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전서

  

목  차

1. 말세에 나타난 구원( 벧전 1 : 3 - 7 )

2. 말세에 나타난 주님의 역사와 재림시의 역사 (벧전 1 : 20, 계 22 : 4 ~ 13 )

3. 순종과 성결( 벧전 1 : 20 - 25 )

4.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일( 벧전 2 : 11 - 17 )

5.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게 되는 일( 벧전 4 : 7 - 16 )

 

베드로 후서

1. 재림에 대한 징조와 확실한 예언( 벧후 1 : 12 - 21 )

2. 주 재림과 성경 해석 문제( 벧후 1 : 16 - 21 )

3. 진 자는 이긴 자의 종( 벧후 2 : 18 - 22 )

 

 

요한일서

1.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 ( 요일 1 : 1 - 6 )

2. 본 것을 증거하는 요한의 사명 ( 요일 1 : 2, 계 1 : 2 )

3. 우리의 대언자 예수 ( 요일 2 : 1 - 2, 28 - 29 )

4.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 자 ( 요일 2 : 1 - 2, 28 - 29 )

5. 가르친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 ( 요일 2 : 24 - 29 )

6. 소망과 성결 ( 요일 3 : 1 - 3 )

7. 하나님의 사랑과 성결 ( 요일 3 : 1 - 9 )

8.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예수 (요일 3 : 4 - 12 )

9. 마귀 일을 멸하러 나타난 예수 ( 요일 3 : 7 - 8 )

10. 사랑과 인격 (요일 3 : 13 - 19 )

11. 담대함을 얻은 자의 기도 ( 요일 3 : 13 - 24 )

12. 온전한 것을 이루는 사랑 ( 요일 4 : 9 - 12 )

13.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요일 4 : 16 - 21 )

14.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인격 ( 요일 4 : 17 )

 

요한이서

교훈 안에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 ( 요이서 1 - 11 )

 

유다서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우는 생활 ( 유 3, 20 - 22 )

심판 날에 정죄 받을 행위 ( 유 4 - 16 )

사도들의 예언을 기억하라 ( 유 17 - 23 )

 

 

 

 

말세에 나타난 구원

( 벧전 1 : 3 - 7 )

 

  하나님은 말세의 구원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모든 선지에게 언약을 세울 때에 목적을 구원이라는 것을 인간에게 베풀겠다는 것이 언약의 총 대지가 된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런 실수가 없이 생활할 수 있는 인격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자가 실수가 있어도 구원을 베풀어서 당신의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택한 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경륜이라고 보게 된다. 아담 하와가 범죄할 것을 모르신다는 것보다도 범죄 하더라도 구원해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를 짓게 하는 신은 아니시다. 택한 자가 약해서 쓰러져도 다시 일으켜 주고 어리석어서 속아도 깨우쳐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니 말세에 나타난 구원이라는 것은 언약을 세워 놓으실 때에 실천적인 언약을 세운 것을 구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택한 성민에게 여호와가 나타나서 말세에 구원할 일을 증거로 보여 주는 동시에 빠짐 없이 말씀을 받아 기록하게 한 것을 성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한 후에 행하는 일은 전부가 차별 없는 구원인데 이 구원은 말세에 하나님 말씀대로 실천하는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이라는 것이다.

 

  1. 하나님의 긍휼 (3)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것은 어떠한 자에게 임하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 자기가 날 때부터 아무런 이유 없이 원죄 아래서 나게 되는 일을 하나님은 불쌍히 본다. 왜냐 할 때에 아담, 하와가 어리석어서 미혹 받으므로 선악과를 먹고 모든 인간들이 다 무조건 죽게 되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원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 : 우상을 공경하는 나라에 태어난 사람들이 그것이 옳은 줄 알고 몰라서 섬긴다는 것은 그 자손들에게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셋째 : 억울하게 마귀의 권세 아래서 자기 힘으로 벗어날 수 없게 된 인간을 볼 때에 그들을 불쌍히 보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의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든다면 사람끼리 길을 가다가 어떤 사람이 억울하게 알지를 못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로 떨어져 내려간 사람을 건져 낼 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둔다면 건져낼 힘이 있는 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해 줄 수 있는데 인간을 긍휼히 보지 않는다면 그 하나님은 타락한 인생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신이라고 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쌍히 보되 아들을 대신 죽게 하고, 다시 부활시키므로 누구든지 예수만 믿으면 무조건 구원해 준다는 것은 말세에 나타난 마지막 방법이라고 본다.

 

  2. 다시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주심 (4)

  하나님께서 이 천지 만물을 창조한 것은 완전한 기업으로 준 것이 아니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받을 수 있는 인격을 이루기 위하여 사용하는 일용품이라고 본다.

  하나님 자체는 전부가 쇠하지 아니하는 것만을 가지고 계신데 이것을 주고자 할 때에 아무 사람이나 덮어놓고 준다는 것은 공의가 아니다. 반드시 어떤 공로가 있어야만 썩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받는다는 것이다.

  공로라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으로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통하여 일을 하게 하되 완전한 기업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을 많이 내라는 것이 사람에게 맡긴 사명이다. 그런데 사람이 의로운 씨를 내지 못하고, 악한 씨를 내게 되므로 사람은 완전한 기업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없고 전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많이 생산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할 일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둘째아담 예수를 나게 한 것은 영원한 기업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을 많이 내는 방침을 세운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맡은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공로로는 도저히 쇠하지 않는 기업을 얻을 수 없게 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공로를 세워서 그 공로를 믿음으로만이 그 기업을 얻게 하는 동시에 믿는 자는 무조건 그 기업을 받고 믿도록끔 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복음을 전하던 자는 남을 믿도록 했다는 공로에서 믿을 수 있는 공로를 세운 예수님과 같이 왕권의 기업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공로를 믿으므로 시민권을 받고, 십자가 공로를 믿도록끔 증거하기 위하여 순교의 생활을 한 사람은 왕권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썩지 않는 기업에도 왕권과 시민권이 있는 것이다.

 

  3. 능력으로 보호하심 (5)

  하나님은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은 어떤 의식이나 도덕을 따라서가 아니고, 다만 택한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능력으로 보호의 역사를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은 약한 인간을 보호해 주는 일이 아니라면 그 능력은 아무런 열매를 나타낼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내게 능력을 주어서 역사하는 그의 역사를 따라 수고한다고 하였다(골1:29).

  하나님의 종에게 능력을 주는 것은 그 종을 위하여 주는 것이 아니고 택한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능력으로 보호함을 받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믿고 용기있게 나갈 때에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게 될 때 능력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4.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심 (6~7)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시험을 통과시키는 것은 구원을 받는 자로서 완전한 영광을 왕권으로 받게 하기 위한 목적이다. 같이 구원을 받아도 시험을 많이 당해서 이긴 자와, 시험을 통과해 본 일이 없이 평안히 나간 자와에 차별이 있되 시민권과 왕권으로 차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말세에 구원을 나타내는 동시에 여러 가지 시험이 시련과 연단으로 닥쳐오게 하는 것은 주 재림시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는 자를 완전히 수를 채우기 위한 목적이다.

 

 결 론

  아름답다! 구원을 받은 자여, 가장 복 있는 말세에 구원을 받게 된 자여, 모든 일에 감사하라. 항상 찬송하자. 무조건 감사하고 영광을 돌릴 것 뿐이다. 구원을 받은 자라면 하나도 원망할 일은 전혀 없다고 본다.

 

 

말세에 나타난 주님의 역사와 재림시의 역사

- 벧전 1:20~23, 계 22:10~13 -  

 

서 론   

말세라는 것은 선지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때를 말세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야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으로 올 때부터가 말세라는 것을 말하였다. 왜냐하면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흘린 피는 세계 만민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 다 하루같이 하나님은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 다시 오시는 주님은 심판기에 오시는 것이니 말세에 온 것이 아니고 심판하러 오시는 것이다. 이제 주님께서 나타난 일과 다시 오시는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성경을 통하여 알 수가 있는 것이다.  

1. 말세에 나타난 주님의 역사 (벧전1:20)  

 1) 믿음과 소망을 위한 역사이다(벧전1:21).  

우리는 믿음으로써 되는 일은 말세에 종말의 세계적인 완전 구원의 역사이니 그리스도께서 말세에 나타나심이 아니면 세계 인류는 아무런 소망 없는 인간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을 주려고 오신 것은 심판기에 구원받을 사람을 얻기 위한 목적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믿음과 소망을 주는 역사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세계를 심판할 권리를 행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소망을 주는 일이 있는 다음에 심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와 사랑의 법칙이다.  

 2) 중생의 씨를 주는 것이다(벧전1:23).  

중생의 씨라는 것은 썩지 아니할 씨이다. 만일 주님께서 믿음과 소망을 준다 하여도 그 씨가 내게 와서 자라난 역사가 없다면 완전한 역사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영생의 씨인 생명을 중생으로 받아 들여 이것으로 말미암아 자라서 완전한 열매를 이루는 것이다.  

2. 심판주로 오실 때의 역사 (계22:10~13)  

 1) 예언의 말씀을 개봉한다(10).  

심판기에는 중생의 씨를 받은 사람에게 예언대로 심판을 나리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의 씨를 받은 사람을 위하여 오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중생을 받은 자라도 예언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면 재앙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예언이다. 이것은 재앙 속에서 살아서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자에게 해당될 교훈이다. 그러므로 그때는 진노의 주님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봉한 책의 비밀을 그들이 알도록끔 전해주는 역사를 하게 된다.  

 2) 불의와 의를 갈라놓는 역사(11).  

이때는 악한 자는 더욱 악하여지고 더러운 자는 더 더러워지고 의로운 자는 더 의로워지고 거룩한 자는 더 거룩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가을에 추수기가 임박하여 쭉정이는 완전히 쭉정이로 마르고 알곡은 완전히 알곡으로 굳어지는 것과 같다. 세밀히 말하자면 알곡 될 사람은 예언의 말씀을 꿀같이 받아먹을 것이오 쭉정이가 될 사람은 오히려 예언의 말씀을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3) 일한 대로 갚아주는 역사이다(12).  

갚아주는 일은 두 번 다시없는 것이니 재림할 때에는 일한 대로 갚아주고 대심판 때에는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는 것이다. 이것을 행위 심판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 한대로 갚아주는 것은 종된 자를 표준한 것이요 행위대로 갚아주는 것은 일반적인 백성에게 해당된다.   

결 론  

예수를 영접함으로써 중생의 씨를 받은 것이요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일한 대로 갚아줌을 받아서 왕국의 권세를 계급에 따라 왕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중생의 씨를 받은 데서 끝을 맺는 것은 절대 아니다. 씨를 받은 자로서 맡은 일에 따라서 갚음을 받는 것으로써 재림의 주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순종과 성결

( 벧전 1 : 20 - 25 )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고, 순종하는 자에게 성결함을 주어서 당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기독교의 완전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은 우리를 완전하게 할 하나님의 진리를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생명을 받느냐, 못 받느냐, 완전한 인격을 받느냐, 못 받느냐는 문제가 결부되는 것이다.

  이제 순종과 성결에 대하여 본문을 들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진리를 순종할 일

  1) 우리를 위하여 나타났으므로(20)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당신을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신이 아니고, 친히 말씀하시고 예정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생을 찾아 와서 모르는 인간들에게 알도록 나타내는 것을 하나님의 진리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조건 나타난 진리를 순종하는 것만이 타락한 인생의 할 일이라는 것이다.

  만일 인생이 요청하는데 의하여 하나님께서 맘을 돌이켜 주신다는 것은 복음 진리의 원칙이 아니고, 인생이 알지도 못하고, 구하지도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아시고, 우리 인생을 깨우쳐 주고, 구원하기 위하여 나타난 것이 그리스도의 도성 인신의 역사라는 것이다.

  2)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했으므로(21)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었다 부활했다는 것이 진리의 전체의 큰 뜻이 되는 것이다. 만일 인생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옳은 도리를 가르쳤다 하더라도 그 목적을 달성해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실천하는 역사가 없었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진리가 인생을 향하여 분명히 기록되었다 하여도 인생 자체로는 도저히 그 진리를 믿을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는 것이 인생이므로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공의의 법칙을 따라 행하지 않고, 사랑의 법칙을 행하기 위한 선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공의의 죄 댓가를 무조건 없애 버린다는 것도 진리가 아니요, 또는 인간이 죄가 있다고 덮어놓고, 공의의 법칙을 인간에게 행하여 죽인다는 것도 하나님의 진리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진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대신 죽고 다시 살아서 인생에게 완전한 소망을 주어 그 소망 아래서 기쁨으로 순종하게 하는 것이 생명이 있는 진리 운동이라는 것이다.

 

  2. 성결하게 하는 일

  1) 영혼을 깨끗케 하심(22)

  하나님은 사람을 성결케 할 때에 먼저 그 영혼을 성결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이라는 것은 마귀의 지배를 받을 적에 마귀의 종이 되고 하나님 신의 지배를 받을 적에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니 우리가 피차에 사랑하고 하나가 되는 것은 사람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영혼을 깨끗케 해 주셨으므로 피차에 거짓없이 서로 사랑하는 단체를 이루는 것이다. 만일 어떠한 교회에서 사랑이 떠났다면 그것은 그 영이 죽은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의 성결한 사랑이라는 것은 육체의 정욕을 채우는 방랑적인 사랑이 아니요, 먼저 영혼이 깨끗하게 되므로 자동적으로 맘이 뜨거워지는 사랑이 있게 되므로 자아라는 것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 뿐으로써 하나를 이루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깨끗함을 주었으므로 자기라는 것이 결부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되는 것뿐이다.

  2) 영생의 씨를 받았으므로(23)

  우리는 성결함으로써 영생을 받는 것이 아니고, 썩지 않는 영생의 씨가 왔으므로 그 생명이 우리에게 약동할 때에 자동적으로 성결을 이루는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승리할 수 있는 생활에 들어간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거룩한 말씀이니 그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는 성결이라는 것은 필연적인 열매가 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인생에게 요구하는 것은 순종밖에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행함으로써 완전하게 되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당신이 행함으로써 완전하게 되는 것을 요구하는 신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을 창조할 때에 한 질그릇에 불과한 인격을 주었던 것이다. 이것은 아담을 통하여 천국을 이룰 것을 뜻한 것이 아니고, 둘도 없는 독생자의 역사로만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순종함으로만이 성결한 인격을 이루는 동시에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을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일

( 벧전 2 : 11 - 17 )

 

서 론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 종된 자로서 마땅히 해야할 본문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 하는데 대하여 본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1.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일 (11~12)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이라는 것이다. 모든 일에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하는 근본은 육체의 정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싹이 트는 것이다.

아무리 사람 앞에는 모든 일을 잘 한 것 같으나 육체의 정욕을 따르는 일은 주님 나타나는 날에 오히려 큰 벌을 받을 것이니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이라는 것이다(마24:49~51). 주님께서 자기가 가장 옳다고 주장하는 바리새교인을 보고 “네 아비는 마귀라” 한 것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요8:44).  

2. 인간이 세운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는 일 (13~15)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를 덮어놓고, 무시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정치적인 제도도 악행 하는 자를 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세운 제도이다. 만일 주님을 위한다는 자가 인간 제도에 어긋나는 일을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게 되고, 또는 주님을 중심해서 그 제도를 순종치 않는다는 것도 영광이 못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 제도를 순종하되 주를 위해서 해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도 주님을 위하여 모든 일을 행할 때 그 결국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이다.  

3. 자유를 바로 사용하는 일 (16~17)  

자유란 바로 사용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요, 자유를 악용하면 그 자유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될 것이다. 분문은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 된 자의 자유를 가져야 할 것이다. 종 된 자의 자유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불타는 데서 되는 일이다.

사랑에 불타는 심정 속에서 사람을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는 것이다. 자유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죄를 이기는 자유를 받은 자이니 형제나 나라를 위해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생활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건설적인 자유를 말한 것이다. 과거에는 죄의 종 된 자로서 교만의 종이 되고, 욕심의 종이 되고, 인간 물질의 종이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종과 같이 건설적인 생활에 들어가는 것을 참된 자유라 하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일을 위하여 사는 것을 성도의 가치 있는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제일 무가치한 생활은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따라가는 일이요, 인간 제도에 뒤떨어진 일이다. 즉 자유를 악용하는 일, 이것을 무가치한 생활이라고 본다. 그러나 영광 되는 일은 자체의 정욕을 이기고, 사회적인 제도의 선구자가 되고, 진정한 자유의 종이 되는 생활을 하나님께 영광 되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게 되는 일

( 벧전 4 : 7 - 16 )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자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무조건 열심을 낸다는 것은 열심이 없던 자보다도 오히려 더 타락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게 되는 일은 어떠한 일이라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분명히 우리는 알아야 한다.

 

  1.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할 일 (7)

  기도 생활에 있어서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는 것이 없다면 오히려 기도를 하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보다도 욕을 돌리게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도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죄가 있다든지 말씀이 혼선되면 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지극히 작은 죄라도 있을까 항상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는 일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무조건 믿으면 된다든지 구하면 준다 하는 정도의 신앙은 아무런 열매 없는 나무같이 될 수도 있다.

  영광이라는 것은 인간 행위로서는 나타날 수 없고, 기도 응답으로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육적 이스라엘이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여도 이방 세력에게 망하여 큰 수치를 당하게 된 것은 정신을 차릴 일에 정신을 차리지 않고, 삼갈 일에 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 생활에는 방탕의 생활이 있는 것이 원칙이요, 소망이 있는 생활에는 정신을 차리고, 삼가는 생활이 있는 것이 원칙이다. 누구든지 정신을 차리고 삼가할 마음으로 기도하는 자라면 그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2.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일 (8)

  사랑이라는 것은 열심이 없다면 아무런 열매가 없이 되고 만다. 어떤 사람이 사랑한다 하면서 열심이 없다면 그 사랑은 아무런 열매가 없게 되므로 오히려 자신이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게 될 것이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 사람이라면 말씀으로 서로 사랑할 것이 없지만, 소망이 있는 사람으로서 열심으로 사랑치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수치를 당할 일이 된다. 그러므로 열심으로 사랑하는 일이 있어야만 죄를 이기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3. 원망이 없이 서로 봉사하는 일 (9~11)

  봉사라는 것은 사람에게 무엇을 얻고자 한다면 원망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갚아 주는 것을 목적했다면 원망할 일은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시는 것은 섬김을 받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요, 오히려 섬기게 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자는 항상 서로 봉사하는 일이 있어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4. 시험을 당할 때에 기뻐하는 일 (12~16)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큰 영광을 당신께 돌리게 하는데 있어서는 인간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당하게 한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영광을 받기도 하시고, 영광을 주기도 하시기 위한 선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가장 큰 영광을 받는 일은 가장 큰 시험을 통과하는 일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한 것은 영광을 받기로 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정신을 차리고, 삼가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일과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일과 원망이 없이 봉사하는 일과 시험을 당할 때에 오히려 기뻐하는 일이 있어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동시에 세세 왕권을 받게 될 것이다.

 

 

 

재림에 대한 징조와 확실한 예언

( 벧후 1 : 12 - 21 )

 

서 론  

우리는 주 재림을 믿는 신앙에 대하여도 확실한 징조도 있고 확실한 예언도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우리에게 완전한 신앙을 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징조만 있고 확실한 예언이 없어도 불완전이요, 예언만 있고 징조가 없어도 완전한 것은 아니다. 징조가 확실하고 예언도 확실하니 이것은 합법적인 진리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제 징조와 확실한 예언을 성경으로 다음과 같이 찾아본다.  

1. 재림에 대한 징조를 봄 (16~18)  

이 날까지 기독교에서 재림에 대한 확실한 징조는 보여진 것으로 알고 있으나 확실한 예언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 자체도 징조는 내가 보았으나 확실한 예언을 분명히 모른다고 말했다. 베드로가 재림의 징조를 보았다는 것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변화산에 올라가서 직접 눈으로 그 영광도 보았고 주님의 자체를 보았고 똑똑히 음성도 들은 것이다. 이것을 보아서 확실히 주님은 강림한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또는 주님이 승천할 때 천사가 말했다(행1:11).

그러나 다시 온다는 징조는 친히 눈으로 보았으나 다시 올 때 예언은 계시록을 통해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은 어찌하여 재림의 징조는 있게 했으나 이 때까지 예언의 확실한 것은 알려주지 않는 이유도 있는 것이다. 이미 죽은 성도에게는 주님 다시 온다는 것만 알아도 만족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다. 십자가, 부활, 승천, 재림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이 신앙은 주님이 분명히 오신다는 것만 믿으면 된다.

왜냐하면 확실한 예언이란 주 재림을 살아서 환난 가운데 남은 종으로서 맞이할 자에게 해당되기 때문이다. 만일 죽어서 부활할 성도에게 예언을 지키라고 하면 이것은 이단설이 될 것이다. 이것은 때가 되기 전에는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 날까지 예언을 들고 활동하던 사람이 실패한 것은 그리스도만을 바로 믿기만 하면 될 시기에 월권적인 행동을 했던 것이다.  

2. 확실한 예언 (19)  

사도들은 확실한 예언이 있다는 것을 말했으나 해석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언이란 인간의 사사로운 생각으로는 풀 수가 없다는 것이다(20). 예언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할 때 하나님이 바로 해석하도록 해 준다는 것을 베드로가 그 때 사사로이 예언을 풀었던들 그는 사도의 자격을 잃게 되었을 것이다. 사도의 직분은 그리스도 한 분을 바로 증거해서 믿게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확실한 예언을 증거하는 총 대지는 계10:7일 것이다.

세상 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시기는 일곱째 나팔을 불 때니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한 말씀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비밀이 옛날 선지의 전한 복음과 같이 성령으로 잉태되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고 성신이 강림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사명이다. 그러나 심판기의 사명자는 세상이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는 것이 선지의 예언대로 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심판기의 종들이 전할 사명이다.

그러면 심판기에 남은 종들은 모든 환난과 재앙과 또는 남은 종과 남은 백성이 선지의 예언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의 다림줄을 바로 쥐고 나가서 다시 예언하는 역사이다. 다시 말하면 미분명한 해석을 분명히 해석해 준다는 뜻이다. 만일 환난과 재앙이 올 때 확실한 예언을 증거 못한다면 기독교는 흑암에 빠지고 말 것이다.

예언은 등불이라 할 것이다. 등불은 어두움이 오는 밤에 필요한 뜻을 가르친 것이다. 이미 태양빛 같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로 믿게 하는 시대가 빛의 시대라면 신랑이 밤에 온다는 말과 같이 주님 올 때는 빛의 시대가 아니고 흑암 시대다. 흑암 시대가 올 때까지 예언의 등불을 들지 못한다면 주님을 맞이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기독교가 확실한 예언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촛대교회를 일으킬 수 없다. 촛대란 밤에 쓰는 등불이다.

우리는 사명적인 겸손이 있어야 한다. 베드로와 같은 심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확실한 예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믿으면 된다 하여 예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것도 교만이요, 자기 사명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예언을 해석 한데도 교만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니 하나님께서 확실한 예언을 나가 하도록 해줄 때 순종하는 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나가 증거할 것뿐이다(계12:11).  

결 론  

하나님의 역사란 징조가 먼저 똑똑하고 예언은 글자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약 때 양으로 제사 드린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징조를 보여준 것뿐이다. 십자가의 속죄를 완성할 때 징조는 폐지된 것이다. 그와 같이 재림의 징조만을 믿던 신앙을 완전한 예언이 나올 때 징조만을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확실한 예언이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주님 다시 온다는 징조도 다 있는데 믿으면 되지 무슨 예언이 필요 있느냐 할 때 이것은 시대를 모르는 어리석은 종이 될 것이다.

 

 

 

주 재림과 성경 해석 문제

( 벧후 1 : 16 - 21 )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해석할 수 없고, 주님께서 역사하므로만이 그 성경이 이루어지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타락한 인생을 다시 구원해서 그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언약의 말씀이니 이 말씀을 사람이 함부로 해석한다는 것은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계약서를 쓸 때에 그 계약서를 쓴 사람이 책임을 질 글이므로 한 자라도 틀림이 없이 쓰는 것도 실천하는 것도 계약서를 써서 주는 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에게 계약서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언약으로 세울 때에 말로만 한 것이 아니고, 완전한 문서로써 기록한 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성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날까지에 우리가 성경을 증거한 것은 예언대로 그리스도께서 실천하신 사실을 만민이 알도록 증거한 것뿐이다. 그러므로 부활을 증거하는 사명에 대표적인 사도 베드로는 주 재림과 성경 해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재림에 대한 징조를 봄 (16~18)

  베드로는 주님께서 재림하는 일에 대하여 자기가 변화 산에 올라가 본 징조를 가지고 재림하실 주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큰 위엄을 봄(16)

  그리스도를 따라가던 제자들은 평소에는 자기네와 똑같은 사람이므로 침식을 같이 했고, 또는 역사를 할 때에도 그 역사에 동참해서 같이 수종을 드는 제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산에 올라가서 갑자기 그리스도의 몸에서 큰 빛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희어지는 광경이 보이면서 감히 두려워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없는 모양으로 나타났다. 이것을 본 제자들은 무서워서 다 쓰러졌던 것이다.

  이것을 본 베드로는 재림의 주가 올 때에 그와 같은 모양으로 오실 것이라고 증거한 것뿐이다. 왜냐하면 초림의 주로 오실 때는 어린양의 제물로 나타났고, 재림의 주로 오실 때는 만왕의 왕으로 오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초림의 주는 양같이 온유한 모양이요, 다시 오시는 주님은 위엄을 가지고 나타나서 원수를 갚는 때이기 때문이다.

  2) 친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 (17~18)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소리가 들려 올 때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음성을 듣게 될 때에 분명히 인성만이 아니요, 신성을 가진 독생자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증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하나같이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에 분명히 참 메시야라는 것을 전하기 위하여 피 흘리기까지 싸웠던 것이다.

 

  2. 성경 해석에 대하여

  1) 확실한 예언이 됨(19)

  초림의 주가 올 때에도 확실한 예언이 글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요, 재림의 주가 올 때에도 확실한 예언이 글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부활을 증거할 사명을 맡은 베드로는 자기는 재림에 대한 징조를 본 것뿐이고, 재림시에 될 예언은 더 확실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다시 샛별 같은 새로운 역사가 나타남으로만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할 때에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라고 말한 것이다(계22:16).

  2) 예언을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고 함(20~21)

  예언은 예언대로 역사가 있게 될 때에 그 성경을 그대로 읽어서 증거할 것뿐이다(계10:7). 만일 기독교 종말의 예언이 어떤 사람의 해석으로서 분명히 알게 된다면 그 해석을 끼고 얼마든지 마귀가 역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귀 미혹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재림의 주에 대하여 확실히 예언할 때에 선지서를 읽어보면 초림의 주가 올 것은 사7:14, 9:1~2, 42:1~4, 53장, 61:1, 65:1에 나타나 있다. 이밖에 이사야 선지서 전체가 재림의 주가 올 때 될 일을 세밀히 말한 것이고, 슥9:9, 11:10~14 이외는 전부가 재림의 주가 올 때에 될 일을 가르친 글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자기가 성경대로 십자가 부활을 증거한 외에는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금일에 와서 선지서나 계시록을 어떤 박사들이 주석을 쓴다는 것은 그 종들의 사명이 아닌 것이니 그 주석을 가지고 재림의 주를 영접할 수 없고, 우리는 이 시대에 와서 사도가 증거한 외에 선지서를 그대로 읽어서 증거할 때가 온 것이 현실이라고 본다.

  우리는 구약 말기에 선지들이 당하던 그 시대를 만난 것이 현실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 시대 종교 부패, 정치 부패, 인심 악화, 경제 혼란, 북방으로 오는 환란. 이것이 금일에 우리가 당한 난국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와서 그들이 묵시로 예언한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읽어서 증거할 때가 왔다고 본다. 지금 새로운 샛별의 역사가 나와야만 기독교는 성경을 바로 증거하는 동시에 난국을 돌파하고 남은 종이 되어 세계적인 성도 통치의 왕국을 이루게 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종은 자기 사명과 성서의 한계를 바로 정해야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사명의 한계선을 성경에서 바로 획선을 긋지 못한다면 오히려 자신이 위험하게 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위험이라는 것은 말씀을 증거하는 종이 자기가 증거할 말이 아닌 것을 잘못 증거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혼선시키는 과오를 범했기 때문이다(사8:20).

  그러므로 우리는 주 재림과 성경 해석에 대하여 특별한 사명적인 노선에서 바로 서야만 될 것이다. 금일에 기독교가 너무나 영계가 혼선되고 진리가 혼선된 것은 주 재림과 성경 해석에 탈선된 과오라고 보게 된다.

 

 

 

진 자는 이긴 자의 종

( 벧후 2 : 18 - 22 )

 

  우리 신앙 생활은 항상 싸우는 생활이니, 마귀에게 지면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이요, 마귀를 이기면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귀의 세력을 허락하여 미혹하게 하시는 것은 이기는 자에게 축복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이제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되는 일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한 자 (18~19)

  우리는 육체의 정욕을 이기면 하나님의 종이 되고, 못이기면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의 정욕을 죽이는 일을 하기 위하여 역사하는 것이 성신의 역사이다. 그런데 정욕을 용납하는 자유라는 것은 마귀의 미혹이다. 어떤 종이 정욕을 죽이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고, 정욕을 따라가면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거짓 선지의 더러운 영의 역사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종된 자격을 갖추려면 먼저 정욕을 이기는데 목적을 두고 해산의 수고를 다해야만 될 것이다. 정욕이라는 자체는 마귀이니, 이것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항상 마귀의 종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보고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신 것은 마귀의 정욕이 네게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던 것이다(요8:44).

 

  2. 주님을 알고도 죄를 이기지 못한 자 (20)

  만일 어떤 사람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죄에서 벗어남을 받았다가 다시 죄의 세력을 이기지 못하고 진 자라면 나중 형편이 더 심한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마귀를 대적하고 나가다가 마귀에게 다시 잡히면 더 무서운 마귀의 세력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항상 십자가를 지고 죄와 싸워서 이기는 생활이 있어야만 큰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오늘에 교회가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 마귀의 세력을 이기지 못하고, 타협적으로 나간다는 것은 무서운 화가 올 일이라고 본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는다면 순교적인 생활을 해 나가는 자가 되어야만 처음보다도 나중 열매가 더 많아지므로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왕권 반열의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 하여도 죄를 이기지 못한 자는 죄의 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철저한 회개가 있을 때에는 지옥을 면하는 일은 있을 수 있으나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보좌에 앉을 수는 없는 것이다.

 

  3.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자 (21~22)

  우리가 거룩한 명령을 받고 저버리는 자가 된다면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는 것이나 동일하다. 그러므로 거룩한 명령을 받은 자는 끝까지 순종해 나가야만 거룩한 명령을 받은 것이 축복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거룩한 명령을 받았다는 것이 오히려 큰 화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언제나 이기는 생활을 해야만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이니, 베드로가 아무리 예수를 따라 가는 제자였지만,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예수님께 십자가를 피하라고 할 때에 “사단아, 물러가라”는 책망을 받았던 것이다. 아무리 사명을 맡은 자라도 마귀에게 지게 될 때에는 마귀의 종이 된다. 그러므로 항상 거룩한 명령을 받은 자는 충성과 진실을 가지고 나가야만 될 것이다.

 

 결 론

  가장 가련한 사람이라는 것은 거룩한 사명을 맡아 가지고도 마귀의 종이 된 사람이다. 세상에서 제일 가련한 사람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보다도 교회 안에 들어온 자로서 마귀에게 져서 마귀의 종된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든 일이 공연히 헛수고를 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날마다 이기는 생활을 하기 위하여 전심 전력을 다하는 일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요한일서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

( 요일 1 : 1 - 6 )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시다 (1)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할 때에 말씀으로 창조했다고 한 것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된 만물이라고 보게 된다. 언제나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신 3위로서 알파와 오메가의 역사를 하고 있다. 천지를 창조할 때에도 예지와 예정 아래서 영원한 생명을 인생에게 줄 것을 예정하신 범위하에서 창조했다고 보게 된다(마25:34). 창조의 목적은 아들로 말미암아 영원한 천국을 이룰 것을 목적하고 창조했다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독생자를 홀로 있게 하는 것이 기뻐하는 일이 아니요, 독생자를 통하여 큰 나라를 이루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통하여 천국을 이루는 것이 목적인데 아담이 실수함으로 둘째아담 예수를 보냈다는 것이 예정이 아니요, 피조물된 아담이 천국을 이룰 수가 없는 인격이지만 독생자를 통하여 천국을 이룬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할 때에 사람을 흙으로 창조해서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 넣은 것이 생령이 된 아담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신이 아니요 생령이다.  

  신이라는 것은 성부, 성자, 성신 외에는 참된 신이 될 수 없고 피조물된 인생은 그 신의 생명을 통하여 생령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생령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에 속한 피조물이 된다 그러므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다.

 

  2. 인간에 나타난 생명이다 (2)

  인간이 범죄 하므로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와의 동등된 영광을 누릴 수가 없게 된 것이 인간의 타락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물과 피로 임한 몸을 가지고 세상에 나타난 것은 첫째아담의 범죄로 타락한 인생을 다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생을 다시 생명으로 인도하는 방법은 물과 피로 임한 몸으로서 대속의 제물이 되는 동시에 그로 말미암아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죄의 난제를 완전히 청산하고 이제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들을 다시 영원한 생명을 받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영생이라는 것이다.

  종교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이 참된 신앙을 인간이 가질 수 있다. 이것은 피의 제사이니 아담 때부터 내려오던 희생 제물의 피의 제사는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피를 바라보고 예언적인 제사에 불과한 것이다. 예언적인 제사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라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에 속한 몸이 아니고는 영원한 속죄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온 물과 피가 임한 몸이므로 영원한 속죄가 된다.

 

  3. 생명적인 교제 (3)

  생명의 교제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사람에게 흘러올 때에 그 생명을 받으므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 사귐이라는 것은 사람의 행위에 속한 것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찾아와서 먼저 교제할 수 있는 구속의 일을 하시므로 사람이 그 생명을 받아 그리스도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교제를 갖게 되는 것이니, 예를 든다면 그루터기에서 오는 진액이 가지로 가는 것으로 나무에 본색을 나타내고 나무에 본능적인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니,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의 역사가 인간들에게 흘러오는 교제가 있으므로 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체가 이루어지는 인격과 그리스도가 하는 일을 행할 수 있는 열매가 나타난다. 이것이 생명적인 기독교의 열매라는 것이다.

 

  결 론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와의 어떠한 관계가 있다는 것은 과학을 초월한 하나님의 신의 역사인 그 영원한 생명을 친히 받은 자 외에는 도저히 알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일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이란 역사일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이란 자체는 보고 듣는 것으로써 알 수 없고 친히 그 생명을 받는 사귐이 있으므로만이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본 것을 증거하는 요한의 사명

( 요일1:2, 계1:2 )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세우는 동시에 그 약속의 말씀이 무엇인지 모르고 기록하도록 한 책도 있고 깨달아 알게 하므로 기록한 책도 있으니 알지 못하고 쓴 글은 이루어질 예언의 말씀이요, 분명히 알고서 쓴 것은 이루어진 일이 된 것이다.

  이제 사도 요한이 본 것을 증거한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우리는 믿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1. 이루어진 것을 보고 증거한 진리 (요일1:2)

  기독교는 이루어진 것을 보고 증거한 것이 기독교의 완전한 속죄, 완전한 구원이 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 증거한 일에 대하여 3가지로 구분을 지어서 우리는 신앙하여야 한다.

  1)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으로서 세상에 왔다는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는 신성이라는 것을 친히 보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는 것을 친히 본 것인데 이것을 완전한 증거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한 대로 이루어지되 자연계나 식물이나 사람에게 있는 질병까지라도 다 말씀 한마디에 순종한 사실을 볼 때에 이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모든 증거가 나타나게 한 것은 신성을 가진 아들이라는 것을 알도록끔 표적을 보여준 것이다.

  2) 인성으로 나타난 것을 친히 봄

  요한은 친히 예수님의 몸을 만져보았고 항상 침식을 같이 한 사람으로서 꼭 사람과 같은 인성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친히 보고 증거할 때에 예수는 인간을 위한 화목 제물이 되었다는 것을 담대히 증거했던 것이다(요一2:2).

  3) 그는 완전히 승리를 이루었다는 것을 목도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할 때에 이루어진 사실을 친히 목도하고 증거했던 것이다(요19:35).

  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라갔지만 십자가 앞에서 그 증거를 확실히 본 자는 사도 요한 뿐이다. 그는 친히 본 것을 증거할 때에 성경이 그대로 응한 사실을 완전히 믿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을 강하게 증거했던 것이다(요일3:5).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친히 본 자들이 증거한 그것을 의심없이 믿을 때에 이것을 하나님이 의로 인정하는 일이 된다. 왜냐하면 보고 믿는 자 보다도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더 복 있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요20:29).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 보인 것은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증거할 대표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보고 증거하도록끔 하였고 그밖에 믿는 자들은 대표적인 사도들의 증거한 것을 그대로 믿을 때 믿는 자에게 증거가 나타나게 된다(요일5:10).

  그러므로 신앙이라는 것은 대표적인 사람이 기록한 것을 그대로 믿는 것인데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저마다 보고 믿게 하는 것이 아니고 행하신 일을 본 자가 나가 증거할 때에 그 증거를 믿는 자에게 말씀대로 응답이 왔다는 것이 기독교 역사에 뚜렷한 사실이다.

 

  2. 이루어질 것을 보고 증거한 진리 (계1:2)

  우리 하나님의 종들로서는 이루어진 것을 보고 증거한 진리와 이루어질 것을 보고 증거한 진리를 다음과 같이 구별해야 한다.

  이루어진 것을 보고 증거한 진리는 믿는 자의 영혼을 중생시키어 구원해 주는 진리요 이루어질 것을 보고 증거한 진리는 환란 가운데서 중생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몸이 재앙 속에서 구원받는 진리를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증거한 시대는 은혜 시대라면 이루어질 것을 보고 증거한 진리를 증거할 때는 환란과 재앙시기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증거한 자의 그 증거를 보고 믿을 때에 그 영혼이 중생 받는 체험이 있고 이루어질 것을 보고 증거한 것을 읽고 지킬 때 그 몸이 변화를 받아 승천하는 일과 보호를 받고 구원받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이루어진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자는 부활 성도요, 이루어질 것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증거하는 자는 변화 성도가 되는 것이다. 변화 성도라는 사람은 환란과 재앙에서 구원받는 비밀을 증거하는 것이니 이루어질 일을 증거하는 선지가 된다(계11:10).

  이제 사도 요한이 이루어질 것을 보고 증거한 일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진리가 있다.

  1) 대표적인 사람이 나온다는 것이다

  계11:1이하를 보면 사도 요한이 계시를 볼 때에 앞으로 대표적인 사람이 나올 것을 뜻한 것이 11장의 계시이다.

  이루어질 것을 요한은 보고 기록할 때에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본대로 기록해서 증거한 것뿐이나 종말에 대표적인 사람이 나타나서 역사할 것을 요한에게 보여준 것이니 이 대표는 보고 증거하는 사람이 아니고 작은 책을 꿀같이 먹고 다시 예언한다고 요한은 계시를 보았다(계10:7~11).

  왜냐하면 기독교가 이날까지 요한이 보고 증거한 계시록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고 여러 가지 주석이 나왔지만 이것은 증거할 만한 진리를 알지 못한 자들이요, 완전히 그 진리를 증거할 사람은 변화 성도들인데 먼저 성령과 신부가 말할 것을 계22:11~17에 말했다. 그러므로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면서 성전과 제단 안에 경배하는 자를 척량하라 한 것은 앞으로 대표적인 사람이 성경을 완전히 깨닫고 나와서 증거할 때에 모든 사람은 다 하나같이 그 진리 역사에 하나가 될 것을 계11:1에 말했다.

  언제나 기독교 통일이라는 것은 대표를 통하여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을 기독교의 완전한 단체라는 것이다. 이날까지의 종들은 사도들이 증거한 교훈 안에서 통일을 가져오게 했고 종말에 환란과 재앙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사람이 진리를 권세 있게 증거할 때에 그 역사에서 하나가 되므로 재림의 주를 맞이할 남은 교회와 남은 종이 나올 것을 가르친 것이니 계시록 11장과 12장에 관한 진리이다.

  2) 환란 가운데서 보호받을 것을 목적한 진리이다

  인류 역사에 없던 환란은 북방으로 온다는 것을 아시아에서 모든 선지가 하나같이 증거했고 사도 요한은 붉은 짐승으로 말미암아 환란이 올 때에 보호를 받은 자가 남은 종이요 남은 교회라 했는데 남은 종은 권세 역사로써 승리하게 되고 남은 교회는 예비처의 특별 보호가 있으므로 그 환란에서 남은 교회가 될 것을 가르친 것이 계시록에 요한 사도가 보고 증거한 진리이다.

  3) 심판과 새 시대

  심판이라는 것은 우리 앞에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니 인종 전멸의 심판이 있고 새 시대가 오고, 행위 심판이 있고 무궁 세계가 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종 전멸의 심판이 올 때 종족이 구원을 받아 새 시대를 이루고 행위 심판이 올 때에 생명책에 기록된 자를 통하여 영원한 무궁 세계에 아름다운 도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진리의 대표적인 사람은 사도 요한으로 본다. 보고 증거한 진리도 완전한 것은 요한 사도가 쓴 글이라고 본다. 이루어진 일을 보고 증거한 것은 4복음 중에 요한 복음이 진리의 권위가 있고 이루어질 일을 보고 증거한 요한계시록도 앞으로 심판의 다림줄이 되는 권위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대언자 예수

( 요일 2 : 1 - 2, 28 - 29 )

 

서 론  

주님은 십자가에서 승리한 자이심으로 우리의 대언자로서 다시 올 때까지 역사하는 것이다. 이 대언이라는 것은 어떠한 사람을 위해서 대언 하느냐에 대해서 본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1. 양심적인 고백이 있는 자 (1:9)  

하나님은 죄를 사해 주는 것이 마땅한 의무이지만, 고백이 없는 사람을 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미 화목제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고백을 받고, 하나님 앞에 고백한 자를 위하여 대언기도 해주는 것은 고백할 공로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죄 값은 용서 없이 죽는다는 율법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2. 실수한 자 (2:1~2)  

이미 자백을 하고, 속죄를 받은 자라도 또 다시 실수가 있는 경우에 그 사람이 이미 올라간 기도가 있기 때문에 대언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여, 나를 죄를 짓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해주시옵소서” 라고 이런 기도를 할 때 그는 대언기도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성령을 보내서 다시 부흥을 주고, 시험에서 다시 이기는 큰 힘을 주기 위해서 주님은 대언기도 하는 것이다.  

3. 주 강림시에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하여 대언기도 하는 것이다 (2:28~29)  

우리의 완전이라는 것은 주님의 대언기도로 되는 것이다. 약한 자를 능하게 하기 위하여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하기 위하여 심지어 잠든 자를 깨우치기 위하여 문을 두드리는 심정을 가지신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문 밖에서 재촉하는 것이다(계3:19~20).

주님은 당신의 택한 종이 쓰러지고 피곤해 어찌할 줄 모를 적에 여호와만 바라봐도 새 힘을 받도록끔 역사하는 것이 대언기도로 되는 것이다(사40:30).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마귀 압력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강권역사로 나리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주 강림 시기는 마귀도 극도로 참소하고 주님도 극도로 강하게 대언기도를 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안에만 있는 자라면 된다는 것이다.  

결 론  

주님은 일천 구백년 동안을 대언기도로써 승리를 이루어 온 것이다. 만일 주님의 이와 같은 간구가 아니라면 마귀 참소를 벗어날 종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바울이 이것을 믿고 누가 나를 그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는 용기를 가지고 나섰으므로 그는 승리의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롬8:34~35). 우리도 이와 같은 용기를 가지고 나서지 않고는 도저히 승리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 자

( 요일 2 : 1 - 2, 28 - 29 )

 

  인생이라는 것은 온전케 된 자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아무리 한 때에 세계를 움직이는 영웅으로 나타났다 하여도 그 시대 사람 중에 선구자라고 볼 수는 있지만, 온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서 온전케 될 때에 인간으로서 알 수 없는 것을 알게도 되고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것을 하게도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자체가 온전해지기를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요, 당신의 사랑이 사람 속에서 온전케 되기를 목적하고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온전케 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우리를 위하여 화목 제물 된 사랑 (1~2)

  타락한 인생을 온전케 하는 역사는 전부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는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죄를 진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지만, 죄 값대로 심판을 나릴 하나님께서 심판 받을 인간에게 심판을 나리지 않고, 화목하자는 사랑에서 먼저 인간의 죄를 위하여 그 아들을 화목 제물로 세우신 것이 인간을 온전케 할 수 있는 사랑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말에 있지 않고, 실천에 있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온전하게 되는 것은 오직 화목 제물 되신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열매가 있게 되므로 그 사랑을 남에게 주기 위한 역사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기독교의 온전한 역사라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 안에 이 사랑의 역사가 없다면 자동적으로 전부가 거짓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께서 화목 제물 되신 것을 믿는 양심 속에 그 사랑을 남에게 주는 것이 없다면 그 사랑을 받은 자라고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2.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자에게 온전케 하는 사랑 (3~5)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람에게든지 온전케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자에게 온전케 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람에게든지 무조건 온전케 된다면 공의가 없는 것이니 공의가 없는 사랑은 심판을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화목 제물 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자에게 역사하기 위하여 지금도 항상 대언기도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 역사라는 것은 말씀대로 행하시는 역사이니 그 말씀대로 지키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기도라는 것은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는 자가 말씀대로 행하지 못한 죄를 깨닫고 말씀대로 행하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할 때에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역사가 오는 것은 화목 제물 되신 예수님의 대언 기도를 통하여 오는 것이다.

  오늘에 기독교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만, 그 사랑이 자기 속에서 온전케 되는 체험을 받은 자는 심히 적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 이렇게 되는 것은 말씀대로 행하려고 하는 것이 너무나 미약한 원인이다. 누구든지 말씀대로 행하려는 것이 강한 자라면 그 사랑의 역사도 강하게 오는 것이다.

 

  3. 예수의 행하시는 대로 행하게 되는 일 (6)

  신앙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믿는 동시에 지금도 행하시는 그 역사대로 따라서 행하는 것을 신자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행함으로서 그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고 그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마음이 불타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의 역사가 우리 속에 와서 역사하므로써 우리는 그 역사에 따라서 행해지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 자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나뭇가지가 진액을 받되 그 진액이 온전케 되어 열매가 맺어진 가지는 더 가꾸고, 진액을 받되 그 진액이 온전케 되지를 못한 가지는 제하여 버리는 것과 같다.

  신앙 생활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 자라야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왕권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한 것이니, 그 사랑이 온전케 된 자만 그 사랑 속에서 구하면서 그의 역사대로 쓰여지는 인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결 론

  사랑은 세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랑도 있으며,
  둘째는 자기가 이익을 보기 위하여 남을 사랑하는 사랑도 있으며
  셋째는 자기가 남을 사랑하되 그 사람이 온전케 되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랑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도 아니요, 하나님이 당신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도 아니요,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켜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의심없이 믿고 순종하는 사람 속에 온전케 되는 사랑인 것이다.

 

 

 

 가르친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

( 요일 2 : 24 - 29 )

 

  기독교는 세계 통일의 완전 교훈을 이미 이루어 놓은 것이니 그 시대를 따라 변하는 것이 교회가 아니고 그 교훈 안에 그대로 거하는 생활을 할 때에 그 교훈대로 이루어지는 체험에서 그 시대 사람에게 각성을 주는 것이 기독교 사명이다. 그러므로 요일2:27에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친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교파의 울타리 안에서 거하는 것보다도 가르친 그대로 가감없이 생활할 때에 다음과 같은 축복이 있다.

 

  1. 영원한 생명이 있다 (24~25)

  가르친 교훈은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교훈이니 그 교훈에서 가감된 생활이 있다면 영원한 생명은 그 생활에 있을 수 없다. 예를 든다면 진액이 없는 나무가 발전이 없듯이 영원한 생명이 없는 생활에는 아무런 생활에 산 체험적인 발전을 가질 수가 없다. 영원한 생명이 있을 적에 산 믿음이요 없을 적에 죽은 믿음이다.

  기독교의 신앙 체험이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항상 그리스도께로부터 흘러오는 것이니 이것은 가르친 그대로 그 안에서 생활하는 자만이 받게되는 체험이다.

 

  2. 기름 부음을 받게 된다 (26~27)

  완전한 열매라는 것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에게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두뇌에서 나오는 교훈은 물질에 국한된 교훈이니 사람이 가르치고 연구하는 범위 안에 있는 것이요 기독교 안에 교훈이라는 것은 기름 부음을 받은 종들이 성령으로 가르침을 받아 기록한 것이므로 인생에게 완전한 것을 주는 교훈이니 완전치 못한 인간의 지식이 완전한 것을 가르치는 교훈에는 아무런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가르친 교훈 안에 거하는 자라야 그들이 받은 기름 부음을 같이 받으므로 그들이 못 다한 사명을 우리가 계승하게 되는 것이다.

 

  3. 주의 날에 담대함을 얻게 된다 (28)

  주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 나셔서 부활 승천하기까지 행하신 일은 죄인을 부르기 위한 법을 완성하신 것이요 다시 강림하실 때는 가르친 교훈 그대로 생활하며 싸워서 승리한 자에게 갚아주러 오시는 날이니 아무리 하나님의 자녀라 하여도 가르친 그대로 교훈 안에 거하며 생활하지 않은 자는 주의 날에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예를 든다면 어느 학생이 시험을 보는 날에 가서 그 선생이 가르친 교훈 그대로 답을 못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기독교 안에 많은 종들이 각각 자기의 주관을 세우면서 여러 가지 학설을 말한다는 것은 오히려 위험한 일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교훈 안에 그대로 있지 않는 생활이 되기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운 사도들의 교훈 그대로 신앙 생활을 한다면 조금도 혼선이 없고 조금도 가감이 없는 정확한 다릴줄의 진리를 잡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가르친 교훈은 하늘이 돈다는 과학이 지구가 돈다는 과학으로 변해진 것은 사람은 완전한 지식을 가진 것이 아니고 나날이 발전하는 두뇌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한 조물주의 교훈이니 조금도 사람이 가감할 수 없는 교훈이므로 그 말씀대로만 순종할 때에 주의 날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왕권의 영광을 영, 육이 아울러 받게되므로 담대함을 얻는 인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결 론

  허공을 치는 바람잡이 생활은 하나님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않는 생활이요 가장 작은 일에서 큰 열매를 가져오는 생활은 그 교훈 안에 거하는 생활이라고 보게 된다. 갈릴리 해변에서 불학무식한 사람으로 어장을 버리고 예수를 따를 적에 너무나 어리석은 일 같으나 요한이 교훈 안에 거하므로 완전한 승리의 사도로서 기독교 종말의 진리를 하나님께 받은 사도가 되었다.

  아무리 약한 자라도 교훈 안에 거할 때에 강한 자가 되고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그 교훈 안에 거하게 될 때에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에 역사하시되 교훈대로 역사하는데는 교훈 안에 거하는 사람을 들어 쓰기 때문이다.

 

 

 

 소망과 성결

( 요일 3 : 1 - 3 )

 

서 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적에 특수한 것은 소망이다. 소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 외에 동물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로 소망을 잃고 보니 금수보다 더 악해 진 것이 인간의 타락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신 것은 소망을 잃은 인생에게 산 소망을 주는 동시에 자동적인 성결이라는 인격을 가지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을 기독교의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소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된 것이다 (1)  

우리의 소망은 영생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데서부터 싹트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의 씻음을 받을 때부터 확실한 증거로 받은 것이다(롬8:15~17). 증거라는 것은 성신이 오셔서 아버지를 찾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생의 기업을 상속할 권리를 받은 것이다.   

2. 주 예수님과 같이 될 소망이다 (2)  

우리는 자녀 된 것으로만 끝을 맺는 것이 아니고 자녀 된 자로서의 자기가 할 직책을 다할 때 아버지께서 큰 사명을 맡기어 역사하도록 하되 예수님과 동등한 왕권을 받도록 해준다는 것이 종 된 자의 소망이다. 첫째 아담과 같이 죽게 되었던 몸이 예수님의 몸과 같이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3. 무엇이든지 구하면 받는다는 소망이다 (22)  

무엇이든지 구하면 받는다는 소망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특권이 있으니 요청을 얼마든지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풍부한 소망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주마는 약속이 있는 동시에 구하는 자에게만 준다는 것이니 하나님 앞에 담대히 구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결 론  

하나님께서 소망을 주지 않고 깨끗하게 살라고만 한다면 이것은 세상 도덕적인 의식적인 종교에 불과한 것이다. 완전한 소망을 주므로서 산 생명의 생활이 있는 행동에서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향하여 양심 중심 사상 생활이 깨끗해지는 것을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성결이라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 신자로서 중심에 불결한 마음을 고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 사람은 완전한 소망을 얻은 자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성결

( 요일 3 : 1 - 9 )

 

  대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경륜은 완전 성결의 인격을 이룬 자로써 거룩한 나라를 이루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귀를 들어서 쓰신 것은 마귀를 이기는 자를 완전히 성결에 이르른 인격으로 인정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성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는 사랑 (1)

  이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고싶은 심정을 가지시고 인간이 그 심정을 알게 하는 동시에 실천적인 증거를 나타낸 사랑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라는 것이다. 이 사랑의 비밀은 세상과 거리가 너무나 멀기 때문에 세상이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런 일이 없는 악한 죄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의 명분을 얻게 된다는 것은 그 은혜를 받은 자 밖에는 알 자가 전혀 없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사랑을 받아 자녀가 된 자는 깨닫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억울함을 당하는 일도 있게 되는데 그것은 거룩한 생활을 해 나가기 위한 데서 세상에 대적이 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나의 택함을 입은 자 인고로 미움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셨다(요15:19).

 

  2. 왕권을 받게 하는 사랑 (2~3)

  하나님의 사랑의 한계는 죄인을 불러서 거룩한 자녀가 되게 하는 것으로 교회를 세우게 되고 거룩한 당신의 아들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해서 왕권을 받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주님을 다시 오시게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완전한 성결은 마음에 두지를 않고 한 죄인의 한 사람이 되는 자리에서 만족하여 예수님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일에 목적을 두고 싸워 나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같이 왕권을 누리는 단계에 들어갈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모든 순교자들은 재림의 날에 완전한 구속을 받는 몸이 될 것을 바라보고 순교적인 생활을 했던 것이다.

 

  3. 죄를 없이하는 사랑 (4~5)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용납하는 사랑이 아니고 죄를 없이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의 완전한 체험을 받으려면 죄와 싸우는 생활에서 자신의 죄의 근성까지 없이할 것을 믿고 싸워 나갈 때에 하나님의 사랑은 그 죄를 없이하는 역사를 하시므로 거룩한 인격을 이루게 된다. 우리가 행함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죄를 없이하는 그 사랑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4. 마귀의 일을 멸하는 사랑 (6~8)

  어떤 사람이 사랑이라는 간판 밑에서 마귀의 일을 용납한다면 거짓 영의 미혹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한 자이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조금도 타협이 있을 수 없고 마귀의 일을 없이하는 주님의 역사를 받을 때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베풀 때에 사랑의 씨를 먼저 주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천적인 사랑을 가지셨으므로 말로만 거룩하게 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고 거룩한 씨를 주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어 대신 죽게 하시고 누구든지 믿는 자는 죄를 이길 수 있는 씨를 주어서 완전한 인격이 이루어지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예수

( 요일 3:4~12 )

 

  처음부터 죄를 범한 자는 마귀요,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자는 예수님이시다. 마귀가 없었으면 죄가 없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마귀를 창조했느냐고 물어 보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마귀는 하나님이 낸 것이 아니요 하나님과 같이 마귀도 스스로 있었다는 이원론을 말하는 자도 있다. 또는 천사가 타락해서 마귀가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조금도 가감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창조하신 것은 근본이 가장 간교한 뱀이다. 가장 간교하다는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이러한 기능을 준 것은 아무리 꾀이는 일이 있어도 가장 간교한 뱀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인줄 믿는 자에게 완전한 것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남을 범죄하도록 꾀이는 죄도 있고, 꾀임을 받아 범하는 죄도 있는 것이다. 남을 꾀어서 범죄하게 하는 것은 마귀의 행동이요, 꾀임을 받아 범죄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행동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사람이 꾀임을 받아 범죄할 때에 깨닫도록 해주는 일이 있으며, 그 죄를 용서해 주는 법을 세운 것이 속죄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짓게 꾀는 것이 옛 뱀인 용의 역사이다(계12:9, 20:3).

  이제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예수님의 역사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죄를 없이 하려고 세상에 나타나신 역사 (4~5)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나타나신 것은 세계 인류 가운데 택함을 입은 사람의 죄를 없이하는 일을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모르고 흑암 속에 거하는 사람을 찾아 오셔서 행하신 일이다. 만일 사람이 연구할 수 있다든지, 찾아 볼 수 있는 역사라면 인간의 죄를 없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나라에 계시던 예수님이 죄를 진 인간들을 찾아 오셔서 그 죄를 없이 할 수 있는 법을 세우신 것이니, 이것이 만민의 죄를 대속한 십자가이다.

  죄라는 것은 죄를 지은 사람이 없이할 수 없고, 죄를 범한 자를 벌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자라야 없이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죄를 벌할 권리가 있는 자라고 해서 법을 무효로 한다면 이것은 법을 낸 자를 멸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범죄자의 죄를 없이 할 수 있는 조건이 되며, 법을 세운 자에게도 법대로 벌을 주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이 십자가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없애는 일을 하기 위하여는 독생자를 죄인을 대신해서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셔서 역사하는 것밖에 다른 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없이 하기 위하여 아들을 세상에 보내서 예수는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하여 3년간 이적을 행하게 하셨고, 아들이 십자가에 죽을 때에도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골고다에 높이 달아 왕래하는 사람들까지라도 알게 하셨고, 아들이 완전 승리로 부활한 후에도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에게까지 나타나 만져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증거로 나타냈고, 십자가에 죽는 것은 세상이 알도록 하시었고, 부활하신 것은 친히 나타나셔서 보여 주셨던 것이다. 누구든지 나타난 예수를 의심없이 믿는 자는 그 죄를 없이하는 속죄의 은총을 주시는 동시에 다시 기억지도 않으신다.  

  인간의 죄 하나를 없애기 위하여 역사하신 일은 천지 만물을 창조한 일보다 더 큰 일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천지가 없어진다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를 없이 한 사람은 영원히 영생하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범치 않게 하시는 역사 (6)

  주님께서는 인간이 과거에 지었던 죄를 없이하는 것으로써 끝을 맺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은 범죄치 않도록 성신으로 다스리는 것이 주님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성신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역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벗어나게 될 때에 죄를 범하는 것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에 결코 범죄함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사랑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되는  행동이요, 사랑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 안을 벗어나는 행동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면서 죄를 범한다면 미혹을 받은 자라고 볼 수 있다. 오늘의 기독교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지 않고, 한 교회 안에서 사는 것을 신앙 생활로 본다는 것은 아무런 산 체험이 없는 사람들의 하는 일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안에 있고 주님은 우리 안에 있어서 당신이 하실 일을 우리를 통하여 하시고, 당신이 받은 왕권의 영광을 우리에게도 주고자 하시는 것이 죄를 없이 하기 위하여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역사라는 것이다.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이 조금이라도 죄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요, 죄를 회개하는 자에게 죄를 그냥 둘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이 죄가 없는 동시에 죄를 없이하는 일을 하시고, 죄 없이 함을 받은 자를 들어 쓰시되 하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목적하고 역사하시는 것이다.

 

  3. 마귀의 일을 멸하시는 역사 (8)

  예수님께서 먼저는 죄를 없이하는 일을 하여 마귀의 일을 이기는 사람의 수가 차기까지 참으신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귀의 일을 멸하시므로써 죄가 없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평안히 살게 되는 것을 새 시대라는 것이다. 지금 마귀의 일을 없애지 않는 것은 마귀의 일을 이기는 사람에게 왕권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하나님께서 마귀의 일을 허락한 것은 당신의 일을 하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마귀의 일이 없다면 하나님의 일이 필요가 없고, 하나님의 일이 없다면 마귀의 일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때에 마귀의 일도 일어나도록 허락하신 것은 마귀가 역사한다 하여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에게 큰 영광을 주기 위한 선한 방법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마귀의 일을 용납한다면 그 시간부터 그리스도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여도 마귀의 일을 없이 하려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아무런 열매 없는 자가 되어 가인과 같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볼 수 없고, 오직 형제를 사랑하는 자라야 하나님의 자녀라고 볼 수 있다.

 

 결 론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나신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는 동시에 죄를 용납할 수 없고, 죄를 용납지 않는 동시에 회개하는 자의 죄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다 없애는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면 죄를 없이 하는 일에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우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마귀 일을 멸하러 나타난 예수

( 요일 3 : 7 - 8 )

 

서 론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는 것은 마귀 일이다. 하나님께서 마귀도 일할 수 있게 허락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로서 충성과 진실을 보자는 것이었으나 인간들이 모두 마귀에게 먹힘을 당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은 슬퍼하는 것보다도 마귀를 없애자는 진노가 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제 마귀의 일은 무엇인가 하는데 대하여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1. 범죄하도록 미혹하는 것이다 (7~8)  

인간이 미혹을 받는다는 것은 중생한 자녀를 미혹하려는 마귀에게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중생치 않은 마귀의 자녀는 미혹을 할 나위조차 없는 것이다(4~7). 미혹이라는 것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이 나게 만드는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생각에 붙여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믿음이란 문제를 가지고 자기 어떤 주관적인 소욕에 붙인다면 믿음도 유혹의 믿음이 되는 것이다.  

2. 의로운 일을 미워하는 일이다 (3:12)  

사람이 의를 사랑하면서도 미혹을 받는 죄도 있고, 의를 미워하여 악에 속한 자도 있는 것이니 고의적으로 의를 박해하고 의를 미워한다는 것은 마귀에게 완전히 속한 자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가인의 범죄라는 것을 본문은 말하고 있다.  

3. 예수님의 도성인신을 부인하는 일이다 (4:2)  

마귀는 인간 지식을 끼고도 역사하는 것이니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것이 마귀의 일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인류가 당하는 범죄다. 인간이 죄를 취급할 수 없고, 정당화시키는 것이니 이것을 가르쳐 흑암이라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아니고는 마귀를 멸할 자는 인간에게 전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자는 다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마귀를 없애게 하는 일은 죄악의 권세를 깨뜨리는 속죄의 법으로만이 개인 개인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날까지 주님이 나타나서 행하신 일은 각인의 중심 속에서 역사하는 마귀의 역사를 없애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구름 타고 다시 올 때 전 세계의 인류를 미혹하던 마귀를 없애는 반면에 그 때까지 회개치 않고 마귀에게 속하여 사는 자는 전멸되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첫째, 인격을 이루기 위한 것이요, 둘째, 새 시대를 이루기 위한 것이다(계20:1~3).  

 

사랑과 인격

( 요일 3:13~19 )

 

  인생이라는 것은 사랑이 있으므로 인격이 향상되고 사랑이 없으므로 인격이 타락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사랑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요일4:8).  

  사랑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다(요일3:14).   

  사랑이 없는 자는 빛이 없다(요일2:11).

  그러므로 사랑은 인격을 이루는 요소가 된다. 인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고 그 사랑을 남에게 줄 자격도 있다. 인생의 지식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는 오히려 타락이 된다.  

  이제 사랑과 인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사랑이 있어야 생명으로 들어가는 자가 된다 (13~14)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으로 사람을 완전케 하기를 원하시지만 형제를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기도 하고, 생명으로 완전한 인격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영생은 바라보면서도 형제를 사랑할 줄 모른다면 그 인격은 영생할 생명을 받은 자가 아니고 영생을 바라는 한 욕망에 지나지 않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바리새교인에게 책망할 때에 너희는 하늘에 오를 듯 싶으냐 음부에 떨어지리라고 했던 것이다.

  형제를 사랑함이 없는 자에게는 성경을 읽어도 기도를 하여도 아무런 열매가 없는 생활이 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이루어지기 위한 약속이요, 기도는 사랑의 약속대로 하나님이 응답하는 것인데,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종교라는 것은 오히려 그 인격을 가증하게 만드는 폐단이 될 것이다.

 

  2. 사랑은 용사 인격을 이룬다 (15~16)

  온 세계를 점령할 왕권을 받을 인격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자이다. 사람이 볼 때에 약한 것 같으나 강한 자는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 싸우는 사람이다. 주님께서 요구하는 인격은 형제를 위하여 죽는 것을 마땅히 아는 인격이라고 보게 된다. 어부의 한 사람인 요한이 예수님 다음 가는 지위를 받게 되는 것은 본문의 말씀대로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것은 동물에 불과한 인격이요, 약한 형제를 구원해 주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싸우는 것은 예수와 같은 인격이다.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은 전부가 이러한 사상을 가진 자에게 소유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형제의 것을 탐내는 욕심이 있는 것은 땅의 것만을 생각하는 밥 먹는 벌레요, 형제를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자는 하늘에 속한 영생체를 이루는 변화 승천이 있을 것이다.

 

  3. 사랑하는 자는 주 앞에 굳센 자가 된다 (18~19)

  사람의 인격은 사람 앞에 굳센 자 보다도 주 앞에 굳센 자가 되어야만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되는 것이다. 주 앞에 굳센 자가 될 때에 이것은 주님과 교통할 수 있는 인격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홀로 있을 적에 주님 앞에 굳세게 부르짖는 인격이라면 이 사람은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인격이 될 것이다. 가장 강한 인격은 주 앞에 굳센 자라고 보게 된다. 만일 어떤 종이 사람 앞에는 자기 배짱을 부려도 주 앞에서 굳센 인격으로 강하게 부르짖는 것이 없다면 이 사람은 사람 앞에 자기 인격을 세우려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제자에게 말씀할 때에 너희는 큰 자가 되려면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도 세상에 오신 것은 섬기려 하고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하여 대속물로 주려고 함이라고 말했다(막10:43~45). 예수님도 죄인을 대할 때에 겸손히 대해 주셨지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땀이 흘러 피가 되기까지 간구했던 것이다.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은 아무리 억울함을 당하고 고생스러운 일이 와도 주님 앞에 굳세게 서서 진리를 믿고 나간다면 그 사람에게 모든 것을 책임지고 다 이루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람이 주 앞에서 굳세게 믿고 나가느냐 하는 것을 시험해 볼 때도 있다.

 

 결 론

  사랑은 하나님과 인간과에, 인간과 인간과의 온전을 이루는 생명의 빛이니 사랑하는 자라야 하나님과도 완전한 교제를 할 수 있고 참 사랑이 있는 자라야 참된 성도의 교제를 가지므로 완전한 교회의 기둥이 되는 인격을 이룰 것이다.

 

 

담대함을 얻은 자의 기도

( 요일 3 : 13 - 24 )

 

  하나님은 거짓이 없는 신이시요, 능력이 무한한 신이신지라 아무리 원수의 세력이 강하다 하여도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자에게 역사하는 신이시다. 기도하는 것은 마귀와 싸우는 전쟁에서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해줄 줄 믿고 구하는 것이니 누구든지 원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고 세상일에 끌리지 말고, 담대히 믿고 구하는 자라야 큰 열매가 있다는 것이다.

  이제 어떤 자라야 담대함을 얻을 수 있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형제를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6~19)

  형제를 해치고자 하는 자는 비겁한 자요, 형제를 살리고자 하는 자는 담대한 자이다. 왜냐할 때에 형제를 해치려는 자는 그 마음이 은혜가 떠나고 극도로 고통이 있고, 불평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니 이것은 그 영이 활동을 못하는 증거다. 영이라는 것은 남을 살리고자 하는 일에만 활동하는 것이요,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적에 이것은 육의 정욕을 따라오는 것이니 영에 따라 움직이는 자는 담대함을 얻어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육을 따라 움직이는 자는 기도의 힘을 잃고 극도로 약한 자리에 떨어지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형제를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는 마음이 불탈 때에 하늘로부터 오는 큰 힘을 얻게 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싸울 적에 구하는 대로 응답이 나리는 것이다.

 

  2. 양심에 가책이 없게 하는 자 (20~21)

  사람이라는 것은 양심이 있는 것이니 누구나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할 때에 자동적으로 약해지고 겁이 나는 마음이 생기므로 그 사람은 하나님을 상대할 수 없고, 사람 앞에 보이려는 가면을 쓰게 된다. 이렇게 되므로 하나님과는 멀어지고 사람의 눈을 맞추어 일을 해 보려고 할 때에 그 사람은 기도할 수 없는 영이 되어 아무런 활동을 못하게 된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회개하고, 사람에게 보이려는 것보다도 “하나님이여, 나를 아시나이다” 라는 양심에서 나가는 자라면 그 영은 하나님과 상대되는 심령으로 나날이 소성을 받아 담대함을 얻는 용사가 되어 하나님과 씨름하는 기도의 생활에서 야곱과 같이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가지는 승리의 용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에게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할 때에 용서 없이 징계를 나리는 것은 구하는 대로 주기 위한 목적이니 언제나 양심적인 생활에서 하나님을 상대하는 생활이 있다면 기도의 큰 열매를 가져오는 사람이 될 것이다. 가장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인격을 찾지 않고, 사람 앞에 담대히 서려는 수단을 부린다는 것은 큰 과오를 범하는 근본이 된다.

 

  3. 주안에 거하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22~24)

  인간이라는 것은 주님 품안을 벗어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는 타락의 본질이요, 사망의 법인 마귀를 벗어날 수 없는 죄의 생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15:6보면 사람이 내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 없는 나뭇가지같이 되어 불에 사름을 당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맡긴 사명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자라야 주는 그 안에 있고, 그는 주안에 있어서 담대한 사람이 되는 동시에 주님 가신 길을 가는 실천이 있고, 주님께서 가르친 말씀을 그대로 믿는 자로서 이루어지는 기도 응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최고 인격은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는 것이니 이러한 자라면 무엇이나 구하는 대로 열매를 맺게 된다.

 

 결 론

  기독교는 담대함을 얻어 기도로 승리하는 것이 있으므로 흑암의 권세 아래서 죄인들을 해방시켜 천하의 교회를 확장시켰고, 종말에도 담대함을 얻은 자들이 기도로 승리할 때에 세계를 정복하는 새로운 시대를 이루게 된다. 누구든지 주안에 거하는 자라면 주의 임하시는 날에 담대함을 얻는 동시에 완전한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이다(요일2:28).

  언제나 하나님은 원수의 세력을 강하게 하는 것은 담대함을 얻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으로 승리하게 하기 위한 선한 방법이니 우리들은 이 시대에 담대함을 얻어서 기도로 승리하는 용사가 되어야만 여호와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온전한 것을 이루는 사랑

( 요일 4 : 9 - 12 )

 

서 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온전을 이루어 주시는 것은 당신이 먼저 자진하여 인생을 찾아오는 사랑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온전이 아니요,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온전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인간이 인간을 대하는 사랑도 있고,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는 사랑도 있으니 생명이 있는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밖에 없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형제를 사랑한다 하여도 하나님께로 온 사랑으로 준 것이 아니라면 그 속에는 생명을 주는 열매는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께로 온 사랑을 먼저 받고 그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한다면 다음과 같은 열매가 있을 것이다.  

1. 성령이 역사해 주는 것이다 (13)  

성령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주기 위하여 역사하는 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께로 오는 사랑이 없는 교회라면 성령은 계시지 않는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하되 하나님께로 받은 사랑에 녹아진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면 성령은 강하게 역사할 것이다.  

2. 하나님께로 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는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한다 (17)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그 사랑의 법칙에 의하여 베풀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종이 남을 사랑한대도 인간적인 어떤 편파적인 사랑을 가진 종이라면 심판 날에 설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심판이라는 것은 네가 참으로 남을 사랑했느냐 안 했느냐는 것으로 심판을 내리기 때문이다(마18:35).  

3. 이와 같은 사랑이 있는 사람이라면 환난이나 사망이나 그밖에 아무런 것도 그에게 두려움을 줄 수 없을 것이다 (18)  

이것은 왜냐하면 모든 재앙은 사랑을 떠난 자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 사랑 속에 있는 자라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보호와 축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결 론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며 형제를 미워한다면 이것은 자동적으로 외식의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한다면 형제를 미워할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 요일 4:16 - 21 )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신이신 동시에 사랑의 신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의 뜻을 만족히 채우기 위하여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부터 사랑을 목적하고 역사하신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 외에는 가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피조물 자체에는 남을 사랑할만한 인격이 완전히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에 끌려서 활동하는 것 뿐이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연계를 움직이는 것도 사랑을 목적한 것이요, 영계를 움직이는 것도 사랑을 목적한 것이니 우리는 그 사랑 속에서 순종하여 쓰여지는 도구가 될 것 뿐이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다음과 같이 요소가 있는 것이다.

 

  1. 사랑 안에 거하는 자를 만족케 하심 (16)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사랑해 주시는 그 안에 순종만 하면 모든 것이 다 만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생자를 보내서 십자가에 죽게 하고 이제 그 사랑 안에 들어오라고 죄인들을 부르는 것이니 누구든지 믿고 순종하며 그 안으로 들어갈 때에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만족한 생활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것은 조물주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외에는 만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 동물은 먹는 것으로 만족을 누릴 수 있으나 사람은 먹는데 국한된 동물이 아니요, 하나님이 거할 수 있는 인격을 가졌으므로 하나님 안에 안기는 생활이 있으므로만이 인생의 가치를 발휘하기도 하며 또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만족히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의라는 것은 누구든지 사랑 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만족함을 누리도록 해 주는 것을 십자가 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의 십자가이니 그 안에서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께 받게 되기 때문이다.

 

  2. 심판 날에 담대함을 주심 (17)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은 사랑의 법을 완성하는 오메가 역사이다. 사랑의 시작은 누구든지 아들을 믿으면 다 사랑 안으로 들어와서 만족을 얻게 하는 것이라면 심판이라는 것은 사랑 안에 들어 온 자로 새로운 왕국을 이루기 위한 종말적인 역사이니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이라는 것은 사랑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고 배반한 자를 다 없애는 것이 심판이다.

  누구든지 죄가 있으므로 심판을 받는 것보다도 그 사랑을 믿지 않은 조건으로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그 안에 들어오는 자를 온전하게 만들어 그 사람들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함을 얻어 남은 자가 되게 하는 동시에 심판을 나리기 때문에 심판이라는 것은 오히려 온전하게 된 자를 더 사랑하는 시대로 옮겨 놓기 위하여 심판하는 것이니 지금 이 세상은 사랑하는 자가 시련을 받고 억울함을 당하는 시대이지만 심판은 사랑하는 자로 완전한 평화의 왕국을 이루어서 영광의 복락을 누리게 하기 때문이다.

 

  3. 두려움이 없게 하는 사랑 (18~21)

  인간은 죄를 질 때부터 두려움이라는 것이 있게 되어 거기서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항상 인류 역사가 두려운 전쟁, 사망, 고통, 재앙으로 내려온 것 뿐이다. 그러므로 두려움에 빠진 인생들을 두려움이 없는 자리로 옮겨 놓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이다(히2:14~15). 만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공포심이 있다면 그 사람은 완전한 사랑에서 온전함을 이룬 인격이라고 볼 수 없다. 온전한 인격이라는 것은 두려움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며 죽음을 돌파하고 나가는 인격이다.  

  어떤 사람이 믿는다 하면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참 사랑의 인격을 갖지 못한 자라고 보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고 그 사랑을 인간에게 주시는 동시에 사람으로서 그 사랑 속에서 남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 온전한 것을 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있는 영생의 생명과 영광의 나라의 기업을 택한 자에게 주고자 하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이 원하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시므로 하나님이 주고 싶은 소원을 이루어 주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에는 형식과 의식이 필요 없고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시므로 하나님 마음에 사랑이 불타는 심정으로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주고 싶은 그 마음을 만족케 하는 일을 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어 대신 죽게 한 것이다.

  이제 그 십자가를 통하여 사랑이 되시는 하나님의 뜻은 다 이루어지되 하나님과 동거할 수 있는 인격을 만들어 영원히 같이 영광을 누리도록 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인 동시에 완전한 역사라는 것이다.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인격

( 요일 4 : 17 )

 

서 론  

인생의 최고의 인격은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인격이다. 왜냐하면 스바냐 1장을 보면 모든 이방 종교나 정치인이나 모든 사람이 다 소멸될 때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만 남는다고 말한 것이다. 아무리 사람 앞에 옳은 것 같아도 심판 날에 서지 못할 인격도 있고, 아무리 사람이 볼 때 멸시와 천대를 받아도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자가 있다는 것이 말세 교훈 중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제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인격을 다음과 같이 성경에서 자세히 찾아보기로 하자.  

1. 원망하지 않는 자다 (약5:9)  

하나님께서 심판기가 올 때는 극도로 당신이 택한 종에게 원망스러운 일이 부딪혀 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략이니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인격을 이루기 위한 훈련에 불과하다. 인생은 자체가 완전한 것은 못되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히 생각해서 무슨 일을 당하든지 원망하지 않는 것 하나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2.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이다 (약2:13)  

하나님은 남을 살려 보려고 눈물 흘리며 올리던 기도와 소원을 다 풀어 주는 것이 심판이니 오히려 심판 날에 나서서 자랑을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일로 원하는 것은 당신이 긍휼히 여기는 자를 같이 긍휼히 여기면서 애쓰는 사람을 귀히 여기기 때문이다. 어떤 종이 양떼를 불쌍히 보는 심정이 없는 목자라면 심판대 앞에 설 수는 없을 것이다.  

3. 작은 일에 충성한 자이다 (마25:21)  

하나님은 충성이라는 것은 작은 일에서부터 보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은 일에 충성이라는 것은 하나님만 중심하는 일이 아니라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 앞에 크게 보이는 것만을 목적한다면 상을 이미 다 받는 일이 될 것이니 지극히 작은 일에 하나님께 대한 양심으로 일할 적에 숨은 사랑을 받는 종으로서 심판대 앞에는 전부 상급으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4. 형제와 화평을 위하여 노력한 자다 (롬12:17~19)  

만일 화평을 위하여 노력이 없다면 심판 날에 설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수를 갚는 심판이니 원수를 맺는 일이 없어야 된다는 것이다. 어떤 종이 남을 공연히 판단을 했다면 자기도 판단을 받는다고 주님은 말했다(마7:1). 심판대 앞에 담대하려면 아무리 형제가 원수같이 나를 미워해도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한 사람만이 심판대 앞에 설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기도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5.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종 (마24:45~46)  

이것은 종이라는 것은 맡은 일에 충성을 하되 시대를 따라서 진리를 바로 증거해야만 된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심판은 복음대로 심판하는 것이니 은혜시대 종이 그 시대적인 진리를 바로 증거 못했다면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요, 환난 시대 진리를 바로 증거하지 못했다면 그 때 사람들의 생명에 대하여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 그러므로 스승 된 자의 심판이 크다고 약3:1에 가르친 것이다. 진리를 증거한 종만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아끼고 아끼는 심정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붙들어 주시고 일으켜 주시는 것은 심판 날에 담대히 설 수 있는 인격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이라는 것은 당신의 사람을 위하여 심판하는 것이니 당신의 사람이 부족한 것을 그냥 두고 심판하면 하나님은 막대한 손해가 되기 때문에 강권으로라도 심판대 앞에 서게 하겠다는 것이 기독교 종말에 심판기의 역사이다.

 

 

요한이서

 

교훈 안에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

( 요이 1 - 11 )

 

서 론  

하나님은 교훈대로 역사하는 신이시니 교훈 안에 모시고자 하는 자라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교파 안에만 하나님이 역사한다고 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그 안에서 도저히 역사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교훈 안에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은 하나님의 교훈을 존중히 알고 교훈대로 실행하시는 참 신이신 것을 믿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이제 어떤 생활이 교훈 안에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인가에 대해서 본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1. 진리를 위한 사랑 안에서 행하는 생활이다 (1~2)  

하나님은 진리를 위하여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은 똑같이 역사해 주므로써 한 지체를 이루는 교회를 구성케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남녀에 진리를 위한 사랑이 아닌 것이 있다면 마귀가 틈을 탈 것이로되 진리를 인한 사랑에서의 교제는 하나님이 같이 함으로써 열매를 나타낼 것이다. 사랑은 마귀를 청하는 사랑도 있고, 하나님을 모시는 사랑도 있으니 진리를 위한 사랑에서만이 하나님은 역사해 주는 것이다. 교회라는 것은 진리를 위한 사랑의 계명을 지킨 단체를 교회라 하는 것이다.  

2. 온전한 상을 잃을까 삼가하는 생활 (7~8)  

하나님의 신은 우리의 구원만을 목적하여 역사하시는 신이 아니요, 온전한 상을 이루도록 지혜와 능력으로써 미혹을 받지 않도록 역사해 주는 신이시니 온전한 상을 잃을까 삼가하는 사람은 돕기도 하고, 깨우치기도 하고, 더욱 열매를 맺도록 역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돕는다는 믿음은 있으나 상을 잃을까 봐 삼가하는 것이 없다면 하나님은 거기서 역사하지를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생활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사람의 할 일을 힘써 하기를 기다리면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3. 교훈 안에서 싸우는 생활이 있어야 할 것이다 (10~11)  

우리가 교훈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싸워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교훈을 주시고 그 대적이 따르게 한 것은 싸우는 자에게 더 축복을 하고, 완전한 승리를 이루도록 역사하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훈을 위해 싸우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싸우는 생활이니 하나님은 기뻐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하나님의 교훈을 중심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이 말씀을 이용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일 것이다.

하나님의 교훈을 그대로 가지지 않는 자는 죄인만이 아니요, 악한 일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싸워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교훈 안에서 싸우는데 있어서도 두 가지로 보게 된다. 어떤 형제가 그 교훈을 바로 믿고 그대로 활동을 하다가 실수하는 사람은 그 사람을 건져 주기 위해서 싸워야 할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찾기 위해서 싸우는 싸움도 있고, 막기 위한 싸움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전쟁이란 것은 포위에 든 사람을 건져내기 위한 싸움도 있는 것이다. 어떤 형제가 옳은 교훈을 가진 자로서 탈선된 교훈에 미혹을 받을 때 찾기 위해서 싸워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의견과 자아의 고집을 위해서는 강하게 나가서는 안 될 것이로되 교훈을 위해서는 사자같이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 론  

교훈이 없이 신을 모시는 것은 자동적인 우상이 되는 것이다. 우상이라는 것은 무엇을 만들었다고만 우상은 아니다. 교훈이 아닌 것을 숭배하는 것이 우상이다. 다시 말하면 교훈 안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 외에는 하나님을 찾아도 우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지켜 우상을 멀리하라고 말한 것이다(요일 5:21).

 

 

유다서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우는 생활

( 유 3, 20 - 22 )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홀로 가는 길이 아니요, 신앙 노선의 정로가 있는 반면에 곁길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 정로를 가기 위해서는 곁길을 가는 자들과 자동적으로 싸우는 일이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 신앙 정로가 있는 가운데 곁길이 있게 하는 것은 싸워서 이기는 자에게 축복을 주기 위한 방법이다. 신앙의 도를 위하여 싸우는 생활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는 것을 알 것 (3)

  믿음의 도라는 것은 인간 편에서 저술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편에서 미리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대로 실천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나타난 것이 구원을 완성한 십자가의 도라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행하신 역사를 믿으므로 말미암아 그 의가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라는 것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서 영원한 속죄를 완성하고, 구원을 완성하고,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 죄를 사해 주고 구원하는 일은 이미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 그대로 사람에게 주는 것을 속죄와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믿음의 도라는 것은 단번에 영원한 속죄와 구원을 완성하신 것을 믿으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것을 우리가 거저 받게 되는 것이다.

 

  2.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할 것 (20상반절)

  믿음이라는 것은 거룩한 것이다. 인간이 행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거룩한 성부, 성자, 성신이 행하시는 역사이니 그 역사를 믿음을 통하여 받게 될 때에 ‘나’ 라는 자체는 그 역사를 믿는 신앙에서 날마다 발전하여 완전한 인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내가 믿으므로 내가 완전해 진다는 것보다도 거룩한 믿음 위에서 ‘나’ 라는 것이 전부 이루어지는데 있어서는 거룩한 인격을 하나님께 은혜로 받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할 수 없으니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하면서 거룩한 생활을 등한히 하는 것도 탈선이요, 내가 예수를 믿으니 내가 행한다고 장담하는 것도 탈선이다. 오직 우리는 거룩한 믿음 위에서 조금이라도 불의를 용납지 말고, 싸워 나가는데서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를 계속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이기는 생활을 할 때에 자아라는 인격은 자아의 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거룩한 믿음 위에서 날마다 향상되는 것이다.

 

  3. 성령으로 기도할 것 (20하반절)

  우리의 싸움이라는 것은 성령으로 기도하는 생활이 없이는 아무런 힘조차 얻지를 못하게 된다. 언제나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이 있으므로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우는 생활에 승리를 이루게 되어 완전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기도하는 영계에 들어가려면 조금이라도 불의를 용납하지를 않아야 된다. 그러므로 거룩한 믿음 위에서 불의와 싸워 나갈 때에 성령의 기도는 내게 강하게 역사하므로 완전 승리의 인격을 이루는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4.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킬 것 (21상반절)

  우리는 ‘나’ 라는 것이 스스로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게 될 때에 ‘나’라는 자체는 완전 승리를 이루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려면 성별된 생활이 있어야 된다. 조금이라도 속화된 일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생활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을 바라본다든지 자기의 어떤 욕망을 채워 보려는 것은 참된 신앙에 들어간 자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참된 믿음이라는 것은 거룩한 믿음인 동시에 인격적인 생활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품안에 안겨지는 것을 기독교인의 신앙의 정로라고 한다.

 

  5. 긍휼을 기다리는 것 (21하반절~22)

  긍휼이라는 것은 게으른 자나 타협을 하는 자나 교만한 자에게는 있을 수 없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는 자에게만 있는 것이다.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우는 생활에는 긍휼함을 기다리고 나가는 것이 있어야만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불의와 타협하면서 “주여, 나를 불쌍히 보시옵소서!” 라고 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가증한 일이 될 것인가!

 

 결 론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우는 생활에 원수가 누구냐 하는 것을 말한다.

  첫째 : 정욕대로 행하는 자.
  둘째 : 기롱하는 자.
  셋째 : 당을 짓는 자.
  넷째 : 육에 속한 자.
  다섯째 : 성신이 없는 자.

 

 

심판 날에 정죄 받을 행위

( 유 4 - 16 )

 

  하나님께서 아담의 7대손 에녹의 예언한 일을 본문에 기록하게 한 것은 변화 승천할 종들이 일어날 때에 정죄 받을 자들의 형편을 말했다. 심판 날에는 아무리 하나님의 종이라 하여도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정죄 받을 것을 말했다. 강퍅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을 말했다.

  이제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행동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원망하는 자

  원망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이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애굽에서 구원받아 나왔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고, 항상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망의 말이 있으므로 하나님은 진노하여 그 무리를 진멸시킨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는 생활에서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원망 없이 나가야 한다.

  예를 든다면 한 가정에 부부가 목적을 두고 생활해 나갈 때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일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 와도 그 남편을 받들어 섬기므로만 그 가정은 목적을 달성할 수가 있다. 우리는 남편이 되시는 예수를 맞이하려면 아무리 난관이 와도 원망 없이 싸워 나가야 한다. 만일 원망하는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정죄 받게 될 것이다(약5:9).

  주께서 심판하시는 날은 끝까지 원망하지 않고, 나가는 자만이 남은 자가 될 것이니 우리는 끝까지 원망치 않고 나가는 자가 되어야 재림의 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2. 불만을 토하는 자

  불만이라는 것은 주님을 대적하는 일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은 일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인데 갚아 주시려 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자가 주님께 대하여 불만을 가진다는 것은 주님을 대적하는 일이 될 것이다. 주의 종이라 하면서 주님의 일에 불만을 가지는 자는 자동적으로 정죄를 받게 된다.

  예를 든다면 어떤 군대가 전쟁에 나가서 자기 나라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애국 정신이 아니요, 나라를 대적하는 정신이니 반드시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끝까지 순종하신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가 주님의 일에 불만을 가질 수 없다. 불만을 가지는 자는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행동이니 마땅히 정죄 받아야 될 것이다.

 

  3. 정욕대로 행하는 자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린 것은 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한 것인데 정욕대로 행하는 자는 십자가를 대적하는 자이니 정죄를 받게 된다. 예를 든다면 어떤 종이 주인의 집에서 일하면서 자기 정욕에 따라서 일을 한다면 주인의 집에 도둑이니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산 백성 중에서 주의 것으로 쓰여져야 할 종인데 자기 정욕대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집을 망치는 행동이니 이러한 자는 용서 없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4.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는 자

  우리 입술이라는 것은 주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 외에 자기의 것을 자랑한다면 십자가의 대적이 된다. 어떤 사람이 먼 곳에 급한 소식을 전하러 보냄을 받은 자가 그 소식을 전하는 것보다도 자기를 내세우는 말을 하고 있다면 이러한 사람은 용서 없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제일 급한 소식은 죽어 가는 죄인들에게 십자가를 말해 주는 일인데 어떤 종이 강단에서 자기의 지식이나 인격을 자랑하게 된다면 십자가의 강단을 더럽히는 행동이니 정죄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저주가 온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바울은 절대로 자기 지혜나 지식을 말하지 않은 것은 십자가의 권능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이다.

 

  5.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는 자

  어떤 종이 충성된 말을 하지 않고, 자기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아첨하는 행동을 한다면 이러한 자들은 정죄를 받게 된다. 종이라는 것은 자기 생명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충성 되이 말하는 것이 충성된 증인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싸워야 할 사람이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아첨한다면 이 사람은 삯꾼의 행동이니 이러한 무리는 재림의 날에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충성된 증인으로 자기에게 불리한 일이 있다 하여도 끝까지 주의 일을 지키는 자 외에는 주의 날에 설 자가 없는 것이다. 가장 옳은 일은 주님 올 때까지 충성 되이 증거하는 자요, 가장 불의한 자는 주님 올 때까지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는 자이다.

 

 결 론

  가장 두려운 일은 종 된 자로서 정죄를 받는 일이요,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종 된 자로 칭찬을 받는 일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여 심판 날에 그 거룩한 반열에 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노력하여야 한다.

  첫째로 중심 성결을 위하여, 둘째는 양떼를 살리기 위하여, 셋째로 사상을 지키기 위하여, 넷째는 진리를 변론하기 위하여  조금도 타협치 말고, 용기있게 싸워 나가야 한다.

 

 

사도들의 예언을 기억하라

( 유 17 - 23 )

 

서 론  

성령으로 시작된 신령한 교회가 종말의 심판기가 올 때에 지도자의 부패로 말미암아 사도들이 피 흘려 세운 교회가 막대한 피해를 당하게 될 것을 성령님은 미리 아시고, 사도들에게 감동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을 한 것이니 우리는 이 예언을 마음 속 깊이 기억하고, 정신을 차려 교회를 바로 지도하는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금일에 우리의 원수가 되는 자들은 본문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1.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다 (18)  

이들은 사도적인 경건한 신앙 생활을 변질시켜서 인본주의적인 세속화로 흐르되 육체적인 정욕의 자유를 부르짖는 동시에 초대적인 신앙 노선을 오히려 기롱하는 자들이니 신령한 일을 어리석게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이다.  

2. 당을 짓는 자들이다 (19상반절)  

우리는 그리스도는 머리요, 성도는 그 몸의 지체라는 것이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사상이며, 정신이며 생활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세에는 부패를 따르는 무리들이 한 자기의 그룹을 만들어 보려는 야욕적인 교권주의의 파당이 올 것을 말한 것이다. 이런 무리들은 심판 날에 용납할 수 없는 미운 물건이 될 것이다.  

3. 성령이 없는 자들이다 (19하반절)  

기독교라는 것은 성령이 없으면 자동적으로 사단의 회가 되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잉태할 때부터 성령의 역사로 시작되고 부활 승천할 때도 성령으로 된 것이다(롬1:4, 8:11). 또는 교회가 완전히 서는 것도 성령의 강림으로 시작된 것이니 교회가 끝을 맺는 것도 인간의 힘과 능으로 못하되 하나님의 신으로만이 되는 역사를 종말의 역사라 하는 것이다(슥4:6, 계11:4~5).  

결 론  

아무리 심판기의 교회가 부패했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이니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는 사람을 통하여 영생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려서 끝까지 남은 자는 그리스도의 강림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도적인 신앙에서 조금이라도 변하여지면 개포도가 되는 것이니 심판을 면할 수가 없을 것이다(계14:1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