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장 - 21장 ]
1 장
1. 믿는 자의 받는 권세와 지키는 자의 받는 권세 (요1:7~18, 계2: 26~28)
2.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요1:29~42)
3. 메시아를 영접하는 인격 (요1:35~51)
4. 사도적인 신앙의 계통 (요1:39~51)
5. 참 이스라엘은 어디 있느냐 (요1:40~48)
2 장
1 순종과 열매 (요2:1~11)
2. 삼일 만에 일으킨 성전 (요2:19)
3 장
1. 땅의 일과 하늘의 일 (요3:11~15)
2. 심판을 향한 두 가지 길 (요3:16~21)
3.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요3:16~21)
4. 믿음과 심판 (요3:17~19)
5. 참된 증인의 양심 (요3:22~36)
6. 참되다고 인치는 믿음 (요3:31~36)
4 장
1. 택한 자를 찾는 주님의 심정 (요4:1~38)
2. 아는 것을 예배할 때가 이름 (요4:1~26)
3. 택한 양을 찾는 목자의 인격 (요4:7~19)
4. 참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요4:22~26)
5 장
1. 아버지와 같이 아들을 공경해야 할 이유 (요5:19~29)
2. 성경과 신앙 문제 (요5:39~47)
3. 성경과 신앙 사상 문제 (요5:39~44)
6 장
1.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요6:26~40)
7 장
1. 그리스도의 가정 문제 (요7:1~7, 행1:13~14)
2. 사명자의 시련과 가정문제 (요7:1~7, 행1:12~14)
3. 교훈을 바로 아는 자가 되자 (요7:14~18)
4. 스스로 속는 자가 누구냐 (요7:37~53)
8 장
1. 주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 (요8:12~20, 31~37)
2. 진리가 주는 자유 (요8:31~36)
3. 욕심은 마귀에서 난 것이다 (요8:42~49)
9 장
1. 영적 소경된 사람의 행위는 무엇이냐 (요9:39~41)
10 장
1. 주님의 죽으심과 하나님의 사랑 (요10:7~18)
2. 선한 목자의 죽음 (요10:7~18)
3. 한 목자에게 있어야 할 단체 (요10:14~18)
4. 택한 자의 산 믿음 (요10:22~29)
5. 하나님 말씀을 받은 자는 신이다 (요10:34~39)
6. 참된 말씀만 증거한 종의 열매 (요10:40~42)
믿는 자의 받는 권세와 지키는 자의 받는 권세
- 요 1:7~18, 계2:26~28 -
서 론
하나님께서는 만물에게 권세를 줄 수 없으나 자기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에게 권세를 주는 것은 영광을 받고자 하는 뜻이 있는 것이다. 권세라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에게 주는 권세도 있고 악한 자에게 주는 권세도 있는 것이다. 악한 자에게 주는 권세는 잠깐 동안 허락하는 일이 있는 것이요, 사랑하는 자에게 주는 권세는 영원한 권세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권세라는 것은 반드시 주시되 차별이 있는 것을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1. 믿는 자에게 주는 권세 (요1:10~12)
하나님께서 인생을 향하여 죄가 없을 때에는 에덴동산에서 지키라는 사명을 주었던 것이다. 그 때 지켰다면 그 권세는 믿는 자에게 주는 권세가 아니고 지키는 자에게 주는 권세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키지 못함으로 자녀의 권세까지 잃어버리는 인류 타락의
비참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잃어버린 권세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지키라는 법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음으로 믿음으로써 그 권세를 다시 찾도록 한 것을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하는 것이다.
메시아로 오신 것은 이 권세를 주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이루어지는 법이다.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준다는 권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권세를 택한 자에게 찾아 주기 위해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부활하여 인생을 대할 때에 “너희는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한 것은 잃어버렸던 권세를 받을 자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권리와 요청할 수 있는 권리와 상속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신 것이다. 이 권리를 가진 자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인도와 양육과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다. 이 권세는 천국 시민권이다.
2. 지키는 자에게 주는 권세 (계2:26~28)
하나님은 자녀 되는 권세를 주는 동시에 너는 이런 일을 하라고 사명을 맡기는 것은 더 큰 철장 권세를 주고픈 사랑에서 맡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서 사명을 행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주려는 목적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맡긴 사명을 끝까지 지키면 동등한 권세를 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이 예수와 같이 사랑하는 한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맏아들이라고 롬8:27에 말하였다.
맏아들 되시는 예수님이 끝까지 사명적인 계명을 지키므로 철장 권세를 받았다면 작은 아들 되는 우리도 맡은 일을 죽기까지 지켜야만 될 것이다. 이것은 첫째아담을 떨어뜨리던 마귀를 쳐서 없애기 위해 주는 권세이다. 다시 말하면 억울한 피 값을 갚기 위한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자기의 맡은 일을 충성치 않고도 다시 오시는 주님을 고대한다면 이것은 철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다. 철장 권세라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줄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엡4:13~14).
결 론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낸 목적은 훌륭한 영광의 나라를 이루어 놓자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생의 타락을 슬퍼하는 하나님은 먼저 자녀의 권세를 주기 위하여 성령을 부어 주는 동시에 다시 왕국을 이루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다. 이 때에 중생을 받은 정도의 신자는 백성이 될 것이요, 철장 권세를 받기까지 사명을 지키는 자는 왕권으로써 새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될 것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 요 1:29~42 -
타락한 인생을 향하여 하나님이 할 일은 오직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진리 하나로만이 하나님은 해결할 수 있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를 진자는 죄의 대가를 의를 행하는 자는 의의 대가를 주어야 할 책임이 있는 조물주 하나님의 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이라는 것은 반드시 법을 따라서 역사하는 신이시니 하나님의 법에 따라 인간을 다스릴 책임이 있는 신을 조물주 하나님이란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참된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찾는 것이 참된 구원의 종교가 된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을 찾을 때에 무조건 죄인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죄 된 인간을 아무런 의로운 방법이 없이 무조건 죄인을 불러들인다는 것도 불의가 될 것이고 죄를 지은 사람을 무조건 죽인다는 것도 하나님의 의가 아니다. 그러므로 세상 죄를 아들에게 지워서 세상으로 보내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찾는 의로운 방법이다.
이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진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1. 완전한 공의이다 (요1:29, 35~36, 사40:2)
죄라는 것은 법을 범한 자에게 배상을 하라고 하는 것이 공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18:5~6을 보면 아무리 회개할 기회를 주어도 회개하지 않고 죄를 범하는 자에게 갑절이나 재앙으로 갚아 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배나 갚아 주어야 될 죄를 아들에게 짊어 지워서 죄의 대가를 청산하는 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완전한 속죄의 법이라는 것이다.
첫째아담의 범죄로 인간의 육의 사망이 왔고 그 후에 자범죄로 말미암아 영의 사망이 왔다(엡2:1).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 올 때에 하나님의 신이 아무리 나타나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가르쳤고, 모든 선지를 통하여 심판의 경고를 주었다 하더라도 세상 죄를 지고 인간을 찾아오는 일이 없다면 그 공의로운 말씀은 한 지나 간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로운 말씀은 세상 죄를 지고 세상에 오는 시간부터 인간에게 큰 효과를 발휘하는 열매가 되기 시작했다. 유대 땅 베들레헴 쓸쓸한 말구유에서부터 갈보리 산상 십자가까지 걸어가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으로 끝을 맺은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이 법이라는 것은 다시없는 유일한 법이다.
2.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한 일 (30~34)
성령이 요단강에서 어린양 예수에게 임할 때에 몸이 물에 잠겨 올라올 때에 임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주님의 몸은 세상 죄를 짊어진 몸이요 , 성령으로 물과 피로 임한 몸이니 그 몸은 인간의 죄를 위하여 제물로 온 몸이니 물에 잠겨 올라온 것은
인간의 죄를 다 도말하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을 이루어 놓는 뜻으로 친히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는 것은 완전히 그 세례를 하나님께서 의롭게 인정한다는 증거다. 주님도 이것이 없다면 도저히 역사할 수가 없는 몸이다. 인간의 몸이란 것은 성령을 받음으로만이 완전하게 되는 몸이니 예수님도 성령을 받음으로써 완전 승리에 이르게 된 것이다. 기독교가 인간의 죄를 사하는 일이 있다 해도 성령이 임하는 일이 없다면 완전 승리를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신을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지음 받은 것이 인간의 몸이라는 것이다. 죄가 있는 몸에 성령이 임할 수 없다. 죄의 값은 사망이니 죄가 있는 몸이 성령의 전이 될 수가 없음으로써 우리 주님이 죄 없는 몸으로 만민의 죄를 짊어지고 오셨기 때문에 인간을 대표하여 세례를 받을 때부터 성령은 역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죄 사함 받은 자가 물에 잠겨 올라오므로 해서 성령을 완전히 받게 된 것이다.
행2:38을 보면 “너희가 회개하고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베드로는 증거했던 것이다. 예수님께 임한 신의 역사는 은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된 몸으로서 권세 역사를 받았던 것이다. 이것은 죄 사함 받은 예수가 아니고 남을 위하여 의를 행한 일이 되기 때문에 권세의 신을 받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말세에도 남종과 여종에게 신을 부어 준다고 욜2:29에 말씀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죄 사함을 받을 때에 선물로 받는 성령은 은사로 받는 것이요, 의를 행하므로 받는 역사는 권세로 받는 것이다. 주님께서 만민의 죄를 짊어진 몸으로 와서 역사한 일은 아들 된 권세를 지상에서 나타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요한도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고 하였다.
3. 따라가는 자는 제자가 된다. (35~42)
인간이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행위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믿었다는 의로 되는 것이다. 세례요한의 증거를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는 사도가 되었고 모든 권리를 예수님께 받아서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 왜냐하면 이들은 이미
생령 된 이스라엘로 메시아 오기를 고대하고 있던 신앙 있는 자이므로 직접 사도로 택함을 받았다.
사람이라는 것은 자체가 의로운 사람은 없되 의로우신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면 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를 행하시는 이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예수뿐이요. 그 밖의 사람은 그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것뿐이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였지만 그 의를 순종치 않을 적에 다 저주를 받게 된 것이다(롬10:1~4).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은 사람이 죄를 지으므로 심판을 한다는 것 보다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의를 믿지 않을 때에 정죄를 받게 된다(요3:18).
결 론
하나님의 완전이라는 것은 세상 죄를 지고 인간을 찾아온 데서부터가 인간이 하나님을 공경할 수 있는 완전한 의가 성립되었으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이 완전이라는 것을 하나님도 가지고 인간도 받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남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라도 능력이 있다는 것으로써가 완전이 아니고 그 능력을 발휘하여 남을 살리는 일을 함으로만이 완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생자가 세상으로 오시므로 사람들은 참되다고 인을 칠 증거가 되었다(요3:31~33).
메시아를 영접하는 인격
- 요 1:35~51 -
하나님께서 야곱의 씨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스라엘의 모든 선지를 통하여 예언할 때에 메시아가 올 것을 빠짐없이 가르쳤으므로 그들은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큰 소망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말씀을 믿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보다도 이스라엘 나라에 메시아가 온다는 것이 그 나라 사람들에게 큰 자랑이 되었던 것이다. 만왕의 왕 메시아가 자기 나라에 오면 그들은 세계에 으뜸가는 나라가 되고 세계 열방을 다 통일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민족을 상대하지 않고 자기네만이 메시아를 영접할 민족이라는 것을 믿는 동시에 극도로 교만한 위치에서 남을 무시하는 민족이 되었던 것이다. 예루살렘 거리에 많은 사람이 거룩한 예복을 입고 왕래하지만 세례요한의 증거를 듣고 메시아를 영접하는 자는 갈릴리 벳새다 동네의 어부들이 메시아를 영접했던 것이다. 어찌하여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세례요한의 전도를 받지 않고 이방 갈릴리에 있는 불학무식한 어부들이 받았던가 하는 것을 이제 알아야 할 일이다.
1. 마음이 겸손한 자들이다 (35~42)
언제나 겸손한 자는 영안이 밝고 교만한 자는 어두운 것이다. 세례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고 할 때에 교만한 인간들은 오히려 이단시하고 대적했지만, 기도의 사람으로 메시아를 고대하던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를 볼 때에 영적으로 알려지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 안드레 이 사람들은 비록 무식하고 빈곤한 생활을 하지만 메시아를 고대하고 기도하던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한 일이라고 본다. 주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므로 그들을 만날 때에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었던 것이다.
언제나 신령한 세계를 체험하려면 부유한 생활보다도 빈곤한 생활에서, 호화로운 자리보다도 비천한 자리에서, 화려한 도시보다도 조용한 곳에서, 많은 무리보다도 작은 무리라도 합심하는 곳에서, 영계 운동은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들은 메시아를 고대하는 신앙 양심에서 산명수려(山明水麗)한 갈릴리 해변을 찾아 작은 동네의, 작은 집에, 적은 무리가 모여서,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메시아를 고대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들을 만날 때에 직접 따라 오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그만큼 준비가 되어 있던 신앙가라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무런 믿음이 없고 합당치 못한 사람을 모르고 택한 것이 아니고 알고 택할 때에 가룟 유다 외에는 다 승리의 왕권을 받게 되었다. 가룟 유다를 택한 것도 말씀이 응하기 위한 과정이었다.
메시아를 영접할 자격은 성신을 충만히 받지는 못했으나 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날그날에 하나님과 그의 양심과에 접촉되는 생활에서 메시아를 영접했던 것이다.
2. 성서적인 사람이다 (43~45)
언제나 성경을 많이 읽고 사모하는 생활이 없이 도저히 영계 생활은 보존할 수가 없다. 그들은 성경을 완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성경에 메시아가 온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정도의 지식을 가지되, 동정녀 몸에 탄생한다는 것(사7:14), 베들레헴에 난다는 것(미5:2), 갈릴리에서 시작된다는 것(사9:1~2), 이와 같은 성경을 절실히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반드시 메시아의 역사는 예루살렘에서가 아니고 갈릴리 해변에서부터 날 것을 특히 깨닫고 지금 우리가 재림의 주가 올 때는 동방에서 역사가 일어날 것을 믿듯이, 메시아가 올 때에 갈릴리 해변에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철저히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볼 때에 자기네가 기다리던 메시아인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벳새다 동네의 어촌은 메시아를 고대하는 신앙촌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메시아를 고대하는 신앙 양심에서 두텁게 사귀어졌던 친구들이다.
이 친구야말로 고락을 같이 겪는 영원한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세상에 많은 친구가 있지만 이와 같은 친구는 역사적으로 한 페이지가 되는 친구가 되었다. 이와 같이 재림의 주를 맞이하는 때에 동방에서 나오는 선구자의 한 단체가 나오는 것도, 사도와 같이 막역한 친구의 한 무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신앙적인 양심에서 재림의 주를 맞이하는 친구가 메시아를 맞이하던 갈릴리 벳새다 동네의 친구와 같은 인연이 있게 될 것이다.
3.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46~51)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 아니고는 메시아를 영접할 참 이스라엘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은 참 이스라엘을 찾기 위하여 벳새다 동네의 어부들을 찾아갔던 것이다. 모든 바리새교인들은 간사한 무리들이므로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명예를 위하여 권리를 다투며 싸우는 무리였던 것이다. 이들도 메시야를 고대했던 것은 학과적으로 배우고 교리적으로 남을 가르치고 베들레헴에 난다는 것을 마2:4~6에 말했던 것이다.
이것을 본다면 신앙은 교리만이 아니요, 양심이라고 보게 된다. 아무리 이들이 학과적으로 가르치는 무리들이나 한 교권과 명예의 감투를 쓰고 세상 안락에 마음이 어두워진 무리들이다. 그러므로 동방박사가 별을 보고 예루살렘을 찾아올 때에 그들은 오히려 헤롯과
같이 왕으로 나신 메시아를 죽이는 무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신앙 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무리가 아니고 전부 간사한 거짓 선지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책망했던 것이다. 예수님도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까지 했던 것이다(요8:44). 아무리 이스라엘이라 하여도 간사한 정욕이 있는 사람은 죽은 영이니 자동적으로 마귀의 자식이 된다. 신앙은 간사함이 없는 양심에서라야 이스라엘이라는 영적 사람이 될 것이다. 나다나엘은 비록 어촌에 사는 사람이지만, 날마다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하는 것을 주님께서 보았다고 말씀했던 것이다. 은밀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양심의 사람이라야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는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이다.
가장 복 있는 사람은 이스라엘 중에서 메시아를 영접한 사도들이요, 또는 재림의 주를 맞이할 동방 땅 끝의 종들이라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갈릴리 벳새다 사람은 은혜시대의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는 선구자가 되었고, 동방 땅 끝에 해변의 종들은 재림의 주를 맞이할 진리 운동의 선구자라는 것을 성경은 가르쳤다. 그러므로 갈릴리 바다 옆의 어부들은 부활성도의 선구자요, 동방 땅 끝에 있는 종들은 변화성도의 선구자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영접할 자의 자격과 재림의 주를 영접할 자의 자격을 논의한다면 다음과 같다. 동방 땅 끝에 종들이 일어남으로써 원수를 회삼물같이 짓밟고 나간다고 했고, 사41:8~25을 보면 분명히 새 시대를 이루는 역사라고 했고, 사9:1~2을 보면 갈릴리 바다 해변에서 일어나는 역사는 이방의 빛이 된다고 말했으니 이방의 빛이 되는 역사가 은혜시대 역사라면 이방 세력을 짓밟고 나가는 역사는 진노의 날에 남 은 변화성도의 역사라고 본다. 그러므로 언제나 시대가 바뀔 때에 종은 선구적인 자격을 가져야 된다.
결 론
율법시대가 끝이 나고 은혜시대가 이루어질 때에 메시아를 영접한 사도의 인격은 율법시대의 영계에 선구자로서 은혜시대를 이루는 일에 처음 열매가 되었던 것이다. 가장 복되고도 복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갈릴리 벳새다 동네의 어부가 된 일과 사도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세계만방에 기독교가 대 승리를 보게 된 일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재림의 주를 맞이할 변화성도의 인격이 이루어진 자로 새 시대를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도적인 신앙의 계통
- 요 1:39~51 -
기독교는 계통적인 신앙이 있는 것이니 이 계통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1. 오실 메시아를 고대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된 계통 (39~ 45)
많은 사람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들은 이방 갈릴리를 찾아가서 맑은 공기, 맑은 물을 벗 삼고 기도하면서 고기를 잡는 생활에서도 양심을 살려가며 기도의 한 클럽이 되어 벳새다 동네를 자리 잡고 오실 메시아를 고대했던 것이다. 이 때에 헤롯의 정치 부패, 바리새교의 영계 부패, 그 지도를 받지 않고 하나님과 직접으로 교통하는 한적한 곳을 찾아간 그의 신앙 믿음으로 사귀어진 친구들이 사도의 한 클럽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순수한 성경 본문 주의에서 기록한 그대로 될 것을 믿었던 것이다.
신앙 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절대로 두려워하는 동시에 그대로 믿는 신앙이라야 사도적인 신앙이라고 보게 된다. 이들은 나사렛 목수 예수를 볼 때 성경에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다고 45절에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신앙을 가진 자들을 갈릴리 바다 옆으로 인도한 것은 그들은 자기네가 거기서 메시아를 영접하리라고 생각한 바는 없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예정 아래서 인도했던 것이다.
지금도 택한 사람은 자기가 계획한 바는 아니로되 하나님의 신이 인도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한 동네에서 살 때에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함께 사도가 되자는 생각조차 해 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한 곳으로 모아서 메시아를 영접하게 한 것이다. 지금도 순수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들어 쓰기 위해서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한 클럽이 이루어지도록 하시는 것이다.
2. 간사함이 없는 사람들이다 (46~47)
신앙이라는 것은 조금도 간사함이 없는 자라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니 나다나엘은 참된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은 간사함이 없다는 조건이다. 간사함이 없는 자에게 하나님은 비밀을 알려 주기도 하시고 그를 들어 쓰기도 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혈통에 관한 것보다도 사상, 정신, 양심에서 간사함이 없는 자라면 하나님은 그를 찾으시는 것이다. 완전한 사람이 되므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고 간사함이 없는 자라면 그에게 사명을 맡겨 일할 수 있도록 끔 지혜와 능력을 주어서 역사하는
것이다.
3. 하나님만 상대하는 생활이 있다 (48~51)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순수하게 하나님만 상대하는 숨은 기도 , 숨은 봉사, 숨은 중심 성결이 있어야 된다. 은밀한 가운데 살피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 알게 일하는 자에게 역사하는 신이시다. 누구든지 작은 일에 충성을 하되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을 중심할 때에 놀라운 역사를 할 수 있는 영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도들이 완전한 권능을 못 받고 완전한 신앙 지식에 들어가지 못할지라도 그들이 그 시대에 가장 합당한 자라는 것을 주님은 인정하시고 그들을 부르셨던 것이다. 지금도 누구든지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며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라면 주님은 그들을 통하여
재림의 주를 영접하도록 역사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것은 언제나 계통이 있는 것이니 사도들이 메시아를 영접할 때에 가졌던 계통은 재림의 주를 맞이할 때까지 그 계통으로 끝을 맺게 될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은혜를 크게 받음으로써 바로 선다는 것보다도 바른 신앙을 가질 적에 큰 변화를 받게 되며 큰 역사를 받게 되므로 시대적인 역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참 이스라엘은 어디 있느냐
- 요 1:40~48 -
서 론
주님께서 도성 인신하여 세상에 오셔서 당신과 같이 일할 사람을 택할 때 참 이스라엘을 찾기 위하여 그는 빈촌을 찾아가다 보니 벳새다 동리에 한편 모퉁이 어촌에 숨어 있는 참 이스라엘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육안으로 본다면 참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에 있지 않고 어촌에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이제 참 이스라엘이 어디 있느냐에 대하여 성경을 찾아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참된 회개의 운동을 따라가는 자이다 (40~42)
세례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하고 회개의 운동을 일으키는 그 말을 달게 받고 따라가던 자 중에서 수제자 될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가 따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세례 요한의 책망을 받고 요한을 반대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오히려 비소하는 훼방을 했던 것이다. 같은 성민이요 같은 이스라엘이지마는 충성된 마지막 선지인 요한의 말을 참으로 받아들이고 나가던 자는 주님을 따르게 되었던 것이다.
언제나 시대가 바뀌어 질 때는 참 이스라엘만이 새 시대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볼 때는 어리석은 자의 행동 같으나 시대를 바로 아는 참 이스라엘이 된 자는 갈릴리 해변에 있었던 것이다.
2.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때를 기다리는 자들이다 (45)
율법시대가 끝을 맺을 적에 율법과 계명을 가르친다는 성직을 맡은 대제사 장, 교법사, 장로, 유사, 서기관, 이런 무리들은 때를 모르고 교권, 명예, 안락, 여기에도 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바로 알고 때를 기다리는 무리는 이방 갈릴리 빈한한
어촌 벳새다 동리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말세에 끝 날에도 참 이스라엘이 재림의 주를 맞이할 자는 화려한 바벨에 있지 않고 쫓겨난 자 중에 있다고 사41:17에 말했다.
3. 조금도 간사가 없는 것이다 (47)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육적 혈통을 보아서가 아니고 영적인 참의 계통을 가리켜서 주님은 말씀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특히 하나님의 택한 야곱 같은 순수한 신앙을 가진 성도를 가리킨 것이다. 아무리 교회의 성직을 가진 자라도 간사가 있으면 이것은 참 이스라엘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를 가리킨 것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아무리 시험을 해도 끝까지 참고 천사와 씨름하여 이길 때 받은 이름이기 때문이다.
4.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이다 (48)
나다나엘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한적한 벳새다 동리 무화과나무 아래 제단을 쌓고 매일같이 하나님과 교통했다는 사실을 주님은 말씀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을 들은 나다나엘이 너무 똑똑한 자기 비밀을 말할 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만일 은밀한 가운데 살피시는 하나님이 인정할 만한 숨은 기도의 봉사가 없다면 참 이스라엘인 14만 4천에 들 수는 없을 것이다.
결 론
기독교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감하시사 간사가 없는 진실한 사람을 찾고 있는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계2:23). 메시아를 영접하는 자는 이스라엘 중에도 참 이스라엘만이 메시아를 영접하여 사도가 되었고,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가 재림의 주를 맞이할 때에도 참 이스라엘 된 14만 4천의 인 맞은 종들이다 . 다시 말하면 참 이스라엘인 사도들이 교회를 세움과 같이 참 이스라엘인 14만 4천이 남은 교회를 붙들고 역사하다가 재림의 주를 맞이할 것이다.
순종과 열매
- 요 2:1~11 -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처음으로 행하신 기적은 물로 극상 포도주가 되게 하신 일이다. 우리는 어찌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이러한 기사를 먼저 보여 주었느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는 큰 진리가 있는 것이니, 순종하는 자 에게 좋은 열매가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본다. 순종치 않으면 극상 포도라도 그 즙이 변한 것과 같이 될 것이요, 절대로 순종한다면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극도로 좋은 열매를 맺는 생활로 변해지는 일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 것이다.
이제 순종과 열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순종을 부탁한 일 (1~5)
가장 어려운 일은 가난한 집에서 잔치를 배설하고 손님을 대접할 것이 모자라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이것을 크게 염려할 때에 하인들에게 부탁하기를 예수가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순종하라고 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깊이 생각해 볼 진리가 있다. 하나님의 교회가 교회에 들어오는 자들에게 만족히 먹을 만한 것을 주지 못한다면 큰 수치라고 본다.
그러므로 교회에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만족히 줄 것이 있으려면 예수님께 순종해야만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지금도 우리에게 요 구하는 바는 무조건 예수님께 순종하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도 누구든지 무조건 순종할 수 있는 이는
예수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은 순종하는 자 에게 만족함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2. 순종할 때에 물이 포도주가 된 일 (6~9)
인간이 볼 때는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 같다. 예수님께서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히 채우라고 할 때에 무조건 물을 채운 일이나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할 때에 갖다 준 일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 즉시에 포도주가 된 것은 아무리 가난하고 부족한 집이라도 예수님께 순종할 때에 부족함이 없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 교회 상태는 포도주가 없는 갈릴리 가나의 혼인집과 같다고 볼 수 있다. 극상 포도주를 먹어야만 되겠는데 아무런 영양이 없는 물만 있듯이 극도로 곤경에 빠진 상태에 있는 말세 교회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만 한다면 차고 넘치는 극상 포도주와 같은 진리로 만족함을 얻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사야 55장을 보면 다윗에게 언약한 확실한 은혜는 극상 포도주와 같은 말씀이라고 가르쳤다. 오늘에 우리는 다윗 왕국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진리 운동에 쓰여지는 종이므로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무조건 순종해야만 되는 것이다.
3. 처음보다 마지막에 좋은 열매가 나타나는 일 (10~11)
우리 교회는 처음보다도 마지막에 더 풍성한 은혜가 있어야만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있다. 기독교가 시작될 때에는 성경의 진리를 다 알지 못하여도 교회가 섰지만, 마지막 때에 가서는 극상 포도주와 같은 여호와의 말씀을 모든 사람들에게 풍성히 주는 역사가 있어야만 될 것이다. 만약에 말세 교회가 이러한 역사가 없다면 큰 수치를 당하는 일이 있게 된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순종하는 종이라면 물로 포도주를 만들듯이 아무리 어려운 자리에서라도 차고도 남음이 있는 은총을 내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것을 주시되 순종하는 자에게만 주시는 것이 주님의 역사이다.
결 론
가장 귀한 일이라는 것은 혼인 잔치요,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모든 손님을 만족히 대접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 종말에 가장 영광스러운 교회는 모든 사람에게 만족하게 극상 포도주와 같은 진리를 나누어주는 교회라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열매가 있으려면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는 일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삼일 만에 일으킨 성전
- 요 2:19 -
서 론
하나님께서 영자적인 예루살렘 성전을 헐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폐지된다는 뜻을 가르친 것이요, 삼일 동안에 다시 일으킨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부활로 말미암아 영적 열매가 되는 교회가 이루어질 것을 가르친 것이다.
이제 신약 시대에 와서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루어진 성전은 어떠한 것이냐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영원한 속죄로 이루어진 교회 (히9:11~12)
이것이 구약 교회에 제사장들에게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를 씻는 제사법을 행하는 것이 직업화되었기 때문이다. 진리적으로 시대를 그들이 구분한다면 주님께서 삼일 만에 짓는다는 이 말을 고맙게 생각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영원한 속죄를 믿고 자기들의 직분을 폐해야만 될 것인데 오히려 이 말을 큰 문제시 삼아가지고 예수를 죽이는 그런 악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이것이 소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사람의 흑암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역사적인 속죄의 제사의 끝을 맺는 영원한 속죄의 제물의 몸을 가르쳐서 삼일 만에 부활함으로써 완전한 새로운 시대의 역사가 이루어 질 것을 가르쳤다. 그리스도는 단번에 영원 속죄를 드리시고 하늘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 역사하신 것이다.
2. 율법적인 것을 폐지하고 영원한 성령의 법으로써 다스린다. (히9:14, 롬 8:2~4)
하나님이 율법을 세운 것은 사람의 죄를 알도록 하는 몽학선생인 교훈이요 ,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사람을 완전하게 할 힘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함으로써 성령을 부어 주는 역사로 율법적인 교회가 폐지되었고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열매의 영적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속죄로 이루어짐으로써 영원한 성신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도록 성령은 역사하는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율법이라는 것은 죄인대로 두고 법을 범하면 죽인다는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부활로 이루어진 교회는 성령으로써 심령을 부활시켜서 능 히 율법을 초월한 생활로써의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을 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교회는 율법과는 하등의 관계없는 은혜의 세계에서 역사하게 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할례인 세례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골2:11~15, 롬2:28)
이제부터는 할례의 성민의 주권이 폐지되고 그리스도의 할례인 세례를 받은 자로서의 천국의 시민권을 가짐으로 할례 받은 유대인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과에 하등의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 세례라 하는 것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물에 잠기는 시간은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을 의미하고 물에서 다시 올라올 때는 부활의 생명에 접붙은 것을 표시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선악과를 먹고 죽게 된 아담의 피에 속한 몸이 장례를 받고 죽지 않은 영생의 몸으로서 부활한 주님의 몸과 일체가 된다는 뜻이다.
결 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함으로써 역사적인 속죄제와 율법의 교훈과 할례의 법은 완전히 폐지되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 영원한 성신 영원한 세례의 법으로써 완성된 교회를 가르쳐 삼일 만에 일으킨 성전이라 하셨던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교회가 아직도 구약적인 속죄나 율법의 교훈이나 할례의 법을 폐지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헌 옷에다 새 베를 깁는 거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된다는 것이다. 구약적인 교회는 완전히 무너뜨리고 신약적인 교회로 완전히 서야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
땅의 일과 하늘의 일
- 요 3:11~15 -
서 론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을 아울러 믿는 것이다. 만일 땅의 일만 있고 하늘의 일이 없다 해도 불완전이요, 하늘의 일만 있고 땅의 일이 없다 해도 불완전일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땅에서도 믿을만한 증거가 있고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증거도 가지게 되는 것이다.
1. 땅의 일 (11~14)
우리는 친히 듣고 보고 만진 바를 믿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만일 땅에서 이루어진 일이 분명치 않다면 하늘의 일도 분명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신앙에 땅의 일이란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십자가 부활 승천, 성신강림, 세계적인 복 음 전파, 이것이 현재 확실한 믿음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2. 하늘의 일 (15)
우리는 땅에 있는 동안 십자가와 부활 승천, 성신 강림을 믿음으로 중생이란 똑똑한 산 체험을 받게 되는 동시에 성신의 합법적인 진리의 역사로 완전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소유함으로 하늘로 승천한 예수와 같은 몸으로 세상의 영광을 천국에서 이루는 것이니 하늘의 일은 영원이라면 땅의 일은 잠깐인 것이다.
잠깐이란 생활에서 중생을 받고 성결을 받고 생활한 모든 것은 영원한 천국의 생활을 준비하는 과정의 하나일 것이다. 만일 어떤 교인이 땅에서 되는 일을 맛보지 못한 니고데모와 같다면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하여도 천국은 그 사람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 . 천국은
땅에서 이루어진 일에서 끝을 맺는 열매가 될 것이다(계21:1~2).
결 론
기독교의 특색은 땅에서도 타종교보다 특별한 산 증거가 있고 하늘에서 될 일도 뚜렷한 진리의 똑똑한 증거로 되어 있다. 이것이 이교 아닌 참의 종교라는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다.
심판을 향한 두 가지 길
- 요 3:16~21 -
서 론
하나님은 심판을 목적하고 역사할 때 인생은 자동적인 두 가지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만일 두 가지 길로 갈라지지 않게 하고 심판을 한다면 심판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함으로써만 당신의 사랑의 뜻을 완성하기 때 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심판의 법을 세우실 적에 택한 자로서의 살길을 열어 주고 심판하는 것을 의로운 심판이라고 한다.
이제 의로운 심판을 행하시는 데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길이 있다.
1. 빛이 세상에 왔어도 빛을 미워하고 어둠을 사랑하는 것은 자동적인 사망의 길이 될 것이다 (1:9)
왜냐하면 심판이라는 것은 억압적인 심판이 아니고 자기의 무엇을 사랑하는데 따라서 갚아 주기 때문이다. 빛을 미워하고 어둠을 더 사랑한 자는 자동적으로 어둠의 지옥으로 향하여 가는 것이 자동적인 의로운 심판이 될 것이다. 만일 빛을 사랑하는 사람을 어두운 데로 가라고 한다면 이것은 불의가 될 것이다. 심판을 받는 자는 자기가 어둠을 사랑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심판이 될 것이다.
2. 진리를 좇는 자는 빛을 따라 오게 되니 결국은 빛의 광명한 나라를 가 게 되는 것이 기독교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만일 진리를 좇지 않는 자를 하나님이 사랑해서 그를 구원해 준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불의의 심판이 될 것이다. 이 진리라는 것은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이라도 따라만 오면 살려 주마라는 약속의 말씀이 선한 목자 예수님의 진리인 것이다. 진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생을 사랑하시사 어떻게 구원해 준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 진리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언약의 말씀이니 그 말씀을 좇기만 하면 하나님은 진리대로 행하여 주실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빛도 어둠도 창조한 것은(사45:7) 하나님의 공평한 공의의 사랑을 베풀기 위한 방침이다. 왜냐하면 선과 불의를 갈라놓기 위한 모략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 심판은 사람으로서의 자유를 주는 동시에 결말을 그들의 요구대로 이루어 주는 것을 심판이라고 하는 것이다.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
- 요 3:16~21 -
인간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 누구나 다 하나같이 자기의 만족을 얻어 보려는 요구는 자기 자신 속에서 얻으려는 것이 아니고 남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서 만족해 보려는 욕망이 있는 인간들이다. 친구로 혹은 부모로 혹은 선생으로 혹은
정권으로 혹은 물권으로 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의 요구를 채워 보려는 것이 있지만 하나님이 독생자를 준 사랑이라는 것은 요구하는 것보다 반대하는 세상이 된 것은 멸망의 도성이라는 것이다. 독생자를 주신 사랑에 의하여 모든 인류의 끝을 맺는 판단이 오게 된다.
이제 독생자를 주신 사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1. 제일 높고 큰 사랑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모든 축복을 자녀나 물질로나 몸의 건강을 현재 주신다 하여도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 아니라면 완전한 축복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라는 것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가정에 물질이 많고 자녀가 많고 건강이 좋다 하여도 죄 값으로 오는
심판은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 무엇인지를 깊이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더 큰 것을 구한다면 어리석은 요구라고 본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신 것 외에는 더 큰 것이 없고 높은 것이 없는 것을 알고 그 사랑 안에서 만족함을 얻고 절대적인 순종이
있을 적에 만민의 죄를 짊어지고 오신 예수와 같이 동등하게 될 것이다.
2. 다함이 없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무궁 안식 세계를 이루기 위한 사랑이니 이 사랑으로써 다함이 없는 영생이 있고, 왕권이 있고, 화려한 새 도성이 있는 것이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것을 주자는 목적에서 독생자를 주신 것이니 이 사랑을 받은 자가 잠깐이라는 세상에서 괴로움을 참지 못한다는 것은 그 사랑의 영원한 가치를 아직까지 완전히 믿지 못하는 증거라고 보게 된다.
영원이라는 것은 두 가지로 되는 것이니 독생자를 주신 그 사랑을 믿으면 영원한 영생의 기업이요, 믿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완전한 법으로 심판하는 공의라는 것이다. 공의 중에도 완전한 공의는 십자가의 공의다(사42:3~4).
3. 조금도 변함이 없는 사랑이다 (사54:9~10)
인간이 물질을 놓고 계약을 세우는 것도 변경을 하면 손해 배상을 내는 것이다. 이것이 계약의 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둘도 아닌 독생자를 주신 사랑이 어찌 조금인들 변할 수가 있겠는가. 그 피로 산 백성을 하나님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완전한 사랑을 줄 수도 없고 사람에게 받을 수도 없기 때문에 언약을 세우고 손해를 보면서라도 해약을 시키는 일이 있겠지만 하나님께 서는 독생자를 주신 사랑으로 세워진 언약은 천상천하의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으므로 그 아들을 소유한 자에게 아무도 해할 수 없는 권세가 성립되었으므로 조금도 원수가 피해를 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생자를 주신 사랑에 의하여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 힘이라는 것은 천지를 창조할 때에 역사하던 힘만이 아니요, 이 천지 밖에의 영원한 천국을 이루기 위한 힘이니 창조주가 아들을 대신 죽여서 역사하는 일이므로
필연코 완전을 이루고야 마는 것이다.
완전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데 있는 것인데 독생자를 주신 것은 피조물 된 인생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것을 다 주기 위한 뜻에서 최선의 큰 방법을 세운 것이 십자가란 것이다. 십자가 외에 더 큰 사랑이 없는 것이니 누구든지
독생자를 주신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다 안다면 이것을 완전한 지식이라 하며 이 지식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사11:9).
결 론
인생이라는 것은 마귀 미혹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독생자를 주신 사랑을 오히려 반대하는 일은 흑암 중에 더 큰 흑암이라고 본다. 알지 못하고 죄를 지었다는 것은 약간의 흑암에 거친 일이라고 볼 수 있으나 하나님의 사랑의 진리 말씀을 듣고 도 짐짓 대적하는 것은 흑암에서도 더 흑암으로 떨어지는 악인의 행동이다.
흑암이라는 것은 잠깐 동안 가리는 흑암도 있고 영원히 멸망을 주는 흑암도 있으니 하나님의 사랑의 소식을 알지 못해서 죄를 지은 자와 큰 사랑을 받고도 짐짓 대적하고 죄를 지은 자와의 그 죄의 차이점은 가히 형언할 수 없다. 잠깐의 흑암에 거쳤다 하더라도 그
사랑을 깨닫고 순종한 자라면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누릴 것이로되 짐짓 독생자를 주신 사랑의 복음을 듣고도 반대한 자는 영원한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을 멸망이라는 것이다.
믿음과 심판
- 요 3:17~19 -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 데는 믿음과 심판이라는 두 가지 법으로 완전히 말세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모든 역사와 말씀은 믿음과 심판으로 끝을 맺는 것을 목적하고 언약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독생자를 보내서 십자가에 죽게 하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것은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의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부활 승천이 있기 전에는 완전한 신앙 운동이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대상자의 완전 승리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신앙의 대상자가 되시는 주님의 역사는 믿음과 심판으로 결단을 내리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1. 구원을 받게 하려 보내신 예수를 믿음 (17)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은 구원을 받게 하려고 보내신 예수를 믿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하므로 된 것이 아니고 믿게 하려는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이다. 구원을 받게 하려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는 일에 대하여 3가지로 말하게 된다.
첫째 : 하나님의 열심에서 되어지는 일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급한 일을 만날 때에 급한 일을 만난 사람의 열심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게 될 때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자의 열심히 없이는 도저히 어찌할 수가 없을 때에 죽게 된 사람은 활동할 수가 없고 죽게 된 자를 살려 주려는 자의 희생적인
활동이 있어야만 하듯이 죽게 된 인생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열심에서 되어지는 일이다.
둘째 : 하나님의 책임에서 되어지는 일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죽어 가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 사람을 돌보아 주어야 할 책임이 길 가던 사람에게 있는 것과 같이 죽게 된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은 인생을 버려둔다면 하나님이 큰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택한 인생을 구원받게 하려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억울하게 미혹을 받고 타락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셋째 : 끝까지 참는데서 되어지는 일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부모가 자식이 병들어서 애를 쓰는데 아무리 고생이 된다 해도 아들을 끝까지 붙들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심지어 가산이 파괴되고 사업이 파괴된다 하여도 병든 아들을 살리고 본다는 마음에서 부모는 끝까지 참고 견디면서 자식을 구원하고자 할 것은 부모의 불타는 마음일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생을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고 핍박을 받는 일이 있다 하여도 끝까지 참으시면서 기다리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구원하고자 하여 역사하는 일이 없다면 하나님을 훼방하고 핍박하는 자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훼방하고 핍박한다 하여도 끝까지 참으시면서 기다리시는 것도 인간의 구원을 받게 하려는 데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2. 예수의 이름을 믿지 않으므로 받는 심판 (18)
심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풀되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심판을 받게 되는 데는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너는 이미 멸망 받을 죄인인데 예수를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된다. 이제 예수의 이름을 믿지 않으므로
받는 심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할 것이다.
첫째 : 하나님의 사랑을 반대했다는 죄는 완전히 멸망 받을 죄가 된다. 조상적부터 죄 아래서 출생하여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에서 죄를 범했다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고 반대했다는 죄는 다시는 용서받을 길이 없는 죄다.
둘째 : 예수를 반대했다는 죄는 심판권을 가진 자를 반대한 죄이므로 심판을 면할 수 없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자기를 살려주기 위하여 역사하는 사람을 원수로 알고 오히려 자기를 죽이는 사람의 말을 따라간다는 것은 망한다 하여도 누구든지 합당하게 볼 것이다. 왜냐하면 짐짓 죄를 범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복음을 온 천하에 전파한 이때에 예수의 사상을 대적하는 유물론 공산주의 사상을 따라간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심판의 대상자가 된다. 그러므로 오늘에 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고 유물론 사상으로 기울어지는 것은 멸망 받을 바벨론을 이루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종말의 심판은 의로운 심판이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계19:1~21). 만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지 않고 심판한다면 의로 운 심판이 될 수 없지만 독생자를 보내서 복음을 전하고 믿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은 가장 참되고도 의로운 심판이 되는 것이다.
결 론
가장 큰 일은 예수를 믿는 일이다. 심판을 받느냐 받지 않느냐 하는 것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예수를 믿는 일을 어리석게 본다는 것은 자기의 본심이 아니요 마귀 흑암에 빠진 양심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해 주려고 보내신 예수를 반대한다는 것은 너무나 악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양심이라는 것은 다 선한 양심이 있는 것인데 예수를 반대한다는 것은 흑암 덮인 양심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예수를 반대하는 자는 마귀의 도구가 된 인간들이므로 멸망을 받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참된 증인의 양심
- 요 3:22~36 -
서 론
하나님의 사명 받은 증인은 하나님을 대한 양심이 맑은 자를 참된 증인이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양심을 보고 역사하기 때문이다. 이제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통하여 참된 증인의 양심을 다음과 같이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1. 하늘에서부터 주신 것을 받는 것뿐이라는 양심이다 (27)
만일 어떤 종이 하늘에서 주신 것 외에 딴 것을 가한다면 이것은 참된 증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낸 사람은 위에서 준 것 외에는 딴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주인에게 부탁을 받고 가서 그대로 하지 않고 자기의 주관을
세운다면 이것은 주인을 무시하는 종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오늘의 주의 종들이 하나가 못된 원인도 깊이 양심적으로 반성할 문제이다.
2. 사명의 한계에서 지키는 양심 (28~30)
만일 어떤 종이 사명 한계를 지키는 양심이 없이 남의 사명을 침범한다든지 자기의 맡은 바 사명을 회피한다면 이것은 참된 종이라고 할 수 없다. 세례 요한은 자기의 사명적인 한계를 분명히 대중 앞에 말했던 것이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고 말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율법시대의 끝을 맺는 나의 사명은 쇠하여야 하겠고, 은혜와 진리를 가지고 온 그리스도의 역사는 이제부터 흥해져야 한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대제사장이나 장로, 집사들이 다 이와 같은 양심이 있었던들 예루살렘은 큰 축복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적인 자기 교회의 교권을 내세우고 새로 나오는 사도적인 교회를 없애려는 압박이 심하므로 예루살렘은 황폐화되고 돌 한 개도 첩 놓이지 않고 다 무너지고 만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을 대적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종들이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고 자기의 주권을 세우려는 교만으로 망하고 만 것이다. 만일 금일의 교회의 종들이 새로운 순과 같은 종들이 새 역사를 가지고 나설 때 세례요한 같은 양심이 있는 종들이어야 할 것이다.
3. 하나님은 참되다 하여 인친 양심이다 (33)
증인은 하나님은 참되다는데 대하여 변할 수 없다는 양심의 인이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확신이 없다면 그는 생명을 바치는 증인은 도저히 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론에서가 아니고 확실한 체험이 역사적인
사실, 중심적인 사실, 생활에 확증적인 사실의 삼대 증거가 있는 자로서 하나님은 참되다는 인친 양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증거하는 것을 누가 환영치 않는다고 해서 말씀 외에 딴 어떤 것을 가입한다면 이것은 인친 양심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참되시니 말씀대로 역사한다는 것을 믿고 듣든지 말든지 역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결 론
누구든지 참된 증인의 양심적인 생활에서만 움직이는 종이라면 열매는 없을 수 없고 승리도 없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따를 증인이 되었기 때 문이다. 순종하면 영생이요 순종치 않으면 진노라는 것뿐이다.
참되다고 인치는 믿음
- 요 3:31~36 -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찾는데서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편에서 완전 계약의 말씀을 인간에게 주는 동시에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증거를 하실 때에 받는 자로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참되다고 인을 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확신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완전한 진리의 종교라고 할 수 없다 .
진리라는 것은 참되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해 주시겠다고 말씀한 것이 진리인 동시에 그 진리는 다음과 같이 증거가 있다.
1. 위로부터 오는 증거 (31)
기독교는 전부가 땅에 속한 것을 목적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만물에 속한 것을 말했다면 이것은 과학적인 지식에 불과할 것이로되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보내는 증거가 즉 그리스도의 탄생인데, 그리스도의 잉태는 땅에서 올라 온 만물에 속한 혈통이 아니고, 위에서부터 온 것이니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물과 피가 임하여 이루어진 몸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몸도 땅 위에 속한 혈통을 받은 몸이라면 그 몸은 참되신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위에서부터 온 몸이요, 또는 신이시다.
2.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함 (32~33)
주님께서는 스스로 말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에게 알게 해 주는 동시에 그대로 행하시는 주님이시라 주님께서 모든 증거하는 일이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는 증거라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오신 메시아가 아니고 거짓선지가 될 것이로되 주님의 증거는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분명히 알게 해 주셨으므로 그 증거는 참되다고 인을 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므로 (34)
아무리 예수님께서 성경을 증거했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준 역사가 없다면 참된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도 예수님 머리 위에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을 볼 때에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았다고 증거했다(요1:31~34). 언제나 참된 증거라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따르는 것이다. 지금도 기독교가 아무리 진리를 증거한다 하여도 성신을 부어 주는 역사가 없다면 참되다고 인을 칠 수가 없다.
4. 영생이 있는 증거 (35~36)
영생이라는 것은 현저히 그 생명이 믿는 자에게 온다는 것을 분명히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 생명이 옴으로써 나날이 발전하는 영계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나뭇가지에 진액이 옴으로써 그 가지에 순이 나서 자라듯이 영생의 생명이 흘러오므로 날마다
그 영이 자라나 큰 역사를 하게 되는 열매가 있게 된다.
영생이 오는 것은 행함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으므로 그 영생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인격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결 론
기독교의 신앙은 하나님이 행하시겠다는 말씀을 먼저 선지를 통하여 세상에 나타나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증거가 그리스도의 성신 잉태로부터 십자가 부활, 승천, 성신강림으로 현저히 나타났다. 그러므로 택한 자는 이 증거를 받게 되는 동시에 참되다고 인을 치는 신앙에 들어가게 된다.
택한 자를 찾는 주님의 심정
- 요 4:1~38 -
서 론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은 그의 외형적 인격이나, 표현적 이적이나 모범적인 생활을 보고 믿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먼저 아는 것이 신앙의 요소가 될 것이다.
이제 주님의 심정이 어떻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1. 겸손한 심정 (1~9)
인간의 겸손한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주님 같이 겸손한 자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음란한 여자를 찾아가는 일, 또는 거룩한 손을 내밀어 더러운 손에서 주는 물을 요구하는 일,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여자에게 먼저 가까이 하여 말씀을 요청하는 일, 또는 그를 대하여 존경하는 태도를 가진 일, 이것이 주님의 겸손이다.
2. 영생의 물을 주고 싶은 심정 (13~14)
주님은 죄를 보는 것 보다 그 중심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영생이란 것은 값없이 주는 것이니 차별을 둘 수 없고 택한 자라면 주고 싶어 하는 심정을 가진 것이다. 인간은 요구하는 것이 물질의 것을 요구하나 주님은 그 요구 외에 더 좋은 영생의 물을 주고 싶어 하는 것이다.
3. 인격을 아끼는 심정 (17~18)
주님께서는 사람을 대할 때에 아버지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어린아이까지라도 대우를 했던 것이다. 심지어 자기 죄를 가리워 보려는 이 여자에게도 그 인격을 아껴서 자진적으로 깨닫도록 말씀을 했던 것이다. 만일 억압적인 탄압으로 죄를 깨우쳐 준다는 것은 주님의 심정은 아니다. 양심에 거리낀 죄를 지은 자를 그 양심에 자유를 주어서 양심이 움직이는 데서부터 깨닫게 하는 것이 아끼는 심정이다.
4. 알려 주고자 하는 심정 (21~26)
주님은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하든지 알려주는 것으로써 그를 인도하는 것이 주님의 심정이다. 억지로 나를 따르라는 것은 절대로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비천한 여자에게라도 자기의 자체를 알려 주었던 것이다.
5. 불타는 심정 (31~34)
주님은 한 마리 양을 찾는 선한 목자의 심정이니 사마리아의 여자 하나를 찾고도 이것이 나의 양식이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6. 바빠하시는 심정 (35)
주님은 세상에 계셔서 잠시도 쉬지 않는 안타까운 심정 속에서 최고의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추수기에 추수꾼의 심정을 가지고 말했던 것이다. 알곡을 아끼는 추수꾼의 심정은 바빠하는 심정이다.
결 론
만일 주님께서 이러한 심정이 없는 분이라면 우리와 주님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양심과 하나님을 상대할 때에 사마리아 여인의 생활보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은 심정을 가진 예수님을 따를 자라면 이와 같은 심정을 우리도 가져야만 될 것이다.
아는 것을 예배할 때가 이름
- 요 4:1~26 -
인생이라는 것은 예배할 수 있는 인격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가 흘러오는 동안에 참으로 아는 것을 예배한 자는 큰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사람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할 적에 오히려 죄가 되는 것이요, 아는 것을 예배할 적에 의를 이루는 동시에 최고의 가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 타락하여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인격을 상실하고 보니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을 수가 없게 된 이유는 인간들이 하나님 말씀을 순종치 않고 자기 마음대로 예배할 때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마귀를 숭배하는 우상적인 종교가 되고만 것이다. 아무리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야곱의 열 두 지파라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치 않고 예배할 때 북방 사마리아라는 나라가 생겼던 것이다.
이것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향기로운 제사를 드리므로 복을 받았지만 이방의 여신을 용납했다는 죄로서 결국은 알지 못하는 예배를 드리는 부패가 생겼던 것이다. 북방 사마리아가 남방 예루살렘과 원수가 된 것은 열 두 지파 중 열 지파가 남방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러 가지 못하도록 담을 막고 그리심 산에 신당을 짓고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예배할 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떠나가고 우상적인 종교를 이룬 사마리아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종말에도 소위 기독교 교인이라 하면서 예배를 방해하고 자기의 주권적인 운동을 해보려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바로 알고 그 진리에 따라서 예배해야만 될 것이다. 이제 아는 것을 예배하는 자는 어떠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1. 예배를 받는 자의 심정을 알아야 한다. (1~20)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예루살렘 성전을 들어가 볼 때에, 노하여 강도의 굴혈을 짓지 말라고 하면서 모조리 채찍으로 때려서 내몰았던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서 생수를 받으라고 했던 것이다. 아무리 그 여자가 남편이 많다 하여도 그 여자를 더럽다
하지 않고, 나는 메시아라고 하면서 지금은 아는 것을 예배할 때가 온다고 했던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더러운 죄인으로 볼 수 있는 여자 하나를 앞에 놓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생수를 받으라고 하는 심정, 나는 메시아라고 하는 심정,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어떠하다고 말씀하신 그 심정은 아무런 죄인이라도 아는 것을 예배할 때가 왔으니 너는
나를 누구인 줄 바로 알고 예배하라는 말씀이다.
예루살렘 거리에서 자기가 옳다는 생각을 가지고 거룩한 거리에 거룩한 의복을 입고 왕래하던 무리들이 예배하던 성전은 황무지가 되었고 유대인이 볼 때 짐승같이 여기는 죄인들은 바로 알게 되어 성전을 짓고 예배하는 일이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배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자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게 된다.
2. 시대를 따르는 예배 (21~22)
언제나 하나님은 시대를 따라 법을 세우고 법을 따라 예배를 드릴 때에 예배를 받으시고 축복하시는 것이다.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는 아담의 집에서부터 양을 잡아 드리는 피의 제사로 하나님을 공경하되, 양심으로 공경했다(딤후1:3). 이 양심이라는 것은 오실 메시아를 기대하는 양심에서 어린 양을 제물로 드릴 때에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신약시대가 이루어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으므로 어느 민족이나 다 같이 예배할 수 있는 비밀을 모르고 예배를 방해하던 유대인들은 다 망하고 십자가의 도를 바로 아는 자들이 예배할 때에 성령은 강하게 역사하므로 기독교는 온 세계 인류를 구원하는 대 종교를 이룬 것이다.
3. 신령과 진리의 예배 (23~24)
과거에는 모든 일을 몽학적인 교훈으로 예배 의식을 하나님이 주셨지만,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이 되는 역사가 있을 때는 몽학적 교훈의 의식이 필요 없고 직접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통하는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때와 성령이
역사할 때의 예배는 다르다. 지금 만일 어떤 교회가 성령의 역사 없이 예배 의식만 지킨다면 이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형식에 지나지 않는 예배가 된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는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성령의 역사가 은사로 내렸던 것이다.
지금은 예배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분명히 알고 예배하는 자라면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임하므로 은사의 체험을 받는 신령한 세계에서 그 영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같이 새로워지는 열매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예배를 인도하는 자는 십자가 중심에서 날마다 십자가의 고난을 참고 나가는 승리의 생활이 있음으로만 마귀의 흑암을 이기는 예배가 될 것이다.
결 론
가장 복 있는 자는 지금 이때에 아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금일에 예배하는 자가 많이 있지만 사랑을 떠난 교회에는 도저히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없으므로 그 예배는 아무런 응답이 없게 될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나타나서 구원을 완성했으니 이제는 여러 가지 의식이나 제물이 필요 없고 구원을 완성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녹아져서 그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할 때에 적은 무리가 모여도 신령한 예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은 자들이 그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될 적에 사랑의 은사를 체험하고 사랑의 진리를 가지고 사랑이 넘치는 생활에서, 입으로 찬송하고, 입으로 기도하고, 입으로 증거할 때에 기도나 찬송이나 설교는 다 열매가 되는 것이다.
택한 양을 찾는 목자의 인격
- 요4:7 ~19 -
기독교는 택한 양을 찾아 한데로 모으는 것을 목적하니 만큼 목자의 인격이 온전하게 됨으로만 열매를 거두게 된다. 오늘에 기독교가 많은 목자가 있지만 목자의 인격을 상실하게 될 때에 교회는 아무런 발전을 보지 못하게 되는 일이 있게 된다. 이방 종교는 택한 양을 찾는 종교가 아니요, 사람이 신을 찾아오는 데서부터 시작 되었으므로 다신 숭배가 있다. 여러 가지 신을 섬기는 그 것은 신이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신을 찾다 보니 여러 가지 신을 공경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방 종교에는 목자의 인격이 완전치 못해도 종교를 유지해 나가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찾아보는데 불과하기 때문에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도 덕을 보겠다는 욕망에서 이것저것을 찾아보는 정도로 나가는 것뿐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택한 양을 찾는 목자의 인격이 완전하므로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생명이 있는 것이다. 이제 생명 있는 교회에서 택한 양떼를 찾는 목자의 인격은 다음과 같다.
1. 겸손한 인격 (7~9)
목자는 겸손한 인격이 없이는 택한 양을 찾을 수 없다. 왜냐 하면 양과 목자의 인격 차이가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목자가 양을 찾아가지 양이 목자를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을 찾아오는 인격은 인간으로서 찾아볼 수 없는 겸손이다.
같은 야곱의 자손이지만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을 대하여 상종치 않는 것은 사마리아 사람은 야곱의 자손으로 속화되었다는 이유로 정통을 주장하는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대하여 상종하면 자기가 더러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겸손히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서 물을 구할 때 사마리아 여인은 이상하게 보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겸손하게 사마리아 여인을 대하여 구하는 인격은 인간이 볼 때는 무가치한 일이나 하나님이 볼 때는 크게 기뻐할 일이다. 우리는 예수 같이 겸손한 인격을 가지지 않고는 택한 양을 찾을 수 없다.
2. 영생의 물을 주는 인격 (10~14)
완전한 인격이라는 것은 받는데 있지 않고 주는데 있다. 죄인을 만나서 구하기 전에 먼저 내가 영생에 물을 준다고 하신 것은 주님밖에는 이런 일을 행할 자는 없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은 구원이 없다고 상종치 않는데 예수님은 영생의 물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참된 목자의 인격은 목마른 양떼에게 물을 줄 수 있는 인격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영생의 물을 주기 위한 목적에서 오신 것이다 . 그러므로 우리는 줄 수 있는 인격을 홀로 가질 수 없고 주님이 쓰시는 종이 될 때에 주님께서 영생의 물을 주는 일을 하기 위하여 종을 들어 쓰시되 주님이 주시는 그 사랑에 이끌려 남을 살려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순종하는 자라면 그 종을 통하여 모든 심령들이 영생의 물을 마시게 되므로 주님과 같이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인격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목자는 영생의 물을 주는 역사가 있어야 한다. 계22:17을 보면 성령과 신부가 말하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하였다. 언제나 주님께서 지금도 택한 양을 찾는 목자를 통하여 영생의 물이 되는 은혜의 역사를 강하게 내리는 것이다.
3. 부족을 깨닫게 해주는 인격 (16~19)
목자라는 사람은 부족한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니 양떼가 완전하다면 목자가 필요 없고 너무 어리석고 미약한 양이 되므로 목자가 필요하다. 주님께 서 언제나 택한 양된 우리에게 괴롭히는 말씀을 하지 않고 소망 있는 말씀을 하시어 택한 자의 부족을 깨닫게 하사
부드러운 말로 죄를 깨닫게 해 주시는 예수님은 언제나 죄인을 향하여 그를 완전히 깨닫도록 해주시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것이다.
의사는 언제나 병자를 바로 진찰하여서 그 병의 내막을 바로 알게 하여 그 병을 없이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참된 목자는 택한 양이 되는 사람의 마음을 괴롭히지 않고 부족을 깨닫도록 해주시는 것이 목자의 인격이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사람이 부족을 깨닫고 회개하게 하되 부드럽고도 사랑스러운 태도로 대하는 인격이 있어야 한다. 어떤 목자가 강단에서 부드럽고도 사랑스러운 태도로 택한 자의 부족을 깨닫게 해준다면 그 목자는 완전한 인격을 가진 자라고 볼 수 있다.
결 론
기독교는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기는 종교가 아니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종교이며, 죄인이 의인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고 의인이 죄인을 섬기는 종교이며, 약자가 강자를 섬기는 종교가 아니고 강자가 약자를 섬기는 것이 기독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어느 단체보다도 목자의 인격이 완전해야 되는 것이다.
참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 요 4:22~26 -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예배를 받으시고 역사하는 신이시다. 왜냐 할 때에 타락한 인생에게 완전한 것을 주고자 하는 것이니 죄를 진 인간에게 무조건 준다는 것은 불의와 타협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타락한 인생이 희생의 제물을 바치는 것을 받으시고 응답하셨지만, 그리스도의 완전 속죄가 성립된 후에는 희생의 제물이 중심된 제사가 아니고 예배를 중심하는 것인데 참된 예배가 있는 자에게 역사하는 것이다. 이제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요구를 들어주는 예배를 원하심 (22)
하나님의 요구라는 것은 합심을 요구하신다(마5:24). 합심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인데, 서로가 부족을 깨닫는 동시에 하나님께로 오는 것을 받지 않고는 도저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마음이 생길 때에 서로가 화목을 이루는 합심이 생긴다. 예배라는 것은 완전한 사람이 되므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고, 불완전한 인간이 자기 부족을 깨닫는 동시에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마음이 불타게 될 때에 자동적으로 예배는 신령한 세계로 기울어지게 될 것이다.
구약 때 이스라엘에 사마리아가 생긴 것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따로 그리심 산에서 예루살렘과 담을 막고 제사할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제사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금일에 기독교가 예배를 드린다 하여도 이모저모로 서로 합심이 되지 않는 예배는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밖에 없다. 이것은 자녀들이 각각 자기 요구를 들어 달라고 할 때에 부모의 마음은 오히려 괴로움을 느끼는 것같이 오늘의 기독교가 시대적인 하나님의 법을 순종치 않고 자기 주관을 내세우는 예배는 옛날 사마리아가 망하듯이 큰 화를 받게 되는 예배가 될 것이다.
2. 시대적인 진리의 법을 따라서 예배하는 것을 원하신다. (23)
하나님은 그 시대를 따라 법이 있고 법에 따라서 역사하는 신이시니 아무리 예배를 드린다 하여도 시대의 법을 순종치 않는 예배는 받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제나 그 시대 사람에게 비밀을 알려주고 그 진리를 신앙하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할 때에 진리를 순종하는 마음으로 예배하는 자에게 시대적인 축복을 나리는 것이다.
아무리 예루살렘이 거룩하고 성전이 거룩하다 하여도 그리스도의 영원한 속죄인 십자가법을 무시하고 예배하던 예루살렘은 황폐화된 것이다. 비록 미약한 무리이지만 십자가 부활을 증거할 목적으로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무리에게 큰 응답이 내렸던 것이다. 예배라는 것은 진리를 믿는 자들이 진리를 순종하며 진리를 따라 내리는 은총을 받기 위한 것이 예배의 목적이며 은총을 주고자 하는 하나님은 이러한 예배를 원하신다.
아무리 예배한다 하여도 진리의 법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없다면 진리의 신은 역사하다가도 떠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신이 아무런 역사를 할 수 없는 불법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 나라도 국법에 위반된 요구를 들어준다면 요구를 들어 준 자에게 혹독한 형벌이 있을 것이다. 하물며 조물주 하나님께서 진리의 법을 따르지 않는 장소의 예배를 조금도 받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3. 신령한 역사가 영적으로 통하는 예배를 원하신다. (24)
예배는 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이니 아무리 의식과 모든 설비가 장치되었다 하여도 영적 운동을 중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찬송이나 기도가 영으로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엡5:19). 언제나 영으로 하나님과 교통이
없는 예배라는 것은 아무런 열매가 없는 횡설수설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영을 통하여 활동하며 역사하는 것이니 영적 예배를 드리려면 몸은 제물에 불과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롬12:1). 몸이라는 것은 예배 시간에 아무런 활동이 없고 영에 이끌려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게 사로잡히는 자리를 이루어야 될 것이다.
예배 시에 몸에 국한된 생각으로 시간이 지루한 생각을 느끼게 된다면 영적 예배를 이루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예배에는 몸은 성령의 은혜 속에 잠겨 있을 것뿐이다. 이렇게 되므로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새롭게 나타내기도 하고 말씀대로 열매를 맺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결 론
예배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사람을 찾는 사랑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누구든지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일 때에 하나님은 그러한 예배를 받으시기 원하는 것이므로 억지로 되는 일이 없고 자유스러운 예배가 이루어진다. 이 자유라는 것은 성신의 자유다. 예배하는 자가 억지로 사람에 보이려는 의식이나 법에 국한된다면 자동적으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외식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참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 예배의 원칙이 된다.
아버지와 같이 아들을 공경해야 할 이유
- 요 5:19~29 -
서 론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아들을 공경하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기를 기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1. 아무 일이든지 스스로 하지 않는 것이므로 (19)
우리가 아들을 공경할 이유는 그가 절대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 외에는 조금도 스스로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주님께서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시키시는 일이 아닌 것을 행한 일이 있다면 그 십자가도 우리를 구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한 것은 양같이 순종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들을 공경하는 사람은 스스로 행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주님께서 당신도 양이요, 따라오는 사람도 양이라고 말한 것이다.
2. 아버지께서 인간에게 나타날 일을 아들로 나타내 주신 것이다 (20)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세상에 와서 똑똑히 보여주는 사실이 없다면 확신이 있는 신앙을 가지고 아들을 공경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무조건 아들을 공경하라는 것은 아니다.
합법적인 진리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큰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 예수의 행적이다.
3. 살릴 수 있는 권리를 아들에게 주신 것이다 (21)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심 같이 아들도 원하는 자를 살릴 수 있게 하신 것이다. 만일 살릴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 받은 아들이 아니라면 그를 공경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4. 심판할 권리를 맡긴 것이다 (27)
하나님은 심판을 아들에게 맡긴 이유는 인간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몸을 가지신 아들이 되었으므로 맡긴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공로를 가진 자 이외는 심판할 권리도 없기 때문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온 세계 만민을 다스리사 나게도 하고 죽게도 하고 또는 길흉화복을 주관하시되 공중의 나는 새까지도 지배하신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타락된 인간을 죄에서 해방을 줄 만한 일은 예수님밖에 다른 이는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아들을 아버지와 같이 공경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성경과 신앙 문제
- 요 5:39~47 -
서 론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 자체에 영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 믿도록 가르친 것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이제 성경과 신앙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본문을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1.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중심에 영생 얻기를 원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런 효과를 성서에서 찾지는 못하는 것이다(40)
왜냐하면 성경은 영생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혼인잔치에 오라는 편지를 받은 자가 편지를 읽기만 했다고 잔치를 먹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니 영생을 얻기 위한 사람에게만 양식이 되는 것이다(42).
2.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극진히 사랑하므로 주신 말씀이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자는 아무리 읽어도 필요가 없게 된다(43).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어떻게 죄를 용서하며 어떻게 성령을 부어 주며 어떻게 구원하되 어떠한 축복을 주겠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인생이 같이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세상에 보낸 말씀이니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자는 아무리 읽어도 필요가 없는 것이다 (44)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의 영광보다 더 크고 완전한 나라의 영광을 주고 자 하는 것을 무시하고 썩어질 세상 영광을 구하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결 론
바리새교인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가르치고 숭배하지마는 실제는 구원을 목적한 것이 아니고 한 직업적 삯꾼의 행동을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면 나를 믿었을 것이라. 그도 믿지 않거든 내 말을 믿겠느냐고 탄식했다. 금일에 성경을 들고 가르치는 목사나 장로가 되었다 하더라도 중심에 간절히 원치 아니하던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치 않는다든지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자동적으로 바리새교인의 행동이 될 것이다.
성경과 신앙 사상 문제
- 요 5:39~44 -
금일에 성경이 세계적으로 번역되어 어느 나라나 그 민족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지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은 큰 축복을 받을 기회라고 보게 된다. 그러나 성경과 읽는 사람의 신앙과 사상과 합치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불행을 가져오는 과오가
있게 될 것이다. 성경을 하나님께로 받아 기록한 사람이 유대인이요, 성경을 많이 읽어본 사람이 유대인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이 오신 메시아를 오히려 이단시하고 아직까지 메시아 오기를 기다린다는 무서운 과오를 범하고 있다는 것은 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어떠한 방법으로 구원해 주는 동시에 심판을 나리고 새 시대를 이루고자 하는 것인데 신앙 사상이 그 하나님과 맞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가 없는 마른 나무가 되고 말 것이다. 이제 어떠한 신앙 사상이 있어야 성서를 통한 열매가 있겠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성경을 우상화시키지 말 것이다 (39)
우상화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 사람이 성경을 기록했으니 자기에게만 영생이 있다는 관념이다. 성경을 순종하는 양심이 아니고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 큰 과오가 된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전부 자기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 원인은 독선의 교만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성경은 목적이 무엇이며 누구를 가리킨 말씀인 것을 분명히 알기 전에 함부로 자기 주관에 맞춘다는 것은 성경을 우상화시키는 일이 되게 쉽다.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고 성경대로 행하시는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신앙 사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2.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 있어야 된다. (40~42)
언제나 하나님께 겸손히 순종한다는 마음이 없는 자라면 성경을 읽어도 오히려 마음이 더 강퍅해 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실천 생활에 순종이 없이는 아무런 체험이 없으므로 성경을 많이 볼수록 마음이 더 굳어지고 강퍅해질 우려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의 비밀을 모르고 잘못 해석하는 가운데 오히려 남을 판단하는 과오를 범한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 ‘이 목숨을 바쳐 그 뜻에 순종한다’는 맑은 양심에서 읽는 자라야 성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직접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는 자라야 된다. (43~44)
누구든지 사람의 영광을 목적하면 언제나 거짓 선지에게 미혹을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라는 것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끄는 방침을 가지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는 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 보다도 인간의 무엇으로 보든지 옳게 보이는 일로 가장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하고 하나님께로만 보이려는 사상이 아니라면 성경의 깊은 비밀을 도저히 알 수가 없고 하나님의 시대적인 비밀을 모르고 오히려 반대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성경은 기록한 선지들이 억울하게 사람에게 멸시를 받고 핍박을 받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려는 생활을 할 때에 그 시대의 사람들이 다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인정받고 묵시로 받아 기록한 글이니 이것은 그 뜻을 바로 알자는 성경을 기록하던 선지와 같은 신앙 사상에서 하나님의 영광만 바라보고 나가는 자라야 하나님의 참된 신의 감화를 받게 되므로 시대의 비밀을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초림의 메시아가 올 때도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는 제사장들과 교법사, 유사, 장로들은 오히려 예수를 이단이라고 판정을 내렸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묵묵히 기도하던 시몬이나 안나 같은 선지들은 어린 예수를 품에 안고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려고 성전에 들어갈 때에 벌써 메시아인줄 알았던 것이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에 바리새교인들은 몰랐지만 베드로와 요한과 그 밖의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전도를 받고 메시아를 영접했던 것이다. 재림의 주가 오실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만 바라보는 종들 외에는 다 성경의 비밀을 모르고 오히려 성경을 그릇되이 해석하므로 예언을 멸시하다가 멸망을 자취할 것이다.
결 론
성경을 손에 들고 신앙 사상이 잘못된 자 보다도 성경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 정직하고 겸손한 자가 있다면 오히려 성경을 들고 잘못 해석하는 자보다는 시대적인 참된 증인의 전도를 받고 축복을 먼저 받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 요 6:26~40 -
서 론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을 하라고 명령하셨지만 사람이 범죄함으로써 기능을 상실하고 다 죄의 종이 된 인간이 됨으로 썩어질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벌레 같은 인간이 된 것을 불쌍히 보고 너희는 믿기만 하면 내가 이렇게 역사해 주겠다는 것이 복음이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가 오셔서부터는 참으로 믿는 자를 들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역사하겠다는 뜻이 내포된 것이다.
이제 어떤 믿음을 가진 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일하시겠느냐에 대하여 성경을 찾아보기로 하자.
1.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친 자라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27)
하나님이 인 친다는 것은 전권을 아드님에게 맡겼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모든 결재를 아드님을 통하여 끝을 맺도록 한다는 것을 뜻한 것이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복을 받는 것도 화를 받는 것도 모든 자유로운 권리를 행할 수 있는 인을 쳤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모든 행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특권을 맡겨서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란 뜻이다.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해도 인을 친 예수님을 모르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2. 예수는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35)
사람이 떡이 없으면 육체의 생명을 보전할 수 없음같이 생명의 떡인 예수를 바로 믿는 자 외에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떡이라는 것은 보는데서 효과를 주는 것은 아니다. 먹는 데서야 맛을 알고 맛을 얻는 것과 같이 예수를 믿는 일은 관능적인 외식적인 것을 떠나서 예수를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내 마음에 들어와서 약동하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생명이 살아나는 새로운 무엇이 없다면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산 생명의 체험적인 신앙이다. 유대인들은 보리떡을 줄 때는 좋다고 먹더니 예수님이 자기가 생명의 떡이라니 다 물러가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은 그 무리들이 구경거리로 따라오던 증거다. 금일도 많은 사람이 교회에 왕래하지만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써 먹고 체험하는 자는 많지 못하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아무리 교리나 의식이나 모든 도덕적인 생활이 충만하다 해도 생명의 떡인 예수님을 직접 먹어서 체험을 받는 개인적인 신앙의 비밀이 없다면 이것은 생명의 종교는 아닐 것이다. 떡을 먹는 사람이 자기에게 얻은 맛의 체험은 먹는 자 밖에는 모르는 것과 같다.
3. 결코 버리지 않는 사랑을 믿어야 한다. (37)
마귀는 믿는 자에게 와서 주님은 너를 버린다는 의심을 갖다 주는 일이 있는 것이니 이것이 흑암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절대 내게 오는 사람을 결코 쫓아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버릴까 봐 항상 의심을 한다면 주님을 참되신 주로 믿지 않는 것이니 주님은 이런 신앙을 원치 않는 것이다.
4. 주님은 자기 뜻대로 행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38~40)
왜냐하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행하려고 오신 것이니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자는 예수를 바로 믿는 신앙은 아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믿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하등에 필요가 없다고 보면 이것은 망령된 신앙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날까지 하나님의 예언하신 말씀을 순종하되 십자가의 죽으시기까지 순종했고, 오늘도 그 뜻을 이루기 위하여 다시 오시는 것이다. 금일에 신앙의 큰 병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예수님대로 믿는다 하면서 예언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 큰 병인 것이다.
결 론
신앙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역사하는 일을 순종하는 양떼의 심정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신자를 양이라 한 것은 목자의 말대로 순종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만 가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역사하는 일을 순종하는 것은 약해도 강하게, 어리석어도 지혜롭게, 더러워도 성결하게 되는 일은 주님의 역사에서 되는 일이니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정 문제
- 요 7:1~7, 행 1:13~14 -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이루게 한 것은 하나님 경륜이 이루어지기 위한 한 단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정이 합심된 가정은 심히 적었다고 본다. 아브라함의 가정에도 사라와 하갈의 싸움이 있었고, 이삭의 가정에도 에서와 야곱의 싸움이 있었고, 야곱의 가정에도 형들이 요셉을 애굽으로 판 일도 있었다. 이것은 가정의 천국이 아니요, 천국을 이루기 위한 과정의 한 단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한 가정에서도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질 수 있고, 환란과 안식으로 갈라질 수도 있다. 아무리 천사를 보내서 롯의 가정을 구원코자 했으나 롯의 처는 멸망을 받고만 사실을 보아도 온 가정이 단체가 되어 보호를 받는 것은 최대의 행복이라고 보게 된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 자라난 가정이라도 하나가 되지 못한 사실을 볼 때에 가정이라는 것은 시련의 과정이 있고야 합심될 수도 있고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보게 된다.
이제 그리스도의 가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 예수를 믿지 않는 가정 (요7:1~7)
마리아는 잉태할 때부터 천사의 지시를 받았고 성령으로 잉태되는 체험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을 알지 못하는 요셉은 마리아를 의심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는 마음까지 있은 것이다(마1:19). 그러나 천사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네 아내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니 아들을 낳거든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지시를 받고 사7:14이 자기 아내에게 응한다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 의심하던 요셉은 아내를 끝까지 보호하고 합심하여 예수님을 기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는 동생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분명히 목수 일을 하는 것을 날마다 보았고 아무런 징조가 없이 그 날이 그 날 같이 지내 왔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민의 구주요,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부활하므로 그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믿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말이 아니고 불평을 두는 말이었다. 그 때 예수님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세상이 너희는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한다.”고 하셨다.
언제나 사람이라는 것은 신이 아니요, 또는 완전하지를 못하므로 언제나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나님의 종이 그 가정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미움을 받고 압제를 받는 일도 있을 수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사명자로서 가정에 시련이 올 때에 깊이 깨달을 것은 예수님도 가정의 시련을 받았는데, 내게도 있는 것이 마땅한 줄 알고 깨닫지 못하는 식구를 원망하지 말고 “우리 가정을 불쌍히 보시옵소서” 할 기도를 할 것뿐이다.
2. 합심 기도하는 가정 (행1:13~14)
신앙이라는 것은 선구자가 있고 후진자가 있는 것이니 그리스도의 가정에 있어서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먼저 믿었고, 요셉이 의심 중에 있다가 천사의 지시를 받고 믿으므로 합심된 신앙 부부를 이루었지만, 그 동생들은 주께서 부활 승천하는 것을 본 후에야 완전한 신앙을 가지므로 신앙의 복된 가정이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신앙 가정을 이루는데 있어서 시련기를 지낸 후에야 합심된 가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하고 사명자로서는 자기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영계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을 목적하고 노력할 것뿐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자기 사명을 다 하게 될 때에 의심하고 믿지 않던 동생들까지도 다 믿으므로 다락방에 모여 합심 기도하게 되므로 성신을 충만히 받고 야고보서와 유다서가 그 동생을 통하여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 말세의 사명자는 완전한 신앙 가정을 이룰 때는 재앙으로 땅을 치는 역사가 있을 때에 어느 가정이나 다 합심된 가정을 이루게 될 것이다. 가장 복된 가정은 초림의 주를 모시고 합심된 요셉의 가정이라면 그보다도 더 복된 가정은 재림의 주를 영접할 때에 합심된 가정이라고 보게 된다.
만왕의 왕이 자라난 가정도 새 시대의 축복을 받지 못했지만 왕권 받은 변화성도가 자라나는 가정은 새 시대의 축복을 받게 되므로 왕족적인 가정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가정을 깊이 생각하며 가정이 합심이 못되는 것을 원망할 것 없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만 복된 가정이 이루어질 것이다.
결 론
신앙 가정이라는 것은 먼저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가 바로 열매 있는 신앙을 가지게 될 때에 아무리 반대하던 식구라도 그 증거를 보고 합심된 가정이 이루어질 것이니 내 가정에 합심이 되지 못한 것을 생각하여 낙심될 것도 없고 또는 귀한 종의 가정이 합심되지 못한 것을 비난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자라난 가정도 주님께서 동생들에게 비방하는 일을 받은 일이 있거든 하물며 어리석고 부족한 인간들이 주를 위하여 일꾼이 되려고 할 때에 이해하지 못하는 비소나 또는 핍박이 있다고 해서 이것 때문에 타격을 받는다는 것은 종 된 자의 자격을 상실하는 자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에 말하기를 원수가 네 집안에 있다고 하였지만 끝까지 참고 나갈 때에 하나님은 택한 종이 자라난 가정을 버리지 않고 다 환란 날에 구원해 줄 것을 믿고 나가야 할 것이다.
사명자의 시련과 가정문제
- 요 7:1~7, 행 1:12~14 -
서 론
시련과 가정 난제는 결부된다는 것과 큰 사명자의 시련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도 가정에서 쓴 시련을 통과한 것은 우리는 깊이 생각할 문제다. 삼십년간 가정의 생활 문제를 위하여 목수의 노동 생활도 시련이겠지만 세계 민족을 살리는 복음 운동을 시작할 때 가정 단합이 되지 않고 동생들까지도 비웃고 믿지를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요7:4~5에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주님께서도 나사렛 동리 회당에서 축출을 받을 적에 이 말씀을 했던 것이다(눅4:24). 시련 이라는 과정에는 하나님과 그 사명자만이 비밀이 연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도 친척도 부모도
그 사정을 모르게 되는 것이다.
1. 시련시의 가정문제 (요7:3~7)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때가 되기 전에는 가정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 했다는 것은 본문 성경이 증명한다. 동생들이 예수를 보고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는 자라는 말은 비평적인 한 마디였다.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지 않고 왜 숨기고 있느냐라는 이런 말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는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매일같이 손에 장기를 들고 목수 일을 하던 것을 보던 동생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세상의 구주라 하는 이 말을 들을 적에 마땅히 비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세의 종들도 멸시를 받고 미움을 받고 종 되었던 자가 일어남으로 열 왕이 그 앞에 절을 한 것도 시련 중에 하나라고 말한 것이다(사49:7). 또는 원통한 사정을 당하는 야곱이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말도 시련 중에 하나라고 할 것이다(사40:27).
초인간적인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생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야곱의 열 한 형제들이 요셉이 어떻게 될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를 박해한 사실도 사명자의 시련일 것이다. 다윗이 장인 되는 사울에게 미움을 받고 쫓겨 다닌 것도 다윗이 만 왕의 왕조가 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신이시니 인간이 기대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들어 쓰지를 않기 때문에 인간이 흠모할 만한 사실이 없다고 이사야 선지는 53:2에 말한 것이다.
주님께서 이와 같은 가정 시련을 거친 것은 그와 같이 왕권을 가질 사명자에게 주는 교훈의 하나가 될 것이다. 때가 되기 전에는 예수님도 완전한 사람의 하나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합당한 진리가 된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 없었더라면 이것은 완전한 구주의 자격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는 사명자는 여러 가지의 시련을 통과시킨다는 성서이기 때문이다. 주님도 받은 시련이어늘 우리는 가정 적인 시련에 낙심할 것은 도저히 없는 것이다.
2. 사명자의 축복과 가정 문제 (행1:12~1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도 그 동생들은 믿지를 않았지만 부활 승천 한 사실을 본 후에야 동생들도 깨닫고 그리스도의 가정식구들은 전체가 다락방에서 모여서 부활하신 주님이 내려 보낼 성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성모 마리아까지 동참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만일 부활 승천하는 일이 없었던들 그 가정은 이와 같은 변동을 받을 수 없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말세 사명자도 변화 승천할 시기가 올 때 그 가정은 더욱 합심하여 부르짖는 기도가 있게 될 것이다(계11:13). 자기가 남편으로 모셨던 사람이 승천하는 광경을 볼 때 아내가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자녀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축복 받은 종의 가정은 절대 합심하여 부르짖는 기도가 있도록 역사해 줄 것은 사실이다.
결 론
우리는 가정을 떠난 축복이 없고 가정을 떠난 승리가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위하여 부모나 처자나 전토를 버리는 자는 현세에서도 백배나 준다는 것이다(마19:29).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가정의 시련과 가정의 축복을 통과한 것은 말세 에
들림 받을 종들에게 줄 약속의 표증이 될 것이다.
교훈을 바로 아는 자가 되자
- 요 7:14~18 -
사람의 완전한 인격이라는 것은 교훈을 받을 때에 그 교훈이 어떠한 교훈인지를 바로 아는 자가된다면 이 사람은 완전한 것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교훈을 할 때에 소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바리새교인과 대제사장과 유대인 들은 그 교훈을 듣고도 바로 알지를 못하고 그리스도를 이단시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교훈을 바로 알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1. 하나님께로 온 교훈이 무엇인지 알라고 말씀하심 (14~ 16)
인간들은 사람이 배운 지식이 많은 자라야 그 교훈을 바로 아는 줄 안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님께서 글을 배워 본 일이 없는데 무식한 사람으로 어떻게 교훈을 하느냐고 하면서 의심하는 무리들에게 내 교훈은 하나님께로 온 교훈이라 고 말씀했다. 만일 인생이 머릿속으로 아는 지식으로서만 교훈한다는 것은 오히려 흑암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소위 박사라고 하는 자들이 교회를 망치는 이유는 하나님께로 온 교훈을 자기 지식으로 해석을 하고 가르친다는 것이 교회의 쑥물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완전한 교훈이라는 것은 사람의 정신작용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 오는 교훈이 완전한 것인 줄 아는 자라면 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알아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인간 지식을 배워서 거기에 국한된 교훈을 한다면 세계 인류를 구원할 자격이 없는 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금도 배운 일이 없는데 인간이 할 수 없는 교훈을 하시는 그리스도이시므로 참으로 우리가 믿을 만한 교훈이 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는 자라야 바로 알게 됨 (17)
세상 교훈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알게 될 것이요, 하나님께로 온 교훈은 하나님께 속한 자라야 바로 알게 될 것이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고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같이 하므로 교훈을 바로 알게 해 주시는 것이다. 아무리 대제사장이라 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는 마음이 없이 자기의 안락을 위한 삯꾼이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의 교훈을 반대하고 멸망을 자취하는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는 마음이 불타는 자라야 시대적인 교훈을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아무리 목회자라 하여도 그 삯을 따르는 삯꾼이 된다면 교훈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자신이 망할 뿐 아니라 양떼를 죽이는 비참한 일이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라야 참된 교훈을 하게 됨 (18)
죄 중에 저주받을 큰 죄는 자기의 영광만 구하는 일이요, 의 중에 축복 받을 의는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는 일이다. 이날까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 의 영광을 위하여 명예를 날리는 일을 교훈으로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정으로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를 희생한 지도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모두가 자기의 욕망을 위하여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이었지만 말구유에 탄생하시어 빈곤한 목수의 생활을 거쳐 노방전도, 병자 방문, 죄인들을 환영하며 겟세마네 동산의 피땀의 기도를 드리고 십자가를 지고 만민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것 전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순종의 걸음을 걸어 간 것뿐이다.
그리스도의 교훈은 전부가 땅의 것을 중심하지 않고 하늘의 것을 중심으로 하여 여러 가지 비유로, 여러 가지 이적, 기사로 또는 여러 가지 변론을 하실 때에 조금도 타협이 없는 십자가의 길에서 죽기까지 충성된 증인으로 증거한 말씀은 부활, 승천, 성신 강림의 역사로 이루어졌으며 그의 증거대로 세계 인류가 다 구원을 받게 된 현실에 이르러 우리는 여러 가지 혼선이 많은 교계에서 종말의 교훈을 바로 알아야만 될 때가 왔다.
결 론
교훈은 완전한 사람을 만들 수도 있고 금수와 같은 사람을 만들 수 있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교훈을 바로 알 때에 하나님같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의 교훈을 바로 알지를 못할 때에 금수보다 못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훈을 바로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제일 큰일이다.
스스로 속는 자가 누구냐
- 요 7:37~53 -
종교 신앙을 가진 자로서 스스로 속는 자들의 형편을 본문을 통하여 말하고자 한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양심을 떠나게 되면 무엇이나 스스로 속는 자가되는 것이다. 마귀의 미혹이라는 것은 스스로 속게 하는 것을 마귀의 미혹이라는 것이다. 성신은
언제나 그 사람의 마음에 부족을 깨닫게 하는 역사이요, 마귀의 술을 먹는 사람은 자기만이 옳다는 생각에서 스스로 속게 만드는 것이니 스스로 속는 자의 형편은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1. 성경을 잘못 해석함 (37~44)
사람의 마음에 자기의 주권을 세우고자 하는 자는 성경을 해석해도 잘못 해석하게 된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교인들이 예수님의 귀한 말씀을 들어도 그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성경을 자세히 읽지도 않고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를 이단이라고
정죄까지 했던 것이다. 그들은 미5:2을 들어 가지고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베들레헴에 날 것을 말하며 갈릴리에서 나오는 예수는 성서에 의하여 이단이라고 정죄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나시고 갈릴리에서 나오는 것이 사9:1~2이 응하는 것인데, 이것을 모르는 바리새인들은 성서를 들어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메시아가 아니라고 한 것은 스스로 속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일점일획도 가감 없이 응하는 것인데 성경을 한 절만 가지고 자기주장을 세우는 자는 마귀의 미혹을 받는 탈선된 길에 서게 될 것이다. 금일도 많은 종들이 다 성경을 들고 각자가 자기주장을 세운다는 것은 스스로 속는 일이 많게 된다.
메시아가 올 때도 성경을 가감하는 자들이 망했고, 재림의 주가 올 때도 그와 같이 될 것이다. 성경이라는 것은 여러 선지를 통하여 그리스도 한 분을 가르친 것이니 한 선지의 예언만 치중하고 모든 선지의 예언을 종합하여 획선을 바로 찾지 못하면 스스로 속는 사람이 된다. 이렇게 되는 사람들은 성경을 이용하려는 야심이 있으므로 성경에 눈이 어두워져서 큰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2. 함부로 남을 미혹되었다고 하는 자이다 (45~47)
대부분이 영계가 어둡고 스스로 속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남을 미쳤다, 미혹을 받았다, 이단이다, 마귀다 하는 말을 많이 한다. 예를 든다면 술에 취한 자가 함부로 남에게 이유 없이 욕설을 하는 것이나 똑같다. 금일에 교회가 자기는 영계에 아무런 체험이 없으면서 조금만 자기와 다르면 미혹으로 본다는 것은 스스로 속는 일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함부로 남을 미혹으로 보는 것보다도 영계를 잘 분별할 때에 남이 혹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다 하여도 그 사람을 아끼는 심정에서 그 시험을 벗어나도록 해 보려는 안타까운 심정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도 언제나 마귀에게 시험받는 사람을 겸손히 찾아가서 건져 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바리새교인들은 그것까지도 훼방하며 귀신이 들려 가지고 귀신을 쫓아낸다고 마12:27에 말했는데 세상에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미혹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자기가 미혹을 받은 심령인 것을 분별치 못하면서 남을 판단하는 자들은 소위 교권에 치우친 자들이라고 보게 된다. 자기 교파 외에는 다른 사람은 다 미혹으로 보는 어리석은 자들이 자신을 망치고 교회를 망치는 것이다.
3. 함부로 남을 저주하는 자이다 (48~53)
율법을 알지 못하는 예수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속는 자들이다. 무엇이 바로 아는 것인지 이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이다. 금일에 와서 소위 정통 신학이라고 하면서 고집만 남아 가지고 성경의 해석을 자기네 주관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무식한 자라고
하면서 함부로 이단이라고 판정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는 사람들이다. 성경을 잘못 사용하면 자신을 망치는 자가되는 것은 자기 주관에 따라서 움직이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리 성경을 가르친다 하여도 오히려 교만을 가져오게 되고 안다는 지식 때문에 오히려 스스로 속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경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연합되는 생활에서 그 시대 그 시대 비밀을 아는 사명자 외에는 다 스스로 속게 되는 폐단이 있다. 성경을 자기가 안다는 것도 탈선이요, 성경을 깊이 알아보지 않는 것도 탈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는 것을 아는 신령한 성신이 같이 함으로만 자기 사명을 행할 수 있는 지식을 갖게 된다. 소위 율법자라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한 것은 스스로 속는 자가 아닐 수 없다. 무엇인지를 자세히 알아도 보지 않고 무조건 자기가 안 다는 자체는 스스로 속는 교만이다.
그러므로 바리새인 중에 하나인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를 찾아 와서 교훈을 받고 깨달은 바가 있은 후 바리새교인들이 예수를 저주할 때에 그 동료들을 합당치 않다고 지적하고 말할 때에 오히려 니고데모까지도 무시했던 것이다. 가장 어리석은 자는 함부로 경솔히 남을 판단하는 자이다.
결 론
스스로 속는 자가 되지 않으려면 성경을 세밀히 상고하여 성경의 연관성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고 그 시대의 법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며 무엇이 미혹 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영계가 있어야 할 것이니 사람의 인격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근본적인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며 그 목적이 무엇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종교인 중에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교권에 치우친 자, 자기의 주관에 치우친 자, 자기 의 이익을 위하여 날뛰는 자, 이러한 무리가 다 스스로 속는 인간들이다.
주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
- 요 8:12~20, 31~37 -
서 론
하나님은 생명의 원동력을 가지신 신이시니 무엇이든지 자유를 줄 수 있고 자유로 활동하게 해서 열매를 맺게 하는 신을 하나님의 신이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지은 것도 다 자유롭게 되게 한 것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이나 말 못하는 동물이나 또는 하나님과 동등한 형상을 가진 사람이나 다 참된 자유를 주어서 자유로운 발전을 가지는 동시에 자유롭게 열매 맺게 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신이시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주는 자유는 무엇이냐라는 것을 성경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1. 생명의 빛을 얻게 하는 자유다 (12)
주님께서는 어두움에서 헤매는 인간들을 억지로 끌고 가는 주님은 아니다. 생명의 빛을 마음에 비춰 주고 깨닫게 해서 자동적으로 회개케 하고 자동적으로 옳은 길을 가도록 만드는 역사이다. 그러므로 음란한 여자를 돌로 쳐 죽여야 마땅하냐는 질문에서 주님은 누구든지 죄가 없는 자는 돌로 치라고 하실 때 주님의 생명의 빛이 그 가운데서 역사했던 것이다(요8:7~11).
그러므로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은 다 자진적으로 물러가고 여자를 정죄하지 아니하고 다시는 범죄치 말라고 하시면서 말씀으로 여자에게 자유를 주었던 것이다. 절대적으로 그리스도는 죄인을 억지로 회개시키는 일은 없고 억지로 따라오라고 한 일도 없다. 자동적인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면서 따라오게 한 것이 그리스도가 주는 자유의 역사라 한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실천함으로써 남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28)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반대할 때 내가 십자가에 죽은 후에야 너희들이 내가 누구인줄을 스스로 알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아무리 옳은 진리를 말했다 하더라도 십자가에서 죽은 실천이 있은 후에 그를 반대하던 자들도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면서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마27:54). 이것이 참된 자유를 주는 역사였던 것이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못 박아 죽인 악한 원수들도 자동적으로 회개하며 가슴을 치며 돌아왔던 것이다( 행2:36~38).
3. 진리를 앎으로 자유를 얻게 한다. (31~32)
기독교의 진리라는 것은 누구든지 바로만 알면 참된 자유를 얻게 된다. 이것은 옳은 진리의 노선을 찾되 참된 생명의 소망을 알게 되니 자유롭게 죄를 버리고 성결을 찾고 있는 것이다(요일3:3). 이 자유라는 것은 양심에서부터 맑아지고 또는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생명이 있는 자유를 찾게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떠한 신자가 무엇을 할 적에 하나님이 무서워서 억지로 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마귀와 우상을 섬기는 그 생활에 불과할 것이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진리를 바로 알고 자유롭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유롭게 죄를 이기고 나가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율법적인 바리새교인을 보고 너희는 아직까지 죄의 욕심을 따라 행하니 마귀에게 속했다고 말했다.
결 론
그리스도께서 주는 자유는 영원한 자유가 된다. 왜냐하면 영생의 생명을 따라서 오는 자유니 완전한 끝을 이루기까지 하나님은 계속적인 성령의 역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나뭇가지에서 순이 나서 열매가 되도록 계속적인 진액이 그루터기로부터 보급됨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주는 자유는 당신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끊임없이 역사해 주는 것이니 완전한 자유를 가지되 자유로운 권세를 얻어서 세세왕국의 영광을 누리기까지 역사해 주는 것을 주님이 주는 자유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종 된 자에게 주는 자유의 열매이다.
진리가 주는 자유
- 요 8:31~36 -
인생의 최고 가치는 자유의 생활인데, 진리가 주는 자유가 없다면 그 자유는 오히려 자신을 망치는 불행을 가져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안에서 자유를 바로 찾으면 향상이고, 진리 안에서 탈선된 자유를 따를 때에는 타락이 되게 한 것이니 가장 간교한 뱀을 창조하여 진리로 오는 자유를 방해하도록 한 것은 마귀를 이기는 자에게 참된 자유를 주어서 세세영광을 누리게 하자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담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치 않고 간교한 뱀의 말을 순종했으므로 인생은 진리의 자유를 상실하고 마귀를 통하여 오는 욕심에 끌리는 자리에서 타락을 가져오는 생활이 육체의 정욕을 따라 행하는 방랑적인 자유가 인간 타락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금일에 인간들이 참된 진리를 대적하는 ‘민주주의’라는 간판 밑에서 육체 정욕을 만족하게 해 보려는 것은 자유의 세계를 이루는 것보다 멸망의 날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제 진리가 주는 자유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진리에 거하는 생활이 있어야 된다. (31)
하나님은 자유의 신이시니 말씀을 주시는 동시에 말씀대로 얼마든지 행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신이시므로 사람이 그 말씀에 거할 때에 아무리 약한 자라도 말씀대로 역사하는 신의 역사를 통하여 무소불능한 신의 힘으로 참된 진리의 자유를 이룰 수 있는 인격을 얻게 된다. 언제나 인생이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없고, 인생을 들어서 역사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자유의 생활을 하는 축복이 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것이다. 사람이 범죄함으로 죄의 권세를 잡은 마귀의 세력을 벗어 날 수 없는 것을 긍휼히 보시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인생을 그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이끌어 내어 영원한 자유의 세계를 이루어 주겠다는 것이 복음의 말씀이니 말씀 안에 거하는 자라야 참된 말씀을 주는 주님의 제자가 된다.
2. 진리를 분명히 알므로 (32)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인간에게 말씀한 것이니 그 진리를 분명히 알려면 진리를 따라 갈 때에 진리대로 역사하는 신의 증거를 받으므로 그 진리를 분명히 깨닫는 생활 안에 들어가게 된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는 자라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진리에 순종하는 생활이 없는 자는 그 진리를 분명히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성경을 읽긴 읽지만 그 말씀 안에서 생활하지 않고 자기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관념적인 교만에서 오히려 마귀의 일을 하는 자들이 되었다(39~40).
참된 자유라는 것은 의식과 도덕이 아니고 심령이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생활에서 신의 축복을 받는 생활을 할 때에 참된 자유의 세계를 정복하는 자리로 들어가게 된다. 오직 진리를 아는 것은 사람의 정신작용에 있지 않고 영이 하나님의 신과 교통하는 세계에서 영적 활동이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진리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쁨의 생활이다.
3. 주님만이 참된 자유를 주심 (36)
참된 자유는 인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시므로 만이 있는 것이다. 자유를 위하여 세상에 오신 주님께서 인생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공로도 사랑도 능력도 계시므로 누구든지 주를 믿고 순종할 때에 홀연히 참된 자유를 체험하는 생활을 기독교의 완전한 자유라 하는 것이다.
마귀는 언제나 사람을 어둡게 하고 마음에 공포를 주는 신이지만 주님은 사람에게 언제나 완전히 깨닫는 마음을 주어 확실한 소망이 무엇인 것을 알게 하고 소망 중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는 인격을 주는 것이니 아무리 신자라 해도 죄의 생각이 마음을 점령한다면 이것은 주님이 주는 자유를 소유한 자라고 볼 수 없고 아직 그 심령은 마귀에게 속했다고 보게 된다(요8:44).
그러므로 주님은 사람을 율법 아래 두지 않고 은혜 아래 두어 은혜로써 자유로운 행동을 하게 하되 죄를 짓는 자유가 아니고 죄를 이길 수 있는 자로써 참된 평강을 중심에 누리고 참된 기쁨을 가지고 아무런 난관이 와도 용기 있게 나가도록 하는 것이 주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라는 것이다.
결 론
금일에 인간들이 자유를 찾는 것만은 누구나 인간 본능으로서 원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 자유가 참된 자유이냐 이것이 마귀 미혹이냐를 모르는 사회에서 참된 자유를 진리 안에서 소유한 자만 앞으로 오는 환란에서 남은 자가 되고 새 시대를 정복할 수 있는 용사가 될 것이다.
욕심은 마귀에서 난 것이다
- 요 8:42~49 -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고 사람을 낼 때에 사람에게는 양심을 주고 간교한 뱀에게는 욕심을 주었다. 그러므로 욕심을 받은 마귀와 양심을 받은 사람과에 대립을 시킨 것이니 이것은 양심을 가진 사람으로 욕심을 가진 마귀의 말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자에게 모든 영광을 주기 위한 작정이다.
그러므로 가장 간교한 뱀이 역사하는 것은 어떻게 하든지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싫어하고 공연히 욕심을 내어서 속이도록 하는 본질을 가진 것이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란 것이다. 마귀도 하나님이 있는 줄 알고 천국도 지옥도 다 알지만 근본이 욕심으로 지은 피조물이니 도저히 그 욕심을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심을 떠날 수 없는 것이 마귀요, 양심을 떠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이제 욕심의 근본인 마귀 역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하나님의 아들을 공연히 미워하는 일 (42)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은 마귀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이니 이유 없이 미워하는 것은 마귀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바리새교인들이 이유 없이 예수를 미워할 적에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누구든지 마귀 역사가 그 마음에 있을 적에 자동적으로 남이 역사하고 잘 되는 것을 보면 심술이 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마귀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 바리새교인들이 예수님이 아무런 역사도 하지 않을 때는 가만히 있었으나 예수님이 역사해서 많은 사람이 따를 때는 미워서 죽이려고까지 한 것은 마귀의 역사라고 본다.
지금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사람들이 남의 교회가 부흥되고 남이 역사하는 것을 보면 공연히 그 사람의 흠을 잡아 보려고 하는 것은 바리새교인에게 같이 하던 마귀라고 본다. 왜냐하면 바리새교인들이 자기의 교권을 위하여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야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따라 갈 때에 그를 믿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 흠을 잡아 해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따라갔던 것이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남의 흠을 잡아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공연히 남의 말을 한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마귀의 자식이라고 보게 된다. 사도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마귀에 속한 자라고 요일3:10에 말했던 것이다. 지금 예수라 하면 누구든지 그 진리를 싫어하고 마음으로 미워하는 것은 전체가 마귀가 주는 마음이라고 본다.
2.
진리를 들어도 깨닫지를 못함 (43)
언제나 마음에 욕심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듣기를 싫어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 사상이 말씀과 맞지 않는 원인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상은 자기가 목숨을 바쳐 남을 살리겠다는 것이요, 마귀의 사상은 어떻게 하든지 참된 하나님의 자녀를 죽게 하겠다는 것이 사상이니 하나님 말씀과 그 사상은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사랑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요일4:7~8에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은 남을 살려보려는 마음을 가진 자라야 듣는 대로 보는 대로 깨달아지는 것이다.
지금 아무리 교회에 성경을 들고 가르치는 자가 많지만, 욕심이란 것이 있는 사람은 그 진리를 바로 깨달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마음에 맞춰 서 말하게 되니 독주를 먹고 취한 자가 된다(사28:7~8). 이러한 자들은 오히려 참된 진리를 바로 해석하는 것을 듣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비평하며 마귀와 타협을 하는 동시에 거짓을 행하여 자기의 위신을 세워 보려는 자들이다(사28:14~15).
하나님의 말씀을 묵시로 받는 자들이 다 욕심이 없이 남을 살려보려는 마음으로 눈물 흘려 기도하다가 묵시를 받았고 그 진리를 바로 깨닫는 사람들도 남을 살려보려고 기도하는 자라야 그 묵시의 진리를 바로 증거할 수 있다.
3.
살인자다 (44)
살인이라는 것은 마귀의 자식이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는 일이 첫째 아담의 집에서부터 가인이 동생을 죽였던 것이다. 간교한 뱀이 사람을 속여 선악과를 먹게 하므로 사망이 왔고 사망의 권세가 사람을 지배할 때에 사람을 죽이는 사회가 되고 보니 아 담의 가정에서부터 싸우던 싸움은 금일에 와서 세계 인류의 전멸이라는 비참한 살인적인 무력이 완비되는 흉악한 세상이 되었다.
사람이라는 것은 남을 살리면 하나님의 일꾼이요, 남을 죽이면 마귀의 종이다. 그러므로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 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도라면 이 십자가의 도를 반대하는 세력은 누구나 다 살인자라고 보게 된다. 살인도 3가지로 볼 수 있다.
말씀을 잘못 전하는 것도 살인이요, 남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요, 직접으로 남을 죽이는 살인도 있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일도 의를 위하여 죽이는 일이 있으니 이것은 살인으로 볼 수 없고 옳은 심판으로 본다. 이제 살인을 하지 않고 남을 살리던 자가 왕권을 받게 될 때에 마귀의 자식들을 모두 죽여 없이 할 권리를 받게 된다(계19:19 ~21).
4.
성신의 역사를 마귀라고 하는 일 (45~49)
언제나 마귀의 충동을 받은 자가 자기의 세력을 옳다고 내세우기 위하여 공연히 남을 마귀라고 하는 것은 그 마음에 욕심이 있는 증거이다. 요즈음 교회가 남을 이단이라고 정죄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자기가 마귀에게 속한 증거라고 보게 된다.
에덴 동산에서 간교한 뱀이 하나님을 거짓이라고 말하듯이 금일도 거짓 선지의 세력이 오히려 참된 종을 거짓이라, 이단이라, 마귀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귀는 언제나 자기가 옳다는 것을 내세우고 하나님이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마귀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결 론
참된 하나님의 종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아무리 억울한 욕을 먹고 훼방을 받아도 악으로 말하지 않고 정당한 진리만을 말씀한 것 같이 아무리 동역자의 비방을 받고 악한 자들의 모략을 받는다 하여도 거기에 탓하지 않고 진리만을 증거하는 것이 진리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떤
종이 남이 욕하면 같이 욕을 하고 내 흠을 말하면 같이 남의 흠을 드러내어 말하고 남이 권리를 내세우면 나도 권리를 내세워 보려고 한다는 것은 참된 하나님의 종이 하는 일이라고 볼 수 없다. 언제나 세세 왕권을 바라보는 참 종이라면 금일에 원수를 갚으려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서 설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부탁의 기도를 할 것뿐이다.
영적 소경된 사람의 행위는 무엇이냐
- 요 9:39~41 -
서 론
주님께서 영적 흑암에 잠겨 있는 바리새교인들을 향하여 “네가 본다 하기 때문에 죄가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왜냐하면 주님은 주님을 판단하는 그들의 죄가 더 크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자가 본다 하기 때문에 죄가 더 많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이제 영적 소경된 바리새교인들이 주님께 대한 판단을 내린 것은 다음과 같이 성경에서 보게 된다.
1. 주님을 안식일 범죄자라는 판단을 내림 (16)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는 조건으로 예수를 안식일 범죄자로 보았다. 안식일이란 사람을 위하여 있는 안식일인데 사람이 복을 받는 일까지 죄로 취급한 것은 영적 소경이라 하는 것이다. 안식일의 정신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축복한 날인데도 불구하고 병을 고치는 것을 죄라고 판단한 것을 주님께서는 그들을 소경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2. 예수를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정함 (22)
교권주의에 치우친 행동이라는 것은 영적 소경이라는 것을 주님은 말씀하셨다. 아무리 하나님을 공경해도 교권에 치우친 야욕적인 행동은 용서할 수 없는 죄라는 것을 주님은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 하는 사람은 무조건 출교하라는 것이 바리새교인들의 교권이었던 것이다. 금일도 무조건 자기 교권 하나를 내세우는 무리들은 다 영적 소경이 될 것은 사실이다.
3. 그리스도를 죄인이라고 결정 내렸던 것이다 (24)
함부로 남의 죄를 만들어서 판단하는 것이다. 자기만 옳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하여 남을 정죄하는 것이 바리새교인의 악독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영적 흑암이란 남의 허물을 만들어서 책잡으려는 것이 영적 흑암이라고 주님은 말했던 것이다.
4. 그리스도를 모세만 못한 사람이라고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29)
남의 근본을 알지도 못하고 영계를 판단하는 것이 영적 소경이라 하는 것이다. 모세는 훌륭한 종이지만 예수는 모세보다 못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그들은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의 당파를 내세우기 위하여 자기가 숭배하는 사람 외에는 다 틀렸다고 보는 것이 영적 흑암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5. 남을 무조건 무시하고 나가는 것이다 (34)
이것은 자기 주관 외에는 남은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무시하고 나가니 역시 영적 흑암이다. 소위 종교 지도자라는 바리새교인들이 불쌍한 소경의 눈이 나아서 감사하며 말할 때 압박하며 회중에서 쫓아냈던 것이다(요12:10).
결 론
이와 같은 무리들은 소위 정통파라는 자기의 고집을 내세우고 예수님을 판단하고 또는 훼방하는 동시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한 그 영계를 보시고 예수님은 “너희가 소경이 되었다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본다 하니 죄가 그냥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차라리 하나님을 몰랐다면 나을 뻔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방인보다 더 악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말세에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무리 가운데도 교권에 치우친 악한 거짓 선지의 행동이 역시 이러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육신으로 오신 메시아를 박해하던 무리가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에도 반드시 이와 같은 무리가 있다고 말씀하셨다(계1:7).
주님의 죽으심과 하나님의 사랑
- 요 10:7~18 -
서 론
하나님은 아들을 특히 사랑하게 됨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더욱 큰사랑을 베푸신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죽으심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당신의 경륜과 작정을 도저히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주님께서 하나님께 받은 계명을 순종치 않으셨다면 이 사랑을 베풀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랑이라는 것은 공의를 완성한 사랑이니 이 사랑으로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님의 죽으심을 인하여 사랑할 이유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주님 한 분이 죽으심으로 당신의 양을 살리게 될 것임으로 (9~10)
하나님은 주님 한 분이 죽은 것으로 잃었던 양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 큰 승리를 이루는 것이니 예수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더 사랑을 베풀게 되는 것이다.
2.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계 인류가 하나가 됨으로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이다 (15~16)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한데 모아 한 무리가 되는 것을 기뻐하고 원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희생을 기뻐하는 것이다. 만일 십자가의 죽으심이 아니라면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을 한데 모을 수 없을 것이니 세계인류는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한 무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다.
3. 주님은 자원하여 십자가에 순종하셨음으로 그 계명을 지킨 것이다 (18)
만일 주님께서 억지로 마지못해 죽으신 것이라면 이것은 제사가 될 수 없다. 대속이란 것은 자원해서 피 흘린 십자가임으로 대속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누가 마지못해서 할 수 없이 원수에게 잡히어 죽었다면 이것은 순교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을 것이다. 순교란 것은 먼저 정신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동적으로 만민을 위해 죽으심이 속죄가 되는 것이요, 자동적으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죽은 것은 순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한의 사랑을 가지셨지만 희생의 피를 흘리는 것을 따라서 모든 권리를 맡기는 사랑이 베풀어지는 것이다 .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되 예수님의 죽으심으로써 받는 그 사랑을 우리도 받기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사랑은 받기를 원하면서 죽기까지 순종이 없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을 가진 자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도 죽음으로써 사랑을 받았거든 하물며 죄인 된 자로서의 속죄를 받고 성신을 받고 사명을 받고 죽기까지 충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명령을 받고 충성을 다하지 않는 자를 조금도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대적하는 사람이니 묵인할 수 없을 것이다.
선한 목자의 죽음
- 요 10:7~18 -
조물주 하나님께서는 무소불능의 신이지만 죽음을 슬퍼하는 신이시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는 일에 큰 화를 가져 오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니 먹지 말라는 것으로 엄한 법을 세웠던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내지 않았으면 죽음이 없을 것이 아니냐고 하는 말도 있다. 그러나 영원히 산다는 법이 있는 동시에 죽는다는 법도 있어야만 공의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국민을 사랑하는 정객이 살린다는 법만 있고 죽인다는 법이 없다면 이것은 국민을 사랑하는 법이라 할 수 없다. 사랑이라는 것은 덮어놓고 사랑한다는 것은 오히려 자신을 망치고 가정과 사회를 망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이 없이 덮어놓고 사랑한다는 것은 방랑적인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물주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할 때에 목적을 두되 당신을 의심 없이 믿는 자를 사랑한다는 것이며 사랑하는 자에게 완전한 것을 더 준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간교한 뱀을 창조하여 꾀어 보는 것은 하나님을 의심 없이 믿나 안 믿나 보자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의심한 죄로 결국은 선악과를 먹게 되므로 죽게 된 것이니 이제 믿지 않고 죽게 된 자를 다시 한 번 믿게 해서 용서하며 구원한다는 것이 희생의 피를 드리는 제사의 법으로 세운 것이다. 인생이 믿지 않은 죄로 죽게 되고, 다시 믿는 법을 의심 없이 믿는다면 다시 산다는 것이 구원의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선한 목자로 오셔서 죽기까지는 원죄로 죽을 몸을 가진 사람들이 양심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은 피의 제사였던 것이다. 피의 제사라는 것은 그 영을 구원해 주는 동시에 앞으로 올 소망을 갖되 죽어도 다시 산다는 부활을 믿었던 것이다. 이 부활이라는 것은 선한 목자가 죽음을 통하여 온 것이다.
이제 선한 목자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가 있다.
1. 구원을 얻게 하자는 것이다 (7~9)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자는 독생자 예수라고 본다. 그러므로 조물주께서는 첫째아담으로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둘째아담 예수로 말미암아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나라가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나라이라면 그 나라의 대통령이 되기를 누구나 원하되 어느 부모가 아들이 있다면 가장 제일 사랑하는 아들을 그 나라의 대통령이 되기를 원할 것은 사실이다. 다윗 왕도 솔로몬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아들보다도 그 아들이 왕이 되기를 원하는 말을 했으므로 솔로몬이 왕이 된 것같이 하나님께서도 아담이 천국의 만왕의 왕이 되는 것보다도 자기의 신성을 가진 독생자를 통하여 천국에 왕이 되는 것을 기뻐하시므로 첫째아담은 성령을 부어준 일이 없으므로 마귀의 미혹을 이기지 못하고 왕권을 빼앗긴 것이다.
그러나 둘째아담 예수는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고 올라올 때에 성신이 비둘기 같이 임하며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시었다. 그러므로 기뻐하고 사랑하는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으로만 천국을 이루어 놓는 것을 조물주께서 기뻐하심으로 첫째아담까지라도 피의 제사를 드리게 한 것은 피조물인 인생 중에서 누구든지 자기가 천국에 갈 수 없고 사랑하는 아 들로 말미암아 가는 것을 기뻐하기 때문이다.
2. 생명을 풍성히 얻게 하자는 것이다 (10)
하나님께서 무한의 생명을 가지셨지만 첫째아담에게는 생명을 풍성히 준 것이 아니고 생령이 되게 한 것뿐이다. 그러나 둘째아담 예수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생명을 풍성히 얻게 하자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께 있는 풍성한 생명을 몽땅 사람에게 주고자 하는 것인데 이것을 얻는 데는 사람의 행위로써 얻는 것을 아버지께서 원치 않고 독생자의 의로운 행실이라야 그 생명을 풍성히 얻을 조건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독생자가 만민을 위해 죽었다는
의(義) 외에는 하나님을 만족케 할 의는 세상에 없는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도덕적인 행위가 옳다 하여도 그것은 사람 앞에 상대는 될지언정 하나님과 상대는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희생의 제사가 최고의 의가 되고 다음에는 그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하여 피 흘리기까지 싸운 의가 만왕의 왕권에 가입되는 의다.
독생자의 의는 만왕의 왕이 되시는 동시에 많은 영혼을 살리고 몸까지 영생하는 의가 되었다. 예수님이 만민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으므로 많은 사람의 죄가 사해지고 부활했으므로 많은 사람이 영생의 생명을 받게 되었고 그리스도께서 성신을 보냄으로 몸까지 신령한 몸이 되고 그리스도가 재림하므로 의를 위하여 죽은 몸은 부활하여 왕이 되고 재림시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심판의 다림줄의 진리를 쥐고 싸워서 붉은 용의 미혹을 이기고 승리한 자는 그 몸이 변화 승천하는 것이니 이 전부가 독생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열매다.
3. 하나가 되기 위하여 (14~16)
세계 인류가 하나가 된다는 이유는 십자가 외에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행위로써 천국을 이룬다면 사람마다 자기가 옳다는 것으로 될 것이니 자기가 옳다는 것으로 하나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십자가 의로써 구원을 받게 되는 것으로만이 자기가 없고 그리스도의 은혜뿐이라는 것으로 하나가 된 것이 완전한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단체는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아 뭉쳐진 단체라고 보게 된다. 이 단체만이 영원한 나라를 이루는 동시에 영원히 같이 즐거워하며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계시록 5장을 보면 네 생물, 24 장로, 천천만의 천사, 만물까지도 다 어린양의 죽음으로 된 일을 노래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 뿐이라고 계21:27에 말씀한 것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누구든지 어린양의 죽음을 통하여서만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결 론
인생의 최고의 의는 선한 목자 예수님이 죽었다는 그 의로만이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에도 선한 목자가 죽었다는 것이 제일 큰 역사요, 인간의 역사에도 선한 목자가 죽었다는 것으로써 완전 승리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한 목자에게 있어야 할 단체
- 요 10:14~18 -
세상에는 많은 단체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한 목자에게 있어야 할 만한 단체는 기독교뿐이다. 아무리 세상에서 훌륭한 지도자라 하여도 그 한 사람을 중심해서 완전한 단체가 이루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완전한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한 때에 일국의 지도자는 있었지만, 세계적인 지도자로서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꼭 같이 다스릴 자는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한 목자에게 있어야 할 단체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우리를 분명히 아는 목자 (14~15)
아무리 세상에서 영웅적인 지도자가 있다 하여도 지도를 받는 사람들을 분명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어떤 지도자가 지도를 받는 사람의 사정을 모른다면 하나의 단체를 이룰 만한 자격이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를 아는 것보다도 더 세밀하게 우리를 분명히 아시는 목자이시니 우리를 지도할 만한 자격을 충분히 가지신 것이다. 우리가 원하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는 선한 방법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죄와 사망의 법을 벗어나는 일이 없다면 모 든 것을 다 얻었다 하여도 결국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예를 든다면 죽을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죽음을 벗어날 수 있는 좋은 약이 필요한 것인데, 좋은 음식과 의복을 아무리 많이 갖다 준다
하여도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2. 우리를 인도하는 목자 (16)
오늘날 남을 인도할 책임을 가진 자도 많이 있기는 하지만, 세계 인류를 하나가 되도록 인도할 이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되 억지로 따라오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새롭게 해서 자동적으로 따라 오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사람의 마음을 하나같이 새롭게 하셔서 인도하시기 때문에 하나가 되는 나라를 이루시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 하더라도 지금 살아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는 역사를 내리지 못한다면 완전한 단체를 이룰 수가 없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자는 마음이 깨끗해지고, 평화를 누리는 동시에 사랑의 격동을 받게 되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생활에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반대하던 자라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달게 받으며 따라 오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인도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있다면, 참으로 주의 인도를 따라가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3. 자유로운 권세가 있는 목자 (17~18)
자유로운 권세가 있는 지도자가 아니라면 모든 사람을 바로 인도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므로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할 수 있는 목자이시다. 아무리 사랑이 있다 하여도 자유로운 권세가 없는 자는 남을 완전히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실천에 있다고 본다. 목숨을 버리기도 하고, 다시 얻기도 하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은 완전한 사랑을 친히 실천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사랑을 가지신 동시에 그 사랑을 완전히 실천하는 일은 아들에게 행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는 단체를 이루어 영원한 나라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일이 있도록 하신 것이다. 가장 귀한 것은 사랑인 동시에 그 사랑을 실천한 일이라고 본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하나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만으로 영원하고도 완전 한 단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가장 귀한 것은 한 목자 안에 뭉쳐진 단체라고 본다. 그런데 이것이 없다면 인간의 미를 이룰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를 분명히 아시고, 인도하시고, 자유로운 권세가 있는 예수로 말미암아 한 단체를 이루는 것이 대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크고도 영원한 섭리라는 것이다.
택한 자의 산 믿음
- 요 10:22~29 -
참된 종교의 신앙이라는 것은 어떤 의식이나 법도나 사람의 기도에 따라서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산 믿음이라는 것은 오직 택한 자라야 믿어지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산 믿음이 될 수 없고,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선물을 주는 믿음이 산 믿음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 안에 다니실 때에 소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유대인들이 말하기를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 여든 밝히 말하시오”라고 하였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을 보고 내 양이 아니라고 하신 것을 보면 믿음이라는 것은 주님의 택한 사람이라야만 있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누구든지 다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택한 사람만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산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아무리 역사적인 예루살렘이라도 택한 사람이 심히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성전에 왕래하면서 하나님을 공경하였지만 지극히 적은 소수가 예수를 믿고,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 다 예수를 믿지 않고 훼방하다가 망한 것을 본다면 택한 양은 유대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나라의 사람이든지 모태로부터 택한 자가 있는데 이 자를 찾기 위하여 역사할 때에 택한 자에게 믿어지도록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이제 택한 자의 산 믿음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1. 깨달아 듣는 일이 있다 (27상반절)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서 외칠 때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지만 나사렛 예수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고 할 때에 예수님을 따라 가는 자는 심히 적었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어린양을 보라고 할 때에 벌써 메시아인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산 믿음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일을 듣고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예를 든다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양이라도 자기 목자의 음성은 잘 알아듣는 것이다. 이와 같이 택한 자가 참된 진리를 듣고 깨닫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아니요, 벌써 하나님께 속한 자이므로 그 심령이 깨달아지게 된다. 이것은 어떤 사람의 방법에서 되는 것이 아니고 무조건 믿어지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아무리 들어도 모르는 것을 택한 자가 깨달아 듣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깨달아 들리는 것은 그를 택한 하나님의 신이 역사하시는 증거이다(마13:23).
2. 따라 가는 일이 있다 (27하반절)
인생이라는 것은 따라가는데 의하여 죽느냐, 사느냐에 놓이게 되고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문제가 결부된다. 산 믿음이라는 것은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핍박이 있어도 예수님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도덕을 초월한 영적 행동이라고 본다.
인생이라는 것은 누구를 따라가든지 그 따라가는 것이 바로 그의 생활이 된다. 방랑생활을 하는 것도 그 마음에 무엇인지 모르게 금할 수 없이 역사하는 것이 있으므로 하게 되는 것이고 의로운 정로를 따라가는 것도 그 마음에 무엇이 역사하므로 되는 것인데 여기에는 사상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동물이 먹을 음식을 볼 때에 덮어놓고 먹겠다는 식욕에 끌려서 따라가는 것뿐이요, 거기에 어떠한 목적이 있어서 따라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먹기 위해서 따라 간다는 것은 가치가 없는 동물의 생활이요, 목적을 두고 따라 가는 것은 동물계를 초월한 생활이라고 본다. 그리고 목적을 두고 따라가는 중에서도 핍박이 많고, 시험이 많은 험한 길을 가신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택함 받은 사람이 아니고 는 도저히 갈 수가 없는 길이다.
그러므로 천하에 제일 적은 무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산 믿음을 가진 자라고 본다. 주님께서 “내가 다시 올 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은 택한 자로서 산 믿음을 가진 자가 적다는 것을 가르친 말씀이다. 이스라엘 60만 대중이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나섰지만 끝까지 산 믿음을 가지고 싸워 나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다.
오늘에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 같지만 산 믿음으로 끝까지 싸워 이기고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자는 14만 4천인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3. 붙들려 사는 일이다 (28~29)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무엇에 붙들려서 사는 생활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도 무엇에 붙들려서 살기 때문이요 , 죽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도 무엇에 붙들려서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복 있는 생활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손에 붙들려서 사는 것이다. 우리 자체에 아무런 활동을 할 힘과 능이 없다고 해도 하나님과 예수님의 손에 붙들리게 된다면 그 생활이야말로 과학을 초월한 생활이 된다. 왜냐 하면 무소불능의 역사에 끌려서 사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오늘에 세상이 소위 문명이라는 것을 자랑하지만 이것은 과학적인 기계에 붙들린 것이다. 오늘날 세계적인 전쟁이라는 것도 과학적 원자무기가 무서워서 떠는 전쟁이므로 기계에 붙들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택한 자의 산 믿음이라는 것은 대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것이다. 그러므로 기계에 붙들린 과학 문명으로는 이상적인 국가를 이룰 수가 없겠지만, 조물주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자는 눈물, 전쟁, 죽음, 고통이 없는 평화 의 왕국을 이루고야
말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산 믿음을 주어서 그 믿음으로 순종하게 하고 믿는대로 역사해 주시므로 영광을 받기도 하시고 세세 영광을 주기도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받은 자는 신이다
- 요 10:34~39 -
하나님께서는 인생에게 말씀을 주실 적에 각자 각자에게 직접 주는 것이 아니고 대표적인 사람에게 말씀을 주는 동시에 그 사람을 신과 같이 들어 쓰므로 그 말씀이 널리 전파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바로 깨달아 믿게 하는 방법이라고 본다.
이제 하나님 말씀을 받은 자를 신과 같이 쓴 것을 성서를 보아서 알 수 있다.
1. 율법과 계명을 받은 모세 (출4:11~12, 7:1, 14:21)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국을 이룰 때도 말씀을 받은 모세를 신과 같이 쓰므로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해결하도록 하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만 모세에게 주고 신과 같이 들어 쓴 일이 없다면 이스라엘의 왕국을 이룰 수 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받아 기록한 사람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그 때 즉시 말씀이 이루어지는 때의 종은 신과 같이 썼고 이루어질 것을 묵시로 받아쓰는 종은 잠잠히 글만 기록하는 것으로 머물러 둔 것이다. 모세는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말씀이 이루어지는 때에 말씀을 받아 가르친 종이므로 그 말씀이 응하기 위하여 신과 같이 쓰여진 것이다(창15:12~1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말씀대로 이스라엘이 이방의 객이 되어 애굽을 섬겼고 말씀대로 400년 동안 괴로움을 받았고, 말씀대로 그 나라를 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언제나 사람을 들어 쓰되 그 입과 손을 들어 쓰므로 입에도 손에도 열매를 맺게 하므로 신과 같이 역사하게 하는 것이다. 모세는 애굽 나라에 신과 같이 나타나서 역사하므로 그 압박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한 것이다.
2. 말씀을 받은 베드로를 들어 쓰심 (행3:6~8, 5:3~6)
많은 제자가 있지만 베드로를 통하여 신과 같이 역사하도록 한 것은 주님께서 “천국 열쇠를 네게 주노라” 하였고 또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한 것은 대표적인 사람으로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아무리 예수를 세 번씩 모른다고 부인 한 실수도 있지만 말씀을 맡겼기 때문에 그 말씀을 증거하기 위하여 신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역사하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아무리 십자가 앞에서 대신 아들이라는 명분까지 받았지만, 은혜시대의 복음을 맡은 자가 아니고 영원한 복음이 되는 계시록을 잠잠히 받아 기록한 것으로 끝을 맺었다.
사도 중에도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책임을 맡은 바울과 할례 받은 자에게 총 책임을 맡은 두 사도만을 들어서 놀라운 역사를 하게 한 것은 복음의 말씀을 위한 대표로 들어 썼기 때문이다.
3. 예언의 말씀을 맡은 증인 (계11:3~6)
모든 선지가 묵시의 말씀을 기록했지만, 그들을 통하여 큰 역사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묵시를 볼 때에 앞으로 동방 땅 끝에서부터 역사가 일어나되 원수를 회삼물같이, 진흙같이 짓밟고 나간다고 사41:25에 말했고, 불 가운데로 지나도 불꽃이 사르지 못한다고 사43:2에 말했고, 원수의 세력이 부끄러워 손으로 입을 막고, 귀가 막히게 되어 떨게 된다고 미7:15~16에 말했고, 하나님같이 쓰여진다고 슥12:8에 말했고, 동북의 소문을 듣고 북방의 세력이 번민케 되어 발악적인 행동을 하다가 망한다고 단11:44에 말했으니 이 모든 성경은 다 말세 재앙의 날에 선지의 예언을 가지고 다시 예언하는 종들의 역사라고 보게 된다.
그 밖에도 모든 선지는 진노의 날에 남은 종은 불이 되고 원수는 초개같이 된다고 말씀했으니 우리는 말씀을 받은 종이 신 같이 쓰여진다는 것만으로 그 시대에 모든 난제를 해결한다고 믿는 것이다. 율법시대가 시작될 때도 말씀이 임한 자를 신 같이 썼고, 은혜시대가 시작될 때도 말씀이 임한 자를 신과 같이 썼으니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는 마지막 역사에도 말씀을 받은 종이 신과 같이 쓰여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제 모든 난제는 말씀이 임한 종을 신과 같이 들어씀으로써 끝을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고 하신 것을 어찌 폐할 수가 있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결 론
기독교가 산 종교라는 것은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되 사람을 신과 같이 쓴 것으로써 그 시대 사람들에게 증거를 보여 주므로 원수의 무리를 이기고 나가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일이 과거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게 됨으로써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참된 말씀만 증거한 종의 열매
- 요 10:40~42 -
세례 요한은 어떠한 이적을 행한 적은 없었지만 그가 증거하는 말씀을 믿고 따라 간 자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므로 그 열매는 세계적인 복음 운동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많은 선지가 과거에 묵시를 보고 기록한 것을 정확히 증거해서 그 증거대로 이루어진 것이
신약 시대이다. 아무리 이적을 많이 행했다 하더라도 말씀의 증거대로 이루어지는 열매가 없다면 그 이적은 아무런 효과를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말씀만 증거하는 종이 되어야만 열매가 많게 될 것이다.
1. 요한이 증거한 말씀은 참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됨 (40~ 42)
세례 요한이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할 때에 많은 사람이 처음에는 이상히 여겼던 것이다. 나사렛 동네에서 목수 일을 하던 사람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증거하는 것은 너무나 이해치 못할 일이다. 그러나 안드레와 시몬 베드로와 그밖에 많은 제자들은 의심 없이 믿고 따라갔던 것이다(요1:35~ 45).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은 어부들이 따라 가는 것을 어리석게 보았지만, 알고 보니 요한의 증거가 참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요한은 예수를 증거할 때에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고 하였다. 그 말씀대로 오늘날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역사를 받을 때에 누구나 다 세례 요한의 증거가 참되다고 말하게 된다.
우리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어떤 이적을 보고 하나님은 참되다고 말하는 것보다도 하나님 말씀이 증거한 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큰 열매가 되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증거가 참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신의 역사를 통하여서만 된다. 그러면 세례 요한이 증거한 말씀이 참으로 이루어진 것을 통하여 온 세계 인류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은 큰 열매가 되는 일이라고 본다.
2. 요한의 증거를 받고 예수를 따른 자라야 확실한 증인이 됨 (행1:21~22)
세례 요한의 증거를 인하여 예수를 확실히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증거가 없이 예수님은 스스로 나설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순서가 요한의 증거로부터 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세례 요한의 증거가 없이 이루어진 일이라면 성경은 처음부터 그대로 응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사40:3 이 응해짐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증거할 수 있는 사도의 역사가 나오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법이다. 법이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그대로 실행이 되지 않는다면 그 전체가 무효가 되고 마는 것이다. 요한이 아무런 이적을 행치 못 하고 증거를 말씀으로만 했지만, 이 말씀이 사도적인 권위를 세우는 시발점이 되었다. 세례 요한의 증거를 받고,
예수님을 참 메시아인줄 알고서 그 때부터 떨어지지 않고 따라간 사람이 확실한 증인의 자격이 있다는 것을 베드로는 말했다.
그러므로 요한의 증거는 천국 복음 운동의 문을 여는 역사가 되었던 것이다. 요한의 증거는 모든 선지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일을 먼저 전한 것이니, 요한의 증거를 바로 깨달아 안 자가 천국 복음 운동의 선구자가 될 수 있다. 요한은 인간이 볼 때에 놀라운 역사도 없이 쓰러지고 말았지만, 그의 증거는 천국 복음 운동의 선구자를 세우는 일에 큰 열매를 나타낸 것이다.
3. 요한의 증거대로 마지막 증인이 나오게 됨 (마3:12, 사40:3~11)
요한은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운다고 증거했다. 그러므로 마지막 증인은 요한의 증거의 계통자라고 볼 수 있다. 이사야 40장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한 것을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한 것은 대조해 본다면 요한은 메시아를 영접하라는 것을 외칠 때에 회개를 말하였고,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는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된다. 먼저는 씨를 뿌리러 온 것이라면 마지막은 알곡을 모으러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40장은 세례 요한의 증거와 마지막 증인의 사명을 연관시킨 것이요, 이사야 42장은 그리스도의 교훈과 하나님의 새 일의 교훈을 연관 시킨 것이다. 세례 요한의 증거 아래에서 사도적인 역사가 나오게 되었고, 종말에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변화성도도 나오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세례 요한의 증거는 아무런 이적이 없는 증거이지만, 그 말씀대로 은혜시대의 역사도 심판기의 역사도 다 열매가 되는 것이다. 신앙의 확증이라는 것은 세례 요한의 증거에서부터 가지게 될 때에 알파적인 역사와 오메가적인 역사를 혼선 없이 정확히 알게 된다.
결 론
세례 요한이 참된 말씀만 증거한 것이 큰 열매가 되었다면 기독교 종말에 끝을 맺는 선지들도 말씀만 증거하므로 열매가 많게 될 것이다.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는 말씀만 증거하는 것으로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열매이니 기독교의 완전 승리의 열매를 이루게 될 것은 사실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성경에 기록된 말씀만 증거하지 않고 다른 것을 가입한다면 이것은 불법이므로 이적이 있다 하여도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이다.
[ † 목 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