이치를 통달케 하는 것이 과학적 연구라면 영계에 관한 깊은 것을 통달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신학이라 할 것이다. 금일에 신학이라는 세계의 인간 지식이 결부된다는 것은 큰 위법 중에 위법이 될 것이다.  

3. 사람의 지혜로 가르치는 일을 버리는 자 (13)  

만일 어떤 종이 은혜를 받았다 하면서 인간 지혜 수단 방법이 들어간다면 이 사람은 은혜를 쏟을지언정 깊은 영계를 맛볼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왜냐하면 성령을 노엽게 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어떤 선생이 있는데 그 선생을 무시하고 다른 선생의 말만 따른다면 그 선생의 마음을 분노케 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하물며 성령을 받은 자가 인간 지혜를 따라 일한다는 것은 성령을 괴롭히는 행동이 될 것이다.   

4.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 (16)  

우리의 신령이라는 것은 어떤 외형적인 이적이나 어떤 표적으로써가 아니다. 중심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한 것이 신령자라 한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마음인 겸손, 온유, 진실, 사랑 이것이 있는 자라면 모든 일을 바로 판단할 수 있는 신령한 자라고 보게 될 것이다. 판단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 외에는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사 11:3~4).   

결 론  

우리는 속담에 ‘되지도 못하고 다 된 체 한다’는 말과 같이 신령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남의 영계를 판단한다는 것은 멸망을 자취하는 행동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마7:1~2과 같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신령한 사람이 되어서 모든 진리를 말씀의 칼로 바로 쪼개서 판단이 있게 설교하는 자가 마귀를 치는 권세의 종이 될 것이다. 기독교의 최고의 영계는 말씀의 칼을 들고 나가 말씀으로써 세계를 통일시키는 일로 끝을 맺을 것이다(계11:3).

 

일한 공력이 헛될까 조심하자

- 고전 3:10~23 -

 

  우리는 날마다 사는 생활이 집을 세우는 자와 같은 생활이다. 그러므로 집을 짓되 어떠한 집을 지어야 될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집을 짓고라도 그 집에서 영광을 누리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면 오히려 집을 짓지 않은 것만도 못할 것이다.

  이제 어떻게 집을 지어야 그 공력이 헛되지 않을까 하는 일에 깊이 깨닫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1. 사도 바울이 닦은 터 위에 집을 짓자 (10~15)

  우리는 이 말 저 말, 이 생각 저 생각할 필요조차 없이 사도 바울이 14권의 성경을 쓴 그대로 신앙의 토대를 잡으면 그 이상 더 할 것이 없다고 본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십자가의 도를 남보다도 더 명확히 쓸 수 있는 영감을 주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복음은 완전히 기독교의 정통 신앙의 터를 닦았다고 본다. 이 사람은 과거 청년 적에 바울 서신을 많이 본 것은 어느 성경보다도 내 신앙에 완전한 확신을 주기 때문이었다.

  누구든지 바울 사도의 기록한 서신에서 조금이라도 가감된 신앙을 가진다면 그 터를 바로 잡지도 못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완전한 터를 잡고 다음과 같이 해야 될 것이다.

  첫째 : 다른 터를 닦을 자가 없다고 생각을 두어야 한다(11).

  우리는 대표적인 종이 받은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은 신앙관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세운 대표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에서 가해도 교만이요, 감해도 교만일 것이다. 왜냐 하면 바울 사도를 들어서 우리에게 완전한 신앙의 토대를 잡도록 성신이 역사하셨는데 여기에 기준하지 않고 다른 무엇을 생각한다면 바울을 대적하는 것보다도 성신을 근심케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 불타지 않을 것으로 세워야 될 것이다(12~15).

  우리의 수고라는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주님께서 갚아 줄 수고도 있고 갚아 줄 것이 없는 수고도 있으니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만을 중심하지 않고 어떤 인물이나 교파를 중심해서 수고했다면 주님은 책임을 질 수가 없다. 왜냐 하면 주님의 일은 어떤 개인이나 개 교파를 초월해서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 끌려서 그 사람에게 보이려고 일했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 일한 것이니 이것은 풀이나 짚으로 지은 집과 같이 몇 날이 못 가서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주님만 중심해서 그 뜻에 복종하는 수고 외에는 다 헛수고가 될 것이다.

 

  2. 일꾼된 자격을 가져야 할 것이다 (16~17)

  일꾼이라는 것은 자기 홀로 일할 수 없고 성신이 내주하여 역사하는 대로 쓰여지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소불능의 신이시지만 일하는 사람의 몸을 거룩한 성전같이 성별 되게 쓰는 것이니 일꾼된 자가 자기 몸을 함부로 아무 곳에나 쓴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과 같다. 우리 몸은 주의 피로 산 몸이니 주님이 가실 곳을 우리 몸이 가고 주님이 붙들 사람을 우리 손으로 붙들어 주고 주님이 하라는 말을 우리 입으로 하게 되고 주님이 하시던 일을 우리 몸으로 하는 것이 일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말씀하면서 성신을 받으라고 했던 것이다(요20:21~22). 하나님은 예수님의 몸을 세상 죄를 걸머지고 죽으라는 사명을 맡겨 보냈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우리를 쓰시는 것은 주님이 행하신 일을 우리가 나가서 전하되 주님의 대행자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은 신앙의 대상을 완성시킨 일을 하셨고, 우리는 모든 사람이 바로 믿도록 전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3.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한다 (18~23)

  하나님께서 제일로 싫어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세상 지혜로 하려는 자라고 본다. 그러므로 세상 지혜를 어리석은 일로 보고 하늘의 지혜로만이 하나님의 일을 바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절대 사람을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완전 지혜를 받기 위하여 노력하는 동시에 그 지혜로만 모든 일을 이루어 나가려고 할 때에 지혜로운 건축자가 될 수 있다.

 

 결 론

  인간 생활의 가장 비극은 남지 못할 일을 위하여 수고하는 생활이라고 본다. 또는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복된 일은 작은 일에서나 큰 일에서나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일을 하는 자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고 하였다(10).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자  

- 고전 7:1~35 -  

 

서 론  

하나님은 어떠한 일이든지 화평 중에 행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니 아무리 신앙이 열렬하다고 하여도 무슨 일이든지 어지럽게 만드는 일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아니하신다. 우리는 성경을 중심하는 동시에 성경에 탈선되지 않는 일은 얼마든지 자유롭게 하되 분요함이 없이 해야 될 것이다. 만일 성경이 탈선된 일이 있는 경우에는 목숨을 내놓고 싸우더라도 할 수 없으며 그밖에 일은 양심 자유에 맡기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교회에 덕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1. 부부간의 분방 문제 (1~6)  

하나님께서 일남 일녀를 창조하여 가정을 이루게 한 것은 서로 돕고 합의하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피차에 돕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부부는 서로 자기 한 사람을 위하여 움직일 수 없고 서로 책임을 지고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서로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여자가 만일 자기는 거룩한 체하고 남편과 분방하여 남편과 멀리 한다는 것은 합당치 않고 남편이 거룩하다 하여 아내를 가까이 아니하고 분방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합당치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단에게 기회를 줄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부의 분방이라는 것은 어떠한 특별한 기도의 기간을 정하고 얼마 동안 합의하에 분방 하는 것 외에는 합당치 않다.  

2. 혼인 문제 (7~11)  

우리는 혼인을 부정하게 본다는 것은 잘못이요, 또는 혼인을 억지로라도 해야 된다고 강조하는 것은 합당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신앙 자유에 맡기되 부득이 혼인하여야 할 자신이라면 억지로 불타는 정욕을 가지고 나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가당할 것이요, 혼인을 해도 자신상 필요 없는 관계도 있고, 사명상 안 해야 할 형편이라면 혼인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3. 가정 문제 (12~15)  

가정이라는 것은 신앙으로써 단번에 완전하게 거룩하게 되는 가정은 심히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가 함께 부부의 생활을 하기 원하는 것이 죄라는 것보다도 함께 생활하기를 원한다는 경우에는 믿는 신자가 믿지 않는 자를 전도해서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모든 일을 참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믿기 전에 부부 생활이 있었던 사람에게 해당된 말이다.

이미 믿는 자가 안 믿는 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로되 믿지 않는 생활에서 먼저 믿고 나중 믿는 관계라면 먼저 믿는 자는 나중 믿는 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갈라서기를 원한다면 갈리게 하여도 하등 죄가 없다는 것이다.  

4. 환경 문제 (17~20)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질 때부터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생활이니 과거의 할례의 유무가 관계가 없고, 과거의 종이나 자유 자에게 하등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억지로 갑자기 고쳐야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믿는 자는 다 그 복음을 받은 그 때 있는 환경에서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바로 살아가는 것을 존중하게 생각할 문제요, 환경 문제부터 억지로 고치려고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탈선된 경우라면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워서 벗어나야 할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상관되지 않는 환경에서 억지로 변경을 하려는 것은 어지러운 일이 되기 때문이다.  

5. 자녀 출가 문제 (25~26)  

우리는 억지로 자녀 결혼을 시키지 않으려는 부모는 잘못이요, 자녀가 합당치 않게 여기는 결혼을 억지로 시키려는 것도 잘못이다. 출가 문제는 절로 자유에 맡기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처녀가 출가하는 것은 주님의 사업에 큰 지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는 주님의 사업을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결혼 생활은 더 합당하게 볼 수 없는 것이다. 주 재림이 임박한 이 때 부부 생활은 사명 감당하기에 불리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사명자에게 국한된 말이다. 주 재림이 임박한 환난의 세상에 무거운 짐을 사명자가 걸머진다는 것은 즉 육신의 고난이 있다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데는 인간에게도 어지럽지 않도록 덕을 세우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있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목적에서 가정 생활을 어지럽게 만든다는 것은 합당한 것이 아니다. 만일 가정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관계가 있는 경우에는 안 될 것이로되 진리 안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면 얼마든지 어지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된다는 것이다.

 

넘어질까 조심할 일  

- 고전 10:1~13 -  

 

서 론  

우리는 넘어진다는 것은 누워있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걸어가는 자에게 오는 시험이니 모든 일의 승리의 길을 가는 길에는 조심이 없이는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적하는 세력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노릇 할 때는 넘어지는 것이 없는 생활이었다. 넘어진다는 것은 소망 있는 길에서 넘어지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 생활은 아무런 소망 없는 생활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노동을 해도 수입이 없고 아무리 자녀를 낳아도 기를 수 없는 이러한 압박 속에 있는 민족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마귀의 권세 안에 사는 생활이 그와 같은 생활이었다. 열매 없는 무가치한 생활이 애굽의 생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영적 지도자를 강권으로 보내어 소망 없는 민족을 소망 있는 길로 인도한 것이 출애굽이라 하는 것이다. 소망 있는 길을 떠난 그들은 어려운 난관이 부딪힐 때마다 하나님은 크게 역사하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앞길을 막고 있던 바다가 갈라진 일, 식물 없는 사막에 만나가 나린 일, 음료수 없는 마른땅에 샘물이 난 일, 이것이 소망을 주는 그들의 체험적인 신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생명의 산 체험을 받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조심치 아니하므로 60만 대중은 다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리 생명의 떡을 먹고 생명의 물을 마셔도 조심 없는 생활에는 비참을 이루는 일이 말세에 있다는 것을 거울로 보여준 것이다. 그들은 무슨 일에 조심 못했던가 하는 것을 본문에서 알 수 있다.  

1. 우상을 숭배하게 된 일 (7)  

이것은 모세가 40일간 이라는 기간을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금식하며 기도 중에 십계명을 쓴 비석을 받았던 것이다. 잠깐동안 지도자 떠난 대중에는 마귀의 미혹이 왔던 것이다. 눈에 보이던 지도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대신 금송아지를 만든 일이다. 이것은 너무 경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의뢰하는 정신은 우상숭배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이들이 만일 모세를 바라보지 않고 여호와만 바라보는 신앙이 강하였던들 이러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2. 간음한 일 (8)  

이것은 발람과 발락이 합심하여 이스라엘을 망치고자 할 때 아름다운 모압 여자를 보내어 꼬이었던 것이다. 언제나 넘어뜨리려는 마귀의 시험은 여자를 통해서 쓴다는 것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여자를 조심치 아니한 결과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던 것이다.  

3. 주를 시험하는 일 (9)  

그들은 길을 가다가 피곤하다는 것으로 마음이 상해서 애굽 땅으로 돌아가자는 생각을 가지다 불뱀에게 물려 죽은 사실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감사한 줄 모르고 짐짓 뒤를 돌아보는 일이라는 것은 지극히 조심할 일이다.  

4. 원망하는 일 (10)  

그들은 배가 고파도 원망이요, 목이 말라도 원망이요, 조금만 괴로워도 지도자를 원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멸망한 원망은 무엇인가 할 때 하나님께서 40일 동안에 가나안 복지를 점령해 준다는 것을 믿지 않고 악평하는 열 정탐꾼의 충격을 받고 하나님께서 세운 여호수아와 갈렙을 원망하고 대적하다가 전멸을 당한 것이다. 괴로울 때 무엇을 달라고 원망하는 일은 용서를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역사하는 일을 무시하고 반박하는 원망을 할 때는 용서가 없었던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소망 있는 길로 인도하는 동시에 시련을 통과시키는 것이다. 시련을 통과할 때 조심이 있는 사람을 보호하고 지켜서 목적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 있는 사랑이다. 다시 말하면 소망 있는 길에서 겪는 시련은 하나님이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일이 있는 동시에 통과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험이란 소망 있는 자기 백성에게 더 진보를 주는 동시에 완전한 것을 이루는 인격을 구성하는 방법이다.

 

성령으로 한 몸 된 교회

- 고전 12:12~27 -

 

  세상에는 많은 단체가 있다. 그러나 이 단체라는 것은 성령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고 사업적, 정치적인 한 단체에 불과한 것이다. 완전한 종교 단체라는 것은 성령으로 한 몸과 같이 연결된 단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단체를 이루기 위하여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고, 승리의 부활을 하셔서 성령을 보내는 일에 전력을 두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성령으로 한 몸 된 교회를 이루지 못한다면 주님과는 하등에 관계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성령으로 한 몸 된 교회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증거하기로 한다.

 

  1. 성령의 세례를 받으므로 한 몸 된 단체 (12~13)

  우리는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인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성령을 부어 줄 수 있는 생명의 주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은 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받으므로만 확증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무신론 공산당이 세계를 침투하고 있는 이때에, 성령의 세례를 받는 체험이 우리에게 없다면 대항해서 싸울 용기가 없을 것이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나의 체험에 의하면 중생을 받고도 성신의 역사가 여러 가지 계단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처음에는 자기 죄를 자복하는 회개가 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영생의 진리를 알아보려고 할 때에 기도 중 어려서부터 지었던 죄가 전부 생각이 나면서 눈물로 고백하는 일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에 우리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이 생기게 되는 체험을 받았다.

  그때부터 기도가 열려지고, 진리가 열려지며,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심 성결을 지키지 못하고 항상 여러 가지 죄가 마음에 발생하는 것을 억제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마음이 깨끗할 때도 있고, 죄가 발생할 때도 있는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에는 내가 마음에까지 죄가 완전히 없어진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16년 전에 중심 성결을 얻기 위하여 입산 기도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내 마음과 생각으로 범한 죄를 7일간 회개하고 9일만에 뜨거운 마음을 받아서 이날까지 죄라는 것이 마음에서 발생해 본 일이 없다. 이것은 내 결심이 아니요 마음이 항상 뜨거워 있으므로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다. 나는 마음에 뜨거운 불이 항상 충만해 있으므로 마음에 죄가 조금도 발생을 못하는 것을 17년째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전부가 아니었다. 남을 살리기 위하여 3일간 밤을 새워 기도하다가 생수의 역사가 흘러오는 체험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1957년부터 1967년까지 계속해서 생수의 은혜를 입으로 마시고, 온 몸에 충만해진 생활을 할 때에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는 영계에 들어가게 되었고, 신앙 장성으로 이루어지는 인격적 체험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은혜시대의 성령의 역사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그 후에 여호와를 바라보고 호소하던 중 새 힘을 받으므로 몸의 변화라는 것을 체험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세밀한 체험을 말할 필요가 없고, 성령의 세례로 역사하는 것을 체험한 바에 의하여 증거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세례로 인격 완성이 되는 것이다. 성령을 통하여 오는 은혜는 한번만 있고 끝나는 것이 아니요, 항상 새로운 역사가 흘러오는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의 교회가 성령의 체험이 너무 박약한 가운데서 성령의 역사를 경홀히 생각하는 폐단도 있다. 성신의 역사라는 것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데서 끝이 아니고, 얼마든지 인격을 향상시켜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엡4:13).

 

  2. 조금이라도 서로 떠날 수 없는 단체 (14~25)

  성령으로 이루어진 교회는 어떤 도덕이나 의식이나 교권을 중심하는 것보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은 자기 사명에서 서로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눈이나 입이나 손이나 발이나 그 밖의 모든 지체가 자기 홀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으므로 서로 떠날 수 없는 것과 같다.  

눈이 아무리 보아도 수족이 없다면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 없고, 아무리 수족이 있다 하여도 눈이 없다면 아무런 일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으로 한 몸 된 단체라는 것은 성신의 소욕을 이루기 위한 데서 움직이는 것이니,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성신의 인도를 따라서 자기 사명을 하되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기 위하여 단체적인 행동을 취하여야만 될 것이다.  

  아무리 큰 사명을 가진 자라도 자기 홀로는 할 수가 없고, 서로 뭉쳐지는 단체가 있으므로만 그 사명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가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없는 증거라고 본다.

 

  3. 고통도 영광도 함께 받는 단체 (26~27)

  기독교는 어떤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진 단체가 아니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의 교통을 받는 단체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받아도 주님을 위하여 받는 것이요, 영광을 얻어도 주님을 위하여 얻는 것이니, 영원히 동거 동락할 단체이다. 어떤 형제가 괴로움을 받을 때에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내 마음도 괴롭고, 어떤 형제가 영광을 얻을 때에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내 마음도 기쁜 것은 성령으로 하나가 된 단체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종이 자기의 명예를 내세우기 위하여 동역자를 비판한다면 성령으로 역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어떤 형제가 시험을 만날 때에 애를 쓰며 기도하게 되고, 어떤 형제가 역사할 때에 기뻐서 같이 찬송하게 되는데, 이것이 영원히 동거 동락할 단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내게 행한 것이라고 하셨고, 누구든지 나를 믿는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한다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고 하셨다. 우리 기독교 안에서 형제를 내 몸 같이 사랑하게 되는 것은 도덕을 초월한 성신의 열매로 되는 것이다.

 

 결 론

  사람이라는 것은 완전한 단체가 없이는 완전한 일을 할 수가 없고, 완전한 인격적인 행동을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성신의 역사가 임하는 목적은 단체적인 역사를 하기 위한 것인 줄 알고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합심 단결하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이다.

 

제일은 사랑

- 고전 13:11~13 -

 

  하나님은 사랑의 자체이시다. 그러므로 그 사랑의 만족을 이루어 놓는 것을 천국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있는 완전한 것을 인생에게 전부 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령인 동시에 그 완전한 것을 주기 위한 역사를 능력이라는 것이다. 제일인 사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완전한 것을 이루는 것이다 (11)

  사랑이라는 것은 완전치 못한 자가 완전한 자를 섬기는 사랑도 있고, 완전한 자가 완전치 못한 자를 길러 주는 사랑도 있다. 여기에 제일 가는 사랑은 완전치 못한 자가 완전한 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요, 완전한 자가 완전치 못한 자를 길러 주는 사랑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는 사랑에는 감히 대조할 수가 없다. 예를 든다면 아무리 자식이 부모를 사랑한다 하여도 길러주신 부모의 사랑엔 비할 수가 없는 것과 같다.

  제일 가는 사랑은 조물주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완전한 사람이 되게 해 주는 사랑인 것이다. 우리 기독교라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대한다든지 인간이 하나님을 대한다든지 하는 범위에 국한된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역사가 기독교를 이룬 것이니 그 사랑 안에서 중생 하여 자라나 온전한 사람이 되어 온전한 세세 왕국에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제일 가는 사랑의 종이 되려면 하나님께서 인생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를 체험하는 영계에 들어가서 완전한 인격을 하나님께로 받아야 된다. 완전한 인격을 하나님께로 받은 자가 아니고는 하나님의 사랑의 비밀을 다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어린아이는 앞에 사탕을 놓고 좋은 서책을 놓으면 자기에게 사탕이 필요하다고 하겠지만,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좋은 서책을 자기의 무기로 사용하는 인격을 가지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어린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때 그때에 자기를 길러 주는 은사를 좋아하겠고, 완전한 장부가 될 때에는 성경 전체에 말씀의 칼을 무기로 쓸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국 복음 운동을 하실 때에는 은사를 중심하여 역사 하셨지만 완전 승리의 지상 왕국을 이룰 때에는 마귀의 권세를 개방하여 여러가지로 시험을 해 보고 시험에서 말씀으로 이긴 자로 완전한 승리의 왕국을 이루게 하신다.

 

  2. 완전히 알게 되는 것이다 (12)

  우리는 지금 주님의 사랑의 범위를 다 알지 못하되 그 사랑을 받아서 우리가 중생을 받고 은사를 받고 날마다 자라나는 생활에서 사랑을 하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분명히 아시고 인도하시지만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시는 그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 때에야 그 사랑의 목적이 무엇인 것을 다 알게 된다. 이 세상에서 사는 생활은 그 사랑을 다 알지는 못하였지만 그 사랑의 능력의 역사를 받아 날마다 전진하며 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은혜시대에는 영혼을 구원하는 사랑 속에서 역사했고, 환란 재앙이 올 때에는 그 몸까지 구속해 주는 역사 아래서 재림의 주를 맞이하게 된다. 이 땅에서 받는 사랑은 재림시까지에 완전함을 이루어 죽은 자는 부활하고 남은 자는 변화하여 즐거운 혼인 잔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3. 믿음 소망보다도 제일은 사랑이다 (13)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이요, 소망이라는 것은 사랑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는 것이니 믿음과 소망의 목적은 완전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자체는 사랑이시니 당신의 사랑을 믿고 소망을 얻은 자로 완전한 나라를 이루어서 이들에게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베풀어주는 것을 세세 왕권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나 미래는 믿음, 소망, 사랑으로 나가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이루어진 세세 왕권의 영광의 기업을 누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대사업은 완성되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신은 사랑의 신이신데 그 사랑의 소원을 다 이루어 놓는 것을 천국의 영광이라고 한다. 지상 왕국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되는 천년 왕국이요, 영원한 천국이라는 것은 하늘 위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된 새 예루살렘을 영원한 도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 론

  인생의 제일 큰 일은 제일 가는 사랑을 받고 사는 일이라고 본다. 누구나 다 사랑을 받고 싶어 하지만 제일 가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이것을 받지 못하고 흑암에 떨어진 것을 붉은 용에게 꾀임을 받은 인간이라고 본다.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는 수고

- 고전 15:9~11 -

 

  우리가 은혜를 받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은 더욱 귀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든지 받는 것이 좋은 일인 줄 아는 것보다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 더 큰 일인 줄 생각하고 수고가 있어야 한다. 은혜라는 것은 수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 놓는 것이니, 이것이 기독교의 열매라는 것이다.

  이제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는 수고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은혜로 된 인격 (9~10상반절)

  사람의 인격도 여러 가지로 되는 것이니, 과학으로 된 인격도 있고 도덕으로 된 인격도 있고 정치로 된 인격도 있다. 그러나 은혜로 된 인격이라는 것은 과학, 도덕, 정치를 초월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세계 인류를 살리는 인격은 은혜로 된 인격밖에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라도 은혜로 된 인격이 될 때에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고 싸워 나가게 됐다.

  예를 든다면 아무리 나쁜 나무라도 베어서 버리고 좋은 나무를 접붙이면 좋은 나무 열매를 맺게 되는 것과 같다. 은혜로 된 인격은 아무리 남을 죽이려던 사람이라도 그 즉시에 남을 살리기 위하여 나서게 되는 것이다. 바울 하나가 은혜로 된 인격이 될 때에 그 인격을 통하여 인류적인 속죄 구령의 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세계적인 복음 확장의 열매를 이루게 되었다. 이것을 본다면 은혜로 된 인격이 얼마나 열매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은혜로 된 수고 (10하반절)

  수고도 저주로 된 수고도 있고, 은혜로 된 수고도 있다. 사람이 땀을 흘려야 먹게 된 수고는 땅이 저주를 받은 증거요, 눈물과 땀을 흘려서 복음을 전하게 된 수고는 이 땅에 천국이 임하는 증거이다. 하늘에서 오는 은혜를 남에게 주기 위하여 수고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열매요, 먹기 위하여 수고하는 것은 아담이 미혹을 받아 범죄한 열매이다. 그러므로 수고를 하되 은혜를 남에게 주기 위하여 수고하는 자라야 은혜가 헛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은혜를 받고도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을 한다면 그 은혜는 헛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나리시는 것은 은혜를 받은 자로서 남을 살리기 위하여 수고할 수 있는 인격을 이루어 놓기 위한 것이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남에게 대접을 받기 좋아한다는 것은 사단의 시험이요, 은혜를 받은 자로서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워 나간다는 것은 성신의 역사이다.

  오늘에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고도 수고하기를 싫어할 때에 그 은혜가 더하여지지를 못하고 은혜가 감하여지므로 나뭇가지가 말라지듯이 자신이 메말라지는 상태에 있게 된다. 은혜를 받은 자라도 순교적인 생활을 함으로만 은혜 위에 은혜를 더 받아서 그리스도와 같이 왕권을 받게 되는 것이다.

 

  3. 은혜로 된 열매 (11)

  세상에도 여러 가지로 열매가 나타나는 일이 있지만 은혜로 된  열매만이 영원한 열매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생산을 하는 일에 열매가 많으므로 세계적인 갑부가 된 일도 있고, 어떤 사람은 문학적 소질을 가지고 많은 서책을 내므로 세계적인 박사가 된 일도 있고, 어떤 사람은 정치적 천재를 가지고 구라파를 자기 손에 넣었던 영웅도 있었지만 그 당시뿐이지 영원한 것은 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바울이 은혜로 된 인격을 받아 은혜로 된 수고로 많은 사람을 중생 받게 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열매는 이 날까지도 세계적인 활동을 하는 동시에 이 땅에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지고야 말 것이다. 예를 든다면 생명이 없는 기계는 처음에는 훌륭하게 보여도 점점 낡아지고 마는 것이로되 생명이 있는 겨자씨는 처음에는 보잘것없이 보여도 점점 자라나서 온 밭을 덮는 나무가 되는 것과 같다. 바울 한 사람이 은혜로 된 열매는 생명적인 종교로서 온 세계를 정복하게 된 것이다.

 

 결 론

  가장 귀한 것이 은혜이며, 가장 귀한 것이 은혜로 되는 수고이다. 그리스도 한 분이 십자가에 죽어서 얼마든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의가 된 것은 은혜를 받은 자의 수고가 있다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받아서 수고만 한다면 가장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아담 안의 죽음과 그리스도 안의 부활

- 고전 15:20~28-

 

  하나님께서는 죽음이 오는 것도, 생명이 오는 것도, 다 계통적으로 있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다스리되 반드시 그 씨를 따라서 열매가 있게 하신다. 씨라는 것은 악의 씨도 있고 의의 씨도 있고 죽음의 씨도 있고 생명의 씨도 있다. 그러므로 죄의 씨를 주는 계통도 있고 의의 씨를 주는 계통도 있고 죽음의 씨를 주는 계통도 있으며 생명의 씨를 주는 계통도 있는 것이다. 이제 계통적인 역사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아담 안의 죽음 (20~21)

  죽음이라는 자체는 순종치 않는 자에게 오는 법이니 선악과를 먹을 때에 죽음이라는 씨가 사람의 몸에 들어온 것이다. 이것이 질적 타락이다. 질이라는 것은 생명의 질도 있고, 사망의 질도 있는 것이니 아담을 통하여 인간에게 전해 주는 질은 사망의 질이다. 선악과라는 것은 그 자체가 보통 과실과 같은 질이 아니요, 그것을 먹으면 사람이 죽는 질이 있는 과실이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낸 것은 순종치 않는 자에게 사망을 주기 위한 법을 따라 낸 과실이요, 생명과는 순종하는 자에게 영생을 주기 위한 과실이다.

  사람의 몸이라는 것은 흙에서 지음을 받은 몸이니 완전한 몸으로 창조된 몸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완전한 몸이 되는 것이요, 순종치 않으면 죽는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몸으로써 자녀를 낳을 때에 그 피의 계통은 다 사망의 몸이 되었다. 이러한 몸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순종해서 하나님의 신의 도구가 될 때에는 그 몸을 다시 영생할 몸으로 이루어 놓는 법을 구속의 법이라는 것이다.

  본문에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한 것은 몸의 사망과 영생을 가르친 말씀이다. 아담은 몸의 사망을 받았으나 그 영은 속죄제를 드리므로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아담 후에 몸의 타락은 사망의 질이 되는 선악과의 질을 받은 계통이므로 누구든지 그 피를 받은 자는 다 아담 안에서 한 몸 같이 되어 있으므로 죽은 것이다. 이와 같이 부활을 받는 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2. 그리스도 안의 부활 (22~23)

  모든 사람이 다 죽게 된 것은 아담의 후손은 누구든지 다 아담의 몸에서 나왔으므로 그 계통적인 사망을 받게 된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는 자들은 아담에게 속한 자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붙는 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의 모든 자가 부활케 하는 이치는 다음과 같다.

  첫째 : 예수님의 몸을 물과 피로 임하게 하심 (요일5:6~9)

  그리스도의 몸은 아담의 계통이 아니요, 마리아의 태를 그릇과 같이 사용한 것 뿐이다. 다시 말하면 아담의 계통적인 마리아의 몸의 피가 예수님을 이룬 것이 아니고 성신의 역사로 마리아의 몸에 역사해서 물과 피가 임하게 하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은 영생할 생명으로 이루어진 몸이다. 이러한 몸이기 때문에 만민의 죄를 대속하는 피를 쏟고도 창 자국이 난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흘렀던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물에 잠겨 올라 올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몸을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몸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롬6:2~5).

  둘째 : 성신의 전이 됨 (고전6:14~20)

  성신께서 우리의 몸을 다스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산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일이 아니라면 성령이 오셔서 역사할 수가 없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몸이기 때문에 성신이 오셔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우리 몸이 성신의 도구가 될 때에 아담에게 속한 몸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몸이므로 죽어도 살고,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 변화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 몸이 변화하는 것은 죄에 속한 몸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몸이므로 영생할 몸으로 완전히 변화를 받게 된다.

  모든 사람들은 그 몸이 아담 안에 있으므로 죽을 것이요, 주 재림시에 변화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몸이므로 완전히 영생할 몸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이 왕권 받을 사람에게 이루어지므로 지상 왕국이 이루어진다.

 

  3. 불가불 왕 노릇 하는 일 (24~25)

  그리스도의 통치 왕국이 이루어지는 그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1차 부활에 참여한 자가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왕국은 부득불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인격을 이룬 자들이 통치하게 된다. 이것을 새 시대라 하는 것이다.

 

  4. 만물이 복종하는 일 (27~28)

  첫째아담이 범죄 하므로 만물이 아담 안에서 저주를 받았고, 둘째아담 예수가 승리하므로 만물이 다 복종을 하는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는 것을 성도의 통치 지상 왕국이라는 것이다.

 

 결 론

  아담 안에서 사망이 옴으로 만물이 저주를 받게 되어 사망을 받을 몸에게는 만물이 복종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한 분이 순종하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생명에 속한 몸으로서 만물이 복종하는 완전한 나라를 이룬 것을 그리스도의 통치 왕국이라는 것이다.

 

인생의 두 가지 형체

- 고전 15:44~49 -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실 때에 흙으로 사람의 몸을 창조하여 그 속에 생기를 불어넣어 산 영을 가진 아담이 되게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창조할 때 완전한 몸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고 완전케 될 수 있는 피조물로 낸 것이다. 많은 동물을 흙에서 나게 했지만 사람만은 그 몸이 영체가 될 수 있는 사람으로 낼 때에 어떠한 방침으로써 영체가 되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가장 간교한 뱀은 악한 형체를 가질 수 있게 내었고, 사람은 영생할 영광의 형체가 되게 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될 사명을 하지 못하므로 흙으로 돌아갔고 간교한 뱀은 사람을 꾀어서 이길 때에 자기의 사명을 했으므로 용이 되어 공중 세력을 잡고 크게 역사하게 된 것이다(계12:9, 20:2).

  다시 말하면 사람은 생령으로서 영화로운 영체를 가지므로만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간교한 뱀은 간교한 사탄의 영으로서 대 승리를 보고 큰 용이 되어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중에서 사탄의 말을 순종하면 용과 같이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요, 사람은 산 영으로서 용을 이기고 하늘에 속한 영체가 이루어지면 영원한 천국의 왕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대 섭리 하에서 사람에게 두 가지 형체가 있다.

 

  1. 땅에 속한 형체

  이 형체는 땅에 속한 열매를 먹고, 땅에 속한 물을 먹고, 땅에 속한 동물을 다스리며, 땅에 속한 식물을 가꾸며, 땅에 속한 나라를 이루어, 땅에 속한 자녀를 교육하며, 땅에 속한 사람으로 하여야 할 일을 해야 된다. 이제 땅에 속한 자가 할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육하고 번성해서 의로운 씨를 이 땅에 충만케 하여야 될 사명이 있다. 그런데 사람이 마귀에게 미혹을 받고 선악과를 먹었으므로 그 몸은 의로운 씨를 전하지 못하고 악한 씨를 전하는 타락한 몸이 되었다. 이렇게 되므로 이 세상은 죄악의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둘째아담 예수가 세상에 오신 것은 흙에서 그 몸이 나지 않고 성모 마리아 몸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물과 피가 임하여 땅에 속한 사람의 몸을 이루어서 인간이 땅에서 할 일을 친히 하시고, 그 몸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것은 이 땅 사람이 땅에서 지은 죄를 다 걸머지고 땅에서 죽은 것이며, 땅에서 장례를 받은 몸이 다시 부활할 때에, 이 땅에 있지 않고 승천하신 것은 땅에 있는 형체를 가진 사람들로 땅에서 할 일을 능히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기 위하여 승천하셔서, 지금 땅에 속한 사람들의 몸에다 성신을 부어 주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땅에서 사는 생활에서 예수를 믿고 그 영이 산 영이 되는 중생을 받고 성신을 받을 적에 산 영의 사람으로 땅에서 할 일을 할 수 있는 몸이 되는 것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부어 주는 성신을 받으므로 땅에 속한 몸이 땅에서 할 일을 하는 인격을 이루어 주님께서 땅에 있을 때에 어떻게 하라는 사명을 할 수 있게 되므로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 사람을 통하여 회개하게 되고 성신을 받게 되므로 교회를 이루고 주의 사업을 하게 되는 기독교 단체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라는 것은 이 땅에서 하는 사명은 땅에 속한 사람이 땅에서 하는 일을 다 하도록 하는 것을 성신의 역사라 하며 기독교 진리 운동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땅에서 걸어다니는 몸으로써 할 일을 다하는 것이 인생의 의무라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교인이 땅에서 자기 몸으로 할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신령한 세계를 바라만 보고 있다는 것은 기독교인의 사명적인 정신이 아니요, 이것은 염세주의적인 것이니 이런 것은 생명이 있는 종교인의 활동이 아니다.

  금일의 기독교가 세계에 대 종교를 이룬 것은 땅에서 할 일을 할 수 있는 그 인격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는 성신의 역사가 있으므로 대 승리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제 땅에 속한 몸을 가진 사람으로 사는 기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쉬지 않고 활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일한 대로 갚아 주려고 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수가 있다.

 

  2. 하늘에 속한 형체

  주님께서 땅에 속한 몸으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땅 위에 교회를 세워 땅에 속한 자들이 할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오셨고,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시는 것은 땅에서 할 일을 충성 되이 하되 그 몸이 쓰러지기까지 활동하던 사람들의 몸을 당신의 몸과 같이 하늘에 속한 형체를 이루어 주와 같이 할 일을 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초림의 주는 세계 만방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오신 것이요, 재림의 주로 오시는 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충성 되이 일한 자들의 죽은 몸을 다시 살려 하늘의 형체가 이루어지게 하고, 주님 올 때까지 교회를 대적하고 나오는 붉은 용과 짐승의 정권과 거짓 선지와 싸우던 사람들은 죽지 않고 변화 승천시켜 하늘에 속한 몸을 받은 자들로써 왕국 조직을 이루어, 이 세상에 악한 자의 세력을 다 때려부수고 세계를 통일하되, 하늘에 속한 형체가 이루어진 자들이 통치하는 평화 왕국을 이룰 때 이 세상은 완전히 에덴 동산보다 더 좋은 나라를 이루어서, 마귀의 세력이 없어진 평화 왕국을 이루어 아담에게 맡겼던 사명을 다시 할 수 있는 나라를 이루는 것을 지상 왕국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날까지는 악한 씨가 땅을 더럽혔지만, 이 때는 의로운 씨가 복을 받고 거룩한 성산을 이루어 조물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왕국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속한 형체를 받은 자들이 통치하는 시대를 가르쳐서 이 땅에는 천년 왕국이요, 천국에 영원한 무궁 세계가 이루어지는 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변화성도는 땅에서 할 일을 다 했으므로 하늘의 형체가 이루어지고 그 자손은 땅에서 번창하게 되므로 변화성도의 전도를 받고 따라 오던 양떼들이 지상에서 평화로운 시대의 큰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은 변화성도의 전하는 말세의 비밀의 진리 운동이라는 것이다.

 

 결 론

  인생이라는 것은 땅에 속한 형체가 없이 하늘에 속한 형체가 없고 땅에 속한 형체가 있으므로 하늘에 속한 형체가 이루어지는 것이니 땅에 속한 몸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야 할 일을 바로 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라 하며 하늘에 속한 형체가 이루어져 영광을 누리는 것을 인생의 최고의 행복이 되는 세세 영광이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택한 종에게 되는 일

- 갈 1:11~17 -

 

  하나님의 택한 종이라는 것은 도저히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이루어지므로 오직 하나님만 영화롭게 하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택한 종에게 되어지는 것은 연구했거나 노력을 했거나 또는 인간의 혜택을 입은 것이 아니요, 홀연히 되는 일이다.

  아무리 사람이 볼 때는 소망이 없는 것 같아도 뜻밖에 놀라운 일이 있기도 하고, 사람이 볼 때는 악한 것 같아도 홀연히 의로운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이 택한 종에게 되어지는 일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택한 자라도, 인간이 볼 때에 모든 일이 다 허사가 되는 것같이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택한 자가 죄 되는 일을 하려고 할 때에 죄를 짓지 않도록 방지하지 않으시고, 자유로운 행동을 하도록 버려 두셨다가 갑자기 택한 자를 바로 만들어 쓰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제 택한 종에게 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들어서 증거하기로 한다.

 

  1. 계시로 말미암아 되는 일 (11~12)

  택한 종이 일을 하게 되는 일은 인간 지식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도 아니요, 인간 도덕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도 아니요, 인간의 어떤 인도를 받아 되는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므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기독교를 극도로 반대하는 사람이었으나 다메섹 광야에서 홀연히 계시를 받아 그 즉시에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의 종이 연구해서 된다는 것은 완전한 종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 될 적에 완전한 것을 증거할 수 있는 종이 되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의 역사가 인간 두뇌로 연구해서 된다면 이것은 생명의 종교라고 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교회라고 볼 수도 없다. 왜냐 하면 사람의 연구 안에 있는 것은 전부가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계시를 받아 되어진 일은 오늘까지 세계 인류에게 큰 열매를 주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계시를 받지 않고 되는 종은 택한 종이라고 볼 수 없다.

 

  2. 은혜로 부르심을 받게 되는 일 (13~15)

  아무리 교회를 핍박하고 잔해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했지만 하나님은 바울을 은혜로 부르셨다. 이것은 바울이 알지 못해서 핍박을 하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택한 자에게 깨닫도록 할 책임이 있으므로 그를 책망하는 것보다도 은혜로 부르신 것이다.

  누구든지 택함을 입은 사람이라면 알지 못해서 죄를 지은 일은 있으나 깨닫게 될 때에는 그 즉시에 옳은 일을 하게 된다. 바울이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너무나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는 열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핍박한 이유는 유대교 외에 다른 교가 있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정통을 가지고 내려온 유대교를 기독교가 무시한다는 오해를 가졌으며, 유대교를 없이하고 예수교가 우세하게 된다면 자기의 정통은 다 쓸데가 없다는 생각에서 유대 교권으로 기독교를 반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은혜를 모르므로 행한 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은혜를 깨닫도록 역사하셨던 것이다. 언제나 택한 종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다스리신다. 깨닫지 못할 때에는 깨닫도록 지혜를 주시며 약할 때에는 이기도록 능력을 주시는 것은 택한 자에게 은혜로 역사하셔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다.

 

  3.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일 (16~17)

  사명이라는 것은 모태로부터 택할 때에 어떻게 쓰시겠다는 하나님의 예정이 있으니, 아무리 사람이 애를 써 보아도 그대로 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들어쓰시는 대로 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농부가 장기를 손에 잡고 일할 때에 그 장기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농부가 하고자 하는 대로 쓰여지는 것과 같다.

  택한 종이 자기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므로 사람으로서 감히 스스로 무엇을 생각할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이 그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울이 교회를 제일 많이 세웠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택한 종에게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은 조금도 인간의 무엇이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이것을 신령한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 론

  기독교는 택한 종이 있으므로써 있게 되는 것이니, 만일 택한 종이 없다면 교회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가장 귀중한 일은 택한 종이 하는 일이다.

 

 

 

예수를 믿는 정로

- 갈 2:15~21 -

 

  오늘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 정로로 나가지 못한다면 아무런 열매가 없이 되어 예수님을 존귀하게 아는 것보다도 오히려 욕되게 하는 일이 많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그 정로를 걸어 나가는데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믿음의 노선을 가야만 할 것이다.

 

  1. 율법의 행위를 초월한 의를 얻고자 해야 한다 (15~16)

  만일 어떤 사람이 율법의 행위를 고조하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중심 성결을 목적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정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적 행위는 도덕에 속한 행위로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적인 행위는 중심 성결이 없이 마음에 죄를 질 상태에 있다 하여도 행동으로 율법을 범하지 않으면 율법을 지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죄를 질 마음이 있었다면 하나님 앞에 완전한 것을 받을 수 없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중심 성결이 있게 되므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의롭게 인정하시게 되는 것이다.

  성신이 떠난 사람도 도덕적 행위를 가지고 사람에게 옳게 보일 수가 있다. 그러나 성신이 떠난 사람의 마음은 악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 성신이 오는 것은 율법적 행위에 의하여 오는 것이 아니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심 성결의 의를 받으므로써 일어나는 역사가 성신의 열매이다.

  성신이 떠난 사람이 율법적인 행위를 가지고 성신 받은 사람을 박해한 것이 바울이 기독교를 박해한 행동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였다.

  육체라는 것은 타락한 죄의 몸이니,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없다는 것을 바울은 말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 죄악에 속한 생각이 육체를 따라 생기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해야 된다 (17~19)

  신앙이라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불타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사람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전부가 외식이 될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이 불탈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의롭게 보시는 것이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자가 사람 앞에 옳게 보인다 하여도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자의 마음을 따라 갈 수가 없다.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애를 쓰는 일이 있다면 아무리 부족이 있다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면서 그에게 은총을 나리시는 것이다.

 

  3. 내가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이 있어야 된다 (20)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 하여도 “나” 라는 것이 있다면 정로를 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나를 살게 했으니 나는 내 것이 아니므로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이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서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올라올 수 없게 되었는데, 길을 가던 사람이 줄을 내려보내어 끌어 올려 주었다면 그 사람은 항상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줄을 보내 준 사람이 나를 살려 주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예수를 믿는 사람의 마음에는 항상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것으로 산다는 것이 있어야 정로를 갈 수 있다. 사람이라는 것은 ‘나’라는 것이 죄인이므로 항상 ‘나’라는 것이 있을 때는 탈선된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항상 마음 가운데 나는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이 있는 자라면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성령이 역사하므로 정로를 걸어가게 된다.

 

  4. 항상 하나님의 은혜뿐이라고 해야 된다 (21)

  우리는 사람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헛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율법은 나와 관계가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내가 사는 것이 십자가의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절대로 사람이 행하므로써 되는 것이 아니요, 십자가의 의를 통하여 항상 오는 은혜로만 될 것을 믿고 나가는 자라야 정로를 걸을 수 있다. 하나님의 것을 사람이 받는데 있어서는 사람이 행한다는 것은 하등에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지 말고 내가 선을 행했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뿐이라고 우리는 생각해야 된다.

 

 결 론

  믿음이라는 것은 정로를 떠난다면 아무런 열매가 없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항상 도덕적 의를 중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중심 성결의 역사를 목적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고자 하는 것이 있는 동시에 ‘나’라는 자체가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로 오는 은혜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어야만 신앙 정로를 갈 수 있는 것이다.

 

 

 

복음에는 외식이 있을 수 없다  

- 갈 2:11~16 -  

 

서 론  

복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는 능력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니 이 복음을 받고도 외식이 있다고 하면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능력의 역사가 따르기 때문이다.  

이제 복음을 따르는 자의 외식과 하나님의 경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경을 찾아본다.  

1. 성금에 외식을 용납치 않음 (행5:1~5)  

하나님은 얼마든지 죄인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축복을 주기를 기뻐하지마는 성금에 외식하는 아나니아를 용서없이 죽게 한 것은 복음에는 성금에 외식이라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증거로 보여 주었다. 이것은 왜냐 할 때 성령을 속이는 죄가 되기 때문이다. 성신의 역사를 체험하고도 짐짓 성금을 감추고 외식하는 죄를 용서치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단의 자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2. 설교의 외식은 용납할 수 없다 (마24:48~51)  

만일 어떤 종이 공연히 종을 인신공격하고 공연히 남을 쳐서 설교를 하는 자라면 이것은 설교의 외식이니 심판 날에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강단의 설교라는 것은 양을 살리겠다는 눈물겨운 심정이 아니고는 전부가 외식의 설교가 되는 것이니 악한 종이라는 것은 주인이 더디 오리라는 태만과 동역자를 공연히 치는 교만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자동적인 외식의 행동이 될 것이니 엄중한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3. 의식적 외식은 있을 수 없다 (갈2:11~13)  

우리는 의식적으로써 체면을 세우고 위신을 세워 보려는 것도 복음을 받은 자로서 합당치 않다는 조건에서 바울은 게바를 책망한 것이다. 복음을 받은 자는 의식을 초월하여 진리를 따라 행한 것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가 율법적인 의식에 따라서 할례자를 두려워하며 외식한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을 바울은 말한 것이다. 만일 복음적인 교회가 어떤 사람이 무서워서 형식적인 의식을 따라서 움직인다는 것은 성신이 기뻐하는 일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4. 교제적 외식은 있을 수 없다 (골2:18)  

복음을 받은 기독교 신자로서 세상 친구의 교제적인 겸손이나 어떤 학설이나 어떤 숭배를 따른다면 여기에서는 영적 손상을 받을 뿐 아니라 상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으로 교제하는 것밖에는 다른 교제를 따른다는 것은 교제에 외식이 따를 것이니 여기에는 사단이 기회를 탈것이다.  

결 론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히 이루어진 열매이니 이 복음을 받은 자는 외식 없는 중심의 뜨거운 사랑을 떠난 일은 전부가 외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계명의 큰 대지가 되는 것이다.

 

 

심판 받을 행위  

- 갈 5:2~10 -  

 

서 론  

하나님의 심판이란 죄를 지은 사람을 덮어놓고 심판한다는 법은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를 지었다고 그대로 심판하는 신이라면 사랑이 없는 신이시니 사랑이 없는 신은 죄를 짓는 인간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하나님은 심판을 하되 심판 받을 행위를 가진 자를 심판하는 것이다. 이제 심판 받을 행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1. 남의 믿음을 요동케 하는 행위 (갈5:10)  

우리는 실수가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되 고의적으로 남이 진리를 따라 바로 믿는 신앙을 쓸데없이 딴 교훈으로 동요를 시켜서 그 마음이 탈선되게 만드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율법 시대가 지나고 은혜 시대가 와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정통적인 복음을 받아야 되는데도 불구하고 할례를 주장하는 이단설은 순수한 양떼의 신앙을 동요시키는 무리의 행위가 될 것이다. 지금도 이러한 행동을 하는 종이 있다면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죄는 죄 중의 큰 죄가 될 것이다.   

2. 빛을 미워하는 행동 (요3:19~20)  

우리는 빛을 사랑하지만 어둠과 싸우다가 실수하는 죄도 있고, 짐짓 빛을 미워하는 죄도 있으니 두 가지 죄를 놓고 하나님은 역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체가 어두운 미로에서 헤매면서 빛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빛으로 인도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빛이 오는데도 불구하고 빛을 미워함은 하나님의 사랑은 크지만 책임질 수 없이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중심에 빛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면서도 빛의 열매를 나타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령은 빛의 열매를 맺도록 책임지고 역사하는 것이다. 아무리 주님의 교훈을 듣고 증거를 보고도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바리새교인들은 정통을 찾는 교파요 매일같이 기도하고 또는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려도 결국은 멸망을 받았던 것이다. 사랑은 두 가지가 있고 미워하는 것도 두 가지가 있다. 사랑도 빛을 사랑하는 것 외에는 죄가 되고 미워하는 것도 악을 미워하는 것 외에는 죄가 될 것이다.  

3. 종을 대적하는 죄 (사41:8~11)  

하나님께서 종을 쓰시되 말씀을 따라 쓰시는 것이다. 은혜 시대 종을 대적하던 자는 회개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스데반을 죽이는 것을 옳다고 판정을 내리던 바울도 회개하여 사도가 되었다. 그러나 말세에 동방 땅 끝에서 심판의 권리를 받고 나오는 종을 대적하는 자는 멸망이라고 했다. 이것은 왜냐 할 때 동방 역사는 피 값을 갚는 역사니 그 종에게 원수를 회삼물같이 짓밟는다는 특권을 주었기 때문이다(사41:25).

예를 든다면 하나님께서 이같이 하는 것은 대장이 군대에게 너를 대적하는 자를 쳐죽이라는 명령을 받은 것과 같은 것이다. 말세 사명자는 만 왕의 왕의 특명을 받고 나오기 때문이다. 엘리야 모세같이 쓰여지게 된다. 이것을 기독교 종말에 진노의 날에 쓰여지는 종이라 한다(계11:3).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기 위해서 쓰는 종도 있고 원수를 치기 위하여 쓰는 종도 있으니 죄인을 부르기 위해 쓰는 종은 대적해도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원수를 치기 위하여 쓰는 종을 대적하는 자는 멸망하는 것이다.  

4. 예언을 경홀히 아는 죄 (계22:18~19, 사65:12)  

교훈도 용서하기 위하여 전하는 교훈도 있고, 심판하기 위하여 주는 교훈도 있으니 종말에 심판하려고 예언하는 말씀은 조금만 가감해도 용서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롯의 처를 생각하라고 했던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심판을 하고 싶어하는 본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자체는 사랑의 본질이다. 그러나 사랑으로써 살리기 위해서 역사하는 역사를 순종치 아니하므로 자동적인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판을 무서워하는 것보다도 시대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한다든지 그 말씀을 경홀히 여긴다는 것은 심판 받을 행위가 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예정과 그리스도 안의 통일

- 엡 1:3~14 -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될 것을 목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주 세계를 물 가운데 둔 것은 통일된 완전한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인데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지도록 예정하셔서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과 그리스도 안의 통일에 대한 오묘한 진리는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흠이 없는 인격을 이루게 하므로 (3~5)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완전한 통일을 가져올 수 있는 인격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사람의 인격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케 하기 위한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늘에 속한 것을 받게 하신 것이요,

  둘째는 흠이 없게 하는 동시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령한 것을 받아야만 될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에덴 동산의 아담 하와가 아무런 역사도 해보지 못하고 간교한 뱀에게 미혹을 받은 것을 보면 창조를 받을 때에 완전한 인격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지금 기독 신자들이 다 아담 하와같이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가장 간교한 마귀에게 속고 만다면 어찌 그리스도의 통일된 왕국을 이룰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것을 받고 흠이 없게 해주는 인격을 받으므로만 완전 통일된 이상적 국가를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받을 수 있는 그릇을 사람이 가졌다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하더라도 동물과 같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거룩하고 신령한 것을 주실 수가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신령하고 흠이 없는 인격을 이루어서 그들로 말미암아 통일된 왕국을 이루므로 영광을 받고자 하시는 것이다.

 

  2.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므로 (6~9)

  하나님께서 찬송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을 통하여 영원히 찬송을 받고자 하시므로 그 인격을 완전하게 창조하지 않으시고 거저 주는 은혜로 완전하게 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이다.

  첫째는 그리 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는 일이요,

  둘째는 그리 스도 안에서 지혜와 총명을 받는 일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죄를 자기 스스로 이길 수 없는 것이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사람이 만일 은혜로 완전하게 되지 않고 행함으로 완전하게 된다면 찬송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보다도 자기가 받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알게 해 줌으로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사람이 무엇 이나 다 알게 된다면 서로 자기가 안다고 교만해지기 때문에 거저 주는 지혜 총명을 받아 알게 하므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다. 거저 주는 은혜를 받는 것도 사람마다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고 택한 자라야 거저 주는 은혜가 믿어지고 거저 주는 지혜 총명의 역사를 받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3. 기업이 되게 하므로 (10~12)

  하나님께서는 기업을 이루는 것을 원하신다. 이 기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고 싶은 것을 다 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어떤 부모가 아무리 많은 재산이 있다 하여도 그것을 줄 수 있는 아들이 없다면 그것은 슬픔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다 풍성하시지만 이것 을 아무런 사람에게나 다 줄 수가 없고 합당한 사람에게만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합당한 사람에게 줄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기업이 될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 에서만 그 기업을 누릴 수 있는 인격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있는 것을 받되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을 받게되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 기업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4. 인치심을 받게 하므로 (13~14)

  사람이라는 것은 성신의 인치심을 받으므로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이루게 된다. 아무리 부모가 자식을 낳아 기른다 하여도 하나가 될 수 없고, 아무리 선생이 제자를 가르친다하여도 하나가 될 수 없고, 아무리 정치가가 정치를 한다하여도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성신의 인치심을 받게 될 때에 민족적 차별이 없이 통일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아무리 훌륭한 영웅이 되었다 하여도 자기 혼자 영웅이지 사람들을 자기와 같이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성신의 인을 받으므로만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을 이루도록 예정하시고 성부, 성자, 성신이 역사하실 때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죄 사함을 받고 성신을 받고 완전한 기업을 누리도록 하시므로 주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결 론

  통일된 가정, 통일된 교회, 통일된 나라, 통일된 세계가 이루어지므로만 인생의 가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지금 아무리 공산당이 공산 정치로써 세계를 통일할 꿈을 꾸고 있지만 이것은 말세에 사람을 까불어 보는 한 키는 될지언정 통일을 이룰 수는 없다.

 

그리스도 안의 통일 문제  

- 엡 1:3~14 -  

 

서 론  

완전한 것은 완전한 통일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통일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품안을 떠나서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욕망을 가질 적에 자기의 주권, 자기의 욕망을 채워 보려는 것 이상은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다. 마귀는 마귀의 욕망으로 세계를 통일하 려는 것이 붉은용의 역사이다. 그리스도의 요구에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을 이루려 는 것이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이다.

세계 정치적 양대 진영도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로,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로써의 통일을 꿈꾸는 것이 정치적 양대 세력으로써 욕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양대 정치가 통일을 이루어 서 평화로운 시대가 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다니엘 선지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꿈을 꿀 적에 종말에 양대 세력이 서로 철과 진흙같이 나누어서 합할 수 없는 난관 이 부딪힐 때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은 무엇으로써 될 것이냐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성서를 통하여 완전한 진리를 찾을 수 있다.   

1. 초인간적인 지혜와 총명이 임함으로 (8~9)  

인간 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알 수도 없고, 그 경륜을 따라서 행할 수도 없는 것이 인간 지혜다. 왜냐하면 피조물의 지혜가 창조주의 지혜와 서로 대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금일에 소위 유물론 정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볼 때 웃을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분명히 계시록 13장에 보면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준다는 것을 보면 마귀가 사람의 마음을 마취시키는 역사라고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지금은 통일의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그 비밀을 바로 가르치고 바로 믿고 바로 행하도록 한 것이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이다.   

2. 통일 된 기업이 되게 하는 일이다 (10~12)  

만일 어떤 사람이 목적을 정하고 일할 때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기업적인 본질이 아닌 것을 시작했다면은 이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통일이라는 것은 오메가를 이루는 것이니 시작에서부터 그 기업이 되는 일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은과 금으로 집을 지어야만 될 일인데 시작이 흙으로 빚어서 시작이 되었다면 위에 올라와 아무리 좋은 것을 쌓았다 하더라도 이것은 파괴를 이루는 행동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기초를 놓음 같다”고 했던 것이다. 우리는 통일을 목적했다면 통일된 기업을 상속할 수 있는 인격을 이루는 데서부터가 될 것이니 이것은 양심의 토대부터 시작이 되는 것이다.  

3. 확실 한 인침을 받은 증거가 있어야 된다 (13)  

우리는 인친 보증적인 증거가 없는 일을 가지고 하나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탈선된 행동이라고 보게 된다. 인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인을 말한다. 누구든지 마음에 성신의 인을 맞은 자면은 국경을 초월한 어느 민족이든지 자동적으로 하나 되고 있는 것이니 이것은 누가 꺾을 수는 없는 통일이다. 은혜 시대에는 성신의 인으로 통일된 교회를 이루었고 환난기 에는 하나님의 인을 맞는 역사로 통일된다는 것을 계7:2~3, 9:4을 보아 알 수 있다. 이것은 시대를 따라 역사하는 하나님의 인이다.

다시 말하면 종말의 인의 역사는 영과 육이 아울러 들림 받을 종들이 하나같이 사상, 정신, 말씀 통일에 무장을 갖추어 성신의 인으로 섰던 교회를 하나님의 인의 역사로 끝을 맺어 재앙의 날에 진노 심판을 면하고 새 시대를 정복하는 심판의 비밀을 통하여 일어나는 역사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비밀을 믿음으로 성신의 인을 맞게 되고 심판의 비밀인 예언의 말씀을 바로 믿고 증거하는 종들에게 하나님의 종말적인 역사가 임하여 환난과 재앙 중에서 원수를 무찌르고 나아가는 백마 탄 군대를 이루는 것이니 승리자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얻고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통일하는 하늘 권세와 땅의 권세를 받고 나가서 역사하는 권세의 역사다(계 11:3~6). 하나님은 시대를 따라 역사하시되 통일된 역사를 하심으로써 세계 통일의 왕국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독일무이하신 하나님의 종으로서 통일에 목적을 두고 역사하는 그 경륜과 뜻을 알려주는 대로 알게 되고 말하게 되고 역사하는대로 쓰여지는 사람이 된다면 통일은 종된 사람의 책임이 있다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들어 쓰는 일로써 세계통일을 이루게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자기가 통일해 보려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자동적으로 통일을 목적 한 하나님과 대적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그 뜻을 믿고 순종하는 데서만이 하나같이 움직일 뿐이다.

 

은혜로 되는 하나님의 섭리

- 엡 2:1~10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인간의 행함으로 되는 일이 아니요, 당신의 은혜로 되는 일을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간교한 마귀를 들어서 쓰시는 것은 인간의 행함으로 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큰사랑을 믿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서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로만 되게 하는 법을 세운 것이 하나님의 완전 역사이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증거한다.

 

  1. 허물과 죄로 죽은 자를 살려 주는 은혜 (1~5)

  인생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이다. 왜냐 하면 본질적으로 타락된 인간이기 때문이다 . 누구든지 죄를 짓는다는 것은 벌써 악령에게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행하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는 공중에 권세 잡은 마귀를 이길 자는 전혀 없다. 사람이 마귀를 이길 수 있 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게 한 것이 하나님의 무한 광대한 사랑의 법이라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자기 스스로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졌다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아무런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완전 역사라는 것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을 은혜로 구원해 주는 것인데, 이것을 하나님의 예정하신 섭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죄를 짓도록 하시는 것이 아니요 죄를 이길 수 없는 인간을 은혜로 구원하여 죄의 세력을 이기게 하는 것을 은혜의 역사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독생자의 거룩한 십자가의 의로 있게 하여 독생자를 통하여 완전한 나라를 이루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 는 것이다.

 

  2. 지극히 풍성한 은혜 (6~7)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죽은 영혼을 살려 주는데서 끝을 맺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와 같이 세세 영광을 누리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종들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세토록 왕권의 영광을 누리게 하자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을 은혜로 구원해 주는 동시에 얼마든지 은혜로 역사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대행자로 역사하도록 하시는 것은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더 받도록 해서 오는 여러 세대에 길이 길이 영광을 나타내게 하기 위한 목적이다. 누구든지 은혜로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같이 남도 은혜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많은 열매를 맺도록 풍성한 은혜를 나리시는 것이다.

 

  3. 선물로 주는 은혜 (8~10)

  선물이라는 것은 영원히 주는 보화이다. 우리가 은혜로 받은 것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요, 영원히 받은 자의 것이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지혜와 총명을 받으면 영원히 지혜 총명이 받은 자의 것이 되는 것이요, 능력과 권세를 받으면 영원히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있는 인격을 이루게 된다.

  예를 든다면 나뭇가지가 진액을 받아서 크면 그것이 작아지지 않고 큰 가지가 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은혜를 받은 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인격을 이루어 영원히 선물로 받은 은혜로 말미 암아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중생을 받은 자라도 은혜의 선물을 받은 분량에 따라서 그가 받을 영광의 차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체가 의를 행함으로써 인격이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자가 되므로 그 은혜 가운데서 행하게 된다.

 

 결 론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은 은혜를 받은 자를 통하여 열매를 맺게 될 때에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기술을 가진 자가 그 기술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기 전에는 가치를 발휘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에게 은혜를 주므로써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조건이 된다 .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만을 믿고 용기 있게 돌진할 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책임을 지시고 은혜 가운데서 우리를 다스리시므로 가장 복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비밀을 알려 주는 사명

- 엡 3:1~9 -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하실 일을 알려주지 않고는 행함이 없는 사랑의 신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아무리 죄를 지은 인간이라도 살길을 열어 주고 순종치 않을 때에는 순종하는 자만 구원하고 순종치 않는 자는 버려두는 것이 사랑과 공의가 겸전한 역사라고 본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자체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절망 속에 떨어진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 능히 할 수 있다는 비밀을 모든 인류에게 알려주는 것이 어느 종교보다도 특별한 사명이 된다.

  만일 기독교 자체가 하나님의 비밀을 분명히 알려주는 일을 못한다면 아무런 필요가 없는 교회가 될 것 이다. 이 비밀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선지들에게 묵시로 보여준 비밀을 인간이 알 수 없으므로 알도록 해 주는데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하여 선지서에 있는 비밀이 이루어진 것을 알려주는 사명이 사도적인 사명이라는 것이다.

  이제 비밀을 알려주는 사명자의 할 일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순교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사도 바울은 이 비밀을 이방인에게 알려주어야만 이방사람이 살 것을 알 때에 과거에는 아무리 원수가 되었던 나라라도 이제는 내가 순교생활을 하면서 이 비밀을 그들에게 알려 주겠다는 불타는 마음이 일어날 때에 나는 빚진 자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롬1:14).

  왜냐하면 알려주면 그들이 살 것이고 내가 알려주지 않으면 저들은 죽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밤낮으로 쉬지 않고 비밀을 알려주는 일에 전력을 두었던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비밀을 알고도 자기가 괴롭다고 해서 그것을 남에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죄가 될 것이다.

 

  2. 문서 운동이 있어야 한다 (3~5)

  가장 필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기록한 편지라고 본다. 이것을 기록하지 않았다면 이 기독교는 완전한 비밀을 알려 주는 일에 열매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자기가 깨달은 것을 기록해서 읽어보고 알 수 있도록 한 것이 사도 바울의 큰 열매를 가져오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입으로 말한다 해도 합법적인 변론으로 기록된 문서가 없다면 이것은 법적인 근거가 될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에게 묵시로 보여 주면서 받아 기록하도록 한 것이니 이들은 무슨 뜻인지 분명히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입에서 말씀이 오는 것을 받아서 기록한 것뿐이다(사34:16).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쓴 선지서를 볼 때, 십자가의 비밀이라는 도리를 분명히 깨닫게 되어 언제나 편지를 쓸 때에 구약의 성경을 표준 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일에 대한 비밀의 내막을 세밀히 붓을 들어 쓴 것은 바울 사도가 계시로 깨달아 쓴 글이다.

  그러므로 계시라는 것은 앞으로 될 일을 알게 하기 위한 계시도 있고, 이루어진 십자가의 비밀을 밝히 알려 주는 비밀도 있으니, 계시록은 마땅히 될 일을 보여준 계시요, 사도 바울의 서신은 된 일에 대하여 십자가의 의는 무엇이라는 것을 계시로 분명히 깨닫는 대로 쓴 것이 그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글이 되었던 것이다.

 

  3. 능력으로 역사하는 자이다 (6~7)

  아무리 분명히 알았다 하여도 능력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어디로 가든지 능력의 역사가 같이 하므로 큰 일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능력이라는 것은 인간 자력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아무리 할 수 없는 난관이 부딪혀 와도 비밀을 알려 주는 일에 대하여 순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합법적인 진리를 바로 알려줄 적에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같이 했던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바울 서신의 쓴 비밀을 전한다 해도 가감한다던가 또는 그 말씀을 이용하는 정도의 사람은 바울 사도에게 역사하던 능력이 같이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능력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데는 하나님께서 역사할 수 있는 데까지 사람의 할 일을 해야만 되는 것이니 일꾼이 되는 자격은 알았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고 능력이 와서 자신이 역사할 때 에 비밀을 알려줄 수 있는 전도자의 자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밀을 알려주는 사명자는 하나님과의 합치가 되는 동시에 인간을 대할 때에 남을 살려 준다는 데만 전력을 두는 대접이 있을 적에 주님의 능력의 신은 항상 같이 하므로 더 크게 역사가 있게 될 것이다.

 

  결 론

  비밀을 알려 주는 종은 주님의 대행자이니 주님께서 그 종의 수고를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친히 갚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매라는 것은 주님께서 친히 책임지시고 응답해 주실 한계까지 이르는 종이 될 때에 큰 열매가 나타나게 된다.

 

대강 기록한 바울의 편지

- 엡 3:1~9 -

 

  우리는 성경을 읽을 적에 대강 기록한 책도 있고 빠짐이 없이 기록한 책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이다. 사34:16을 보면 여호와의 책은 하나도 빠진 것이 없다고 말씀했다. 그러나 바울의 편지엔 대강 기록했다고 했으니 여기에 대하여 차이점을 알고 우리는 이 말씀을 증거해야만 될 것이다. 이제 대강 기록한 바울의 편지와 빠짐이 없는 여호와의 책과의 연관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대강 기록한 편지의 목적 (1~4)

  바울 사도가 편지를 쓴 것은, 성경을 보고, 계시의 역사로 깨달아진 것을 기록한 목적은 무엇이냐? 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때에 바울은 율법주의자와 변론하기 위해서 편지를 쓰게 되었다.

  왜냐하면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을 염병 같은 이단이라고 하며 이단 중에 괴수라고 정죄를 하고, 바울이 교회를 세운 곳마다 율법주의자들이 따라가서 파괴 운동을 할 때에, 바울은 급하게 대강 기록해서 보낸 것이 그의 서신인 데는, 율법과 은혜를 잘 구분해서 율법시대에 된 일과 은혜 시대에 되는 일은 시대가 다르다는 것을 목적 두고 말할 때에, 율법주의자들에게 성도들이 미혹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을 목적하고, 또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 성령의 법을 따르는 성도 생활의 성신 도리와 생활 도리를 쓰게 되었고,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주님 다시 올적에 받을 상급을 말했던 것이다.

  이 때는 대강 기록한 편지로라도 그 때에 오는 혼란을 이길 수 있는 형편이었다.

 

  2. 기록한 사명적인 한계 (5~7)

  사도 바울은 내 사명은 십자가 외에는 말하지 않는다는 한계를 말했다. 이것이 자기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기독교 종말론을 중심한 편지가 아니고 십자가의 도를 바로 전하는 것을 목적하여 십자가 도를 믿으므로 받는 구원의 확실성과 구원받은 성도에게 성신의 역사에 대한 확정적인 것을 자기 신앙의 생활의 체험에 의하여 글을 썼던 것이며, 모든 성도로 하여금 자기가 받은 십자가의 비밀을 바로 증거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성신의 역사를 혼선 시키지 않고 생활에 부덕을 끼치지 않기 위한 범위 안에서 이 글을 기록한 것이다.

 

  3. 활동의 범위 (8~9)

  그는 문서 운동을 할 때에 이방을 중심하여 어떠하든지 이방 사람들에게 풍성한 은혜가 있을 것을 기록한 서신은 금일에 이방의 모든 민족들에게 다 해당되는 글이 되었던 것이다. 바울의 편지 문서 운동이 아니었던들 우리 이방은 사망의 그늘 밑에서 생명의 빛 되는 복음을 받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이 붓을 들어서 눈물겹게 기록한 책은 오늘 우리 마음속에 산 체 험이 되는 복음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확정할 일이다.

  이제 은혜를 받은 성도들은 대강 기록한 바울 서신으로서 기독교의 종말에 끝을 맺는 것이 아니고, 계10:7과 같이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외칠 때는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다고 계시를 보았다.

  그러므로 요한 사도는 계5:1에 안팎에 기록한 책을 만민의 죄를 위하여 죽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맡아서 떼는 광경을 계시를 보고 기록한 것이 ‘요한 계시록’ 이란 것이다. 이방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가 되는 바울의 서신은 세계 인류에게 빛이 되는 서신이요,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록은 환란과 재앙의 날에 성도들이 읽고 듣고 지켜야 될 예언의 말씀인데, 이 계시록은 사도 바울이 대강 기록하고 남은 것을 모두 전해야 될 말씀인데, 이것은 변화성도들이 전하는 복음이 된다.

  그러므로 20 세기 말기를 당하여서 붉은 세력이 세계를 침투하고 협상주의 거짓 선지가 교회를 짓밟고 들어오는 이 때에 우리들은 성경을 대강 기록한 바울의 서신으로는 막을 수 없고 계시록과 선지서를 밝히 빠짐없이 알아서 증거해야만 될 때가 왔다고 본다.

 

 결 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은 구약 때는 언약을 세우는 하나님께 묵시를 받아 빠짐없이 기록했고, 은혜시대에는 사도들이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선지서에서 대강 기록했고, 마지막 환란과 재앙이 올 때는 변화성도들이 하나님의 비밀이 옛날 선지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어진다는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만 된다고 본다.

 

믿음 으로 말미암아 담대할 일

- 엡 3:11~13 -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실 때에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을 믿으므로만 살 수 있게 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사랑을 가지신 동시에 그 사랑을 완전히 믿는 자에게만 모든 것을 준다는 것이 법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 자체에 있는 것인데, 이것을 인생들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이다. 하나님께서 이 사랑을 그대로 다 믿지를 못하는 인생들에게 믿음을 주어서 믿게 하시 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산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제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을 얻게 되는 일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예정하신 뜻대로 역사 하시므로 (11)

  우리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을 믿을 때에 담대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을 예정대로 할 수 없는 미약한 인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소불능의 신으로서 예정하신 뜻대로 행하시는 것이니, 그것을 폐할 자는 전혀 없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무런 예정 없이 행하는 신이라면 우리는 담력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예정대로 될 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대로 이루어진 것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면 예정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은 기독교 종말관이다. 예정대로 오신 예수를 믿는 우리는 예정대로 오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은 이 시국에 되어지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섭리가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성경에서 분명히 믿어야 한다. 악의 세력이 움직이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에 따라 되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악의 세력을 이긴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을 들어 쓰시는 것은 당신의 자녀를 더 유익하도록 하자는 예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바로 깨달아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의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정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예정을 담대히 믿을 때에 예정대로 이루어지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2.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가게 되므로 (1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자에게는 그 말씀대로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자는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권리가 있다. 예를 든다면 계약서를 가진 사람은 무엇을 주겠다고 계약서를 쓴 사람 앞에 당당히 나아가서 받을 권리가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주겠다고 언약을 세우셨으므로, 우리가 받고자 하여 당당히 나아갈 때에 크게 기뻐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고 싶은 사랑으로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게 되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자는 야곱이 얍복 강에서 하나님과 씨름을 하듯이 믿음의 담대함을 가지고 부르짖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담대함을 가진 사람을 능력 있게 들어 쓰시는 것 이다.

 

  3. 환란이 영광이 되므로 (13)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환란을 사랑하는 자에게 통과시키는 것은 영광을 주기 위한 모략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란을 무서워하지 않고 담대히 나가야만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환란이 없으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환란이 있을 때에 담대히 나가는 자를 통하여 나타나게 된다. 왜냐하면 세세 왕권의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인격은 환란 가운데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영광이라는 것은 환란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영광이라는 자체는 마귀를 이기는 자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앞에 놓고 자기가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만일 자기 앞에 환란이 없도록 해 달라는 기도를 하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리고 환란을 이기고 나가기 위하여 기도 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는 사람이라고 본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담대함을 가지고 원망할 일에 원망치 않고 낙심할 일에 낙심치 않고, 두려워 할 일에 두려워하지 않고 나가는 사람에게 큰 역사를 주시기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믿고 담대히 나가는 자를 가장 옳은 사람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지식 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

- 엡 3:14~21 -

 

  인생이라는 것은 사랑이 없이 살 수 없는 것이니 그 사랑을 바로 가질 적에 바로 살 수 있고 사랑을 바로 가지지 못할 때에 탈선된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이라는 것은 완전한 지식에 넘치는 사랑이 있어야만 그 사랑을 통하여 완전 인격, 완전 생활, 완전 열매를 이루어 완전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지식이 넘치는 사랑의 역사를 말하고자 한다.

 

  1. 사랑 가운데 뿌리를 박게 되는 역사이다 (16~17)

  참된 사랑이라는 것은 깊이 뿌리를 박게 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거짓된 사랑이라는 것은 잠깐 동안에는 도움을 주는 것 같으나 머지 않아 도움을 받는 것보다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는 날이 갈수록 뿌리를 깊이 박게 된다. 왜냐하면 점점 그 사랑 속에 숨어 있는 비밀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나무가 보이지 않는 깊은 땅 속에서 질소, 인산, 가리를 흡수하기 위하여 뿌리를 박는 일을 소리 없이 하므로 진액을 풍성히 받게 되어 많은 열매를 맺는 큰 나무가 되는 예와 같다.

  기독교 신앙 생활의 열매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은 체험을 가지게 될 때에 아무런 난관이 와도 그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점점 자라나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규칙이나 도덕적 행위를 초월하여 하나님만 아는 비밀 속에서 소곤거리는 기도와 묵상하는 속에서 진리가 깊이 깨달아지는 체험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성신의 역사로 되는 것이다.

 

  2. 지식에 넘치는 사랑을 하나같이 깨닫는 역사 (18)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약속이니 부분적인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같이 뭉쳐질 수가 도저히 없고 그 사랑의 약속인 진리의 말씀을 알게 될 때에 비로소 완전한 단체를 이루게 된다. 지식 중에 가장 큰 지식은 하나님의 사랑의 비밀을 아는 자리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리 없이 역사하지 않고 법이 없이는 하나님의 사랑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예정하신 진리의 법칙에 의하여 역사하 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인 말씀이 얼마나 큰 비밀이 그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써만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게 되고 완전한 단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3. 충만케 되는 역사 (19)

  충만이라는 것은 완전을 뜻한 것인데 하나님의 사랑에는 충만이라는 것이 항상 같이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떠한 종이 충만이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범위를 모르는 자리에 있다고 본다. 제일 넓고 , 길고, 높고, 깊은 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아무리 과학자가 연구하여도 이 사랑의 범위를 알 수가 없고 이것을 아는 것은 직접 하나님과 교통을 받는데서 알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달걀 속에 있는 병아리가 뚫고 나오기 전에는 밝은 세계를 모르는 것과 같이 사람의 심령 상태가 죄악이라는 자체를 벗어날 때에 얼마든지 광명한 세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눈이 있어도 그 눈을 가리는 장애물이 있다면 그 눈동자는 아무런 소용이 없듯이 사람의 심령이라는 것은 죄로 가리워 놓으면 아무런 활동을 하지 못하는 심령이 되고 만다.

  인간 자체는 질그릇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통하여 충만한 것이 올 때에 우리 인간은 거기에서 열매를 맺는 인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전부를 당신의 사랑 속 에서 인간에게 주자는 것이 자연을 창조한 목적이니 그 사랑을 바로 아는 자에게 충만이라는 것이 오는 것이다.

 

  4. 능력이 교회 안에서 역사함 (20~21)

  하나님의 사랑은 이론이 아니요 능력이 같이 하는 것이다. 이 능력이라는 것은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가르쳐 주는 것이 사명이요, 하나님은 그 교회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이 영광이 된다. 능력이라는 것은 사랑을 통하여서 인간에게 오게 되고 사람은 그 사랑 속에서 능력을 힘입어 완전에 도달하게 된다.

 

 결 론

  사랑은 완전 지식이 있어야 하고 사랑은 완전한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 밖에 없는 것이다.

 

자라나는 데서 이루어지는 인격

- 엡 4:13~16 -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향하여 역사하실 때에 단번에 완전한 인격을 이루어 놓는 것이 아니요, 날마다 자라나는데서 완전한 인격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완전한 인격을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이루어지게 하는데 있어서는 다음과 같은 역사가 있다.

 

  1. 하나가 되게 하는 역사 (13)

  하나님께서 완전한 인격이 이루어지게 역사 하시는데 있어서는 믿는 것이나 아는 것이 하나가 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오늘에 기독교가 믿음이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한다든지 아는 일에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역사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역사라는 것은 하나같이 믿음을 선물로 주는 동시에 하나같이 진리를 바로 알도록끔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는 것이요, 지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섭리를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지식은 나눌 수 없다. 왜냐하면 분명히 알게 되는 일이나 믿게 되 는 일은 전부가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완전한 신앙과 지식을 가지게 될 때에 진리대로 이루어지는 역사를 받으므로 그리스도의 지체 된 인격이 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 역사를 받아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것으로만 하나를 이루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생 자체가 완전 해지게 한 것이 아니요, 독생자를 믿으므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모방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목적하시는 것이다.

 

  2. 흔들리지 않게 하는 역사 (14)

  그리스도의 역사라는 것은 자기가 완전히 승리하시고 자기와 같이 승리할 수 있는 인격을 이루도록 하시는 것이다. 언제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흔들리지 않고 자라나도록 하시는 데 있어서는 절대적인 보호가 필요하다. 예를 든다면 농장에서 일을 하는 농민이 언제나 농작물이 변질되지 않고 심은 그대로 하나같이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하여 애쓰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하나를 이루게 하시는데 있어서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한 단체가 이루 어지도록 하시는 것이다.

 

  3.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게 하는 역사 (15)

  그리스도의 역사는 언제나 사람을 통하여 하시되 모든 일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 안에서 날마다 자라나 영원한 왕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분량대로 역사하도록 하시는 것이니,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가 되기까 지가 자라나게 하는 한계이다. 완전한 인격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것이니, 그리스도의 역사를 순종할 때에 그 역사를 힘입어 날마다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의 모든 일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역사를 하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4. 분량대로 되어지는 역사 (16)

  그리스도의 역사가 우리에게 오되 장성의 분량대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것도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되 은혜를 받은 분량대로 완전한 열매가 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결 론

  가장 귀한 것은 그리스도의 역사가 우리에게 오는 일이요,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역사 아래서 자라나는 대로 인격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고 항상 그리스도와 연락하는 일이 있게 될 때에 자아의 인격이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다.

 

성도의 교제적인 생활  

- 엡 4:25~32 -  

 

서 론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된 성도의 생활에 있어서 교제적인 생활이 있으므로 구속의 날까지 교회는 활동하는 동시에 승리를 이루는 열매 있는 성도가 될 것이다. 성도는 독립적인 생활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나무의 한 가지가 독립할 수 없고, 몸의 지체의 한 부분이 독립할 수가 없는 것과 같은 교제적인 인연을 가진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 도 바울은 아시아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썼던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성도의 교제적인 생활이냐 하는데 대하여 본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1. 참된 것을 말하여야 된다 (25)  

만일 우리 성도가 성도를 속인다는 것은 자기 손으로 자기 몸을 해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도의 교제는 어떤 물질이나 또는 사업적인 것에 국한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한 양심적인 교제니 참이라는 것을 떠나서는 안 될 것이다.  

2. 분을 내어도 해지도록 품지 말 것 (26)  

우리는 신이 아니요, 사람이니만큼 혹 감정 날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분을 오래 품고 있을 때 성도의 교제를 깨지게 하는 마귀는 틈을 타는 것이다. 무엇이나 우리 성도의 목적은 서로 합심해서 마귀와 싸워 이기라는 것을 목적한 것이니 이해를 막론하고 서로 오해를 풀고 속히 합심되기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성도의 교제는 마귀에게 파탄을 당할 것이다.  

3. 손으 로 수고하는 일 (28)  

우리는 서로 수고하는 봉사 없이 성도의 교제는 있을 수가 없다. 만일 어떤 신자가 자기는 일하지 않고 형제의 덕을 보려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지체된 정신을 떠났다고 보게 된다. 우리는 천국에 보물을 쌓아 두고 생활하는 정신에서 각자가 노력하며 남을 돕고자 하는 정신에서 형제의 교제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4. 서로 덕을 세우기 위하여 말할 것 (29)  

우리는 말할 때에 성도의 위신을 세워 주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 자기를 위한 것이다. 만일 형제에 게 누명을 씌우는 말을 하기를 좋아한다면 정신병자가 자기 몸을 망치는 것과 같은 행동이 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형제에게 은혜가 되도록 해보려는 목적 밑에서 말하는 것이 있어 야만 될 것이다.  

5. 성신을 근심케 말 것 (30)  

성도의 교제란 성령을 통해서 영적으로 되는 교제니 아무리 서로 육적으로는 친분이 있게 나가도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일이 있을 때는 성도적인 영적 교제는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육에 속한 교제가 아니요, 성령에 속한 교제이니 성령을 근심케 하는 자와 사귀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6. 서로 불쌍히 보고 용서해 주는 것이다 (32)  

예를 들면 어느 지체가 괴로울 때 그것 하나를 위하여 온 몸이 고통을 당하게 될 때 전력을 다하여 그 지체의 괴롭게 하는 것을 없애 보려고 하는 것이 지체된 자의 자동적인 행동이다. 이와 같이 어떤 형제가 죄를 짓고 괴로워 할 때에 불쌍히 보고 서로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 교제를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완전한 몸이 없이 싸울 수도 없고 완전한 몸 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성도의 지체적인 완전 교제 없이 교회에 들어오는 마귀를 이길 수 없다. 또는 목적지가 되는 새 시대를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니 성도의 교제적인 생활로 이루어진 교제는 신령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거룩 한 믿음으로 이룬 가정

- 엡 5:32~33, 6:1~4 -

 

  가정은 인류 역사에 시작이 되는 동시에 끝도 가정으로 맺게 된다. 타락도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고, 향상도 가정에서부터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가정을 이루어야 축복을 받 게 된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할 일 (6:1~3)

  오늘날 교회가 정상적으로 발전을 하려면 가정에서부터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철저해야만 된다. 오늘날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사람들이 부모에게 너무 무관심하게 대하는 일이 있는데, 이것은 바리새인의 행동이 될 우려가 있다. 바리새인들이 부모보다도 하나님을 더 공경한다 는 미명하에서 부모님께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그 부모를 공경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을 주님께서 책망하셨다(마15:4~6).

  만일 하나님 께서 우리에게 부모를 공경하지 말고, 당신만 공경하라고 하신다면 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법으로 세우신 하나님께서 그 법을 어기고 자기를 공경하라고 하신다면 불의와 동참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한다.

  첫째 : 주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공경하여야 된다는 것이며,

  둘째 : 하나님의 축복을 믿는 마음으로 부모를 공경하여야 된다는 것이며,

  셋째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공경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님을 경외하지 않고 부모만 공경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부모에게 불행을 주는 일이요, 축복을 믿지 않고 억지로 도덕적인 행동으로 부모를 공경한다 하여도 그 부모에게 불행을 주는 일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 없이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하여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도 부모에게 불행을 주는 일이다.

  왜냐하면 주님을 경외하지 않거나 축복을 믿지 않거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그 부모가 우상이 될 우려가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 부모에게 축복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축복을 믿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부모를 공경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축복을 내리시므로 부모도 자녀들도 다 같이 복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우리 나라가 남의 나라보다도 부모에게 효성하는 것을 극도로 장려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보다도 축복을 받지 못한 것은 부모를 우상화시켜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혼백을 접어놓고 거기에 제사하며, 분묘에 제사하면서도 하나님을 공경치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도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야 될 것이요, 자녀도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야 될 것이니,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 려는 생각으로 부모를 공경하지 말고, 하나님께 보이려는 중심에서 부모를 공경하여야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어떤 가정에 부모가 죄되는 일을 하는데 자녀가 그 일을 순종한다면 그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일 이 아니요, 오히려 망하게 하는 일이며, 부모가 옳은 일을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자녀가 그 일에 순종치 않는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식이니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이다.

  부모를 공경 한다는 것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부모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일이 있어야 한다.

  둘째 : 부모님의 수고한 일이 헛되지 않도록 열매를 완전히 맺는 일을 하여야 한다.

  셋째 : 부모님을 봉양해 드리는 일이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주안에서 행하는 자는 땅에서 복을 누리며 사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2. 주의 교 양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할 일 (6:4)

  거룩한 부모 가 되려면 자기를 위하여 자녀를 교훈한다는 것보다도 주를 위하여 자녀를 교훈하되 주의 축복을 받도록 지도하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로 자녀에게 타격을 주는 일을 하지 않아야만 거룩한 부모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부모에게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이 자녀에게 항상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녀가 하는 일을 억압하지 말고, 자녀에게 좋은 소망을 보여 주면서 그 소망에 대하여 협력해 주는 것으로 자녀를 가르쳐야 된다. 예를 든다면 농부가 연한 순이 상하지 않도록 곡식을 잘 가꾸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부모님이 실천 생활에서 주의 은총을 받으며, 자녀에게 교훈할 때에 자녀들은 부모님이 받고 있는 은총을 자기도 받아 보겠다는 생각이 나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님이 하시는 일을 자녀들이 존경하지 못하고 무시할 정도라면 자녀를 가르칠 만한 자격이 없는 부모가 되고 말 것이니, 언제나 자녀들이 부모에게 싫증나는 일이 없이 항상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끔 해야 한다. 이 사모라는 것은 부모의 덕을 보겠다는 것이 아니요, 부모의 인격과 사상과 정신에 감동을 받고 반드시 부모를 따라가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자녀에게 부모님은 자기보다도 더욱 훌륭한 분이라는 것을 인식하게끔 되어야 한다.

  오늘날 주의 종들을 자녀들이 볼 때에 타격을 받을 행동이 가정에서부터 있게되므로 소위 주의 종들의 자녀들이 믿음을 얻지 못하고 세상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는 영향이 많다. 자녀들이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우리 부모에게 역사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때에 하나님이 없다는 악 감을 가지게 되는 폐단이 있게 되는 것이다.

 

  3. 사랑과 경외가 있는 부부 생활 (5:32~33)

  사랑이 있더라도 경외가 없으면 거룩한 부부라 할 수 없으며, 경외가 있고 사랑이 없다고 해도 거룩한 부부라 할 수 없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할 것이요, 아내는 남편을 경 외하여야 할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인간의 애정인 사랑도 있고, 주님께로부터 오는 거룩한 사랑도 있다. 그런데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되 한 애정에 불과한 사랑이라는 것은 아내에 게 경외심을 주는 것보다도 방랑한 마음이 생기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거룩한 믿음의 가정에서는 죄가 없는 거룩한 생활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사랑을 주되 주님께서 거룩한 사랑 으로 교회를 다스리듯 해야 될 것이며, 그 사랑 안에서 아내는 남편을 주를 경외하듯 해야 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연애 적인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는 속화된 생활에서 시작된 것이니, 이것은 거룩한 가정을 이루 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거룩한 믿음의 부부는 죄를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합심하여 기 도하는 생활에서 사랑하기도 하고, 경외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결 론

  거룩한 믿음 이라는 것은 완전한 인격을 이룬 자에게 있는데, 이것이 있음으로만 거룩한 부부가 되며, 거룩한 자녀가 되며, 거룩한 부모가 된다. 그러므로 이렇게 이루어진 가정을 거룩한 믿음의 가정이라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