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1.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 (롬2:1~8)
2.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자 (롬7:1~6)
3. 곤고한 사람으로 감사할 일 (롬7:22~8:2)
4.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자 (롬7:6)
5.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 (롬7:15~23, 8:12~17)
6. 참된 해방을 받을 자격 (롬7:22~25, 8:1~7)
7. 결코 정죄함이 없는 역사 (롬8:1~2, 34~35)
8.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신다 (롬8:3~11)
9. 성신의 역사와 인격 문제 (롬8:12~17)
10. 하나님의 예정과 인격 (롬8:28~30)
11. 넉넉히 이기게 하는 사랑 (롬8:31~39)
12.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하는 종이 되자 (롬9:1~3)
13. 사명에 불타는 바울의 심정 (롬9:1~3)
14. 영적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자 (롬12:1-2)
15. 영 적 예 배 (롬12:1-2)
16. 원수를 갚는 주님 앞에 합당한 생활 (롬12:14~21)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
- 롬 2:1~8 -
하나님께서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해서 무조건 판단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요, 용서하는 법을 세우시고 얼마든지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그런데 이러한 법을 세우시고 끝까지 기다리는데도 불구하고 순종치 않을 때에는 의로운 판단을 하나님께서 나리시는 것이다.
1. 하나님의 판단은 진리대로 옴 (1~2)
하나님께서는 남을 판단하는 자를 진리대로 판단하신다. 남을 판단하면서 자기가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적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람의 마음은 악에 속해 있는 마음이다. 악이라는 것은 자기가 옳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하여 남을 판단하는 일이다. 자기 허물은 숨기고 남의 허물을 드러내려는 사람은 그 자체가 형제를 해코자 하는 마음을 가진 것이니 그 마음은 사단에 속한 마음이다.
남을 살려 보려는 마음은 간절한데 실수가 있는 사람은 진리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사상을 보시고 불쌍히 보시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는 회개하지도 않고 남을 공연히 판단하며 정죄하고자 하는 것은 바리새인의 행동이므로 주님께서 바리새인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을 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대적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판단은 진노로 옴 (3~5)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판단을 나리시되 죄를 범하는 그 즉시에 나리시는 것이 아니요, 모든 죄를 합해서 진노의 날에 나리시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 날, 그 시에 판단을 나리신다면 이것은 의로운 판단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무리 부족이 있다 하여도 인자하심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길이 참으심이 풍성하시어 각 사람에게 너그러이 대해 주시는 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련한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너그러이 참으시고 기다리는 데도 불구하고 짐짓 하나님을 만홀히 알고 그 인자하심을 오히려 멸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은 죽었다고 말하며, 하나님은 무능하다고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으로 인도하실 때에 겸손히 순종하여야 하며, 길이 참으실 때에 풍성한 은혜를 받아 진노의 날에 남은 자가 될 인격을 하나님께 받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멸시하는 자는 날마다 진노를 받을 일을 쌓고 있는 생활이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실 때에 같이 참고 나가는 자는 상급을 쌓아
놓는 생활이다.
3. 하나님의 판단은 구하는 대로 옴 (6~8)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자유를 주시고 무엇을 구하든지 구하는대로 주신다. 그러므로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갚으시는 것을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라는 것이다.
인간들에게 절대적인 자유를 주어 구하는 대로 주시되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줄 수 있는 공로를 독생자로 이루어 놓으시고, 아무리 죄가 있다 하더라도 속죄를 구하면 속죄를 주시는 것이요, 사랑으로 역사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진노를 나린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다.
죄 중에 제일 큰 죄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은 죄이다. 하나님께서 큰사랑을 인간들에게 베풀어도 그 사랑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큰 죄로 판단을 나리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믿어야 한다.
첫째 :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신다.
둘째 : 하나님께서는 진리대로 판단하신다.
셋째 : 하나님께서는 행한대로 판단하신다.
오늘날 소위 신자라 하면서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을 무시하고, 공연히 남을 이단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며, 자기 교파를 내세우고자 하며 자기의 권리를 내세우고자 하는 것은 죄 중에 가장 큰 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의 죄가 아니요, 교회 안의 죄이기 때문이다.
결 론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은 거룩한 천국과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없이는 거룩한 나라를 이룰 수가 없으므로 모든 말씀을 세울 때에 인생이 할 수 없는 일을 다 해주신다는 언약을 세우고 그 말씀에 의하여 의로운 판단을 나리시게 된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자
- 롬 7:1~6 -
하나님은 열매를 요구하는 신이시다. 그러므로 인생을 향하여 역사하는 목적은 열매를 맺는 사람이 되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는 동시에 그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또는 영광을 주기도 하신다. 이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되므로 열매를 맺는 자가 될 수 있다.
1. 율법에 대하여 죽는 일이 있으므로 (1~4)
율법이라는 것은 죄를 지으면 용서없이 죽이는 것이 율법이다. 그러므로 죄라는 것은 죽음으로만이 죄의 권세를 벗어날 수가 있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사형 선고를 받은 자라면 반드시 죽기 전에는 그 법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죄 값은 율법대로 용서 없는 사망이다. 그러므로 죽을 자에게 아무런 권리가 없다. 이제 그리스도의 대신 죽은 공로를 믿을 때에 하나님은 믿는 사람이 죽은 것과 같이 인정을 하기 때문에 죽을 사망의 법을 벗어나게 되므로 하나님은 율법적인 방법으로 그 사람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율법의 죄 대가를 완전히 십자가로 청산했고 또는 죽을 사람을 살렸으므로 이제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한 지체로 하나님은
인정하게 된다. 이것이 십자가의 승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피조물된 인간이 범죄한 대가를 조물주가 되는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었다는 그 조건이 얼마든지 피조물된 인간의 죽을 사망을 면하게 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은 열매를 맺으므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고 죄에 대하여는 그 대가를 완전히 십자가에서 청산했으므로 그 죄는 완전히 청산해 진 것이다. 이렇게 되므로 그리스도는 열매를 맺게 할 역사를 그에게 나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의라는 것이다.
아직까지 예수를 믿는다 하여도 마귀의 흑암을 벗어나지 못한 자라면 완전히 죽은 단계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기독교의 신앙의 산 체험은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어지는 체험이 완전한 증거가 되는 일이다. 누구든지 이러한 체험이 없다면 완전히 죽는 자리에 이르기 위하여 십자가를 바라보고 눈물 흘려 간구해야 될 일이다.
금일에 기독교 교인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어지는 체험이 없이 무조건 믿으면 된다고 말하는 것은 합법적인 신앙 노선에 섰다고 볼 수 없다. 이러한 자는 아무런 열매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를 든다면 남편이 있는 여자가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그 남편의 법에 매여 있고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벗어남과 같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야 율법을 벗어 날 수 있다.
신자가 죄질 마음이 생기는데 억지로 율법이 무서워서 떠는 마음으로 있다면 이 사람은 율법 아래 있는 자요, 죄에 대하여 내가 죽고 죄를 미워하고 죄의 사상이 없어지고 정욕이 죽은 자가 되어서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동적으로 의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자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마음에 죄를 지을 때에 죄 아래 있는 자라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자라, 중심으로 죄를 지을 때에 아무리 도덕적인
생활을 한다 해도 하나님은 그것을 선한 열매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2.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생활이다 (5~6)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가 된 자에게 항상 영을 새롭게 해서 새로워지는 심령으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할 때에 그것을 기꺼이 받으시며 그 사람이 일한 대로 친히 갚아 주는 일을 하시므로 하나님이 요구하는 완전한 그리스도왕국을 이루게 된다. 어떤 신자가 그 영이 새로워지지 못하고 피곤해지는 상태에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을 한 증거라고 보게 된다. 영이 새로워지는 일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뜻으로 나리는
역사이다.
율법이라는 것은 영을 새롭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가 어떤 의식이나 도덕이나 수양을 목적하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할 때에는 하나님은 역사하지 않기 때문에 영적 상태가 메말라지는 것이요, 모든 일을 영이 새로워지는 것을 목적하고 이루어지는 일이 될 때에 이 사람은 하나님을 상대해서 교통하는 영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세계가 없다면 자동적으로 외식을 가져오게 된다. 항상 하나님께로 향하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 자나깨나 그 영이 새로워지게 하는 것이니 이것은 겸손한 자에게만이 있는 것이다(사57:15).
3. 담대한 자가 되어야 한다 (요일3:21~22)
기도라는 것은 심령이 새로워진 자로 담대히 원수를 대항하여 싸워 나갈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열매가 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으로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이다(롬8:37).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영이 새로워진다 하여도 자기 사명에 불타는 마음으로 원수를 무서워하지 않고 담대히 나가는 일이 없다면 승리의 열매를 거둘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도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믿고 담대히 고난을 극복하고 나갈 때에 많은 열매를 맺는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 언제나 큰 열매가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은 마귀세력을 들어서 대항을 시켜보는 것이니 담대한 마음으로 싸울 때에 하나님은 승리하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요구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일이 사람을 통하여 있을 때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한한 축복을 주고자 하시는 신이시니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자가 될 때에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기업은 전부 열매 있는 자의 것이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열매가 없어도 상급을 준다는 사랑이 아니요, 열매를 맺도록 역사해 주시는 동시에 그 열매를 따라서
상급을 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곤고한 사람으로 감사할 일
- 롬 7:22~8:2 -
인생에 있어서 곤고한 생활이 있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곤고한 자체는 아주 버림을 당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요, 택함 받은 사람에게도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곤고라는 것은 택한 자에게 없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택한 자가 하나님을 경외해도 완전히 성신으로 이루어지는 인격을 받기까지는 자신 속에 싸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싸움이라는 것은 두 가지 법이 있기 때문이니, 첫째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사람도 있고, 둘째는 그 법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으니 첫째 사람은 양심이라 볼 수 있고, 둘째 사람은 육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택한 자라도 육체의 사람이 양심의 사람을 이기게 되면 죄를 짓고 양심의 사람이 육체의 사람을 이기면 의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곤고한 사람이 감사할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과정 (22~24)
현재 많은 사람이 살고 있지만 감사할 수 있는 과정을 거치는 자는 적다고 본다. 왜냐하면 죄와 싸워 보려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불신 사회는 말할 것도 없지만 교회 안에서도 죄와 싸워 이겨 보려고 곤고를 느끼는 사람이 적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고 죄와 싸우기에 곤고한 사람을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 있다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케 하고자 하는 사랑이 계신 동시에 죄와 싸우기에 곤고한 사람에게 완전이란 것을 주기 위해서 역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와 싸우는 자는 그 영이 하나님 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완전하기 때문에 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요, 완전해 보려고 애쓴다고 곤고한 자이기 때문에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도 요일5:16에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를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범죄자를 위하여 저희에게 생명을 주시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예를 든다면 군대가 적군과 싸우다가 피곤하여 쓰러질 때는 그 사람을 보호할 책임이 군부에 있는 것 같이 이 세상 전쟁에서 죄와 싸우다가 곤고한 자를 하늘 본부에서 그를 버리지 않고 그에게 감사할 수 있는 일이 있도록 역사해 주는 것이다.
2. 예수로 말미암아 감사할 일 (25)
그리스도께서는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것이니 중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사모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믿는 자를 그 마음의 소원대로 이루어 주는 역사를 하는 것을 성신의 역사라는 것이다. 우리가 완전해지므로 성신을 받는 것이 아니고 완전해지고자 하여 죄와 싸우는 마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볼 때 다음과 같이 감사할 일이 있게 된다.
① 결코 정죄함이 없음 (8:1)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누구든지 중심으로 죄를 미워하고 주님을 향하여 나갈 때에 결코 정죄하지 않고 그 사람을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끔 역사하는 것을 십자가의 도의 역사라는 것이다.
② 참된 해방을 줌 (8:2)
이 해방이라는 것은 성신의 법으로 말미암아 주는 해방이니 이것을 십자가의 도의 역사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죄를 없이하는 능력이니 성령으로 와서 역사할 때 십자가의 능력이 믿는 자에게 오므로 죄를 이기는 승리의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일은 전부가 성신의 법으로 되는 것이니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는 생활이다.
하나님은 성신의 법에 의하여 역사하기 때문에 전부가 하나님께 감사할 것 뿐이라는 열매를 성령으로 맺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으로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을 이루어 주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시니 사랑이라는 것은 당신의 아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결 론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은 생명인데, 육체의 생명이 있는 몸에 곤고를 느끼게 되고 영적 생명이 있는 마음에 곤고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와 대립하는 세상에서 육이나 영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것을 받으므로만이 곤고한 몸과 영은 소성을 받게 되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영적 곤고를 느끼는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인하여 감사하게 될 때에 그는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게 되었다(8:18).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자기에게 참된 해방이 온 것을 받는 생활에서 고난을 당한 것은 죄로 말미암아 오는 고난이 아니요, 자기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도 받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 받는 고난을 영광으로 생각한 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는 생활에서 기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바울은 넉넉히 이기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8:37~39).
복음적인 생활이라는 것은 전부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사하는데서 모든 일을 진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은 곤고한 사람을 찾는 사랑이요, 죄를 사하기를 원하는 사랑이요, 해방을 주기를 기뻐하는 사랑이요, 일한 대로 갑절이나 갚아 주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사랑을 받은 자는 억지로 하는 일은 전혀 없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영광으로 아는 생활에서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격
- 롬 8:28~30 -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모든 만물로 사람을 돕게 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한 인격을 이루기까지 돕는 만물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까지도 완전한 인격을 이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롬8:18~20).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이 범죄하므로 전 세계 인류가 그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만물의 형상 앞에 머리를 숙여 절하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예지와 예정 아래서 언약을 세운 하나님의 말씀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그로 하여금 맏아들이 되게 하고 그를 믿는 자녀들은 그의 형상을 본받게 하자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 신자는 모든 생각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이나 전부는 예수 형상을 본받고자 하는 목적 안에서 기도나 전도나 봉사나 모든 일을 행해야만 될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예정 속에서 우리를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한 활동은 다음과 같다.
1. 뜻대로 부르심 (28)
기독교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을 찾는 종교인데 아무 사람이나 찾는 것이 아니고 택한 자를 찾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는 것은 절대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이니 택함을 입은 자는 모르나 택하신 하나님은 모태로부터 미리 아시고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지방적으로 택한 자를 출생하게도 하시고 부르시기도 하는 것이다.
부르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시는데도 아무 때나 부르시는 것이 아니고 정한 때에 부르시는 것이다. 부르시는 하나님은 앞으로 될 일도 예정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하나님이 택한 자를 찾기 위하여 쓰는 한 도구이다(행10:5, 13:48, 18:10). 그러므로 전도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 뿐이요, 조금도 인간의 어떤 방법을 취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주님께서도 세상에 오실 때에 어떤 인간의 방법으로 할 수 없는 낮은 자리와 낮은 인격을 가지고 역사했던 것이다.
2. 본받는 자가 되도록 역사하심 (29~30상반절)
예를 든다면, 포도원 농부가 극상 포도를 심고 극상 포도의 열매를 맺도록 노력하는 거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부르신 자를 그냥 버려 두는 것이 아니고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역사하시되 행위를 보고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하는 동시에 아들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신다(롬8:13~17).
하나님께서 바울을 불러 쓰실 때도 그리스도를 반대하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나가도록 역사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승리하셨으므로 그를 믿는 자는 완전히 승리하도록 성령을 보낼 공로가 있으므로 누구든지 부르심을 받은 자는 성령을 무조건 부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으로 역사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대행자가 되도록 역사할 때에 주님께서 하실 말씀을 그 종이 하고, 주님께서 찾아가서 택한 자를 찾을 일을 종을 통하여 하고, 주님께서 손으로 하실 일을 그 종의 손으로 행하므로 예수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행하는 일을 저도 행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것도 행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 영화롭게 하심 (30하반절)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므로 만왕의 왕이 된 것 같이 택함 받은 사람도 그 왕권 반열에 들어서 세세토록 왕 노릇 하는 영광을 주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다(계22:5). 누구든지 자기 스스로가 왕이 되려고 한다는 것은 오히려 죄가 될 것이로되 하나님께서 왕이 되도록 예정하셨으므로 그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는 동시에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정하신 것은 그 뜻을 인간으로는 폐할 자가 전혀 없는 것이다(롬8:35~38).
결 론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는 것이니 왕국이라는 것은 왕 될 자의 수가 차기까지 하나님은 쉬지 않고 역사하시는 것이다.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하는 종이 되자
- 롬 9:1~3 -
하나님의 종은 양심과 성신의 역사가 함께 하여야 될 것이다. 성신은 언제나 어떤 인격이나 학식이나 재능이나 의식을 따라서 움직이는 신이 아니고 양심을 보고 양심의 활동을 따라서 성령은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하는 생활을 본문에서 배우기로 하자.
1.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참 사랑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도덕도 거짓이 있을 수 있고 의식도 있을 수 있고 인간적인 혈통에도 거짓이 있을 수 있고 문학적인 신사라도 거짓이 있을 수 있고 과학적인 기술자에게도 거짓이 있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은 교파 울타리 안보다도 한 교회 안보다도 정통 교리 체계 안보다도 신학적인 학설의 체계 범위 안보다도 좀더 들어가서 있는 것이 그리스도 안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는 참 사랑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참사랑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것 외에는 있을 곳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살리되 그리스도의 참 사랑만이 참된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니 이 사랑 안에는 형제를 위하여 내가
목숨을 바치고 싸워준다는 것 하나만이 충만해지는 것이다.
어떤 종이 자기의 위신이나 명예나 생활에 타격을 받는다고 하여서 불평을 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활이 될 수가 없다. 그리스도 사랑 안에는 그 사랑을 받았으니 그 사랑 그대로 남에게 준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14만 4천에 드는 종은 거짓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남을 살리기 위하여 그 사람의 비밀을 지켜주는 데서는 아는 것을 모른다 할 수도 있고 보고도 못 보았다 할 수 있고 그 사람의 단점을 알고도 모른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밖의 거짓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2. 형제를 위하여 근심과 고통이 있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2)
만일 하나님의 종이 자기의 어떤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근심과 고통이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형제를 위하여 근심하고 고통 하는 마음으로 부르짖는 기도와 전도는 열매있는 종의 생활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심령 고통을 받은 것은 우리를 위한 고통이요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쉬지 못하고 기도하는 것도 우리를 위한 애달픈 기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목회자가 양떼를 위하여 마음에 근심하고 남의 시련을 나의 시련보다도 더 근심하고 남의 고통을 내가 당하는 고통보다도 더 안타까워하는 것이 있다면 이 종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격동하는 마음이라고 보게 된다. 양떼가 주려도 목이 마르다해도 목자의 마음에 근심이 없다면 그 목자는 삯을 위해서 있는 목자라고 보게 된다.
마음에 하나님의 양떼를 내 몸같이 사랑하는 종은 형제를 위하여 근심과 고통을 하는 종이라고 보게 된다. 자기 몸이 병들 때 근심을 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으며 자기 몸이 괴로울 때 고통 하지 않을 자가 어디 있으리요. 이와 같이 사랑하는 형제들의 딱한 사정을 볼 때에 근심하며 기도하고 가슴을 두드려 가며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이 오는 것이다.
히스기야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옷을 찢고 성전에 올라가 울며 기도할 때 북방 앗수르가 무너졌던 것이다. 금일에 와서 아시아의 넓은 대륙을 공산당이 집어삼키되 교회를 짓밟고 들어와 다 황폐화된 금일에 남한 땅 작은 모퉁이에 있는 종으로서 이 비참한 일을 보고도 기지개 켜며 잠자기를 좋아하며 오락과 연락에 도취가 된 자라면 그 양심은 성령 안에 있는 양심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마음에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근심과 고통이 있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3. 희생적인 소원이 있다 (3)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친히 담당하시면서 인간이 구원받기를 소원한 것과 같이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저주를 받아도 자기 골육과 친척이 구원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참된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은 자기를 위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그리스도 일꾼의 정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참된 사랑이라는 것은 자아를 희생하고 남을 살린다는 마음이 불탈 적에 그리스도의 능력은 십자가를 통하여 그 종에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은 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찾을 것이고 자기 목숨을 찾는 자는 잃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과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과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우리에게 와서 항상 역사하는 성신과 항상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괴로움을 극복하고 나가는 종과 합해지므로 왕국 건설 운동은 필연코 대 승리를 보게되는 것이다.
자기네 유대 교권을 내세우기 위하여 바울을 염병 같은 이단이라고 정죄 하던 바리새교인들은 열매 없는 나무같이 찍힘을 당했고 남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을 두고 복음을 전하던 그 역사는 세계를 정복하는 대 확장을 이루는 동시에 필연코 승리의 왕국을 이루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자아를 위하여 날뛰는 소극적인 사람이 되지 말고 자아를 희생하여 형제를 살린다는 사랑의 용사가 될 적에 진노의 날에 남은 종이 되어 새 시대를 왕권으로 정복하게 될 것이다.
결 론
인생의 가치라는 것은 옳은 일에 증거하는 자가 될 때에 옳은 사람이 되고 불의한 일에 증거하는 사람이 될 때에 불의한 자가 되는 것이다.
금일에 공산당은 허위 선전에 날뛰고 있지만 이것은 아무런 열매 없는 검불이 될 것이요 참된 양심이 그리스도 안에서 증거하는 진리의 사람은 완전히 열매를 맺는 푸른 나무같이 될 것이다.
넉넉히 이기게 하는 사랑
- 롬 8:31~39 -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마귀를 이기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넉넉히 이기도록 해서 이기는 자에게 왕국의 축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다. 만일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이긴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도 없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없는 사람을 넉넉히 이기게 하자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넉넉히 이기게 하는 사랑은 무엇이냐는 것을 성경을 읽어서 알 수 있다.
1.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한 사랑 (31~32)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아끼지 않았다는 사랑이 제일 큰사랑이니 그 사랑 속에서는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모든 것을 줄줄 믿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우리 죄를 위하여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한 하나님께서 벌써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구할 때에 감사한 마음으로 받은 줄 믿고 구하여야 된다(요일5:15).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주신 것을 믿는 것이니 그 밖의 것은 벌써 다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확신해야 된다.
2. 택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사랑 (33)
아무리 죄인이라도 하나님께서 독생자의 의를 믿는 자를 의롭게 인정하시는 것이니 의로운 사람의 모든 권한은 구하는 대로 받고 보호를 받을 주권이 있고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특권을 받은 것이다. 신자가 어떠한 사람의 악평이나 훼방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완전히 의롭다 함을 받은 단계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것보다도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볼 때에 기뻐하지 않을 일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내 원수에게 인정을 받아 보려고 노력한다면 마음에 노할 일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여기는 사랑을 가지고 계시는데 어떤 인간에게 인정을 받아 보려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고 그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진노를 받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사람의 어떤 송사나 훼방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3.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는 사랑 (34)
세상에 제일 큰사랑은 그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사랑이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우리를 위하여 피땀을 흘리기까지 간구하셨고, 십자가상에서도 손과 발에 못 박혀 피를 쏟으시면서도 인간의 죄를 위하여 간구하셨고,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그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 기도대로 이루어 줄 수밖에 없는 완전한 기도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승리라는 것은 간구하는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 무조건 하나님께로 역사가 나리므로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위험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요, 그런 일이 닥쳐오더라도 넉넉히 이기게 해 주시므로 그런 일을 당치 않은 자보다 더 큰 왕권의 상급을 받게 하는 것이 주님의 사랑이시다.
4. 택한 자를 버리지 않는 사랑 (35~39)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를 절대 잃지 않고 버리지도 않는 완전한 사랑을 가지시고 역사하시는 것이니 피조물 된 것이 조물주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는 자를 절대로 해칠 수가 없다. 만일 조물주께서 택한 자를 피조물된 자에게 빼앗긴다면 피조물이 조물주보다 강한 것이니 이러한 일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물주 하나님은 완전한 창조주요, 피조물은 불완전한 것이므로 조물주 하나님의 사랑에서 어떤 피조물이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조물주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우리가 모든 피조물을 이긴다는 것은 넉넉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일이다.
결 론
하나님은 택한 자를 들어 쓰시되 무엇이나 억지로 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소불능의 나래 밑에서 넉넉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는 생활을 하게 하시는 것이 곧 사랑의 원칙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랑 안에서 넉넉히 이기는 승리가 있으므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 세세에 있게 되는 것이다.
육의 사람과 영의 사람
- 롬 7:15~23, 8:12~17 -
인생이라는 것은 모양은 하나이지만 두 가지 사람이 있다. 육의 사람이 있고 영의 사람이 있는 것이다. 신앙 자로서 육에 속한 인격을 가질 때와 영에 속한 인격을 가질 때의 차이점은 사도 바울의 간증적인 글을 보아서 알 수 있다.
1. 육의 사람 (7:15~23)
첫째 : 죄에 끌리는 사람이다 (15~17)
사람이라는 것은 죄에 끌리면 육에 속한 사람이요, 영에 끌리면 영에 속한 사람이다. 아무리 신자라도 중심에는 죄를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만 죄에 끌리면 아직까지 그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죄가 그 몸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몸에 죄의 역사가 있는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육에 끌려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둘째 : 중심에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18~20)
마음에는 원해도 그 원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그 심령이 자라지 못하고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없는 연약한 심령이 된 증거이다. 그 영이 활동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는 육에 있는 죄를 이길 수가 없는 것이 육에 속한 사람이다.
셋째 : 두 가지 법을 섬기게 되는 자이다 (21~23)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도 하고 예배를 드리지만 세상에 나가면 세상에 끌려서 살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가는 일도 있을 때가 있다.
육의 사람이라는 것은 도저히 진리대로 실천할 수가 없는 인격이다(8:7).
2. 영의 사람 (8:12~17)
첫째 : 영으로 육의 행실을 죽인 자이다 (12~13)
신앙 생활은 성신의 역사로 몸의 행실이 죽어지는 일이 있기 전에는 도저히 발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몸에 병이 있는 아이가 그 몸이 자랄 수 없는 것같이 심령에 죄가 남아 있는 자는 그 영이 자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몸의 행실이 다 죽게 될 때에 그 영은 자유롭게 승리의 생활을 하게 되므로 나날이 영적 발전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 영이 그 몸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 성령의 인도가 같이 하는 자이다 (14~15)
성신의 인도라는 것은 육에 속한 사람에게 있을 수 없고 육의 행실이 완전히 죽게 될 때에 성령의 인도 하에서 움직이는 생활을 하게 된다. 성령은 역사할 때에 먼저 그 몸의 마귀세력을 없이 하고자 하는 것이 성신의 원하는 것이니 모든 육체의 행실을 죽이고자 노력할 때에 성신은 강하게 역사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은 마귀와 절대 타협할 수가 없으므로 조금이라도 죄를 용납하고 숨기는 생활을 할 때에는 성신은 그 사람을 인도하고
다스리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신의 인도라는 것은 거룩한 생활로 인도하는 것이다.
셋째 : 그리스도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고 고난을 이기고 나가는 사람이다 (16~17)
육에 속한 사람은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극복할 자격이 없고 영의 사람이 죄악의 세력을 이기고 나가는 것이다. 영에 속한 사람이 될 때에 육의 안락을 요구치 않고 영원한 영광을 목적으로 하고 기뻐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이것은 억지가 아니요,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다.
결 론
첫째아담이 범죄하므로 육에 속한 사람이 되었고 둘째아담 그리스도가 승리하므로 성신의 역사가 타락한 인간에게 은혜로 올 때에 영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따라 움직이는 생활을 말한다. 영에 속한 사람이 되므로 승리의 열매가 있게 되고 승리의 열매가 있으므로 왕권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결코 정죄함이 없는 역사
- 롬 8:1~2, 34~35 -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역사하시는 일은 죄를 없이 하고자 하여 아들을 죽게 하신 것이니 결코 정죄하지를 않고 역사하시므로 당신의 뜻을 완전히 이루시되 다음과 같이 하신다.
1.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는 역사 (1)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를 불러서 그리스도 안에 있도록 역사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택한 자를 친히 찾으시는 역사로,
둘째는 강하게 붙들어서 인도하시는 역사로,
셋째는 완전히 은혜로 다스리는 역사로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신다.
어린이를 사랑하는 어머니는 어려운 일이 올수록 어린이에게 피해가 없도록 하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다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절대로 택한 자를 당신의 품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역사하되 신자의 마음이 조금도 세상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세상의 쓴잔을 주어서 시련을 시키는 일도 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 품안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징계하는 일이 있다(계3:19~20).
주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다. 당신이 친히 십자가에 죽은 피의 공로로 얼마든지 용서하는 법을 세우신 것은 죄를 범해도 품에 안아 준다는 것이 아니고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항상 택한 자를 다스리는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승리가 없다면 죄인을 불러서 자기 안에 둘 수가 없을 것이로되 택한 자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승리하셨으므로 택한 자를 강권으로라도 당신 품안으로 인도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2. 성신의 법으로 행하는 역사 (2)
성신의 법이라는 것은 생명의 활동으로 역사하는 것인데 십자가 해방의 역사이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믿어지도록 하는 것도 성신의 법이요, 죄를 이길 수 있게 역사하는 것도 성신의 법이니, 성신의 법이라는 것은 택한 자에게 무조건 역사하는 법이다.
십자가라는 것은 불택자를 위한 십자가가 아니요, 택자를 위한 십자가이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할 때에 벌써 택한 사람을 구속하는 제사가 완성되었으므로 택한 자를 강권으로 성신이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신을 찾아서 받는 것이 아니요, 성신이 택한 자에게 강하게 역사하기 위하여 다스리시므로 죄를 회개하지 않을 수도 없고 믿지 않을 수도 없고 죄를 고의적으로 짓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의라는 것은 우리가 구할 때에 역사하는 것보다도 구하기 전에 이미 이루어진 십자가이니 택한 자는 십자가의 의가 믿어지면서 회개하게 되는 역사가 심령을 통하여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 사람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고 택한 자에게 성신의 법이 해당되므로 택한 사람은 그 법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인간의 어떤 결심이 아니요, 자기도 모르게 성신에게 이끌려서 믿게 되고 회개하게 되고 의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택한 자가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고 정죄에 이르지 않도록 성신의 법이 그를 다스리는 것이다.
3. 사람이 정죄할 수 없는 역사 (34~35)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정죄하지 않고 성신의 법으로 다스릴 때에 어느 사람이나 그 사람을 다스릴 권리가 없고 그 마음을 지배할 수 없다. 만일 기독교 신자가 어떤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긴다든지 어떤 사람에게 정죄를 받아 은혜가 떨어진다든지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항상 택한 자를 위하여 간구 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간구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첫째는 범죄가 있어도 기도하시고,
둘째는 위험한 일을 당해도 기도하시고,
셋째는 크게 역사할 일을 위해서도 기도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택한 자를 정죄할 수는 없다. 아무리 훼방을 하고 거짓말로 음모를 꾸민다 하여도 결국은 그를 들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
결 론
가장 복된 일은 정죄함을 받지 않는 일이다. 죄가 있어도 책망을 할지언정 절대로 정죄하지 않는 사랑과 죄를 이기도록끔 역사해 주는 사랑과 남을 사랑하도록끔 역사해 주는 사랑과 그리고 남을 가르칠 수 있도록끔 역사해 주는 그 사랑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고 택한 자에게만 오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결코 정죄함이 없는 역사는 불택자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선택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어떤 자가 죄를 짓는 것도 하나님의 예정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택한 자를 죄를 짓지 않도록 해서 거룩한 자녀를 삼으며 거룩한 종을 삼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정죄하지 않는 역사라는 것이다.
할 수 없는 그 것을 하나님은 하신다
- 롬 8:3~11 -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은 인간으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고자 하는 예정 속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섭리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할 수 있게 지은 것보다도 사람으로는 할 수 없고 당신이 역사해 주므로 만 할 수 있게 하여 당신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로 영광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는 동시에 영광스러운 나라를 그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지만 지킬 수 없는 사람을 지킬 수 있도록 역사해 주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사람으로서 다 하나가 되게 하는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낼 때에 각자 스스로가 할 수 있게 내었다는 것으로 통일을 가져올 수 없고 할 수 없는 인간으로 하나님께서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은혜로만 하나가 되는 거룩한 나라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제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아들의 몸에 죄를 정하심 (3)
인간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법을 행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법을 숨김없이 인간에게 알도록 발표한 것이 율법과 계명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죄가 무엇이라고 알려준 것은 인간이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뜻한 것이 아니고, 죄가 이렇게 많다는 것을 알려준 것뿐이다. 예를 든다면 의사가 병자 자신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조건으로 병의 내막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병이 있는데 이러한 방법을 쓰면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율법과 계명을 가르친 것은 죄가 무엇인지 알려 주고 그 죄를 없이하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방법은 오직 독생자의 몸에 죄를 정해서 대신 죽는다는 법밖에 없다는 것을 선지서에 가르쳤으며, 그 법대로 실천한 것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죽음이란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죄도 알리지를 않으시고 어떠한 방법으로 죄를 사해 주신다는 것도 알리지 않으시고 무조건 역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병세를 알려주는 것도 고쳐 주는 것도 의사가 하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알려주는 동시에 어떠한 방법으로 그 죄를 없이해 준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하여 이 날까지 많은 종들을 희생시키면서 인간의 죄를 걸머진 독생자의 십자가를 증거하게 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도덕에 불과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죄를 아들의 몸에 걸머지게 하는데서부터가 인간에게 나타낼 사랑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의인 동시에 독생자의 의며 독생자의 의인 동시에 믿는 자의 의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역사에 끌려가는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아들의 몸에 걸머지운 것은 인간에게 주고 싶은 그 마음을 발표하는 행동 개시의 역사이다.
2. 성령을 좇아 행하게 하심 (4~5)
인간은 성령을 좇을 수 없는 타락한 인간이지만 누구든지 독생자의 거룩한 보혈을 믿으면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므로 믿게 된다. 죄인들이 성령을 좇아 행하게 된다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거기에 결부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찾으시는 방법의 하나이다. 십자가의 의는 택함 받은 자를 위한 의이니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가 범죄에 있다 하여도 성신으로 역사해서 책망을 하게도 하시고 징계도 하게 하시어 떨리는 마음으로 순종하고 따라오게
하시는 것이다.
오순절 성신이 임하실 적에 성신의 책망이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나타날 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욕하고 때리던 무리들이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 하고 떠는 마음으로 베드로 앞에 울면서 모여든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역사가 무엇인 것을 모든 인간들은 알게 되었다. 성신의 역사가 인간들이 반대하여도 택한 자에게 임하는 것은 택한 자를 위하여 죽으신 십자가의 의로 말미암아 성신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신님께 순종하는
것이 의무요, 그 밖의 것은 하나님께서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는 역사뿐이다.
3. 성령이 거하게 하심 (6~9)
성령은 거룩한 신이시지만 독생자의 의로 택한 자에게 보냄을 받을 적에 택한 자 안에 거하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요, 성령이 우리에게 와서 죄를 깨닫도록 책망하고 믿어지도록 감화를 주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를 따라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의 의로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신이 거하는 사람을 그리스도 사람이라는 것이다.
결 론
가장 기쁘고 즐거운 일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사람이 죄에서 해방을 받은 것도 기쁜 일이요, 마귀의 인도를 따르던 사람이 성신의 인도를 따르는 것도 기쁜 일이요, 마귀가 마음에 거하던 지옥 생활에서 성령이 마음에 거하는 천국 생활도 기쁜 일이기 때문이다.
성신의 역사와 인격 문제
- 롬 8:12~17 -
인생이라는 것은 자체에 완전성이 있는 것이 아니요, 완전성이 있는 신의 역사로 그 인격이 완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 신앙의 인격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낼 때에 완전하게 하신 것이 아니고 성신의 역사를 통하여 완전하게 하시는 것이 당신의 뜻인 동시에 영광이 된다. 그러나 인간 자체에는 성신을 받을 자격이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로 인하여 성신을 줄 수도 있고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롬8:2~4).
그러면 성신의 역사와 인격 문제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증거한다.
1. 성신의 역사와 육신 문제 (12~13)
성신의 역사라는 것은 사람의 몸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몸은 성신의 전이기 때문이다. 신의 역사라는 것은 사람의 몸을 통하여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도 사람의 몸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이요, 성신도 사람의 몸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마귀는 사람의 몸에 정욕이 발생케 만들어서 자기의 도구로 쓰는 것이요, 성신은 몸에 죄된 행실을 죽여서 없이하고 난 뒤에 그 몸을 도구로 써서 의의 병기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롬6:12~14).
성신은 십자가의 승리로 인하여 우리 몸에 역사하시는 신이시니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하는 자에게는 역사하셔서 몸에 있는 죄의 근성인 정욕을 죽이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것은 성신이 몸의 정욕을 죽여주므로 거룩한 인격을 이룰 수 있다.
오늘날 신자들이 성신의 역사로 몸의 정욕이 죽는다는 것을 체험치 못하고 성결을 부인한다는 것은 큰 과오가 되는 일이라고 본다. 성신은 믿음이 있는 자에게 역사하시는 신이시니 육체의 정욕이 성신의 역사로 죽을 것을 믿고 구하는 자에게 역사하셔서 그 몸의 정욕이 죽게 하므로 능히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는 인격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
2. 성신의 역사와 영의 문제 (14~16)
성신이 우리에게 오셔서 역사하실 때에 우리 영과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우리 영이 성신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고 성신이 우리 영을 주관하시는 것이다. 첫째는 인도하시며(14), 둘째는 부르짖게 하시며(15), 셋째는 증거하게 하신다(16). 이렇게 되므로 영은 자유롭게 활동하는 영이 된다. 우리의 영은 성신의 인도가 없이는 바른 길을 찾아 나갈 수 없으며 성신의 역사가 없이는 강하게 부르짖는 힘을 얻을 수 없으며 성신의 역사가 없이는 증거하는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영을 지배하는데 있어서는 성신을 통해서 지배하여 우리 영을 발전시키므로 영적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성신의 역사를 받지 못하고는 영적 활동을 하는 영의 사람이 될 수 없다. 현 사회의 사람들은 육으로 사는 생활, 정신 작용으로 사는 생활, 영으로 사는 생활로 나뉘어져 생활하고 있다. 육으로만 사는 자는 정신 작용으로 사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요, 정신 작용으로 사는 사람은 영으로 사는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신이 함께 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영적 활동이 있게 된다.
3. 성신의 역사와 생활 문제 (17)
성신의 역사로 사는 생활은 그리스도와 같이 항상 싸우는 생활이 있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남을 살리기 위하여 싸워 주듯이 성신을 받은 사람도 남을 살리기 위하여 싸우는 생활이 있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만민을 살리기 위하여 싸우는 그 전쟁에 한 정병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종들에게 성신을 부어 주신 목적은 그 한 사람을 위하여 주신 것이 아니요, 많은 사람을 살려 주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성신을 받은 자는 자동적으로 싸우는 생활이 있게 된다. 이것은 성신의 역사가 많은 사람을 구원해 주는 것을 목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신을 받은 자는 남을 살려 주기 위하여 순교하기까지 싸우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남을 살려 주기 위하여 고난을 달게 받고 나가는 것이 없다면 이 사람은 성신의 역사가 떠나간 종이라고 볼 수 있다. 성신의 역사라는 것은 남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영광으로 아는 것이다. 이것은 억지로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지와 사도와 성도들은 고난을 받을 때에 거기서 더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동시에 인정을 받은 종으로서 묵시를 받아 성경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그들이 받은 묵시의 글을 바로 전하려면 고난받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만 될 것이다.
결 론
가장 귀하고 큰 일은 성신의 역사로 인격이 완성되는 일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 역사로 완전한 왕국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신의 역사와 인격 문제를 바로 알고 나가야만 열매 있는 생활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말씀의 칼)
참된 해방을 받을 자격
- 롬 7:22~25, 8:1~7 -
서 론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은총을 받는 것도 그것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은혜도 법을 따르기 때문이다. 용서도 법을 따라 있고, 성신의 역사도 법을 따라 있기 때문이다.
1. 중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자 (7:22~23)
하나님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는 것이다. 사람 앞에 실천은 못하나 중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참된 해방인 성신의 역사를 받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2. 죄악의 고통을 느끼는 자 (7:24)
죄를 가슴 아프게 알고 괴로워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그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 의무를 가지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병든 사람에게 라야 의원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당신께서 죄악의 고통을 당하는 자를 고치러 오셨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3. 그리스도 예수 안으로 들어오는 자 (8:1)
누구든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품안을 찾아만 온다면 그리스도는 결단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탕자가 아무리 실패를 했지만 아버지 품안으로 돌아올 때 즐거운 잔치를 하며 환영한 사랑 같은 것이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이다.
4.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 (8:4)
누구든지 성신의 인도를 받아 보려고 하는 자라면 성령은 책임지고 인도하고 다스리되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도록 역사해 주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은 피조물된 인간들이 마귀의 권세 아래서 포로된 것을 보시고 그저 있을 수 없는 뜨거운 열심을 가진 신이시니 누구든지 위의 네 가지와 같이 행하려는 자를 절대로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자
- 롬 7:6 -
서 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유형적인 제물이나 의식적인 규례나 율법적인 교훈으로써가 아니요, 오직 영의 새로운 것으로써 섬기는 것을 완전한 그리스도의 참된 신앙이라 하는 것이다.
이제 영의 새로운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경을 통하여 말한다.
1. 죽을 것이 죽어야 될 것이다 (롬7:6)
여기에서 죽는다는 것은 육체의 정욕이니 영적 생명은 아니다. 인간 자체의 죄악의 본질인 그 정욕이 죽은 것을 가르친 것이니 이것이 육체 속에서 역사함으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영의 새로운 것이란 것은 율법적인 신앙으로가 아니고 순수한 복음적인 그리스도의 생명으로써만 영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2. 진리의 젖을 사모하는데서 새로워지는 것이다 (벧전2:2)
영의 새로워지는 것은 신령한 젖을 사모함으로써만이 새로워져 자라는 것이다. 만일 어떤 신자가 사모하는 마음이 없이 되어 있다면 이것은 원체로 오는 진액을 받지 못한 나뭇가지와 일반일 것이다. 나뭇가지가 진액을 받게 됨으로 더 무성할 수 있는 진액을 흡수함과 같이 항상 중심에 사모하는 것이 있다면 영의 새로운 것이 날마다 풍성하여질 것이다.
3. 지식이 새로워지는 일 (골3:10)
우리의 영이라는 것은 지식을 따라 새로워지나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랄 때 영은 새로워지느니라(참고, 골1:10). 사람의 키가 자람에 따라 육적 지식이 새로워짐 같이 영이 자라는 동시에 영적 지식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4. 원망과 시비가 없이해야 할 것이다 (빌2:14~15)
아무리 은혜를 받고도 남을 원망하고 시비하는 자가 된다면 그 영은 새로워지는 빛을 나타낼 수가 없는 것이다. 영이라는 것은 원망이란 것이 있을 때 스스로 죽고 마는 것이다.
5. 상 주심을 믿고 일하는 것이다 (히11:26)
영이란 것은 아무 활동이 없으므로 둔해지고 활동이 있으므로 새로워지는 것이니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은 상 주심을 믿고 싸우는 생활이라야 할 것이다(빌3:14~15).
결 론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사는 생활을 떠나서 영의 새로움으로써 섬기는 생활이 산 생활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육으로 떨어지면 동물에 지나지 않는 타락이 있을 것이요, 영이 새롭게 됨으로 섬기는 생활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이룸으로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을 볼 것이다(엡4:13). 이제 영이 새로워지는 일이 있음으로 그 인격은 장부와 같이 승리를 이룰 수 있는 열매를 갖게 될 것이다.
사명에 불타는 바울의 심정
- 롬 9:1~3 -
서 론
하나님은 기독교를 박해하던 바울을 완전히 중생 시켜 어느 사도보다도 더 불타는 심정을 주어서 맹렬히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하던 것은 기독교 신앙의 표본으로써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기독교의 원수라도 하나님은 용서하여 쓰신다는 증거로 보여 주신 동시에 그를 높이 들어 썼던 것이다.
1. 조금도 거짓이 없는 심정 (1~2)
이는 극도로 강한 의사를 가졌기 때문에 특히 타인보다도 기독교를 더 박해한 것은 거짓이 없는 양심가인 동시에 유대 교회 최고의 열성가였다(딤전1:13).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는 것은 거짓이 없는 양심에서 움직이는 사람을 기뻐하신다. 아무리 훼방, 핍박, 폭행을 행한 바울이지만 그 중심을 보시고 주님은 나타나 부르셨던 것이다.
2. 애족심이 강하다 (3)
바울은 이방의 사도인데 특히 타인보다도 동족의 박해를 더 많이 받은 사도이다(고후11:24~25). 그러나 동족에 대한 애족심은 누구보다도 더 강하게 일어났다. 왜냐 할 때에 이 복음을 반대하므로 자기 동족이 망할 때에 불타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는 환영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는 것은 바울의 정신은 아닐 것이다.
3. 희생적인 봉사심이 강하였던 것이다 (고전4:11, 행18:1~4)
바울은 친히 희생을 하는 동시에 친히 일하면서 복음 전하기를 목적으로 했던 것이다. 그는 조금도 타인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는 정신이 강하였던 것이다(고전9:11~15).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그에게 특성을 주신 것은 복음을 모르는 이방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쓰기 때문에 이러한 심정을 불타게 가지도록 역사했던 것이다.
4. 그는 동정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고전9:21~23)
이것은 외식이 아니요,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심장이 뛰는데서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받는 고통을 볼 때 눈물을 흘리는 심정에서 그를 대해 주는 심정이었던 것이다(빌1:8). 우리는 남의 형편을 볼 때 동정하는 마음이 불타는 것이 없이는 복음을 전할 마음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방의 불쌍한 민족을 위하여 조금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안타까운 심정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5. 세상 영광을 분토같이 보는 것이었다 (빌3:5~8)
바울은 자신이 귀족인 동시에 학문이 높고, 로마의 시민권이 있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고, 정통적으로는 바리새교인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란 분을 위하여 다 버리고 오직 복음 하나만을 불쌍한 이방 민족에게 전한다는 마음 하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결 론
우리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 신앙한다면 복음을 전한 자의 심정을 우리도 모범 한다는 것이 합당한 일이라고 본다. 종말에 와서 예언하는 증인으로서 이와 같은 심정이 없다면 순교자의 반열인 그 수에 들 수 없을 것이다. 주의 종은 하나님을 중심하는 종인 동시에 택한 백성을 위하여 우리는 주의 일꾼이니, 바울과 같은 심정이 없다면 종말적인 권세 역사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러한 심정을 가지고 순교를 함으로 끝을 마쳤고, 우리는 그들의 억울한 피값을 갚는 자가 되려면 권세의 역사를 받아야만 할 것이다. 이 권세의 역사는 선지자와 성도의 원한을 풀어 주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영적 예배를 드리는 자가 되자
- 롬 12:1~2 -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할 때에 생령이 되게 한 것은 생령 된 사람에게 예배를
받고 예배에 따라 당신에게 있는 것을 풍성히 내려 하나님과 동거할 수 있는 인격에 들어가도록 하시며 예배를 통하여 완전한 인격을 이루게도 하시고
완전한 단체를 이루게도 하시고 완전한 나라를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 목적이다.
성부, 성자, 성신이 홀로 있다는 것은 영광이 될 수 없으므로 생령된 사람을
통하여 예배를 받기도 하시고 생령된 사람에게 당신의 것을 주기도 하시는 것을 영광으로 삼으신다. 그러한 영적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되려면 어떠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하기로 한다.
1. 몸을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 (1)
사람이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 드릴 적에 육의 사람이 아니요 영의 사람이
된다. 사람이라는 것은 그 몸을 하나님이 주관하면 영의 사람이 되고 마귀가 주관하면 육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내실 때에
당신의 하실 일을 할 수 있는 도구로 쓰기 위한 질그릇으로 내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신은 몸이 없지만 사람에게 몸을 준 것은 영의 하나님이
그 몸을 통하여 당신의 원하는 뜻을 이루어 영광을 받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을 바친 자에게만 하나님께 있는 감춘 보화를 간직할 수 있는
그릇이 된다. 예를 든다면 바람이 아무리 강하다 하여도 물체가 있으므로 그 강한 바람은 힘을 나타내게 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물과
불이 합해서 강한 바람을 발휘한다 하여도 물체의 비행기나 자동차가 없다면 효과를 조금도 나타낼 수 없음같이 하나님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하여도
사람의 몸이 없다면 그 강한 힘은 큰 능력의 역사를 나타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몸을 무소불능의 하나님께 바칠 적에 하나님의 역사가
같이하므로 자동적으로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통이 있게 되는 예배를 가지게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예배를 드리고 있어도 그 몸이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 없다면 영적 예배가 될 수 없고 한 우상적인 예배의 의식이 되고 말 것이다.
2. 마음이 새로워져야 한다
(2상반절)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세상으로 치우치게 되면 더러워지고 어두워지고
강퍅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이다(요일5:19). 아무리 예배를 드린다 하여도 그 마음이 세상에 기울어진 사람은
마음이 새로워지는 체험을 받지 못한다. 누구든지 날마다 마음이 새로워지는 사람이 되면 조금도 외식이 있을 수 없고 어디를 가나 영적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생활에서 영적 예배를 날마다 갖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영적 예배의 종교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교회가 찬양대 음악을
맞추어 개회를 하고 폐회를 한다하여도 그 찬양대가 성령으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면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이 될 수 없고 아무리 설교자가 웅변,
학적, 변론, 역사적인 예화를 든다하여도 그 종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나오는 설교가 아니라면 그 설교는 영적 예배를 가져올 수 없다.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양식을 나눠주는 설교가 될 때에 마음을 새롭게하는 역사가 되므로 영적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3.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2하반절)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모든 사람이 연합될 때에 영적 예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뜻을 따라오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 따라가는 것이 신령한 예배가 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줄 분별하게 되는 영계로 들어갈 때에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행하실 일을 하게 되므로
열매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언제나 영적 예배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치 못하는 사람들이 교권을 쥐고 교회를
움직일 때에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시므로 마귀에게 드리는 우상과 같은 교회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예배를 드리는 자들에게 임한 것과 같이
인간 종말에도 그와 같이 될 것이다.
결 론
사람이라는 것은 영적 예배가 있으므로 초인간적인 세계를 알게되고 교통하게
되고 그 세계로 들어가서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은 영적 예배를 통하여 완전한 인격이 이루어지게 되며 사람의 생활도 영적
예배를 통하여 열매있는 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영 적 예 배
- 롬 12:1~2 -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은 영적 예배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이다. 과거 육적
이스라엘 백성이 유형적인 제사를 드릴 때는 새로운 성신의 역사를 나리는 일이 없지만, 주님께서 세상에 오시어 십자가상에서 유형적인 제사는 완전히
끝을 맺었고,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부터는 유형적인 제사는 필요 없고, 영적 예배로만 하나님의 역사는 완전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오늘에 예배를 드리는 자가 많이 있지만 영적 예배가 되는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역사를 받게 되고 영적 예배를 드리는 일을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역사를 받지 못하므로써 아무런 열매도 없는 마른나무와 같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예배는 어떻게 하는 자라야 드릴 수 있다는 것을 본문으로 증거한다.
1. 몸을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
(1)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릴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몸을 화목 제물로
영원한 제사로 드렸기 때문이다. 우리 몸을 산 제사로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께서 그 몸을 다스리게 되는 것은 주님의 희생적인 피의 제사가 우리를
깨끗케 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몸에 오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배를 드린다 하여도 몸을 하나님께 바쳐 하나님이 다스리는 몸이 되기 전에는 영적
예배가 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예배를 드릴 때에 육적 생각에 머물러 있다면 이 사람은 육적의
사람이요, 영의 사람이 아닌 고로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다스릴 때는 우리가 육적에 있지 않고 영에 있게
된다(롬8:8~9). 영적 예배라는 것은 우리 몸은 성령이 다스릴 때에 영적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몸을 성령이 다스리게 되는 원인은
주님께서 의로운 제사를 드렸으므로 우리가 주를 믿고 하나님께 드릴 때에 하나님의 신은 예수의 의를 믿는 의를 통하여 우리를 다스리게
된다.
2. 마음이 새로워지므로
(2상반)
영적 예배라는 것은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생활에서 영적 사람이 될 때에 항상 세상을 이기는 생활이 있게 되므로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 있으므로 영적 생활에 향상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마음이 새로워지는 생활을 못한다면 이 사람은 육에 있는 사람이요, 영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육의 생각이 영을 지배하게 된다면 타락하는 것이요,
영이 육의 생각을 지배하게 되면 향상하게 될 것이다. 우리 몸이라는 것은 거룩한 영이 내주 하여 있는 성전이 되므로만 항상 마음이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 예수의 십자가는 육체의 정욕을 온전히 죽이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여 예수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는 열매가 있게
된다.
3.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
(2하반절)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자가 되려면 영적 예배를 드리므로
마음이 새로워지는 사람이 될 때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게 되므로 생활의 열매를 맺게 된다. 오늘에 교회가
혼란에 빠진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하고 사람의 생각을 따라서 모든 일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하고
공연히 남을 판단한다든지 필요 없는 일에 참여하여 교회 일을 움직인다면 그 교회는 벌써 흑암의 세력에게 먹힘을 당했다고 본다.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일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 예수의 완전한 의로만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요,
둘째 : 예수의 대언 기도로만 응답이 나린다는 것이요,
셋째 : 예수의 권세로만 마귀를 이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생활이라는 것은 예수의 의로만 우리의 죽은 영이 중생을
받게 되는 동시에 주님의 대언 기도로 영적 발전을 보게 되었고, 예수의 권세 아래서만 승리의 왕국이 이루어진다. 온전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요, 온전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은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는 영적 예배를 받기를 기뻐하시고 그 예배를 통하여 당신의 역사를
나리시기를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적 예배를 통하여 사람과의 교통할 수가 있고 사람과의 교통이 있으므로만 하나님의 섭리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원수를 갚는 주님 앞에 합당한 생활
- 롬 12:14~21 -
주님께서는 용서할 수 있는 공로도 있고,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권세도 있다. 그러므로 용서하기 위해서 참는 기간도 있고, 원수를 갚기 위해서 진노하는 기간도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한 사람을 위하여 용서하고, 한 사람을 위하여 원수 갚는 것이 아니다. 용서를 하되 모든 나라 사람을 용서하고, 원수를 갚되 모든 나라 사람을 원수 갚는 것이다.
우리가 원수를 갚는 날에 주 앞에 서려면 용서하는 주님의 뜻을 순종해야 된다고 본다. 그러므로 용서하는 기간에 우리는 합당한 생활을 해야 될 것이다.
1. 축복을 비는 기도 생활 (14)
기도라는 것은 원수를 갚는 날에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요, 용서하는 날에 기쁘시게 받으시는 것이다. 기도한다는 사람이 항상 축복을 비는 마음이 없다면 용서하시는 주님 앞에 합당한 자라고 볼 수 없으며, 합당한 기도라고 볼 수 없다. 주님께서 용서하시고 복을 주기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했다면, 우리도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정신이 있어야만 원수를 갚으시는 주님 앞에 받을 것이 있는 종이 될 것이다. 왜냐 하면 남이 축복 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주님의 마음과 합치가 된 것이니, 주님과 합치가 된 자라야 주님께서 갚아 줄 수 있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종이 자기의 마음에 합당치 않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을 저주하는 기도를 한다면, 주님 대신에 자기가 심판 주가 되므로 실지는 주의 대적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하실 일을 자기가 했기 때문이다. 오직 원수를 갚아 줄 책임은 주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도 과거에는 주님과 원수가 되었던 사람들인데 십자가의 공로로 용서를 받았으니 지금 사는 생활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의 것으로써 사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에 합당치 않다고 해서 남을 저주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심판권을 침범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원수를 갚는 심판권은 주님께만 있으니, 우리는 형제가 나를 괴롭혀도 ‘축복을 주시옵소서’ 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주님의 지체가 된 생활이라고 본다.
2. 참된 교제의 생활 (15~16)
우리는 형제에게 행한 일을 상급이 되도록 갚아 주시는 주님 앞에서 합당한 교제의 생활이 있어야 한다. 무엇을 얻어 보려고 형제를 사귀는 사람이라면 원수를 갚는 주님 앞에 설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형제를 돕는 생활을 하지 않았으므로, 주님께서 그 사람의 하는 일을 오히려 적대시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을 바라보는 것보다 형제에게 갚음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주님보다도 형제를 더 의지하는 생활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위하여 사는 생활보다도 형제를 위하여 사는 생활을 해야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형제를 돕기 위해서 사는 생활에는 항상 동정하는 마음이 불타야 된다. 형제가 슬퍼하는데 슬프지 않고, 형제가 즐거워하는데 즐겁지 않고, 형제를 높이는 것보다도 자기를 더 높인다면 주님 중심에서 형제를 교제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자기 중심에서 교제하는 사람이므로 자동적으로 위선자가 될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형제에게
행하는 일을 주님께 하는 일과 같이 생각하는 자라야 진노의 날에 남은 자가 될 수 있다(마25:40).
3. 선한 일을 도모하는 생활 (17)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원수를 갚는 것이 아니요, 선한 일을 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선한 일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일인데, 우리는 그 일을 위하여 쓰여지는 종이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 선한 일을 할 자는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선이라는 것은 죽을 사람을 살려주고, 망할 사람을 흥하게 하고, 화 받을 사람을 복 받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주님밖에는 행할 자가 없는 것이다.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우리는 순종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할 것뿐이다.
4. 평화를 위한 생활 (18~21)
평화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서 다르다. 은혜시대에는 아무리 형제가 부족이 있다 하여도 용서를 하면서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화목 제물이 되어 지금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죄인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역사하신 일이 없었다면 세계 평화의 왕국은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은혜시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아들을 보내서 대신 죽게 하시고, 누구든지 그 아들만 믿고 회개하면 하나님을 대적했던 자라도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평화를 이루는 역사이다. 그리고 진노의 날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평화를 이루기 위하여 아무리 회개를 기다려도, 짐짓 당신의 사랑을 대적하는 무리들을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위한 사람들만 남은 자가 되게 하여 평화 왕국을 이루는 것이 진노의 심판과
새 시대이다.
우리 사명자라는 것은 진노의 날이 오기까지는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악에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악에 진다는 것은 악을 악으로 대하는 일이요,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은 아무리 악해도 선으로 대하는 일이다. 그러나 악의 사상을 용납한다면 그 시간부터 악에게 지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악의 사상을 용납치 말고, 악의 세력이 물러가고 의의 세력이 승리하도록 하는 것을 원수를
갚는 주님 앞에 합당한 생활이라고 본다.
결 론
원수를 갚는 것은 참된 사랑의 열매이다. 원수를 용납한다고 해도 참된 사랑이 아니요, 지금 원수를 갚는다고 해도 참된 사랑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원수를 갚아 줄 때까지 주님과 같이 참고, 주님과 같이 사랑해야 될 것이다.