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목  차

1. 참된 증인의 심정 ( 빌 1 : 3 - 11 )

2. 복음에서 교제하는 인격 ( 빌 1 : 3 - 11 )

3. 주의 날을 사모하는 성도의 기도 ( 빌 1 : 9 - 12 )

4. 온전히 담대한 바울 ( 빌 1 : 12 - 24 )

5. 온전히 담대한 바울 ( 빌 1 : 19 - 30 )

6. 주의날에 자랑할 것이 있는 자가 되자 ( 빌 2 : 12 - 18 )

7. 참된 지식을 따르는 생활 ( 빌 3 : 5 - 16 )

8.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의 생활 ( 빌 3 : 9 - 16 )

9. 온전함을 이룬 자의 사상( 빌 3 : 10 - 16 )

10. 십자가의 원수는 멸망 ( 빌 3 : 17 - 19 )

11. 재림의 주를 기다리는 성도의 교제 ( 빌 3 : 20 - 4 : 3 )

12. 사명자의 완전 결합 ( 빌 4 : 1 - 3 )

13. 하나님의 평강이 같이 하는 생활 ( 빌 4 : 4 - 7 )

14. 주안에서 기쁨으로 사는 생활 ( 빌 4 : 4 - 7 )

15.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하는 생활 ( 빌 4 : 4 - 9 )

16. 배워지는 바울의 인격 ( 빌 4 : 10 - 15 )

 

골로새서

1. 기도의 정의( 골 1 : 9 - 12 )

2. 기도 생활의 일곱 가지 요점( 골 1 : 9 - 12 )

3. 복음의 일꾼된 바울( 골 1 : 23 - 29 )

4. 능력의 역사를 따라 수고하자( 골 1 : 24 - 29 )

5.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위력을 잃지말자( 골 2 : 8 - 23 )

6.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하는 자가 되자( 골 3 : 15 - 17 )

7. 성도의 사생활과 하나님의 보응( 골 3 : 18 - 25 )

8. 기도와 전도의 열매( 골 4 : 2 - 6 )

 

 

참된 증인의 심정

( 빌 1 : 3 - 11 )

  기독교 안에 많은 사람이 진리를 증거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볼 때에 어떠한 심정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하여 모든 역사는 좌우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볼 때에 환영을 받고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는 것 같으나 그 열매가 완전한 것이 없다면 그 종의 심정은 바로 선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이제 참된 증인의 심정은 어떠한 심정이 있어야 완전한 열매를 맺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항상 간구하는 심정이 있어야 된다 (3~4)

  아무리 외형적인 열심이 있다 하여도 중심에 항상 간구하는 마음이 불타지 않으면 그 열심이라는 것은 얼마 가지 않아서 식어지고 말 것이다. 바울이 아무리 옥중 생활을 하지만 조금도 식어지지 않고 기쁨으로 항상 간구하는 마음이 불탈 때에 비록 옥중에 있지만 옥중에서도 많은 열매가 있는 종이 되었던 것이다. 그가 쓴 옥중 서신은 이 날까지에 큰 열매를 가져오는 진리 운동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종은 항상 간구하는 마음이 있는 자라면 어디를 가나 항상 열매 있는 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간구하는 기도는 다 주님께서 책임을 질 일이기 때문이다.

 

  2. 확신이 있어야 된다 (5~6)

  확신이라는 것은 양심적인 신앙에서 가지게 되는 것이니 조금도 인위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고 순수하게 주님의 역사에만 순종하는 자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와도 마음에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은 모두 되어지는 일이 전부가 주의 역사에서 되어지는 일을 볼 때 자기를 확신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더욱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위적인 방법으로 하는 일은 처음에는 될 것 같으나 그대로 되지 않는 것을 볼 때에 낙망을 하게 되는 것이요, 참된 증인이 하는 일은 자기가 하는 일이 아니요, 그 증거의 말씀대로 신의 역사가 점점 강하게 일어나므로 실패 같으나 모든 일이 뜻밖에 이루어질 적에 더욱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증인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점점 강해지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함 (7~8)

  세상에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자를 사모하지만 그 사모라는 것은 한 인정에 지나지 못한 것이로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하는 것은 인정적이 아니요 참으로 심장으로 그를 완전히 복을 받도록 하겠다는 불타는 마음에서 목숨을 바치기까지 기도하면서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되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에 의하여 마음에 불타는 마음을 금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가는 종을 하나님은 인정하는 것이다.

 

  4. 남이 완전해지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9~11)

  언제나 참된 종의 심정은 사랑하는 양떼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이냐는 것을 심각히 생각해서 그 결말이 바로 되기를 바라는 심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거짓 선지라는 것은 일시 사람에게 흥분과 감정을 주는 것을 목적해서 자기를 따라오게 하려는 것이로되 참된 증인의 심정은 양떼가 점점 자라서 잘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흥분이 없이 완전한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을 목적하고 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양떼는 임시 자기에게 좋게 하는 것을 따라가게 되므로 결말이 좋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주의 날에 부끄러움이 없이 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하나를 목적 두고 일하는 것이 참된 증인의 심정이라는 것이다.

 

 결 론

  기독교의 사업이라는 것은 참된 증인의 심정을 떠나게 되면 오히려 사회 기관보다도 더 가증한 일이 될 것이니 항상 간구하는 마음과 확신하는 마음과 사모하는 마음과 남의 장래를 심각히 생각하고 나가는 마음이 있어야만 열매 있는 종이 될 것이다.

  금일에 하나님의 종들이 이 네 가지 마음이 없게 될 때에 하나님은 그 예배나 그 전도나 기도를 받을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은 진노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완전한 사람은 없는 것이로되 참된 증인의 심정을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께서 완전히 들어 쓰므로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동시에 완전한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것이다.

 

 

 

복음에서 교제하는 인격

( 빌 1 : 3 - 11 )

 

  인생이라는 것은 교제없이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악인은 악인을 교제하고, 의인은 의인을 교제하고, 부자는 부자를 교제하고, 빈자는 빈자를 교제하는 것이 사회 생활이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으로 교제하는 사회는 아니다.

  복음으로 교제하는 인격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1. 간구하는 자가 됨 (3~4)

  세상에 신자 친구가 있다 하여도 친구가 복 받기를 위하여 항상 간구하는 심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의 교제는 항상 간구하는 마음이 있다. 하나님이 볼 때에 항상 남이 복 받기를 간구하는 사람을 참된 종으로 인정한다. 만일 복음을 전하는 자가 남이 복 받게 하기 위하여 간구하는 심정이 없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외식하는 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도 항상 간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모든 성도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2. 소망의 확신을 가지는 자 (6)

  세상의 교제라는 것은 임시 그 때에 따라서 교제를 하는 일이 많지만 복음적인 교제라는 것은 소망의 확신을 가지는 데서 서로 참고 기다리면서 교제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광산에서 광물을 찾는 광부들이 좋은 광물이 있는 것이 확신이 될 때에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희생을 해 가면서 고난을 극복하듯이 복음으로 교제하는 사람도 주의 날에 확신을 소망하는데서 서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순교자의 동무적인 교제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 많은 친구가 있지만 주의 날에 설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면 가장 귀한 친구인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한 교제가 되기 때문이다.

 

  3. 은혜에 참여하는 자가 됨 (7)

  세상에 교제라는 것은 한 식탁에서 맛있는 음식을 나눈다든지 한 직장에서 재미있게 일을 한다든지 학생이 한 책상에서 공부를 하는 일이 있을 때에 서로 깊이 사귀어지는 것은 자연적으로 되는 일이다. 이와 같이 복음으로 교제하는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나리는 은혜를 함께 항상 받게 될 때에 참된 교제를 은혜 속에서 하게 되므로 그 진리를 위하여 함께 싸워 나가게 되는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는 자 (8)

  우리의 교제는 기분이나 오락이나 문학적이 아니고 어떤 세력을 초월해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하나가 되는 교제이다. 이것은 혈통적인 관계보다도 영적 관계로 한 마음, 한 뜻을 이루는 교제가 된다. 세상에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마음이 꼭 하나가 되기는 어렵지만 복음적 교제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하나가 되는 교제이다.

 

  5. 사랑과 지식을 가진 자 (9~11)

  우리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진리의 지식을 받았으므로 점점 진보하는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날까지 장성하여 다 같이 왕권을 받는 교제가 된다. 사람이라는 것은 서로 발전이 있으므로 끝까지 열매를 맺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교제가 있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끝까지 나가지 못하고 신앙이 식어진다면 자동적으로 완전한 교제를 이룰 수 없고 서로 떠나게 되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나뭇가지가 자랄 때에 같이 자라는 가지는 같이 열매를 맺을 것이로되 진액을 받지 못하고 말라지는 가지는 자동적으로 찍힘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복음적인 교제도 그와 같은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생에게 복음을 주고 복음으로 교제한 단체를 이루는 것을 기뻐하신다. 이것은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고 복음으로 교제가 될 때에 복음의 자체는 그리스도이므로 그리스도의 자체가 되는 단체가 이루어지므로 복음대로 활동하는 하나님과 복음으로 교제하는 단체에 하나가 되는 것을 성도의 나라라는 것이다.

 

 

 

주의 날을 사모하는 성도의 기도

( 빌 1 : 9 - 12 )

 

  우리의 기도라는 것은 주의 날을 사모하는 중심에서 할 때에 그 기도는 완전한 열매를 이루게 된다. 주님께서 기도의 응답을 나리는 것은 재림의 날에 설 수 있는 인격을 이루기 위하여 나리는 것이다. 주의 날에 설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다음과 같이 기도하는 자라야 된다.

 

  1. 사랑이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해지기를 목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9)

  오늘날 기독교가 사랑을 말하고 있지만 진리의 지식이 없고 영계적으로 밝은 자리에 이르지 못하므로 사랑을 바로 베풀지 못하고 비진리를 사랑하고 참된 진리의 사람을 이단시하며 참된 성신의 역사를 사단으로 알고 사단의 역사를 성신으로 아는 폐단이 있으므로 기도를 하여도 아무런 응답이 나리지 않는 일이 많다. 기도는 진리에 의하여 상달되는 것인데 진리의 지식이 없이 영계의 분별도 없이 기도한다는 것은 바리새 교인의 기도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과 총명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기도해야 될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세상의 것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기도는 이방인의 기도와 같고 오직 진리의 깊은 지식에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해야만 될 것이다. 기도의 중점이 지식에 있지 않고 헛된 허영심에 있게 될 때에는 기도는 오히려 더 손해를 보는 일이 있게 된다. 아무리 사랑이라 하여도 참된 지식과 총명이 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랑 자체가 죄를 이루게 된다.

 

  2. 선한 것을 분별하므로 허물이 없이 되기를 목적으로 하여야 할 것이다 (10)

  성도의 허물이라는 것은 선한 것을 분별치 못할 때에 아무리 열심이 있어도 그 열심은 허물을 더 많이 내게 되는 일이 있게 된다. 예를 든다면 길을 가는 나그네가 길을 분별치 못하고 잘못된 길로 열심히 걸어간다는 것은 가면 갈수록 더 불리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도하는 사람이 선한 것을 분별치 못하고 무조건 열심히 해 나간다면 그것은 오히려 불행을 가져오는 열심이 된다. 오늘날 기독교가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하여도 허무한 일이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보다도 분별할 수 있는 그 일을 먼저 목적으로 하고 조심해야 할 것이다.

 

  3.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기를 목적으로 하여야 할 것이다 (11)

  기도의 목적은 무엇이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의의 열매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인간 자체가 행했다는 것이 결부되어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서만 상달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마음이 있을 때에는 기도라는 것은 하등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불완전한 사람에게 응답을 내리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 의의 열매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완전한 의의 열매를 얻고자 할 때에는 그리스도의 의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기도하여야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를 요구하시는 것보다도 그리스도의 의로써 인간에게 응답을 나려 의의 열매가 되게 하여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흑암이라는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인간의 도덕적인 의로 치우쳐서 사람에게 보이려는 중심에서 움직일 적에 그 하는 일은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행동을 하는 일이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자기의 의를 사람 앞에 나타내려는 자를 통하여 있게 된다.

 

 결 론

  기도라는 것은 이방적인 기도도 있고 성도의 기도도 있으니 아무리 기도를 한다 하여도 하나님께 상달이 되지 않는 기도는 다 이방적인 기도가 된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도는 정상적인 기도가 있어야 한다. 푸른 나무의 순이 계속으로 진액을 받으므로 열매가 많듯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아무런 실패가 없이 이르는 성도가 되려면 기도의 세 가지 요소가 항상 있어야 한다.

  첫째 : 점점 풍성해지는 일과,

  둘째 : 허물이 없이 되는 일과,

  셋째 : 열매가 충만해지는 일이 있는 사람은 주의 날에 설 수 있는 무장을 갖춘 자이다.

  기도라는 것은 날마다 인격이 완전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날에 칭찬 받을 일을 목적으로 두는 생활에서 기도해야만 될 것이다.

 

 

 

온전히 담대한 바울

( 빌 1 : 12 - 24 )

 

서 론  

주님께서는 택한 종을 쓰시는 방법은 온전히 담대한 종을 만들어 쓰겠다는 것이 사랑하는 자에게 목적을 둔 비밀이다. 인간이 볼 때는 실패, 낙망, 공포, 수치를 당하게 하는 일이 있게 되는 것은 사랑하는 종은 완전히 담대한 사람을 만들어서 더 큰 역사를 할 수 있는 영계에 이르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제 사도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온전히 담대한 바울이 된 원인은 다음과 같다.   

1. 진보가 된 줄 생각하는 마음이다 (12)  

이것이 사도 바울이 넓고 높고 깊은 영계를 체험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인간이 볼 때는 자유를 잃고 로마 옥중에 있는 것이 복음 전파에 퇴보 같으나 바울은 더 진보라고 깨달아졌던 것이다. 이것은 어떤 환경이냐 할 때 형제 다수가 바울이 매임을 당할 때 겁 없이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14).

또 어떤 자들은 그와 반대로 시기하고 분쟁으로 악평적인 말로써 선전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어떻게 되었든 악평으로 말했다 해도 그리스도를 알려 주니 고맙다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란 것은 악화를 시켜서 쓰는 일도 있고 성령으로써 담대히 만들어 쓰는 것이니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일에는 진보가 되리라는 것을 그는 믿었던 것이다.  

2. 성령의 도우심으로써 될 것을 믿고 나아갔던 것이다 (19)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와도 성신의 역사만이 떠나지 않으면 필연코 승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있어야 될 것이다. 아무리 인간이 환영을 하고 천사같이 대접해도 성신의 역사가 아니라면 아무런 승리를 거둘 수 없는 것이니 바울은 이러한 때를 당하여 더 큰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온전히 담대하게 되는 원동력이다.  

3. 그리스도만 존귀케 된다면 무엇이든지 유익으로 아는 바울이었다 (20)  

죽어서 존귀케 된다면 죽어도 좋고 살아서 존귀케 된다면 살아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하나님의 종은 죽고 사는 문제에 국한되어 있다면 큰 담력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것도 저것도 다 내게는 만족이라는 것밖에는 없다. 내가 살고자 함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죽고자 하므로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만이 온전히 담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마음 가운데 내가 세상에 있어서 좀 더 일하는 것이 양떼를 위하여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24).

하나님의 종은 살아도 남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살아보자는 것밖에는 딴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종이 “세상이 귀찮으니 어서 세상을 떠나가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합당치 못하다. 이건 왜냐 할 때 양떼를 아끼는 마음이 없는 종이기 때문이다. 담대한 힘을 얻는 것은 절대 하나님이 나를 쓰려고 죽지 않게 한다는 것을 믿고 나서야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내 양심을 아신다는 데서 오는 힘일 것이다(빌1:8).   

결 론  

온전히 담대하다는 것은 사도 바울과 같은 정신과 사상 양심이 있는 자에게만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말세 비밀을 증거하기 위한 사도 바울 정신을 모방하고 그를 따르는 후계자가 되는데서 온전히 담대한 종이 될 것이다.

 

 

 

온전히 담대한 바울

( 빌 1 : 19 - 30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이 온전히 담대하게 될 때에 그를 들어서 쓰시되 완전 승리를 이루게 하므로 영광을 종에게 주기도 하시고 받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온전히 담대한 바울을 통하여 세계적인 대 종교를 이루는 열매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기독교를 박멸코자 하던 바울이 기독교를 위하여 온전히 담대한 종이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성령의 도우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될 줄 알므로 (19)

  성신의 역사로써 일하는 바울은 자기 힘으로가 아니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하여 반드시 승리할 것을 믿고 담대히 나갈 때에 하나님의 신은 강하게 역사했던 것이다. 성령의 역사라는 것은 어려운 일을 통과시키면서 역사하므로 완전 승리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성신을 받고 일하는 종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성신의 완전 역사로 모든 것이 완전히 이룰 것을 확신하고 담대히 나가야 한다.

  아무도 바울을 도와주지 않았지만 성신의 도움만 믿고 날마다 싸워 나갈 때에 어디를 가나 교회가 서게 되었던 것이다. 마귀의 역사가 강하면 성신의 역사도 강하게 일어나는 것이니 어려운 일이 올 때에 더욱 담대한 사람이 되면 그 일로 말미암아 오히려 감사할 일이 있게 된다.

 

  2.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려는 생각이 있으므로 (20)

  그리스도를 대적하던 바울은 그리스도만을 존귀케 하기 위하여 온전히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싸울 때에 더욱 강한 힘을 로마 옥중에서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만을 존귀케 한다는 생각으로 무장된 사람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자기라는 것을 생각지 않으며 죽든지 살든지 여기에 대하여 문제시하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기 위하여 싸우게 된다. 이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같이 하므로 무슨 일을 당하든지 완전 승리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3. 모든 일을 유익하게 생각하므로 (21~24)

  사도 바울은 죽는 것도 유익하고 사는 것도 유익하지만 주님 앞에 가는 것보다도 세상에 있어서 일하는 것이 모든 성도들에게 유익할 것을 생각하고 눈물겨운 심정으로 모든 성도들에게 편지를 하게 되었다. 바울은 어떻게 하든지 모든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싸워 나갔던 것이다.

 

  4. 믿음의 진보가 있을 것을 알므로 (25~26)

  우리는 어려운 일이 온다고 해서 믿음이 없어지는 것보다도 더욱 진보하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옥중 생활을 할 때에 약해지지 않고 믿음의 진보와 기쁨이 더할 것을 확실히 알고 오히려 옥중에서도 위로의 편지를 써서 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냈다. 옥 밖에 있는 성도들이 옥중에 있는 바울을 위로하는 것보다도 옥중에 있는 바울이 모든 성도들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5. 대적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을 강조하므로 (27~28)

  하나님의 종이 대적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대적하는 자는 멸망할 자요, 복음을 믿는 자는 구원받을 자라는 것을 담대히 믿고 증거하여야 한다.

 

  6. 은혜로 주신 것은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므로 (29~30)

  우리는 고난을 받고 참는 것이 은혜라고 생각을 하여야 된다. 왜냐하면 은혜를 주신 것은 고난을 극복하고 이기게 하기 위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제자가 되려면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다.

 

 결 론

  온전히 담대한 바울이 옥중에서 쓴 서신은 우리에게 담대한 마음을 주는 말씀이라고 본다. 사도 바울이 괴로운 일을 당할 때에도 감사한 마음으로 기록한 말씀을 믿는 자라면 바울과 같이 온전히 담대함을 받게 될 것이다.

 

 

 

주의날에 자랑할 것이 있는 자가 되자

( 빌 2 : 12 - 18 )

 

  오늘에 사람들은 인간이 볼 때에 자랑할 만한 일을 많이 한다. 그러나 오늘날 인간들의 사상이나 양심이나 생활을 본다면 주의 날에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저주를 받을 사상이며, 양심이며, 생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대의 과학 문명을 볼 때에 하나의 자랑거리로 끝날 것이 아니라, 분명히 주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의 재림이 가까운 오늘에 주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으려면 어떠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한다.

 

  1. 항상 복종의 생활을 하는 자 (12)

  만일 어떤 사람이 처음에 복종을 잘했다 하여도 항상 복종치를 않고 변한다면 처음에 복종한 일은 무효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복종하는 일을 하기 위하여 방심하지 않고, 두렵고 떠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든다면 목표를 향하여 달음박질하는 사람이 처음에도 열심으로 뛰지만, 그 목적지에 가까이 왔을 때에는 더 용기를 내어 참고 뛰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복종하는 생활에 있어서는 주 앞에 설 때까지 더욱 용기를 내어 나아가야만 할 것이다.

  오늘에 수많은 종들 가운데서 처음에는 열심히 일했다가 얼마 못 가서 그 열심이 식어지고 마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고 본다. 그러나 처음보다도 점점 더 열심을 내는 자가 되어야만 주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끝까지 복종하는 사람을 골라 세우기 위하여 마귀를 허락해서 얼마든지 대항하게 하셨다. 그러나 마귀는 항상 복종하는 자를 해칠 수는 전혀 없는 것이다.

 

  2.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행하는 자 (13~15)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무슨 일을 잘 할 수가 없다 하여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해 나간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시므로 주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는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는 자가 되려면 원망할 일과 시비할 일이 올 때에 조금이라도 원망하지 않고, 시비하지 않는 생활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원망할 일과 시비할 일이 올 때에 참지를 못하고 원망과 시비를 하고 만다면 주의 날에 아무런 열매 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에게 응답을 내리시기 전에 원망할 일과 시비할 일이 있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일이 온다 하여도 원망과 시비가 없이 나가는 것만을 목적해야만 주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는 자가 될 것이다.

 

  3.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자 (16)

  만일 하나님의 종들이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일이 없다면 모든 수고는 헛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일에 전력을 두고 수고해야만 주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는 자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신이시므로 아무리 열심이 있다 하여도 말씀이 탈선된 자에게는 응답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가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유형적인 사업에만 정신을 쓰기 때문에 영적으로 큰 부패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이 탈선된 교회가 아무리 열심이 있다 하여도 불법적인 행동으로 보시고 역사를 내리지 않기 때문이다. 사업도 좋지만 말씀을 밝히지 않는 교회의 사업이라는 것은 오히려 부패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4. 참된 기쁨을 가지는 자 (17~18)

  기쁨에는 흥분적인 기쁨도 있고, 소망적인 기쁨도 있다. 그런데 참된 기쁨이라는 것은 주를 위하여 희생하는 일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을 기뻐한다면 주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는 사람이다.

 

 결 론

  누구든지 주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는 사상이 아니라면 모든 일은 다 헛수고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있는 사람이 되어 보려는 것이 간절해야만 주의 날에 남은 자가 될 수 있다.

 

 

 

참된 지식을 따르는 생활

( 빌 3 : 5 - 16 )

 

  인간이라는 것은 무엇을 따라 가는데 의하여 그 생활은 좌우되는 것이다. 돈을 따르는 생활은 그 생활이 물질을 초월할 수 없고 세상 권리를 따르는 생활은 그 생활이 그 권리를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참된 지식을 따르는 생활은 참된 지식 안에서 지식의 범위를 다 소유할 수 있는 열매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제 참된 지식을 따르는 생활에 대하여 본문으로써 읽어 알 수 있다.

 

  1. 참된 지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는 생활 (5~8)

  사도 바울은 가장 귀족이요, 가장 정통을 자랑하는 바리새인이요, 또는 인간적으로 희망이 가득한 청년이었다. 그러므로 영웅심이 강한 청년으로 기독교를 대적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핍박하던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일이니 이것을 분명히 알고 그 진리 안에서 복을 받으려 할 때에 그 지식의 대적이 되는 것은 다 분토 같이 보고 용기 있게 나섰던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가장 옳은 지식을 찾게 될 때에 명예보다도 육체의 안락보다도 세상 권세보다도 가장 귀한 것은 참된 지식이라는 것을 알고 진리의 싸움을 하는 자라야 그 진리대로 이루어지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2. 참된 지식 안에서 발견하려는 생활 (9)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을 새로이 발견하는 생활이 있으므로 그 생활의 미를 이루고 또는 생활에 새로운 발전을 보게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만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지식을 남보다도 깊이 발견한 사람이다.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만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진리를 발견하여 14권이나 쓴 글은 전 세계 인류를 살리는 진리 운동이 된 것이다.

  과학자가 과학적 지식으로 기계를 하나 발명해도 그 기계로 말미암아 세계 인류에게 큰 유익을 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진리를 발견한 것은 전 세계 인류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역사가 되어 영원히 망하지 않는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다.

 

  3. 참된 지식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생활 (10~11)

  참된 지식이라는 것은 내 생명보다도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참된 지식이 없다면 생명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생명보다도 그 지식을 더 사랑할 때에 생명은 더 풍성함을 받게 되는 것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열매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생명이 피해를 당할까 무서워서 참된 지식을 위하여 싸우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참된 지식의 가치를 발견치 못한 자라고 볼 수 있다. 참된 지식이라는 것은 그 생명을 잃게 하는 지식이 아니요, 생명을 더 풍성히 얻는 것과 영광의 풍성한 것을 누리게 하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4. 참된 지식의 온전을 위하여 진보하는 생활이다 (12~13)

  인간 생활이라는 것은 하루살이 생활이 아니고, 하루하루 사는 생활이 완전을 목표하고 전진하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금일에 하루를 만족으로 안다는 것보다도 내일의 장래를 위하여 금일의 수고가 족한 줄 알 때 그 생활은 날이 갈수록 전진의 걸음을 걷는 동시에 온전이라는 그 세계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5. 참된 지식의 목적 (14~16)

  참된 지식의 목적은 자아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천지를 창조하신 조물주께서 완전한 것을 주는 데까지가 목적인 것이다. 인간에 국한된 지식은 아무리 애써 보아도 온전을 이룰 수가 없을 것이로되 인간을 초월한 무소불능의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는 것을 받을 수 있는 지식은 온전이라는 것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과학적 지식이 발전하여 잠깐의 유익을 준다 하여도 온전이라는 것을 얻는 지식은 될 수가 없고, 온전한 것을 얻는 활동을 돕는 지식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과학적 지식을 무시한다는 것이 참된 지식이 아니고, 과학적 지식을 초월한 지식을 위한 생활에서 과학적 지식에 국한된 물질을 바로 사용하는 것이 온전을 이루는 생활의 열매가 될 것이다.

 

 결 론

  인생은 지식을 위한 인생이 아니요, 지식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니 사람은 그 지식을 바로 사용할 때에 인간의 할 일을 할 수 있는 데까지 도달할 수 있는 인격을 찾게 되는 동시에 참된 지식의 인격을 소유한 자에게 주는 온전은 왕권의 축복을 상급으로 받게 될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의 생활

( 빌 3 : 9 - 16 )

 

  인생이라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기 전에는 올바른 생활을 할 수가 없다. 우리의 도덕적 생활이 완전한 생활이 아니요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의 생활이라야 산 생명이 있는 생활이다. 이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의 생활은 무엇이라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한다.

  오늘의 교회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미명(美名)하에서 그 생활이 속화되었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 증거라고 보게 된다.

 

  1.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 생활이다 (9~10)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므로 의롭다함을 받는 생활에 들어간다면 십자가를 믿는 사상에서 십자가를 지게되는 것은 도덕을 초월한 중심 사상에서 자동적으로 있게 된다.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기까지 충성을 다한다는 마음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본다. 왜냐 하면 십자가의 의를 믿음으로 받았으므로 그 의의 사상이 즉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첫째 :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순종하는 십자가요,

  둘째 : 남을 살리기 위한 십자가요,

  셋째 : 죄악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승리의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하여 오는 의가 우리에게 역사할 때에 사랑의 법을 순종하는 생활이며 남을 살리기 위한 생활이며 죄를 조금도 용납하지 않고 싸우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의 세력이 우리에게 와서 역사하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2. 좇아가는 생활이다 (11~12)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에게는 자동적으로 좇아가는 생활이 있다. 왜냐하면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왕권의 소망을 받았기 때문에 의롭다함을 주신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이 되셨으므로 따라가는 자도 꼭 같이 왕권을 받기 위한 것만 소망이 되기 때문이다. 의롭다함을 받은 자는 구원을 바라본다는 것보다도 1차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참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생활에 들어갈 때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고 그 왕권을 목적하고 좇아가는 것은 정욕적이 아니고 사명인 것이다. 만일 어떠한 사람이 믿는다 하면서 왕권을 목적하고 나가는 불타는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까지 십자가의 의를 믿음으로 받은 자라고 볼 수 없다.

  오늘날 많은 신자가 있지만 진보적인 생활을 못하는 것은 아직까지 죄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는 증거라고 본다. 하나님의 의의 세력이 그 사람을 지배할 때에 자동적으로 불의의 세력과 싸우는 일을 하게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가 되는 것이다.

 

  3. 항상 부족을 느끼는 생활이다 (13~14)

  누구든지 마음 가운데 내가 된 줄로 생각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받은 생활이라고 할 수 없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는 항상 부족을 깨닫는데서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따라가게 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완전한 것을 주시는 것보다도 항상 마음 가운데 날이 갈수록 더 받아보려는 마음이 생기게 하신다.

  그러므로 매일같이 사는 생활이 푯대를 향하여 나가는 사람과 같이 조금도 뒤를 돌아다 볼 사이도 없이 모든 일을 바로 해 나가겠다는 생각만 불타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의가 온 사람의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뒤를 돌아다보고 자랑을 한다든지 낙심을 하는 일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의를 받은 자의 마음이라고 볼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의를 마음에 받은 자는 과거의 것을 자랑하지도 않고 낙심하지도 않고 날마다 푸른 새순이 새로워지듯이 새로워지는 생활에서 진보적인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든다면 목적지를 향하여 경주하는 사람이 넘어져도 급히 일어나 뛰며 옆에서 누가 말을 하여도 이말 저말 듣지 않고 거기에 간섭하지도 않고 이것 저것 보지도 않고 남보다 먼저 간다는 것만을 생각하고 해산의 수고를 다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의 생활은 인간의 의가 아니요,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한 자로써 그 의의 면류관을 목적하고 따라가는 생활이다. 조금도 자기의 행위를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만을 말하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4. 온전히 이루는 생활이다 (15~16)

  우리가 온전히 이루는 생활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의의 한계를 이루게 되는 생활이다.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 영혼을 살리는데서 끝난 것이 아니고 의로운 통치 왕국을 이루는 것으로 완전히 이루는 것이니 누구든지 세상의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의 생각이 아니고 사단의 생각이다. 누구든지 의롭다함을 받은 자는 위에서 이루어 주는 일만을 목적하고 나가기 때문에 온전함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로 온전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의로만 온전한 것을 이루는 것이 거룩한 섭리가 된다. 인간의 도덕적 의라는 것은 하나님과 상대가 될 수 없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아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오는 역사를 힘입어서 완전한 상급을 받으며 영원한 왕국을 이루는 데까지가 거룩한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것이다.

 

 

 

온전함을 이룬 자의 사상

( 빌 3 : 10 - 16 )

 

  인생이라는 것은 온전함을 이루는 것이 없다면 이것은 아무런 열매 없는 동물에 불과한 것이로되 온전함을 이루게 될 때는 그리스도와 동등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동물은 하늘과 땅의 차이를 가질 수 없는 것이로되 사람은 큰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기독교를 박해하고 대적하던 사울이 바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붓을 들어 기독교 성경을 14권이나 썼다는 것은 개인의 생활에도 믿기 전 생활과, 믿은 후 생활이 너무나 차이를 가진 것이니 어찌하여 한 사람이 이렇게 인격을 온전히 이루게 되었느냐에 대하여 본문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1.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는 생활 (10~11)

  그는 십자가의 도를 반대하는 한 사람이었지만, 다메섹 광야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서 그에게 십자가 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도록 하셨으므로 그는 예수와 같이 자기도 만민을 위하여 죽되 예수는 죄를 위하여 죽었지만, 자기는 이 십자가의 도를 만민에게 전하기 위하여 죽는다는 것과 죽어도 주와 같이 산다는 소망에서 담대히 나설 때에 아시아를 비롯하여 유럽에까지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우리의 사상이라는 것은 희생을 각오한다는 것이 없다면 그 사상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으리라”고 말씀했던 것이다(요12:25). 하나님은 무소불능의 신이지만, 희생적인 사상이 없는 자에게는 능력을 주지도 않고, 역사도 하지 않기 때문에 희생을 각오하는 사상이 없이는 그 능력을 체험할 수가 없다.

  밀알 한 알이 완전한 열매를 맺는 것도 그 자체가 희생이 없고는 열매가 있을 수 없다(요12:24). 식물이 완전한 열매를 맺는 것은 희생이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 같이 사람의 인격이 온전함을 이루는 것도 희생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2. 돌진의 걸음을 걸어야 된다 (12)

  사상이라는 것은 뚜렷한 목적이 없이는 있을 수 없고, 목적을 위하여 돌진의 걸음을 걷지 않는다면 그 목적지를 도착할 수 없음같이 우리 기독 신자가 그 목적을 땅에 두지 않고 위에서 갚아 주시는 것을 목적했다면, 그것을 얻기까지 전진해 나가는데는 조금도 다른 곳에 정신을 둘 수 없고, 일구월심에 그 목적 하나만을 이루기 위하여 생각하는 것이나 움직이는 것을 꼭 같이 해야만 될 것이다.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은 그 목적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온전함을 주고자 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사람을 낼 때에 온전함을 준 것이 아니고, 온전함을 이룰 수 있는 자격을 준 것이다. 동물과 식물을 창조한 목적은 사람을 위하여 지은 것이요, 사람을 창조한 것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는 완전한 것을 주기 위하여 창조한 것이니, 사람이라는 것은 조물주 하나님의 주고자 하는 온전을 바라보고 돌진할 때에 무소불능의 신은 그 사람에게 온전함을 이루도록 역사하는 것을 기독교 능력의 역사라 하는 것이다.

  천하에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땅의 것만을 생각하는 자요, 제일 지혜로운 자는 위의 것을 생각하고, 용기있게 나가는 생활에서 위의 것을 받는 생활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 악한 자를 들어 쓰는 것은 온전한 사람을 이루기 위하여 쓰는 것이니 아무리 악한 자의 박해가 있다 하여도 조금도 여기에 눌리지 않고 모든 것을 돌파하고 전진할 때에 악한 자의 박해가 오히려 온전함을 이루는데 요소가 될 것이다.

 

  3. 하나님의 뜻만 생각해야 된다 (13~14)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수고한 대로 갚아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조물주이신 동시에 사람에게는 갚아 준다는 것 하나를 더 두시고 사람을 상대해서 역사하시되 갚아 주는 일에 목적을 두고 약한 자를 돕기도 하시고,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도 하시는 동시에 잘못된 것을 고쳐 주기도 하시되 은혜는 거져주고 일한 데는 갑절이나 갚아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범위는 사람을 창조한 데서 시작되어 사람을 일한 대로 갚아 주는 천국으로 끝을 맺는 것이니, 그 범위는 무한 광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택한 자를 불러서 역사하게 하는 것을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4. 잘못된 사상을 가진 자를 받지 아니 하심 (15~16)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사, 그 중심에 하나님이 갚아 주시는 것을 목적하지 않고, 다른 생각을 가졌다면 하나님은 오히려 그 사람을 미워하시는 것이다(말2:1~3).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대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대 자연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낼 때에 그 목적이 사람에게 법을 주고 그 법을 지키면 더 좋은 것을 주어서 이 물질계  밖에 있는 영원한 도성을 왕권으로 주고자 하는 것인데 이 대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목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그 사상이 맞지 않으므로 오히려 버림을 당하는 것이다.

 

 결 론

  온전함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면 이 역사를 믿고 순종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본분일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함을 이루는 자의 사상은 온전함을 이루어 주는 하나님의 뜻과 합하는 생활이 있음으로만이 온전함을 이루는 인격을 가지게 될 것이다.

 

 

 

십자가의 원수는 멸망

( 빌 3 : 17 - 19 )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을 그냥 두고 멸망을 시킨다면 이것은 불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모태로 날 때부터 억울하게 죄에서 태어나서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모르고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아보려고 해도 알 수도 없고, 공경하려고 해도 공경할 수도 없고, 진리를 들어보려야 들어 볼 수도 없는 것이 세계 인류의 비극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어 만민의 죄를 위하여 죽게 하시고 누구든지 이 십자가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전하는데도 불구하고 듣고도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인간들은 멸망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십자가의 원수에 대하여 본문을 들어서 말한다.

 

  1. 저희의 배로 신을 삼는 일이다 (19상반절)

  사도 바울이 십자가의 도를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 위하여 헐벗고 굶주리며 눈물과 땀과 피흘리기까지 복음을 증거해도 짐짓 하나님의 사랑을 대적하고, 자기의 배부르는 것을 목적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자는 멸망이라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첫째 :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 없게 생각하는 일

  둘째 : 사람에게 영생이 없다는 일

  셋째 : 사람은 고등 동물이라는 일

  이것이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 짐승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인간들을 가리킨 것이다. 아무리 죄가 많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는 의로운 자라고 인정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대적하고 죄를 짓고 다니면서 짐짓 죄를 사하는 진리를 부인하고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면 이것은 멸망할 자식의 행동이므로 멸망을 받아도 마땅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를 대적했기 때문이다.

 

  2. 부끄러운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일이다 (19중반절)

  인간의 가장 부끄러운 일은 십자가를 믿지 않고 사는 생활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 자기를 살려 주는 것인데, 살리는 일을 오히려 원수로 알고, 자기를 죽이는 일을 영광으로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빚을 많이 졌는데, 그 빚을 탕감해 주기 위하여 많은 돈을 가지고 조용한 밤에 그 집을 찾아와 문을 두드릴 적에 빚에 단련을 받던 사람이 문을 걸어 매고 밤에도 빚을 받으러 왔다고 야단을 친다면 이것이 알고 보면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의 인간들이 자기들의 죄를 사해 주기 위하여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외칠 때에 도리어 그 사람을 원수로 알고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는 일까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죄를 진 인간들에게 죄를 사해 주겠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싫어한다는 것은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일이라고 본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를 믿되 젊어서 믿을 일이 아니요, 늙어서 믿을 일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젊어서 훌륭하게 되어 훌륭한 일을 하는 것을 오히려 부끄러운 일인줄 알고 젊어서 마음대로 먹고 마시며 재미있게 노는 것을 영광으로 본다면 이 사람이 부끄러운 것을 영광으로 삼는 자이다. 사람이 일생 동안 옳은 일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면 세세 왕권의 영광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젊어서 마음대로 놀고, 자기 육의 만족을 채우는 것을 영광으로 본다는 것은 영원히 부끄러운 일을 당할 일이라고 본다.

  십자가의 원수라는 것은 진리를 위하여 수고하는 것을 부끄럽게 알고 그 날 그날 자기의 육적 안락을 꿈꾸고 살아 나가는 생활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에 와서 인간을 위하여 빈곤의 생활과 노방 전도의 생활과 십자가의 혹독한 형벌을 받으시면서 구원을 완성하셨는데, 그 은혜를 모르고 그날그날 자기 육의 만족을 위하여 사는 생활은 너무나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3. 땅의 일만 생각하는 일이다 (19하반절)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이 땅을 영원한 처소로 삼은 것이 아니다. 천국을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낼 때에 ‘너는 땅에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라’ 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내 말을 순종하면 생명과를 먹고 영생할 몸으로 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는 것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다. 그런데 사람이 땅의 일만 생각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말씀을 순종치 않는 흑암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어 사람을 하늘에 속한 형체가 이루어지도록 해서 신령한 사람으로 천국의 영광을 누리게 하자는 것이 십자가의 목적이요, 십자가의 사랑인 것이다. 그래도 땅의 일만 생각하는 자는 사단의 자식이 되어 멸망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대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십자가에 죽는 것을 면케 해 달라고 할 때에 ‘사단아, 물러가라’고 책망을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땅의 것을 생각지 않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고 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실 것이로되 하늘의 것을 생각지 않고 땅의 것만 생각하는 자에게는 당신의 대적으로 알고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멸망을 받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날 그날에 십자가를 지고 위엣 것을 목적하고 싸우는 생활이 아니고는 십자가의 의를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결 론

  십자가의 원수라는 것은 죄인이 되는 것보다도 악인이 되는 것이니 악인에게 멸망이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가 온 세상에 전파되고 다음에는 십자가의 원수를 없애고 십자가의 승리로 새로운 왕국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의는 영원한 영생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가 세상에 나타난 것이요, 우리 사람의 할 일은 그 의를 순종하는 것 뿐이니 그 의를 대적하는 것이 멸망이 된다.

 

 

 

재림의 주를 기다리는 성도의 교제

( 빌 3 : 20 - 4 : 3 )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서로 교제하는 것을 바로 하고 못 하는데 따라서 모든 일의 열매는 좌우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미라는 것은 교제가 없이는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참된 성도들이 재림의 주를 고대하면서 교제하는 그 단체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완전히 성취하는 것이다. 이제 재림의 주를 고대하는 성도들의 교제를 본문을 통하여 참된 교제가 무엇이냐는 것을 알 수 있다.

 

  1. 소망의 확실성 (3:20~21)

  우리 성도들의 소망이라는 것은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것으로 전부가 아니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이 완전한 영광의 몸으로 변화가 되도록 역사하실 것을 믿는 것이 확실한 성도들이라야 참된 교제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대 자연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람의 몸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적한 것이 아니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영원히 영광을 누리도록 하시고자 하는 것이니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에 오시어 인간이 사는 생활을 친히 하시되 무엇이든지 다 친히 인간의 행할 일을 행하시고, 그 몸이 영광의 몸으로 부활 승천한 것은 자기와 같은 몸으로 이루어지도록 역사하기 위하여 승천하셔서 지금 성신의 역사를 우리 성도의 몸에 부어 주는 것은 자기와 같이 세세 왕권의 영광을 누릴 사람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시면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영혼 구원을 목적하는 것보다도 우리 몸이 변화 승천하는 것을 목적하고 싸워 나가야 할 것이다. 사도 시대에도 이것을 목적한 것은 완전한 성신의 역사라고 본다. 왜냐하면 성신이 오신 목적은 영혼 구원을 목적한 것이 아니요, 우리의 몸까지 완전하게 영광스러운 몸으로 이루어 놓기 위한 목적이니 초대 교회도 모든 성도들이 재림의 주를 기다리면서 불타는 마음으로 자기 사명에 충성을 다하게 한 것은 주님 다시 올 때에 완전한 몸으로 부활하여 세세 영광을 누리게 하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2. 형제를 자기의 면류관으로 아는 사람이다 (4:1)

  참된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 면류관을 쓰려는 것이 아니고, 믿는 형제를 면류관으로 알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 왜냐하면 믿는 형제에게 행하는 일이 내 면류관이 된다는 상급을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이 있는 바울은 인간이 볼 때에 가장 괴로움이 되는 옥중 생활을 했지만 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쓸 적에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게 된 것은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핍박과 환란을 만나고 옥중에까지 갇힌 것은 자기의 일을 위해서가 아니고, 형제를 구원해 주기 위한 일이기 때문에 “너희는 나의 면류관이라”고 했던 것이다.

  이 세상 사람은 자기가 이익을 보려는 생각에서 교제를 하고 있지만, 재림의 주를 기다리는 성도들은 주님 앞에 설 때에 주께서 주시는 면류관을 목적했기 때문에 형제를 위하여 괴로움을 받고 죽는 데까지 이르러도 그 형제를 내 면류관으로 알고 기뻐하는 것이 참된 교제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3.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게 됨 (2)

  세상에 많은 단체가 있지만, 참으로 마음이 하나가 되는 단체는 재림의 주를 기다리는 성도들의 순교적인 생활이라고 본다. 기독교에 여러 가지 단체가 있지만, 이것은 인위적인 단체라고 본다. 어느 교파를 초월하여 이루어지는 단체는 재림시까지 남은 성도들이 뭉쳐진 단체일 것이다. 이 단체야말로 영원한 왕국을 이룰 단체라고 본다.

  세상에 많은 나라가 있지만, 마음이 하나가 되는 나라는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성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나라는 마음이 하나가 된 나라이니 이것이 하나님께서 같이 하는 거룩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4. 동역자를 서로 돕는 일 (3)

  마음이 하나가 된 단체는 서로 돕는 것으로 아름다운 미를 이루게 된다. 예를 든다면 한 몸의 모든 지체는 하나같이 움직이되 서로 돕는 것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을 건전한 몸이라고 본다. 손은 손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요, 발은 발을 돕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지체는 다 이(耳), 목(目), 구(口), 비(鼻)가 자기를 돕기 위한 것이 아니요, 서로 돕기 위한 결합 단체이다.

  이와 같이 사명자는 다 자기를 위한 사명이 아니요, 남을 돕기 위한 사명이니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멍에를 같이 하고, 남종과 여종이 서로 돕고 협력할 때에 이것으로 말미암아 주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명이 큰 자는 더 많은 사람을 돕게 하는 것이니 동역자가 서로 돕는 것이 아니라면 완전한 교회를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결 론

  참된 교제의 성도가 있으므로 그들을 통하여 재림의 주를 맞이할 수 있고, 재림의 주를 맞이한 자라야 왕권을 받을 수 있다(계20:4~6).

 

 

 

사명자의 완전 결합

( 빌 4 : 1 - 3 )

 

  세상의 많은 단체가 있지만, 이것은 완전한 단체라고는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일시 어떤 인물이나 사업이나 정치적인 권리로 뭉쳐진 단체라는 것은 한 때에 결합은 될 수 있으나, 영원한 단체를 이룰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참된 사명자 결합이라는 것은 어느 정권이 피해를 줄 수 없으니 이 단체야말로 영원한 왕국을 이루는 단체이다. 이 단체에 있어서 어떠하다는 것을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1. 형제를 참으로 사랑하는 단체 (1)

  참된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 단체는 참으로 형제를 사모하되 자기의 면류관 같이 여기는 마음에서 사모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는 형제 하나를 살려 주는 것을 자기 면류관으로 아는 심정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사모할 때에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하는 말을 하게 되었다.

  언제나 사명자는 형제를 자기의 면류관 같이 아는 마음이 있어야 된다. 이것은 형제 하나가 완전한 축복을 받는 것을 자기가 받는 것같이 여기는 마음이다. 예를 든다면 참 사랑이 있는 부모가 자기 자식이 성공하는 것을 자기 면류관 같이 아는 심정을 가진 것은 자기 혈통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형제가 큰복을 받는 것이 자기의 면류관 같이 생각하는 것은 영적으로 한 계통의 연결이 있는 증거이다.

  지금 교회가 믿는 형제를 자기 면류관 같이 아는 심정이 없다면 그 교회는 자동적으로 완전한 단체를 이루지 못하고 아무런 열매를 나타내지 못하는 죽은 나무같이 되는 것이다.

 

  2. 마음이 하나가 된 단체 (2)

  인간의 단체라는 것은 외형적으로는 한 단체를 이룬 것 같으나 마음이 하나가 된 단체는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단체라는 것은 외형적인 조직을 이루었다는 것보다도 자동적으로 마음이 하나가 되는 단체가 된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 하나같이 그리스도의 완전한 진리의 사랑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한 예배나 사업은 벌써 실패를 당한 단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하나가 되는데 있어서는 마음에 숨은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성신의 불의 역사를 체험한 자로서 하나같이 성결하고, 하나같이 평화롭고, 하나같이 담대하고, 하나같이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되므로 어떤 환란이나 고통이 온다 하여도 그 단체는 해산시킬 수가 없다. 왜냐하면 환란과 고통이 올 때에 하나같이 마음에서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3. 함께 힘쓰는 단체 (3)

  사명자라는 것은 복음을 위하여 힘쓰는 자이다. 사명자는 불타는 마음에서 나오는 열심으로 어떤 사람의 지배를 받지 않고, 함께 힘을 쓰는 단체이니 남녀의 구별을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부녀들이라고 말하게 되었다.

  이것을 본다면 바울이 복음 운동을 할 때에 부녀들이 함께 힘써 주므로 대승리를 보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함께 힘쓰는 단체가 없이는 아무리 큰 사명자라도 일할 수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함께 힘쓰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 하나님께서 대표적인 종을 세우신 다음에 그밖에 사명자들은 다 함께 힘쓰도록 역사를 나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표적인 종을 무시한다든지 반대한다는 것은 주님을 반대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 종을 대표로 세웠는데 함께 힘쓰지 않는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주님의 일을 파괴시키는 일이므로 주님을 대적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함께 힘쓰는 종들을 하나같이 돕는 마음으로 힘을 쓸 적에 큰 역사는 따라 오게 되는 것이다.

  어떤 종이 생각하기를 주님이 세운 종은 주님이 돕는다고 말하면서 도와줄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주님께 속한 마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같이 합심하여 힘쓰는 동시에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가 될 때에 대승리를 이루는 단체가 되는 것이다.

  둘째 : 각각 자기의 사명 분야에서 힘써야 한다. 어떤 종이 힘은 쓰지만, 자기 사명이 아닌 일에 힘을 쓴다는 것은 위법이 된다. 예를 든다면 군대가 전쟁을 할 때에 각각 자기가 맡은 부서를 하지 않고, 등한히 안다면 엄벌에 처하는 것같이 주님께서도 자기가 맡은 사명 분야를 벗어나서 다른 일을 하는 것은 탈선된 일로 보시는 것이다. 과거에 사울 왕이 자기 사명 분야를 벗어나서 일을 행할 때에 여호와의 신은 그를 버렸던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역사할 때에 단체적인 행동을 하도록 예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려고 유럽으로 건너가서 빌립보 성에 이르러 제 일차로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그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과 결합된 단체를 이루어 복음을 전하게 되므로 세계적인 복음 운동을 하는 일이 유럽에서 크게 일어나 오늘날 세계적인 교회 확장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평강이 같이 하는 생활

( 빌 4 : 4 - 7 )

 

  하나님은 평강을 주기를 기뻐하는 신이신 동시에 평강을 위하여 역사하시고 평강을 위하여 친히 갚아주는 신이시다. 하나님의 신의 성품은 피조물 된 인생에게 더욱 평강의 평강을 더 주는데는 무조건 주시는 것이 아니고 어려운 난관을 당하게 하시는 동시에 그 난관을 돌파하도록 역사해서 더 큰 평강을 주시는 데는 어떠한 자에게 주신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자 (4)

  누구든지 아무리 어려운 난관이 와도 주안에서 기뻐하는 생활이 있다면 무엇이나 뜻밖에 평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 부자유스러운 생활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은 주안에 안겨 있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자기 죄로 말미암아 옥에 갇혔다면 불행 중에 불평의 생활이었겠지만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위하여 옥에 갇힐 때에 이것은 주안에 있는 생활이니 누구든지 남을 살리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자는 다 주안에 있는 생활이다(요일3:24)

  인생의 참된 평강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생활에서 초인간적인 평강을 누리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게끔 하는 역사를 하므로 사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참된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된다. 인간이 볼 때에 불행스러운 일 같으나 오히려 더 큰 축복이 오게 될 때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생활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쓴 글은 오늘까지도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2. 관용심을 가진 자 (5)

  인생을 저주하기를 기뻐하지 않고 용서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남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자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남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자에게는 다음과 같은 유익이 있다.

  첫째로 영적 축복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역사가 더 강하게 역사를 나릴 때에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열매가 있기 때문이요

  둘째로 하나님의 깊은 사랑 속에 더 들어가게 되므로 그 생활이 더욱 평화롭고도 자유로워지는 거요

  셋째로 주님이 다시 올 때 갚아주는 보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그러이 용서해 주는 것이 있으므로만이 주의 종은 지금도 미래도 열매를 거두기 때문이다.

 

  3.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자이다 (6)

  하나님 앞에는 무엇이나 억지나 불만이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체는 사랑이시니 무슨 일이나 전부가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니 인간이 볼 때 억울하고 불만을 둘 일이 있는 것 같지만 그 일이 있으므로만이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열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목자가 양 무리를 인도할 때 높은 산을 넘어가면 양에게 만족을 줄 푸른 초장과 시냇물이 있는데 양은 그것을 모르되 목자는 알고 양의 무리를 억지로 몰아서라도 그 산을 넘게 할 때에 알지 못하는 양떼는 오히려 괴로워 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목적지가 되는 데까지 도착할 때에 뜻밖에 기갈을 면할 수 있게 됨을 체험할 때 그 때야 양들은 기뻐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주의 인도를 따르는 종은 무슨 난관을 만나든지 감사하므로 기도하게 되는 것은 생각밖에 홀연히 더 좋은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결 론

  평강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니 하나님의 역사가 없이 평강은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자기에게 있는 평강을 택한 자에게 주기 위한 목적에서 주시겠다고 언약을 세우시고 (사48:18~19 미5:5~9) 그것을 주기 위하여 역사하는 것을 하나님의 완전 역사라는 것이다.

  평강을 잃은 인생에게 당신이 가진 평강을 주기로 언약을 세우시고 이것을 주기 위한 실천을 하신 것이니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공포 속에 문을 닫고 숨어있는 제자들을 찾아가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 오시는 주님은 환란을 만난 자들에게 평강을 주시려 오는 것이다. 첫째는 영적 평강을 주고 다음에는 몸에 평강을 주는 것이다.

 

 

 

주안에서 기쁨으로 사는 생활

( 빌 4 : 4 - 7 )

 

  오늘날 과학 문명이 발달하여 얼마든지 화려하게 살 수도 있고, 빨리 왕래할 수도 있고, 평안히 지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항상 기쁨은 주안에서 사는 생활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항상 기쁨으로 사는 생활이라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을 본문을 들어 증거한다.

 

  1. 관용심이 있어야 한다 (4~5)

  관용심이라는 것은 최후에 만족을 누리는 자에게만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밖에의 것을 받고 기쁨으로 사는 자는 아무리 괴롭히는 사람이 있고, 손해를 보는 일이 있다 하여도 거기에서 상심하지 않고 관용심을 가지고 나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 자기가 용서를 받았고, 만족한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자기를 괴롭히고 손해를 주는 일에 대하여 조금도 상심을 갖지 않고, 너그러이 용서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을 충만히 받은 사람이 그 사랑이 넘치는 생활에서 너그러이 용서하게 되는 것은 억지로가 아니요, 기쁨이 넘치는 마음에서 있게 된다. 이것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할 때에 하늘의 상급이 크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므로 오히려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2. 감사함으로 올리는 기도가 있어야 한다 (6)

  언제나 기도는 감사함으로 할 조건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된 일이요, 둘째는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받은 일이요, 셋째는 모든 일은 기도로 다 해결되기 때문이다. 기도를 할 수 없는 사람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로 이루어진 일이니 기도를 할 수 있게 된 은혜를 항상 감사하게 생각을 해야만 된다.

  우리가 구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보다도 우리가 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예정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이니 무슨 일을 당하든지 기도하는 사람에게 큰 유익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에 있어야 한다 (7)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것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면서 평강을 소유하지 못한 자라면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이 되지 않은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참된 평강이라는 것은 기도 응답으로만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런 어려운 일이 와도 염려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인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귀를 들어 택한 자를 괴롭히는 것은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믿는 사람에게 평강을 주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평강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자만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천하에 가장 복된 생활은 주안에서 사는 생활이니 이러한 자는 세계 인류가 하루살이 같이 쓰러지는 날에라도 참된 평강이 있을 것이다.

 

 결 론

  조물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기뻐하게 될 때에 그것을 영광으로 받으시는 신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참된 기쁨을 인간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역사하시므로 인간들이 죄값으로 받을 형벌을 당신의 아들에게 담당시키신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택한 자에게 기쁨의 생활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주안에서만이 기쁨의 생활이 있다는 것을 체험한 자라면 자동적으로 그 사람은 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하는 생활

( 빌 4 : 4 - 9 )

 

서 론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다. 참된 평강은 하나님 한 분만이 주관하는 것이다. 인생은 범죄하였으므로 참된 평강을 잃었으나 하나님은 참된 평강을 인간에게 주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날 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였다.  

이제 어떠한 자에게 평강이 함께 하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읽어서 알 수 있다.  

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자이다 (4~5)  

우리는 항상 기뻐하는 일이 없다면 그밖에는 사단이 기회를 타는 것이니 마음이 항상 기뻐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하는 것이다. 만일 관용심이 없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과 하등에 관계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용서하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2.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기도하는 자이다 (6~7)  

우리는 염려하는 일이 없음으로써 평강을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염려되는 일을 하나님께서 해결시킬 것을 믿음으로써만 평강이 함께 하는 것이다. 만일 염려되는 일을 당할 적에 하나님께서 해결할 줄 믿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할 수가 없을 것이다.  

3. 말씀을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는 자에게 (9)  

우리는 아무리 배우고 들었다 하더라도 그 것을 실천에 옮기지 않은 자는 평강을 소유할 수 없을 것이니 말씀을 받고 듣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고 행하는 자에게 평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우리가 평강을 바라는 것보다 평강이 함께 하는 생활을 가르쳐서 하나님이 동거하는 것으로 알게 된다. 어디 있든지 이 평강이 같이하는 곳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옥중이나 황폐한 빈들에서도 그는 평강을 누리게 될 것이다.

 

 

 

배워지는 바울의 인격

( 빌 4 : 10 - 15 )

 

  하나님께서 종된 자의 인격을 향상시킬 때에 날마다 배워지는 인격이 있게 하므로 종된 자로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생활에서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게 하신다. 예를 든다면 과실을 맺는 나무가 새로워지는 것이 있으므로 과실을 맺듯이 종된 자의 생활이 새로이 배워지는 인격이 되므로 그 인격은 마른나무 같은 인격이 아니고, 푸른나무 같은 인격으로 날마다 새로워지는 발전이 있을 때에 그 종을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으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1. 자족하기를 배우는 인격(10~11)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스스로 족하게 생각이 나도록 배워진다면 그 사람은 완전한 지각이 있는 인격이라고 본다. 마음에 불만과 불평이 있는 자는 지각이 없는 자요, 날마다 마음에 기쁨을 가지고 족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사랑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자라고 본다. 왜냐할 때에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무엇이나 유익하도록 하는 모략의 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략이라는 것은 택한 자에게 유익을 얻도록 하는 방침을 세울 때에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오히려 낙심을 하고 불만을 두고 점점 떨어지는 인격을 가지게 되지만, 자족하기를 배우는 인격이라는 것은 무슨 일을 당하나 새로운 발전을 보게 된다.

 

  2. 비결을 배우는 인격 (12)

  인생이 완전한 인격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무슨 일이나 그 속에 숨어 있는 비결을 알게 된다면 무슨 일을 당하든지 그 일이 다 형통을 이루는 열매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나무가 열매를 맺을 적에 추운 바람, 더운 바람, 뜨거운 태양, 부딪히는 폭우 등 여러 가지를 거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있음으로써 그 나무는 건전한 나무를 이루게 된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이방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러 나선 몸으로 여러 가지 풍랑을 만났지만, 거기서 신비한 체험을 받게 되는 동시에 어찌해서 이러한 일이 내게 온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감사했던 것이다. 인간이 볼 때는 죽는 길 같으나 살고도 남음이 있고, 굶주리는 일 같으나 그런 일이 있으므로 더 풍부한 것이 오고, 실패를 당하는 일 같으나 그것으로 말미암아 주의 일이 더 확장되는 것을 볼 때에 오히려 하나님의 완전 역사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3.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됨 (13~15)

  주의 종이라는 사람은 배워지는 인격을 가질 적에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인격이 된다. 왜냐하면 배워지는 인격에는 주의 능력이 나리기 때문이다. 주의 능력이라는 것은 주의 뜻을 따라 역사하되 바로 배워지는 인격을 들어 쓰기 때문이다. 능력이라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인데, 이것은 주께서 어려운 시련을 주는 동시에 그 난관을 돌파하고 나가도록 역사하는 것을 주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주께서는 사람에게 능력을 주되 법을 따라 주는 것이니 진리의 법이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능력을 주어서 역사하게 한다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능력을 줌으로써 일을 한다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 능력은 어떠한 일에 어떠한 목적을 위하여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께서 능력을 주는 일에 대하여서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첫째 :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기 위하여 능력을 주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한다는 것을 아버지께서는 영광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시는 것이다. 왜냐 할 때에 하나님의 대적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무시하고, 자기 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볼 때에 교만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둘째 : 약한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주는 것이니 항상 약해서 쓰러지는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불쌍히 볼 때에 능력은 쓰러지는 사람을 위해서 나리는 것이다.

  셋째 : 하나님은 마귀의 세력을 들어서 하나님의 종을 대적하게 하고, 종에게 능력을 주어서 역사하게 하는 것은 그 종에게 마귀를 이김으로써 세세 왕권을 받게 하기 위한 선한 방법이다. 아담, 하와는 능력을 받지 못했으므로 타락했지만, 지금 하나님의 종은 주님의 대행자로 나섰기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능력이 오게 된 것은 주의 손에 붙들린 인격이기 때문이다.

  천하에 제일 강한 자는 주의 능력의 손에 붙들린 종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을 대적하던 로마의 정권과 모든 교권은 다 무너졌지만, 사도 바울이 능력을 받아 세운 기독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는 동시에 세계 통일의 완전한 평화 왕국이 이루어질 것이다.

 

 결 론

  가장 인생 중에 복된 자는 배워지는 인격으로써 날마다 진보하는 성도라고 본다. 왜냐 하면 이 성도의 주권으로만이 세계 인류는 가장 행복된 세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볼 때는 작은 일 같으나 제일 큰 일이 날마다 새로이 배워지는 종의 인격이라고 본다. 아무리 세계적인 강대국이라는 나라도 아무런 열매 없는 허수아비 같이 되었지만, 배워지는 인격을 가진 바울은 지금에 와서 큰 열매를 이루게 된 것이다.

 

 

골로새서

 

기도의 정의

( 골 1 : 9 - 12 )

 

  오늘날 많은 종교인들이 기도를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종교가 날마다 부패되어 가는 원인은 기도의 정의를 모르고 하기 때문이다. 과학 만능이라고 하지만, 암흑의 세상을 이룬 것은 종교인이 탈선된 과오가 있으므로 기도의 산 체험을 받지 못한 이유라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기도의 정의가 무엇인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인생의 참된 미의 열매라는 것은 기도의 정의를 바로 찾는데 있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증거하겠다.

 

  1. 하나님의 뜻을 앎으로 (9)

  우리 인간들은 기도를 통하여서만 신령한 지혜와 총명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들이 정신 작용의 활동을 인간의 본능으로 알고 그 밖의 것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극도로 타락한 인간의 생활이라고 본다. 기도라는 것은 내 영이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단계로 들어가는 것을 목적하여야 정의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도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는 것도 없이, 무조건 자기 주관이나 소욕을 따라서 구한다는 것은 오히려 불행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 왜냐하면 기도가 탈선될 때에 마귀의 미혹을 받는 단계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려는 것을 목적하고 기도하여야 완전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2. 범사에 기쁘게 행함으로 (10)

  세상에 도덕적 수양이나 철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기쁘게 행하는 일을 할 수 없어도, 기도하는 사람은 조금도 외식이 없이 중심에서 기쁘게 행해질 적에 선한 열매를 많이 맺게 되어 큰 발전을 보게 되는 것이다.

  도덕적 행위라는 것은 사람에게 보이려는데 불과하므로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열매를 맺게 되지만, 주님 중심으로 기쁘게 행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축복할 일이므로 초인간적인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이 억지로 하는 것이 있게 된다면 그 기도는 우상 앞에 드리는 기도나 다름이 없다.

  기도의 정의라는 것은 기쁘게 행하는 것이니, 이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가 되므로 나날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발전하여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동시에 완전한 생활에서 완전한 왕권의 축복을 받는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3.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므로 (11)

  인간 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를 찾는 것은 오래 참음에 이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 생활은 마귀 세력과 싸우는 생활이기 때문이다. 이 참는 힘을 주께서 주시는 능력을 인하여 이루어 나가므로, 아무리 원수의 세력이 강하다 하여도 왕권의 영광을 누리기까지 승리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그날 그날의 안락을 요구하는 생활에서 무엇을 얻기 위하여 기도하지만,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오래 참음에 이르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기도하는 것이 정의가 된다. 우리가 날마다 기도로서 힘을 얻는 것은 금세에서 영광을 누리자는 것이 아니고, 세세 영광을 목적하고 싸워 이기기 위하여 구하는 것이다.

 

  4. 아버지께 감사하게 되므로 (12)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의 생활은 영원한 기업을 목적했으므로 그 기업을 얻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고자 하여 항상 아버지께 감사하는 생활이 있게 된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은 참된 성도가 영광의 기업을 얻는데 손해를 주는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볼 때는 실패같이 보이나 성도로서는 오히려 감사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되었으니,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고 말한 것이다(롬8:17).

  기도의 정로는 기업을 얻기 위하여 이 땅에서 모든 일을 감사하게 여기는 것이니, 조금도 원망할 일이나 낙심할 일은 있을 수 없다. 이 땅에서 평안이나 영광이나 어떤 권리를 얻고자 한다는 것은 기도의 정의가 아니요, 어떠한 환란과 핍박이 와도 그것을 감사히 생각하고, 나가는 생활을 해야 기도의 정의를 가진 사람이라고 본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인격을 먼저 주는 것이 아니고,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어서 진리를 따라 구하는 자라면 완전한 왕권의 기업을 얻도록 역사해 주는 것을 원칙으로 세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정의를 바로 알고 나가야만 된다.

 

 

 

기도 생활의 일곱 가지 요점

( 골 1 : 9 - 12 )

 

서 론  

우리는 기도하는 것은 진리의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을 기독신자의 기도라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신자가 기도를 하지만, 기도의 요점을 모른다면 이교도의 기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기도 생활에 있어서 떠날 수 없는 요점을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알 수 있다.   

1. 지혜와 총명의 하나님의 뜻을 알 것 (9)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기도의 요점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을 아느냐에 요점이 있다. 무엇을 달라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 아닐 수 없으나 먼저는 지혜롭고 총명스러운 하나님의 뜻은 어떠한 뜻이라는 것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불타야 될 것이다.   

2. 범사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데 요점이 있어야 됨 (10상반절)  

만일 어떤 사람이 기도할 때 자기를 기쁘게 해보려는 욕망이 있다면 이 기도를 통하여서는 큰 시험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범사에 기뻐하는 일은 우리 생각밖에 더 미리 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에 범사에 주님을 기쁘게 하려는 기도라면 범사에 열매가 있을 것이다.  

3. 선한 일에 열매를 맺으려는 것 (10중반절)  

우리는 시작이 좋다 하더라도 열매가 없다면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이니 열매를 맺게 하는 이는 하나님이신 줄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것뿐이다.  

4. 지식을 자라나게 하기 위한 것 (10하반절)  

신앙은 지식을 떠난 신앙은 미신에 가까운 것이니 이 지식이라는 것은 과학적인 물체의 요소를 아는 것보다도 하나님을 바로 아는 지식이다. 우리의 인격 향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나는데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5. 능력으로 능하게 되는 일이다 (11상반절)  

현재 과학자는 과학만능을 의지하지만, 기도의 사람들은 물체 밖에 하나님의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되는 것을 목적하는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능력이 오는 증거가 될 것이다.  

6. 모든 일에 오래 참음에 이르는 것 (11하반절)  

사람의 인격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오래 참음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초인간적인 큰 역사는 오래 참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이것은 기도가 아니고는 있을 수가 없다.  

7. 성도의 기업을 얻기에 합당하게 되는 것 (12)  

우리가 인간의 어떠한 기업을 얻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물며 성도의 영원한 기업을 얻기 위해서는 합당하게 하는 이는 하나님인 것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뿐이다.  

결 론  

기도는 사람을 완전케 하는 생명선이 되는 것이니 아무리 저 편에 올 만한 요소가 있어도 통하는 선이 없다면 이 편으로 올 수가 없음같이 영원하고 완전한 신의 세계에서 인간으로 옮겨지는 일에 그 선은 기도밖에 없는 것이다.

 

 

복음의 일군된 바울

( 골 1 : 23 - 29 )

 

  기독교를 핍박하고 훼방하면서 나섰던 사울이 복음의 일꾼 된 바울로 나서게 된 것은 세계 인류를 죄에서 해방시키는 운동의 처음 열매가 되는 일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완전한 사람을 들어 쓰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를 핍박하던 자를 회개시켜서 썼다는 것이 기독교 역사의 특징이 되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왜냐할 때에 기독교에 이런 역사가 없다면 세계 인류를 마귀 권세 아래서 해방시키는 역사를 도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일꾼 된 기독교 역사의 표준적인 일이다. 이제 복음의 일꾼 된 바울에 대하여 그가 일꾼 된 자격은 어떠한 자격이라는 것을 본문에서 배우는 동시에 우리가 따라 가야 할 선구자가 되는 바울이다.

 

  1. 우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했다 (24)

  복음의 자체는 그리스도인데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받은 고난을 기뻐했으니 복음의 일꾼도 이 사상을 가지게 된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던 사람이 복음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기뻐했다는 것은 초인간적인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일꾼이라는 것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고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없다면 이것은 그 목적을 완전히 바로 두지 못한 원인일 것이다.

  금일에 어떤 종이 양떼를 위하여 괴로움을 받는 것을 회피하려는 것은 우리의 선구자 바울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쓸 때 완전한 사람을 들어 쓴다는 것보다도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깨달을 때 자기가 구원받은 복음을 남에게 전하기 위하여 괴로움을 당해도 기뻐한다는 것이 기독교 사랑의 본질이다. 참된 기쁨이라는 것은 이것이라고 보게 된다. 남을 구원하기 위하여 괴로움을 기뻐한다는 그 자체가 복음의 일꾼 된 마음이다. 누구든지 이러한 마음을 가졌다면 이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이 들어 쓰는 종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괴로움이 올 때에 기쁨으로 일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참과 거짓은 자동적으로 판명된다. 그러므로 미혹하는 선지라는 것은 자기에게 유익이 되면 화평으로 말하고 유익이 없으면 싸움을 일으킨다는 것이 거짓 선지의 인격이라고 보게 된다(미3:5). 누구든지 일꾼 된 자격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일이니 이러한 것이 없는 자라면 자동적으로 삯꾼이 될 것이다(미3:11).

 

  2. 하나님 말씀을 이루려고 함 (25~27)

  복음이란 자체는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는 역사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를 통하여 말씀한 대로 행하는 일이 복음이니 그 복음은 자체가 그리스도가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도성인신하여 나타난 일이 없다면 하나님 말씀은 복음이 될 수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 한 분이 나타나므로 그 목적은 유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온 세계를 위한 복음인 것을 깨달을 때 이 복음을 모든 이방 사람들이 알게 하므로 그들이 살게 될 것을 생각할 때에 그는 전하지 않으면 화가 오리라는 것을 마음 속 깊이 깨닫게 되었다. 모든 이방 사람은 다 영들이 죽었는데, 내가 전하지 않으면 저들은 살 길이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괴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밤낮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전력을 두었던 것이다.

  언제나 복음이라는 것은 인간이 알 수 없는 비밀이니 이 비밀을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오히려 억울한 핍박을 받게 되는 것이다. 어느 때나 인간들은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요, 모르는 것은 무조건 반대하려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인간의 방법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역사로만이 된다는 것을 그는 확신했던 것이다.

  언제나 복음의 일꾼은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이루기 위하여 역사하는 일에 종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될 것이다. 어떤 종이 아무리 열심이 있다 하여도 말씀이 이루어지는 일을 목적하지 않고, 자기의 어떤 주장을 내세운다면 그 자체가 복음의 대적이 되는 자가 될 것이다. 언제나 복음은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일이니 어느 인간이 막을 자가 없다는 담력을 가지고 나서야만 될 것이다.

 

  3. 남을 완전케 하려는 것이다 (28~29)

  완전이라는 것은 복음으로만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복음을 전하는 자가 남의 단점을 말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복음과는 관계가 먼 자이다. 언제나 복음 안에서 능력으로 모든 사람이 완전케 될 것을 믿고, 조금도 다른 사람의 과오를 말하지 않고, 언제나 능력의 역사를 따라서 완전해진다는 것만을 믿고 힘을 다하여야만 될 것이다.

  능력이라는 것은 복음을 따라서 오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해주겠다는 것이 언약의 말씀이니 능력의 역사를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자는 자동적으로 아무런 역사가 없게 되는 것이다.

  언제나 복음의 일꾼은 능력으로써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완전케 해 주실 것을 믿고, 남의 실수를 볼 때에 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동시에 복음을 전해야 될 것이다. 아무리 수고한다 하여도 남을 완전케 해보려는 마음이 없다면 이것은 헛수고가 될 것이다.

 

 결 론

  복음의 일꾼이라는 것은 자기 자체가 복음에서 일꾼이 되어 가지고 나서야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복음이 내게 완전한 체험이 없다는 사람은 그 복음과는 상관이 없는 인격이니 복음을 전할 자격을 가진 자라고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복음을 반대하던 자가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는 것이 기독교 복음 운동의 표준이 되는 일이다.

 

 

능력의 역사를 따라 수고하자

( 골 1 : 24 - 29 )

 

서 론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한 역사는 능력이 없이 세울 수 없는 것이요, 능력이 없이 발전할 수 없는 것이요, 능력이 없이 복음을 전파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능력의 역사는 어떤 곳에서 역사하느냐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괴로움을 기쁘게 알고, 나아가는 종을 통하여 (24)  

하나님은 무소불능의 능력이 있지만, 아무 사람이나 아무 곳에서 역사하는 것은 아니다. 능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가 아니고, 인간이 할 수 없는 가운데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는 자에게라야 있을 것이다.  

2.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말씀을 이루려 할 때 (25)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경륜이 이루어지기 위한 말씀을 따라 역사하기 때문에 말씀을 이루려 하는 것이 없는 자에게는 조금도 있을 수가 없다. 이는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3. 감추었던 비밀을 나타내기 위하여 (26)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은 그 속에 숨은 비밀이 있는 것이니 이 비밀을 인간이 알도록끔 하는 데는 능력의 역사가 없이는 안 되는 것이다. 비밀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만 나타내기 위하여 역사하는 것이다.  

4. 영광의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27)  

영광의 소망을 이루는 것은 인간의 힘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능력의 역사가 아니고는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 바라는 영광은 인간의 노력으로써 되는 일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영원한 그리스도의 영광의 소망은 인간의 힘이 조금도 가입될 필요가 없고 전혀 능력의 역사만으로 되는 것이다.  

5. 지혜로 남을 가르치는 자에게 역사한다 (28)  

하나님은 능력으로 역사하시되 어리석은 자에게 역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지혜가 따르는 동시에 완전한 것을 이루는 능력이 역사하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동시에 인간의 힘을 다하는 수고도 필요한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능력이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기가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것이 없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다. 또는 자기 힘으로 된다고만 생각하고 능력을 무시한다면 이것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위력을 잃지 말자

( 골 2 : 8 - 23 )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는 것은 인간의 모든 것을 초월한 생활이니 그리스도인이 그 위력을 상실할 때에 아무런 열매 없는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위력을 잃지 않으려면 다음과 같은 생활이 있어야 한다.

 

  1. 인간 철학을 초월한 데서 충만한 생활이 있어야 한다 (8~11)

  오늘날 기독교인의 큰 실패는 기독교 신앙 세계의 산 체험이 없이 인간 철학으로 신앙 세계를 움직여 보려는 것이다. 이것은 조갑지로 바닷물을 되려는 사람과 같으니 인본주의적인 철학에 노략을 당할까 주의할 것이며 인간의 초등 학문적인 철학적 세계를 넘어서서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의 모든 충만한 것을 체험하여야 된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성은 인간 철학으로는 감히 그 세계를 도달할 수 없고 육적의 몸을 벗어나서 신의 세계의 충만한 역사를 체험하는 단계로 들어가야만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완전 승리를 이루셨으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승리의 역사로 인격을 완전히 개조시키는 일이 있게 된다. 이렇게 되므로 철학적 세계와는 거리가 먼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세계라는 것이다.

  오늘날 소위 신학자라 하는 자들이 철학을 초월한 신의 세계의 충만을 체험치 못하고 철학적 세계에 노략을 당한 상태에서 신학을 연구하는 자가 있다. 이것은 예를 들면 대학생을 앞에 놓고 강의할 사람이 소학교 학과를 가지고 연구하는 것이나 같다.

 

  2. 그리스도와 같이 사는 생활에서 율법을 초월한 생활이 있어야 한다 (12~17)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가 되고 함께 일으킴을 받은 생활이다. ‘나’라는 자체가 완전히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믿으므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니 율법을 따라서 행하는 역사가 아니고, 율법에 대한 죄의 세력을 완전히 도말 하고, 십자가의 승리로 역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역사를 받았으므로 그림자가 되는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우리를 변론할 필요조차 없고, 율법과 율례를 십자가에서 도말하신 그리스도의 역사를 받으므로써 그리스도의 생활의 위력이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마음에 역사가 없이 신앙 생활을 한다면 이 사람은 아직까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니요, 죄인의 생활이라고 본다. 과거에 죄를 진 인간들에게 몽학적인 교훈을 한 것이 율법과 계명이다. 우리는 죄인 된 인격을 그대로 가지고 생활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 된 인격은 장사한 바 되고 그리스도를 부활시킨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를 지배하므로 그 역사 아래서 살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위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육의 사람을 완전히 벗어나 영의 사람으로 움직일 때에 과거에 받지 못하던 하나님의 역사를 받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위력이라는 것을 체험하여야만 될 것이다.

 

  3. 일부러 겸손한 자에게 지배를 받지 않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18~19)

  소위 인간 도덕적 겸손이라는 것은 일부러 겸손하게 태도를 취하는데서 사람의 마음을 끄는 일도 있다. 그리스도인이 이것에 끌린다면 아무런 상을 받을 수 없이 되므로 자동적으로 영적은 메말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머리되시는 예수님께로부터 항상 공급을 받아 연합될 때에 하나님의 역사로 나날이 자라나는 것이다.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위력이라고 한다.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중심하는 것이 아니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항상 자라나게 하는 역사를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생활의 위력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4. 사람의 명한 것과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생활이 있어야 한다 (20~23)

  어떤 사람이 의식이나 필요 없는 숭배나 모양을 내려는 방면으로 치우칠 때에 성신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6:1과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 중심에서만 그 역사를 받게 될 때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결 론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위력이라는 것은 철학적이나 율례적이나 도덕적이나 인간의 어떤 숭배적인 것을 초월해야만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위력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하는 자가 되자

( 골 3 : 15 - 17 )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나 그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하게 되므로서 바로 행하는 열매가 있게 된다. 인간의 정치나 도덕은 마음의 평강이 없이도 행해 나갈 수가 있으나 기독교 신앙 세계에 있어서는 마음의 평강이 없다면 아무런 효과를 거둘 수 없고, 전부가 외식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 감사하는 자가 됨 (15)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항상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만 완전한 인격이 이루어지는 생활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이 없이 일하게 된다면 이 사람은 완전한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에 온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할 때에 항상 감사하는 생활에서 그 날 그 날의 인정받는 일이 있으므로 무엇이나 축복을 받는 열매 있는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나뭇가지가 진액이 있으므로 자동적으로 열매가 맺어지듯이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에 있으므로 자연적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지게 되는 동시에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너희들에게 평강이 있을 찌어다” 라고 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평강을 주신다는 뜻이 있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관하는 사람이 되려면 땅에 속한 자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한다.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성신을 받고 그 인도를 따라 가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말씀이 마음에 풍성히 거하는 자 (16)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마음에 충만할 때에 가르치는 일이나 권면하는 일이나 신령한 노래를 부르는 일에서 생활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맡기는 동시에 말씀을 마음에 충만케 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가르치는 일이나 권면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이 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마음에 충만할 때에 모든 움직이는 전체가 말씀 안에서 움직이게 되므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기계가 움직이는 것은 자기 힘으로가 아니고, 기름의 힘을 통하여 움직이는 것과 같다. 우리의 활동은 말씀이 충만한 가운데서 움직일 때에 말씀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되므로 그리스도의 정병이 되는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아무리 주의 종이라 하여도 말씀이 충만치 못하면 그 사람은 기름이 없는 기계와 다름이 없다.

 

  3.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 (17)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것도 받을 권리가 없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얼마든지 하나님께 받을 특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하는 자가 명예나 주권을 버리고, 예수의 이름으로만 행하는 인격이 될 때에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받게 되므로 예수 이름의 권세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늘 위에나 땅 위의 모든 일에는 예수의 이름이 없이 아무 것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니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는 백전백승의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자를 말한다.

  첫째 : 자기의 의를 세우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만을 자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는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고는 인간의 어떤 도덕적 행위로 인정을 받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의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의 의를 세우는 것은 죄 중에 큰 죄가 될 것이니 그리스도의 의밖에 없다고 자랑하는 자라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이다.

  둘째 : 자기의 어떤 영광을 바라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나타내려고 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이다.

  셋째 : 자기의 일을 생각지 않고, 주님의 일만을 생각하고 나가는 자라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이다. 이러한 자가 될 때에 하나님께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있게 된다.

 

 결 론

  가장 복된 자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하는 자이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사단의 세력이 마음을 주장하고 있는 생활을 한다면 일생 동안 사단의 종이니 이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강이 마음을 주장할 때에 일생 동안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생활이니 얼마나 복된 생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도의 사생활과 하나님의 보응

( 골 3 : 18 - 25 )

 

서 론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염세주의적인 사상을 버려야 할 것이고, 세상의 사생활에서부터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생활에서 행하는 일을 통하여 보응을 나리는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주의 종이 대중 앞에서 신령하게 보이더라도 사생활이 그렇지 못하다면 이것은 자동적인 외식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친히 사생활에서부터 본을 끼치는 길을 걸어가신 것은 성도에게 마땅히 가야 할 길과 생활의 표본이 되는 것이다.  

1. 성도의 부부 생활 (18~19)  

성도의 부부 생활이라는 것은 주안에서 사는 생활이니 주안에서 남편에게 순종하는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으로서 괴롭히지 말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에 부부 생활을 주님과 교회와의 관계와 같은 뜻을 표시한 것이다(엡5:22~25). 하나님께서 일남일녀를 창조하실 때에 남자를 도와주라는 책임을 주기 위해서 여자를 창조했고, 남자는 여자를 통하여 영광을 같이 누리게 함으로 일체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승리하시고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에 교회도 주님께만 순종하면 영광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남자나 여자나 합하여 지므로 서로 더 아름다운 미의 생활의 열매를 이루어 주자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니 부부라는 것은 조금도 가면적인 형식이 따를 수는 도저히 없다.   

2. 부모와 자녀간에 할 일 (20~21)  

자녀는 모든 일을 부모에게 순종하되 주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라야 된다. 아무리 부모에게 순종이라 하여도 주안에서 되어지는 일이 아니라면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해도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를 격노케 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자녀를 기르는 부모는 소망을 끊어주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책망에 있어도 소망을 위하여 자녀를 더 힘이 나도록 하기를 힘써야 될 것이다. 푸른 순같이 자라나는 자녀를 낙심이 가게 만든다면 축복을 빼앗는 일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무리 징계해도 더 열심이 나도록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하는 일이다. 이와 같이 주 안에서 믿음으로 자녀를 기르는 것도 은혜로 되도록 힘써야 될 것이다. 만일 부모가 자식에게 혈기를 내고, 감정을 내서 어린 마음을 낙심하게 하면 사단은 반드시 틈을 탈것이다.  

3. 종과 상전에 대하여 (22~23)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안에서 어떤 형제가 자기 상전인 주인에게 순종하되 눈가림만 하는 일이 된다면 이것은 신앙의 양심이 잘못된 행동이다. 주님을 믿는 신앙이라면 양심적인 생활에서 주를 두려워하여 거짓이 없는 성실로 행해야만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신자가 남의 일을 할 때 그 날 그 날 자기 삯이나 바라는 마음에서 한다는 것보다도 주님이 주시는 상급을 목적하고 마음을 다 하여야 할 것이니 이것이 없다면 주님 앞에 설 때 불의의 보응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이 없다면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는 주님 앞에 서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 론  

성도의 지상 생활에서 되어지는 일은 영원한 천국을 위하여 심는 생활이니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둘 것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여야 큰 일에도 충성이 있다고 주님은 가르친 것이다(눅16:10). 예를 든다면 큰 나무가 유형적인 열매를 이루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포적인 작은 뿌리에서부터 힘을 얻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큰 열매를 나타내려면 은밀한 골방 생활인 사생활에서부터 힘을 얻어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은 천국을 건설하는 인격을 양성시키는 양성소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마6:6).

 

 

기도와 전도의 열매

( 골 4 : 2 - 6 )

 

  기독교의 전도 운동이라는 것은 합심 기도가 없이는 아무런 열매를 거둘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전도라는 것은 마귀와 싸우는 전쟁에서 잃었던 백성을 찾아내는 것이니 아무리 사도 바울이 위대한 역사를 했다 하여도 모든 성도들이 기도하는 봉사가 없었다면 아무런 열매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봉사가 있으므로 큰 열매가 나타난 것을 본문에 가르쳤다. 기도와 전도의 열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기도에 항상 힘쓰므로 (2상반절)

  기도라는 것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믿음에서 항상 힘써야 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 마귀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하여,

  둘째 : 기도의 분량을 채우기 위하여.

  셋째 : 사랑에 불타는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일이다.

  아무리 은혜를 받았다 하여도 이 세 가지를 목적으로 하고, 항상 힘쓰는 것이 없다면 역사가 따르지를 않는다. 기도라는 것은 분량이 많으면 역사가 강하고 분량이 적으면 역사가 적고, 분량이 없으면 역사가 없는 것이다.

 

  2. 기도에 항상 감사하므로 (2하반절)

  기도라는 것은 항상 감사할 조건에서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첫째 :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일이요,

  둘째 : 기도를 하므로 얼마든지 받게 되는 일이요,

  셋째 : 기도를 하므로 왕권을 받게 되는 일이다.

  기도라는 것은 감사의 생활이 있게 되므로만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내는 열매가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마음에 불평이 있다든지 정욕이 있다든지 의심이 있다든지 하면 이 사람의 기도는 상달될 수 없고, 그 마음에 죄가 있으니 이 죄를 회개할 조건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일이 와도 마음에 감사하는 기도를 할 때에는 벌써 마음에 승리가 있는 것이니 그 기도는 남을 구원해 주는 열매가 있게 된다.

 

  3. 사명자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므로 (3)

  기도라는 것은 사명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통하여 사명자에게 역사를 나린다. 왜냐하면 사명이라는 것은 시대를 따라 동일한 사명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직접으로 말씀을 전하지는 못하더라도 참된 종을 위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에 따라서 그 종을 들어 쓰되 기도를 하는 자나 말씀을 전하는 자나 동일하게 인정한다.

  어떤 사람이 사명이 크다 하여도 그 사람 혼자서는 할 수 없겠지만, 여러 사명자가 도와주므로 되는 것이다. 바울은 전도 문이 열리는 것도 입이 열리는 것도 다 신앙 동지의 기도로 되었다고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하시는 것은 왕국 건설의 한 단체를 이루기 위한 방법이다.

 

 결 론

  기도의 열매로 모르는 백성들에게 그 시대의 비밀을 널리 알리게 되는 것이니 항상 은혜 가운데서 큰 변화를 일으키는 역사가 있게 된다. 기도라는 것은 예를 들면 화약과 같고 말씀은 탄알과 같다. 아무리 탄알이 있다 하여도 화약의 분량이 없으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과 같이 말씀의 운동이라는 것은 기도가 분량이 차므로 그 말씀이 능력 있게 나가므로 많은 변화를 일으키는 열매가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역사를 나리는데 있어서는 기도에 따라 나리기 때문이다.

  사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성취시키는 일이니 예수님은 만민의 죄를 대신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이 열매가 되었고, 모든 사도와 성도들도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한 것이 열매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사명을 계대하는 것이니 그들의 기도가 우리에게 열매가 되고 그들의 전한 복음이 열매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