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환난에서 기쁨으로 받는 복음

데살로니가 후서

불법자의 나타남과 주님의 나타날 일

디모데 전서

1. 능하게 하신 예수께 감사할 일( 딤전 1 : 12 - 17 )

2. 하나님의 소원과 종의 할 일( 딤전 1 : 18 - 19, 2 : 1 - 7 )

3. 기도인과 정치 문제( 딤전 2 : 1 - 4 )

4. 기도 생활( 딤전 2 : 1 - 7 )

5. 우리의 스승 된 바울( 딤전 2 : 5 - 10 )

6.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차이점( 딤전 2 : 8 - 15 )

7. 사명자의 남녀 구별( 딤전 2 : 8 - 15 )

8. 사명자의 사생활( 딤전 3 : 1 - 7 )

9.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는 종이 되자( 딤전 3 : 8 - 13 )

10. 사명자의 목회 생활( 딤전 3 : 14 - 16, 4 : 6 - 16 )

11. 연습과 유익( 딤전 4 : 6 - 16 )

디도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 역사( 딛 3 : 4 - 8 )

히브리서

1.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는 진리( 히 2 : 9 - 18 )

2.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 히 7 : 18 - 25 )

3.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 히 10 : 9 - 18 )

4.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 일( 히 12 : 1 - 14 )

5. 참된 제사가 있는 생활( 히 13 : 12 - 17 )

 

환난에서 기쁨으로 받는 복음

( 살전 1 : 2 - 7 )

 

  기독교의 복음이라는 것은 환란을 통과한 십자가 복음인 동시에 환란 가운데서 목숨을 바치고 전하는 동시에 받는 자로 환란에서 기쁨으로 받는 복음이다. 복음이라는 자체는 인간의 힘을 초월한 신의 역사로 되어지는 일을 복음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할 것을 선지들에게 묵시의 예언으로 기록한 데로 이루어지는 역사이니 사람이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서 사람을 들어서 사람을 찾도록 하는 복음이라고 본다.

  이제 환란에서 기쁨으로 받는 복음 운동에 대한 일을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항상 감사 기도하는 일이다 (2~3)

  우리의 기도라는 것은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올 때에 여기에서 믿고, 역사하고, 사랑하고, 수고하는 생활에서 서로 참고 서로 기억하는 마음에서 서로 서로 원망이 없이 서로 불쌍히 보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항상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성도의 교통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도라는 것은 어려운 일을 극복하는 중에서 감사함으로 드리는 기도라야 그 기도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가 될 것이다. 어느 종이나 아무리 어려움이 와도 감사함으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참된 복음을 위한 종이라고 볼 수 있다.

 

  2. 택한 자를 찾기 위한 복음의 역사 (4~5)

  복음을 전하는 역사라는 것은 아무리 어려움이 와도 택한 자를 찾기 위한 하나님께서 성신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문이 열려지고, 또는 택한 자가 아무리 어려움이 와도 복음을 받아 믿게 되는 것이다. 복음은 인간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마귀의 시험에서 능력으로 택한 자를 구원해 내는 것을 목적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어디를 가나 환란을 당하게 될 때에 역사가 일어나서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3. 주를 본받는 자가 되는 일 (6)

  누구든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가는 생활이 아니라면 기쁨으로 복음을 받을 수도 없고, 또는 전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도덕을 초월한 능력의 역사로서 그 생명을 구원해 주는 일이므로 언제나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도 환경이 어지러운 가운데서 복음을 받으므로 그 환경을 벗어나는 역사를 생명의 종교가 되는 복음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4. 믿는 자에게 본이 되는 일 (7)

  하나님께서 환란 가운데 기쁨으로 복음을 받음으로써 교회를 서게 한 것은 모든 신자에게 표본이 되게 하는 역사로 하게 된다. 기독교가 만일 환란에서 역사를 못하고 쓰러진 기독교라면 우리는 도저히 앞으로 오는 환란을 이길 수 없을 것이로되 환란에서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서 세운 교회이므로 앞으로 환란 가운에서 기쁨으로 승리하고 새 시대를 정복하게 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이 계신 동시에 그 사랑을 중심하여 인생에게 역사하는 것을 복음 역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환란이 와도 기쁨으로 복음을 받을 수 있도록 역사해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상급을 받고, 복음을 받은 자로 큰 축복을 받는 동시에 완전한 신앙에 들어가도록 역사하는 것을 기독교의 초인간적인 역사라는 것이다.

 

 

 

불법자의 나타날 일과 주님의 나타날 일

( 살후 2 : 1 - 12 )

 

서 론  

그리스도께서 메시야로 나타날 때도 불법적인 교권의 세력이 극도로 강성하여 참 성도를 탄압할 때 나타났던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다시 공중에 나타날 때도 불법적인 거짓 선지의 세력이 노골화하여 자기의 숨겼던 비밀을 만방 앞에 공포하고 개시할 때 주님은 홀연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주 재림을 고대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절대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는 일이 있기 전에는 주님이 오지 않는다고 단언적으로 말했던 것이다.

이제 불법의 사람이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대하여 본문을 보아서 알 수가 있다.  

1. 배도자의 뒤를 따라 나온다 (2~3)  

이 배도란 이미 세워진 교회를 황폐화시키는 정책을 말한 것이다. 단11:30~31에 다니엘은 종말의 환난은 북방과 남방으로 대립되는 것을 말할 때 북방 세력은 하나님 말씀을 배반하는 자를 중히 여기고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한다고 했다. 이 배도는 과거에도 개인적인 행동으로는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는 세계제왕이 배도한 일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 배도라는 것은 세계적인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북방세력을 말한 것이다.

즉 북방의 적그리스도의 정책을 말한다. 이렇게 배도적인 세력이 세계적인 위협을 쥐고 나올 때 그 배도자의 뒤를 따라 나오는 거짓 선지를 불법자라 하는 것이다. 불법이란 마7:21, 마24:11~12의 성경을 보면 “주여 주여” 하면서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 날까지는 기독교가 말씀에 탈선된 자를 출교, 책벌 등의 강한 치리가 있으므로 불법의 비밀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것이 노골적으로 나타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 재림이 임박해서는 이것이 세계의 교권을 쥐고 불법적으로 노골화시켜 만민 앞에 공개시키고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을 현재 ‘새 신앙 고백서’ 라고 말할 수도 있다. 동정녀 잉태설과 심판을 빼고 나오는 이 고백서는 불법이 아닐 수 없다. 즉 알파와 오메가를 빼놓은 불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성신 잉태와 그리스도의 강림의 심판을 뺀다면 메시야도 재림의 주도 부인하는 불법이다. 이것을 강단에서 세운다는 것은 미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2. 성전에서 나타난다 (4)  

여기에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한다는 것은 인본주의적 사상을 말한 것이다. 즉 자칭 유대인이다(계3:9). 동정녀 잉태설을 부인하고 재림을 부인하는 신앙고백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니 자칭 유대인인 동시에 가증한 물건이라고 보게 된다. 자기의 중심에 맞는 것을 믿는다면 자기를 믿는 신앙이니 하나님은 참되시다 하는 인을 친 자가 아니고는 다 불법이라고 볼 수 있다(요3:33).  

3. 하나님께서 허락하므로 나타났다 (5~8)  

하나님은 왜 불법적인 신앙고백서를 내놓게 하느냐 할 때 이제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이 때라는 것은 주님이 나타날 때이다. 이 때는 전 3년반기이니 말세증인이 나와야 할 때다. 왜냐하면 권세 받은 증인이 나오지 않고는 이 세력을 막을 자가 없다는 것이다.

4. 능력과 기적과 표적으로 나타난다 (9)  

하나님은 사단을 허락해서 능력도 기적도 표적도 행하도록 허락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즉 예언의 말씀을 바로 믿고 다림줄을 쥔 종에게 천상 천하의 권세를 맡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 하와를 미혹해 보라고 사단을 허락한 것같이 말세에도 말씀의 칼을 든 종만 골라 세우기 위하여 사단의 능력과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는 것이다.  

5. 속이는 일로 나타난다 (10)  

이것은 누가 진리를 사랑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을 시험하기 위한 방법이다. 누구든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는 사람은 다 속도록 만드는 심판이다(사66:4). 예언의 말씀을 듣고도 가하든지 감하든지 하면 재앙은 받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말세 진리를 가감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거짓을 믿도록 하겠다는 것이다(11). 다시 말하면 이것은 영적으로 오는 재앙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 론  

주님이 나타날 시기에는 이 말, 저 말 듣지 말고, 기독교의 불법적인 행동이 교권을 가지고 나오는 때를 주님 나타날 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니 처음에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과를 주겠다는 목적에서 간교한 뱀을 허락한 것같이 말세의 성도들에게 죽지 않고 살아서 생명과를 먹을 수 있는 축복을 주기 위하여 다시 마귀를 극도로 간교하게 속이도록 허락하는 것이니 이 때는 말씀의 칼을 든 자 외에는 다 하와 같은 혼미를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종말에는 예언대로 심판하는 것이니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느냐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라도 이 때 진리를 사수하지 않는 자라면 다 미혹을 받게 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미혹을 시키겠다고 말씀했으니 이 말씀을 예언하신 하나님은 말세 진리에 혼선되는 자를 미혹을 안 시켜도 심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가 다시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 한 것도 이러한 때를 두고 말한 것이다.

 

 

디모데 전서

 

능하게 하신 예수께 감사할 일

( 딤전 1 : 12 - 17 )

 

  기독교가 세계를 통일할 역사는 아무리 기독교를 박해하던 사람이라도 그리스도는 버리지 않고, 그 사람을 불러 능하게 만들어서 그리스도의 정병으로 피 흘리기까지 싸우도록 하는 것이 있으므로 아무리 원수가 많은 세상에서도 대 종교를 이룬 것이다. 생명의 종교라는 것은 율법과 도덕을 초월하여 사람을 능하게 만들어서 역사하게 하는 것이니 능하게 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충성되이 보시므로 (12)

  주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것이니 사도 바울이 아무리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람의 하나이었으나 주님이 보실 때에 충성된 사람인 것을 아시고 불렀던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완전한 사람이 없고 다 죄인이지만 주께서 보실 때에 충성되이 나가려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깨닫게 해주시고 깨끗하게 해 주시고 지혜롭게 하시되 모든 일을 능하게 하도록 주님은 역사를 나리어서 쓰시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 보시기에 충성이라는 것은 조금도 외식이 없고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딤후1:3). 바울이 아무리 기독교를 반대하고 나왔지만, 바리새교인 중에도 외식하는 자가 아니요, 정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다. 누구든지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알지를 못하고 실수하고 넘어진다 하여도 주님은 그 사람을 찾아서 다시는 넘어지지 않도록 능하게 들어 쓰시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할 때에 짐짓 알고도 자기의 욕망을 채우겠다는 것이 있는 자는 주님께서 절대로 응답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주님을 따라오며 주를 위해서 일해 보겠다는 자라도 중심에 정욕을 따르는 자라면 그 사람은 오히려 주님께서 버릴 것이로되 몰라서 진리를 반대한다 하여도 옳은 양심으로 충성을 다 하려는 마음이 있는 자라면 그 사람에게 주님은 나타나는 것이다.

 

  2. 긍휼함을 입은 자다 (13)

  긍휼이라는 것은 완전한 자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넘어지고 쓰러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니 인간이 충성을 다해 보다가 인간으로서 깨닫지를 못하고 쓰러지는 자라면 주님은 불쌍히 보고 그 사람을 깨닫게 해서 너그러이 용서하고 그 죄를 기억도 하지 않으시고 능하게 하셔서 다시는 그 일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주의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율법 자요, 바리새 교인이요, 유대교의 가장 지나친 열심을 가진 자였다(갈1:14). 우리는 주님 앞에 긍휼 함을 받는 것은 열심으로 힘을 다하여 나가던 자에게 있는 것이니 예를 든다면 누워서 잠자는 자보다도 넘어지더라도 열심 있게 나가는 자를 주님은 더 긍휼히 보시는 것이다. 바리새 교인을 보고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하던 주님은 바리새 교인 중에 하나인 바울이 기독교를 없애려는 폭행을 하며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주님은 공중에 나타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으로 그를 깨우쳐 주었던 것이다.

  오늘도 택한 종이 열심 있게 일해 나가다가 지나친 열심을 가지고 알지 못하는 도중에 실수가 있더라도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고, 찾아와서 붙들어 주며 깨우쳐 주는 일이 있으므로만이 앞으로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사도 바울이 과거에 사도들과 대적이 되어서 성신이 충만한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하고 나갔지만 강권으로 사도 바울은 사도와 같이 하나가 되게 한 것을 보면 종말에 종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고, 주님께서 직접 택한 자를 긍휼히 보시고 깨우쳐 주므로만이 하나가 될 것이다.

  지금도 진실한 종들이 기독교 종말관을 모르고, 이 진리 운동을 핍박하는 자가 있지만, 그 종들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충성된 자라면 불쌍히 보고 깨닫게 하므로 하나가 되게 하실 것이다.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이 월간지를 이 시대에 발행하게 하는 것은 충성된 종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역사라고 본다.

 

  3. 믿음과 사랑이 넘치게 하므로 (14)

  믿음과 사랑이라는 것은 인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택한 자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누구든지 과거에 자기 부족을 절실히 깨닫고 충성을 다 하려는 자에게는 믿음도 사랑도 주시는 동시에 은혜가 넘치도록 풍성케 해서 그리스도만을 자랑할 수 있는 능력의 종이 되게 하신다. 우리가 넘치도록 받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 충성된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누구든지 충성된 사람이라면 바울에게 주던 몇 배를 더 넘치도록 부어 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역사할 때보다도 더 악하고도 무서운 환란이 앞에 있으므로 충성된 종들에게 더 강한 역사를 부어 주시는 것이다(욜2:29). 기독교의 역사상 가장 넘치도록 주시는 때는 지금이라고 보게 된다. 아무리 북방 세력이 강하게 일어나지만 당신의 종들에게 이슬과 단비같이 역사를 나리어 수풀 속의 사자같이 강하게 쓸 때가 즉 이 때라고 보게 된다(미5:6~9).

  왜냐하면 주님은 원수 세력이 강할 때는 당신의 종을 더 능하게 해서 들어 쓰기 때문이다(사41:14~16, 25).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 때는 능하게 쓸 때이니 자다가 마땅히 각성을 받고, 일어날 때다. 사60:1이하를 보라, 우리는 강하게 일어나면 무한한 축복이 올 것이다.

 

 결 론

  가장 기뻐하고도 만족한 생활은 능하게 된 종의 생활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죄인 중에 괴수가 되는 바울이 그 손으로 성경을 14권이나 썼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오늘에 가장 복된 자는 모든 선지들이 쓰러지며 압박 속에서 묵시를 보던 심판의 다림줄이 우리 동방에 나타나서 가장 무식하고도 못난 지렁이 같은 종의 입을 통하여 얼마든지 진리의 변론을 말하도록 해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되는 일이다. 전부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능하게 하는 일이라고 자랑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소원과 종의 할 일

( 딤전 1 : 18 - 19, 2 : 1 - 7 )

 

서 론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쓰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만일 어떤 종이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를 생각지 않고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종 된 자의 직분은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서 순종할 것뿐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소원을 따라 행하는 종은 어떠한 종인가 하는 것을 본문에서 배울 수 있다.  

1.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1:18~19)  

하나님께서 종을 쓰는 목적은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이다. 이러한 싸움은 자기의 욕망을 위하여 싸우는 것은 아니다. 마귀를 물리치고 남을 구원해 주기 위하여 싸우는 것을 선한 싸움이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군대가 적군이 자기편을 해치고자 하는 것을 보고도 구경만 하고 있다면 군인의 양심은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종이 진리의 대적이 양떼를 해치려고 들어 왔는데 이것을 보고도 예언을 따라 싸우지 않는다면 양떼를 살리기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양심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에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한 것이다.  

2.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에 힘쓰는 종이다 (2:1~4)

우리는 국가를 위하여나 민족을 위해서 영적 대표 인물은 하나님의 종이니 이 종의 간구하는 기도로써 많은 사람이 진리를 알고 구원받도록 역사하겠다는 것이다. 왜냐 할 때 하늘의 법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 없다면 역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란 다 제사장의 사명을 맡은 자인 것이니 그러므로 죄 중에 큰 죄는 남을 살리기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 죄가 제일 큰 죄라는 것이다(삼상12:23).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양심에서 잘못된 일이다. 즉 자기는 남의 기도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받고도 남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 없다면 양심이 하나님을 향한 종은 아닌 것이다.  

3. 믿음과 진리 안에 스승이 되자 (2:6~7)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거짓이 없는 믿음과 진리니 이것을 그래도 가감 없이 가르치는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믿음으로 가르치지 않고, 자기 주관으로 가르치든지 진리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든지 자기 지식으로 가르친다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말씀을 따르는 종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믿음도 하나요, 진리도 하나니 믿음과 진리가 떠난 역사라면 마귀의 일이 되기 때문이다  

결 론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따라 역사하는 주님의 역사와 모든 종들의 역사로써 구원을 받은 우리니 구원받은 양심으로써 선한 싸움을 싸우며 남을 위해 기도하며 믿음과 진리 안에 스승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가 없는 사람은 삯꾼에 불과한 것이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간곡히 부탁한 것이 이것이었던 것이다. 바울은 종된 자로서 언제나 착한 양심적인 행동을 해야 된다는 것을 거듭 디모데에게 가르친 것이다(딤전1:5~9, 딤후1:3~5).

주의 종의 양심이 잘못되면 하나님과 양떼 사이에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종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향하여 깨끗한 양심이 있어야 할 것이고, 양떼를 향하여 착한 양심이 있는 동시에 뜨거운 사랑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귀신의 역사는 외식하는 자라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딤전4:1~2). 하나님의 종이 양심적인 사람이 못 될 때 하나님은 그 종을 통하여 은혜를 나릴 수도 없고, 또는 그 종이 하는 일에 책임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도인과 정치 문제

( 딤전 2 : 1 - 4 )

 

  우리는 기도인과 정치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야 된다. 기도하는 사람이 나라의 정치를 무관심 한다는 것도 탈선이요, 또는 기도하는 사람이 정권을 잡아 보려는 것도 탈선이라고 본다.

  기도의 사람은 나 하나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니 기도하는 사람이 자기의 안락이나 명예나 권세를 탐한다는 것은 기도의 정신을 벗어난 일이라고 본다. 기도의 정신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1. 모든 사람을 위하는 정신 (1상반절)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이루기 위한 것이니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하나같이 사랑하는 것이므로 편벽이나 차별을 두는 것이 있으면 안될 것이요,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을 믿는 동시에 아무리 부족한 자가 있다 하여도 그 사람을 무시한다든지 버리는 것은 기도의 사람으로 있을 수 없고, 우리는 기도할 것 뿐이고, 그 사람이 모두 되는 것은 하나님 장중에 있다는 것을 믿고 기도할 때 그 사람이 기도를 받기에 합당치 않을 때는 그 기도가 기도하는 사람에게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모든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기도하는 본인에게 지혜도 능력도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하는 사람에게 지혜도 주고, 능력도 주므로 그 사람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는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기도의 사람은 절대로 자기란 것을 위한다는 데서는 아무 것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할 때에 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므로 나 자체가 완전해지는 것도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해서 완전해지기를 구해야 될 것이다. 만일 종이 부족하면 대중에게 큰 피해를 주는 일이 있을 것이므로 대중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의 완전을 구해야 될 것이다.

 

  2. 감사를 하는 일이 있어야 된다 (1하반절)

  기도의 사람이 불만을 둔다는 것은 벌써 그 심령은 기도할 자격을 잃은 것이라고 본다. 우리 기도하는 사람은 첫째로 남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을 감사해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므로 내게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보다도 더 큰 상급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님께서 갚아 주실 적에 “네가 너를 위하여 기도했으니 상급을 받으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네가 억울함을 당해도 참고 기도했으니 상급을 받으라”는 것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무엇이나 다 감사할 수 있는 마음에서 기도해야만 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도할 때에 남을 원망하면서 불평을 두고 “하나님이여, 나를 왜 이렇게 하십니까?” 하는 기도란 것은 아무런 열매가 없고, 원망스러운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여, 나를 아시나이다. 내가 무엇을 잘했다 할 수 있사오리까?” 하는 마음에서 내 부족을 깨닫는 대로 모든 일을 진행해 나가면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3. 정치인들을 위하여 기도할 일 (2)

  정치인이라는 것은 신, 불신을 막론하고 다 하나님이 그 나라를 주관하는 섭리 하에서 있는 것이니 기도하는 사람이 정치인을 억지로 간섭해 보려는 것은 과오를 범하는 일이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움직여 나라를 바로 다스리길 기도한다면 내가 직접으로 정치하는 것과 같이 열매를 거둘 수가 있다.

  왜냐하면 정치인이라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 하에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자기가 잘해서 바벨론 나라를 이룬 줄 알고 말하기를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했더니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가로되 “느부갓네살아, 너에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位)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 나가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나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더니 그대로 대왕이 미쳐 소처럼 풀을 먹으며 짐승같이 산에 나가 이슬을 맞고 다닌 일이 있었다.

  예루살렘이 부패할 때 느부갓네살을 들어 예루살렘을 황폐화시킨 일이 있고, 그 왕을 미친 사람이 되게 한 일도 있고 정신이 돌아오게도 한 일이 있으며, 고레스를 들어 바벨론을 치고,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매 즉 그가 조서를 내려 예루살렘을 복구하게 한 일도 있다. 아무리 강대국이라도 그 왕의 마음을 하나님이 주관했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을 보아서 우리는 정치인을 위하여 기도할 책임이 있다. 기도하는 사람이 정치를 반대하는 데모를 한다든지 비난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기도의 양심을 떠난 사람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사람과 정치와는 떠날 수 없다.

  정치란 것은 무력이나 경제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장 중에 있다는 것은 성경에 구약 역사를 보아 분명히 알 수 있다. 계17:17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라”고 한 것을 보면 심판기까지 나라 정치인의 마음을 주관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이것을 기꺼이 받으실 일이라고 3절에 말했으니 우리 기도의 사람으로는 나라와 정부에 대하여 기도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며, 더욱 우리 대한 민국에 사는 성도로서 하나님이 보호 하사 우리 나라 만세란 것을 믿을 진데는 극동 난제를 당한 이 때에 더욱 금식을 하며 기도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내가 이 나라를 위하여 받은 체험을 말한다.

  한번은 9일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특별 기도를 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도의 힘을 주므로 하루에 6시간씩 눈물 흘려 부르짖는 일이 있었다. 일어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기도하던 중 기도를 마치는 마지막 날 새벽이었다. 하늘에서 큰 징조가 나타날 때 별이 12개가 빛을 내어 우리 나라로 비춰지는 광경을 보았다.

  그 때 이상한 방언이 내 입에서 나오며 알려오기를 “네 민족을 위하여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12별과 같은 종들의 역사가 이 나라에 나타나서 세계 열방을 깨우치므로 네 나라가 빛나는 나라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나는 우리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전력을 두었습니다. 하나님이 보호 하사 우리 나라 만세는 하나님께서 사명적인 국가로 예정한 약속의 말씀으로 믿습니다. 기독교 종말에 새 일이란 진리가 즉 이 뜻인 것을 성경에서 알았습니다(사43:19).

 

 

 

기도 생활

( 딤전 2 : 1 - 7 )

 

  서    론

  하나님께서 우주 공간에 대 사업을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바로 깨닫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목적 둔 것인데 이 사업은 사명자의 기도가 없이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역사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사명자의 기도에 의하여서만 역사가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명자의 기도 생활을 본문에서 배우기로 하자.

 

  1대지 : 완전한 기도가 있어야 함 (1)

  완전한 기도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위하여 하는 기도가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는 기도이다. 그런데 남을 위하여 기도하더라도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가 있어야 된다.

  간구란 것은 최선의 힘을 다하여 해산의 수고를 하는 기도를 뜻했고, 기도라는 것은 항상 마음으로 원하는데서 끊어지지 않고 드리는 기도를 뜻했다. 이 기도는 장소나 시간에 대하여 어떤 규정이 없이 항상 하는 기도이다. 도고라는 것은 입을 열어서 늘 고백하는 기도니 사람의 이름을 불러 가면서 사정을 말해 가면서 드리는 기도다.

  감사는 무슨 일이나 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고 핍박이 와도 고생스러워도 아무리 동역자에게 중상을 받는 일이 있다 하여도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적에 이것은 오히려 영계가 속히 향상되는 동시에 하늘의 상급이 크게 되는 것이다.

 

  2대지 : 국가의 안정을 위하여 (2~3)

  나라의 운명은 하나님께 있고 정치인의 마음도 하나님이 주관하는 것을 믿고 기도해야 된다. 기독 신자는 국가를 떠나서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국가 안에서 생활하면서 국민의 정신과 사상과 생활을 개혁시키는 것이 사명이기 때문이다. 금일에 우리 나라에 하나님이 보호하사 라는 진리는 기독 신자를 통하여 이루어질 진리다.

  사명자가 정치적인 야욕을 둔다는 것은 탈선이로되 정치인을 기도로 움직여 주는 것은 의로운 사람의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한 사람의 기도가 하늘 보좌를 움직일 수도 있고, 원수의 나라를 물리칠 수도 있고, 모든 재앙이 물러갈 수도 있다는 것이 성서의 역사이라면 오늘의 모든 난제를 해결하는 것은 사명자의 기도 응답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소돔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이 없으므로 망한 사실을 볼 때 의인이 다수는 못되어도 합심하여 올리는 기도가 국가를 움직이는 생명선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라고 본문에 가르쳤다.

 

  3대지 : 기도에 대한 하늘의 활동 (4~7)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라고 본문에 기록했다.

  하나님은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의 대언기도를 통하여 세계 만방에 대 확장을 가져오도록 복음 운동을 전개시킨 것은 전부가 사명자의 기도 응답이 예루살렘 다락방에 성령의 불이 떨어져서 온 세계를 덮게 된 것이니 전부가 사명자의 기도의 응답으로써 이루어진 현실에 앞으로 온전히 성도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사명자의 기도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사명이라는 것은 각각 분야가 다르지만 전부가 다 기도 응답으로 그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데는 그 중보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우리는 대언자 예수님과 항상 긴밀한 연락을 기도로 하는 데서만이 승리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스승 된 바울

( 딤전 2 : 5 - 10 )

 

 인간이라는 것은 모든 일에 스승 된 자가 있어야만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 같은 스승은 인류 역사상 없었다. 누구든지 바울이 자기에게 참된 스승이 된다고 깨달은 자라면 가장 복 있는 자라고 볼 수 있다.

  소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대제사장과 교법사와 유사와 장로들은 바울을 염병 같은 이단이라고 정죄했었다. 그러나 이단이라고 정죄한 자는 아무런 열매가 없이 망하였고 이단이라고 정죄를 받은 바울은 세계 인류를 바로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것을 세계 인류가 알게 되었다.

  이제 바울이 우리의 스승 된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증거한다.

 

  1. 그리스도는 중보자이신 것을 밝히 가르침 (5)

  그리스도를 반대했던 바울이 그리스도 한 분만이 중보자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일생을 피 흘리면서 싸웠다. 만일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중보자 되심을 가르치기 위하여 싸우지 않았다면 이방인은 다 흑암에서 해방을 받고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서도 훌륭한 인물이 많이 있었지만, 그들은 한 도덕가나 종교가는 될지언정 중보는 될 수 없다.

  바울이 그리스도만이 중보자라고 가르친 것은 하나의 이론이 아니요 확실한 증거를 받은 바울로서 분명히 가르친 것이다. 우리가 바울의 증거를 참이라고 믿어지는 것은 그대로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바울이 그리스도를 중보자라고 가르쳤다 하여도 지금 우리에게 산 증거가 없다면 바울은 우리의 참된 스승이라고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증거한 말씀은 오늘도 우리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는 증거가 있으므로 누구든지 이 증거를 받은 자는 하나같이 바울을 참된 스승으로 시인하는 동시에 그가 싸우던 싸움을 계속하여 싸우게 된다.

 

  2. 확실한 증거를 가르침 (6)

  그리스도의 증거라는 것은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증거가 확실한 만큼 이루어질 증거도 확실한 것이다. 만민의 죄를 위하여 속죄 제물이 되신 예수님께서 앞으로 말씀대로 다시 오실 것은 너무나 똑똑한 사실이다.

  이미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희생하셨다면 이루어질 일이 너무나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가 속죄의 은총을 받았으므로 앞으로 재림의 주가 올 때에 될 일이 분명한 것이라는 것을 바울은 말했다. 어떤 사람이 십자가를 믿는다 하면서 다시 오시는 주님에 대하여 갈망하는 마음이 없다면 초림의 주를 통하여 오는 산 체험을 받지 못한 자라고 볼 수 있다.

 

  3. 자기 사명에 대하여 거짓이 없다고 말함 (7)

  참된 스승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고, 직접 주님께서 스승으로 세운 자라야 자격이 있는 것이다. 바울은 기독교를 반대하고 폭행을 하던 사람이었으나 주님의 명령을 받고 나서게 될 때에 언제나 자기 사명에 대하여 서슴지 않고 말하게 되었다. 인간이 스스로 연구했다는 것은 참이라고 할 수 없고 주님께서 직접 주신 것이라야 참되다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사람의 말이라는 것은 그대로 되지를 않으므로 참 말이 될 수 없고, 주님께서 명령하신 일은 끝까지 주님께서 책임을 지고 행하시므로 참 말이 되기 때문이다.

 

  4. 하나가 되기를 원함 (8~10)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옥중에서도 남자나 여자나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자기는 희생을 당할지언정 모든 사람들에게 다툼이 없이 하나가 되어 기도하면 승리할 것을 말했던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가 되지 않고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바울은 가르쳤다.

  만일 서로 다투는 일이 있다면 그 사람 자체가 사단에게 먹힘을 당한 것이니 아무리 기도한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며,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서 기도해야만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가 되어 기도하여야만 완전한 승리를 이루게 된다. 아무리 바울이 진리를 바로 가르쳤다 하여도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하나가 못된다면 완전한 열매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결 론

  사람이라는 것은 스승이 없이 아무 것도 바로 할 수가 없고, 스승이 있다 하여도 가르침을 받은 자가 바로 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진리의 스승인 바울을 표본으로 삼는 단체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차이점

( 딤전 2 : 8 - 15 )

 

  하나님께서 남녀를 들어서 쓰시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남녀에 있어서 사명의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차이점을 본문으로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1. 손을 들어 기도할 특권이 남자에게 있음 (8)

  하나님 앞에 손을 들어 기도할 특권은 남자에게만 있다. 왜냐 하면 하나님 앞에 대표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남자가 받았기 때문이다.

  남종은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하나님께 받아야 한다. 오늘의 교회에서 남종들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한 것은 인간성이 남아서 서로 노하는 일, 다투는 일이 있으므로 그 손에 축복이 임하지를 않기 때문이다.

  거룩한 손을 들어 축복할 수 있는 자격은 자아라는 것이 완전히 죽어지고 조금이라도 감정이나 육적 정욕에 끌림이 없이 항상 거룩한 생활을 하는 자라야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모세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사람이었지만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반석을 두 번 쳤다는 조건으로 사명이 옮겨간 사실을 알 수 있다. 종된 자가 억울한 일이 있다고 해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과격한 행동을 해서 손으로 실수를 하게 된다면 그 손을 들어 기도할 자격을 상실했다고 본다. 남을 책망하되 사람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깨닫도록 하는 종이라면 지도자가 될 만한 자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순교자들은 억울함을 당하여도 하나님께 손을 들어 기도하고, 원수들이 죽이는데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세상을 떠난 자들이므로 왕권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억울하다고 해서 참지를 못하고 남을 때린다든지 합당치 못한 일을 감정으로 했다든지 하면 이 사람은 거룩한 종이라고 볼 수 없고, 하나님 앞에 손을 들어 기도할 자격도 없다. 우리 사명자의 오른 손은 하나님의 도구로만 쓰여지는 손이 되어야만 거룩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 일절 순종할 책임이 여자에게 있음 (9~11)

  여종은 대표적인 사명을 가질 수 없고, 대표적인 사람이 하는 일에 일절 순종하여 받들어 나가는데 전력을 두어야 할 사명을 가졌다. 그러므로 고전11:7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남자라는 것은 대표적인 사람이 된다 하여도 여자의 순종이 없다면 아무런 영광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남종이 아무리 일을 바로 하려고 해도 사모되는 여종이 순종치 않고 반대하고 나선다면 대표적인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육적 부부가 아니라도 사명적으로 여종들의 받드는 것이 없다면 대표적인 사명자라도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일하실 때에도 많은 여종들의 받드는 것이 있음으로서 그 사명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자는 염치나 정절로 단장한 인격이 아니고는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남자를 섬기는 사명을 가진 여자가 염치없이 대접받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나 정절을 지켜야 할 여자가 마음이 변해 버린다면 깨어진 뚝배기와 같이 아무런 곳에도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여자는 의복을 단장해도 섬기는 인격으로 아담하게 해야 하며 염치와 정절로 단장을 해야 된다. 받드는 사명을 가진 여자가 너무 값진 보석이나 의복으로 꾸민다는 것은 양심이 마비된 행동이므로 무엇이나 절약해서 간단한 것으로 몸을 단장하고 주의 사업에 전력을 두어 받드는 것이 있어야만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3. 남녀의 주권에는 차이점이 있음 (12~14)

  남자의 주권이 여자를 지배할 수는 있으나 여자의 주권이 남자를 지배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를 받을 때에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돕는 배필로 여자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둘째 : 뱀에게 꾀임을 받은 자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의 범죄에는 차이가 있다. 여자가 꾀임을 먼저 받아가지고 남자까지 망쳤다는 것이 큰 죄이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남자의 주권아래서 여자가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도와서 일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은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가 남자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차이점을 바로 가지게 됨으로써 복된 가정과 교회를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가정과 교회라는 것은 남녀의 결합이 있음으로만 있을 수 있고,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명자는 자기가 맡은 일을 하되 남녀의 차별을 바로 두어야 할 것이다.

 

 결 론

  오늘에 와서 남녀 동등권이라는 것은 국가를 발전시키고, 교회를 부흥시키고, 가정을 잘 움직이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녀 동등권을 악용할 때에 가정을 망치고, 교회를 망치고, 국가를 망칠 수도 있는 것이다. 동등권이라는 것은 남녀 차별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남자는 남자 입장에서 권리를 찾고, 여자는 여자 입장에서 권리를 찾으라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

 

 

사명자의 남녀 구별

( 딤전 2 : 8 - 15 )

 

  서    론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가장 으뜸이 되는 남자를 창조하시었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루어진 인격이다. 그러나 그가 홀로 있는 것을 합당치 않게 하나님은 보시었다. 왜냐하면 천국을 목적 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큰 사명을 가진 남자를 돕는 배필이 있어야만 되겠으므로 남자의 사명적인 영광을 위하여 여자를 창조한 것이다.

  고전11:7을 보면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바울은 가르쳤다. 9절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 받은 것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타락하기 전 에덴 동산에서와 같이 사명자는 남녀의 구별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은 영들인데 중생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명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열 두 제자를 택할 때도 남자들로만 택한 것은 아무리 예수님의 은혜로 되는 일이라도 남녀의 구별을 둔 증거라고 본다. 주님 당시에도 많은 여종들이 따라가며 물질로 봉사하고 끝까지 수종을 들은 사실을 볼 수 있다. 이제 남녀 구별을 본문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

 

  1대지 : 남자의 합심 단결이 있을 것 (8)

  남자라는 것은 분노와 다툼이 없어야 된다는 것이다. 사명자가 분노와 다툼이 있다는 것은 큰 과오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만왕의 왕을 따라가는 자가 되려면 완전히 십자가에서 정과 육이 죽어야만 사명자의 인격을 가진 것이다. 마귀와 싸우는 군대가 되려면 싸우는 사명자 인격이 사단의 본질인 분노와 다투는 일이 없이 되어야만 될 것이다.

  우리가 마귀와 싸우는 군대로서 마귀를 대적하는 싸움 외에는 다른 일에 분노한다든지 싸우는 것은 벌써 영적으로 사단에게 정복을 당하는 시간이니 이것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할 때 여기서 더 사명을 할 수 있는 역사가 내리는 것이다. 언제나 사명 가진 남자들이 단결할 때에 역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아무리 사명자라도 합심하여 하나가 되는 일이 없다면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복지를 점령할 때에도 열 두 정탐꾼이 하나가 못되고 다툴 때에 40일이 40년으로 연기된 일이 있고 황폐된 예루살렘이 복구될 때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가지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지만 합심이 못되고 서로 다툴 때에 15년간 연장된 일이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한 것이다. 이 글은 로마 옥중에서 환란을 만난 바울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어려운 환란이 올 때에 남자들이 합심하여 기도하여야만 된다는 것이다.

 

  2대지 : 여자의 순종과 종용 (9~12)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할 때 남자보다도 연약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태도를 주어서 낸 것은 남자가 맡은 사명을 돕기 위하여 순종하면 된다는 뜻이요, 일선에 나서서 싸우라는 인격은 아니다. 또는 우렁찬 남자의 위엄을 무시하지 말고 종용히 그 권세 아래서 수종을 드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대표적인 종을 남자로 세운 것은 그 사명 아래서 여자는 순종하고 종용하게 해서 도와주라는 것이다.

  순종이라는 것은 남자가 두려워서가 아니고 순종하므로써 종용히 배우는 자리에서 남자를 가르칠 수 없고 남자를 주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자가 여자를 배워주고 주관할 수는 있을 수 있으나 여자가 남자를 주관한다는 것은 사도바울의 신앙 양심에서 허락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3대지 : 남녀의 선후 관계 (13~15)

  하나님께서 남자 아담을 먼저 지었고 하와를 후에 지은 뜻은 남자에게 먼저 모든 것을 맡기고 다음에 여자를 창조하여 그 맡긴 일을 돕기 위해 두었던 것이다. 여자가 먼저 꾀임을 받고 죄에 빠졌으므로 남자에까지 그 영향이 미친 것은 여자에게 죄에 빠진 책임이 있으므로 여자는 해산의 수고를 하는 것이 있으므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게 되므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여자는 홀로 왕권을 받을 수는 없고 남자가 받는 왕권에 가입할 수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언제나 여자의 사명을 남자가 돕는 것이 아니고 남자의 사명을 여자가 돕는 것을 하나님은 원칙으로 했던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은 이미 남자에게 임한 것인데 그 사랑 속에서 남녀가 다 같이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와 같은 뜻으로 예수님도 성령으로 잉태될 적에 물과 피로 임하여 남자의 형상을 이루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셨으니 하나님도 자기를 가르쳐 나는 네 남편이라고 사54:5에 말했고 예수님도 자기를 신랑으로 말씀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나 아들의 형상이 다 남자의 형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은 다 남자의 영광이라고 볼 수 있다(사62:5).

 

 

 

사명자의 사생활

( 딤전 3 : 1 - 7 )

 

  서    론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가운데 살피시되 사명자의 사생활에 있어서 작은 일에 바로 하는 자라야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역사를 내리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의 일을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에 따라서 왕권을 받는데 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나무가 대중이 보도록 아름다운 열매를 맺되 열매로써 일하는 자에게 힘을 공급하는 것과 같이 사명자가 항상 사생활에서 바로 되는 자라야 대중을 살리는 열매있는 종이 될 것이다. 이제 크게 쓰는 일꾼이 되려면 어떠한 생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본문에 가르친 것이다.

 

  1대지 :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1)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가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있고 없는데 따라서 열매는 따라가는 것이다. 어떤 종이 주의 일을 할 때에 중심에 사모하는 마음이 없다면 중심보시는 하나님이 일을 한다 해도 외식하는 자라고 보게 될 때에 오히려 죄가 된다(마24:51). 누구든지 사명을 맡은 자로서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때부터 하나님은 일할 수 있는 은혜를 내리므로 열매가 있게 되는 것이다.

 

  2대지 : 가정이 바로서야 한다 (2)

  가정은 사명자가 일할 수 있는 힘을 주는 내장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부부의 신성과 절제, 근신이 있으므로 아담한 가정이 되어야 한다. 가정에서부터 신성을 떠나고 절제있는 생활이 없게 된다면 그 종은 아무런 활동을 할 수 없는 몸이 된 것과 같으니 자동적으로 힘을 낼 수 없고 열매를 맺는 단계에 들어 갈 수 없다.

  그러므로 사명자의 가정은 성도를 육적으로도 대접할 수 있고 영적으로도 진리를 잘 가르칠 수 있는 생활이 있게 될 때에 큰 일을 할 수 있는 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남에게 누를 끼치는 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떠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3대지 : 거룩한 인격을 이루어야 된다 (3)

  하나님의 종은 그 몸이 존귀한 몸이니 그 몸을 정상적인 인격에서 움직여야 한다. 만일 취하는 술이나 또는 혈기내는 일이나 입으로 다투는 일이나 또는 물질에 끌리는 몸이 된다면 사명자의 인격을 상실한 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먹는 일이나 혈기를 내는 일이나 다투는 일이나 돈을 따르는 일에 치우친다면 그 인격은 대중을 지도할 인격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대중을 지도하는 종이 되려면 항상 너그러이 남을 용서하는 마음에서 움직이는 인격을 가져야 될 것이다.

 

  4대지 : 가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4~5)

  가정이라는 것은 작은 것 같으나 큰 것이요, 가장 존귀한 것인데 가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대중을 지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정의 자녀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증거를 알도록끔 되는 종이 되어야 한다. 만일 자녀가 업신여기고 대적을 하게 된다면 벌써 그 종은 하나님의 종의 권위를 가정에서부터 상실한 자라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가정에 식구들이 감동을 받는 일이 없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같이하지 않는 증거라고 보게 된다.

  사44:3을 보면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하였고 49:25을 보면 “너를 대적하는 자를 내가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 하였고 66:22을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을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참으로 복 받을 종이 될 때에 가정 축복은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다(마19:29).

 

  5대지 :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는 자가 되어야 한다 (7)

  사람이라는 것은 불신자도 양심이 있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종이 될 때에 교회 밖의 사람도 그 종을 참 종이라고 인정을 하게 된다. 언제나 교회 밖의 사람들이 그 종을 무시하지 못하고 옳다고 증거하게 될 때 자동적으로 그 종은 전도할 문이 열리는 것이다. 전도란 것은 말에 있지 않고 먼저 열매에 있어야 한다.

 

 결 론

  하나님께서 가장 위대한 신이시지만 가장 세밀하시고 가장 무소 불능한 신이시지만 지극히 작은 백합화 한 송이까지도 입히시는 것이며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도 먹을 것을 주시는 신이시니 이러한 하나님의 종이 되려면 사생활에서 바로 나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는 종이 되자

( 딤전 3 : 8 - 13 )

 

  믿음의 큰 담력이라는 것은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는 자에게 오는 축복이라고 본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할 때에는 큰 담력을 얻어서 작은 일에 충성을 하던 자가 큰 일을 할 수 있게 되지만, 맡은 일에 충성을 하지 않는 자는 큰 일을 맡아 하다가도 점점 맥이 빠져 쓰러지는 상태에 들어갈 때에 오히려 일을 시작하지 않았던 자보다도 더 불행스러운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집사의 일을 잘 하는 자가 믿음의 큰 담력을 얻는다고 말한 것이다. 언제나 큰 역사를 하는 종들은 다 집사의 일을 충성되이 보던 종들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역사를 하는 종이 집사의 직을 거치지 않고 된 자는 없을 줄 안다. 그러면 어떠한 집사가 되어야 큰 담력을 얻는 종이 될 것이냐에 대하여 본문을 들어서 말한다.

 

  1. 단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8)

  단정이라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은 절대로 변함이 없는 사람을 찾고 있다. 누구든지 한 번 하나님 앞에 작정한 것은 변함이 없어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에 성직을 맡은 자로 입의 말이나 물질이나 모든 일에 단정한 사람이 될 때에 입에도 하나님의 역사가 오고, 물질에도 하나님의 축복이 오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란 일구이언을 한다든지 세상 재리에 명랑한 사람이 못된다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보게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의 입을 쓰고, 물질을 통하여 주의 일에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니 신앙의 큰 담력을 얻으려면 입에 열매가 있고, 물질에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정직이 있어야 할 것이다.

 

  2. 깨끗한 양심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9)

  언제나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는 마음이 깨끗할 때에 항상 하나님과 교통하는 신앙의 비밀을 체험하게 된다. 만일 이것이 없는 자라면 어려운 난제를 당할 적에 이길 수 없이 쓰러지고 말게 된다. 신앙이라는 것은 비밀의 교통이 없다면 진액이 없는 마른나무 같다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신앙의 비밀이 있는 자라야 날이 갈수록 더 담력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나뭇가지가 진액을 받을 적에 점점 튼튼한 가지가 되듯이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이 있는 자는 날마다 점점 자라나는 신앙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된다.

 

  3. 가정에서부터 바로 서야 한다 (12)

  가정은 신앙을 길러 주는 학교라고 볼 수 있다. 가정에서부터 배워지는 일이 없다면 그 신앙은 정상적인 신앙이라고 볼 수가 없다. 가정 자녀를 다스릴 줄 모른다면 큰 교회를 바로 지도할 수 없을 것이다. 혹은 하나님께서 택한 종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가정에 시험이 없는 것은 아니로되, 가정의 식구들에게 감화를 주지 못한다면 그 종은 내장이 잘못된 몸과 같이 될 것이니 가정에서부터 바로 서는 종이 될 적에 그 종은 모든 일을 바로 할 수 있는 생활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위하여 부모나 전토나 모든 자녀를 버리고 나가는 자라면 백 배나 받는다”고 한 것은 주를 위하여 일할 때에 가정에 얽매이지 말고,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올 것을 믿고 맡은 일에 충성을 다 하면 가정의 모든 난제 해결은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이루어 준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만일 어떠한 종이 가정 식구가 방해한다고 주의 일을 중지하고 만다는 것은 오히려 가정을 망치는 일이 될 것이니 가정의 자녀나 모든 식구를 다스리되 주님의 일을 바로 할 수 있는 일을 만들기 위하여 권위 있게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부모나 처자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합당치 않다”고 한 것은 이것을 가르친 것이다. 누구든지 주님의 일꾼이 되려고 할 때에 주님의 일 하나를 바로 하기 위하여 승리의 길을 가므로 갈수록 큰 힘을 얻는 종이 될 것이니 조금도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만 큰 담력을 얻는 종이 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종이 신앙의 큰 담력을 얻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는 것을 마음에 명심하여야 될 것이다.

  1) 주님의 일을 내 일보다도 더 존중히 할 것.

  2) 주님의 일을 할 때에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큰 일로 생각하여야 될 것.

  3) 주님의 일을 할 때에 주님의 역사로만이 될 것을 믿는 마음이 강하여야 될 것.

  이와 같이 나갈 때에 집사의 일을 하던 자가 큰 담력을 얻고 아름다운 지위를 받게 될 것이다.

 

 

사명자의 목회 생활

( 딤전 3 : 14 - 16, 4 : 6 - 16 )

 

 서  론

  인류 생활에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목회 생활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정당 생활은 국민의 육적 생활을 지도하는 거요, 공장 생활은 물건 하나를 위한 생활이요, 군인 생활은 적군을 막기 위한 생활이요, 농민 생활은 열매 하나를 식물에서 얻고자 하는 생활이요, 상인 생활은 자기가 이익을 바라보는 생활이다. 그러나 목회 생활이란 것은 하나님의 대행자로서 모든 생명을 영생 세계로 인도하는 생활이다. 이 생활이라는 것은 저주받은 생활을 벗어나서 자신이 복을 받고 그 복 받는 진리를 남에게 가르쳐 주는 생활이다. 이제 목회 생활에 있어서 본문을 통하여 요소가 무엇인 것을 알 수 있다.

 

  1대지 :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것을 알고 행하여야 된다

(3:14~16)

  조금이라도 진리가 혼선되면 교회가 아니요, 진리가 정확히 바로 서므로만이 하나님의 교회인 것을 알고 자신이 진리에 온전히 바로 서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한다.

 

  2대지 : 형제를 깨우치는 일을 해야 된다 (4:6)

  목회자는 언제나 깨우치는 일이 있게 된다면 자신이 발전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예를 든다면 싸우는 군대가 자기 홀로 싸울 수 없고 다 같이 정신을 차려야 되듯이 언제나 하나님의 종은 대중을 깨우쳐 주는 일이 있을 때에 모든 일은 순조롭게 되는 것이다.

 

  3대지 :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된다 (7~8)

  사람이라는 것은 완전해져서 일을 하는 것보다 일을 하면서 바로 서도록 연습할 때 성령은 그것을 기뻐하시고 나날이 발전해서 바로 일할 수 있는 생활에 이르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목회자는 모든 일을 경건하게 나가 보려고 연습적으로 노력할 때에 경건한 생활이 전부 이루어지는 열매를 보게 된다.

 

  4대지 :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고 노력하여야 한다 (9~10)

  목회자는 조금도 사람에게 무엇을 얻어 보려고 할 때에 그 시간에서부터 실패다. 언제나 하나님이 갚아 주시는 것만을 바라보는 마음이 불탈 때에 하나님은 친히 갚아 주시는 것이다.

 

  5대지 :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11~13)

  모든 사람은 다 완전한 사람이 아니요, 부족한 사람들이라도 한 단체가 되어 그 대표적인 사람의 철저한 인격에 감화를 받고 따라가므로 좋은 열매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니 목회자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의 본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인격으로써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일에 착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6대지 :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어야 된다 (14~16)

  언제나 목회자는 새로운 것이 있어야 된다. 예를 든다면 모든 식물이 새로이 진보하는 것이 없다면 열매를 거둘 수 없고 그 열매가 없이는 사회 생활을 이룰 수가 없음같이 목회자가 강단에서 설교할 때마다 새로운 것이 있어야 모든 영들은 그를 통하여 나타나는 역사에서 활동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되려면 전심 전력을 다해야만 되는 것이다.

 

 결 론

  가장 복된 자는 하나님의 집을 맡아서 주님 올 때까지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는 자라고 보게 된다(마24:45~47).

 

 

연습과 유익

( 딤전 4 : 6 - 16 )

 

  인생은 피조물이다. 피조물이라는 것은 완전하게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고, 완전에 도달할 수 있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생령의 사람으로 창조했지만, 죽은 영이 된 우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둘째아담 예수님의 십자가의 부활로 우리 죽은 영을 생령이 되게 하고, 생령된 사람으로서가 전부가 아니요,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는데 따라서 나날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생령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연습과 유익에 대해서 본문으로 알 수가 있다.

 

  1. 선한 교훈을 받는 일이다 (6)

  아무리 중생을 받은 자라도 잘못된 교훈을 받으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거요, 좋은 교훈을 받아서 양육을 받을 때에 옳은 진리 가운데서 날마다 마귀와 싸우는 생활이 있으므로 나날이 연습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연습이라는 것은 몸에도 필요하고, 영적으로도 필요 한데 가장 유익이라는 것은 영적 씨름이라고 본다(엡6:12).

  하나님께서 중생 받은 자를 언제나 악령과 싸우는 생활에서 날마다 일취월장하도록 연습적인 생활을 시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중생을 받았다 해도 아무런 연습이 없이 잠자는 상태에 있다면 그 생활은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

 

  2. 수고하고 힘을 다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7~10)

  버릴 것을 버리고, 취할 것을 취하기 위하여 수고하고 힘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중생 받은 사람은 소망을 하나님께 둔 것이니 소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소망에 필요 없는 말이나 교훈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의 신이시니 진리라는 것은 우리에게 완전한 것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를 가르친 것이니 역사라는 것은 진리를 따라 있고, 진리를 따르는 역사는 목적을 진리에다 두고 수고하며 애써 힘을 다하는 자라야 진리대로 이루어지는 열매를 이룰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있다 하여도 가만히 있는 자에게는 아무런 역사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대로 역사하되 수고하고 힘을 다하는 자에게만 역사하는 것이다.

 

  3. 본이 되고자 하여야 한다 (11~15)

  하나님의 종이 되려면 언제나 실천적인 본이 없다면 아무런 열매 없는 나무같이 될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인격을 이루는 것이니 진리를 가르치는 자가 인격을 상실한다면 생명 없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가르치는 일에 착념하라고 했고, 항상 조심해서 전심전력을 다하며 진보적인 사람이 되라고 눈물겨운 부탁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

  청년이라는 것은 진보적인 사람이 되어야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종이 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볼 때에 어떠하든지 모든 일을 바로 해보려고 애써 연습하는 자에게 바로 되도록 해 주는 것이 하나님의 신의 역사라는 것이다. 성령은 완전한 신이지만, 원치 않는 자에게 역사하는 신이 아니요,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만 역사하는 것이니 연습과 유익은 사람의 할 일은 성신의 역사가 합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사람을 기계화시키는 것은 아니로되 연습하면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몸도 연습에 따라서 유익이 있는 것인데, 몸의 연습에는 성신의 역사가 필요 없고, 영적 진리의 경건을 위하여 연습하는데는 초인간적인 신의 역사가 같이 하므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데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딤후3:17).

 

 

디 도 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는 역사

( 딛 3 : 4 - 8 )

 

  하나님의 완전 역사라는 것은 의롭다 함을 얻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역사하시되 의로운 사람이 되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을 말한다. 물체에 관한 것을 중심하지 않고, 인격 하나를 완전하게 이루어 놓는 것을 하나님의 완전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완전히 역사하신 것이 아니고, 타락한 인생이라도 완전하게 만들어 놓는 것을 완전 역사라고 한다. 천지 만물을 창조한 역사보다도 만물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 하나를 완전히 만들어 놓는 것이 하나님의 제일 크고도 완전한 역사이다.

  이제 의롭다 함을 얻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는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중생케 하는 역사 (5상반절)

  중생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범죄를 용서해 주는 역사이다. 예를 든다면 더러워진 의복을 깨끗하게 씻는 것과 같다. 이것은 인간의 도덕적 의가 필요없이 깨끗해지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도덕적인 의라는 것은 깨끗해지는 일이 아니요, 깨끗하지 못한 마음이 있어도 깨끗하게 살아 보려고 하는 노력이 따르는 것 뿐이다.

  그러나 중생이라는 것은 사람이 더러운 마음을 가지고 깨끗하게 살아 보려는 것이 아니요, 도덕을 초월해서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끗하게 살아 보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이 필요가 없고, 깨끗해진 사람으로서 자동적으로 생활의 열매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중생의 역사라고 한다.

  만일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마음에 깨끗함을 받지 못하고, 깨끗하게 살아 보려는 마음만 있다면, 신령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깨끗함을 받은 사람끼리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입을 열어 찬송하고 기도할 때에 그 예배를 통하여 깨끗한 사람으로서 일할 수 있는 역사가 하나님께로부터 내리게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 의의 역사라는 것은 행하라고 하는 법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고, 행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 놓는 것을 목적한 것이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중심에 성결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도덕적으로 사람에게 바로 보이려고 하는 것만 있다면, 자동적으로 교회의 모든 일을 외식으로 행하게 되므로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시게 된다. 이것은 당신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보다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므로, 이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상대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는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을 목적하고, 하나님을 향하여야만 된다.

 

  2. 새롭게 하는 역사 (5하반절)

  성신은 항상 새롭게 해 주는 역사를 하신다. 예를 든다면 푸른 나뭇가지에는 항상 새로워지는 일이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이 산 믿음을 가지게 될 때에는 예배를 드리든지 기도를 하든지 항상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에 있어서 새로워지는 역사가 있게 되는 것이다. 겨자씨 한 알이 큰 나무를 이루듯이 산 믿음을 가진 자는 성신의 새롭게 해 주는 역사에서 큰 발전을 보게 된다. 생명이 있는 종교라는 것은 성신의 새롭게 해 주는 역사가 있으므로 최후 승리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성신의 새롭게 하는 역사에 있어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체험이 있게 된다.

  첫째 : 항상 마음이 새로워지는 일이 있게 된다.

  둘째 : 항상 말씀이 새로워지는 일이 있게 된다.

  셋째 : 항상 생활이 새로워지는 일이 있게 된다.

  인간이 볼 때는 뚜렷한 역사가 없다 하여도 마음이 새로워지고, 말씀이 새로워지고, 생활이 새로워지므로 완전 인격과 완전 지식과 완전 생활의 열매를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복된 가정과 복된 교회와 복된 나라를 이루게 되는 열매는 인간의 힘을 초월한 성신의 새롭게 하는 역사에 있는 것이다.

 

  3.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 (6~7)

  그리스도께서 풍성한 은혜를 하나님께 받으셨으므로 그로 말미암아 우리도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게 된다. 모든 사람이 같은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체험한 자는 많지 못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는 자기 개인적인 신앙 하나를 위하여 노력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남을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서는 종들에게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분량이 각각 다른 것이다.

  강단에 서는 종이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지 못한다면, 그 교회를 부흥시킬 수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강단을 통하여 모든 피곤한 영들이 소성을 받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가 점점 더 부패되어 가는 것은 강단에 서는 종들이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풍성한 은혜를 받지 못하고, 강단에 서게 될 때에 넘쳐흐르는 역사가 없으므로 은혜를 갈망하던 양떼들이 실망을 하고, 세속으로 치우치는 일이 있게 된다.

  나의 체험으로 말한다면 강단에 서는 종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풍성히 받지 못할 때에 설교하는 자의 자신부터 복잡한 마음으로 생활하게 된다고 본다. 그리고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으면서 강단에 서는 종이 된다면 평강에 평강을 누리는 생활에서 모든 일이 다 자유로운 열매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라는 것은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으므로만 해야 할 의무를 완전히 다하게 된다. 누구든지 풍성한 것을 받지 못한다면 자동적으로 의로운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불행을 가져오는 부패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풍성히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한 직업에 불과한 일이 되고 말 우려성이 많다. 오늘의 교회가 목사의 직업소라고 하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 것은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지 못하고 강단에 서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풍성히 부어 주는 역사를 받으므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생활에서 의로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4. 선한 일을 힘쓰게 하는 역사 (8)

  하나님께서는 선한 일을 직접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사람을 들어서 하게 하시되 성신으로 역사하신다. 이것은 사람에게 성신의 격동을 주어서 선한 일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마귀의 역사를 충만히 받은 사람은 정욕이 발생하므로 죄를 짓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요, 성신의 역사를 풍성히 받은 사람은 사랑의 불이 타므로 선한 일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자리에 들어가게 된다.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항상 의의 격동이 마음에 있으므로 남을 살려 보겠다는 불타는 마음에서 고생을 낙으로 알고 일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한 일을 하지 않고는 마음이 괴롭고, 선한 일을 항상 해야만 마음이 기쁘도록끔 역사하는 것이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역사이다.

 

 결 론

  의라는 것은 하나님밖에는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아니고는 마귀를 이길 수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서 인간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믿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타락한 인생이라도 중생케 하는 동시에 생명으로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하는 동시에 역사를 풍성히 부어 주시고, 풍성히 부어 주시는 동시에 선한 일을 힘쓰도록끔 역사하신다.

 

 

히브리서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는 진리

( 히 2 : 9 - 18 )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것을 주시되 고난을 통과한 자라야 주신다는 것이 진리의 대지가 된다. 고난이 없이 온전이 있다는 것은 공의가 아닌 미혹이 되는 것이다. 언제나 마귀란 놈은 모든 것이 고난이 없이 될 것 같이 믿어지게 만들어서 미혹을 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도 자기의 말만 들으면 하나님같이 된다는 말에 미혹을 받아 타락한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온전한 것을 주고자 하실 적에 당신의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것을 주는 법을 실천하신 것이다.

  이제 고난으로 온전케 하는 진리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1. 고난을 당하므로 영광과 존귀가 있게 하심 (9)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므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의 법이었다. 독생자가 잠깐 동안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므로 만 왕의 왕이 되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천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법을 완성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원인 동시에 하나님의 의를 완성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실천이 없이 영광을 받으시는 신이 아니요, 실천하므로 이루어지는 일을 영광으로 받으시는 것이다.

 

  2.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 (10~13)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를 얻게 되는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한 형제라 부르는 것으로 하나님은 만족을 삼으신다. 온전이라는 것은 세계 인류가 하나가 되는 일이 아니고는 온전이라는 것을 이룰 수가 없다. 이 날까지 여러 방면으로 활동하는 자가 있었지만, 하나를 이루지 못하였고, 세계 인류를 한 형제가 되게 만드는 역사는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3. 고난으로 말미암아 마귀를 없이 하심 (14)

  그리스도의 고난이 없이는 사망의 권세 잡은 마귀를 없이 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마귀의 자식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이것이 오히려 마귀가 망하게 일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들어 쓰시는 것은 마귀를 유익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요, 마귀는 온전한 나라를 이루는데 한 도구로 쓰는 것 뿐이다. 십자가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마귀를 없이 하는 일은 다음과 같다.

  첫째 : 해방을 주는 일과

  둘째 : 마귀를 없이하는 일을 하시므로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믿으므로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의 수를 채우시고 다음에 마귀를 심판하신다.

 

  4.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항상 도우시는 일을 하심 (15~18)

  십자가의 고난은 한 번 죄를 사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고, 아무런 시험이 오더라도 돕는 역사가 있으므로 승리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십자가의 피로 산 백성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으므로 무조건 항상 도와줄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남을 도와주는 것은 법이 없이는 도울 수 없지만, 내 것을 내가 간수하는 일은 마땅히 할 의무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 우리를 돕는 것은 얼마든지 도울 수 있는 의무가 있으니 이것은 십자가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았기 때문이다.

 

 결 론

  고난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 자기의 죄 값으로 받는 고난이요,

  둘째 : 남을 살리기 위한 고난도 있는 것이다.

남을 살리기 위한 고난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있는 것이요, 사람이 사람을 위해서 고난을 받았다는 조건으로 남을 살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의로우신 예수님의 고난으로만 온전한 것을 이루는 것이다.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

( 히 7 : 18 - 25 )

 

  언약이라는 것은 예언적인 언약도 있고, 실천적인 언약도 있다. 구약 시대의 지성소에 드리는 대제사장의 직분은 예언적인 언약의 증거라면 신약 시대의 이루어진 언약이 영원한 속죄를 이룬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언약을 실천하는 일의 보증이 된다. 예를 든다면 구약 시대는 죄를 지으면 용서 없이 죽인다는 율법을 기준 하여 세워진 언약이며 언약의 증거요, 신약의 은혜는 얼마든지 살려 준다는 언약의 보증이다.

  다시 말하면 첫째는 공의를 목적 둔 것이라면 둘째는 사랑을 목적한 것이다. 죄를 지으면 용서 없이 죽인다는 언약을 받은 민족도 복되다 하였거든 얼마든지 살려 준다는 언약의 보증이 되시는 예수를 믿는 자에게 그 축복이야말로 감히 인간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본문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계명은 무익하므로 폐하고 좋은 소망이 생기게 함 (18~19)

  하나님께서 계명으로만 행하는 하나님이라면 그 하나님은 무능력한 하나님으로 보게 된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물 밖에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정신을 차리라, 여기로 나오너라” 하는 말을 해 보았던들 그 사람을 물에서 건져낼 능력이 없다면 “정신을 차려라” 하는 말이나 “물에서 나오라” 하는 말은 하등 필요가 없는 말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죄악의 물결에 휩쓸려 들어간 인생들을 향하여 “정신을 차려라, 죄에서 나오너라” 하더라도 그 인생을 끌어내어 올 능력이 하나님께 없다면 그 계명은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익한 법은 폐지하고 좋은 소망을 인생에게 준 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계명을 가르친 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알도록 선포한 것 뿐이요, 그 계명을 인간이 행할 수 있다는 조건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행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는 법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하기 위한 과정에서 예언적인 증거를 보여준 것뿐이다. 인간이 행하므로 된다는 것은 소망이 될 수 없고, 인간이 행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행함으로써 인간을 구원해 준다는 것이 소망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 힘으로 도저히 나올 수 없으나 다른 사람이 구원선을 타고 물에 빠진 자를 끌어 배에다 올려놓듯이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교회를 구원선과 같이 세운 것은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제를 드리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여 성신을 내려보내므로 죽은 영들이 살아나는 교회가 이루어질 때에 이루어진 교회에서 전도하는 목적은 누구든지 이루어진 교회에서 나와서 은혜를 받으라는 것이다. 누구나 믿음으로 교회에 들어올 때에 다 같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2.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심 (20~21)

  하나님께서 맹세를 세우되 아브라함에게는 “네 씨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는 맹세를 세웠고(창22:16~18),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맹세는 완전한 속죄제를 완성하시고 누구든지 믿으면 이루어 준다는 맹세이니 이 맹세로만이 완전이라는 것을 이루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먼저 맹세는 아들을 보내서 만민의 죄를 위하여 영원한 속죄가 되게 한다는 것을 목적했지만, 은혜시대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으니 이 언약의 피를 믿으면 무조건 구원한다는 맹세이다.

 

  3. 항상 살아서 간구하시므로 (22~25)

  만일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 하여도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 없다면 보증적인 역사가 될 수 없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보증을 서고도 책임을 할 능이 없어서 활동을 못한다면 그 보증은 무효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속죄를 완성하시고 맹세를 세운 동시에 그 맹세대로 실천하기 위하여 항상 택한 자를 위해 간구하는 기도가 있으므로 택한 사람에게 예정대로 모든 것을 다 이루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속죄는 물에서 건져 주는 역사라면 간구하는 기도는 물에서 건져낸 사람을 완전하게 만들어서 완전한 일을 하도록 해주는 거와 같은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보증을 서고도 그대로 못하는 수가 있지만, 우리의 보증이 되신 예수님은 언약의 말씀대로 몽땅 다 행하시는 보증이시다. 가장 완전한 일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보증적인 인격을 가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이다.

 

 결 론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증을 서 주는 신앙이라고 보게 된다. 완전한 계약서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한 언약의 속죄의 피가 이미 우리를 살려준 일이니 보증적인 그리스도의 역사로만이 앞으로 오는 모든 난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

( 히 10 : 9 - 18 )

 

  그리스도는 영원한 것을 인생에게 주기 위한 활동을 개시할 때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었다. 종교라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것이 종교의 중심이 되는 동시에 그 제사를 통하여 그 종교는 모든 일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는 영원한 제사를 드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다.

  우리는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예수를 믿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1. 폐하고 세우신 것을 믿는 것이다 (9)

  우리 인생 자체가 무엇을 폐하고 세웠다는 것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폐하시고 세운 것은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는 조건이 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율법에 관한 것을 폐하지 않고 믿으라 하는 것이라면 우리 죄인들은 감히 그를 신앙할 수가 없다. 왜냐 하면 율법으로는 저주를 받아야 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는 완전히 세운 것이 없다 해도 믿을 수 없다.

  왜냐 하면 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한 목적이니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죽으시므로 폐할 수도 있고, 세울 수도 있는 조건이 확립된 것이다. 십자가에 죽으므로 율법의 저주는 폐한 바 되고 은혜의 법은 세운바 된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무 조건 없이 법을 세웠다가 폐하고 아무 조건 없이 세우기도 한다면 이것은 진리의 신이라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그대로 행치 않고, 그 말을 취소하고 또 다른 말을 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신용이 없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말한 다음에 그 말을 폐하는 것도 합법적인 조건이 성립되고 다른 방법으로 세우는 것도 합법적인 조건이 성립되게 하는 자라면 이 사람은 법의 사람이니 그 사람을 참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고 그 말씀을 폐하는 것도 당신이 조건이 있게 폐하시고 다시 새로운 일을 세우는 것도 합법적인 조건이 있게 세운 것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라는 것이다.

 

  2. 단번에 거룩함을 얻게 하심 (10)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라는 것은 그 몸을 단번에 드리어서 영원히 다시는 제사를 드릴 필요조차 없이 된 것을 가르친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고라도 그것이 완전 거룩을 주는 열매가 없다면 우리는 그 십자가를 믿을 수 없는 것이로되 우리가 1900여년 전에 죽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원한 속죄를 믿음으로 지금도 우리 마음에 거룩을 주는 증거를 받을 때에 영원한 속죄가 된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 수 있다.

 

  3.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으므로 (11~12)

  우리의 신앙의 대상자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속죄제를 드리었으므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지금은 대언의 기도 한 마디면 얼마든지 세계 만민을 살릴 수가 있는 특권을 가지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한 번 말할 때에 하나님은 그 말에 응답을 나리게 되는 것이 예수님 이름으로 오는 응답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다 시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14:13).

 

  4. 원수를 갚는 권세가 있음 (13)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제는 죄를 사하는 특권이 있는 동시에 원수를 갚는 권세가 따르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으므로 그 피를 믿는 사람은 의롭게 여기는 동시에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 억울함을 당하는 것은 원수를 갚아 주는 동시에 억울함을 당한 당신의 사람에게는 상급을 주고 당신의 사람을 억울케 하던 자는 멸망을 시키는 것이다.

 

  5. 영원히 완전케 하심 (14~18)

  주님께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으므로 죄를 사해도 영원히 다시 기억하지도 않는 것이요, 영원히 영생을 누리게 하는데는 영원한 기업을 주시되 무엇이나 영원한 것으로 갚아 주는 것이다.

 

 결 론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는 우리에게 완전을 주기 위한 제사이니 그 제사로만이 하나님의 뜻은 완전히 이루어지되 피조물된 인간에게 주고자 하는 모든 것이 전부 영원한 제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 일

( 히 12 : 1 - 14 )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여러 가지로 시련과 징계를 주시는 것은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기까지 목적을 두고 하시는 것이다. 의라는 것은 하나님 자체에 있는 것인데 두 가지로 보아야 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역사하시는 것이요,

  둘째는 당신이 사랑하는 자의 의를 나타내게 하여 완전한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의와 성도의 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증거한다.

 

  1. 하나님의 의 (1~3)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사랑하는 자를 완전케 하고자 하시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대로 버려 두는 것이 아니요 사람이 아무리 타락하고 당신을 멀리 떠났어도 그 사람을 다시 완전케 한다는 것이 의라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의의 역사를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얽매이기 쉬운 죄의 세력을 허락하신 것이요(1),

  둘째 : 완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게 하신 것이요(2),

  셋째 : 거역하는 자를 향하여 참으신 것이다(3).

  하나님께서 죄의 세력을 용납하신 것은 당신의 의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아무리 인생이 죄에 얽매었다 하여도 이것을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일을 하시므로 하나님의 의는 완전히 나타난 것이다. 가장 간교한 뱀을 창조하여 하나님을 의심하도록 시험해 보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의심하더라도 택한 자는 버리지 않는다는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아담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하신 것이 아니요, 둘째아담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의로우신 것을 나타낸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 독생자의 의를 세상에 나타내기 위한 목적이다. 인간들이 죄에 얽매어 타락했지만 독생자로 말미암아 세계 인류가 죄에서 해방을 받고 천국이 이루어지는 일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큰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하였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으로 죄인들이 피곤하여 낙심치 않게 하기 위하여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을 완전한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에서 역사하는 그 힘으로 말미암아 받게 된다.

 

  2. 성도의 의 (4~14)

  성도의 의라는 것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징계를 달게 받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이제 성도의 의로운 행실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첫째 : 징계를 받을 때에 낙심하지 않는 일이요(4~6),

  둘째 : 징계를 받을 때에 더욱 복종하는 일이요(7~9),

  셋째 : 징계를 받고 난 뒤에 화평과 거룩을 좇는 일이다(10~14).

  사람이라는 것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징계가 없이는 의로운 일을 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는 것은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기까지 목적을 두고 하시는 것이다.

  사람 자체가 행함으로써 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옳은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깨닫는 것을 의로운 생각이라고 하며 아무리 징계가 있어도 더욱 순종하는 일을 하면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따라서 화평과 거룩을 좇는 일을 하므로만 하나님의 참된 종이 될 수가 있다.

  인생이라는 것은 낙심하지 않고 더욱 순종하며 따라가는 것밖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세 가지를 행하는 자라면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 단계에 들어가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징계를 달게 받고 순종하는 것밖에는 아무런 것도 할 수 없다. 가장 큰일은 그리스도께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여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순종하는 사람에게 완전하게 되도록 역사하시는 일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자연계를 창조하실 때에 의의 평강한 열매로서 영원한 왕국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신님께서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기까지 역사하시는 것을 기독교의 완전 승리의 역사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승리로 완전한 의를 완성하였고 모든 사람들은 그 의를 믿고 순종할 때에 그 의의 역사는 순종하는 자들에게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것을 의의 평강한 열매라는 것이다.

 

 

참된 제사가 있는 생활

( 히 13 : 12 - 17 )

 

  사람의 가장 가치 있는 생활은 참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이라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참된 제사를 드리는 자에게만 역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앙 생활이 있다 하여도 참된 제사를 드리지 못한다면 그 신앙 생활은 자동적으로 외식이 되고 말 것이다. 가장 허무 맹랑한 생활은 신자라 하면서 참된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생활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진노의 날에 남은 자가 되려면 참된 제사가 있어야만 그 생활에는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니 참된 제사에 대하여 성경 본문으로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1. 몸을 희생하는 생활 (12~13, 롬12:1)

  우리 몸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바칠 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나가려고 하는 자라면 그 몸은 하나님이 받아쓰시는 도구가 되므로 자동적인 제물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되 사람의 몸을 통하여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소불능의 신은 아무리 부족한 인생이라도 그 몸을 하나님께 희생으로 바칠 때에 무조건 들어서 쓰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참된 가치라는 것은 그 몸이 평안한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몸을 참된 진리를 위하여 희생하는데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 몸을 어디 바치든지 바치는데 따라서 그 생활은 좌우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 몸을 바로 바치느냐 못 바치느냐에 따라서 모든 열매는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금일에 많은 기독교인이 있지만, 그 몸을 완전히 바치지 못하는 생활에서는 아무런 체험적인 생활을 맛볼 수 없는 것이다.

 

  2.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생활 (14~15)

  누구든지 완전히 몸을 바치는 생활에는 찬송이 인격이 되고 생활이 될 때에 그 찬송은 하나님께 제사가 되는 동시에 입술에 열매가 되는 것이다. 가장 하늘에서 기뻐하는 것은 몸을 바치고 싸우는 종들이 우렁차게 찬송을 올릴 때에 그 찬송은 제사가 되므로 응답이 내리는 것이다. 금일에 소위 교회가 찬송을 부르는 일에 제사가 못된다면 그 예배는 한 의식에 불과한 예배가 될 것이다.

  찬송의 제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첫째 : 성결한 마음으로 찬송할 때에 제사가 된다. 찬송은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불탈 때에 그 진리를 입으로 불러 찬송하는 것은 그 심령이 하나님의 세계를 향하는데서 영적으로 신의 세계와 화답이 있게 된다.

  둘째 : 마귀를 대적하는 마음에서 담대히 부를 때에 찬송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제사가 되므로 마귀가 물러가는 새로운 힘이 내리므로 승리의 열매가 된다.

  셋째 :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를 때에 하나님은 그 찬송을 영광으로 받으시고 그 종의 생활에 더욱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있도록 역사를 나리시는 것이다.

 

  3. 서로 접대하는 것이 제사가 됨 (16~17)

  항상 남에게 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의 생활은 하나님께서 제사로 받으시고 얼마든지 줄 것이 있도록 응답을 나리신다. 우리가 받지 못하는 것은 주고자 하는 마음이 적을 때에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종된 생활은 남에게 주지 못하는 것을 눈물겹게 생각할 때에 이것이 제사가 되므로 항상 그 종을 통하여 차고 넘침이 있게 한다. 그러므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무엇을 주시되 사랑하는 종을 통하여 주시기 때문에 항상 남에게 주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한 자를 통하여 역사하시므로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는 생활은 받는 자에게 있지 않고, 주는 자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했으니 이것은 주는 것이 제사가 된다는 뜻이다.

 

 결 론

  제사라는 것은 언제나 희생이 없이는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주기를 기뻐하시되 제사를 받으신 후에야 주시는 것이니 몸을 제물로 바치고 입으로 찬송하며 손으로 봉사하는 생활이 있어야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을 받는 생활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